남주 누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말했다.“이혼하자면 맨몸으로 나갈게. 양육권도 당신이 가져. 당신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들도 당신과 함께 지내면 좋은 교육 받을 거야.”“나는 좋은 엄마 아니야. 좋은 아내도 아니고. 내가 아들 망치게 하지 마.”고정훈은 끝내 눈시울이 붉어졌다.“딴 놈의 유혹을 그렇게 못 뿌리치겠어? 나 하나로는 만족 못 하겠어?”“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고 젠틀해. 속궁합도 잘 맞고, 나와 내 친정에도 잘해줘.”“그런데 왜 그랬어?”고정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남주 누나는 또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켰다.“내가 나쁜 여자라 그래. 천성이 노는 걸 좋아해서 사실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고정훈은 마음이 아팠다. 아내는 그가 너무 정직하다고 재미없다고 탓하지 않고 모든 잘못을 자기한테로 돌렸다. 그 때문에 순간 해야 할 말을 잃었다.“난 이혼하기 싫어. 이혼은 생각도 안 해 봤어.”고정훈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하지만 남주 누나는 이혼을 고집했다.“나 안 변해. 모든 걸 알고도 나랑 예전처럼 지낼 수 있어? 우리는 점점 간극이 생길 거고, 자주 싸울 거고 모순은 날로 커져만 갈 거야. 난 그런 날이 오는 게 싫어. 아름다울 때 끝내는 게 좋잖아?”고정훈의 눈시울은 붉었다.“그런데 난 당신 사랑해. 헤어지기 싫어.”남주 누나는 고개를 돌린 채 상대의 눈을 피했다.그동안 부부로 지냈는데, 아무 감정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남주 누나도 사실 고정훈과 헤어지기 아쉬웠다. 하지만 본인이 앞으로 얌전히 지낼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누나는 본인한테 자신이 없었다.고정훈은 남주 누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우리 다시 시작하자. 당신도 노력하고, 나도 노력하면 돼. 행복한 가정 유지하는 거 어렵잖아. 이대로 무너지는 거 싫어.”“그런데 내가 한 일 정말 신경 안 쓸 수 있어?”고정훈은 도리질했다.“난 알아. 당신은 그저 놀기 좋아하는 거지, 그 남자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재미 좀 본 거라고 생각하고
“수호 씨, 정말 뛰어갈 거예요? 몸도 아직...”애교 누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누나, 저 결심했어요. 이제부터 바뀔 거예요.”“그럼 나도 같이 뛰어요. 수호 씨 혼자 두고 가는 건 마음 놓이지 않아요.”“아니에요. 운전해서 돌아가요. 전 혼자서도 괜찮아요.”애교 누나는 내 고집을 꺽지 못해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그 길로 뛰기 시작했다.사실 뛴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조깅에 지나지 않았으니까.몸이 아직 낫지 않아 도저히 달릴 수가 없었다.나는 밤거리를 걸으며 바람을 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이네.’임천호는 절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고, 정태곤도 또 나타날 건데.그렇다고 양동준 형님더러 계속 지켜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나는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하지만 강해지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얼음이 삼척 깊이까지 얼려면 하루 이틀 춥다고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양동준 형님처럼 강해지는 건 절대 며칠 만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마사지숍으로 출근하는 것 외에 매일 시간 내서 운동해야겠네.’우선 체력부터 끌어올려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그리고 나는 싸우는 기술도 배우고 싶었다.설령 상대를 이기지 못하더라도 도망칠 기회를 만들 정도는 되고 싶었다. 아니면 또 용천 호텔에서처럼 상대한테 꼼짝도 못 할 테니까.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취객 여러 명이 싸우고 있었다.4명이서 한 사람을 때리고 있었는데, 그걸 본 순간 가운데서 맞고 있는 사람이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맞고 있는 사람이 반항하는 건 의외였다.그리고 비법을 하나 발견했는데, 상대의 사타구니를 발로 차는 거였다.그 방법은 백발백중이었다.사타구니를 걷어차인 사람은 순간 전투력을 잃게 된다.나는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 기술을 기억했다. 나한테는 그게 참 유용한 기술 같았으니까.특히 여러 명한테 맞고 있거나 상대가 나보다 강할 때, 위기에서 빨리 벗어날 수
민우도 거친 숨을 몰아쉬었지만 이를 악물고 말했다.“4명이 나 한 명 때리는 건 매너 있고?”“그러게 누가 우리 흥을 깨?”민우는 손을 휘휘 저으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헛소리 그만해. 여기가 너네 구역도 아니고, 나도 엄연히 돈 내고 소비한 건데 안 될 거 뭐 있어?”여기서 잠깐 설명하자면 이 다섯 명이 싸운 곳은 바비큐 가게다.아마도 식사를 하다가 모순이 생긴 모양이었다.4명 중에 꽃부리 셔츠를 입은 놈이 가장 험악하게 생겼는데, 동시에 민우한테 가장 처참하게 맞은 놈이기도 했다.놈들은 모두 가랑이를 맞아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그 꽃부리 셔츠의 표정이 가장 괴로워 보였다.“젠장, 4명이 너 하나 못 이기면 앞으로 얼굴 들고 못 다니지. 이렇게 하자, 우라도 한 명씩 네 가랑이 차게 해주면 오늘 일은 그냥 넘어갈게.”민우는 음산한 표정을 지었다.“누굴 바보로 아나? 한 사람이 한 번씩 차면 앞으로 남자구실을 어떻게 해? 먼저 시비 건 사람은 네놈들이잖아. 맞아도 싸지. 졌으면 나보다 실력 부족한 걸 인정해야지.”그때 키 작은 놈이 말했다.“너보다 실력이 부족한 거 아니거든. 너보다 비겁하지 못한 거지. 집요하게 거시기만 노리는 놈이 어디 있어? 넌 없냐?”“풉...”나는 참다못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 웃음소리에 네 놈이 동시에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순간 아차 싶었다.키 작은 놈이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봤다.“너 웃었어? 네 거시기 터뜨린다?”‘젠장. 난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설마 나로 화풀이하는 건 아니겠지?’‘아하, 민우한테는 상대가 안 되니까 만만한 나를 노리는 거네.’‘내가 만만해?’‘정태곤이 나를 무시하는 것도 분한데, 같잖은 것들까지 나를 무시해?’“그래? 어디 해 봐.”나는 순간 욱해서 이대로 약하게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정말 여기저기서 무시당할 테니까.게다가 내 옆에 민우도 있고, 꽤 강한 것 같으니 겁날 것도 없었다.이 상황에서 겁내면 너무 쪽팔리잖아?키 작은 놈
민우는 여전히 용맹했다. 혼자서 셋을 상대하는 데도 세 놈만 연신 비명을 질러댔디.그러다 결국 네 놈은 함께 줄행랑쳤다.나는 몸 이곳저곳이 아프고 쑤셔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지만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민우를 바라봤다.“친구야, 너 싸움 진짜 잘한다. 그동안 어떻게 숨겼대?”‘대학 때는 전혀 몰랐는데.’민우는 나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도 몸 여기저기 아픈 모양이었다.아무리 그 기술이 강하다지만 상대는 4명이다.서로 치고받고 싸우다 보면 쪽수에 밀릴 때도 당연히 있었을 거다.하지만 나보다 몇 배는 강하다는 건 사실이었다.우리는 서로를 부축하며 길가에 앉았다.내 팔에 두르고 있던 붕대는 끊어져서 면처럼 대충 감겨 있었다.게다가 뼈도 또 부러진 모양이었다.민우는 상처투성이인 내 모습을 보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수호야, 미안해. 너까지 끌어들여서.”“친구끼리 뭘 이런 일로 사과해?”“어제 같이 밥 먹자고 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난 김에 같이 먹을래?”민우는 내 팔을 보더니 말했다.“우선 상처부터 치료하자. 제때 치료하지 않다가 장애라도 남으면 어떡해? 난 너 평생 책임 못 져.”“별거 아니야. 그냥 팔 조금 부러진 거야. 병원 가서 치료하면 돼.”“그래, 병원부터 가자.”민우는 나를 부축해 작은 진료소에서 상처를 치료했다.그 우리는 작은 식당을 찾아 음식과 술을 주문해 먹으면서 얘기했다.나는 민우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물어봤다.그러자 민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말도 마. 되는 일이 없어. 난 정말 재수 없는 놈인 것 같아.”“너 졸업하자마자 병원에 인턴으로 들어갔잖아?”“맞아, 하지만 내가 좀 직설적이라 우리 과 상사한테 미움을 샀거든. 그 뒤로 나를 어찌나 괴롭히는데, 결국 참지 못해서 나왔어. 그 일이 있고 나서 다른 병원도 가보고, 약국도 가보고, 심지어 진료소도 갔었는데 내 성격 때문에 다 오래 버티지는 못했어.”“설아 부모님은 나에게 미래고 없다면서, 서아한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으니 헤어지라고 하더라
아직 너무 늦은 때는 아니라 사장님이 잠들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얼른 문자를 보냈다.사장님은 곧바로 답장을 했다.[그래요. 내일 하루 일해보라고 해요.]나는 핸드폰을 민우 쪽으로 들이밀었다.“우리 사장님이 내일 하루 일해보라는데?”민우는 흥분하면서 나에게 술을 따라주었다.“수호야, 넌 나를 다시 태어나게 해준 부모님이나 다름없어. 자, 받아.”“야, 뭐 오버하고 그래?”민우는 한꺼번에 술 한 잔을 비우더니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오버 아니야. 넌 몰라서 그래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일도 마음대로 안 되지, 연애도 안 되지, 설아 부모님한테 무시나 당하지. 가끔은 사는 게 공기 낭비라는 생각도 들더라.”나는 다급히 말했다.“누구나 다 가치 있어. 절대 허튼 생각 하지 마.”“그런데 난 가치 있을까? 부모님 속 뒤집어 놓고, 설아 슬프게 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 있어?”“네 가치는 네 존재 자체야. 그것 자체가 희망이야.”이건 내가 책에서 본 구절이다. 그때 참 마음이 힐링 되는 느낌이었는데.민우는 내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내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그런 말 해줘서 고마워. 절망 속에 있는 나를 꺼내줘서 고마워. 솔직히 너 만나기 전에는 사는 게 희망이 없었어. 그런데 다시 희망이 생긴 것 같아.”나도 따라서 웃었다.“그럼 다행이고. 뭐가 됐든 목숨은 하나야. 절대 바보 같은 짓 하지 마.”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민우의 핸드폰이 진동했다.민우는 전화를 받지도 끊지도 않았다.액정을 보니 설아 이름이 적혀 있었다.나는 문득 의아했다.“임설아 전화인데 왜 안 받아?”“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민우는 고민스러운 듯 말했다.“너 내일 일자리 면접 보러 가잖아. 좋은 소식을 알려줘야지.”“될지 말지도 모르는데, 뭘 말해?”“무조건 합격할 거야. 나 믿어 봐. 우리 사장님 엄청 좋은 분이셔. 게다가 요즘 연달아 두 명이 그만둬서 마침 일손이 모자라. 너도 한의학
“나도 피하고 싶지 않아. 그런데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헛소리 그만해. 나 지금 너 보고 싶어. 만날 거야 말 거야?”나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라는 사인을 보냈다.하지만 민우는 여전히 망설였다.“나... 우리 내일 만날까? 내일 면접 성공하면 만나자. 실패하면... 다른 사람 찾아.”“다른 사람 찾으라니,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리야? 신민우, 너도 내가 맨 처음 좋아한 사람이 너 아니라는 거 알지? 그런데도 결국은 너랑 만났어. 나 임설아는 한 입으로 두말 안 해. 너랑 같이 있기로 했으면 절대 다른 사람 안 만나.”“우리가 몇 년을 만났는데, 다른 사람 찾아가라고? 너 죽고 싶어?”임설아는 울면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옆에서 그걸 듣고 있는 내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 임설아가 이렇게 당돌할 줄이야.민우는 된통 욕을 먹고는 쩔쩔맸다.“나, 나도 이러기 싫어. 내가 너무 쓸모없는 놈이라서 그래.”“그래, 너 쓸모없는 놈 맞아. 어떻게 3년을 만났는데 털끝 하나도 안 건드려? 내가 뭐 조선시대 종갓집 규수라도 되는 줄 알아? 내 의견은 물어봤어? 난 너랑 결혼하고 싶고 백년해로하고 싶은데, 딴 놈 만나라고? 신민우, 우리 만나. 내가 너 죽여버릴 테니까...”임설아는 더 펑펑 울었다.민우 역시 눈물을 흘렸다. 사내놈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설아야, 미안해...”“미안하다는 소리 듣기 싫어. 애초에 나한테 했던 약속이나 지켜. 평생 나 아니면 결혼도 안 하겠다고 했잖아. 나 그거 진담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말한 대로 약속 지켜.”나는 얼른 민우 어깨를 두드리며 정신 차리라고 귀띔했다.임설아처럼 좋은 여자애를 놓치면 민우는 분명 후회할 거다.민우는 내 격려를 받고 심호흡했다.“좋아. 임수거리에서 기다릴게, 마침 옆에 수호도 있어.”“수호? 어떤 수호?”“정수호. 우리 대학 동기. 네가 좋아했던 애.”“네가 말 안 하면 잊을 뻔했네. 둘이 어떻게 만났어?”나는 멍하니 둘의 대화를 들었다.
두 사람은 조금 뒤 보기로 약속했다.민우는 신이 나서 말했다.“수호야, 여기서 기다려. 나 설아 데려올게.”“난 됐어. 둘이 만나는데 내가 왜 끼어?”민우는 다급히 말했다.“안돼, 넌 내 은인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까지 설아를 피하고 있었을 거야. 나 설아 앞에서 너한테 고맙다고 인사하고 싶어. 내 말 들어. 기다려.”말을 마친 민우는 신이 나서 전기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버렸다.민우가 떠난 뒤,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설아와 대화했던 내용을 뒤져봤다.특히 어제 받았던 음성 메시지를. 지금까지도 그 목소리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나는 모든 대화 내용을 삭제했다. 이러면 증거가 없어질 테니.그때 임설아가 내 카톡으로 문자를 보냈다.[안녕하세요. 나 임설아 엄마예요. 어젯밤 설아 핸드폰으로 대화한 건 그쪽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어요. 우리 설아랑 뭐 있죠?]‘귀신을 속여라.’‘아주 본인이었다고 광고를 해!’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협조했다.[어머님이셨군요. 저와 임설아는 그저 평범한 친구입니다. 아무 관계도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임설아는 나에게 또 문자를 보냈다.[믿어요. 어제 보낸 음성 메시지 역시 테스트 일종이니 다른 사람과 말하지 말아요.]나는 웃으며 임설아의 문자에 답장했다.[네, 그럼요. 하지만 좀 궁금하네요. 혹시 어제 저를 테스트하려고 스스로 한 거예요?]임설아는 화가 난 이모티콘을 보내왔다.[어른한테 못하는 말이 없군.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나? 당연히 인터넷에서 찾았지.][그렇군요. 알겠어요. 부모님 마음은 다 똑같잖아요. 이해해요. 그러면 그 사진은요? 어떻게 딸 사생활이 담긴 사진을 폭로하는 사진은 마구 배포할 수 있어요?][사진으로 유혹하지 않으면 속았겠어요?][네, 참 촐명하시네요.]‘얼마나 똑똑했으면 낯선 남자를 시험하려고 자기 딸의 사생활이 담긴 사진을 보내지?’‘이런 말은 귀신도 안 믿겠어.’대화를 하면 할수록 어이없는 일의 연속이었다.심지어 임설
“수호야, 너 그게 무슨 말이야?”민우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나는 솔직히 대답했다.“남자가 그립다던데?”“어, 정말이야?”신민우의 표정은 더욱 이상해졌다.“설아 어머니 남편 있는데?”“남편이 있는데 뭐? 남편이 있다면 만족시켜 주지 못하나 보지. 임설아 아버지도 중년이라서 기능이 많이 약해졌나 보지, 반대로 어머니는 오히려 욕구가 많을 나이고.”나는 덤덤한 얼굴로 헛소리했다. 그러다가 임설아를 바라봤다.“임설아, 안 그래?”“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임설아는 나를 향해 소리쳤다.그 모습을 보니 왠지 헛웃음이 나왔다.‘그러게 왜 자기 어머니를 방패막이로 사용해? 내가 바보인 줄 아나?’‘네가 놀겠다니 같이 어울려주는 거야.’“임설아, 네 어머니 병원에 좀 데려가 봐. 안 그러면 참다가 병 나.”사실 이 말은 임설아에게 하는 충고였다.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왜냐하면 임설아 낯빛을 보니 확실히 정상은 아니라는 게 티가 났으니까.임설아는 나를 휙 째려봤다.“너나 잘해. 민우야, 나 오늘 집에 가기 싫어. 네 자취방 가고 싶어.”퉁명스럽게 나를 쏘아붙인 임설아는 얼른 민우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그 말을 들은 민우는 안색이 변했다.“뭐? 내 자취방에?”민우는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얼른 테이블 아래로 그를 걷어찼다.‘아까 말한 걸 모두 잊었나?’사실 민우는 걱정이 있었다. 지금 그가 사는 곳은 환경이 안 좋아 임설아가 자기와 함께 고생하는 걸 원치 않았다.하지만 내가 자꾸만 발로 툭툭 차며 임설아를 집에 데려가라고 일깨워 주니 갈등이 생긴 모양이었다.옆에서 그 모습을 보는 나만 조급해 났다.‘나였으면 진작 동의했을 텐데. 이러니까 임설아가 불만이 많지.’“설아야, 아니면 내일 내 일자리가 확정되고 다른 자취방을 알아보면...”그 말을 들은 설아의 낯빛은 이내 어두워졌다.“또 변명이야? 매번 왜 변명이 그렇게 많아? 난 그저 너랑 하룻밤 같이 있고 싶을 뿐인데, 왜? 그게 그렇게
“엄마, 괜찮아요?”윤지은은 엄마의 이상한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보통 엄마라면 자기 딸이 우수한 짝을 찾기를 원하지 않나? 왜 엄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게다가 딸이 아무것도 아닌 남자랑 잤다는데 왜 화를 내지 않지?’“괜찮지 그럼. 우리 윤씨 가문은 정략결혼으로 사업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돈 많은 사돈에게 빌붙을 필요도 없어. 난 전에 네 심리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문제없다니 오히려 다행이지. 앞으로 외로우면 만나고 싶은 남자 마음대로 만나. 넌 윤씨 가문 딸이잖아. 뭐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윤지은의 얼굴은 또 빨갛게 달아올랐다.윤지은은 사실 욕구불만인 사람은 아니다. 다만 전에는 정말 힘든 데다 여준휘한테 복수하려는 마음에 아무나 만나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거였다.“필요 없어요. 요즘 병원 일이 바빠서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 없어요.”“누굴 속여? 너희 병원 요즘 안 바쁘잖아. 나 고 교수한테 다 물어봤어. 네가 요즘 할 일이 없다면서 휴가 줄 생각도 하던데. 차라리 이참에 수호 씨랑 여행이나 다녀와.”윤지은은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버럭 소리 질렀다.“싫어요. 가더라도 혼자 다녀올 거예요.”“혼자 가는 게 얼마나 위험해? 낯선 환경과 낯선 도시에 가면 외로울 때 누가 같이 있어 줘?”“엄마. 말끝마다 남자 얘기하지 마요. 전 독립적인 여성이에요. 남자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요.”“우리 딸이 얼마나 독립적인지는 나도 잘 알지. 그럼 그냥 친구랑 같이 논다고 생각해. 두 사람이 가는 게 혼자보다는 낫잖아. 남자도 사실 애완동물처럼 곁에 두면 꽤 즐거워.”그 말에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역시 부자들한테는 뭐든 애완동물로 보이는구나.’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윤지은 씨, 윤 사모님, 이제 설명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나는 기분이 언짢아 일부러 호칭으로 두 사람과 거리를 두었다.그러자 이영미가 다급히 내 팔을 잡았다.“가긴 어딜 가?
그때, 슬리퍼 한쪽이 날아와 내 뒤통수를 가격했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나는 그대로 소파 위에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윤지은은 그 틈에 덮쳐와 가위로 내 옷을 마구 잘랐다. 그 모습에 나는 오금이 저려 났다.가위가 조금만 더 아래로 향하면 나는 정말 고자가 됐을지도 모른다.나는 다급히 윤지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너무한 거 아니에요? 정말 저를 고자로 만들 작정이에요? 내 거로 얼마나 기분 좋았던지 잊었어요? 정말 잘라버리면 앞으로 누가 지은 씨 기분 좋게 해줘요?”윤지은은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봤다.“그건 너 없이 나 혼자서도 해결해. 그런데 감히 우리 엄마를 노려? 그러면 죽어야지.”“전 지은 씨 어머님 노린 적 없어요. 정말 마사지해 드린 것뿐이에요.”“노린 적 없다고? 그런데 아까 더 세게 하라느니 거친 게 좋다느니 한 말은 뭔데?”“제가 너무 살살 누른다고 더 세게 누르라는 거였어요.”“헛소리하지 마. 누가 그 말을 믿을 줄 알고. 내가 들어왔을 때 네놈이 우리 엄마랑 같이 방에 들어가는 거 똑똑히 봤는데. 말해. 우리 엄마한테 나쁜 짓 하려고 했지?”“제가 여색을 밝히는 건 맞지만 짐승은 아니에요. 전에 지은 씨랑 그랬는데 어떻게 지은 씨 어머니를 노리겠어요? 내가 변태도 아니고.”윤지은이 뭐라 하기 전에 이영미가 초조한 모습으로 달려 나왔다.“지은아, 너희 둘... 정말 했어?”윤지은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목까지 빨개졌다.“엄마, 말 좀 예쁘게 하면 안 돼요?”이영미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용천 호텔에서부터 두 사람 심상치 않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어. 우리 예쁜 딸. 네가 남자랑 사랑도 나누어 봤다니 엄마는 너무 기뻐. 난 네가 불감증인 줄 알았잖아. 어때? 해보니까 기분 좋지? 한 번 하니 또 하고 싶고 계속하고 싶지?”윤지은의 얼굴은 점점 달아올라 빨갛게 익어 버렸다.“엄마. 좀 점잖게 행동해요.”“에이, 엄마도 다 겪었는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나랑 수호 씨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절대 못 그래요. 제가 그렇게 물으면 지은 씨는 분명 저를 잡아먹으려고 할 거예요.”나는 바로 거절했다.그러자 이영미는 한숨을 푹 쉬었다.“우리 딸이 정말 불감증은 아니겠지? 평생 결혼도 안 하고 남자도 안 만나려는 건가? 남자랑 한 번도 해보지 못한다는 건 너무 불쌍한데.”“크흠...”서슴없이 말하는 이영미의 모습에 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수호 씨, 힘 좀 써봐.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이 정도면 돼요?”“아니. 더 힘써 봐. 난 심플하고 거친 걸 좋아하거든.”“이렇게요?”“아, 좋아...”한편, 집 문 앞에 도착해 문을 열려던 윤지은은 안에서 어머니와 누군가의 이상한 대화가 들려 다급히 문에 귀를 바짝 댔다. 그리고 바로 우리의 대화를 들어 버렸다.그 순간 나와 제 어머니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고 착각한 윤지은은 얼굴이 잿빛이 되어 문을 확 열어젖히고 노기등등해서 들어왔다.“정수호, 이 개자식. 감히 우리 엄마를...”하지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참 공교롭게도 윤지은이 들어오기 바로 전 이영미는 소파가 불편하다며 침대에 누워 마사지를 받겠다고 했다.결국 나는 마지못해 이영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 때문에 나와 이영미가 한 방에 같이 있는 장면을 윤지은에게 들키고 말았다.단단히 화가 난 윤지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손에 잡히는 대로 가위를 집어 들었다.“정수호, 이 개자식. 감히 우리 엄마를 넘봐? 내가 너 다시는 남자구실 못 하게 만들 거야.”나는 침실에 들어오기 전에 사실 도어락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영미가 얼른 마사지해달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바로 그걸 무시해 버렸다.고개를 돌렸을 때 이영미는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게다가 슬립이 너무 짧아 예쁜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이런 상태에서 마사지해 주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한참 동안 망설이고 있을 때, 이영미가 말했다.“안 될 거 뭐 있어? 집에 사람도 없는데. 무엇보다 당사자인 내가 괜찮다잖아. 얼른 눌
“이렇게요. 손가락을 구부리지 말고 쫙 펴야 해요.”나는 최선을 다해 시범을 보여주었다.그때 이영미가 갑자기 내 바지춤을 잡으며 말했다.“옷이 너무 커서 시선이 막히잖아. 옷 벗어 봐. 그래야 잘 보이지.”“어머님, 그건 안 돼요...”“그럼 옷을 들어 올리던가. 이렇게 하면 잘 안 보여.”나는 어쩔 수 없이 티셔츠 밑단을 위로 들고 다시 시범을 보여주었다.“보세요. 이렇게 손가락을 놓으면 검지와 중지 사이에 간격이 조금 생기는데 그 위치가 바로 우리가 찾으려는 혈자리예요.”“똑바로 앉아 봐. 잘 안 보여.”이영미는 또다시 나를 마구 잡아당겼다. 이러다가 바지가 벗겨질 것 같아 나는 다급히 일어나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그녀와 거리를 유지했다. “어머님, 전 이미 충분히 보여줬으니 직접 찾아보세요.”“이렇게? 이것 봐, 내 손가락이 말을 안 듣는다니까.”이영미는 동안에 귀염 상이지만 손은 어찌나 둔한지 계속 틀렸다.결국 보다 못한 나는 직접 가르쳐주었다. 다만 자세만 잡아주고 혈자리를 찾는 건 역시나 이영미 스스로 찾게 했다.“혈자리를 찾았다면 가볍게 눌러 봐요. 시큰거리는지 확인해 봐요.”그 과정에 나는 이영미를 보지 않으려고 계속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내 말에 이영미는 혈자리를 살짝 눌렀다.“아. 진짜 시큰거리는 것 같네. 앞으로 여기를 누르면 해소된다는 거지?”“네.”나는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로 돌아가 다시 이영미의 맥을 짚었다.이영미는 낮은 소리로 진작 물었던 걸 그랬다며 혼잣말했다. 이영미의 모습을 보니 연기 같지는 않았다. 아까 계속 내 바지를 내리려 해서 하마터면 이영미가 나한테 뭐라도 할 줄 알고 진땀을 뺐는데, 보아하니 내가 너무 예민했던 모양이었다.맥을 한참 짚어본 뒤 나는 상황을 말했다.“보아하니 편두통이 있으신 것 같아요. 손으로 마사지하면 두통이 사라질 거예요.”나는 이영미더러 소파에 기대앉게 하고 나는 소파 뒤에 선 채 머리를 마사지해 줬다.그때 이영미가 갑자
이영미는 개량한복 스타일의 슬립을 입고 있었는데, 고급스러운 연핑크색에 우아한 얼굴이 어우러져 섹시하면서도 단정한 분위기를 연출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남자인 내가 이대로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격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나는 좋은 마음에 귀띔했다.“어머님, 외투라도 좀 걸치는 게 어때요?”“한여름에 외투는 무슨. 더워죽겠는데. 난 집에서 항상 이렇게 입어. 수호 씨도 익숙해지면 돼. 얼른 들어와.”이영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상대도 괜찮다는데 내가 오히려 부끄러워하면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일 터라, 나는 결국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훑었다.“혹시 혼자 계세요? 하정현 씨는요?”“내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정현이는 못 봤어. 지은이 말로는 B시에 가슴 보러 갔대.”집에 정말 이영미 혼자뿐이라는 걸 알게 된 나는 얼른 치료하고 빨리 떠날 생각뿐이었다. 시간을 끌다 윤지은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나는 입이 열 개라도 설명할 수 없었을 테니까.“어머님, 혹시 어디가 불편하세요? 제가 봐 드릴게요.”나는 빨리 끝나려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러자 이영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여기. 자꾸만 답답하고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아.”“우선 앉으세요. 제가 봐 드릴게요.”이영미는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내가 맥을 짚는 사이 이영미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수호 씨는 내가 어떤 것 같아?”‘엥? 갑자기 왜 이런 걸 묻지?’“아름다우시죠. 관리도 잘하셨고.”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이영미는 으쓱한 듯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당연하지. 나 이거 다 자연산이야. 화장도 안 했어.”“네.”“여자가 하고 싶을 때 어떤 방법으로 욕구를 억제해야 해?”갑자기 야릇해진 대화 주제에 나는 어색해서 코를 쓱 문질렀다.“따뜻한 물로 목욕하면 해소될 수 있어요.”“소용없던 걸? 내가 다 해봤어. 혹시 다른 방법은 없어? 예를 들면 혈자리를 마사지한다던가 혹은 침으로 자극한다던가.”
하지만 변석훈의 말은 역전하려는 내 꿈을 처참히 짓뭉개 버렸다.내가 풀이 죽어 있을 때 변석훈이 갑자기 또 입을 열었다.“비록 실력은 나처럼 될 수 없어도 기술을 많이 익히면 적어도 스스로 보호할 수는 있어.”‘말 좀 한꺼번에 하지. 희망 없는 줄 알고 놀랐네.’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감히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스승님께서 좀 가르쳐 주세요.”“여기 내 명함이야. 몸 다 회복하면 연락해.”나는 얼른 그 명함을 챙겼다.그 뒤로 변석훈은 나와 한참 동안 얘기하다가 윤해철을 찾아갔고, 윤해철도 운동이 거의 끝났는지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이 떠난 뒤 나는 이영미에게 바로 문자했다. 남편분 건강이 채 회복되지 않아 몸조리를 더 해야 한다고.문자를 받기 바쁘게 이영미는 곧장 나에게 전화했다.[대체 몸조리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벌써 보름 동안 몸조리했는데 아직도 안 나았다고?]“한약 치료는 원래 효과가 늦게 나타나요. 이건 급하면 안 돼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셔야 해요. 제가 윤 회장님 몸 다 치료해 드리면 회장님은 무조건 어머님을 모셔갈 거예요.”이영미는 짜증나는 듯 물었다.[그이가 나한테 전한 말은 없었어?]“무척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아직은 어머님이 원하는 행복을 드릴 수 없어 모셔 와도 싸울 거라고 하셨고요. 그리고 젊을 때 절제를 몰랐다고 무척 후회하셨어요.”나는 이영미가 또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대충 그럴싸한 변명을 지어냈다.그 말을 들은 이영미는 살짝 놀란 듯 말했다.[그래도 양심은 있네. 그럼 시간 좀 더 준다고 전해줘. 그러니 수호 씨도 서둘러야 해. 되도록이면 우리 남편 몸 예전처럼 돌려 놔줘.]“그럼요. 그러니 어머님도 요즘 인내심 갖고 기다리세요. 지은 씨도 출근하랴 어머님 기분 맞춰드리랴 쉽지 않을 거예요.”[그걸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당연히 지은 씨한테서 들였죠. 지은 씨가 저더러 어머님과 윤 회장님을 도와주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제가 방금 확인했는데 윤 회장님
“너무 긴장하지 마. 나도 수호 군이 나쁜 사람 아니라는 거 아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기다리지도 않았어.”윤해철의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왜 기다리신 거예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러자 윤해철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저쪽 벤치에 앉아서 얘기하자고.”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윤해철과 함께 공원 벤치에 앉았다.“우리 집사람이 수호 군한테 뭘 시켰는지 나도 아네. 하지만 난 아직 집사람을 받아줄 수 없어. 몸 건강 때문이 아니라 회사 때문에. 우리 회사에 요즘 문제가 생겼는데 한동안은 그걸 처리해야 하거든. 그러니 우리 집사람 쪽은 수호 군이 시간 좀 끌어 줘.”윤해철이 상세한 사항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고민됐다.내가 이영미를 돕는 건, 이영미가 양동준을 설득해 나를 제자로 받게 해준다고 약속해서다. 하지만 윤해철을 돕는 건 나한테 아무런 이득이 없기에, 도와야 할지 무척 고민됐다.짝짝!내가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윤해철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그 순간 수풀 뒤에서 날카로운 눈매를 한 남자가 걸어 나와 윤해철에게 공손히 인사했다.“윤 회장님.”윤해철은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며 나를 바라봤다.“이 애는 내 개인 경호원 겸 기사인 변석훈이라고 하네. 이 애의 실력도 양동준 못지않아. 수호 군이 내 요구를 들어주면 석훈이더러 수호 군을 제자로 받아주라고 할게.”나는 도저히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변석훈의 실력이라면 의심이 가지 않았다. 윤해철의 개인 경호를 맡을 정도라면 실력은 당연히 문제없을 거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발전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왜? 싫나?”윤해철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좋아요. 너무 좋아요. 회장님 조건은 저한테 너무 이득이에요.”“하하. 별거 아니야.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거든.”비록 그렇다지만 나는 너무 감격스러워,
“비꼬지 마세요. 저도 마음 같아서는 정태곤을 죽이고 싶어요. 그럴 능력이 안 돼서 비겁한 수단으로 상대한 거지.”“비겁하든 말든 뭔 상관이야. 목숨만 건지면 되지.”어제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난 양동준만큼 강해지고 싶다. 아니, 심지어 양동준보다 더 강해지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임천호처럼 실력이 부족해도 권력이 있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부하를 거느리던가.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어젯밤은 운이 좋았던 거지만, 다음번에도 과연 그럴까?정태곤이 가더라도 또 강태곤이거나 서태곤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임천호의 부하가 얼마나 많은데. 수많은 사람이 임천호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한다. 때문에 나는 서둘러 강해져야 한다.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소여정이 갑자기 내 옆에 앉았다.“먹어. 왜 안 먹어?”나는 두 입에 제비집 한 그릇을 뚝딱 먹어 치웠다.“됐어요. 이제 배불러요. 다른 용건 있어요? 없으면 이만 가 줘요. 전 휴식할 테니까.”사실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다.내 말에 소여정이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봤다.“그렇게 우리가 갔으면 좋겠어?”나는 차분히 해명했다.“저 정말 해야 할 일이 있어요.”“무슨 일인데? 그렇게 다쳤으면서 설마 여자 만나러 가려고?”“아니요. 중요한 일이에요!”나는 재차 강조했다.“그럼 같이 가.”“그럴 필요 없어요. 사적인 일이라 데리고 가기 불편해요. 저 정말 괜찮으니까 마음 놓고 가세요.”오랜 설득 끝에 나는 겨우 두 불청객을 집에서 내보냈다. 이윽고 외투를 걸치고 국민 공원으로 향했다. ‘오늘 윤 회장님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네. 운에 맡겨야지.’만약 만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하지만 뜻밖에도 내 운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윤 회장님. 이런 우연이. 또 만나네요.”윤해철이 오늘도 평행봉에서 운동하는 걸 본 나는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윤해철은 나를 흘긋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 갔어요?”난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정태곤은 절대 순순히 돌아갈 사람이 아니다.그때 소여정이 말했다.“갔어. 가는 거 내가 직접 봤어. 어젯밤 일은 정말 몰랐어. 만약 알았다면 분명 막았을 거야.”“소여정 씨 탓할 생각 없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나는 진심으로 말했다.그러자 소여정이 의아한 듯 물었다.“정말 내 탓 안 해?”“소여정 씨가 정태곤더러 저를 죽이라고 시킨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소여정 씨를 탓해요?”“내가 수호 씨 찾아가서 정태곤이 살의를 느낀 거잖아.”소여정이 말했다.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하긴. 그럼 다음부터 저 찾아오지 마세요.”“진심이야?”“농담이에요. 소여정 씨는 제 환자잖아요. 제가 제 환자를 치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운 거지.”문제에 직면했다고 자꾸 피하면 안 된다. 만약 내가 피하면 오히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보일 테니까.게다가 앞으로 따로 나가 사업하면 이런저런 문제에 직면할 텐데, 고작 이런 용기조차 없다면 사업도 하지 말아야 한다.내 말을 들은 소여정은 은근히 기뻐했다.“어디 있어? 내가 지금 갈게.”“오늘은 됐어요. 저 다쳐서 오늘 하루는 집에서 휴식하고 있거든요.”“치료하러 가는 거 아니야. 얼마나 다쳤나 보러 가는 거지. 수호 씨 입으로 내 의사라고 했잖아. 내 주치의가 나 때문에 다쳤는데 병문안 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소여정의 말에 나는 반박할 수 없어 결국 주소를 알려주었다.하지만 놀랍게도 소여정은 혼자 온 게 아니라 백연우와 함께 왔다.“하. 나 오늘 바빠. 지은이 찾아가지 왜 나를 끌고 오는 거야?”“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 성격이 안 맞는 거 알면서. 내가 부른다고 지은이가 따라오겠어?”두 사람은 중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심지어 소여정의 손에 보건 식품을 가득 들려 있었다.“그 정도 아니에요. 이거 다 찰과상이에요.”이 보건 식품은 모두 귀한 것들이라 분명 적지 않은 돈이 들었을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