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양동준을 스승님으로 모셨는데, 서지예가 양동준을 좋아한다면 내 사모님이나 다름없다.그런데 어떻게 이 여자가 내 스승님을 두고 바람피우게 할 수 있단 말인가?하지만 서지예는 이미 내 몸 위로 올라와 유혹했다.“우리 해볼래요?”나는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동준 형님은 제 스승님이에요. 그런데 내가 그쪽이랑 썸 타고, 그 사진을 동준 형님께 보내면, 형님이 나를 어떻게 스승님으로 받아주겠어요?”“얼굴 가리면 되죠.”서지예는 이미 내 앞에 다가와 나에게 몸을 비비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밀쳐냈다. 나라는 사람이 이토록 정직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서지예는 나한테 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아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봤다.“무슨 뜻이에요? 내가 그렇게 매력 없어요?”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매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지예 씨는 내 미래 사모님인데, 우리 이러면 안 돼요.”“흥, 아직 제자로 받아주지도 않았는데 벌써 제자인 척하기는.”서지예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그걸 보니 왠지 난처했다. 방금 힘 조절을 하지 못해 상대가 아프지는 않나 걱정되었다. 나는 결국 걱정스레 물었다.“괜찮아요?”“상관 마요.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네 도움도 바라지 마요.”서지예는 화가 난 듯했다.“그러지 마요. 임천호 일은 정말 내 능력을 벗어났어요. 그런데 스승님과 지예 씨 일은 다른 방법으로 도와줄 수 있어요.”“무슨 방법인데요? 말해 봐요.”서지예는 기세등등해서 물었다.나는 한참 생각하다가 내 방법을 말했다.“남녀 사이는 분위기가 중요해요. 우리 스승님과 러브호텔에 가는 건 어때요?”“그 사람 성격에 절대 안 갈 거예요. 소용없어요.”“속여서 불러내면 되죠. 섹시한 속옷을 입고 기다리면 절대 못 버틸걸요. 그래도 안 되면 그 전에 술 좀 먹이는 것도 나쁘지 않죠. 남자는 알코올이 들어가면 참지 못하거든요.”서지예는 내 말에 예쁜 눈을 반짝였다.“괜
“스승님을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땡중으로 생각해요. 그런 사람을 홀려 규율을 어기게 만들어야 한다고요.”나는 서지예한테 예를 들었다.그러자 서지예는 바로 내 뜻을 이해했다.“아, 알았어요. 양동준은 보통 남자랑 달라서 꼬시려면 특별한 수단을 좀 써야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무슨 수단이요? 잘 모르겠는데.”‘어... 이걸 어쩐다?’‘여자가 어떻게 매력 발산해야 하는지 나도 모르는데.’“아니면 백연우 씨를 따라 배우는 건 어때요?”“미쳤어요? 어떻게 그런 시킬 수 있어요?”서지예는 나를 한바탕 호되게 꾸짖었다.백연우를 제외하고 형수가 떠올랐지만, 형수는 하산하기 전에 진동성이 뭐 하나 봐야겠다며 서둘러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그런데 그런 사람더러 가지 말고 도와달라고 할 수 없었다.머리를 쥐어 짜내며 적임자를 떠올렸지만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때 서지예가 말했다.“정 안 되면 그쪽이 가르쳐주던가요.”“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가 여자도 아니고, 남자를 꼬셔 봤어야 알죠.”“아는 여자가 그렇게 많은데 보고 배웠을 거 아니에요? 됐어요, 수호 씨가 가르쳐 줘요. 내가 양동준을 자빠뜨리면 그쪽을 제자로 받으라고 설득해 줄게요. 약속할게요!”서지예는 아주 매력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게다가 양동준과 그런 사이이니, 서지예를 도우면 양동준의 제자가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동준 형님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다면 못 할 것도 없지.’결국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해보죠.”“그럼 이제부터 말하는 대로 하면 돼요?”나는 나를 소여정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사람을 유혹하는 면에서 소여정을 따라올 자는 아무도 없었으니까.나는 서지예더러 양동준인 척하게 하고, 남자의 욕망을 어떻게 자극해야 할지 직접 시범을 보여주었다.“하하하... 하하하...”서지예는 아예 웃음을 터뜨렸다.‘사람 머쓱하게.’“뭘 웃어요?”서지예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방금 그거 너무 웃겨서요. 됐어요, 안 웃을 테니 다시 한번 보여줘요.”
“그렇게 직접적으로요?”“네, 그래야 해요. 정식하고 올곧은 사람일수록 빙빙 에돌아 가면 작전 실패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서지예는 한참 생각하다가 미간을 좁혔다.“어떻게 갖다 대요? 안에 넣어요? 아니면 겉에 대요?”‘어...’“시범 보여줄래요?”‘어...’‘왜 이 여자가 나한테 흑심 있는 것 같지?’“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마요.”나는 경계 가득한 눈으로 서지예를 보며 물었다.그러자 서지예가 잔뜩 화난 얼굴로 말했다.“나 아무것도 몰라요. 왜요? 내가 다 알면 가르쳐달라고 했겠어요?”“그런 사람이 내 바지를 벗기려 했어요? 난 또 아주 능수능란한 줄 알았죠.”나는 왠지 큰 손해를 본 기분이었다.서지예는 팔짱을 꼈다.“궁금해서 그런 거잖아요. 당신 그곳이 얼마나 대단하면 여자들이 주위에 끊이질 않나 해서요.”나는 어색하고 낯 간지러웠다.“그 얘기는 그만해요. 부끄럽잖아요. 나도 내 인생이 로또 맞은 기분이에요.”“쓸데없는 말은 그만하고 실용적인 거나 가르쳐 줘요.”서지예는 강경한 태도로 말했지만 얼굴은 살짝 발그스름했다.나는 서지예의 치맛자락을 바라보며 머쓱하게 말했다.“그러면... 그쪽한테 손해 아니에요? 조금 부끄러운데요?”“나도 괜찮은데, 그쪽이 안 괜찮을 거 뭐 있어요? 그만 우물거리고 얼른 손 이리 줘요.”“서지예는 말하면서 내 손을 자기 치마 밑으로 쑥 밀어 넣었다.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의 예쁜 눈매가 찡그러졌다.서지예는 잘 숨겼지만 나는 바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뜨뜻한 무언가가 울컥 흘러나왔다.그건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이렇게 민감하다고?’하지만 서지예는 여유 있는 모습인 척해서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그저 협조하는 것뿐.“맞아요. 이렇게 하면 돼요. 보통 이 정도 하면 보통 남자들은 참지 못해요.”서지예의 얼굴은 점점 빨개졌고 목소리도 부끄러움이 담겨 있었다.“그럼 다음은... 바로 본론으로 가면 돼요?”“네, 자연스러운 거 아니에요?”나는 말하면서 얼른
“뭐가요?”“서 쌤이 시크하기로 유명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여자를 상대로, 아주 대단해요.”나는 다급히 해명했다.“흑심 품고 뭘 해보려는 건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차나 몰 것이지 뭘 그렇게 상관해요?”문득 운전기사 주제에 뭔 말이 그렇게 많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말할수록 상대가 서지예한테 흑심 품고 눈요깃거리로 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를 태웠다.나는 차에서 서지예를 기다렸다.하지만 30분이 다 되어 가는데 서지예는 돌아오지 않았다. 약간 걱정이 된 나는 얼른 그녀에게 연락했다.[다 됐어요?]서지예는 빠르게 답장했다.[그렇게 가고 싶어요? 뭘 그리 재촉해요?”‘헐. 황폐한 산속에서 위험할까 봐 그러지. 걱정해 줘도 난리야.’‘됐어. 마음대로 하라지. 상관 안 해.’나는얼른 소설 사이트를 열었다.한참 뒤, 서지예는 겨우 돌아왔다.얼굴이 붉고 색스러운 게 딱 봐도 홍수가 터진 모양이었다.서지예는 자리에 돌아와 기사한테 말했다.“됐어요. 출발해요.”나는 핸드폰을 거두고 서지예를 바라봤다.“내 가르침 어땠어요?”“나쁘지 않네요.”“그럼 성공하면 스승님한테 꼭 나를 스승으로 받아주라고 설득해 줘요.”“네.”서지예의 대답은 뜨뜻미지근했다.상대가 나를 상대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형수와 애교 누나는 이미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백연우와 사모님도 갈 곳으로 갔다.서지예는 나에게 어디로 가면 되는지 물어봤다.나는 아직 팔에 깁스를 하고 있고, 갈비뼈가 채 아물지 않아, 사모님은 하산하기 전에 집에서 잘 휴식하라고 당부했다.하지만 지금 집에 가기 싫어 서지예한테 말했다.“할 일 없으면 얼른 계획을 실행에 옮겨요.”“지금요?”“네, 빨리 실행해야 스승님을 빨리 차지하죠. 나도 하루빨리 스승님 제자가 될 수 있고요.”다른 건 모르겠고, 내가 하루빨리 양동준 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다.서지예는 얼굴이 붉게 물들더니 기사한테 말했다.“기사님, 부근에 있
“부끄러울 거 뭐 있어요? 본인 입으로 그랬잖아요. 성인이 이런 곳 오는 거 정상이라고.”서지예가 쑥스러워하는 걸 알았기에, 나는 그녀를 위로했다.사람은 누구나 풋풋한 시절로부터 점차 성숙해져 가는 거다. 나도 그렇게 겪어 왔고. 때문에 서지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서지예는 마음을 다잡더니 말했다.“알았어요. 이제 전화하면 돼요?”“네. 합리적인 이유를 대서 먼저 여기로 불러내요. 하지만 여기가 어떤 곳인지 절대 말하지 마요.”“알았어요.”소지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양동준한테 전화 연결을 시도했다.전화는 빠르게 연결되었다.서지에는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양동준, 나랑 술 마셔줄 수 있어? 나 지금 기분이 안 좋아. 여기로 좀 와줘. 기다릴게. 안 오면 죽도록 마실 거야.”서지예는 상대가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이제 양동준이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나는 대충 할 일을 끝낸 것 같아 입을 열었다.“난 먼저 가볼게요.”“어디 가게요?”그 질문에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당연히 떠나야죠. 이따가 두 사람이 꽁냥거리는데 내가 끼어 있겠어요?”서지예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잔뜩 긴장하고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나 너무 떨려요. 망치면 어떡하죠?”“헐, 나를 상대할 때는 이러지 않았잖아요.”“그거야 그쪽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쪽 앞에서는 부담이 없는 거죠. 하지만 양동준은 좋아한단 말이에요. 내 몸과 마음을 다 줄 걸 생각하니 설레고 불안해요. 거절당할까 봐 두렵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내가 또 욱해서 싸움 날까 봐 걱정이기도 하고.”사람은 좋아하는 상대 앞에서는 쩔쩔매게 돼 있다.예전에 애교 누나 앞에서 나도 이랬으니까.나는 서지예 앞에 다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긴장할 거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에요. 어떻게 몰입해서 서로에게 좋은 추억을 남길지만 생각해요.”“될까요? 아니면 가지 마요.”“그건 무리한 요구라는 생
윤 사모님은 우아하고 기품 있었다.특히 피부는 탱탱하고 새하얀 데다 살짝 은색을 띠고 있었다.이곳에서 윤 사모님을 만난 게 너무나도 의외였다.“윤 사모님, 여기서 다 만나네요.”“팔은 왜 그래요? 다쳤어요?”“네, 부러졌어요.”“어쩐지 요즘 가게에 안 나오더라니. 요즘 수호 씨가 안 나와서 얼마나 재미없었는지 알아요?”윤 사모님 말에 나는 약간 쑥스러웠다.“저를 너무 띄워주네요. 가게에 저도다 실력 좋은 선생님들 많은데요.”“그런데 다들 수호 씨만큼 젊지도, 잘생기지도 않았잖아요.”윤 사모님은 나를 희롱하면서 이상야릇한 눈빛으로 내를 훑었다. 내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윤 사모님 눈에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는 듯했다.“내 집이 바로 요 근처인데, 차라도 한잔하고 갈래요?”“네? 아니에요, 일이 있어서 그건 생략할게요.”무엇보다 내가 떠나면 서지예가 나를 찾지 못할까 봐 걱정됐다.하지만 윤 사모님이 갑자기 말했다.“아, 머리가 어지러워서 걷지 못하겠는데, 부축해 줄 수 있어요?”윤 사모님이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았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상대가 큰 고개인데 어쩌겠나?“알았어요. 집까지 부축해 드릴게요.”‘나도 환자인데 내 부축을 받으려 하다니, 참 지독하기도 하지.’나는 윤 사모님을 부축한 채 그녀가 살고 있는 동네에 도착했다. 그곳은 고급 주택 단지라 얼굴 인식을 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하지만 윤 사모님이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단지는 매우 컸는데, 무려 건물만 100여 채나 됐다. 윤 사모님이 살고 있는 곳은 97동이었다.윤 사모님이 데려간 집은 매우 컸는데 입이 떡 벌어질 지경이었다.게다가 채광도 좋고 집에 있는 가전제품은 대부분 AI 기능이 있었다.나는 참지 못하고 한 바퀴 빙 둘러봤다.그러다가 뒤를 돌아본 순간, 윤 사모님이 갑자기 나를 덮치며 내 목을 끌어안았다.나는 멍해졌다.“윤 사모님, 왜 이러세요?”나는 다급히 윤 사모님을 밀어냈다.그랬더니 윤 사모님은 생긋 웃으며 나를 노골적으로 쳐
“어쨌든 안 돼요. 강요하지 마세요. 계속 강요하면 저도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윤 사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기에 절대 건드리면 안 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나는 권력도 실력도 없는 사람이다. 임천호 한 명만 해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윤 사모님과 얽히면 어떻게 주을지도 모른다.이번에 용천 호텔에 다녀와서 한 가지 알게 된 게 있다면, 바로 여자를 만나려면 자본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만약 내가 임천호 같은 사람이면 고민 없이 윤 사모님과 몸을 섞었을 거다.하지만 난 아니다. 때문에 이 흙탕물에 뛰어들면 안 된다.“수호 씨, 축하해요. 테스트는 통과했어요.”심각한 표정으로 윤 사모님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이렇게 말해버리니 나는 어리둥절했다.“네? 무슨 상황이에요?”윤 사모님은 내 몸 위에서 일어나더니 단정하게 옆에 앉았다.“이건 다 테스트한 거예요.”“문제는 저를 왜 테스트하는 거죠? 뭘 하려고요?”나는 어안이 벙벙했고 머리가 멍했다.윤 사모님은 생긋 웃더니 나를 바라봤다.“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죠?”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윤 사모님이 부잣집 사모님이라는 것 외에 아는 게 없다.윤 사모님은 가볍게 웃더니 말했다.“사실 나한테 다른 신분이 있어요. 내 남편도 몰라요.”‘뭐지?’‘뭐 스파이 놀이라도 하는 건가?’나는 궁금하고 이해가 되지 않아 윤 사모님을 빤히 바라봤다.“무슨 신분인데요?”“킬러예요. 구체적인 킬러.”윤 사모님은 어두운 표정으로 매섭게 말했다.나는 몇 초간 멍해 있다가 입을 열었다.“에이, 그럴 리가요. 킬러라니, 말도 안 돼요.”“왜 말이 안 돼요?”“살기가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데서 보면 킬러는 기본적으로 살기가 있는데 윤 사모님은 없어요.”“하하하... 수호 씨 너무 재밌네요. 소설과 드라마를 믿어요? 하지만 제대로 맞췄어요. 나 사실 킬러 아니에요. 장난친 거예요?”“그럼 다른 신분이라는 게 있긴 한 거예요?”“있죠.”“뭔데요?”“맞춰 봐요.”
“하지만 나도 세계적인 명탐정이 되는 게 꿈이에요.”나는 너무 웃어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러면서도 윤 사모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네, 꼭 성공할 거예요. 성공하길 바랄게요.”윤 사모님은 나를 꼬집었다.갑작스러운 고통에 나는 얼른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다.그러자 윤 사모님이 다리를 꼰 채 얼굴이 어두워져서 말했다.“수호 씨랑 같이 일해보려고 했는데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네요. 그만 가 봐요.”“네? 저랑 같이요? 왜요?”“잘생겼으니까요. 가끔 미색을 희생해서 목표에 접근해야 할 때가 있거든요.”“전에 마사지숍을 열겠다고 했잖아요? 왜 갑자기 탐정이 됐는데요?”“마사지숍은 뻥이죠. 이 업계에서 위장은 기본이라고요. 알겠어요?”윤 사모님은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았는지 말하는 태도가 거칠었다.방금 전 농담이 지나쳤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사과했다.“미안해요, 아까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우선 진정해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자세히 말해 봐요.”“부잣집 사모님이 호의호식하며 생활을 누릴 수도 있는데 사모님은 본인 사업이 있잖아요. 혼자 뭔가를 이루려는 생각도 있고, 그래서 대단한 것 같아요. 존경스러워요.”내 말이 꽤 효과 있는지 윤 사모님 얼굴에는 또다시 미소가 번졌다.“진작 그럴 것이지. 내 탐정 사무소 규모가 꽤 커요. 게다가 다 큰 건만 받아요. 일거리 하나당 보너스도 몇백만 원은 돼요”“잘만 하면 연말에 인센티브도 있고, 1년에 적어도 몇천만 원은 벌 수 있어요. 맹인 마사지숍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아요. 어때요? 생각해 볼래요?”“이거 완전 사촌 동생 직원 스카우트하려고 물밑 작업하는 거잖아요. 두 분이 알면 어떡하려고요?”윤 사모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상관없어요. 두려울 것 없어요. 내가 수호 씨를 오랫동안 지켜봤는데, 우리 사무소에 마침 수호 씨처럼 젊고 잘생긴 데다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친구가 필요해요. 여러 번 테스트했는데 수호 씨 만한 사람 없어요.”그 말
나는 재차 거절하며 말했다.“앞으로 우리 가게 자주 찾아와 주시면 돼요. 그러니 2억은 받을 수 없어요.”“에이, 수호 씨가 마음에 들어서 주고 싶어 주는 건 데도 안 받을 거야? 돈 받고 우리 딸이나 잘 만족시켜 줘.”이영미는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그에 반해 나는 그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님은 제가 지은 씨랑 만나는 거 괜찮아요?”“괜찮지 그럼. 이렇게 잘생기고 몸매도 좋은 남자애가 또 어디 있다고. 수호 씨가 우리 딸 만족시켜 주면 우리 지은이도 좋아할 거야.”“난 개방적인 사람이라 우리 딸만 즐겁고 행복하면 돼. 결혼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잠깐 만나다 헤어지면 그만이야.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 윤씨 가문은 지은이를 먹여 살릴 수 있어.”처음 들어보는 관점에 나는 크게 놀랐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윤씨 가문은 워낙 재산이 많고 부부가 워낙 개방적이니 결혼이 최종 귀착점이 아닐 수 있었다.게다가 이영미는 자식이라고는 윤지은 한 명뿐이니, 당연히 자기 딸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부끄럽네요. 하지만 어찌 됐든 이 돈은 받을 수 없어요...”“안 받으면 안 돼. 안 받으면 수호 씨가 우리 지은이 만족시켜주지 못할까 봐 걱정돼. 우리 지은이가 불감증인데 수호 씨를 못 잊는 걸 보면 수호 씨가 그쪽 방면으로 꽤 쓸만하다는 뜻이니까.”“콜록콜록...”나는 침에 사레가 들렸다.“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구체적인 상황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우리 지은이가 수호 씨랑 같이 있고 싶어 하고 나도 수호 씨가 마음에 드니까, 수호 씨는 우리 지은이만 만족시켜. 난 우리 딸이 평생 즐거움을 경험해 보지 못하는 건 바라지 않아. 그러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뭔 소용이 있어?”역시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걸 나는 다시 한번 느꼈다.나는 열심히 돈 벌어 출세하려고 아득바득하고 있는데, 이영미는 벌써 후대의 행복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그것도 이토록 깊숙이.그때
소설 중간마다 가끔 나오는 삽화는 수위가 너무 높았다.나는 이런 걸 이해할 수 없지만 요즘 많은 여자애들 사이에서 비엘이 인기라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영미도 그중 하나였을 줄은 몰랐다.나는 책을 다시 책장에 밀어 넣고 다른 책 하나를 골랐다. 이번에는 비엘 만화였다. 이영미가 이 정도로 심각하게 베엘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니.나는 그 책을 도로 꽂아 넣고 또 다른 책을 골랐다. 하지만 이번 역시 비엘 만화였다.알고 보니 책장 전체에 이런 책들뿐이었다.나는 너무 어이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보아하니 이영미는 평소 이런 책을 즐겨 보고 윤해철은 이영미를 무척이나 아끼기에 특별히 아내를 위해 전문 책장까지 만들어준 모양이었다.볼 수 있는 책이 없어 나는 결국 새를 구경하러 갔다.어떤 새들은 마치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무척 재밌게 행동했다.그중에 말할 수 있는 앵무새 두 마리가 있었는데, 나는 참지 못하고 그 앵무새들을 건드렸다.그때 한 앵무새가 갑자기 이영미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여보, 샤워해.”그러자 다른 앵무새가 잇따라 소리 냈다.“같이 씻을래?”“좋아. 난 역시 욕실이 좋아...”대화가 이어지는 두 앵무새를 보니 나는 넋을 잃었다. 앵무새까지 이 정도로 밝히는 걸 보면 평소 이 집 부부가 얼마나 붙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 뒤로 무려 2시간 뒤에 윤해철과 이영미는 함께 내려왔다.나는 속으로 윤해철의 지속력에 감탄했다.이영미는 얼굴이 발그스름했고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오래 기다렸지?”“아니에요.”나는 예의상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지만 솔직히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었다. 아니, 참기 힘들다는 게 더 맞을지도.집안 곳곳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분위기에 보통 사람들이 오면 정말 견디지 못할 거다.“수호 군, 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수표를 써줄 테니까.”윤해철은 내려올 때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가 돋보인다던 양복을 입고 내려왔다. 그 모습은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너무 멋있었다.그러니
“크흠...”나는 일부러 헛기침하며 뒤에 나도 앉아 있다는 걸 티 냈다.그런데 이영미는 오히려 깔깔 웃으며 말했다.“수호 씨는 한숨 자. 나는 우리 남편과 볼일이 좀 있으니까.”‘이건 무슨 상황이지?’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잘 수 있을 리가 있나?“저기 두 분 좀만 참으세요. 이따가 집에 도착하면 마음껏 하셔도 돼요.”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또래의 부부에게 이런 말을 하려니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때 이영미가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이런 걸 어떻게 참아? 수호 씨도 경험 있을 거 아니야. 하고 싶을 때 쉽게 참아져?”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그럼 저 먼저 내렸다가 두 분 끝나면 다시 올게요.”“그럴 필요 없어. 그냥 앉아 있어. 차는 움직일 때 더 느낌 있으니까.”내 옆에 앉은 기사는 이런 대화를 듣고도 덤덤한 표정이었다. 보아하니 자주 있는 일이라 익숙해진 듯했다.결국 나는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올 리가 만무했다.그도 그럴 게, 귓가에 자꾸만 이영미의 애교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으니까.비록 두 사람은 정말 몸을 섞지는 않았지만 서로 희롱하며 불장난하는 모습만 봐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심지어 가끔 몸을 저릿하게 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이 점으로 보면 두 사람이 평소 자주 야릇한 농담을 주고받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둘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다 보니 나는 점점 부러웠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도 나중에 늙어서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집으로 가는 내내 화끈한 장면이 뒤에서 생중계되는 바람에 영화를 관람할 때보다 더 괴로웠다.심지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윤해철은 이미영을 안고 서둘러 침실로 돌진했다.운전기사이자 윤씨 가문 집사인 손정현은 나를 거실로 데리고 가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그때 나는 문득 궁금해서 물어봤다.“혹시 기사님은 아무 반응도 없어요?”손정혁은 덤덤하게 대답했다.“나도 이제 50이 넘는데 무슨 반응이 있겠어요?”“50이 넘는다고 나이 든 건 아
하지만 윤지은은 겉으로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뜬금없이 왜 이래?”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윤지은이 대놓고 거절하지 않았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뜻이니까.나는 말을 이었다.“우리가 서로 날을 세우고 있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사람 중에 서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안 그래요?”“그런 거 묻지 마. 난 몰라.”윤지은은 답변을 거절했다.이에 나는 싱긋 웃었다.“저는 지금 이대로가 편한 것 같아요. 사실 지은 씨가 말은 독하게 하지만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내가 그딴 감언이설에 넘어갈 것 같아? 그럴 시간에 사업이나 일궈.”“안 그래도 사업은 할 거예요. 참, 이틀 뒤에 천수당이 개업하는데 지은 씨도 와요.”“시간 봐서. 스케줄 없으면 가고, 있으면 못 가.”윤지은은 항상 이런 식이다. 어느 한번 애교 누나나 형수처럼 확정된 대답을 할 때가 없다.하지만 윤지은이 이렇게 말한 것만 해도 나는 무척 기뻤다.나는 다른 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면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서로 틀어져 영원히 얼굴 보지 않는 관계보다는 나으니까.우리가 한창 대화하고 있을 때 이영미와 윤해철이 짐을 챙겨 나왔다.나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짐을 대신 들었다.윤지은은 아버지한테 여전히 쌀쌀맞게 굴었지만,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나오라는 건 고분고분 동의했다.차에 오른 뒤 윤해철은 참지 못하고 한탄했다.“지은이 쟤는 성격이 누구를 닮았는지 아주 고집불통이야.”“누구를 닮았긴? 당연히 당신을 닮았지. 당신도 젊었을 때 저랬잖아.?”“내가 그랬다고? 난 당신 앞에서 저런 적 없는데?”윤해철은 인정할 수 없었다.그때 이영미가 윤해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내 앞에서는 그런 적 없어도 아버님 앞에서는 그랬잖아. 잘 생각해 봐. 지은이 성격 당신이랑 똑 닮았지?”윤해철은 난감한 듯 얼굴을 붉혔다.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젊었을 때 윤해철은 사업
“지금이야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 만나면 생각이 바뀔 거야.”윤해철은 여전히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다만 윤지은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 쓰레기가 얼굴에 쓰레기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 부잣집 도련님 중에 쓰레기가 없다는 건 어떻게 장담해요? 아빠는 그동안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 봤잖아요. 그럼 아빠가 한번 말해 봐요. 평소 만났던 부잣집 도련님 중에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어요?”“다 싸잡아서 욕하지 마. 부잣집 도련님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 누군가는 네가 말한 그런 사람이 있겠지...”“저는 싸잡아서 욕한 적 없어요. 그저 어떤 신분의 남자든 쓰레기는 똑같이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었어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래요. 그 누구도 저를 강요할 수 없어요.”“아빠가 정말 저를 아끼고 사랑하고 저를 위해 생각한다면 제 의견도 존중해 줘야 하잖아요. 계속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할 게 아니라...”“내가 언제 강요했다고 그래? 몇천억짜리 회사를 그냥 주겠다는데 그게 왜 강요야?”두 부녀가 싸움 날 것 같자 이영미는 얼른 끼어들어 분위기를 풀었다.“됐어. 그만 싸워. 어쩜 부녀라는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워대? 지은아, 가업을 잇고 싶지 않으면 잇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엄마가 네 편 들어줄게. 오늘 식사 자리에 꼭 참석해. 엄마 체면 봐서라도. 알았지?”윤지은은 소파에 기대앉아 건성으로 대답했다.“나중에 주소 보내줘요.”그 말에 이영미는 활짝 웃었다.“그래. 레스토랑 예약하면 바로 알려줄게.”“여보, 나 짐 싸는 거 좀 도와줘.”이영미는 윤해철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홀로 남겨진 나는 윤지은을 빤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 곁으로 움직였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나를 째려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얘기 좀 해요.”“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있던가?”“아무 거나 얘기하면 되죠. 그러고 보니 우리 안 본 지 꽤 됐잖아요.”“차라리 평생 내 눈앞에서
윤지은은 오늘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벨 소리에 문을 연 순간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있는 모습에 잠깐 넋을 잃었다.나 역시 잠옷을 입고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윤지은을 보고 잠시 넋을 잃었다.윤지은은 평소 병원에 있을 때 항상 머리를 높게 얹고 흰 가운을 걸치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때문에 윤지은이 잠옷 차림으로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이웃집 동생 같은 모습을 한 걸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손에 의학서적 한 권을 들고 있어 박학다식한 학자 가문 집 딸내미 같은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이건 너무 큰 반전이었다.그때 윤지은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홱 째려봤다.“뭘 봐? 여긴 왜 왔어?”나는 얼른 생각을 정리한 뒤 해명했다.“저도 윤지은 씨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왔어요.”이영미는 얼른 내 편을 들었다.“지은아, 엄마랑 아빠가 화해한 거 다 수호 씨 덕분이야. 오늘 저녁 수호 씨한테 밥 사주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와.”“저는 됐어요. 바빠요.”윤지은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색다르게 보였다.그때 이영미가 친근하게 딸의 팔짱을 끼며 애교 부렸다.“가자. 우리 가족이 오붓하게 식사하는 거 오랜만이잖아. 엄마가 부탁할게. 응?”이영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윤지은도 더 거절할 수 없었다.그때 윤해철이 대뜸 물었다.“넌 여기서 언제까지 살 거야?”“그게 아빠랑 뭔 상관인데요?”“지은,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저 원래 이런 거 알잖아요. 듣기 싫으면 듣지 말던가요.”윤지은은 말을 마친 뒤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 모습을 보며 윤해철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우리 부녀는 전생에 원수였나 봐. 오랜만에 만나는데 가족애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네. 하.”나는 이 상항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윤지은이 나한테만 쌀쌀맞게 구는 게 아니라 친아버지한테도 쌀쌀맞게 구는 것 같았다.‘원수를 스스로 만드네.’윤지은은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
강용재라면 바로 임천호 곁을 지키던 그 덩치다.전에 백조의 호수 근처에서 강용재가 나를 미행했던 적이 있다. 다만 내가 정신없을 때 양동준이 나타나 위기를 넘긴 거였다.나는 이제야 임천호가 나를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동안 윤지은이 양동준더러 은밀히 나를 지켜주라고 한 덕에 그동안 내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거였다.그런데 이제 양동준이 출장 갔으니 강용재는 나 혼자 상대해야 한다.예전 같았으면 나는 분명 불안했을 테지만 지금은 두렵지 않았다.두려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 사람들은 상대가 두려워한다고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길 사람이 아니다.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요즘 나와 윤지은은 거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게 양동준더러 나를 보호하라던 것까지는 영향이 미치지 않은 모양이다.자세히 생각해 보니 내 목숨은 윤지은이 구해준 것이기에 나는 윤지은한테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나는 그저 이영미 쪽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러면 이영미가 나를 도와 좋은 소리 몇 마디 해주면 나와 윤지은의 관계도 완화될 수 있으니까.아파트 단지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마침 이영미와 윤해철을 만났다.이영미는 다정하게 윤해철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얼굴이 발그스름한 게 한눈에 봐도 사랑을 듬뿍 받은 티가 났다.윤해철 역시 활기가 차 넘치는 게 전에 여색에 관심조차 없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두 사람 사이가 더 화목해진 걸 보니 나는 흐뭇했다.“사모님, 윤 회장님.”나는 먼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그러자 이영미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수호 씨 정말 대단하더라? 우리 남편 지금 엄청 끝내줘. 호호호...”이영미는 말하는 와중에도 흐뭇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때 나는 이내 겸손하게 말했다.“별말씀을요. 다 윤 회장님이 꾸준히 단련하고 보양에 신경 쓴 덕분이에요. 그 기초에 제가 약물로 조금 치료해 드리니 바로 나은 거예요. 기반이 좋지 않으면 제가 아무리 약을 들이부어도
하정현의 아버지 하대철은 재직할 때, 많은 지역의 거물들에게 미움을 샀었다. 때문에 하대철이 무너지자마자 그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이 하정현과 하정현의 어머니 진수향을 잡으려고 쫓아다녔다.그래서 진수향은 할 수 없이 몸을 숨겼고 하정현 역시 강북으로 도망쳐 와서 윤지은을 찾았다.하지만 하정현은 이런 일들을 윤지은한테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동안 윤지은의 기분이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하정현은 평소 털털하고 덤벙거리는 것 같지만 사실 매우 섬세했다. 때문에 기분도 안 좋은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아직 강북까지 쫓아온 건 아니기에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날 밤 용천 호텔에서 하정현은 아버지를 구해내라는 진수향의 전화를 받았다.하정현도 답답한 마음에 푸념했다.“제가 무슨 수로 아버지를 구해요? 제 코가 석 자인데...”[그런 건 모르겠고 우리가 너를 힘들게 키워 놨으니 이제 너도 은혜를 갚을 때가 됐어. 만약 네 아버지를 구해내지 못하면 앞으로 너 같은 딸 둔 적 없다고 생각할 거야.]진수향의 말은 너무 모질고 무자비해 하정현은 기분이 계속 안 좋았다. 심지어 그때 하정현은 생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하지만 나와 사모님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하정현은 스스로 자멸할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정현은 나쁜 놈 손에 유린당할 바에는 차라리 처음을 원하는 사람한테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강요는 아니니까.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하정현은 나를 찾아왔었다. 진실을 끝까지 얘기하지 않은 건 단순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하정현은 자신의 비참한 가정사를 들키고 싶지 않았고 내가 그 때문에 자기를 동정해서 도와줄까 봐 싫었다.매일 가슴 확대 수술을 입에 달고 사는 듯하지만 사실 그건 하정현이 스스로를 속이려는 말이었다.생존조차 어려운 여자가 가슴 확대 수술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까?하정현은 단지 몸매를 더 예쁘게 만들어 모델 일이라도 하거나 아니
“보니까 은근히 지은이길 바라네?”나는 윤지은이라고 확신했기에 하정현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그건 아마도 그 상대가 윤지은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커서였을 수도 있었다. 정말 윤지은이면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생각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당연하죠. 그럼 더 이상 알아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동안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겠어요.”“너무 쉽게 생각하네. 수호 씨가 비록 임유미 씨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딱 한 끗 차이였어. 본인이 키스했던 사람이 수호 씨라는 걸 발견했을 때 유미 씨 표정이 어땠는지, 수호 씨는 아마 모를 거야.”그 말은 단번에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놀라던가요? 아니면 실망하던가요?”“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놀라움과 실망감도 있긴 했지만 뭔가 더 있었어.”“뭐가요? 무슨 뜻인데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러자 하정현은 귀찮았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몰라.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보지 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유미 씨는 상대가 수호 씨라는 걸 발견한 뒤에도 수호 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어.”“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모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나는 사모님을 대신해 해명했다.하정현은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유미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아무튼 알아요.”“그럼 내 친구 지은이는 그런 사람이고?”“그런 뜻 아니에요.”“정수호, 수호 씨는 항상 본인 입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더라. 그 사람을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지은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심지어는 수호 씨네 형수와 애교 씨도 제대로 알아본 적 없지? 두고 봐, 두려워할수록 그 일이 닥칠 테니까.”하정현의 애매모호한 말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아무것도 아니야. 할 말은 다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