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나도 세계적인 명탐정이 되는 게 꿈이에요.”나는 너무 웃어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러면서도 윤 사모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네, 꼭 성공할 거예요. 성공하길 바랄게요.”윤 사모님은 나를 꼬집었다.갑작스러운 고통에 나는 얼른 용서해 달라고 애원했다.그러자 윤 사모님이 다리를 꼰 채 얼굴이 어두워져서 말했다.“수호 씨랑 같이 일해보려고 했는데 그러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네요. 그만 가 봐요.”“네? 저랑 같이요? 왜요?”“잘생겼으니까요. 가끔 미색을 희생해서 목표에 접근해야 할 때가 있거든요.”“전에 마사지숍을 열겠다고 했잖아요? 왜 갑자기 탐정이 됐는데요?”“마사지숍은 뻥이죠. 이 업계에서 위장은 기본이라고요. 알겠어요?”윤 사모님은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았는지 말하는 태도가 거칠었다.방금 전 농담이 지나쳤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사과했다.“미안해요, 아까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우선 진정해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자세히 말해 봐요.”“부잣집 사모님이 호의호식하며 생활을 누릴 수도 있는데 사모님은 본인 사업이 있잖아요. 혼자 뭔가를 이루려는 생각도 있고, 그래서 대단한 것 같아요. 존경스러워요.”내 말이 꽤 효과 있는지 윤 사모님 얼굴에는 또다시 미소가 번졌다.“진작 그럴 것이지. 내 탐정 사무소 규모가 꽤 커요. 게다가 다 큰 건만 받아요. 일거리 하나당 보너스도 몇백만 원은 돼요”“잘만 하면 연말에 인센티브도 있고, 1년에 적어도 몇천만 원은 벌 수 있어요. 맹인 마사지숍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훨씬 좋아요. 어때요? 생각해 볼래요?”“이거 완전 사촌 동생 직원 스카우트하려고 물밑 작업하는 거잖아요. 두 분이 알면 어떡하려고요?”윤 사모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상관없어요. 두려울 것 없어요. 내가 수호 씨를 오랫동안 지켜봤는데, 우리 사무소에 마침 수호 씨처럼 젊고 잘생긴 데다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친구가 필요해요. 여러 번 테스트했는데 수호 씨 만한 사람 없어요.”그 말
“이래도 안 돼요? 잘생긴 수호 씨.”윤 사모님은 나에게 윙크를 보내며 현금다발을 들고 앞에서 흔들어댔다.나는 여자의 유혹은 참았지만, 돈 앞에서 끝내 무너졌다.그도 그럴 게, 윤 사모님이 손에는 정확히 현금다발이 들려 있었으니까.내가 매달 140에서 160만 원 정도 번다고 해도 대출과 집 살 돈을 적금 들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하지만 윤 사모님과 손잡으면 매달 돈 생겨날 구멍이 더 생기는 거다.그러니 참을 수가 있나?나는 망설임도 없이 통쾌하게 대답했다.“좋아요. 할게요.”윤 사모님은 곧바로 나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우선 사인해요. 그러면 보너스 줄게요.”‘이렇게 좋은 일이 있다고?’나는 역시나 또 망설임 없이 바로 사인했다.윤 사모님은 서둘러 계약서를 챙겼다. 다만 내 온 정신은 보너스에 있었다.윤 사모님은 통쾌하게 손에 든 돈을 나에게 건넸다.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손에 든 돈을 세어봤다. 그때 윤 사모님이 갑자기 말했다.“하하, 수호 씨 완전 속았네요. 그 돈은 수호 씨 1년 치 연봉이에요.”나는 어벙한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순간 손에 돈다발을 들었는데도 기쁘지 않았다.“부잣집 사모님이라는 분이 어떻게 사람을 속일 수 있어요?”“흥, 고작 알바생인 주제에 우리랑 비슷하게 받겠다고요? 꿈도 야무지네요. 마사지숍 그만두고 여기 일에만 전념하면 또 몰라.”‘역시 다 나를 속이는 수단이었어!’‘내가 아직 너무 어려서 된통 속았네.’나는 화가 나서 손에 든 돈을 던져버리고 싶었다.윤 사모님은 그런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눈웃음을 쳤다.“화나요? 돈 갖기 싫으면 돌려줘요. 천만 원이라, 스파 몇 번 받을 수 있겠네.”나는 그 말에 서둘러 돈을 챙겼다.천만 원은 나한테 정말큰 돈이다. 윤 사모님이 스파로 모두 써버리면 마음 아플 거다.“이제 볼 일 없죠? 없으면 저는 이만 갈 게요.”“있어요.”윤 사모님이 째려보는 바람에 나는 마지못해 다시 자리에 앉았다.“무슨 일인데요? 말해요.”“우리 일 내
나는 단번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채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차에 올랐다.그렇게 한참 동안 기다려도 서지예와 양동준은 나오지 않았다.참지 못한 나는 결국 서지예한테 문자했다.[어떻게 됐어요? 성공했어요?]서지예는 계속 답장이 없었다.그렇다고 재촉할 수도 없고, 그저 묵묵히 기다리기만 했다.그 뒤로 한참이 지나자 양동준의 모습이 보였다.나는 감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상대가 내 우상이니까.하지만 서지예와 함께 나오지 않은 걸 보니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나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 양동준한테 달려갔다. 나는 흥분된 마음을 도저히 숨기지 못했다.“스, 스승님.”양동준은 미간을 찡그린 채 나를 바라봤다.“누구더러 스승님이라는 거예요?”“양동준 씨요. 엄청 강하던데,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어요.”“난 제자 받는 거 안 좋아해요.”양동준의 싸늘한 거절에 나는 다급히 말했다.“서지예 씨한테서 못 들었어요?”“못 들었어요.”‘이 여자가! 뭐 하자는 거지? 내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나는 도와주지도 않는다고?”너무 실망이었다.그때 양동준이 떠나려고 했다.나는 어렵게 얻은 기회를 놓칠까 봐 얼른 뒤따랐다.“스승님, 어디 가시게요?”“스승님이라고 부르지 마요. 그리고 그 같잖은 아이디어 내준 게 정수호 씨죠?”분위기를 보니 이대로 순순히 인정할 수 없어 나는 거짓말했다.“서지예 씨가 동준 형님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아주 보고 싶어 죽겠다고 해서 아이디어 살짝 낸 것뿐이에요. 하지만 이런 곳에 온 건 제 아이디어가 아니라 서지예 씨 본인 아이디어예요.”“앞으로 그러지 마요.”양동준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가 또 떠나려고 하자 나는 또 그 뒤를 졸졸 따라붙었다.양동준이 뒤돌아 나를 바라봤다.“왜 따라와요?”“동준 형님, 저 정말 동준 형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고 싶어요. 제자로 받아줘요.”양동준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 한번 쓱 훑었다.“난 그쪽 가르쳐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가요.”“싫어요. 저 마음속으로 이미 동
“수호 씨, 왜 이제야 왔어요?”내가 도착하자마자 애교 누나가 걱정스레 물었다.나는 기운 없이 대답했다.“말도 마요. 서 쌤 도와주느라 지체됐어요. 누나, 저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어요.”말을 마친 나는 곧장 방으로 걸어갔다.“어, 잠깐만요.”“왜요?”내 어리둥절한 표정에 애교 누나가 말했다.“우선 자지 마요. 나랑 같이 남주 보러 가요.”“남주 누나는 왜요?”“가면서 말해줄게요.”애교 누나가 한숨을 푹 쉬는 바람에 왠지 불길한 기운이 들었다.그 순간 졸음도 싹 가셔 얼른 누나를 따라나섰다.애교 누나가 운전대를 잡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그러면서 가는 길에 누나는 남주 누나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알고 보니 남주 누나가 신고 당해 정직당하고 조사받는 중이었다.“남주 누나 남편은 알아요?”나는 걱정스레 물었다.그러자 애교 누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정훈 씨는 아직 몰라요. 하지만 둘 다 공무원이라 조만간 알게 될 거예요.”그렇다면 상황은 최악이다.남편이 만약 그 사실을 알면 분명 이혼하려 들 테니까.남주 누나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일로 남편과 이혼하게 되면 어쩌지?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지만 마음은 무거웠다.약 30분 정도 지나자 남주 누나가 사는 동네에 도착했다.남주 누나 집에 도착해 보니 누나 외에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다.애교 누나 말을 들어보니 감사원 쪽 사람이 남주 누나를 감독하러 온 것일 수 있다고 했다.상대의 신분을 들으니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하지만 남주 누나는 옆에 사람이 있건 말건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있었다.나와 애교 누나는 남주 누나 맞은편에 앉았다.“남주 누나, 지금 어때요?”남주 누나는 먹으면서 대답했다.“어떻긴. 정직당했지. 감시자를 붙인 거 안 보여?”“그럼 뭐라도 알아냈대요?”“내가 뭐 횡령한 것도 아니고, 부패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뭘 알아내겠어?”남주 누나는 일부러 상대가 듣도록 말한 거였다.“그럼...”
남주 누나는 팔짱을 낀 채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그래요. 누가 말린대요? 하지만 정직은 없던 거로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까.”여자는 남주 누나의 말에 전화를 하지 못했다.그러자 남주 누나는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 앉아 계속 식사했다.나와 애교 누나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남주 누나의 박력에 내심 감탄했다.만약 내가 정직당하고 조사를 받게 되면 진작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 했을 거다.순간 나이와 경험도 한 사람의 실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남주 누나는 그만큼 실력 있고, 나는 없다.얼마 뒤, 여자는 전화를 받더니 안색이 어두워진 채 씩씩기러며 떠나갔다.애교 누나는 놀란 표정을 하며 물었다.“그냥 이렇게 간다고? 그럼 문제도 해결된 거야?”남주 누나는 아무렇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상관없어. 마음대로 하라고 해. 그런 것까지 신경 쓰기 싫어.”애교 누나는 충격을 받은 것처럼 말했다.“너도 참, 이 상황에 밥이 넘어가?”“아니면? 울면서 용서해달라고 빌까? 애교야, 이럴 때일수록 무서운 티 내면 안 돼. 별문제 될 것도 없고, 횡령도, 부패도 안 했고 그저 사생활이 조금 문제되는 건데 뭐! 까짓거 승진 안 하면 되지. 하지만 이 일로 나를 파면하는 건 어려울 거야.”“그동안 내가 강북을 위해 한 일이 많다는 건 다들 지켜봐서 알 거야. 그런데 나를 파면하면 강북구에는 손해야. 위에서 나를 처리하고 싶어도, 시장님의 동의부터 구해야 할 걸.”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웠다.나는 여자를 이토록 존경한 적이 없다.충분히 놀랄 상황에도 태연하게 마치 태산처럼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참으로 대단했다.그때 애교 누나가 말했다.“공무직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난 몰라. 너만 떳떳하면 돼. 그런데 정훈 씨는 어떡해? 너한테 이런 일이 생겼으니 분명 소식 들을 텐데, 어떻게 설명하려고?”고정훈 얘기에 남주 누나의 미간이 구겨졌다.“정훈 씨 얘기는 하지 말지. 조사받는 건 하나도 두렵지 않은데, 우리 남편한테 어떻게
애교 누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를 수 있으니까 자기 생각으로 친구를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그리고 이런 건 편협한 도덕의 잣대로 판단할 수 없다.누가 맞고 누가 틀린 지 어떻게 알겠나?애교 누나는 남주 누나 손을 잡으며 말했다.“너 절로 해결할 수 있으면 됐어. 올 때 엄청 걱정했는데, 네 상태 보니까 시름 놓이네.”남주 누나는 생긋 웃었다.“하늘이 무너져도 나보다 키 더 큰 놈이 대신 받쳐주겠는데 걱정할 거 뭐 있어? 파면당하면 당했지. 이혼하면 했지, 쫄 거 없어. 나만 여전하면 돼.”남주 누나의 마음가짐은 본받을 만하다.우리가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도어락 소리가 들리더니 남주 누나의 남편과 아들이 돌아왔다.보아하니 고정훈은 아직 그 일을 모르는 듯했다.“여보, 나 왔어. 아들 데리고 하루 종일 밖에서 돌아다니라고 해서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얘가 좀 개구져야 말이지. 누구를 닮았는지.”“어? 애교 씨 왔네요? 이분은... 정수호 씨 맞죠? 이름 잘못 부른 거 아니죠? 어! 팔은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나는 웃으면서 일어났다.“별거 아니에요. 자전거 타다가 넘어졌어요.”“두 분이 올 줄 알았으면 장 더 많이 보는 건데. 그래도 괜찮아요, 냉장고에 야채는 많으니까 내가 요리 해줄게요.”애교 누나는 다급히 말했다.“아니에요. 우리 먹고 왔어요. 남주 안 본 지 한참 돼서 보러 온 거예요. 가족끼리 오붓하게 얘기해요, 우리는 이만 가볼게요.”애교 누나는 나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나는 나가면서 감탄했다.“남주 누나는 정말 보통 여자들과 다르네요.”애교 누나도 감탄했다.“그걸 말이라고, 어릴 때부터 남달랐어요. 놀기를 좋아하고. 나중에 크면 변하겠지 했는데, 웬걸? 하나도 안 변했어요.”“저는 남주 누나처럼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요.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사는 인생, 솔직히 부러워요.”나는 실수로 속마음을 털어 놓았다.애교 누나는 곧바로 나를 째려봤다.“
남주 누나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는 말했다.“이혼하자면 맨몸으로 나갈게. 양육권도 당신이 가져. 당신 정말 좋은 사람이야. 아들도 당신과 함께 지내면 좋은 교육 받을 거야.”“나는 좋은 엄마 아니야. 좋은 아내도 아니고. 내가 아들 망치게 하지 마.”고정훈은 끝내 눈시울이 붉어졌다.“딴 놈의 유혹을 그렇게 못 뿌리치겠어? 나 하나로는 만족 못 하겠어?”“당신은 좋은 사람이야. 다정하고 젠틀해. 속궁합도 잘 맞고, 나와 내 친정에도 잘해줘.”“그런데 왜 그랬어?”고정훈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남주 누나는 또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켰다.“내가 나쁜 여자라 그래. 천성이 노는 걸 좋아해서 사실 결혼하지 말았어야 했어.”고정훈은 마음이 아팠다. 아내는 그가 너무 정직하다고 재미없다고 탓하지 않고 모든 잘못을 자기한테로 돌렸다. 그 때문에 순간 해야 할 말을 잃었다.“난 이혼하기 싫어. 이혼은 생각도 안 해 봤어.”고정훈이 자기 생각을 말했다.하지만 남주 누나는 이혼을 고집했다.“나 안 변해. 모든 걸 알고도 나랑 예전처럼 지낼 수 있어? 우리는 점점 간극이 생길 거고, 자주 싸울 거고 모순은 날로 커져만 갈 거야. 난 그런 날이 오는 게 싫어. 아름다울 때 끝내는 게 좋잖아?”고정훈의 눈시울은 붉었다.“그런데 난 당신 사랑해. 헤어지기 싫어.”남주 누나는 고개를 돌린 채 상대의 눈을 피했다.그동안 부부로 지냈는데, 아무 감정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남주 누나도 사실 고정훈과 헤어지기 아쉬웠다. 하지만 본인이 앞으로 얌전히 지낼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누나는 본인한테 자신이 없었다.고정훈은 남주 누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우리 다시 시작하자. 당신도 노력하고, 나도 노력하면 돼. 행복한 가정 유지하는 거 어렵잖아. 이대로 무너지는 거 싫어.”“그런데 내가 한 일 정말 신경 안 쓸 수 있어?”고정훈은 도리질했다.“난 알아. 당신은 그저 놀기 좋아하는 거지, 그 남자들을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재미 좀 본 거라고 생각하고
“수호 씨, 정말 뛰어갈 거예요? 몸도 아직...”애교 누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누나, 저 결심했어요. 이제부터 바뀔 거예요.”“그럼 나도 같이 뛰어요. 수호 씨 혼자 두고 가는 건 마음 놓이지 않아요.”“아니에요. 운전해서 돌아가요. 전 혼자서도 괜찮아요.”애교 누나는 내 고집을 꺽지 못해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그 길로 뛰기 시작했다.사실 뛴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조깅에 지나지 않았으니까.몸이 아직 낫지 않아 도저히 달릴 수가 없었다.나는 밤거리를 걸으며 바람을 쐬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이네.’임천호는 절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거고, 정태곤도 또 나타날 건데.그렇다고 양동준 형님더러 계속 지켜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나는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하지만 강해지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얼음이 삼척 깊이까지 얼려면 하루 이틀 춥다고 되는 게 아닌 것처럼, 양동준 형님처럼 강해지는 건 절대 며칠 만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마사지숍으로 출근하는 것 외에 매일 시간 내서 운동해야겠네.’우선 체력부터 끌어올려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그리고 나는 싸우는 기술도 배우고 싶었다.설령 상대를 이기지 못하더라도 도망칠 기회를 만들 정도는 되고 싶었다. 아니면 또 용천 호텔에서처럼 상대한테 꼼짝도 못 할 테니까.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취객 여러 명이 싸우고 있었다.4명이서 한 사람을 때리고 있었는데, 그걸 본 순간 가운데서 맞고 있는 사람이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맞고 있는 사람이 반항하는 건 의외였다.그리고 비법을 하나 발견했는데, 상대의 사타구니를 발로 차는 거였다.그 방법은 백발백중이었다.사타구니를 걷어차인 사람은 순간 전투력을 잃게 된다.나는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처럼 그 기술을 기억했다. 나한테는 그게 참 유용한 기술 같았으니까.특히 여러 명한테 맞고 있거나 상대가 나보다 강할 때, 위기에서 빨리 벗어날 수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