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사는 나를 휙 째려봤다.“싸움 구경이 뭐 재밌다고 그걸 봐요? 차라리 날 봐요.”“예전 같았으면 의사 쌤이 싸움 구경보다 재밌다고 생각했을 텐데, 방금 전 일을 겪고 나니 싸움 구경이 여자보다 더 재밌어요.”의사는 화가 난 듯 팔짱을 낀 채 나를 째려봤다.“지금 내가 저 두 남자보다 못하다는 거예요?”“그 뜻이 아니라, 싸움을 배우고 싶다는 뜻이었어요. 그래야 강해지죠. 내가 저 정태곤이라는 놈한테 맞아 이 지경이 됐잖아요. 게다가 이대로 포기할 놈이 아닐 테니 강해져야죠.”여의사는 고개를 돌려 뒤를 흘긋 보더니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했다.“그거라면 간단하네요. 나중에 내가 양동준한테 말해줄게요. 제자로 받아주라고.”“혹시 양동준 형님과 아는 사이에요?”나는 너무 흥분돼서 여의사의 팔을 덥석 잡았다.그러자 의사는 싱긋 웃었다.“어디 알다 뿐이겠어요? 아주 잘 나는 사이죠.”‘뭐야? 설마 사귀는 사이라는 건가? 그러면 너무 잘됐네.”“그럼 부탁드릴게요. 나 정말 양동준 씨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거든요.”“도와줄 수는 있어요. 그 대신 그쪽도 나 도와줘요.”“뭘요?”의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사람이 모여 있는 걸 확인인하고는 낮게 속삭였다.“나중에 말해줄게요. 이 팔 부러져서 다시 이어줘야 해요. 그리고 갈비뼈도 검사해 봐야 해요.”의사는 일련의 검사를 마친 뒤 윤지은에게 말했다.“아가씨, 정수호 씨 상처가 심각해서 저한테 데려가서 치료해야 할 것 같아요.”“그럼 얼른 데려가. 여긴 나한테 맡기면 되니까.”형수와 애교 누나가 먼저 달려와 나를 부축하더니 아예 나를 들어갈 것처럼 굴었다.나는 얼른 두 사람을 말렸다.“저 팔을 다쳤지 다리는 멀쩡해서 혼자 걸을 수 있어요.”“걷긴 뭘 걸어요? 누워 있어요.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수호 씨를 못 들까 봐요?”형수는 강제로 나를 눕혔다.이 상황에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내가 하반신 마비가 된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하지만 나는 별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어도 쓸모 없어진 게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이건 우리 아가씨 행복과 직결된 거라 검사해야 해요.”‘왜 이 여자가 나를 시험하는 것 같지?’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난 그쪽 아가씨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 결백해요.”“하,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그런데 우리 아가씨가 왜 나한테서 자꾸만 피임약을 사 가요?”‘?’나는 순간 넋을 잃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이거 놔요. 그냥 검사하는 거니까.”의사는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보기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지만 꽤 아팠다.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츠렸다.그 틈에 의사가 잽싸게 내 바지를 풀어 헤치더니 발가벗겼다.나는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 순간 마치 도마 위에 올라간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윤지은도 나를 놀리기 좋아하더니, 이 의사도 똑같네.’‘내가 전생에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의사가 내 그곳을 몇 번 문지르자, 나는 바로 반응했다.그때 여의사의 말이 들려왔다.“뭐, 기능은 아직 살아 있네요.”나는 바지를 입으며 울상이 되어 말했다.“당신 아가씨가 이러라고 시켰어요?”“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제대로 말해요.”의사는 내 팔을 붕대로 감으며 말했다.“내가 남자 거기를 본 적이 없어 보고 싶었어요.”“그러니까 당신 아가씨를 도와 나를 검사하는 게 아니라, 놀린 거라, 이 말이에요?”나는 그제야 내가 속았다는 걸 인지했다.여의사는 싱긋 미소 지었다.“한번 놀려봤는데 바로 속을 줄은 몰랐어요.”의사는 말하면서 고개를 저으며 짧게 탄식했다.마치 내가 한심하고 바보 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여자한테 한심하고 바보 같다고 무시했다는 사실이 나한테는 너무 큰 상처였다.하지만 난들 어쩌겠는가? 그저 침대에 누워 끊임없이 반성할 뿐이었다.그러면서 속으로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됐어요. 팔은 이미 치료 끝났어요. 갈비뼈는 며칠
상대가 협조하지 않으니 나도 별수 없이 뒤돌아 떠났다.내가 의무실을 나오자 형수와 누나들이 바로 내 주위를 감싸며 괜찮은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괜찮아요,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내 생각은 온통 윤지은 쪽한테 쏠렸다. 양동준과 그놈이 싸운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하지만 누나들이 나를 에워싸고 조잘대는 바람에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처음으로 미녀들한테 둘러싸인 것도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누나들, 저 정말 괜찮아요. 저 지금 싸움이 어떻게게 됐나 보러 가고 싶어요.”백연우는 웃으며 말했다.“갈 필요 없어. 정태곤이 도망쳤대.”“정말요? 너무 잘 됐어요!”내가 기쁜 건 정태곤이 도망쳤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양동준이 정태곤을 이겼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양동준의 실력이 정태곤 위라는 뜻이니까.‘역시 내가 사람 제대로 봤어. 너무 강하잖아. 내 우상다워.’나는 다급히 백연우를 보며 물었다.“그럼 지은 씨와 양동준 형님은 지금 어디 있어요?”“지은은 경호팀에 갔어. 아마도 경호원들 혼내러 갔을 거야 양동준은 모르겠는데.”나는 윤지은을 찾으러 경호팀에 가려고 했다.하지만 내가 떠나려 하자 누나들이 바로 나를 막아섰다.“수호 씨, 어디 가요?”내가 내 생각을 말하자 하정현이 양 팔을 벌리며 나를 막았다.“안 돼요, 못 가요. 지은이 가기 전에 나더러 수호 씨 잘 돌보라고 했어요.”“아니, 저 지은 씨한테 볼일 있어요. 갔다 올 거예요.”나는 애써 설명했지만. 누나들은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나를 끌고 방으로 돌아갔다. 휴식해야 한다면서.정말 휴식하기 싫은데 누나들의 고집을 못 이겨, 나는 결국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사람이 한가하면 폰을 보고 싶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폰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는 인스타를 확인했다.그리고 놀랍게도 인스타에 60 몇 개의 소식이 떠 있었다.‘뭐지?’나는 얼른 클릭해서 확인했다.그리고 그제야 어젯밤 인스타 게시물을 올렸던 게 생각났다.내가 어제
민우는 카톡으로도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맨 먼저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물었다가 내가 답장하지 않자 지금 뭐 하는지 물었다.나는 바로 답장했다.[미안, 너무 바빠서 이제야 네 문자 보네. 넌 요즘 어떤데, 뭐 하고 지내?]민우의 답장은 매우 빨랐다.[나 요즘 강북에 있는데 할 일 없어. 어제 네가 올린 사진 용천 호텔이지?]이런 우연이, 민우도 강북에 있다니.나는 빠르게 답장했다.[응, 너 강북에 있어? 우리 시간 날 때 만나서 밥이라도 먹자.][좋아. 오늘 저녁 어때?][오늘 저녁은 안 돼. 나중에 시간 될 때 연락할게.][오케이. 그럼 연락 기다릴게.]민우와 대화를 하다 보니 약간 졸려 한숨 자고 싶었다.그때 내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확인해 보니 여전히 신민우 문자였다.[수호야. 지금 이런 말 할 때 아니라는 거 알지만, 할 말 있어. 나 임설아랑 헤어지고 싶은데, 걔가 죽어도 싫대. 네가 나 대신 걔 좀 설득해 줄 수 있어?]임설아는 신민우의 여자 친구다. 두 사람은 대학 때부터 만났는데 늘 사이가 좋았다. 우리 침실 애들이 모두 두 사람을 부러워했으니까.나는 문뜩 궁금했다.[무슨 일인데? 너희 둘 사이 좋았잖아. 왜 갑자기 헤어지려는 건데?]민우가 답했다.[사이는 좋지. 그런데 걔네 부모님이 반대하셔. 내가 설아 계속 만나면 경차에 신고하겠대.]‘이렇게 심하다고?’[임설아는 그 사실 알아?][알아. 괜찮대. 나랑 같이 사는 건 자기지 자기 아버지가 아니라면서 부모가 반대해도 나랑 같이 있겠대.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나 지금 아무것도 없고, 생활하는 것도 문제인데, 걔한테 미래를 약속할 수 없어.]나는 탄식했다.[하, 너희한테 소설에서만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너 진짜 임설아 포기할 수 있어?][포기 못 하면 또 어쩌게? 너무 차이가 많은 사람은 미래가 없어.]비록 민우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몰랐지만, 그의 말에서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일자리도 없어 사는 것도 문제이니 임
나는 임설아와 친하지 않다. 고작 식사 몇 번 해본 게 전부다.그런데 그런 사람을 설득하려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나는 우선 임설아에게 내 소개를 보냈다.[임설아, 오랜만이야. 나 정수호야. 민우 대학 동기. 민우한테서 너희 얘기 들었어. 내가 다 안타깝더라. 하지만 너와 민우의 앞날을 위해 잠깐 헤어져 있는 것도 괜찮다고 봐.]문자를 보낸 지 얼마되지 않아 임설아한테서 답장이 왔다.[민우랑 연락 닿아? 내가 보낸 문자에는 답도 없던데, 너와는 연락했어? 신민우 정말 나 안 사랑하는 거 아니야?]나는 얼른 대답했다.[아니야.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을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임설아는 나한테 우는 이모티콘을 여러 개 보냈다.[내가 볼 때 신민우 나한테 사랑이 식었어. 나를 아직도 사랑하면 어떻게 내가 허튼 생각하게 혼자 둘 수 있어? 내가 슬퍼하는 걸 어떻게 두고만 볼 수 있어? 흑흑, 차라리 죽는 게 나아.]임설아의 대답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컹했다.‘죽겠다니?’나는 얼른 임설아와의 대화 내용을 캡처해서 민우한테 보냈다.[임설아 상태 이상해. 얼른 답장해.]하지만 민우의 답장은 놀라웠다.[안돼. 난 답장할 수 없어. 희망을 줄 수 없어.]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걔가 정말 죽을까 봐 두렵지 않아?][안 그럴 거야. 설아 부모님이 집에서 지키고 있거든. 수호야, 나도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참지 못할까 봐 겁나. 우리 관계 완전히 끊어내려면 내가 마음 독하게 먹어야 해. 나 정말 네 도움이 필요해. 설아도 그렇고.]‘젠장,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데?’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민우가 또 문자를 보내왔다.[수호야, 사실 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설아가 맨 처음 좋아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왜 몰랐지?’민우는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다.[설아가 나를 통해 너한테 마음을 전달하려 했지만, 그러다 보니 우리가 가까워진 거고, 결국 우리가 만나
임설아의 자세는 매우 섹시하고 뭔가를 암시하고 있는 듯했다.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코피를 뿜을 뻔했다.겉보기에 얌전한 임설아가 사적으로는 이렇게 개방적이라니.‘이러다 내가 죄지을 것 같은데?’나는 어찌 된 일인지 두 손을 벌벌 떨며 참지 못하고 그 사진을 저장했다.그러고 나서 임설아에게 답장했다.[너 뭐 하는 거야? 민우가 알면 오해해. 얼른 사진 지워.]임설아는 사진을 지우기는커녕 나한테 또 사진 한 장을 보냈다.이번 사진은 더 색스러웠다.임설아는 스튜어디스룩에 검은 스타킹을 신은 채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치마 속 광경은 보일락 말락 해서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표정은 학교 선생 같은 표정이라 보기만 해도 자빠뜨리고 싶었다.나는 손을 더 심하게 떨면서 이번 사진도 저장했다.그때 임설아가 문자를 보내왔다에[마음에 들어?]나는 마음애도 없는 대답을 했다.[너 안 좋아하니까 사진 지워.][흥, 안 좋아하기는. 너 아니 척하는 거지?][임설아, 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무리 실연했어도, 이렇게 막살면 안 되지.][민우한테 버려져서 안 그래도 사는 게 재미없어. 차라리 이대로 콱 죽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이대로 죽기는 또 너무 아깝거든. 신민우랑 3년을 사귀었는데,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 게 말이 돼? 걔가 남자 맞는지 의심된다니까.]나는 민우 대신 해명했다.[민우 걔는 너 진심으로 사랑해. 너한테 미래를 약속하지 못할 것 같으니 건드리지 않는 거야. 너 책임 못 질까 봐.][누가 책임지라고 했어? 남녀가 같이 있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은 것뿐인데. 왜 그 소원도 안 들어주는데?][내가 사진으로 보낸 옷을 입고 민우를 꼬셨는데도 나한테 걔가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걔 정말 문제 있는 거 아니야?]이렇게 입은 여친을 두고 건드리지 않았다니? 정말 성인이 따로 없다.나도 남자니까 이해할 수 없었다.나는 임설아에게 물었다.[민우한테 문제 있다고 생각하면서, 왜 개
[나 안 아파. 괜찮거든. 나 올해 스물셋이야. 주위에 다른 여자애들은 다 남자 친구가 있어. 나도 그저 남자한테 사랑받고 싶은 것뿐인데, 뭐가 잘못됐어? 그리고 이 나이에 한 번 그런 기분 느껴보고 싶은 게 잘못이야?]임설아가 보낸 문자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긴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떨림이 있는 음성에 약간의 인내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정수호, 나 지금 참기 힘들어. 민우가 나 도와주지 않으니까 네가 도와줄래?]참고 있는 듯한 임설아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는 피가 솟구쳤다.심지어 임설아가 나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상상까지 됐다.문제는 임설아의 목소리가 너무 섹시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임설아가 보낸 사진 두 장이 떠오르면서 상상이 펼쳐졌다.하지만 나는 이성을 잃지 않고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임설아, 너 이러면 안 돼. 그거 중독돼. 병원 가 봐.”그 뒤로 임설아는 동문서답하며 하고 싶다는 감정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었다.하고 싶지만 참는 듯한 임설아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마음이 요동치면서 하고 싶어졌다.임설아는 나에게 연속해서 열 몇 개의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도 모두 야릇한 소리를.나는 누군가 갑자기 들어왔다가 그걸 들을까 봐 다급히 볼륨을 낮췄다.임설아가 괴로워한다는 걸 알기에 나는 더 이상 답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그 음성을 하나하나 들었다.그러다가 오르가슴에 도달할 때 임설아의 소리는 한껏 높아졌다.마치 오랫동안 참다가 끝내 욕망을 방출한 것처럼.살짝 놀라웠다.여자가 성욕을 풀 때도 이토록 에너지가 넘칠 줄은 몰랐다.성욕을 푼 임설아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미안, 네 앞에서 못 볼 꼴 보였네.]임설아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나도 문자로 답장했다.[괜찮아, 네가 편해졌다면 된 거지. 정말 괜찮아? 너 방금 소리가 이상했는데?][뭐가 이상해?][엄청 쌓였던 것 같아. 그래서 그런지 그 순간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스스로
“사모님, 이제 저 필요 없어요?”사모님 말에 나는 초조하고 서운했다. 갑자기 필요가 없어진 느낌이었다.그때 사모님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설명했다.“지금 그 꼴로 어떻게 운전하려고 그래요?”“지은더러 기사 새로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수호 씨가 필요 없어진 게 아니에요.”“그러니까 아직도 저 필요한 거 맞죠?”나는 초조하게 물었다.사모님은 내 말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무슨 말이에요? 나 수호 씨 사장 사모님이에요.”나는 다급히 해명했다.“아니, 제 뜻은 저를 데리고 돌아가는 거 맞죠? 여기 혼자 버리는 거 아니죠?”“당연하죠. 내가 수호 씨 데리고 나왔는데, 버리고 갈 리 있겠어요? 그런데 수호 씨가 다쳐서 차 새로 알아봐서 따로 데려다주고 싶어요.”“싫어요. 저는 사모님과 같이 있을래요.”나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그 말에 사모님의 눈빛이 약간 어색해졌다.사모님이 내 말을 오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나도 덩달아 어색해졌다.‘어떻게 사모님한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나는 다시 해명했다.“사모님, 저, 저는 그저 사모님을 지켜주고 싶은 거지, 별 뜻 없어요.”“알아요.”사모님은 볼이 발그레해서 내 눈도 보지 못했다.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문에 분위기는 일순 어색해졌다.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사모님, 저 목마른데, 물 가져다줄 수 있어요?”사모님은 얼른 일어나 나에게 생수 한 병을 건넸다. 그러고는 뚜껑을 열어 먹여주기까지 했다.나는 사실 한쪽 팔을 다쳤지만, 다른 한쪽은 움직일 수 있었다.하지만 사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려고 폐인처럼 행동했다.사모님이 가까운 거리에 앉아 향수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게다가 살짝 붉은색을 띤 희고 고운 피부가 눈앞에 보였다.나는 참지 못하고 사모님을 훔쳐보다가 하필이면 딱 시선이 마주쳤다.“왜, 왜 그렇게 봐요?”사모님은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나는 내 마음을 들킬까 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오히려 눈을 딱
“엄마, 괜찮아요?”윤지은은 엄마의 이상한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보통 엄마라면 자기 딸이 우수한 짝을 찾기를 원하지 않나? 왜 엄마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지?’‘게다가 딸이 아무것도 아닌 남자랑 잤다는데 왜 화를 내지 않지?’“괜찮지 그럼. 우리 윤씨 가문은 정략결혼으로 사업을 유지할 필요도 없고 돈 많은 사돈에게 빌붙을 필요도 없어. 난 전에 네 심리에 문제가 있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문제없다니 오히려 다행이지. 앞으로 외로우면 만나고 싶은 남자 마음대로 만나. 넌 윤씨 가문 딸이잖아. 뭐든 너 하고 싶은 대로 해.”윤지은의 얼굴은 또 빨갛게 달아올랐다.윤지은은 사실 욕구불만인 사람은 아니다. 다만 전에는 정말 힘든 데다 여준휘한테 복수하려는 마음에 아무나 만나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거였다.“필요 없어요. 요즘 병원 일이 바빠서 쓸데없는 생각할 시간 없어요.”“누굴 속여? 너희 병원 요즘 안 바쁘잖아. 나 고 교수한테 다 물어봤어. 네가 요즘 할 일이 없다면서 휴가 줄 생각도 하던데. 차라리 이참에 수호 씨랑 여행이나 다녀와.”윤지은은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버럭 소리 질렀다.“싫어요. 가더라도 혼자 다녀올 거예요.”“혼자 가는 게 얼마나 위험해? 낯선 환경과 낯선 도시에 가면 외로울 때 누가 같이 있어 줘?”“엄마. 말끝마다 남자 얘기하지 마요. 전 독립적인 여성이에요. 남자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요.”“우리 딸이 얼마나 독립적인지는 나도 잘 알지. 그럼 그냥 친구랑 같이 논다고 생각해. 두 사람이 가는 게 혼자보다는 낫잖아. 남자도 사실 애완동물처럼 곁에 두면 꽤 즐거워.”그 말에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역시 부자들한테는 뭐든 애완동물로 보이는구나.’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윤지은 씨, 윤 사모님, 이제 설명 끝났으니 전 이만 가볼게요.”나는 기분이 언짢아 일부러 호칭으로 두 사람과 거리를 두었다.그러자 이영미가 다급히 내 팔을 잡았다.“가긴 어딜 가?
그때, 슬리퍼 한쪽이 날아와 내 뒤통수를 가격했다. 그 힘이 어찌나 센지 나는 그대로 소파 위에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윤지은은 그 틈에 덮쳐와 가위로 내 옷을 마구 잘랐다. 그 모습에 나는 오금이 저려 났다.가위가 조금만 더 아래로 향하면 나는 정말 고자가 됐을지도 모른다.나는 다급히 윤지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너무한 거 아니에요? 정말 저를 고자로 만들 작정이에요? 내 거로 얼마나 기분 좋았던지 잊었어요? 정말 잘라버리면 앞으로 누가 지은 씨 기분 좋게 해줘요?”윤지은은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쏘아봤다.“그건 너 없이 나 혼자서도 해결해. 그런데 감히 우리 엄마를 노려? 그러면 죽어야지.”“전 지은 씨 어머님 노린 적 없어요. 정말 마사지해 드린 것뿐이에요.”“노린 적 없다고? 그런데 아까 더 세게 하라느니 거친 게 좋다느니 한 말은 뭔데?”“제가 너무 살살 누른다고 더 세게 누르라는 거였어요.”“헛소리하지 마. 누가 그 말을 믿을 줄 알고. 내가 들어왔을 때 네놈이 우리 엄마랑 같이 방에 들어가는 거 똑똑히 봤는데. 말해. 우리 엄마한테 나쁜 짓 하려고 했지?”“제가 여색을 밝히는 건 맞지만 짐승은 아니에요. 전에 지은 씨랑 그랬는데 어떻게 지은 씨 어머니를 노리겠어요? 내가 변태도 아니고.”윤지은이 뭐라 하기 전에 이영미가 초조한 모습으로 달려 나왔다.“지은아, 너희 둘... 정말 했어?”윤지은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목까지 빨개졌다.“엄마, 말 좀 예쁘게 하면 안 돼요?”이영미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용천 호텔에서부터 두 사람 심상치 않다 생각했는데,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어. 우리 예쁜 딸. 네가 남자랑 사랑도 나누어 봤다니 엄마는 너무 기뻐. 난 네가 불감증인 줄 알았잖아. 어때? 해보니까 기분 좋지? 한 번 하니 또 하고 싶고 계속하고 싶지?”윤지은의 얼굴은 점점 달아올라 빨갛게 익어 버렸다.“엄마. 좀 점잖게 행동해요.”“에이, 엄마도 다 겪었는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나랑 수호 씨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절대 못 그래요. 제가 그렇게 물으면 지은 씨는 분명 저를 잡아먹으려고 할 거예요.”나는 바로 거절했다.그러자 이영미는 한숨을 푹 쉬었다.“우리 딸이 정말 불감증은 아니겠지? 평생 결혼도 안 하고 남자도 안 만나려는 건가? 남자랑 한 번도 해보지 못한다는 건 너무 불쌍한데.”“크흠...”서슴없이 말하는 이영미의 모습에 나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수호 씨, 힘 좀 써봐.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이 정도면 돼요?”“아니. 더 힘써 봐. 난 심플하고 거친 걸 좋아하거든.”“이렇게요?”“아, 좋아...”한편, 집 문 앞에 도착해 문을 열려던 윤지은은 안에서 어머니와 누군가의 이상한 대화가 들려 다급히 문에 귀를 바짝 댔다. 그리고 바로 우리의 대화를 들어 버렸다.그 순간 나와 제 어머니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다고 착각한 윤지은은 얼굴이 잿빛이 되어 문을 확 열어젖히고 노기등등해서 들어왔다.“정수호, 이 개자식. 감히 우리 엄마를...”하지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참 공교롭게도 윤지은이 들어오기 바로 전 이영미는 소파가 불편하다며 침대에 누워 마사지를 받겠다고 했다.결국 나는 마지못해 이영미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그 때문에 나와 이영미가 한 방에 같이 있는 장면을 윤지은에게 들키고 말았다.단단히 화가 난 윤지은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손에 잡히는 대로 가위를 집어 들었다.“정수호, 이 개자식. 감히 우리 엄마를 넘봐? 내가 너 다시는 남자구실 못 하게 만들 거야.”나는 침실에 들어오기 전에 사실 도어락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이영미가 얼른 마사지해달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바로 그걸 무시해 버렸다.고개를 돌렸을 때 이영미는 어느새 침대에 누워 있었다. 게다가 슬립이 너무 짧아 예쁜 다리가 훤히 드러났다. 이런 상태에서 마사지해 주는 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한참 동안 망설이고 있을 때, 이영미가 말했다.“안 될 거 뭐 있어? 집에 사람도 없는데. 무엇보다 당사자인 내가 괜찮다잖아. 얼른 눌
“이렇게요. 손가락을 구부리지 말고 쫙 펴야 해요.”나는 최선을 다해 시범을 보여주었다.그때 이영미가 갑자기 내 바지춤을 잡으며 말했다.“옷이 너무 커서 시선이 막히잖아. 옷 벗어 봐. 그래야 잘 보이지.”“어머님, 그건 안 돼요...”“그럼 옷을 들어 올리던가. 이렇게 하면 잘 안 보여.”나는 어쩔 수 없이 티셔츠 밑단을 위로 들고 다시 시범을 보여주었다.“보세요. 이렇게 손가락을 놓으면 검지와 중지 사이에 간격이 조금 생기는데 그 위치가 바로 우리가 찾으려는 혈자리예요.”“똑바로 앉아 봐. 잘 안 보여.”이영미는 또다시 나를 마구 잡아당겼다. 이러다가 바지가 벗겨질 것 같아 나는 다급히 일어나 벌렁거리는 심장을 다독이며 그녀와 거리를 유지했다. “어머님, 전 이미 충분히 보여줬으니 직접 찾아보세요.”“이렇게? 이것 봐, 내 손가락이 말을 안 듣는다니까.”이영미는 동안에 귀염 상이지만 손은 어찌나 둔한지 계속 틀렸다.결국 보다 못한 나는 직접 가르쳐주었다. 다만 자세만 잡아주고 혈자리를 찾는 건 역시나 이영미 스스로 찾게 했다.“혈자리를 찾았다면 가볍게 눌러 봐요. 시큰거리는지 확인해 봐요.”그 과정에 나는 이영미를 보지 않으려고 계속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있었다. 내 말에 이영미는 혈자리를 살짝 눌렀다.“아. 진짜 시큰거리는 것 같네. 앞으로 여기를 누르면 해소된다는 거지?”“네.”나는 그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로 돌아가 다시 이영미의 맥을 짚었다.이영미는 낮은 소리로 진작 물었던 걸 그랬다며 혼잣말했다. 이영미의 모습을 보니 연기 같지는 않았다. 아까 계속 내 바지를 내리려 해서 하마터면 이영미가 나한테 뭐라도 할 줄 알고 진땀을 뺐는데, 보아하니 내가 너무 예민했던 모양이었다.맥을 한참 짚어본 뒤 나는 상황을 말했다.“보아하니 편두통이 있으신 것 같아요. 손으로 마사지하면 두통이 사라질 거예요.”나는 이영미더러 소파에 기대앉게 하고 나는 소파 뒤에 선 채 머리를 마사지해 줬다.그때 이영미가 갑자
이영미는 개량한복 스타일의 슬립을 입고 있었는데, 고급스러운 연핑크색에 우아한 얼굴이 어우러져 섹시하면서도 단정한 분위기를 연출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남자인 내가 이대로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격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나는 좋은 마음에 귀띔했다.“어머님, 외투라도 좀 걸치는 게 어때요?”“한여름에 외투는 무슨. 더워죽겠는데. 난 집에서 항상 이렇게 입어. 수호 씨도 익숙해지면 돼. 얼른 들어와.”이영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상대도 괜찮다는데 내가 오히려 부끄러워하면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일 터라, 나는 결국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훑었다.“혹시 혼자 계세요? 하정현 씨는요?”“내가 여기서 지내는 동안 정현이는 못 봤어. 지은이 말로는 B시에 가슴 보러 갔대.”집에 정말 이영미 혼자뿐이라는 걸 알게 된 나는 얼른 치료하고 빨리 떠날 생각뿐이었다. 시간을 끌다 윤지은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나는 입이 열 개라도 설명할 수 없었을 테니까.“어머님, 혹시 어디가 불편하세요? 제가 봐 드릴게요.”나는 빨리 끝나려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러자 이영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여기. 자꾸만 답답하고 피가 안 통하는 것 같아.”“우선 앉으세요. 제가 봐 드릴게요.”이영미는 순순히 소파에 앉았다.내가 맥을 짚는 사이 이영미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봤다.“수호 씨는 내가 어떤 것 같아?”‘엥? 갑자기 왜 이런 걸 묻지?’“아름다우시죠. 관리도 잘하셨고.”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이영미는 으쓱한 듯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당연하지. 나 이거 다 자연산이야. 화장도 안 했어.”“네.”“여자가 하고 싶을 때 어떤 방법으로 욕구를 억제해야 해?”갑자기 야릇해진 대화 주제에 나는 어색해서 코를 쓱 문질렀다.“따뜻한 물로 목욕하면 해소될 수 있어요.”“소용없던 걸? 내가 다 해봤어. 혹시 다른 방법은 없어? 예를 들면 혈자리를 마사지한다던가 혹은 침으로 자극한다던가.”
하지만 변석훈의 말은 역전하려는 내 꿈을 처참히 짓뭉개 버렸다.내가 풀이 죽어 있을 때 변석훈이 갑자기 또 입을 열었다.“비록 실력은 나처럼 될 수 없어도 기술을 많이 익히면 적어도 스스로 보호할 수는 있어.”‘말 좀 한꺼번에 하지. 희망 없는 줄 알고 놀랐네.’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감히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스승님께서 좀 가르쳐 주세요.”“여기 내 명함이야. 몸 다 회복하면 연락해.”나는 얼른 그 명함을 챙겼다.그 뒤로 변석훈은 나와 한참 동안 얘기하다가 윤해철을 찾아갔고, 윤해철도 운동이 거의 끝났는지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두 사람이 떠난 뒤 나는 이영미에게 바로 문자했다. 남편분 건강이 채 회복되지 않아 몸조리를 더 해야 한다고.문자를 받기 바쁘게 이영미는 곧장 나에게 전화했다.[대체 몸조리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벌써 보름 동안 몸조리했는데 아직도 안 나았다고?]“한약 치료는 원래 효과가 늦게 나타나요. 이건 급하면 안 돼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셔야 해요. 제가 윤 회장님 몸 다 치료해 드리면 회장님은 무조건 어머님을 모셔갈 거예요.”이영미는 짜증나는 듯 물었다.[그이가 나한테 전한 말은 없었어?]“무척 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아직은 어머님이 원하는 행복을 드릴 수 없어 모셔 와도 싸울 거라고 하셨고요. 그리고 젊을 때 절제를 몰랐다고 무척 후회하셨어요.”나는 이영미가 또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대충 그럴싸한 변명을 지어냈다.그 말을 들은 이영미는 살짝 놀란 듯 말했다.[그래도 양심은 있네. 그럼 시간 좀 더 준다고 전해줘. 그러니 수호 씨도 서둘러야 해. 되도록이면 우리 남편 몸 예전처럼 돌려 놔줘.]“그럼요. 그러니 어머님도 요즘 인내심 갖고 기다리세요. 지은 씨도 출근하랴 어머님 기분 맞춰드리랴 쉽지 않을 거예요.”[그걸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당연히 지은 씨한테서 들였죠. 지은 씨가 저더러 어머님과 윤 회장님을 도와주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제가 방금 확인했는데 윤 회장님
“너무 긴장하지 마. 나도 수호 군이 나쁜 사람 아니라는 거 아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기다리지도 않았어.”윤해철의 말에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왜 기다리신 거예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그러자 윤해철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저쪽 벤치에 앉아서 얘기하자고.”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윤해철과 함께 공원 벤치에 앉았다.“우리 집사람이 수호 군한테 뭘 시켰는지 나도 아네. 하지만 난 아직 집사람을 받아줄 수 없어. 몸 건강 때문이 아니라 회사 때문에. 우리 회사에 요즘 문제가 생겼는데 한동안은 그걸 처리해야 하거든. 그러니 우리 집사람 쪽은 수호 군이 시간 좀 끌어 줘.”윤해철이 상세한 사항은 설명하지 않았지만,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 오히려 고민됐다.내가 이영미를 돕는 건, 이영미가 양동준을 설득해 나를 제자로 받게 해준다고 약속해서다. 하지만 윤해철을 돕는 건 나한테 아무런 이득이 없기에, 도와야 할지 무척 고민됐다.짝짝!내가 한창 고민하고 있을 때, 윤해철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그 순간 수풀 뒤에서 날카로운 눈매를 한 남자가 걸어 나와 윤해철에게 공손히 인사했다.“윤 회장님.”윤해철은 사람 좋은 미소를 하며 나를 바라봤다.“이 애는 내 개인 경호원 겸 기사인 변석훈이라고 하네. 이 애의 실력도 양동준 못지않아. 수호 군이 내 요구를 들어주면 석훈이더러 수호 군을 제자로 받아주라고 할게.”나는 도저히 내 귀를 믿을 수 없었다. 변석훈의 실력이라면 의심이 가지 않았다. 윤해철의 개인 경호를 맡을 정도라면 실력은 당연히 문제없을 거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발전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왜? 싫나?”윤해철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좋아요. 너무 좋아요. 회장님 조건은 저한테 너무 이득이에요.”“하하. 별거 아니야. 말 한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거든.”비록 그렇다지만 나는 너무 감격스러워,
“비꼬지 마세요. 저도 마음 같아서는 정태곤을 죽이고 싶어요. 그럴 능력이 안 돼서 비겁한 수단으로 상대한 거지.”“비겁하든 말든 뭔 상관이야. 목숨만 건지면 되지.”어제까지만 해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난 양동준만큼 강해지고 싶다. 아니, 심지어 양동준보다 더 강해지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임천호처럼 실력이 부족해도 권력이 있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부하를 거느리던가.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반드시 강해져야 한다.어젯밤은 운이 좋았던 거지만, 다음번에도 과연 그럴까?정태곤이 가더라도 또 강태곤이거나 서태곤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임천호의 부하가 얼마나 많은데. 수많은 사람이 임천호를 위해 목숨 바쳐 일한다. 때문에 나는 서둘러 강해져야 한다.내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소여정이 갑자기 내 옆에 앉았다.“먹어. 왜 안 먹어?”나는 두 입에 제비집 한 그릇을 뚝딱 먹어 치웠다.“됐어요. 이제 배불러요. 다른 용건 있어요? 없으면 이만 가 줘요. 전 휴식할 테니까.”사실 나는 따로 할 일이 있다.내 말에 소여정이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봤다.“그렇게 우리가 갔으면 좋겠어?”나는 차분히 해명했다.“저 정말 해야 할 일이 있어요.”“무슨 일인데? 그렇게 다쳤으면서 설마 여자 만나러 가려고?”“아니요. 중요한 일이에요!”나는 재차 강조했다.“그럼 같이 가.”“그럴 필요 없어요. 사적인 일이라 데리고 가기 불편해요. 저 정말 괜찮으니까 마음 놓고 가세요.”오랜 설득 끝에 나는 겨우 두 불청객을 집에서 내보냈다. 이윽고 외투를 걸치고 국민 공원으로 향했다. ‘오늘 윤 회장님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네. 운에 맡겨야지.’만약 만나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하지만 뜻밖에도 내 운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윤 회장님. 이런 우연이. 또 만나네요.”윤해철이 오늘도 평행봉에서 운동하는 걸 본 나는 얼른 그에게 다가갔다.윤해철은 나를 흘긋 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정말 갔어요?”난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정태곤은 절대 순순히 돌아갈 사람이 아니다.그때 소여정이 말했다.“갔어. 가는 거 내가 직접 봤어. 어젯밤 일은 정말 몰랐어. 만약 알았다면 분명 막았을 거야.”“소여정 씨 탓할 생각 없으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나는 진심으로 말했다.그러자 소여정이 의아한 듯 물었다.“정말 내 탓 안 해?”“소여정 씨가 정태곤더러 저를 죽이라고 시킨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소여정 씨를 탓해요?”“내가 수호 씨 찾아가서 정태곤이 살의를 느낀 거잖아.”소여정이 말했다.나는 그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하긴. 그럼 다음부터 저 찾아오지 마세요.”“진심이야?”“농담이에요. 소여정 씨는 제 환자잖아요. 제가 제 환자를 치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운 거지.”문제에 직면했다고 자꾸 피하면 안 된다. 만약 내가 피하면 오히려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보일 테니까.게다가 앞으로 따로 나가 사업하면 이런저런 문제에 직면할 텐데, 고작 이런 용기조차 없다면 사업도 하지 말아야 한다.내 말을 들은 소여정은 은근히 기뻐했다.“어디 있어? 내가 지금 갈게.”“오늘은 됐어요. 저 다쳐서 오늘 하루는 집에서 휴식하고 있거든요.”“치료하러 가는 거 아니야. 얼마나 다쳤나 보러 가는 거지. 수호 씨 입으로 내 의사라고 했잖아. 내 주치의가 나 때문에 다쳤는데 병문안 가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소여정의 말에 나는 반박할 수 없어 결국 주소를 알려주었다.하지만 놀랍게도 소여정은 혼자 온 게 아니라 백연우와 함께 왔다.“하. 나 오늘 바빠. 지은이 찾아가지 왜 나를 끌고 오는 거야?”“그걸 말이라고 해? 우리 성격이 안 맞는 거 알면서. 내가 부른다고 지은이가 따라오겠어?”두 사람은 중얼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심지어 소여정의 손에 보건 식품을 가득 들려 있었다.“그 정도 아니에요. 이거 다 찰과상이에요.”이 보건 식품은 모두 귀한 것들이라 분명 적지 않은 돈이 들었을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