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사는 나를 휙 째려봤다.“싸움 구경이 뭐 재밌다고 그걸 봐요? 차라리 날 봐요.”“예전 같았으면 의사 쌤이 싸움 구경보다 재밌다고 생각했을 텐데, 방금 전 일을 겪고 나니 싸움 구경이 여자보다 더 재밌어요.”의사는 화가 난 듯 팔짱을 낀 채 나를 째려봤다.“지금 내가 저 두 남자보다 못하다는 거예요?”“그 뜻이 아니라, 싸움을 배우고 싶다는 뜻이었어요. 그래야 강해지죠. 내가 저 정태곤이라는 놈한테 맞아 이 지경이 됐잖아요. 게다가 이대로 포기할 놈이 아닐 테니 강해져야죠.”여의사는 고개를 돌려 뒤를 흘긋 보더니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했다.“그거라면 간단하네요. 나중에 내가 양동준한테 말해줄게요. 제자로 받아주라고.”“혹시 양동준 형님과 아는 사이에요?”나는 너무 흥분돼서 여의사의 팔을 덥석 잡았다.그러자 의사는 싱긋 웃었다.“어디 알다 뿐이겠어요? 아주 잘 나는 사이죠.”‘뭐야? 설마 사귀는 사이라는 건가? 그러면 너무 잘됐네.”“그럼 부탁드릴게요. 나 정말 양동준 씨를 스승으로 모시고 싶거든요.”“도와줄 수는 있어요. 그 대신 그쪽도 나 도와줘요.”“뭘요?”의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사람이 모여 있는 걸 확인인하고는 낮게 속삭였다.“나중에 말해줄게요. 이 팔 부러져서 다시 이어줘야 해요. 그리고 갈비뼈도 검사해 봐야 해요.”의사는 일련의 검사를 마친 뒤 윤지은에게 말했다.“아가씨, 정수호 씨 상처가 심각해서 저한테 데려가서 치료해야 할 것 같아요.”“그럼 얼른 데려가. 여긴 나한테 맡기면 되니까.”형수와 애교 누나가 먼저 달려와 나를 부축하더니 아예 나를 들어갈 것처럼 굴었다.나는 얼른 두 사람을 말렸다.“저 팔을 다쳤지 다리는 멀쩡해서 혼자 걸을 수 있어요.”“걷긴 뭘 걸어요? 누워 있어요.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수호 씨를 못 들까 봐요?”형수는 강제로 나를 눕혔다.이 상황에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내가 하반신 마비가 된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하지만 나는 별
“겉보기에는 문제가 없어도 쓸모 없어진 게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이건 우리 아가씨 행복과 직결된 거라 검사해야 해요.”‘왜 이 여자가 나를 시험하는 것 같지?’나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난 그쪽 아가씨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 결백해요.”“하,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그런데 우리 아가씨가 왜 나한테서 자꾸만 피임약을 사 가요?”‘?’나는 순간 넋을 잃었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으니까.“이거 놔요. 그냥 검사하는 거니까.”의사는 내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보기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지만 꽤 아팠다.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움츠렸다.그 틈에 의사가 잽싸게 내 바지를 풀어 헤치더니 발가벗겼다.나는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 순간 마치 도마 위에 올라간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윤지은도 나를 놀리기 좋아하더니, 이 의사도 똑같네.’‘내가 전생에 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의사가 내 그곳을 몇 번 문지르자, 나는 바로 반응했다.그때 여의사의 말이 들려왔다.“뭐, 기능은 아직 살아 있네요.”나는 바지를 입으며 울상이 되어 말했다.“당신 아가씨가 이러라고 시켰어요?”“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제대로 말해요.”의사는 내 팔을 붕대로 감으며 말했다.“내가 남자 거기를 본 적이 없어 보고 싶었어요.”“그러니까 당신 아가씨를 도와 나를 검사하는 게 아니라, 놀린 거라, 이 말이에요?”나는 그제야 내가 속았다는 걸 인지했다.여의사는 싱긋 미소 지었다.“한번 놀려봤는데 바로 속을 줄은 몰랐어요.”의사는 말하면서 고개를 저으며 짧게 탄식했다.마치 내가 한심하고 바보 같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여자한테 한심하고 바보 같다고 무시했다는 사실이 나한테는 너무 큰 상처였다.하지만 난들 어쩌겠는가? 그저 침대에 누워 끊임없이 반성할 뿐이었다.그러면서 속으로 다시는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다.“됐어요. 팔은 이미 치료 끝났어요. 갈비뼈는 며칠
상대가 협조하지 않으니 나도 별수 없이 뒤돌아 떠났다.내가 의무실을 나오자 형수와 누나들이 바로 내 주위를 감싸며 괜찮은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괜찮아요,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내 생각은 온통 윤지은 쪽한테 쏠렸다. 양동준과 그놈이 싸운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하지만 누나들이 나를 에워싸고 조잘대는 바람에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처음으로 미녀들한테 둘러싸인 것도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누나들, 저 정말 괜찮아요. 저 지금 싸움이 어떻게게 됐나 보러 가고 싶어요.”백연우는 웃으며 말했다.“갈 필요 없어. 정태곤이 도망쳤대.”“정말요? 너무 잘 됐어요!”내가 기쁜 건 정태곤이 도망쳤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양동준이 정태곤을 이겼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양동준의 실력이 정태곤 위라는 뜻이니까.‘역시 내가 사람 제대로 봤어. 너무 강하잖아. 내 우상다워.’나는 다급히 백연우를 보며 물었다.“그럼 지은 씨와 양동준 형님은 지금 어디 있어요?”“지은은 경호팀에 갔어. 아마도 경호원들 혼내러 갔을 거야 양동준은 모르겠는데.”나는 윤지은을 찾으러 경호팀에 가려고 했다.하지만 내가 떠나려 하자 누나들이 바로 나를 막아섰다.“수호 씨, 어디 가요?”내가 내 생각을 말하자 하정현이 양 팔을 벌리며 나를 막았다.“안 돼요, 못 가요. 지은이 가기 전에 나더러 수호 씨 잘 돌보라고 했어요.”“아니, 저 지은 씨한테 볼일 있어요. 갔다 올 거예요.”나는 애써 설명했지만. 누나들은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나를 끌고 방으로 돌아갔다. 휴식해야 한다면서.정말 휴식하기 싫은데 누나들의 고집을 못 이겨, 나는 결국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사람이 한가하면 폰을 보고 싶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폰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는 인스타를 확인했다.그리고 놀랍게도 인스타에 60 몇 개의 소식이 떠 있었다.‘뭐지?’나는 얼른 클릭해서 확인했다.그리고 그제야 어젯밤 인스타 게시물을 올렸던 게 생각났다.내가 어제
민우는 카톡으로도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맨 먼저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물었다가 내가 답장하지 않자 지금 뭐 하는지 물었다.나는 바로 답장했다.[미안, 너무 바빠서 이제야 네 문자 보네. 넌 요즘 어떤데, 뭐 하고 지내?]민우의 답장은 매우 빨랐다.[나 요즘 강북에 있는데 할 일 없어. 어제 네가 올린 사진 용천 호텔이지?]이런 우연이, 민우도 강북에 있다니.나는 빠르게 답장했다.[응, 너 강북에 있어? 우리 시간 날 때 만나서 밥이라도 먹자.][좋아. 오늘 저녁 어때?][오늘 저녁은 안 돼. 나중에 시간 될 때 연락할게.][오케이. 그럼 연락 기다릴게.]민우와 대화를 하다 보니 약간 졸려 한숨 자고 싶었다.그때 내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확인해 보니 여전히 신민우 문자였다.[수호야. 지금 이런 말 할 때 아니라는 거 알지만, 할 말 있어. 나 임설아랑 헤어지고 싶은데, 걔가 죽어도 싫대. 네가 나 대신 걔 좀 설득해 줄 수 있어?]임설아는 신민우의 여자 친구다. 두 사람은 대학 때부터 만났는데 늘 사이가 좋았다. 우리 침실 애들이 모두 두 사람을 부러워했으니까.나는 문뜩 궁금했다.[무슨 일인데? 너희 둘 사이 좋았잖아. 왜 갑자기 헤어지려는 건데?]민우가 답했다.[사이는 좋지. 그런데 걔네 부모님이 반대하셔. 내가 설아 계속 만나면 경차에 신고하겠대.]‘이렇게 심하다고?’[임설아는 그 사실 알아?][알아. 괜찮대. 나랑 같이 사는 건 자기지 자기 아버지가 아니라면서 부모가 반대해도 나랑 같이 있겠대.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나 지금 아무것도 없고, 생활하는 것도 문제인데, 걔한테 미래를 약속할 수 없어.]나는 탄식했다.[하, 너희한테 소설에서만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너 진짜 임설아 포기할 수 있어?][포기 못 하면 또 어쩌게? 너무 차이가 많은 사람은 미래가 없어.]비록 민우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몰랐지만, 그의 말에서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일자리도 없어 사는 것도 문제이니 임
나는 임설아와 친하지 않다. 고작 식사 몇 번 해본 게 전부다.그런데 그런 사람을 설득하려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나는 우선 임설아에게 내 소개를 보냈다.[임설아, 오랜만이야. 나 정수호야. 민우 대학 동기. 민우한테서 너희 얘기 들었어. 내가 다 안타깝더라. 하지만 너와 민우의 앞날을 위해 잠깐 헤어져 있는 것도 괜찮다고 봐.]문자를 보낸 지 얼마되지 않아 임설아한테서 답장이 왔다.[민우랑 연락 닿아? 내가 보낸 문자에는 답도 없던데, 너와는 연락했어? 신민우 정말 나 안 사랑하는 거 아니야?]나는 얼른 대답했다.[아니야.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을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임설아는 나한테 우는 이모티콘을 여러 개 보냈다.[내가 볼 때 신민우 나한테 사랑이 식었어. 나를 아직도 사랑하면 어떻게 내가 허튼 생각하게 혼자 둘 수 있어? 내가 슬퍼하는 걸 어떻게 두고만 볼 수 있어? 흑흑, 차라리 죽는 게 나아.]임설아의 대답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컹했다.‘죽겠다니?’나는 얼른 임설아와의 대화 내용을 캡처해서 민우한테 보냈다.[임설아 상태 이상해. 얼른 답장해.]하지만 민우의 답장은 놀라웠다.[안돼. 난 답장할 수 없어. 희망을 줄 수 없어.]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걔가 정말 죽을까 봐 두렵지 않아?][안 그럴 거야. 설아 부모님이 집에서 지키고 있거든. 수호야, 나도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참지 못할까 봐 겁나. 우리 관계 완전히 끊어내려면 내가 마음 독하게 먹어야 해. 나 정말 네 도움이 필요해. 설아도 그렇고.]‘젠장,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데?’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민우가 또 문자를 보내왔다.[수호야, 사실 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설아가 맨 처음 좋아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왜 몰랐지?’민우는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다.[설아가 나를 통해 너한테 마음을 전달하려 했지만, 그러다 보니 우리가 가까워진 거고, 결국 우리가 만나
임설아의 자세는 매우 섹시하고 뭔가를 암시하고 있는 듯했다.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코피를 뿜을 뻔했다.겉보기에 얌전한 임설아가 사적으로는 이렇게 개방적이라니.‘이러다 내가 죄지을 것 같은데?’나는 어찌 된 일인지 두 손을 벌벌 떨며 참지 못하고 그 사진을 저장했다.그러고 나서 임설아에게 답장했다.[너 뭐 하는 거야? 민우가 알면 오해해. 얼른 사진 지워.]임설아는 사진을 지우기는커녕 나한테 또 사진 한 장을 보냈다.이번 사진은 더 색스러웠다.임설아는 스튜어디스룩에 검은 스타킹을 신은 채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치마 속 광경은 보일락 말락 해서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표정은 학교 선생 같은 표정이라 보기만 해도 자빠뜨리고 싶었다.나는 손을 더 심하게 떨면서 이번 사진도 저장했다.그때 임설아가 문자를 보내왔다에[마음에 들어?]나는 마음애도 없는 대답을 했다.[너 안 좋아하니까 사진 지워.][흥, 안 좋아하기는. 너 아니 척하는 거지?][임설아, 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무리 실연했어도, 이렇게 막살면 안 되지.][민우한테 버려져서 안 그래도 사는 게 재미없어. 차라리 이대로 콱 죽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이대로 죽기는 또 너무 아깝거든. 신민우랑 3년을 사귀었는데,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 게 말이 돼? 걔가 남자 맞는지 의심된다니까.]나는 민우 대신 해명했다.[민우 걔는 너 진심으로 사랑해. 너한테 미래를 약속하지 못할 것 같으니 건드리지 않는 거야. 너 책임 못 질까 봐.][누가 책임지라고 했어? 남녀가 같이 있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은 것뿐인데. 왜 그 소원도 안 들어주는데?][내가 사진으로 보낸 옷을 입고 민우를 꼬셨는데도 나한테 걔가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걔 정말 문제 있는 거 아니야?]이렇게 입은 여친을 두고 건드리지 않았다니? 정말 성인이 따로 없다.나도 남자니까 이해할 수 없었다.나는 임설아에게 물었다.[민우한테 문제 있다고 생각하면서, 왜 개
[나 안 아파. 괜찮거든. 나 올해 스물셋이야. 주위에 다른 여자애들은 다 남자 친구가 있어. 나도 그저 남자한테 사랑받고 싶은 것뿐인데, 뭐가 잘못됐어? 그리고 이 나이에 한 번 그런 기분 느껴보고 싶은 게 잘못이야?]임설아가 보낸 문자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긴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떨림이 있는 음성에 약간의 인내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정수호, 나 지금 참기 힘들어. 민우가 나 도와주지 않으니까 네가 도와줄래?]참고 있는 듯한 임설아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는 피가 솟구쳤다.심지어 임설아가 나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상상까지 됐다.문제는 임설아의 목소리가 너무 섹시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임설아가 보낸 사진 두 장이 떠오르면서 상상이 펼쳐졌다.하지만 나는 이성을 잃지 않고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임설아, 너 이러면 안 돼. 그거 중독돼. 병원 가 봐.”그 뒤로 임설아는 동문서답하며 하고 싶다는 감정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었다.하고 싶지만 참는 듯한 임설아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마음이 요동치면서 하고 싶어졌다.임설아는 나에게 연속해서 열 몇 개의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도 모두 야릇한 소리를.나는 누군가 갑자기 들어왔다가 그걸 들을까 봐 다급히 볼륨을 낮췄다.임설아가 괴로워한다는 걸 알기에 나는 더 이상 답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그 음성을 하나하나 들었다.그러다가 오르가슴에 도달할 때 임설아의 소리는 한껏 높아졌다.마치 오랫동안 참다가 끝내 욕망을 방출한 것처럼.살짝 놀라웠다.여자가 성욕을 풀 때도 이토록 에너지가 넘칠 줄은 몰랐다.성욕을 푼 임설아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미안, 네 앞에서 못 볼 꼴 보였네.]임설아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나도 문자로 답장했다.[괜찮아, 네가 편해졌다면 된 거지. 정말 괜찮아? 너 방금 소리가 이상했는데?][뭐가 이상해?][엄청 쌓였던 것 같아. 그래서 그런지 그 순간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스스로
“사모님, 이제 저 필요 없어요?”사모님 말에 나는 초조하고 서운했다. 갑자기 필요가 없어진 느낌이었다.그때 사모님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설명했다.“지금 그 꼴로 어떻게 운전하려고 그래요?”“지은더러 기사 새로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수호 씨가 필요 없어진 게 아니에요.”“그러니까 아직도 저 필요한 거 맞죠?”나는 초조하게 물었다.사모님은 내 말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무슨 말이에요? 나 수호 씨 사장 사모님이에요.”나는 다급히 해명했다.“아니, 제 뜻은 저를 데리고 돌아가는 거 맞죠? 여기 혼자 버리는 거 아니죠?”“당연하죠. 내가 수호 씨 데리고 나왔는데, 버리고 갈 리 있겠어요? 그런데 수호 씨가 다쳐서 차 새로 알아봐서 따로 데려다주고 싶어요.”“싫어요. 저는 사모님과 같이 있을래요.”나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그 말에 사모님의 눈빛이 약간 어색해졌다.사모님이 내 말을 오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나도 덩달아 어색해졌다.‘어떻게 사모님한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나는 다시 해명했다.“사모님, 저, 저는 그저 사모님을 지켜주고 싶은 거지, 별 뜻 없어요.”“알아요.”사모님은 볼이 발그레해서 내 눈도 보지 못했다.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문에 분위기는 일순 어색해졌다.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사모님, 저 목마른데, 물 가져다줄 수 있어요?”사모님은 얼른 일어나 나에게 생수 한 병을 건넸다. 그러고는 뚜껑을 열어 먹여주기까지 했다.나는 사실 한쪽 팔을 다쳤지만, 다른 한쪽은 움직일 수 있었다.하지만 사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려고 폐인처럼 행동했다.사모님이 가까운 거리에 앉아 향수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게다가 살짝 붉은색을 띤 희고 고운 피부가 눈앞에 보였다.나는 참지 못하고 사모님을 훔쳐보다가 하필이면 딱 시선이 마주쳤다.“왜, 왜 그렇게 봐요?”사모님은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나는 내 마음을 들킬까 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오히려 눈을 딱
내가 노랑머리한테 준 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다. 족히 10만 원 가까이는 됐으니까. 백수들한테는 이것도 큰돈이나 다름없다.노랑머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었다.아직 대답을 못한 사람들은 얼른 다른 질문을 하라고 나를 재촉했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두 번째 질문을 했다.“그럼 혹시 이연화 혹은 조금희가 요즘 낯선 사람과 만난 걸 본 사람이 있어요?”그 물음에 모든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그 순간 나는 실망했다.“세 번째 질문, 혹시 누가 나 대신 이연화를 감시할래요?”모든 사람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그럼 다 같이 해요.”“그럼 돈은 어떻게 계산하는 거예요?”노랑머리가 물었다.나는 가방에서 또 돈 두 뭉치를 꺼냈다.“세 명이 감시해요. 한 사람당 200씩 줄게요.”세 사람의 눈은 커다래지더니 급기야 반짝반짝 빛이 났다.나는 세 사람에게 귀띔했다.“이 돈은 수고비예요. 누가 만약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면 이 외에도 큰 보상을 받게 될 거예요.”‘역시 돈이 있으니 뭐든 쉽게 되네.’이 사람들이 나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게 하려면 이 사람들 마음을 매수하는 게 우선이다.몇백만 원은 지금의 나한테 큰돈이 아니다. 무엇보다 사장님과 사모님을 도울 수 있다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모든 일을 마친 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윤지은의 말을 들어보니 사모님은 이미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사모님 정서가 여전히 불안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기분이 다운된 사람은 쉽게 졸리고 무기력해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는 방금 전 일을 윤지은에게 말했다.“이번 일 조사하기 엄청 어려울 거예요. 언제 진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고. 장기전을 할 준비는 됐어요?나는 윤지은을 보며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째려봤다.“그걸 말이라고 해? 유미는 내 베스트 프렌드야. 유미한테 이런 일이 생겼는데 내가 같이 있어 주지 않으면 누가 같이 있어 줘? 그러는 너야말로,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설마
나와 윤지은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우리는 사모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사모님, 비록 어렵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건 아니에요. 우리가 끝까지 견지하면 분명 수확이 있을 거예요. 게다가 사장님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줄 거예요.”사장님을 언급하자 사모님의 정서는 드디어 조금 안정되었다. 사모님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호섭 씨, 정말 우리를 지켜줄 거야?”“당연하지.”윤지은도 사모님을 위로했다.그때 내가 분석했다.“제가 볼 때 이연화가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그 여자가 한 말 진짜 아니에요.”“너도 그래?”보아하니 윤지은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넌 어떻게 보아냈는데?”“느낌이 그래요. 이연화가 그렇게 드센데 남편 일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돼요. 게다가 조금희 카드에 입금된 2억이 이연화랑도 연관된 것 같아요.”이건 내 직감이다.나는 왠지 이연화 같은 신분과 배경에 성깔 있는 여자라면 통제욕이 엄청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여자가 자신을 배신했던 남자를 나 몰라라 방치할 수 있을 리가 있을까?그건 그 여자 성격에 부합되지 않는다. 윤지은의 관점 역시 나와 어느 정도 비슷했다. 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며 맞장구치면서 보충했다.“그리고 또 이연화가 2억을 얘기할 때 자꾸 눈빛을 피했어. 그건 거짓말한다는 표현이야.”“문제는 그 여자가 진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예요.”이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그건 간단해. 내가 사람을 시켜 그 여자를 감시하라고 할 거야. 그러면 분명 허점을 보일 거야.”이런 건 역시 돈이 많아야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다.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나는 얼른 맞장구쳤다.“만약 그곳 주민을 감시자로 붙여두면 더 좋을 거예요. 그 사람들이 이연화 행적을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요.”윤지은은 팔짱을 끼고 나를 바라봤다.“그건
사모님의 기세에 눌린 이연화는 오만하고 안하무인이던 태도가 싹 사라지고 다급히 대답했다.“말할게, 말한다고. 이거 먼저 놔.”사모님은 그제야 이연화 머리채를 놔주었다.이연화는 머리를 마구 문질러댔다. 심지어 얼굴까지 시뻘게진 걸 봐서는 사모님의 공격에 적지 않게 다쳤음을 알 수 있었다.이연화는 한참 동안 머리를 쓰다듬은 뒤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 2억은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그 인간이 우리 모자한테 주는 보상이라면서 줬어요.”“당신은 그 사람 아내인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우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이연화가 조급히 말했다.“내 말 다 사실이에요. 난 정말 어떻게 된 건지 몰라요. 우리가 부부인 건 맞지만 명의상 부부나 다름없었어요. 그 인간이 나 몰래 불여우를 만나다가 잡힌 적도 있어요.”“그때 그 인간이 이혼만 하지 말자고 싹싹 빌지 않았으면 진작 헤어졌을 거예요.”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어 나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그 2억이 어디서 났는지 몰랐다면, 조금희 씨가 불치병이라는 건 알았겠죠?”이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알아요. 그 인간이 오래전에 내 앞으로 보험을 들어 놓을 걸 줬었거든요. 자기가 가면 보험사에서 돈이 나올 거라면서.”이건 모두 일가 조사했던 내용이었다. 다만 이연화가 말한 사실이 모두 진짜인가 하는 게 문제였다.나는 이연화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봤다.“그날 장례식장에서 화장을 미뤄달라고 했는데 왜 안 들었어요?”“나 할 일 많아요. 당신들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 인간이 당한 사고가 단순 사고든 인위적인 사고든 난 관심 없어요. 그 인간이 내 앞으로 돈을 남겼으니 난 그 돈을 얼른 받아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었어요.”이연화는 조금희와 더 이상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아 조금희 일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하지만 2억의 존재를 모른다는 게 진짜일지 의문이었다.만약 진짜라면 사건의 실마리는 또 끊기게 된다.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질
그렇다면 우리의 추측이 거의 맞는 거로 증명이 된 셈이다. 게다가 이연화는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거다.“이러면 이연화 모자만 찾으면 사건의 진실을 파헤칠 수 있겠네요.”우리는 일이 이렇게 순조로울 줄 몰랐다.심지어 사모님은 마음이 급해 벌떡 일어섰다.“더는 못 기다리겠어. 나 지금 당장 이연화 만나러 갈래.”“유미야. 아직 조급해하지 마. 지금 이연화 모자가 어디 있는지 모르잖아. 이렇게 해, 내가 한나한테 조사해 보라고 할게.”윤지은은 강한나에게 전화해 이연화 모자가 사는 곳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직무상 편의를 이용해 강한나는 곧바로 이연화 모자의 거주지를 찾아냈다.[미리 말하는데, 이연화 모자 좋은 사람 아니야. 이연화 아버지는 판자촌 터줏대감이라 되도록 갈등을 만들지 마.]“알았어.”이연화가 만만치 않다는 걸 알지만 우리는 무조건 가봐야 했다. 그건 사모님한테는 더더욱 간절했다.아무리 그곳에 불바다라도 사모님은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이연화 집 주소를 알아낸 우리는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판자촌은 낡은 건물 지역이라 외지고 낡은 곳에 있는 데다 교통도 불편했다. 다만 이연화의 집은 그 판자촌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우리가 이연화의 집을 찾았을 때 이연화는 집에서 화투를 치고 있었다.남편이 죽은지 얼마 되지 않는 여자가 이곳에서 한가하게 화투나 치고 있다니 침 한심했다.“이연화 씨, 할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어요.”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그러자 이연화는 나를 흘긋 보더니 말했다.“나 지급 바빠서 시간 없어요.”“이건 당신 남편 조금희 씨와 관련된 일이라 이연희 씨가 저희랑 반드시 가주셔야 해요.”기분이 살짝 언짢아진 나는 당연히 다정한 목소리가 나가지 않았다.하지만 이연화는 자기 구역에 있어 무서울 게 없어 심지어는 나에게 소리까지 질렀다.“반드시? 내가 왜? 당신들이 누군데? 경찰이야? 내가 왜 당신들 말을 들어야 해? 당장 꺼져. 화투 치는 거 방해하지 말고.”여자는 말하면서 다시 화투 치는 데
“보아하니 두 사람 모두 조금희 씨 몸에 종양이 퍼지고 있어 곧 죽는다는 걸 알고 있었네요.”“혹시 조금희 씨가 뒤에서 꼼수 부린 거 아닐까요?”나는 문득 뭔가 떠올라 의문점을 제기했다.현재 상황으로 분석해볼 때 조금희의 혐의가 가장 높았다.그때 윤지은이 말했다.“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하지만 나도 조금희 씨가 이상한 것 같아.”사모님은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다음에 조사할 때 나도 끼워줘. 나도 같이 조사하고 싶어. 두 사람 말 맞아. 호섭 씨가 억울한 죽임을 당했는데, 나라도 진실을 밝혀 억울함을 풀어줘야 해. 이게 내가 살아갈 유일한 동력이야.”사모님은 말하면서 또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슬픔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와 윤지은은 항상 사모님 곁을 지킬 거다.그날, 우리는 곧장 종양 전문 병원에 가 조금희의 병력을 조사했다.조금희 몸에서 종양이 발견된 건 1년 전인데, 처음에 양성이었다가 악성으로 번지기까지 적지 않은 돈을 들였던 거로 확인되었다.게다가 조금희는 불치병에 걸리기 전에 아내와 갈등을 겪었다.“자세한 건 저도 모르는데, 조금희 씨가 우리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젊은 여자가 항상 와서 돌봐줬어요. 그러다가 부인이 병원에 찾아와 그 아가씨를 때렸고요. 그 일은 병원 사람들 다 알아요.”‘그렇다는 건 조금희가 바람을 피웠다는 거네?’조금희가 이런 사람일 주은 생각지도 못했다.윤지은은 여간호사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그러자 간호사는 아주 기뻐하며 떠나갔다.조사를 마친 뒤 우리는 밖에서 식당을 찾았다.식당에 도착한 윤지은은 분석을 시작했다.“조금희 씨가 불치병에 걸렸고, 예전에 아내와 아들한테 잘못을 저질렀다면 혹시 자기가 얼마 못 살 걸 알고 호섭 씨를 배신해 돈을 챙겼던 건 아닐까?”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그럴 가능성이 커요. 만약 조금희 씨 계좌에 큰돈이 입금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아쉽지만 이곳은 강북이 아닌 Y시다. 안 그랬다면 윤지은의 인맥
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배고픔을 느낀다는 건 좋은 일이다.윤지은이 아침을 사 오자 사모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그걸 본 윤지은은 나를 향해 엄지를 추켜들었다. 그건 내 실력을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이번 치료 방법이 확실히 효과적이었으니까.나는 사모님을 한참 동안 관찰했다.비록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데도 사모님은 음식 드실 때 여전히 우아하고 단아했다. 살짝 슬픔을 띄고 있어 살짝 비극의 여주인공 같기도 했다.내가 한창 사모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 윤지은의 날카로운 눈빛이 갑자기 나를 쏘아봤다. “짐승!”윤지은은 욕지거리를 퍼부었다.그 욕에 나는 억울함을 호소했다.“제가 뭘 했다고 짐승이라는 거예요?”“아무튼 짐승 맞아. 이런 상황에서 훔쳐보기나 하고.”윤지은은 나를 째려봤다.난 그저 사모님을 몇 번 본 것뿐인데 나를 짐승 취급하다니, 너무 어이없었다.하지만 이러다 또 싸움 나겠다 싶어 나는 얼른 아침을 들고 다른 곳에 가서 배를 채웠다.식사를 마친 뒤 사모님은 자발적으로 나와 윤지은을 찾아왔다.“알고 있는 거 사실대로 다 알려줘요. 난 호섭 씨 사고에 대한 모든 사실이 알고 싶어요.”사모님은 너무 평온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때문에 나는 사모님 상태가 여전히 걱정스러웠다.“사모님, 우선 맥 좀 짚어봐도 될까요?”“그럴 필요 없어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나도 알아야. 걱정할 거 없어요. 어젯밤 많이 생각해 봤고, 호섭 씨가 떠난 사실을 받아들였어요.”“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호섭 씨처럼 착한 사람이 남한테 죽임을 당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억울함을 풀어줄 거예요.”“난 강해져야 하고 호섭 씨처럼 용감해져야 해요. 그래야 호섭 씨가 마음 놓고 갈 수 있어요.”사모님은 애써 슬픔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또 흐느꼈다.그 말을 들으니 나도 코끝이 시큰거리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같은 목표가 생겼다. 바로 진실을 밝히는 것.나는 얼른 마음의
나는 사모님 팔을 힘껏 잡으면서 사모님과 눈을 마주쳤다.“사모님!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더 이상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사장님이 이런 사모님 보고 편히 가지 못하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내 말이 사모님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줬는지, 사모님은 순간 울음을 터뜨렸다.윤지은은 내가 강제로 사모님을 자극했다며 나를 탓했다.“유미 지금 안 그래도 나약한 상태인데, 왜 그런 말을 직접 해?”나는 너무 난감했다.“누구는 뭐 이러고 싶은 줄 알아요? 하지만 사모님이 계속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환상 속에 살고 있는데, 계속 이러면 상태가 점점 악화해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사모님이 또 상처받을까 봐 걱정했다.나도 사모님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려면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있다. 하지만 사모님을 절망 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나는 윤지은에게 말했다.“정말 사모님을 돕고 싶다면 모질어야 해요. 이럴 때 마음 약해지면 오히려 해치는 거예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 말에 동의하는지, 내가 치료할 수 있도록 묵묵히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나른하게 힘이 쭉 빠진 사모님을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죽은 사람이 다시 돌아올 수 없어요. 사모님이 속사한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속상해할 때가 아니에요. 우리 할 일이 있어요.”“사장님 사고 단순 사고가 아니에요. 누군가 인위적으로 사고 낸 거예요. 사모님, 정신 차리고 우리와 함께 진실을 조사해요.”사모님은 텅 빈 눈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사모님을 깊은 슬픔에서 꺼내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두르지 않고 그녀가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천천히 다가가는 것이다.나는 말투를 부드럽게 하며 방금 한 말을 또다시 반복했다.“사장님 교통사고에 수상한 점이 발견됐어요. 사모님도 사장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시는 거 원하지 않죠? 우리 함께 진실을 알아내 사장님이 억울하게 죽임당하
나는 그 말을 들은 순간 식은땀이 송골송골 솟아올랐다.사모님 상태는 살짝 이상해 보였다. 아마도 의식이 혼미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를지도 몰랐다.나는 사모님이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서둘러 사모님 팔을 꼭 잡았다. 그러면서 계속 따라오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데려올 생각이었다.“수호 씨, 이거 놔요. 난 남아서 호섭 씨랑 같이 있을래요...”사모님은 마구 버둥대며 소리쳤다.이러다가 사고가 날 것 같아 나는 아예 사모님을 어깨에 두러 업었다. 그러자 사모님은 곧바로 버둥거리며 소리쳤다.벼랑 끝에 서 있는지라 조금만 실수하면 함께 아래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결국 사모님을 손날로 기절시켰다.내가 가드레일 안쪽으로 다시 넘어왔을 때 윤지은의 차가 마침 도착했다.“왜 그래?”윤지은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나는 사모님을 차에 앉히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모님 지그 정신이 이상해서 현실과 환각을 구분하지 못해요. 방금 사장님이 춥다고 한다면서 옷 주러 내려가겠다고 했어요. 제가 제때 나타나지 않았으면 뛰어내렸을지도 몰라요.”윤지은은 내 말을 듣더니 미간을 찌푸렸다.“계속 이럴 순 없어. 우리가 잠깐은 지켜볼 수 있지만 평생 지켜볼 순 없잖아.”그때 내 머릿속에 문득 방법이 떠올랐다.“사모님께 사장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려드리는 건 어때요?”“미쳤어? 이번 일로도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또 자극하자고?”윤지은은 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이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했다.“제 할아버지가 남긴 의학 서적에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환자가 가족을 잃고 감정을 통제하지 못할 때 치료가 안 된다면 환자한테 희망을 줘야 한대요. 그 희망이 의학에서 말하는 기예요.”“그 기를 가진 환자가 음식 치료와 약물 치료를 함께 진행하면 서서히 회복할 수 있대요.”“사장님의 죽음에 수상한 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모님과 함께 그 사건을 수사하는 거예요. 아마 사모님도 사장님이 죽은 진실을 알고 싶을 거예요.”
장례식장 안을 모두 뒤져 봤지만 사모님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리 조급하지 않던 내 마음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불안해졌다.사모님은 현재 몸 상태도 안 좋고 정서도 매우 불안하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가족한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됐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내 마음은 점점 불안해졌다.그러다 결국 방법이 없어 나는 문득 사모님 번호를 떠올려 그쪽으로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계속 긴 연결음만 들릴 뿐 아무도 받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 연결음이 꺼졌다.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가 연결되었다.“사모님?”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수호 씨, 나 괜찮으니까 좀 내버려둬요.]사모님 목소리는 매우 우울해 보였고 기운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한테는 너무 듣기 좋았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사모님, 어디 있어요? 너무 걱정돼요.”[혼자 있고 싶어요.]“알아요, 아는데 어디 있는지만 알려줘요. 사모님이 안전하다는 거 확인해야 해요.”전화 건너편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그때 갑자기 차 경적음이 들려왔다.그렇다는 건 사모님이 장례식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나는 문득 사모님이 있을 수 있는 곳이 떠올랐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물었다.“사모님, 알려주시면 안 돼요?”사모님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하지만 이미 대충 답을 얻은 나는 장례식장을 뛰쳐나가 택시를 잡고 사장님이 사고를 당한 곳으로 향했다.가는 길에 사모님을 찾았냐는 윤지은의 전화를 받은 나는 내 추측을 말했다.“아니요. 사모님 아마도 사장님 사고 난 곳에 있는 것 같아요.”[거긴 왜?]윤지은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사장님 죽음이 수상해 직접 조사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단순히 사장님이 그리웠을 수도 있고... 아무튼 저 지금 가는 중이에요.”[그럼 먼저 건너가. 나 이따 바로 갈게.]나는 윤지은과 상의한 뒤 먼저 사장님이 사고 난 곳으로 향했다.사고가 난 곳은 절벽인데, 사모님은 마침 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