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협조하지 않으니 나도 별수 없이 뒤돌아 떠났다.내가 의무실을 나오자 형수와 누나들이 바로 내 주위를 감싸며 괜찮은지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괜찮아요, 저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내 생각은 온통 윤지은 쪽한테 쏠렸다. 양동준과 그놈이 싸운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하지만 누나들이 나를 에워싸고 조잘대는 바람에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처음으로 미녀들한테 둘러싸인 것도 고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누나들, 저 정말 괜찮아요. 저 지금 싸움이 어떻게게 됐나 보러 가고 싶어요.”백연우는 웃으며 말했다.“갈 필요 없어. 정태곤이 도망쳤대.”“정말요? 너무 잘 됐어요!”내가 기쁜 건 정태곤이 도망쳤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양동준이 정태곤을 이겼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양동준의 실력이 정태곤 위라는 뜻이니까.‘역시 내가 사람 제대로 봤어. 너무 강하잖아. 내 우상다워.’나는 다급히 백연우를 보며 물었다.“그럼 지은 씨와 양동준 형님은 지금 어디 있어요?”“지은은 경호팀에 갔어. 아마도 경호원들 혼내러 갔을 거야 양동준은 모르겠는데.”나는 윤지은을 찾으러 경호팀에 가려고 했다.하지만 내가 떠나려 하자 누나들이 바로 나를 막아섰다.“수호 씨, 어디 가요?”내가 내 생각을 말하자 하정현이 양 팔을 벌리며 나를 막았다.“안 돼요, 못 가요. 지은이 가기 전에 나더러 수호 씨 잘 돌보라고 했어요.”“아니, 저 지은 씨한테 볼일 있어요. 갔다 올 거예요.”나는 애써 설명했지만. 누나들은 내 말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나를 끌고 방으로 돌아갔다. 휴식해야 한다면서.정말 휴식하기 싫은데 누나들의 고집을 못 이겨, 나는 결국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사람이 한가하면 폰을 보고 싶다.어젯밤부터 지금까지 폰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나는 인스타를 확인했다.그리고 놀랍게도 인스타에 60 몇 개의 소식이 떠 있었다.‘뭐지?’나는 얼른 클릭해서 확인했다.그리고 그제야 어젯밤 인스타 게시물을 올렸던 게 생각났다.내가 어제
민우는 카톡으로도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맨 먼저 요즘 뭐 하고 지내는지 물었다가 내가 답장하지 않자 지금 뭐 하는지 물었다.나는 바로 답장했다.[미안, 너무 바빠서 이제야 네 문자 보네. 넌 요즘 어떤데, 뭐 하고 지내?]민우의 답장은 매우 빨랐다.[나 요즘 강북에 있는데 할 일 없어. 어제 네가 올린 사진 용천 호텔이지?]이런 우연이, 민우도 강북에 있다니.나는 빠르게 답장했다.[응, 너 강북에 있어? 우리 시간 날 때 만나서 밥이라도 먹자.][좋아. 오늘 저녁 어때?][오늘 저녁은 안 돼. 나중에 시간 될 때 연락할게.][오케이. 그럼 연락 기다릴게.]민우와 대화를 하다 보니 약간 졸려 한숨 자고 싶었다.그때 내 핸드폰이 또 진동했다. 확인해 보니 여전히 신민우 문자였다.[수호야. 지금 이런 말 할 때 아니라는 거 알지만, 할 말 있어. 나 임설아랑 헤어지고 싶은데, 걔가 죽어도 싫대. 네가 나 대신 걔 좀 설득해 줄 수 있어?]임설아는 신민우의 여자 친구다. 두 사람은 대학 때부터 만났는데 늘 사이가 좋았다. 우리 침실 애들이 모두 두 사람을 부러워했으니까.나는 문뜩 궁금했다.[무슨 일인데? 너희 둘 사이 좋았잖아. 왜 갑자기 헤어지려는 건데?]민우가 답했다.[사이는 좋지. 그런데 걔네 부모님이 반대하셔. 내가 설아 계속 만나면 경차에 신고하겠대.]‘이렇게 심하다고?’[임설아는 그 사실 알아?][알아. 괜찮대. 나랑 같이 사는 건 자기지 자기 아버지가 아니라면서 부모가 반대해도 나랑 같이 있겠대.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어. 나 지금 아무것도 없고, 생활하는 것도 문제인데, 걔한테 미래를 약속할 수 없어.]나는 탄식했다.[하, 너희한테 소설에서만 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너 진짜 임설아 포기할 수 있어?][포기 못 하면 또 어쩌게? 너무 차이가 많은 사람은 미래가 없어.]비록 민우한테 무슨 일이 있는지 몰랐지만, 그의 말에서 요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일자리도 없어 사는 것도 문제이니 임
나는 임설아와 친하지 않다. 고작 식사 몇 번 해본 게 전부다.그런데 그런 사람을 설득하려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나는 우선 임설아에게 내 소개를 보냈다.[임설아, 오랜만이야. 나 정수호야. 민우 대학 동기. 민우한테서 너희 얘기 들었어. 내가 다 안타깝더라. 하지만 너와 민우의 앞날을 위해 잠깐 헤어져 있는 것도 괜찮다고 봐.]문자를 보낸 지 얼마되지 않아 임설아한테서 답장이 왔다.[민우랑 연락 닿아? 내가 보낸 문자에는 답도 없던데, 너와는 연락했어? 신민우 정말 나 안 사랑하는 거 아니야?]나는 얼른 대답했다.[아니야.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을 거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임설아는 나한테 우는 이모티콘을 여러 개 보냈다.[내가 볼 때 신민우 나한테 사랑이 식었어. 나를 아직도 사랑하면 어떻게 내가 허튼 생각하게 혼자 둘 수 있어? 내가 슬퍼하는 걸 어떻게 두고만 볼 수 있어? 흑흑, 차라리 죽는 게 나아.]임설아의 대답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덜컹했다.‘죽겠다니?’나는 얼른 임설아와의 대화 내용을 캡처해서 민우한테 보냈다.[임설아 상태 이상해. 얼른 답장해.]하지만 민우의 답장은 놀라웠다.[안돼. 난 답장할 수 없어. 희망을 줄 수 없어.]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걔가 정말 죽을까 봐 두렵지 않아?][안 그럴 거야. 설아 부모님이 집에서 지키고 있거든. 수호야, 나도 내가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참지 못할까 봐 겁나. 우리 관계 완전히 끊어내려면 내가 마음 독하게 먹어야 해. 나 정말 네 도움이 필요해. 설아도 그렇고.]‘젠장, 내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데?’내가 망설이고 있을 때, 민우가 또 문자를 보내왔다.[수호야, 사실 네가 모르는 사실이 있는데, 설아가 맨 처음 좋아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야.]‘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나는 왜 몰랐지?’민우는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다.[설아가 나를 통해 너한테 마음을 전달하려 했지만, 그러다 보니 우리가 가까워진 거고, 결국 우리가 만나
임설아의 자세는 매우 섹시하고 뭔가를 암시하고 있는 듯했다.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코피를 뿜을 뻔했다.겉보기에 얌전한 임설아가 사적으로는 이렇게 개방적이라니.‘이러다 내가 죄지을 것 같은데?’나는 어찌 된 일인지 두 손을 벌벌 떨며 참지 못하고 그 사진을 저장했다.그러고 나서 임설아에게 답장했다.[너 뭐 하는 거야? 민우가 알면 오해해. 얼른 사진 지워.]임설아는 사진을 지우기는커녕 나한테 또 사진 한 장을 보냈다.이번 사진은 더 색스러웠다.임설아는 스튜어디스룩에 검은 스타킹을 신은 채 의자에 앉아 두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치마 속 광경은 보일락 말락 해서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표정은 학교 선생 같은 표정이라 보기만 해도 자빠뜨리고 싶었다.나는 손을 더 심하게 떨면서 이번 사진도 저장했다.그때 임설아가 문자를 보내왔다에[마음에 들어?]나는 마음애도 없는 대답을 했다.[너 안 좋아하니까 사진 지워.][흥, 안 좋아하기는. 너 아니 척하는 거지?][임설아, 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아무리 실연했어도, 이렇게 막살면 안 되지.][민우한테 버려져서 안 그래도 사는 게 재미없어. 차라리 이대로 콱 죽어버리고 싶어. 하지만 이대로 죽기는 또 너무 아깝거든. 신민우랑 3년을 사귀었는데,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 게 말이 돼? 걔가 남자 맞는지 의심된다니까.]나는 민우 대신 해명했다.[민우 걔는 너 진심으로 사랑해. 너한테 미래를 약속하지 못할 것 같으니 건드리지 않는 거야. 너 책임 못 질까 봐.][누가 책임지라고 했어? 남녀가 같이 있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은 것뿐인데. 왜 그 소원도 안 들어주는데?][내가 사진으로 보낸 옷을 입고 민우를 꼬셨는데도 나한테 걔가 나한테 아무 짓도 안 했어. 걔 정말 문제 있는 거 아니야?]이렇게 입은 여친을 두고 건드리지 않았다니? 정말 성인이 따로 없다.나도 남자니까 이해할 수 없었다.나는 임설아에게 물었다.[민우한테 문제 있다고 생각하면서, 왜 개
[나 안 아파. 괜찮거든. 나 올해 스물셋이야. 주위에 다른 여자애들은 다 남자 친구가 있어. 나도 그저 남자한테 사랑받고 싶은 것뿐인데, 뭐가 잘못됐어? 그리고 이 나이에 한 번 그런 기분 느껴보고 싶은 게 잘못이야?]임설아가 보낸 문자를 보고 있을 때, 갑자기 긴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떨림이 있는 음성에 약간의 인내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정수호, 나 지금 참기 힘들어. 민우가 나 도와주지 않으니까 네가 도와줄래?]참고 있는 듯한 임설아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는 피가 솟구쳤다.심지어 임설아가 나에게 문자를 보내면서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다는 상상까지 됐다.문제는 임설아의 목소리가 너무 섹시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저도 모르게 임설아가 보낸 사진 두 장이 떠오르면서 상상이 펼쳐졌다.하지만 나는 이성을 잃지 않고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임설아, 너 이러면 안 돼. 그거 중독돼. 병원 가 봐.”그 뒤로 임설아는 동문서답하며 하고 싶다는 감정을 거리낌 없이 보여주었다.하고 싶지만 참는 듯한 임설아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마음이 요동치면서 하고 싶어졌다.임설아는 나에게 연속해서 열 몇 개의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도 모두 야릇한 소리를.나는 누군가 갑자기 들어왔다가 그걸 들을까 봐 다급히 볼륨을 낮췄다.임설아가 괴로워한다는 걸 알기에 나는 더 이상 답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참지 못하고 그 음성을 하나하나 들었다.그러다가 오르가슴에 도달할 때 임설아의 소리는 한껏 높아졌다.마치 오랫동안 참다가 끝내 욕망을 방출한 것처럼.살짝 놀라웠다.여자가 성욕을 풀 때도 이토록 에너지가 넘칠 줄은 몰랐다.성욕을 푼 임설아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미안, 네 앞에서 못 볼 꼴 보였네.]임설아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나도 문자로 답장했다.[괜찮아, 네가 편해졌다면 된 거지. 정말 괜찮아? 너 방금 소리가 이상했는데?][뭐가 이상해?][엄청 쌓였던 것 같아. 그래서 그런지 그 순간 화산이 폭발한 것처럼 스스로
“사모님, 이제 저 필요 없어요?”사모님 말에 나는 초조하고 서운했다. 갑자기 필요가 없어진 느낌이었다.그때 사모님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설명했다.“지금 그 꼴로 어떻게 운전하려고 그래요?”“지은더러 기사 새로 알아봐달라고 부탁한 거예요. 수호 씨가 필요 없어진 게 아니에요.”“그러니까 아직도 저 필요한 거 맞죠?”나는 초조하게 물었다.사모님은 내 말에 얼굴이 확 붉어졌다.“무슨 말이에요? 나 수호 씨 사장 사모님이에요.”나는 다급히 해명했다.“아니, 제 뜻은 저를 데리고 돌아가는 거 맞죠? 여기 혼자 버리는 거 아니죠?”“당연하죠. 내가 수호 씨 데리고 나왔는데, 버리고 갈 리 있겠어요? 그런데 수호 씨가 다쳐서 차 새로 알아봐서 따로 데려다주고 싶어요.”“싫어요. 저는 사모님과 같이 있을래요.”나는 무의식적으로 말했다.그 말에 사모님의 눈빛이 약간 어색해졌다.사모님이 내 말을 오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나도 덩달아 어색해졌다.‘어떻게 사모님한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나는 다시 해명했다.“사모님, 저, 저는 그저 사모님을 지켜주고 싶은 거지, 별 뜻 없어요.”“알아요.”사모님은 볼이 발그레해서 내 눈도 보지 못했다.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문에 분위기는 일순 어색해졌다.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나는 먼저 입을 열었다.“사모님, 저 목마른데, 물 가져다줄 수 있어요?”사모님은 얼른 일어나 나에게 생수 한 병을 건넸다. 그러고는 뚜껑을 열어 먹여주기까지 했다.나는 사실 한쪽 팔을 다쳤지만, 다른 한쪽은 움직일 수 있었다.하지만 사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려고 폐인처럼 행동했다.사모님이 가까운 거리에 앉아 향수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게다가 살짝 붉은색을 띤 희고 고운 피부가 눈앞에 보였다.나는 참지 못하고 사모님을 훔쳐보다가 하필이면 딱 시선이 마주쳤다.“왜, 왜 그렇게 봐요?”사모님은 어색한 말투로 물었다.나는 내 마음을 들킬까 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오히려 눈을 딱
나는 벌레를 찾은 것처럼 손을 뻗어 손가락을 튕겼다.“벌레는 이미 죽였어요. 그러니까 겁내지 마요.”사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어릴 때 아주 큰 벌레한테 물린 적이 있어서 그때부터 벌레를 엄청 무서워해요. 고마워요.”나는 죄책감이 밀려왔다.“고맙긴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수호 씨, 혹시 어디 불편해요?”너무 오래 앉아 있었는지 엉덩이가 근질근질했다.하지만 그걸 사모님한테 말하기가 부끄러웠다.“허리가 불편해요? 아니면 엉덩이?”사모님은 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걱정스레 물었다.엉덩이가 점점 더 가려워 손을 뻗어 긁고 싶지만 닿지 않았다.물론 낯 뜨거웠지만 너무 간지러워 나는 결국 사모님께 부탁했다.“사모님, 저 엉덩이 긁어줄 수 있어요? 바지 위로 긁어주면 돼요. 거기가 왜인지 계속 간지러워요.”“네? 아니...”사모님은 부끄러운지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정 안 되면, 애교 누나 불러줄래요?”나는 말하면서 애써 닿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닿지 않았다.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던 사모님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도와줄게요, 뒤 돌아요.”나는 얼른 뒤돌았다.그러자 사모님이 한참 망설이다가 끝내 백옥같은 손을 내 엉덩이로 뻗었다.“사모님, 걱정 마세요. 저 오늘 저녁 샤워해서 엉덩이 안 더러워요.”나는 사모님이 결벽증이라도 있을까 봐 설명을 덧붙였다.사모님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더러울까 봐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남자의 은밀한 부위에 손을 댄 적 없어서 어색해서 그래요.”“저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그곳이 너무 간지러워요.”“엎드려요, 긁어줄게요.”사모님의 새하얀 손이 겨우 내 엉덩이에 닿았다. 그러더니 살살 긁어주기 시작했다. 어찌나 살살 하는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조금만 더 세게 해줄래요? 아무 감각도 없어요.”사모님은 손에 힘을 더 실었다.그제야 간지럽고 괴롭던 느낌이 해소되었다.하지만 뒤돌아봤더니 사모님의 새하얀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나는 순간 너무 부끄러웠다.“사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연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기 때문이다.사모님은 커튼 뒤에 숨었지만 새하얀 발이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보는 내가 다 조마조마했다.만약 이 상황에서 들키면 입이 닳도록 설명해도 소용없을 거다.때문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모님을 막아섰다.“백 쌤, 왜 왔어요?”나는 가슴이 괜히 찔리기도 하고 어색했다. 심지어 이 정도로 다쳤는데 연기까지 해야 하는 내 신세가 불쌍했다.백연우는 허리를 살살 흔들며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 덕에 넥라인으로 가슴이 보였다.백연우는 가슴도 큰 데다 워낙 개방적이라서 남이 대놓고 보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뭐 하나만 물어볼게. 앞으로도 나랑 연락하고 지내고 싶어?”“네? 갑자기 그건 무슨 말이에요?”“오늘 오후 여기 떠나면 난 학교 돌아가야 하잖아. 이렇게 헤어지면 앞으로 연락할 일이 적을 거야. 하지만 난 이렇게 헤어지기 아쉬워. 넌 어때? 나랑 헤어지는 거 아쉬워?”나도 당연히 아쉬웠지만 방 안에 사모님이 있다는 게 문뜩 떠올랐다.이대로 인정해 버리면 사모님은 아마도 나를 가벼운 사람으로 생각할 거다.때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백 쌤은 학과장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넘보겠어요?”“감히? 왜 갑자기 거리 둬?”백연우는 내 볼살을 꼬집었다.“아니면 이젠 나랑 노는 게 질려서 차버리겠다는 거야?”나는 안절부절못했다.“질리다니요? 백 쌤, 헛소리하지 마세요.”나는 사모님이 나를 오해할까 봐 걱정되었다.“저 휴식하고 싶으니까 나가주세요.”나는 백연우가 더 말할까 봐 얼른 그녀를 쫓아내고 싶었다.하지만 백연우는 가기는커녕 아예 내 침대 위에 털썩 앉았다.“정수호, 너 이상한데? 솔직히 말해 봐. 왜 그렇게 급하게 쫓아내는데?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백연우는 말하면서 내 이불을 들췄다.내가 물론 그런 짓을 한 건 아니지만, 백연우가 너무 갑작스레 행동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뭐 하는 거예요? 저 이렇게 다쳤는데, 다정하게 대할 수
나는 재차 거절하며 말했다.“앞으로 우리 가게 자주 찾아와 주시면 돼요. 그러니 2억은 받을 수 없어요.”“에이, 수호 씨가 마음에 들어서 주고 싶어 주는 건 데도 안 받을 거야? 돈 받고 우리 딸이나 잘 만족시켜 줘.”이영미는 입을 가리고 몰래 웃었다.그에 반해 나는 그 말에 너무 충격을 받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님은 제가 지은 씨랑 만나는 거 괜찮아요?”“괜찮지 그럼. 이렇게 잘생기고 몸매도 좋은 남자애가 또 어디 있다고. 수호 씨가 우리 딸 만족시켜 주면 우리 지은이도 좋아할 거야.”“난 개방적인 사람이라 우리 딸만 즐겁고 행복하면 돼. 결혼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잠깐 만나다 헤어지면 그만이야.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 윤씨 가문은 지은이를 먹여 살릴 수 있어.”처음 들어보는 관점에 나는 크게 놀랐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윤씨 가문은 워낙 재산이 많고 부부가 워낙 개방적이니 결혼이 최종 귀착점이 아닐 수 있었다.게다가 이영미는 자식이라고는 윤지은 한 명뿐이니, 당연히 자기 딸이 행복하기를 바란다.“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부끄럽네요. 하지만 어찌 됐든 이 돈은 받을 수 없어요...”“안 받으면 안 돼. 안 받으면 수호 씨가 우리 지은이 만족시켜주지 못할까 봐 걱정돼. 우리 지은이가 불감증인데 수호 씨를 못 잊는 걸 보면 수호 씨가 그쪽 방면으로 꽤 쓸만하다는 뜻이니까.”“콜록콜록...”나는 침에 사레가 들렸다.“어머님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에요...”“구체적인 상황이 어떻든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우리 지은이가 수호 씨랑 같이 있고 싶어 하고 나도 수호 씨가 마음에 드니까, 수호 씨는 우리 지은이만 만족시켜. 난 우리 딸이 평생 즐거움을 경험해 보지 못하는 건 바라지 않아. 그러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뭔 소용이 있어?”역시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다는 걸 나는 다시 한번 느꼈다.나는 열심히 돈 벌어 출세하려고 아득바득하고 있는데, 이영미는 벌써 후대의 행복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그것도 이토록 깊숙이.그때
소설 중간마다 가끔 나오는 삽화는 수위가 너무 높았다.나는 이런 걸 이해할 수 없지만 요즘 많은 여자애들 사이에서 비엘이 인기라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그런데 이영미도 그중 하나였을 줄은 몰랐다.나는 책을 다시 책장에 밀어 넣고 다른 책 하나를 골랐다. 이번에는 비엘 만화였다. 이영미가 이 정도로 심각하게 베엘에 빠져 있는 사람이었다니.나는 그 책을 도로 꽂아 넣고 또 다른 책을 골랐다. 하지만 이번 역시 비엘 만화였다.알고 보니 책장 전체에 이런 책들뿐이었다.나는 너무 어이없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보아하니 이영미는 평소 이런 책을 즐겨 보고 윤해철은 이영미를 무척이나 아끼기에 특별히 아내를 위해 전문 책장까지 만들어준 모양이었다.볼 수 있는 책이 없어 나는 결국 새를 구경하러 갔다.어떤 새들은 마치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무척 재밌게 행동했다.그중에 말할 수 있는 앵무새 두 마리가 있었는데, 나는 참지 못하고 그 앵무새들을 건드렸다.그때 한 앵무새가 갑자기 이영미와 비슷한 목소리를 냈다.“여보, 샤워해.”그러자 다른 앵무새가 잇따라 소리 냈다.“같이 씻을래?”“좋아. 난 역시 욕실이 좋아...”대화가 이어지는 두 앵무새를 보니 나는 넋을 잃었다. 앵무새까지 이 정도로 밝히는 걸 보면 평소 이 집 부부가 얼마나 붙어 있는지 알 수 있었다.그 뒤로 무려 2시간 뒤에 윤해철과 이영미는 함께 내려왔다.나는 속으로 윤해철의 지속력에 감탄했다.이영미는 얼굴이 발그스름했고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오래 기다렸지?”“아니에요.”나는 예의상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지만 솔직히 더 이상 기다리기 힘들었다. 아니, 참기 힘들다는 게 더 맞을지도.집안 곳곳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분위기에 보통 사람들이 오면 정말 견디지 못할 거다.“수호 군, 잠깐만 기다려. 내가 바로 수표를 써줄 테니까.”윤해철은 내려올 때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가 돋보인다던 양복을 입고 내려왔다. 그 모습은 같은 남자인 내가 봐도 너무 멋있었다.그러니
“크흠...”나는 일부러 헛기침하며 뒤에 나도 앉아 있다는 걸 티 냈다.그런데 이영미는 오히려 깔깔 웃으며 말했다.“수호 씨는 한숨 자. 나는 우리 남편과 볼일이 좀 있으니까.”‘이건 무슨 상황이지?’무엇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잘 수 있을 리가 있나?“저기 두 분 좀만 참으세요. 이따가 집에 도착하면 마음껏 하셔도 돼요.”우리 부모님과 비슷한 또래의 부부에게 이런 말을 하려니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그때 이영미가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이런 걸 어떻게 참아? 수호 씨도 경험 있을 거 아니야. 하고 싶을 때 쉽게 참아져?”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그럼 저 먼저 내렸다가 두 분 끝나면 다시 올게요.”“그럴 필요 없어. 그냥 앉아 있어. 차는 움직일 때 더 느낌 있으니까.”내 옆에 앉은 기사는 이런 대화를 듣고도 덤덤한 표정이었다. 보아하니 자주 있는 일이라 익숙해진 듯했다.결국 나는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잠이 올 리가 만무했다.그도 그럴 게, 귓가에 자꾸만 이영미의 애교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으니까.비록 두 사람은 정말 몸을 섞지는 않았지만 서로 희롱하며 불장난하는 모습만 봐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심지어 가끔 몸을 저릿하게 하는 말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이 점으로 보면 두 사람이 평소 자주 야릇한 농담을 주고받는다는 걸 알 수 있었다.둘의 대화를 몰래 듣고 있다 보니 나는 점점 부러웠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도 나중에 늙어서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집으로 가는 내내 화끈한 장면이 뒤에서 생중계되는 바람에 영화를 관람할 때보다 더 괴로웠다.심지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윤해철은 이미영을 안고 서둘러 침실로 돌진했다.운전기사이자 윤씨 가문 집사인 손정현은 나를 거실로 데리고 가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그때 나는 문득 궁금해서 물어봤다.“혹시 기사님은 아무 반응도 없어요?”손정혁은 덤덤하게 대답했다.“나도 이제 50이 넘는데 무슨 반응이 있겠어요?”“50이 넘는다고 나이 든 건 아
하지만 윤지은은 겉으로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뜬금없이 왜 이래?”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윤지은이 대놓고 거절하지 않았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뜻이니까.나는 말을 이었다.“우리가 서로 날을 세우고 있는 게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수많은 사람 중에 서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안 그래요?”“그런 거 묻지 마. 난 몰라.”윤지은은 답변을 거절했다.이에 나는 싱긋 웃었다.“저는 지금 이대로가 편한 것 같아요. 사실 지은 씨가 말은 독하게 하지만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는 거 알아요.”“내가 그딴 감언이설에 넘어갈 것 같아? 그럴 시간에 사업이나 일궈.”“안 그래도 사업은 할 거예요. 참, 이틀 뒤에 천수당이 개업하는데 지은 씨도 와요.”“시간 봐서. 스케줄 없으면 가고, 있으면 못 가.”윤지은은 항상 이런 식이다. 어느 한번 애교 누나나 형수처럼 확정된 대답을 할 때가 없다.하지만 윤지은이 이렇게 말한 것만 해도 나는 무척 기뻤다.나는 다른 걸 바라지 않는다. 그저 우리가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면 친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서로 틀어져 영원히 얼굴 보지 않는 관계보다는 나으니까.우리가 한창 대화하고 있을 때 이영미와 윤해철이 짐을 챙겨 나왔다.나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짐을 대신 들었다.윤지은은 아버지한테 여전히 쌀쌀맞게 굴었지만,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 나오라는 건 고분고분 동의했다.차에 오른 뒤 윤해철은 참지 못하고 한탄했다.“지은이 쟤는 성격이 누구를 닮았는지 아주 고집불통이야.”“누구를 닮았긴? 당연히 당신을 닮았지. 당신도 젊었을 때 저랬잖아.?”“내가 그랬다고? 난 당신 앞에서 저런 적 없는데?”윤해철은 인정할 수 없었다.그때 이영미가 윤해철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내 앞에서는 그런 적 없어도 아버님 앞에서는 그랬잖아. 잘 생각해 봐. 지은이 성격 당신이랑 똑 닮았지?”윤해철은 난감한 듯 얼굴을 붉혔다.생각해 보니 확실히 그런 것 같았다.젊었을 때 윤해철은 사업
“지금이야 그렇게 말하지만 정말 그런 사람 만나면 생각이 바뀔 거야.”윤해철은 여전히 자기 생각을 고수했다.다만 윤지은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하, 쓰레기가 얼굴에 쓰레기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 부잣집 도련님 중에 쓰레기가 없다는 건 어떻게 장담해요? 아빠는 그동안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 봤잖아요. 그럼 아빠가 한번 말해 봐요. 평소 만났던 부잣집 도련님 중에 한 사람만 바라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었어요?”“다 싸잡아서 욕하지 마. 부잣집 도련님이 얼마나 많은데 그중에 누군가는 네가 말한 그런 사람이 있겠지...”“저는 싸잡아서 욕한 적 없어요. 그저 어떤 신분의 남자든 쓰레기는 똑같이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었어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래요. 그 누구도 저를 강요할 수 없어요.”“아빠가 정말 저를 아끼고 사랑하고 저를 위해 생각한다면 제 의견도 존중해 줘야 하잖아요. 계속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강요할 게 아니라...”“내가 언제 강요했다고 그래? 몇천억짜리 회사를 그냥 주겠다는데 그게 왜 강요야?”두 부녀가 싸움 날 것 같자 이영미는 얼른 끼어들어 분위기를 풀었다.“됐어. 그만 싸워. 어쩜 부녀라는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 싸워대? 지은아, 가업을 잇고 싶지 않으면 잇지 마. 네가 하고 싶은 걸 해. 엄마가 네 편 들어줄게. 오늘 식사 자리에 꼭 참석해. 엄마 체면 봐서라도. 알았지?”윤지은은 소파에 기대앉아 건성으로 대답했다.“나중에 주소 보내줘요.”그 말에 이영미는 활짝 웃었다.“그래. 레스토랑 예약하면 바로 알려줄게.”“여보, 나 짐 싸는 거 좀 도와줘.”이영미는 윤해철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홀로 남겨진 나는 윤지은을 빤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 곁으로 움직였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나를 째려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야?”“얘기 좀 해요.”“우리 사이에 할 얘기가 있던가?”“아무 거나 얘기하면 되죠. 그러고 보니 우리 안 본 지 꽤 됐잖아요.”“차라리 평생 내 눈앞에서
윤지은은 오늘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벨 소리에 문을 연 순간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이 있는 모습에 잠깐 넋을 잃었다.나 역시 잠옷을 입고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윤지은을 보고 잠시 넋을 잃었다.윤지은은 평소 병원에 있을 때 항상 머리를 높게 얹고 흰 가운을 걸치고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때문에 윤지은이 잠옷 차림으로 머리를 부스스하게 풀어 헤친 이웃집 동생 같은 모습을 한 걸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손에 의학서적 한 권을 들고 있어 박학다식한 학자 가문 집 딸내미 같은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이건 너무 큰 반전이었다.그때 윤지은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홱 째려봤다.“뭘 봐? 여긴 왜 왔어?”나는 얼른 생각을 정리한 뒤 해명했다.“저도 윤지은 씨 어머님 아버님과 함께 왔어요.”이영미는 얼른 내 편을 들었다.“지은아, 엄마랑 아빠가 화해한 거 다 수호 씨 덕분이야. 오늘 저녁 수호 씨한테 밥 사주기로 했는데 너도 같이 와.”“저는 됐어요. 바빠요.”윤지은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색다르게 보였다.그때 이영미가 친근하게 딸의 팔짱을 끼며 애교 부렸다.“가자. 우리 가족이 오붓하게 식사하는 거 오랜만이잖아. 엄마가 부탁할게. 응?”이영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윤지은도 더 거절할 수 없었다.그때 윤해철이 대뜸 물었다.“넌 여기서 언제까지 살 거야?”“그게 아빠랑 뭔 상관인데요?”“지은, 아빠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저 원래 이런 거 알잖아요. 듣기 싫으면 듣지 말던가요.”윤지은은 말을 마친 뒤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그 모습을 보며 윤해철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우리 부녀는 전생에 원수였나 봐. 오랜만에 만나는데 가족애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네. 하.”나는 이 상항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윤지은이 나한테만 쌀쌀맞게 구는 게 아니라 친아버지한테도 쌀쌀맞게 구는 것 같았다.‘원수를 스스로 만드네.’윤지은은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
강용재라면 바로 임천호 곁을 지키던 그 덩치다.전에 백조의 호수 근처에서 강용재가 나를 미행했던 적이 있다. 다만 내가 정신없을 때 양동준이 나타나 위기를 넘긴 거였다.나는 이제야 임천호가 나를 쉽게 놓아줄 리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동안 윤지은이 양동준더러 은밀히 나를 지켜주라고 한 덕에 그동안 내가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거였다.그런데 이제 양동준이 출장 갔으니 강용재는 나 혼자 상대해야 한다.예전 같았으면 나는 분명 불안했을 테지만 지금은 두렵지 않았다.두려움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 사람들은 상대가 두려워한다고 동정하거나 불쌍하게 여길 사람이 아니다.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요즘 나와 윤지은은 거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게 양동준더러 나를 보호하라던 것까지는 영향이 미치지 않은 모양이다.자세히 생각해 보니 내 목숨은 윤지은이 구해준 것이기에 나는 윤지은한테 화를 낼 자격이 없었다.나는 그저 이영미 쪽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러면 이영미가 나를 도와 좋은 소리 몇 마디 해주면 나와 윤지은의 관계도 완화될 수 있으니까.아파트 단지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마침 이영미와 윤해철을 만났다.이영미는 다정하게 윤해철의 팔짱을 끼고 있었고 얼굴이 발그스름한 게 한눈에 봐도 사랑을 듬뿍 받은 티가 났다.윤해철 역시 활기가 차 넘치는 게 전에 여색에 관심조차 없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두 사람 사이가 더 화목해진 걸 보니 나는 흐뭇했다.“사모님, 윤 회장님.”나는 먼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그러자 이영미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수호 씨 정말 대단하더라? 우리 남편 지금 엄청 끝내줘. 호호호...”이영미는 말하는 와중에도 흐뭇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그때 나는 이내 겸손하게 말했다.“별말씀을요. 다 윤 회장님이 꾸준히 단련하고 보양에 신경 쓴 덕분이에요. 그 기초에 제가 약물로 조금 치료해 드리니 바로 나은 거예요. 기반이 좋지 않으면 제가 아무리 약을 들이부어도
하정현의 아버지 하대철은 재직할 때, 많은 지역의 거물들에게 미움을 샀었다. 때문에 하대철이 무너지자마자 그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이 하정현과 하정현의 어머니 진수향을 잡으려고 쫓아다녔다.그래서 진수향은 할 수 없이 몸을 숨겼고 하정현 역시 강북으로 도망쳐 와서 윤지은을 찾았다.하지만 하정현은 이런 일들을 윤지은한테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동안 윤지은의 기분이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하정현은 평소 털털하고 덤벙거리는 것 같지만 사실 매우 섬세했다. 때문에 기분도 안 좋은 친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아직 강북까지 쫓아온 건 아니기에 시간이 있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날 밤 용천 호텔에서 하정현은 아버지를 구해내라는 진수향의 전화를 받았다.하정현도 답답한 마음에 푸념했다.“제가 무슨 수로 아버지를 구해요? 제 코가 석 자인데...”[그런 건 모르겠고 우리가 너를 힘들게 키워 놨으니 이제 너도 은혜를 갚을 때가 됐어. 만약 네 아버지를 구해내지 못하면 앞으로 너 같은 딸 둔 적 없다고 생각할 거야.]진수향의 말은 너무 모질고 무자비해 하정현은 기분이 계속 안 좋았다. 심지어 그때 하정현은 생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다.하지만 나와 사모님이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본 순간, 하정현은 스스로 자멸할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정현은 나쁜 놈 손에 유린당할 바에는 차라리 처음을 원하는 사람한테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강요는 아니니까.그런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하정현은 나를 찾아왔었다. 진실을 끝까지 얘기하지 않은 건 단순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하정현은 자신의 비참한 가정사를 들키고 싶지 않았고 내가 그 때문에 자기를 동정해서 도와줄까 봐 싫었다.매일 가슴 확대 수술을 입에 달고 사는 듯하지만 사실 그건 하정현이 스스로를 속이려는 말이었다.생존조차 어려운 여자가 가슴 확대 수술에 신경 쓸 여력이 있을까?하정현은 단지 몸매를 더 예쁘게 만들어 모델 일이라도 하거나 아니
“보니까 은근히 지은이길 바라네?”나는 윤지은이라고 확신했기에 하정현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그건 아마도 그 상대가 윤지은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커서였을 수도 있었다. 정말 윤지은이면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생각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당연하죠. 그럼 더 이상 알아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동안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겠어요.”“너무 쉽게 생각하네. 수호 씨가 비록 임유미 씨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딱 한 끗 차이였어. 본인이 키스했던 사람이 수호 씨라는 걸 발견했을 때 유미 씨 표정이 어땠는지, 수호 씨는 아마 모를 거야.”그 말은 단번에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놀라던가요? 아니면 실망하던가요?”“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놀라움과 실망감도 있긴 했지만 뭔가 더 있었어.”“뭐가요? 무슨 뜻인데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러자 하정현은 귀찮았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몰라.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보지 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유미 씨는 상대가 수호 씨라는 걸 발견한 뒤에도 수호 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어.”“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모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나는 사모님을 대신해 해명했다.하정현은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유미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아무튼 알아요.”“그럼 내 친구 지은이는 그런 사람이고?”“그런 뜻 아니에요.”“정수호, 수호 씨는 항상 본인 입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더라. 그 사람을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지은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심지어는 수호 씨네 형수와 애교 씨도 제대로 알아본 적 없지? 두고 봐, 두려워할수록 그 일이 닥칠 테니까.”하정현의 애매모호한 말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아무것도 아니야. 할 말은 다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