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은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나중에 내 불장난에 내가 타죽지 않으려면 이쯤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계속 문자를 보내던 윤지은은 문자 전송에 실패하자 그제야 자신이 삭제당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순간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개자식! 역시 남자는 다 똑같아!”윤지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어디론가 전화했다.그리고 곧바로 건너편에서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윤지은은 내 카톡을 캡처해서 보내고 차갑게 말을 이었다.“이 사람 개인 정보 좀 알아봐요. 한 시간 줄 테니까, 그사이에 알아내요.”[네!]윤지은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고 씩씩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그 시각, 호화로운 별장 안.개량 한복을 입은 한 노인이 웬 중년 남자가 다가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회장님, 아가씨께서 전화로 사람을 조사해달라고 합니다.”중년 남자의 이름은 윤해철, 윤지은의 아버지다.윤해철은 서예를 연습하고 있다가 노 집사의 말에 덤덤하게 말했다.“처음으로 부탁하는 건데 도와주게. 방법이 없어서 그러는 걸 테니까.”“회장님, 아가씨께서 한동안 집에 안 돌아오셨는데, 식사하러 오라고 할까요?”윤해철은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았다.“그 말을 들을 것 같나?”답은 당연히 아니다.윤해철은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자기 핏줄인데, 자기 딸 성격도 모를까?‘정말 제 어미 고집을 아주 똑 닮았네.’‘한 명은 밖에서 돌아다니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고, 한 명은 친정에 가서 돌아올 생각이 없고.’윤해철은 오랜만에 한가한지라 모녀가 돌아오는 게 싫었다.물론 조금은 이기적으로 느껴질 테지만, 인간의 본성은 원래 이기적인 것 아닌가?“해달라는 대로 하고 나머지는 신경 쓸 거 없어.”윤해철은 다시 붓을 들고 서예를 시작했다.젊었을 때 윤해철은 처자식이 있는 생활을 갈망했는데, 나이가 드니 오히려 자유가 고팠다.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좋다고 느껴졌다.,그때, 익숙한 목소리
“나 몰래 밖에 나돌아 다니지 않았지? 딴 여자 만나지 않았지?”윤해펄은 다급히 맹세했다.“나 하늘에 대고 맹세해. 난 당신한테 미안한 일 한 적 없어. 이게 거짓이면 천벌 받아 죽을 거야!”이영미는 그래도 남편이 아까운지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떡하라고? 과부가 되라고?”이영미는 말하면서 남편의 품에 기댔다.두 사람은 벌써 스무 날도 넘게 보지 않아, 이영미는 남편이 무척 그리웠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돌아온 거고.윤해철은 아내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다만 요즘 여자는 필요도 없고, 성욕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서예나 하는 게 성관계를 하는 것보다 더 재밌었다.때문에 윤해철은 얼른 이영미를 밀어냈다.“여보, 이제 막 돌아와서 피곤하지? 내가 어깨 주물러 줄게.”윤해철은 말하면서 아내를 끌어와 의자에 앉혔다.하지만 남편의 행동에 이영미는 화가 더 치밀었다.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용기 내어 먼저 돌아와 이렇게까지 하는데, 손도 안 댄다고?’‘계속 냉전하자는 거야 뭐야?’“누가 당신 마사지나 받겠대? 당신 대체 무슨 뜻이야?”윤해철은 일부러 모르는 척 말을 흐렸다.“내가 무슨 뜻은, 당신 아껴주는 거잖아.”이영미는 씩씩거리며 말했다.“이게 아껴주는 거야? 일부러 나 밀어내는 거지. 지금 당신을 봐, 나를 다시 친정에 보내려고 용쓰는 거잖아.”“아니야!”‘설득력이 하나도 없잖아.’이영미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눈시울을 붉힌 채 말했다.“지은도 당신이 변했다던데, 역시 맞았네. 이대로 살 거면 이혼해.”말을 마친 이영미는 화를 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아내가 화를 내며 떠나자 윤해철은 얼른 쫓아갔다.“여보, 이제 막 돌아왔으면서 어디 가려고?”이영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화를 내며 말했다.“지은이한테 갈 거야. 앞으로 우리 모녀가 같이 살 거니까, 당신은 혼자 살아.”“여보, 안돼. 돌아와...”윤해철은 입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쫓아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 시각, 나는 욕조에 누워 핸드폰으로 쇼츠를 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란 나는 바로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나예요, 문 열어요!”윤지은의 목소리였다.나는 순간 마음이 찔려, 윤지은이 내 다른 신분을 눈치챈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정말 따지러 왔으면 어떡하지?’그렇다면 절대 문 열어주면 안 된다.나는 욕조에서 나와 목욕 타월로 몸을 두르고 문 앞에 다가가 물었다.“내 방에는 왜 왔어요?”“할 얘기가 있으니까 문 열어요!”“할 말 있으면 밖에서 해요.”나는 문을 열 배짱도, 마음도 없었다.그러자 윤지은이 싸늘한 경고를 날렸다.“셋 셀 테니까 순순히 열어주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차버릴 태니까.”“미쳤어요? 갑자기 화내면서 찾아와 문 열라고 하는 게 어디 있어요? 그쪽이 나한테 뭐 할 줄 알고? 그리고 할 말 있으면 밖에서 말하라니까, 왜 자꾸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목적이 뭐예요?”윤지은은 내 설명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카운터를 시작했다.“셋, 둘...”나는 이렇게 가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윤지은은 워낙에 막무가내기에 나는 얼른 침대 쪽으로 달려가 프런트에 전화했다.“여보세요? 여기 미친 여자가 자꾸만 내 방문을 차고 있어요. 얼른 와서 데려가요.”‘내가 쫓아내지 못한다고 호텔 직원도 쫓아내지 못하겠어?’나는 전화를 끊은 뒤 방에서 기다렸다.하지만 미친 듯이 쾅쾅거리며 문을 걷어차는 소리에 너무 섬뜩했다.다행히 호텔의 서비스가 좋아 3분도 안 돼서 직원이 도착했다.호텔 직원이 나서니 나는 그제야 안심됐다.‘이제는 함부로 하지 않겠지?’“아가씨, 왜 그러십니까?”“이 문 열어.”나는 문에 바싹 기대 밖의 대화를 들었다. 하지만 밖의 대화에 어리둥절했다.‘여긴 고객님이 아니라 아가씨라고 하나?’‘방금 그게 윤지은 목소리인가?’내가 멍해 있을 때,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그러더니 윤지은이 싸늘
윤지은이 그저 평범한 의사인 줄 알았는데, 배경이 이렇게 빵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나는 한순간에 기가 죽어 윤지은을 보며 말까지 더듬었다.“대,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윤지은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차갑게 물었다.“아까 백연우랑 잤지?”나는 윤지은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에 거짓을 말해야 할지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도 막막했다.머리가 너무 복잡해 언어 기능도 상실한 기분이었다.내가 계속 대답하지 않자 윤지은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묻잖아. 왜 멍때리고 있어?”나는 깜짝 놀라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결국 전전긍긍하며 말했다.“아니요. 계속 방에 있었어요.”나는 고민한 끝에 결국 거짓말을 선택했다.이 여자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친구와 잤다는 걸 안 될 것 같았다.사람은 무서운 소유욕을 갖고 있는 데다 쉽게 질투하는 동물이다.이미 본인과 잤는데, 친구와도 잤다는 걸 알면 윤지은은 본인이 백연우보다 못한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때문에 그런 상황을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인정하지 않는 거다.윤지은은 믿기지 않는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정말? 한 시간 넘게 목욕하고 있었다고? 껍질 벗겨질까 걱정도 안 되나?”나는 뻔뻔하게 말했다.“이런 곳에 처음 왔으니 뭐든 잘 누려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좀 오래 한 건데, 안 돼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의심을 풀었다.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내내, 내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윤지은은 탐정처럼 내 방을 한 바퀴 빙 둘러봤다.난 윤지은이 여자 셜록홈즈라 불릴 정도로 관찰력이 뛰어난 걸 알고 있다.그래서 내가 썼던 종이를 방까지 가져오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지 않으면 빼도 박도 못할 테니까.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자의 치밀함과 논리적 사고 능력을 쉽게 봤다.유지은은 욕조 앞에 다가가 허리를 숙인 채 안을 쓱 만지더니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졌다.“거짓말하네.”나는 너무 당황해서
윤지은의 압박에 나는 심장 박동이 멈춘 것 같았다.특히 나를 꿰뚫어 볼 것 같은 두 눈을 보면 마치 내 모든 치부가 드러난 것처럼 불편해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나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했다.“그런 거 아니에요.”윤지은은 차가운 얼굴로 나한테 걸어왔다. 그녀는 남의 기분을 잘 엿보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내가 대답할 필요도 없이 답을 얻었다.그 시각 윤지은은 마음이 복잡했다.입으로는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자꾸만 부정했지만 내가 자기 친구 백연우랑 잤다는 추측이 들자 너무 괴로웠다. 마음이 복잡해 딱 어떤 기분이라고 정의 내리기도 힘들었다.그런 윤지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나는 그저 윤지은에게 진실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차갑게 말했다.“고개 돌려서 나 봐.”명령 투인 말투와 부잣집 아가씨라는 신분은 나에게 압박으로 작용했다.솔직히 겁먹었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이 호텔 전체가 윤지은네 건데,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나는 조심스럽게 윤지은을 바라봤다. 이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인지 볼 수 없었지만 아주 엉망이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대체 뭘 원해요? 내가 윤지은 씨한테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솔직히 말해. 내 친구 백연우랑 무슨 사이냐?”윤지은은 역시나 내가 솔직히 말하는 걸 듣고 싶어 했다.하지만 나는 너무 무서웠다. 윤지은이 나를 계속 몰아붙이는 게 뭐 하자는 건지 모르니까.결국 나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안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 리가 없잖아요.”윤지은은 내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자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그 순간 나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이 여자가 대체 뭐 하자는 거지?’윤지은은 나를 보며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 그럼 가서 백연우한테 말해. 백연우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한다고.”“미쳤어요? 뜬금없이 가서 그런 말을 왜 해요?”나는
“안 그러면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마지막 한 마디는 협박이 아닌 강조였다. 심지어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그 때문에 나는 백연우와 있었던 일을 더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로 억울하고 답답해 당장이라도 이 여자를 침대에 눕혀 혼내주고 싶었다.“그런데 이렇게 뜬금없이 가서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 너무하지 않아요?”나는 윤지은의 위세에 눌려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연우를 찾아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방금 전에 그런 짓을 했는데 이제 와서 안 좋아한다고 하는 건 매너가 아니니까.윤지은이 나한테 자꾸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건 내가 정말 백연우한테 그런 말을 하길 바라 것보다 시험해 보자는 마음이 더 컸다.혹은 내 입으로 직접 솔직한 말을 듣고 싶거나.윤지은은 내가 끝까지 부정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오히려 이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내가 바로 인정하면 윤지은은 오히려 받아들일 수 없었을 테니까.윤지은은 결국 한 걸음 양보해서 말했다.“그래요, 뭐 이번에는 용서해 줄게요. 하지만 잘 들어요. 앞으로 내 친구 세 명 중 그 누구에게도 손대지 마요!”“만약 상대방이 나를 건드리면요?”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그랬더니 윤지은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걔네가 어딜 만지면 수호 씨 어딜 망가뜨릴 거예요.”‘헐.’‘카리스마 사장님에 관한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어쩜 이리 막무가내지?’나는 바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상대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래요. 하라는 대로 할게요. 부잣집 아가씨의 명령이니까.”나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노려보더니 내 방에서 나가 808호실로 돌아갔다.엉망이 된 방 안을 보니 지은은 마음이 어수선해 바로 담당 부서에 전화했다.“808호실 모든 침구 세트 바꿔. 싹 다!”“네, 아가씨.”호텔 직원의 업무 처리 효율은 대단했다. 30분도 안 되는 사이에 방 안의 모든 것이 새것으로 바뀌었다.심지어
순간 웃음이 터졌다.‘뭐야? 내가 자기 없으면 못 사는 줄 아나? 어디서 아가씨 성질을 나한테 부려?’‘누가 신경이나 쓰는 줄 아나?’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 비위를 맞춰야 했다. 안 그러면 희롱하지 못하니까.결국 나는 윤지은에게 답장했다.[내가 설마 그쪽을 차단했겠어요? 전에는 실수로 연락처가 지워진 것뿐이에요.][내가 바보인 줄 아나!]나는 웃는 이모티콘을 쓰며 답장했다.[진짜예요. 그쪽처럼 예쁘고 몸매도 좋은 여자를 내가 왜 차단하겠어요?][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전에 한 말 생각해 봤어요?][생각해 봤는데, 사귀어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우선 만나지 않을 수 있어요?][만나 보지도 않고 어떻게 연애한다는 거예요?][안될 것도 없죠. 우선 연락하면서 서로 알아가면 되죠. 난 좀 늦게 끓는 성격이라 먼저 만나면 어색할 거예요.][그럼 됐어요. 다른 사람 찾지 뭐.]나는 사실 어장관리를 하려고 이렇게 말한 건데, 윤지은이 이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의외의 대답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었다.그 시각, 윤지은의 마음은 이미 다른 데로 가버렸다. 오히려 그녀야 말로 나와 사귈 생각이 사라져 나를 자기 어장에 들일 생각이었다.집사 아저씨가 신원 조사를 끝내면 나를 꼬셔내 얼굴을 직접 볼 계획이었으니까.그때, 윤지은의 핸드폰이 윙윙 진동했다.헤드폰을 들어 확인하니 다름 아닌 어머니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윤지은은 미간을 좁혔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 다만 말투가 쌀쌀맞았다.“엄마,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전화해요?”이영미는 전화 건너편에서 씩씩거렸다.[나 네 아빠랑 못 살겠어. 이혼할 거야. 지은아, 너 지금 어디야? 엄마가 네 집으로 갈게, 앞으로 우리 모녀가 같이 살자.]윤지은 어머니의 말에 어리둥절했다.“무슨 상황이에요? 또 아빠랑 싸웠어요?”‘한 달 전에도 싸우고 친정에 가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했으면서.’이영미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도 않아 계속 화만 냈다
애교 많은 여자는 운명도 좋다는데, 윤지은은 자기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아버지는 항상 어머니한테 고분고분하고 뭐든 들어주고 예뻐해 줬으니까.심지어 이영미가 윤지은을 낳을 때 너무 아파 둘째는 절대 안 낳는다고 쐐기를 박아 두는 바람에, 윤해철은 정말로 아내에게 둘째를 낳지 못하게 했다.부모님이 아무리 닦달을 해대도 윤해철은 계속 마누라 편만 들어 결국 윤씨 가문에 후손이라곤 윤지은 한 명뿐이다.때문에 윤해철은 어릴 때부터 딸을 미래에 자기 회사를 잇는 후계자로 정성껏 키웠다.하지만 윤지은은 재계에 전혀 관심이 없고 의학을 좋아했고, 어머니처럼 고집스럽기까지 해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대에 합격했다.그때로부터 두 부녀 사이에 모순이 생겼다.다만 윤지은은 그딴 건 상관하지 않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뭐든 했기에 지금 두 부녀 사이가 매우 긴장하다20분도 채 안 되어 이영미가 용천 호텔에 나타났다.“사모님...”“쉿!”이영미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호텔 지배인에게 말했다.“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여기 고객과 똑같이 대해. 아가씨는 어디 있지? 방은 몇 호실이야?”이영미는 누가 제 신분을 알아챌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그 모습은 귀엽기도 하면서 조금 웃겼다.지배인이 다급히 말했다.“아가씨는 VIP 구역 808호실에 묵고 계십니다.”“그래, 알았어. 다들 일 봐. 별일 없으면 나 방해하지 말고.”이영미는 곧장 VIP 구역으로 향했다.그리고 얼마 뒤 808호실 앞에 도착했다.윤지은은 조심조심 행동하는 어머니를 보자 말문이 막혔다.“엄마, 뭐 해요?”“쉿, 아는 사람 만날까 봐 오는 내내 조심하면서 왔어. 얼른 들어가게 좀 비켜 봐. 아는 사람 만나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안 그러면 네 아빠... 아니, 그 남자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 거 아니야.”이영미는 매번 화날 때마다 남편을 낯선 사람처럼 대하며, 윤해철을 그 남자라고 칭한다.그것에 이미 익숙해진 윤지은은 팔짱을 낀 채 ‘또 왜 이러지?’하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주해진을 바라봤다.“왜 이렇게 쉽게 돈을 주는 거지?”주해진이 오늘 이 사달을 벌이느라 분명 적지 않은 돈을 썼을 텐데, 나한테 2천만 원 가까이 되는 돈까지 배상하니 또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지 심히 의심됐다.“이 전에는 이대로 넘어가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 댔는데, 두 사람 실력을 보니 승복했거든. 두 사람 말대로 나도 젊을 때는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굴렀는데, 한 번도 두 사람처럼 죽기 살기로 싸우는 사람을 못 봤거든.”사실 주해진은 말을 아꼈다. 그가 가장 두려운 건 우리의 믿기지 않는 전투력이 아니라 궁지에 몰렸으면서 상황을 역전한 거였다. 그거야말로 가장 두려운 거였으니까.주해진은 우리를 맹수라고 느꼈다. 그것도 싸울수록 더 미쳐 날뛰는 맹수. 심지어 궁지로 몰아넣으면 넣을수록 우리는 오히려 피에 굶주린 모습을 드러냈다.주해진은 제 체면을 회복하고 싶어 그동안 승복하지 않은 거였는데, 우리가 절대 건드리면 안 되는 존재라는 걸 알았으니 더 이상 저항할 필요가 없었다. 어쨌든 그는 이미 손을 씻었고, 이제는 그저 장사를 하며 지내기에 어렵게 얻은 걸 망치고 싶지 않았다.나는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민우는 나더러 먼저 돈을 받으라고 계속 눈을 깜박거렸다.나도 민우의 뜻을 알고 있었다. 이걸 나중에 우리의 사업 자금에 보태자는 뜻이었다. 1800만 원이나 되는 돈을 보니 나도 확실히 마음이 동해 결국은 말없이 받았다. 주해진은 김진호와 안명훈더러 우리에게 사과하게 했고, 두 사람은 찍소리 못하고 순순히 사과했다.떠나갈 때 주해진은 제 차를 나에게 주면서 몰고 가라고 했다.그 순간 나는 오히려 경계심이 곤두섰다.“돈도 배상했으면서 차는 왜 주는 거야? 설마 또 해코지하려고?”주해진은 호탕하게 웃었다.“경계심 너무 많은 거 아니야? 그냥 친구 삼고 싶어서 주는 거야.”“그런데 난 그쪽이랑 친구하기 싫은데.”나는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주해진은 여전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친
김진호는 속이 좁고 질투심이 강하지만 실력은 별로 없다. 특히 일이 터지면 항상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난다.그런데 주해진이 자기를 내밀자 안명훈보다 더 겁을 먹었다.“싫어요... 안 돼요... 해진 형, 저 자식 차를 망가뜨리라고 한 건 형이잖아요. 저더러 형 대신 뒤집어쓰게 하면 안 되죠.”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김진호는 제가 한 짓에 책임지지 못하고 주해진의 체면을 바닥에 짓밟았다.주해진은 너무 쪽팔려서 김진호의 뺨을 내리치면서 버럭 소리쳤다.“사과하라면 해. 어디서 말이 그렇게 많아? 젠장. 내가 널 돕지 않았다면 수호 동생한테 미움 살 일이 있었겠어?”한창 화를 내고 있던 나는 그 말에 순간 멍해졌다.‘수호 동생? 지금 나를 말하나?’‘젠장, 내가 언제 제 동생이 됐다는 거야?’“어디서 친한 척이야? 너희 셋 다 내려와.”나는 차를 또다시 쾅쾅 내리쳤다.민우 역시 차 위에서 나를 협조해 주었다.승합차가 우리 때문에 완전히 뒤집힐 지경이 되자 주해진은 우리와 연맹을 맺으려는 듯 은근슬쩍 나를 회유했다.“수호 동생, 그만해. 내려갈게. 우리 사이에는 원한이 없잖아. 수호 동생이랑 원한 있는 건 김진호잖아. 그리고 안명훈 저 자식도 자기 여자 친구더러 동생 친구 꼬시라고 했어. 저 둘 중에 좋은 놈 하나 없어. 내가 지금 바로 이 두 놈 내려 보내겠으니까 마음대로 처리해.”주해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정말로 김진호와 안명훈을 끌어내 앞에 내팽개쳤다.내 분노는 사실 김진호와 안명훈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가장 큰 원인은 내 차가 박살 난 것 때문이다. 그리고 주범은 바로 주해진이다.때문에 나는 화가 잔뜩 나서 주해진을 향해 파이프를 휘둘렀다.“이 자식들 빚은 내가 천천히 받을 거야. 하지만 내 차를 망가뜨린 건 어쩔 건데?”주해진은 고개를 돌려 내 차를 흘긋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배상할 수 있는 저렴한 차라 안도한 듯했다.“수호 동생, 저 차는 1600만 정도 하지? 내가 나중에 새 차 하나 뽑아줄게.”주해진이
사실 오늘 안명훈은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주해진이 기어코 자기 위엄을 보여주겠다고 불러냈다.그런데 주해진의 위엄은 못 보고 오히려 나와 민우의 미친 모습만 보게 된 거다. 그러니 혼비백산이 되지 않을 리가 있나?안명훈은 필사적으로 차 문을 흔들었다.“나 내릴래. 내려줘...”주해진은 안명훈의 뺨을 후려갈기더니 씩씩거리며 욕설을 퍼부었다.“사내자식이 내리긴 어딜 내려? 네가 문을 내리면 저놈들이 올라올 거잖아. 문 열면 안 돼. 얌전히 앉아 있어. 설마 저 자식이 문을 부수겠어?”펑!나는 승합차를 향해 쇠 파이프를 세게 휘둘렀다.그러면서 속으로는 방금 전의 울분을 토해냈다.‘내 자식 같은 새 차, 아직 할부도 안 끝나 얼마나 애지중지했는데. 네놈들 때문에 고물이 됐잖아.’나는 승합차를 내리치면서 욕설을 퍼부었다.“나와. 차 안에 숨어 있는 게 겁쟁이랑 뭐가 달라?”차 안 세 사람 눈에 나는 충혈되어 시뻘게진 눈을 가진 분노한 맹수나 다름없었을 거다.안명훈은 완전히 겁을 먹어 나한테 끊임없이 간청했다.“오늘 밤 일은 나랑 상관없어... 제발 살려줘. 제발...”주해진도 솔직히 속으로는 무서웠지만 안명훈이 저 하나 살려고 자신을 배신한 걸 보자 화가 나서 그를 발로 차버렸다.안명훈은 그 힘에 못 이겨 옆으로 벌러덩 굴러 넘어졌다.그때, 마침 유리창을 깨뜨린 나는 쇠 파이프로 주해진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셋 셀게, 당장 내려. 안 그러면 죽이는 수가 있어.”주해진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럴 필요까지 있어? 내가 사람을 불러 모으긴 했지만 무기는 안 들었잖아. 게다가 저놈들은 겁을 먹고 이미 도망쳤어. 너희 둘도 크게 다치지 않았으먼서 꼭 미친 짐승처럼 나를 그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겠어?”나는 이를 악물었다.“난 짐승처럼 네 놈을 물고 늘어지는 거로 안 끝나. 아주 뼈도 안 남기고 씹어 먹을 거야. 내가 얼마나 어렵게 산 차인데, 평소 아까워서 조심조심 다뤘는데, 네 놈 때문에 폐차하게 생겼잖아. 내 차 물어
나는 여전히 손에 든 쇠 파이프를 필사적으로 휘둘렀다. 분명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렇다고 기죽을 수도 없었다.민우가 말한 적이 있는데, 싸울 때 가장 무서운 건 싸우기 전부터 겁을 먹는 것이라고 했다.하지만 한참 싸우다 보니 나는 점점 힘에 부쳤다. 놈들 인원수가 너무 많아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그렇다고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인체에는 자극을 받으면 잠재력을 자극하는 혈 자리가 있는데, 그 혈 자리가 자극을 받으면 잠재력이 폭발했다가 나중에 한동안은 몸이 나른해진다.하지만 이 상화에서 다른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에 나는 고민 없이 혈 자리를 눌렀다. 그 순간 온몸에 힘이 솟아나면서 내가 마치 거인이 된 느낌이었다.“야! 다 죽었어!”나는 고함을 지르는 동시에 쇠 파이프를 휘두르면서 달려갔다.나를 에워싸고 있던 놈들은 내가 더 이상 전투력이 없다는 걸 보고 모두 긴장을 푼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미친 것처럼 놈들의 코뼈를 하나씩 부러뜨렸다. 심지어 손이 무척 매웠다.나는 피가 들끓어 끊임없는 힘이 솟구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매번 파이프를 휘두를 때마다 젖 먹던 힘까지 짜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는데도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한방에 놈들 뼈를 부러뜨릴 수 있다는 것에 흥분됐다.‘만약 동준 형님이 이 모습을 본다면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여기지 않을까?’싸울수록 피가 끓고 힘이 솟아났다. 놈들은 심지어 나를 보자 연신 뒷걸음쳤다.옆에 있던 민우마저 나를 보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물었다.“수호야, 너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난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나는 혈 자리를 가리켰다.그러자 민우는 바로 눈치챘다.민우 역시 의학을 전공한 지라 말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곧이어 민우 역시 스스로 한 대 치더니 갑자기 피가 솟구치는 것처럼 흥분했다.“하하하, 나도 다시 회복했어. 너희들 죽었어.”우리는 서로 협조하면서 놈들한테 달려가 퍽퍽, 주먹을 날렸다.우리를 끝장내버리겠다고 큰소리치던 놈
전에는 누가 와서 소란을 피울까 봐 민우더러 나와 함께 가게에서 지내자고 했지만, 지금 사장님 댁에 머물고 있는데 민우까지 데려올 수는 없었다. 때문에 뭐든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민우를 집에 데려다 두는 길에 그는 나에게 함께 사장님 댁에 있어 달라냐며 물었다. 그러면 서로 보살필 사람이 있다면서.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나도 그걸 생각해 보지 않은 적 없어. 하지만 사장님을 돌보려고 그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너까지 데려가면 이상하잖아.”“난 그 개자식들이 또 너한테 무슨 짓 할까 봐 그러지.”“나도 무서워. 하지만 이미 준비해 뒀어.”나는 의자 밑에서 도구 몇 개를 꺼냈다.민우는 그 도구들을 손에 들고 무게를 가늠해 보더니 말했다.“이 도구들은 조금 도움이 될 뿐이야. 그래도 내가 너한테 가르쳐준 방법을 사용해.”민우는 말하면서 손을 움켜쥐는 동작을 했다.그 동작에 나는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그 방법 확실히 좋더라...”우리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백미러에 언뜻거리는 차 한 대가 비쳤다.무의식적으로 뒤에 따라붙은 사람이 운전할 줄 모른다며 투덜거리던 나는 갑자기 이상한 낌새를 챘다. 그도 그럴 게, 뒤에서 달려오는 차는 속도가 아주 빨랐는데 마치 나를 강제로 세울 것처럼 굴었으니까.“잘 앉아.”나는 불안한 예감에 다급히 액셀을 밟아 속도를 냈다.다만 내 차의 유일한 단점은 속도를 너무 빨리 낼 수 없다는 거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뒤 차에 따라잡혔다.놈들은 내 차를 강제로 멈추게 할 작정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고 싶지 않았다. 상대방 차량은 승합차였는데, 그런 승합차는 용량이 커 적어도 열댓 명을 태울 수 있었다.만약 차에서 열 몇 명이 우르르 내리면 나와 민우 둘이 대처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때문에 나는 액셀을 밟았다. 하지만 승합차 두 대는 좌우에서 협공하며 내 차를 가운데 몰아 끼긱끼긱, 하며 긁히는 소리가 났다. 분명 차가 내는 소리였지만 내 살점이 뜯겨나가는 기분이었다.아직 차 할
내가 한창 망설이고 있을 때 사장님도 말을 보탰다.“수호 씨, 남아서 좀 도와줘. 우리 마누라가 요즘 너무 힘들어서 그래. 어릴 때부터 금지옥엽으로 자라나 이런 고생 언제 해 봤겠어? 이것 봐, 피곤해하는 거 보이지? 나도 솔직히 마음 아파.”사장님과 사모님이 모두 나를 남으라고 설득하는 상황이라 나도 더 이상 거절하기 곤란했다.“그래요. 제가 남아서 도와드릴게요.”사장님이 드시고 사용해야 하는 약이 너무 많아 확실히 번거롭긴 하다. 때문에 나도 사모님 혼자 사장님을 케어하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됐다.사모님은 내 말에 이내 환한 표정을 지었다.“수호 씨는 아무것도 가져올 필요 없어요. 여기 모두 있으니까. 전처럼 계속 객실에서 자면 돼요. 그곳 채광이 좋고 공기도 좋아요...”사모님은 내가 이곳에서 지내는 데 불편해할까 봐 끊임없이 말을 늘어놓았다.사장님 내외가 사는 집은 모두 고급 가구를 사용했는데, 내가 이곳에 남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런 걸 누려볼 기회가 어디 있을까?사장님 내외는 나한테 너무 잘해줘서 내가 다 미안할 따름이었다.사장님 몸은 우선 한약으로 며칠간 보양해야 하지만 약을 다 먹으면 사실 힐 것도 없어 나는 가게 일을 돌볼 수 있었다.요 며칠간 주해진은 소란 피우러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대로 포기했다는 건 아니었다. 때문에 나는 동료들한테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한편 주해진은 그날 도망치듯 가게를 떠난 뒤 마음이 계속 안 좋았다.하지만 최근 일손을 구해봤지만 누구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 첫째 이유는 주해진이 깡패라 정계와 연이 닿는 지인이 적었고, 두 번째 이유는 사촌 형이 다시는 화인당을 다시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주해진은 입으로는 싫다고 했지만 요 며칠간 그래도 제 분수를 지켰다. 다만 김진호 병문안을 간 뒤, 마음이 또 바뀌었다.김진호는 나를 여자 등에 빨대 꽂고 출세한 놈으로 말하면서, 깡패인 주해진이 나 같은 등신 하나 해결하지 못한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웃음거리
어르신도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너도 잘했어. 처방한 게 거의 다 맞췄으니까. 새내기 같지가 않아. 네 할아버지한테서 많이 배웠나 보네?”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그럭저럭요. 그런데 그때는 너무 어려 할아버지의 모든 재능을 배우지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에요.”“괜찮아. 앞으로 내가 네 할아버지니까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나는 얼른 감사를 표했다.어르신과 약처방을 확인한 뒤, 나는 화인당에 가 이틀 치 약을 짓고 동료들에게 사장님이 퇴원했다는 사실을 말했다.다들 사장님이 다 나은 줄 알고 기뻐하는 눈치였다. 특히 민우는 슬그머니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사장님이 돌아오면 우리 따로 나가는 거지?”나는 얼른 민우의 말을 잘랐다.“사장님이 돌아와도 이런 말은 급하게 하면 안 돼. 화인당이 안정되고 가게에 일손이 부족하지 않을 때 떠날 수 있어. 우리가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건 자신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지만, 화인당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되지. 사장님이 우리 둘한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는 내가 말 안 해도 알잖아.”민우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내가 생각이 짧았네. 앞으로 절대 함부로 말 안 할게.”“참, 요즘 태진 선배는 어때? 가게에서 본 적 있어?”나는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모태진이 오늘 없다는 걸 발견했다.내 말에 민우가 대답했다.“누가 알겠어? 또 그깟 일 때문에 가게에 피해 갈까 봐 안 나왔겠지. 상관하지 마. 다 큰 어른이 본인 몸 하나 건사 못 하겠어? 수호야, 아직은 따로 나가는 말은 안 할게. 하지만 천수당을 관찰하는 건 괜찮지?”“관찰하는 건 괜찮아. 하지만 함부로 하지 마.”나는 신신당부했다.그러자 민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는 뜻을 내비쳤다.나는 약을 가진 후 다시 사모님 댁으로 돌아갔다.이 약 일부는 목욕용이고 일부는 마시는 약이라 나는 위애 상세하게 적어 따로 분리했다. 그리고 먹는 약은 모두 달여 진공 포장한 뒤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이렇게 하면 마실 때 데
윤지은은 보기 드물게 이번만큼은 내 편에 섰다.“동의하기 싫어도 동의해야지. 내가 진작 서약이 부작용이 있고 중독성이 커서, 장기적으로 이렇게 치료하면 환자가 오히려 탈탈 털릴 거라고 말했는데. 유미한테는 내가 말할게. 걔네 부모님은 아무튼 B시에 계시잖아? 한동안 돌아올 수 없으니까 당분간 비밀로 하지 뭐.”윤지은이 전에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 건 이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서의학 의사면서 서의학이 안 좋다고 하면 분명 안 좋은 영향이 있을 거다.하지만 친구 남편인 정호섭의 생명이 달린 일이니 더 이상 거리낄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친구 임유미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만약 정호섭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임유미는 어떡하라고?나는 사장님을 바라봤다.“그래도 되겠어요?”사장님은 효심이 강한 분이라 장인 장모를 속이는 게 안 좋다고 여겼다. 게다가 두 분이 지금껏 사장님을 길러왔으니.하지만 사장님이 고민하는 동안 윤지은은 이미 사장님 대신 결론을 내렸다.“뭐 그렇게 생각할 게 많아요? 두 분한테 말하면 절대 동의 안 할 거예요. 이 일은 내가 말한 대로 해요. 나도 한의학을 전공했던 사람이라 파악이 없으면 이런 말 안 해요.”나와 사장님 모두 머뭇거렸는데, 윤지은이 이런 태도로 나오니 오히려 감화되었다.나는 윤지은이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뭐든 엄격하고 신속하게 하는 모습은 내가 따라 배울 점이었다.윤지은은 나더러 병원에 남아 사장님을 돌보게 하고 본인은 유미 사모님을 모셔 오면서 한의 치료 방법에 대해 말해주겠다고 했다.그사이 나는 사장님이 아침 식사를 드시는 걸 도와드렸지만, 사장님은 입맛이 없다면서 조금밖에 드시지 않았다.요즘 매일 많은 양의 약을 먹어 위장이 망가져 음식을 먹는 것조차 무리였다.이렇게 부작용이 큰 게 바로 서양의학의 가장 큰 단점이다.나도 사장님을 강요하지 않았다.환자가 입맛이 없다는데 억지로 먹게 하면 오히려 위장의 부담을 더해주기 때문이다.나는 따뜻한 물을 받아와 사장님의 얼굴과 몸을 닦아주었다.
어르신은 내가 보인 자신감에 매우 만족해했다. 하지만 주의할 점을 귀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침술 하기 전에 모든 서약을 끊고 한동안 몸보신해야 해. 지금 너의 사장님 몸은 너무 나약해서 기혈이 거의 다 사라진 거나 다름없어. 이 상태로 침술 할 수 없어. 이 일은 먼저 환자 가족들과 상의하고 동의를 구한 뒤 진행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때마침 윤지은이 회진하러 와서 나는 그녀더러 사장님을 잠시 봐달라고 하고는 어르신을 모시고 밖으로 나갔다.“됐어. 데려다 줄 필요 없어. 이 부근에 마친 공원이 있으니 나도 좀 산책하다가 택시 타고 가면 돼. 네 사장님 상황은 서둘러서 가족과 상의해. 더 지체되면 천지신명이 와도 어쩔 수 없어.”어르신의 긴박한 말투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할아버지.”나는 진심으로 어르신께 감사했다. 90세가 넘는 분이 내 전화 한 통에 아무 이유 없이 도와준 거니까.이 은혜는 꼭 마음에 새길 거다.어르신은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사람을 구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이건 나를 위해 덕을 쌓는 거야. 너도 얼른 가 봐. 이 일은 지체하면 안 된다는 거 잊지 말고.”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어르신이 뒤돌아 떠난 뒤에야 나는 병실로 돌아갔다.다른 사람은 이미 떠나고 윤지은만 병실에 남아 있었다.나는 얼른 윤지은과 사장님께 방금 전 상황을 말씀드렸다.“수호 씨, 한의학 치료법으로 정말 내 병을 완화할 수 있어?”사장님은 나를 조금 믿는 눈치였지만 그래도 한번 확인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설명했다.“아까 보신 분이 우리 마을에서 엄청 유명한 명의세요. 젊을 때 저희 할아버지랑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람들 병을 치료해주셔서 엄청 유명해요. 저도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건데 정말 방법이 있다더라고요.”“사장님이 입원한 뒤 몸 상태가 확실히 점점 나빠지셨잖아요. 이 부분은 제가 말하지 않아도 사장님도 느끼셨을 거예요. 서약은 비록 효과는 빠르지만 부작용도 커요. 사장님 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