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은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나중에 내 불장난에 내가 타죽지 않으려면 이쯤에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계속 문자를 보내던 윤지은은 문자 전송에 실패하자 그제야 자신이 삭제당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순간 그녀는 화가 치밀었다.“개자식! 역시 남자는 다 똑같아!”윤지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어디론가 전화했다.그리고 곧바로 건너편에서 공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아가씨, 무슨 일로 연락하셨습니까?]윤지은은 내 카톡을 캡처해서 보내고 차갑게 말을 이었다.“이 사람 개인 정보 좀 알아봐요. 한 시간 줄 테니까, 그사이에 알아내요.”[네!]윤지은은 말을 마치자마자 전화를 끊고 씩씩거리며 방으로 돌아갔다.그 시각, 호화로운 별장 안.개량 한복을 입은 한 노인이 웬 중년 남자가 다가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회장님, 아가씨께서 전화로 사람을 조사해달라고 합니다.”중년 남자의 이름은 윤해철, 윤지은의 아버지다.윤해철은 서예를 연습하고 있다가 노 집사의 말에 덤덤하게 말했다.“처음으로 부탁하는 건데 도와주게. 방법이 없어서 그러는 걸 테니까.”“회장님, 아가씨께서 한동안 집에 안 돌아오셨는데, 식사하러 오라고 할까요?”윤해철은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았다.“그 말을 들을 것 같나?”답은 당연히 아니다.윤해철은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자기 핏줄인데, 자기 딸 성격도 모를까?‘정말 제 어미 고집을 아주 똑 닮았네.’‘한 명은 밖에서 돌아다니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고, 한 명은 친정에 가서 돌아올 생각이 없고.’윤해철은 오랜만에 한가한지라 모녀가 돌아오는 게 싫었다.물론 조금은 이기적으로 느껴질 테지만, 인간의 본성은 원래 이기적인 것 아닌가?“해달라는 대로 하고 나머지는 신경 쓸 거 없어.”윤해철은 다시 붓을 들고 서예를 시작했다.젊었을 때 윤해철은 처자식이 있는 생활을 갈망했는데, 나이가 드니 오히려 자유가 고팠다.때문에 혼자 있는 시간이 좋다고 느껴졌다.,그때, 익숙한 목소리
“나 몰래 밖에 나돌아 다니지 않았지? 딴 여자 만나지 않았지?”윤해펄은 다급히 맹세했다.“나 하늘에 대고 맹세해. 난 당신한테 미안한 일 한 적 없어. 이게 거짓이면 천벌 받아 죽을 거야!”이영미는 그래도 남편이 아까운지 얼른 그의 입을 막았다.“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떡하라고? 과부가 되라고?”이영미는 말하면서 남편의 품에 기댔다.두 사람은 벌써 스무 날도 넘게 보지 않아, 이영미는 남편이 무척 그리웠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돌아온 거고.윤해철은 아내의 마음을 알 리 없었다. 다만 요즘 여자는 필요도 없고, 성욕도 없었다. 그저 이렇게 서예나 하는 게 성관계를 하는 것보다 더 재밌었다.때문에 윤해철은 얼른 이영미를 밀어냈다.“여보, 이제 막 돌아와서 피곤하지? 내가 어깨 주물러 줄게.”윤해철은 말하면서 아내를 끌어와 의자에 앉혔다.하지만 남편의 행동에 이영미는 화가 더 치밀었다. 그녀는 입을 삐죽 내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내가 용기 내어 먼저 돌아와 이렇게까지 하는데, 손도 안 댄다고?’‘계속 냉전하자는 거야 뭐야?’“누가 당신 마사지나 받겠대? 당신 대체 무슨 뜻이야?”윤해철은 일부러 모르는 척 말을 흐렸다.“내가 무슨 뜻은, 당신 아껴주는 거잖아.”이영미는 씩씩거리며 말했다.“이게 아껴주는 거야? 일부러 나 밀어내는 거지. 지금 당신을 봐, 나를 다시 친정에 보내려고 용쓰는 거잖아.”“아니야!”‘설득력이 하나도 없잖아.’이영미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눈시울을 붉힌 채 말했다.“지은도 당신이 변했다던데, 역시 맞았네. 이대로 살 거면 이혼해.”말을 마친 이영미는 화를 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아내가 화를 내며 떠나자 윤해철은 얼른 쫓아갔다.“여보, 이제 막 돌아왔으면서 어디 가려고?”이영미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화를 내며 말했다.“지은이한테 갈 거야. 앞으로 우리 모녀가 같이 살 거니까, 당신은 혼자 살아.”“여보, 안돼. 돌아와...”윤해철은 입으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쫓아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 시각, 나는 욕조에 누워 핸드폰으로 쇼츠를 보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그때 갑자기 밖에서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란 나는 바로 경계하는 목소리로 물었다.“누구세요?”“나예요, 문 열어요!”윤지은의 목소리였다.나는 순간 마음이 찔려, 윤지은이 내 다른 신분을 눈치챈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다.‘정말 따지러 왔으면 어떡하지?’그렇다면 절대 문 열어주면 안 된다.나는 욕조에서 나와 목욕 타월로 몸을 두르고 문 앞에 다가가 물었다.“내 방에는 왜 왔어요?”“할 얘기가 있으니까 문 열어요!”“할 말 있으면 밖에서 해요.”나는 문을 열 배짱도, 마음도 없었다.그러자 윤지은이 싸늘한 경고를 날렸다.“셋 셀 테니까 순순히 열어주는 게 좋을 거예요. 안 그러면 차버릴 태니까.”“미쳤어요? 갑자기 화내면서 찾아와 문 열라고 하는 게 어디 있어요? 그쪽이 나한테 뭐 할 줄 알고? 그리고 할 말 있으면 밖에서 말하라니까, 왜 자꾸 들어오겠다는 거예요? 목적이 뭐예요?”윤지은은 내 설명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카운터를 시작했다.“셋, 둘...”나는 이렇게 가다가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윤지은은 워낙에 막무가내기에 나는 얼른 침대 쪽으로 달려가 프런트에 전화했다.“여보세요? 여기 미친 여자가 자꾸만 내 방문을 차고 있어요. 얼른 와서 데려가요.”‘내가 쫓아내지 못한다고 호텔 직원도 쫓아내지 못하겠어?’나는 전화를 끊은 뒤 방에서 기다렸다.하지만 미친 듯이 쾅쾅거리며 문을 걷어차는 소리에 너무 섬뜩했다.다행히 호텔의 서비스가 좋아 3분도 안 돼서 직원이 도착했다.호텔 직원이 나서니 나는 그제야 안심됐다.‘이제는 함부로 하지 않겠지?’“아가씨, 왜 그러십니까?”“이 문 열어.”나는 문에 바싹 기대 밖의 대화를 들었다. 하지만 밖의 대화에 어리둥절했다.‘여긴 고객님이 아니라 아가씨라고 하나?’‘방금 그게 윤지은 목소리인가?’내가 멍해 있을 때,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그러더니 윤지은이 싸늘
윤지은이 그저 평범한 의사인 줄 알았는데, 배경이 이렇게 빵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나는 한순간에 기가 죽어 윤지은을 보며 말까지 더듬었다.“대, 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윤지은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차갑게 물었다.“아까 백연우랑 잤지?”나는 윤지은이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상황에 거짓을 말해야 할지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도 막막했다.머리가 너무 복잡해 언어 기능도 상실한 기분이었다.내가 계속 대답하지 않자 윤지은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묻잖아. 왜 멍때리고 있어?”나는 깜짝 놀라 심장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결국 전전긍긍하며 말했다.“아니요. 계속 방에 있었어요.”나는 고민한 끝에 결국 거짓말을 선택했다.이 여자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친구와 잤다는 걸 안 될 것 같았다.사람은 무서운 소유욕을 갖고 있는 데다 쉽게 질투하는 동물이다.이미 본인과 잤는데, 친구와도 잤다는 걸 알면 윤지은은 본인이 백연우보다 못한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때문에 그런 상황을 방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인정하지 않는 거다.윤지은은 믿기지 않는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정말? 한 시간 넘게 목욕하고 있었다고? 껍질 벗겨질까 걱정도 안 되나?”나는 뻔뻔하게 말했다.“이런 곳에 처음 왔으니 뭐든 잘 누려야 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좀 오래 한 건데, 안 돼요?”윤지은은 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천천히 의심을 풀었다.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내내, 내 심장은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윤지은은 탐정처럼 내 방을 한 바퀴 빙 둘러봤다.난 윤지은이 여자 셜록홈즈라 불릴 정도로 관찰력이 뛰어난 걸 알고 있다.그래서 내가 썼던 종이를 방까지 가져오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그러지 않으면 빼도 박도 못할 테니까.하지만 나는 여전히 여자의 치밀함과 논리적 사고 능력을 쉽게 봤다.유지은은 욕조 앞에 다가가 허리를 숙인 채 안을 쓱 만지더니 갑자기 얼굴이 어두워졌다.“거짓말하네.”나는 너무 당황해서
윤지은의 압박에 나는 심장 박동이 멈춘 것 같았다.특히 나를 꿰뚫어 볼 것 같은 두 눈을 보면 마치 내 모든 치부가 드러난 것처럼 불편해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나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심지어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했다.“그런 거 아니에요.”윤지은은 차가운 얼굴로 나한테 걸어왔다. 그녀는 남의 기분을 잘 엿보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내가 대답할 필요도 없이 답을 얻었다.그 시각 윤지은은 마음이 복잡했다.입으로는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자꾸만 부정했지만 내가 자기 친구 백연우랑 잤다는 추측이 들자 너무 괴로웠다. 마음이 복잡해 딱 어떤 기분이라고 정의 내리기도 힘들었다.그런 윤지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나는 그저 윤지은에게 진실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그때 윤지은이 갑자기 차갑게 말했다.“고개 돌려서 나 봐.”명령 투인 말투와 부잣집 아가씨라는 신분은 나에게 압박으로 작용했다.솔직히 겁먹었다는 건 나도 인정한다.이 호텔 전체가 윤지은네 건데, 겁먹지 않을 수 있을까?나는 조심스럽게 윤지은을 바라봤다. 이 순간 내가 어떤 표정인지 볼 수 없었지만 아주 엉망이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대체 뭘 원해요? 내가 윤지은 씨한테 잘못한 것도 없잖아요.”“솔직히 말해. 내 친구 백연우랑 무슨 사이냐?”윤지은은 역시나 내가 솔직히 말하는 걸 듣고 싶어 했다.하지만 나는 너무 무서웠다. 윤지은이 나를 계속 몰아붙이는 게 뭐 하자는 건지 모르니까.결국 나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안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질 리가 없잖아요.”윤지은은 내가 끝까지 인정하지 않자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그 순간 나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랐다.‘이 여자가 대체 뭐 하자는 거지?’윤지은은 나를 보며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좋아, 그럼 가서 백연우한테 말해. 백연우 같은 스타일 안 좋아한다고.”“미쳤어요? 뜬금없이 가서 그런 말을 왜 해요?”나는
“안 그러면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마지막 한 마디는 협박이 아닌 강조였다. 심지어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그 때문에 나는 백연우와 있었던 일을 더 말할 수 없었다.하지만 한편으로 억울하고 답답해 당장이라도 이 여자를 침대에 눕혀 혼내주고 싶었다.“그런데 이렇게 뜬금없이 가서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 너무하지 않아요?”나는 윤지은의 위세에 눌려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연우를 찾아가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방금 전에 그런 짓을 했는데 이제 와서 안 좋아한다고 하는 건 매너가 아니니까.윤지은이 나한테 자꾸만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건 내가 정말 백연우한테 그런 말을 하길 바라 것보다 시험해 보자는 마음이 더 컸다.혹은 내 입으로 직접 솔직한 말을 듣고 싶거나.윤지은은 내가 끝까지 부정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오히려 이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내가 바로 인정하면 윤지은은 오히려 받아들일 수 없었을 테니까.윤지은은 결국 한 걸음 양보해서 말했다.“그래요, 뭐 이번에는 용서해 줄게요. 하지만 잘 들어요. 앞으로 내 친구 세 명 중 그 누구에게도 손대지 마요!”“만약 상대방이 나를 건드리면요?”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그랬더니 윤지은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걔네가 어딜 만지면 수호 씨 어딜 망가뜨릴 거예요.”‘헐.’‘카리스마 사장님에 관한 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어쩜 이리 막무가내지?’나는 바로 반박하고 싶었지만 상대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래요. 하라는 대로 할게요. 부잣집 아가씨의 명령이니까.”나는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그러자 윤지은이 나를 노려보더니 내 방에서 나가 808호실로 돌아갔다.엉망이 된 방 안을 보니 지은은 마음이 어수선해 바로 담당 부서에 전화했다.“808호실 모든 침구 세트 바꿔. 싹 다!”“네, 아가씨.”호텔 직원의 업무 처리 효율은 대단했다. 30분도 안 되는 사이에 방 안의 모든 것이 새것으로 바뀌었다.심지어
순간 웃음이 터졌다.‘뭐야? 내가 자기 없으면 못 사는 줄 아나? 어디서 아가씨 성질을 나한테 부려?’‘누가 신경이나 쓰는 줄 아나?’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 비위를 맞춰야 했다. 안 그러면 희롱하지 못하니까.결국 나는 윤지은에게 답장했다.[내가 설마 그쪽을 차단했겠어요? 전에는 실수로 연락처가 지워진 것뿐이에요.][내가 바보인 줄 아나!]나는 웃는 이모티콘을 쓰며 답장했다.[진짜예요. 그쪽처럼 예쁘고 몸매도 좋은 여자를 내가 왜 차단하겠어요?][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전에 한 말 생각해 봤어요?][생각해 봤는데, 사귀어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우선 만나지 않을 수 있어요?][만나 보지도 않고 어떻게 연애한다는 거예요?][안될 것도 없죠. 우선 연락하면서 서로 알아가면 되죠. 난 좀 늦게 끓는 성격이라 먼저 만나면 어색할 거예요.][그럼 됐어요. 다른 사람 찾지 뭐.]나는 사실 어장관리를 하려고 이렇게 말한 건데, 윤지은이 이렇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의외의 대답에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었다.그 시각, 윤지은의 마음은 이미 다른 데로 가버렸다. 오히려 그녀야 말로 나와 사귈 생각이 사라져 나를 자기 어장에 들일 생각이었다.집사 아저씨가 신원 조사를 끝내면 나를 꼬셔내 얼굴을 직접 볼 계획이었으니까.그때, 윤지은의 핸드폰이 윙윙 진동했다.헤드폰을 들어 확인하니 다름 아닌 어머니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윤지은은 미간을 좁혔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 다만 말투가 쌀쌀맞았다.“엄마,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전화해요?”이영미는 전화 건너편에서 씩씩거렸다.[나 네 아빠랑 못 살겠어. 이혼할 거야. 지은아, 너 지금 어디야? 엄마가 네 집으로 갈게, 앞으로 우리 모녀가 같이 살자.]윤지은 어머니의 말에 어리둥절했다.“무슨 상황이에요? 또 아빠랑 싸웠어요?”‘한 달 전에도 싸우고 친정에 가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 했으면서.’이영미는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도 않아 계속 화만 냈다
애교 많은 여자는 운명도 좋다는데, 윤지은은 자기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아버지는 항상 어머니한테 고분고분하고 뭐든 들어주고 예뻐해 줬으니까.심지어 이영미가 윤지은을 낳을 때 너무 아파 둘째는 절대 안 낳는다고 쐐기를 박아 두는 바람에, 윤해철은 정말로 아내에게 둘째를 낳지 못하게 했다.부모님이 아무리 닦달을 해대도 윤해철은 계속 마누라 편만 들어 결국 윤씨 가문에 후손이라곤 윤지은 한 명뿐이다.때문에 윤해철은 어릴 때부터 딸을 미래에 자기 회사를 잇는 후계자로 정성껏 키웠다.하지만 윤지은은 재계에 전혀 관심이 없고 의학을 좋아했고, 어머니처럼 고집스럽기까지 해서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대에 합격했다.그때로부터 두 부녀 사이에 모순이 생겼다.다만 윤지은은 그딴 건 상관하지 않고 제 마음 내키는 대로 뭐든 했기에 지금 두 부녀 사이가 매우 긴장하다20분도 채 안 되어 이영미가 용천 호텔에 나타났다.“사모님...”“쉿!”이영미는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며 호텔 지배인에게 말했다.“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여기 고객과 똑같이 대해. 아가씨는 어디 있지? 방은 몇 호실이야?”이영미는 누가 제 신분을 알아챌까 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그 모습은 귀엽기도 하면서 조금 웃겼다.지배인이 다급히 말했다.“아가씨는 VIP 구역 808호실에 묵고 계십니다.”“그래, 알았어. 다들 일 봐. 별일 없으면 나 방해하지 말고.”이영미는 곧장 VIP 구역으로 향했다.그리고 얼마 뒤 808호실 앞에 도착했다.윤지은은 조심조심 행동하는 어머니를 보자 말문이 막혔다.“엄마, 뭐 해요?”“쉿, 아는 사람 만날까 봐 오는 내내 조심하면서 왔어. 얼른 들어가게 좀 비켜 봐. 아는 사람 만나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안 그러면 네 아빠... 아니, 그 남자가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 거 아니야.”이영미는 매번 화날 때마다 남편을 낯선 사람처럼 대하며, 윤해철을 그 남자라고 칭한다.그것에 이미 익숙해진 윤지은은 팔짱을 낀 채 ‘또 왜 이러지?’하
“보니까 은근히 지은이길 바라네?”나는 윤지은이라고 확신했기에 하정현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그건 아마도 그 상대가 윤지은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커서였을 수도 있었다. 정말 윤지은이면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생각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당연하죠. 그럼 더 이상 알아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동안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겠어요.”“너무 쉽게 생각하네. 수호 씨가 비록 임유미 씨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딱 한 끗 차이였어. 본인이 키스했던 사람이 수호 씨라는 걸 발견했을 때 유미 씨 표정이 어땠는지, 수호 씨는 아마 모를 거야.”그 말은 단번에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놀라던가요? 아니면 실망하던가요?”“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놀라움과 실망감도 있긴 했지만 뭔가 더 있었어.”“뭐가요? 무슨 뜻인데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러자 하정현은 귀찮았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몰라.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보지 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유미 씨는 상대가 수호 씨라는 걸 발견한 뒤에도 수호 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어.”“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모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나는 사모님을 대신해 해명했다.하정현은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유미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아무튼 알아요.”“그럼 내 친구 지은이는 그런 사람이고?”“그런 뜻 아니에요.”“정수호, 수호 씨는 항상 본인 입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더라. 그 사람을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지은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심지어는 수호 씨네 형수와 애교 씨도 제대로 알아본 적 없지? 두고 봐, 두려워할수록 그 일이 닥칠 테니까.”하정현의 애매모호한 말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아무것도 아니야. 할 말은 다 했
“내 상체는 이미 봤지? 그러면 하체를 보여 줄게.”하정현은 말하면서 제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녀는 섹시한 망사 스타킹을 신어 보일 듯 말 듯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하지만 망사 스타킹 아래는 새하얗기만 할 뿐 문신 같은 건 없었다.그럼 하정현도 배제할 수 있었다.그러면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사람 중에 유미 사모님만 남게 된 셈이다.그건 내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하정현은 또 뜸을 들이며 말했다.“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 좀 해볼게.”나는 너무 초조해서 심장이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만 뜸 들이고 얼른 말해요. 대체 누군데요?”“사실, 사실 그날 수호 씨랑 몸 섞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니야.”“네?”그 대답은 내 예상 범위를 너무 벗어나 나는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 했다.“그럼 유미 사모님이 있었는지만 말해줘요.”“있었어. 하지만 사람을 착각해서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뒤 도망가 버려서 실질적인 관계는 맺지 않았어.”그 대답을 들으니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나와 사모님이 잔 게 아니라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죄책감 가질 필요도 사장님께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나는 심지어 그날 밤 나와 사모님이 나눴던 스킨십을 간과했다.그런 일은 나와 사모님만 입 밖에 꺼내지 않으면 점점 잊힐 테니까.“진짜 수호 씨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누구인지 안 궁금해?”하정현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싱긋 웃었다.“사모님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어요.”“만약 나라면?”나는 멍하니 하정현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진짜예요? 농담이죠?”“난 우선 수호 씨 진심이 듣고 싶어. 수호 씨는 누구였으면 좋겠어?”하정현은 문제를 나한테 던졌다.하지만 나는 누구이길 바란 적은 없다. 그저 그 사람이 절대 사모님만은 아니기를 바랐을 뿐이지.그 때문에 하정현이 그런 질문을 할 때 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소여정? 설마 그 여자인가
하정현의 말을 들으니 나는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하정현은 평소 무심하고 털털해 보이고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얘기를 농담하듯 가볍게 꺼냈지만 사실 그 모든 건 가짜였다. 나는 이제야 그간 하정현이 지은 미소가 모두 가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하정현은 사실 그 일로 계속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바보라고 하기에는 효심이 많고 똑똑하다고 하기에는 인터넷 대출을 받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지금은 대출 빚을 갚으려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고.하지만 계속 이렇게 가면 하정현은 분명 망가질 거다.“이 일은 지은 씨한테 얘기해 볼게요.”나는 속으로 마음을 굳혔다.하지만 하정현은 다급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지은한테 알려주지 마. 지은이는 안 돼.”“왜요? 지은 씨한테 2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인데 왜 본인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숨기는 거예요?”그 말에 하정현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내가 지은이한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빚지면 안 돼.”“그러 알아? 애초에 지은과 준휘를 연결해 준 사람도 나야. 준휘가 쫓아다닐 때 지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나서서 기호를 만들어 준 것 때문에 지은이는 모든 게 하늘의 뜻이라고 믿게 된 거라고...”하정현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 한참 동안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러다 한참 고민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지은 씨도 정현 씨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정현 씨를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나도 지은이가 나를 탓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지은이는 착한 사람이야. 말을 좀 독하게 해서 그렇지. 그런데 그래서 더 이상 폐 끼칠 수 없어.”“하지만 이 일은 정현 씨 혼자서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요. 계속 이러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돼요.”“아무튼 이 일은 지은이한테 말하지 마. 동의하면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게.”“전 정현 씨의 비밀에 관
‘진짜 약도 없네. 지은 씨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그걸 또 몰래 찍었다고?’내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하정현이 갑자기 제 핸드폰을 내 앞으로 쑥 들이밀었다.그 사진을 본 순간 나는 다급히 액정을 가렸다.“미쳤어요? 이렇게 노골적인 사진을 찍으면 어떡해요? 가족이 볼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하정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이게 뭐가 노골적이야? 가려야 할 곳은 다 가렸잖아.”‘이게 가린 거라고?’이런 사진은 섬나라에 수출해 봤자 삼류 축에도 못 낄 거다.나는 하정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아버지가 관직에 계셨고 가정 형편도 괜찮았으니 돈이 모자라면 집에 말하면 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 사진들 당장 삭제해요. 이 사진은 얼굴도 나왔잖아요. 이 사진이 퍼지기라도 하면 앞으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요?”“하. 난 이런 말 들으려고 수호 씨 부른 거 아닌데. 나랑 같이 커플 사진 찍자...”“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저는 절대 이런 사진 찍지 않을 거예요.”나는 하정현의 생각을 아예 싹 잘라버리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러자 하정현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돈 주는데도 안 한다고? 사진 한 세트 찍으면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알아?”“저 지금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 오히려 정현 씨야말로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나 친구한테 말해야지 왜 이런 짓을 해요?”“하.”하정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내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나 자이언트 베이비 아니거든. 그런데 왜 다른 사람한테 손 벌려야 하는데? 나도 내 능력으로 먹고사는 거니까 부끄러울 거 없다고 생각해.”그 말을 들으니 하정현이 궁하긴 궁했나 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이런 사진은 정상적인 여성이라면 절대 찍지 않았을 거다.그 순간 뭔가 머리를 스쳐지나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설마 어디서 대출받은 건 아니죠?”하정현은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더 이상 이영미와 한 공간에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헐레벌떡 도망쳤다.그 와중에도 이영미는 나더러 자기 남편 꼭 데려오라고, 안 데려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윽박질렀다.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윤해철에게 전화했다.[수호 군, 나도 마침 자네한테 볼일 있었는데.]“무슨 일인데요?”[회사 일은 내가 이미 다 처리했으니 방법을 대서 우리 마누라한테 좀 전해줘. 내가 요즘 데리러 갈 거라고.]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이영미가 하고 싶다고 할 때 윤해철이 마침 이영미를 데리러 올 생각이었다니.나는 다급히 윤해철에게 말했다.“방금 사모님을 뵀는데 사모님도 회장님을 무척 그리워하셨어요.”[마침 잘됐네. 그럼 지금 당장 데리러 가지.]“윤 회장님, 잠깐만요.”[왜 그러나?]“사모님은 지금 집에 안 계세요. 밖에 있어요...”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러다 문득 내가 집을 나올 때 이영미가 보냈던 주소가 떠올라 나는 그 주소를 윤해철에게 보내고 그곳에서 이영미를 찾으라고 했다.어떻게 설명할지는 부부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다.이영미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내 임무도 완수한 셈이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뒤, 나는 마침 장을 보고 온 애교 누나와 마주쳤다.“수호 씨, 왜 여기 있어요?”나는 대충 얼버무려 상황을 무마하면서 애교 누나의 짐을 들어주었다.“애교 누나, 저 마침 가게에 나가볼 참이었어요. 형수는 수고스러운 대로 누나가 좀 돌봐줘요. 제가 가능한 빨리 도우미를 구할게요. 그러면 누나도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애교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도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태연이 돌보는 건 나한테 맡겨요. 내가 어려울 때 태연이도 항상 나를 도왔는데 지금은 태연이가 어려운 시기이니 당연히 내가 도와야죠.”“그런데 일 구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일은 뭐 구한다고 바로 구해지는 건가요? 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려고요. 나도 아버지 말고 나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요.”애교 누나
“그럼 얼른 누우세요. 빨리 끝낼게요.”이영미는 두말없이 소파 위에 엎드렸다.나는 먼저 이영미의 허리부터 주물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미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어머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나는 흠칫 놀라 손을 뒤로 뺐다.그랬더니 이영미가 발긋한 얼굴로 말했다.“남자가 내 몸 만지는 게 오랜만이라 흥분했나 봐.”“계속 그러면 제가 어떻게 주물러 드려요?”“이거 다 정상적인 반응이잖아. 의사라는 사람이 침착해야지.”나는 이런 목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침착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사람 혼을 쏙 빼놓는 듯한 목소리는 아마 내시가 들어도 견디지 못할 거다.“안 돼요. 계속 그러면 마사지 안 해드릴 거예요.”나는 참지 못해 난처한 상황이 생길까 봐 먼저 물러섰다.하지만 이영미는 그것조차도 반대했다.“안돼. 계속 해. 안 그러면 안 갈 거니까. 나도 이것저것 다 겪어본 사람인데 뭔들 못 봤겠어? 그러니 어색하지 마. 내 눈에 수호 씨는 꼬맹이나 다름없으니까. 난 괜찮아.”이영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나도 이제 성인이고 혈기 왕성한 나이인데, 어떻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여길 수 있냔 말이다.하지만 이영미는 한사코 내 팔을 꽉 잡고 어디 가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닿는 피붓결에 나는 마음이 더 콩닥거렸다.“알았어요. 그럼 잘 누워 있어요. 계속 마사지해 드릴게요. 하지만 소리 나지 않게 좀 참아주세요.”“그건 안 되지. 욕망을 억누르는 건 몸에 안 좋아.”이영미의 말은 예전에 남주 누나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영미는 내 마사지를 받으며 한편으론 감탄했다.“여자는 역시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니까. 혼자 하는 건 너무 재미없어. 남자도 마찬가지로 여자의 손길이 필요한 법이지. 안 그러면 조물주가 왜 남녀 성별을 따로 만들었겠어? 그것도 상호 보완할 수 있게. 안 그래?”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여기 느
이영미는 제비집이며 인삼 등 다양한 보양식을 가져왔다.“어머님, 이거 다 너무 귀한 것들이에요.”“이건 다 수호 씨 형수 주려고 가져온 것들이야. 지금 의식이 없다고 해서 죽만 먹이면 안 돼. 영양소를 많이 공급해 줘야지.”나는 형수 대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혹시 윤지은 씨는 함께 오지 않았어요?”그때 애교 누나가 불쑥 물어봤다.“그 계집애는 또 무슨 일인지 함께 내려오자고 하니까 기어코 싫다고 하지 뭐야.”이영미는 말을 마친 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혹시 우리 지은이랑 싸웠어?”“아니요.”“못 믿겠는데? 지은이가 말은 독하게 해도 마음씨는 착한 애야. 네 형수 줄 거라니까 이렇게 바리바리 준비해 준 걸 보면 네 형수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뜻이거든. 그런데도 기어코 직접 오지 않겠다는 걸 보면 이유는 하나야. 바로 너. 너희 둘 요즘 싸웠지?”나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어머님, 정말 아니에요.”하지만 이영미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아니긴 무슨. 두 사람 분명 문제 있는데.”그때 애교 누나는 내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얘기 나누세요. 저는 내려가서 뭐 좀 사 올게요.”역시 애교 누나는 내가 말하기 부끄러워할까 봐 배려해 주려고 자리를 피한 거였다.애교 누나가 떠난 뒤 이영미는 내 옆에 꼭 붙어 앉았다.“이제 다른 사람도 없으니 말할 수 있지? 대충 얼버무릴 생각하지 마.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나도 수호 씨 용서 안 할 거니까.”이영미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자 나는 할 수 없이 그날 병원에서 싸웠던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어머님도 제가 쓰레기 같아요?”“응. 조금. 내 딸과 사귀면서 다른 여자와도 사귄다니. 내 딸의 매력이 그렇게 부족해? 한 명으로는 만족하지 못 하는 거야?”이영미의 말에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어머님은 저와 지은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요. 우리는 각자 원하는 걸 교환한 것뿐이지 마음을 주고받고 결혼 얘기까지
나는 내가 예전에 살던 방을 들여다보았다.이곳은 내 추억이 너무 많이 깃든 곳이다. 상황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익숙한 물건들을 보니 나는 문득 형수와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고 형수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 모든 건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했다.“저 잠깐 형수 좀 보고 올게요.”나는 형수 방으로 향했다.혼자 얌전히 누워 곤히 잠든 형수의 모습은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았다.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이불을 덮은 모습은 진짜 그냥 자는 것 같았다.나는 젖은 수건으로 형수의 몸을 닦아준 뒤 면봉에 물을 묻혀 형수의 입을 적셔주었다.형수의 현재 상태는 기껏해야 죽 같은 음식밖에 먹일 수 없고 또 매일 많은 량을 먹을 수도 없다. 나도 당연히 형수가 빨리 깨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날 밤 이후로 내가 무슨 짓을 해서 자극해도 형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애교 누나가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내가 먹일게요. 수호 씨는 불편하면 가서 쉬어요.”“네. 애교 누나. 그럼 부탁할게요.”사실 나는 너무 아파 더 이상 형수를 돌볼 상황이 아니었기에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형수는 내 방을 예전 내가 떠나던 그날 그대로 남겨두었다.형수와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니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나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첫 번째는 나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형수의 일 때문이었다.원래 나비 일은 이제 그냥 묻어두려고 했는데 결국 어젯밤 또 그렇게 되어버렸다.솔직히 나 스스로도 내가 헛것을 봤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용천 호텔에서의 그날 밤 나와 잔 사람이 세 명 중 한 명이라면 아무리 해도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결국 나는 환각이라고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나는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고는 30분 동안 얕은 수면을 취했다.고작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잤다고 정신상태는 훨씬 나아졌다.침실에서 나와 보
그 순간 나는 머리가 띵했다. 나는 애써 눈을 뜨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눈꺼풀이 무거워 도저히 뜰 수 없었다.다만 그 와중에 약간의 의식은 존재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용천 호텔에서 나와 몸을 섞은 사람이 사모님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사모님 댁에서 지내면서 사모님 다리에 있는 나비 문신을 보고 내 추측을 확신했고.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게 사모님이든 아니든 무조건 사모님과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최면했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사장님께 미안한 행동은 할 수 없었으니까.하지만 오늘 저녁 나는 또 잠결에 그 나비를 보게 된 거다. 그 순간 나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뭐지?’오늘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날 용천 호텔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애교 누나뿐이다.하지만 애교 누나 몸에는 분명 나비 문신이 없다.게다가 나는 애교 누나 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애교 누나의 피부는 이 정도로 희지 않다.하지만 애교 누나가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인가?고아연? 아니면 고수연?그날 밤 나는 이 두 여자를 본 적이 없다.나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했고 상대가 누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무엇보다 오늘 너무 취해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눈을 뜰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로 애써 몸부림쳤지만 결국 의식이 점멸되어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그리고 나는 다음 날까지 푹 잠들었다.내가 바닥에서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깨어났다. 내가 그중 맨 마지막에 깨어난 듯했다.나는 아픈 머리를 문지르다가 테이블을 치우는 애교 누나를 발견했다.“누나, 다른 사람들은요?”애교 누나는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대답했다.“다들 일이 있다고 먼저 갔어요. 수호 씨를 방에서 자라고 하려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 아무리 깨워도 깨지 않더라고요.”“애교 누나, 어젯밤 혹시 안 잤어요?”나는 몸부림치며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그때 애교 누나가 입을 열었다.“늦게 잠들긴 했지만 안 잔 건 아니에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