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아, 네 아빠 혹시 밖에 여자 있는 거 아니겠지?”오는 내내 이영미는 이 생각에 사로잡혀 가슴이 답답했다.그 말을 들은 윤지은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이 세상 남자가 모두 바람을 피워도 아빠는 절대 그럴 분 아니에요.”딸의 말에 이영미는 아주 만족했다. 그와 동시에 행복감이 밀려왔다.하지만 여전히 참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그럼 왜 나한테 이렇게 쌀쌀맞게 구는 건데? 스무날이나 전화도 안 하고, 내가 먼저 찾아갔는데 열정적으로 맞아주지도 않고. 남자들이 이러는 건 바람피우거나 바람피우기 직전이거나 둘 중 하나야. 지은아, 엄마가 불안해서 그러는데, 네가 네 아빠 좀 조사해 줄 수 없을까?”윤지은은 어머니한테 물 한 컵을 따라 주며 담담하게 말했다.“아까는 아빠랑 이혼한다면서요? 바로 이혼하면 될 건데 뭔 조사를 해요?”이영미는 순간 난감해졌다.그건 솔직히 그냥 해본 소리지, 절대 이혼할 마음이 없었다.“너도 참, 자식들은 부모 이혼을 뜯어말린다고 하던데, 넌 어쩜 아빠랑 엄마를 이혼하라고 부추기냐?”윤지은은 어머니 옆에 앉으며 솔직하게 말했다.“그건 엄마가 아빠랑 절대 이혼하지 않을 걸 아니까 그렇죠. 항상 이런 방식으로 애교 부려 아빠가 엄마를 찾아오게 하려는 거잖아요. 아빠 마음속에 여전히 엄마가 있고 엄마를 사랑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안 그래요?”이영미는 이내 씩 웃었다.“역시 우리 딸, 아주 엄마 마음을 꿰뚫어 보는구나. 그런데 네 아빠는 아니잖아. 네 아빠가 내 마음을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윤지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빠가 정말 엄마를 모른다고 생각해요?”“무슨 뜻이야? 네 아빠가 내 마음을 알면서 일부러 찾으러 오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면 더 나쁜 거잖아. 흥! 내가 떠나지 않을 걸 알고 일부러 찾으러 오지 않았다니.”“엄마, 엄마는 본인이 너무 아빠한테 달라붙는다는 생각 안 해봤어요?”윤지은은 참지 못하고 독설을 퍼부었다.이영미는 그런 딸의 말을 반박했다.“내가 언제 달라붙었어?”윤지은
윤지은은 더 기가 막혔다.“아빠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면서 왜 쓸데없는 짓을 해요? 지난번에 싸운 것도 정말 이해가 안 가요. 물 온도 45도에 맞춰 달라고 했는데, 55도에 맞춰 줬다고,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너무 억지 아니에요?”이영미는 그게 뭐 어떠냐는 듯 말했다.“맞잖아. 내가 45도짜리 물먹고 싶다면 네 아빠는 항상 1도도 차이 나지 않게 잘 맞춰 줬어. 지난번처럼 그런 적은 없었다고. 내 입천장이 다 데어 까질 뻔했다니까.”아직도 투정 부리는 어머니를 보니 윤지은은 한숨이 났다.“엄마가 너무 귀찮게 해서 아빠도 이제 지친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그런 거라고요.”“그런데 딸, 엄마 그거 사람 귀찮게 하는 게 아니라 애교 부리는 거야. 네 아빠가 어떤 사람인데. 사업에 성공한 중년 남자야. 밖에서 얼마나 많은 대접을 받겠어? 지금껏 네 아빠가 이룬 성과는 네 아빠가 두 손으로 이뤄낸 거야.”“그런 남자가 집에 돌아오자마자 또 알뜰살뜰 보살펴주는 여자가 필요할 것 같아? 아니야. 네 아빠는 독립적인 사람이라 자기를 보살펴주는 것보다 자기가 보살펴줄 수 있는 여자를 더 좋아한다고.”“나를 잘 보살펴주고, 예쁘게 키워놓으면 매번 나를 데리고 술자리나 파티에 참석할 때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 게 더 성취감 있을 거라고. 내가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는 것도 네 아빠의 성취감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야. 남자는 애교 많은 여자를 좋아해, 이건 너도 인정해야 한다.”윤지은은 마음이 조금 흔들려 어머니 말이 진짜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싸우는 걸 본 적이 확실히 드물긴 하다. 심지어 어머니가 말하는 다툼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티격태격하며 사랑하는 거로만 보일 정도니까.‘엄마 같은 여자가 정말 남자 마음을 잡는 여자라고?’‘그럼 난 왜 엄마의 이런 성격을 물려받지 못했지?’윤지은은 남자에게 인내심이 거의 없다. 남자한테 애교 부리라는 건 윤지은한테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거다.심지어
“어머, 지은아, 너 왜 그래? 놀랐잖니!”이영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그러다 딸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얼른 걱정되는 듯 물었다.“지은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무리 큰 일이라도 자꾸 화내지 마. 얼굴에 주름 생겨. 엄마를 봐, 쉰이 넘었는데도 피부가 탱탱하잖아. 그게 바로 화를 적게 내서야. 아무리 화가 나도 미소를 유지해야 해.”이영미는 확실히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여자다. 남편에게 예쁨 받고 집안일에도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게다가 항상 사랑을 받아 쉰이 넘는 나이에도 스무 살 소녀와 같다.게다가 그런 소녀 감성은 이영미의 외모뿐만 아니라 몸매에서도 비롯되었다.그런 앳된 모습은 뼛속에서 풍겨 나오는 것이지 절대 꾸며낸 것이 아니다.아니면 왜 애인을 돌보는 게 꽃 키우는 것과 같다고 하겠는가?정성스러운 보살핌을 받은 여자는 꽃처럼 영원히 아름답게 피어난다.하지만 윤지은은 그 시각 어머니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고 머릿속에 단지 방금 본 자료뿐이었다.카톡 아이디: 뛰는 말성명: 정수호그 아래에는 정수호에 대한 소개가 한가득했지만 윤지은은 볼 기분이 아니었다.단지 정수호라는 몇 글자가 이미 시선을 사로잡았으니까.윤지은은 주먹을 꽉 쥐었다. 너무 세게 힘준 탓에 뼈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이 순간 윤지은은 분노가 화산처럼 치밀어 폭발할 것만 같았다.만약 어머니가 여기 계시지 않았다면 아마 당장 달려와 나를 때렸을 거다.하지만 그 시각, 나는 침대에 누워 의기양양해서 문자를 작성했다. 윤지은이 너무 오랫동안 외롭고 쓸쓸해서 나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그렇다면 나도 윤지은과 뭐라도 좀 해볼 장정이다. 말로 희롱도 해 보고.이렇게 하면 윤지은이 나에게 줬던 모욕감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을 테니까.다만 불쌍한 나는 곧 닥칠 폭풍우를 짐작하지 못했다....“엄마, 나 잠시 나갔다 올게요.”윤지은은 로봇처럼 딱딱하게 말하며 일어섰다.이영미는 무의식적으로 물었다.“어디 가?”“그건
그러면서 속으로 약속 장소로 나가야 할지 고민했다.안 나가자니 윤지은 같은 여자를 포기하는 게 너무 아쉬웠고, 나가자니 이 상황을 어떻게 성명해야 할지 막막했다.사실 나는 솔직히 가고 싶다는 쪽에 마음이 더 기울었다.그러니까 남자는 색에 미친 동물이라고 하나 보다.남자는 이런 상황에 정말로 행동력이 있는 동물이다.나는 이렇게 하는 게 위험한 줄 알면서도 끝내 참지 못했다.심지어 마음속으로 핑계도 생각했다.나는 마침 이곳에 여행차 왔다고 하려고 결심했다.이유를 찾은 뒤 나는 잘 위장하고 곧장 윤지은한테 문자를 보냈다.[어디 있어요?]윤지은이 바로 답장했다.[용천 호텔이요. 여기에 개인 마사지룸이 있는데, 오려면 거기로 와요.]‘개인 마사지룸? 아주 재밌겠는데?’나는 내가 정말 좋은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며 바로 윤지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용청 호텔에 있었어요? 나도 마침 용천 호텔인데, 보아하니 하늘도 우리를 돕고 있나 봐요. 위치 보내줘요. 지금 찾으러 갈게요, 사랑하는 우리 자기.]윤지은의 기분을 맞춰 주려고 나는 아부를 떨어댔다.얼마 지나지 않아 윤지은은 나에게 위치 정보를 공유했다.나는 다시 내 착장을 검사했다. 이 정도로 꽁꽁 둘러쌌으니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뒤, 나는 곧장 개인 마사지룸으로 향했다.윤지은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나는 주위의 풍경은 감상할 겨를도 없었다.몇 분 뒤, 나는 겨우 개인 마사지룸에 도착했다.마사지룸 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책임자가 나에게 몇 마디 물어보더니 곧장 안에서 여사님 한 분이 기다린다고 바로 들어가라고 안내했다.‘역시 부잣집 아가씨라 그런지 돈도 많고 씀씀이도 크고 뭐든 잘한다니까.’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이곳은 개인 마사지룸 치고 매우 컸다. 룸 한 칸이 거의 우리 가게 룸 몇 칸을 더한 것과 맞먹었다.게다가 설비도 매우 다양했고, 대부분 해외에서 수입한 고급 장비들이었다.방 안 조명이 살짝 어둡긴 했지만, 그건 윤지은이 일부러 나를 생각해서
그 순간 나는 숨이 멎을 뻔했다.나는 윤지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고개 들어!”윤지은은 명령조로 말했다.하지만 나는 곧이곧대로 그 말을 들을 수 없었다.차라리 쥐구멍이 있다면 들어가고 싶었다.윤지은은 내가 협조하지 않자 두 남자에게 명령했다.“그 자식 고개 들게 해.”두 남자는 강제로 내 머리를 들어 올렸다.그 순간 머리가 누군가 바이스로 내 머리를 집어 올리는 것처럼 아프고 꿈쩍도 할 수 없었다.더 무서운 건, 고개를 드는 바람에 윤지은과 눈이 마주쳤다는 거였다.“안철수, 정수호!”“정말 감쪽같이 속았네.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었다니.”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이대로 인정하면 내가 어떻게 죽는지조차 알 수 없을 테니까.때문에 나는 헤실 웃으며 뻔뻔하게 말했다.“안철수라니, 무슨 말이에요?”“못 알아듣겠어? 그럼 여긴 왜 왔지?”“이런 곳에 처음 오니까 궁금해서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여기까지 들어온 거예요.”나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며 뻔뻔하게 헛소리를 지껄였다.윤지은은 차갑게 웃으며 나를 쳐다볼 뿐 바로 내 정체를 까발리지 않았다. 오히려 핸드폰을 꺼내 나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내가 폰에 저장해뒀던 얼음 마녀라는 이름이 뜬 순간 나는 머리가 하얘졌다.‘어떻게 이렇게 중요한 걸 잊을 수 있지?’‘이제 어떡해?’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죽겠네 정말.’그때 윤지은이 내 핸드폰을 주어 나에게 보여주었다.“증거가 확실한데 아직도 발뺌이야?”나는 그 순간 알았다.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하지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이 모든 게 내 운명 같았다.“하나만 물어볼게. 카톡으로 추가한 사람이 나라는 걸 언제부터 알았어?”난 윤지은의 눈을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도 할 수 없어 솔직히 말했다.“처음 병원에 갔을 때 발견했어요. 그때 지은 씨도 나를 알아챈 줄 알고 일부러 희롱했던 건데 모르더라고요.”윤지은은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표정이 어두워졌다.“그래서
나를 바라보는 윤지은의 이상한 눈빛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 계속 해명했다.“물론, 내 잘못인 건 맞아요. 상대가 지은 씨인 걸 알면서 거짓말로 다른 사람인 척 지은 씨와 데이트를 즐긴 건 내 잘못이에요. 하지만 내가 정수호든 안철수든 우리 다 즐긴 거 아니에요?”“우리 같이 즐긴 걸 봐서 너무 저한테 뭐라 하지 마요, 네?”윤지은은 내 말에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 미소는 너무 무서웠다.이 상황에서 왜 웃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심지어 너무 겁에 질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이럴 거면 차라리 통쾌하게 욕하기나 하지.’“제발 좀 웃지 마요. 웃으니까 더 무섭거든요.”나는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그러면서 한편으로 성욕에 눈이 멀었던 게 후회됐다.‘이제 어떡해, 다 들켰잖아.’문제는 이런 날이 올 줄 알면서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거다.때문에 이런 일을 당해도 싸다.나는 윤지은한테 용서받길 바라는 게 아니다. 다만 너무 잔인한 방법만 아니길 바랄 뿐이지.예를 들면 물고기 밥으로 강에 처넣는다던가, 아니면 토막 낸다던가...“그래. 그쪽 잘못만은 아니지. 뭐든 한 사람 탓으로 돌리는 건 안 좋은 거니까.”윤지은이 갑자기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그 말은 솔직히 조금 의외였다.‘이 여자가 갑자기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꼈나? 이젠 나를 더 이상 적대시하지 않는 건가?’나는 속으로 생각하며 얼른 미소 지었다.“그렇죠? 나도 사실 이런 일은 직접 말하기 그랬거든요. 모든 게 우연히 벌어진 일이에요.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 바로잡고 싶어도 바로 잡을 수 없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따랐을 뿐이라고요.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서로 정을 봐주자고요.”나는 위험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도망칠 기회를 노렸다.윤지은이 이렇게 쉽게 나를 용서할 리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물론 지금은 이렇게 나를 이해하는 듯 행동하지만, 언제 또 마음이 바뀔지 모른다.때문에 당장 도망치는 게 제
그제야 윤지은이 무서운 기세를 죽였다.나도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계속 말싸움하다간 내가 언제까지 버틸지 막막했다.윤지은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그게 정말이지?”윤지은이 되물었다.그 순간 나는 마음이 찔렸다.“음.”“음이 뭐지?”“응이요. 그러겠다는 뜻이었어요.”이젠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내 머리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윤지은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명확한 답을 줘.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 하지 말고.”윤지은이 또 화를 내자 나는 얼른 해명했다.“내 말은 그러니까 내가 지은 씨를 책임져야 한다면 책임지겠다는 뜻이에요.”“정말? 그럼 여자 친구는 어떡하고?”윤지은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그 순간 나는 애교 누나와 형수가 떠올랐다.솔직히 나는 윤지은을 책임질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현재 상황상, 나를 지키려면 어쩔 수 없었다.그렇다고 윤지은한테 책임지기 위해서 애교 누나 혹은 형수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건 싫었다.나는 뻔뻔하게 말했다.“여자 친구와는 헤어질 수 없어요. 나한테 너무 좋은 사람이거든요. 지은 씨만 괜찮다면 동시에 사귈게요.”“뭐라고? 지금 양다리 걸치겠다는 거야?”윤지은은 갑자기 화를 내며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나는 다급히 해명했다.“아니에요, 양다리 걸치겠다는 생각 해본 적 없어요. 하지만 여자 친구를 포기할 순 없어요. 그러면 내가 너무 쓰레기니까.”“그럼 나한테는 공평하다고 생각해? 여자 친구한테는 이게 공평해?”윤지은이 화를 내며 물었다.나도 순간 머리가 복잡해 짜증을 냈다.“나도 지금 머리가 엄청 복잡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한 대 때려요. 화 풀릴 때까지. 다만 죽이지는 마요.”나는 아예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윤지은의 처분을 기다렸다.도무지 좋은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윤지은이 화가 풀릴 때까지 나를 때리게 하는 것
나는 순간 또 넋을 잃었다.‘내 두 손을 원한다고?’‘그럼 난 평생 불구자가 되는 거잖아?’“난 두 손으로 밥 벌어 먹고사는 사람이에요. 두 손을 망가뜨리면 앞으로 어떻게 생활하라고요?”윤지은의 표정은 다시금 어두워졌다.“아래가 잘려 나가는 것도 싫고 껍질 벗겨지는 것도 싫고 손 망가뜨리는 것도 싫다고? 나랑 갈 데까지 갔으면서 다 싫다면 왜 차라리 죽지 않아?”곰곰이 생각해 보니 윤지은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하지만 윤지은의 요구에 응할 수는 없었다.“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나는 그저 애원할 수밖에 없었다.그때 윤지은이 손에 있는 칼을 내 앞에 있는 테이블에 쾅 하고 내리꽂았다.“잘못했다 한마디로 얼렁뚱땅 넘길 생각이었어? 내가 그렇게 싸구려야?”나는 그 순간 무슨 생각인지 저도 모르게 반박했다.“전에 남자 친구가 양다리 걸친 것도 용서해 줬잖아요.”전 남자 친구를 언급하는 순간 윤지은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그제야 나는 또 말실수를 했다는 걸 직감했다.그 쓰레기는 아마 윤지은이 제일 언급하기 싫은 치욕일 거다. 그런데 내가 그 상처에 소금을 뿌렸으니, 이게 죽여 달라는 게 아니면 뭔가?아니나 다를까 윤지은은 테이블에 꽂았던 칼을 뽑아 들고 나에게달려왔다.“사람 살려요. 여기 사람 죽여요. 사람 죽여요...”나는 도망치면서 미친 듯이 소리쳤다.내 뒤에서 칼을 든 윤지은이 미친 듯이 쫓아오고 있었다.그때보다 못한 경호원 두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가씨, 도움이 필요한가요?”“아니, 내 손으로 잡아서 족칠 거야!”윤지은은 차갑게 툭 내배었다.그렇게 쫓고 쫓기다가 얼마 지나자 윤지은은 점차 체력이 떨어졌다.나도 마찬가지였다.숨이 턱턱 막히고 폐가 터질 것만 같았다.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지은 씨, 계속 이러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니까, 우리 서로 한발씩 물러나는 건 어때요?”나는 이 문제를 정말로 해결하고 싶었다.하지만 윤지은의 화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보니까 은근히 지은이길 바라네?”나는 윤지은이라고 확신했기에 하정현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그건 아마도 그 상대가 윤지은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커서였을 수도 있었다. 정말 윤지은이면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생각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당연하죠. 그럼 더 이상 알아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동안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겠어요.”“너무 쉽게 생각하네. 수호 씨가 비록 임유미 씨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딱 한 끗 차이였어. 본인이 키스했던 사람이 수호 씨라는 걸 발견했을 때 유미 씨 표정이 어땠는지, 수호 씨는 아마 모를 거야.”그 말은 단번에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놀라던가요? 아니면 실망하던가요?”“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놀라움과 실망감도 있긴 했지만 뭔가 더 있었어.”“뭐가요? 무슨 뜻인데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러자 하정현은 귀찮았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몰라.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보지 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유미 씨는 상대가 수호 씨라는 걸 발견한 뒤에도 수호 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어.”“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모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나는 사모님을 대신해 해명했다.하정현은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유미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아무튼 알아요.”“그럼 내 친구 지은이는 그런 사람이고?”“그런 뜻 아니에요.”“정수호, 수호 씨는 항상 본인 입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더라. 그 사람을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지은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심지어는 수호 씨네 형수와 애교 씨도 제대로 알아본 적 없지? 두고 봐, 두려워할수록 그 일이 닥칠 테니까.”하정현의 애매모호한 말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아무것도 아니야. 할 말은 다 했
“내 상체는 이미 봤지? 그러면 하체를 보여 줄게.”하정현은 말하면서 제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녀는 섹시한 망사 스타킹을 신어 보일 듯 말 듯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하지만 망사 스타킹 아래는 새하얗기만 할 뿐 문신 같은 건 없었다.그럼 하정현도 배제할 수 있었다.그러면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사람 중에 유미 사모님만 남게 된 셈이다.그건 내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하정현은 또 뜸을 들이며 말했다.“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 좀 해볼게.”나는 너무 초조해서 심장이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만 뜸 들이고 얼른 말해요. 대체 누군데요?”“사실, 사실 그날 수호 씨랑 몸 섞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니야.”“네?”그 대답은 내 예상 범위를 너무 벗어나 나는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 했다.“그럼 유미 사모님이 있었는지만 말해줘요.”“있었어. 하지만 사람을 착각해서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뒤 도망가 버려서 실질적인 관계는 맺지 않았어.”그 대답을 들으니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나와 사모님이 잔 게 아니라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죄책감 가질 필요도 사장님께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나는 심지어 그날 밤 나와 사모님이 나눴던 스킨십을 간과했다.그런 일은 나와 사모님만 입 밖에 꺼내지 않으면 점점 잊힐 테니까.“진짜 수호 씨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누구인지 안 궁금해?”하정현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싱긋 웃었다.“사모님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어요.”“만약 나라면?”나는 멍하니 하정현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진짜예요? 농담이죠?”“난 우선 수호 씨 진심이 듣고 싶어. 수호 씨는 누구였으면 좋겠어?”하정현은 문제를 나한테 던졌다.하지만 나는 누구이길 바란 적은 없다. 그저 그 사람이 절대 사모님만은 아니기를 바랐을 뿐이지.그 때문에 하정현이 그런 질문을 할 때 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소여정? 설마 그 여자인가
하정현의 말을 들으니 나는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하정현은 평소 무심하고 털털해 보이고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얘기를 농담하듯 가볍게 꺼냈지만 사실 그 모든 건 가짜였다. 나는 이제야 그간 하정현이 지은 미소가 모두 가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하정현은 사실 그 일로 계속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바보라고 하기에는 효심이 많고 똑똑하다고 하기에는 인터넷 대출을 받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지금은 대출 빚을 갚으려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고.하지만 계속 이렇게 가면 하정현은 분명 망가질 거다.“이 일은 지은 씨한테 얘기해 볼게요.”나는 속으로 마음을 굳혔다.하지만 하정현은 다급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지은한테 알려주지 마. 지은이는 안 돼.”“왜요? 지은 씨한테 2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인데 왜 본인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숨기는 거예요?”그 말에 하정현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내가 지은이한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빚지면 안 돼.”“그러 알아? 애초에 지은과 준휘를 연결해 준 사람도 나야. 준휘가 쫓아다닐 때 지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나서서 기호를 만들어 준 것 때문에 지은이는 모든 게 하늘의 뜻이라고 믿게 된 거라고...”하정현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 한참 동안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러다 한참 고민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지은 씨도 정현 씨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정현 씨를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나도 지은이가 나를 탓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지은이는 착한 사람이야. 말을 좀 독하게 해서 그렇지. 그런데 그래서 더 이상 폐 끼칠 수 없어.”“하지만 이 일은 정현 씨 혼자서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요. 계속 이러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돼요.”“아무튼 이 일은 지은이한테 말하지 마. 동의하면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게.”“전 정현 씨의 비밀에 관
‘진짜 약도 없네. 지은 씨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그걸 또 몰래 찍었다고?’내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하정현이 갑자기 제 핸드폰을 내 앞으로 쑥 들이밀었다.그 사진을 본 순간 나는 다급히 액정을 가렸다.“미쳤어요? 이렇게 노골적인 사진을 찍으면 어떡해요? 가족이 볼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하정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이게 뭐가 노골적이야? 가려야 할 곳은 다 가렸잖아.”‘이게 가린 거라고?’이런 사진은 섬나라에 수출해 봤자 삼류 축에도 못 낄 거다.나는 하정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아버지가 관직에 계셨고 가정 형편도 괜찮았으니 돈이 모자라면 집에 말하면 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 사진들 당장 삭제해요. 이 사진은 얼굴도 나왔잖아요. 이 사진이 퍼지기라도 하면 앞으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요?”“하. 난 이런 말 들으려고 수호 씨 부른 거 아닌데. 나랑 같이 커플 사진 찍자...”“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저는 절대 이런 사진 찍지 않을 거예요.”나는 하정현의 생각을 아예 싹 잘라버리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러자 하정현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돈 주는데도 안 한다고? 사진 한 세트 찍으면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알아?”“저 지금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 오히려 정현 씨야말로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나 친구한테 말해야지 왜 이런 짓을 해요?”“하.”하정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내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나 자이언트 베이비 아니거든. 그런데 왜 다른 사람한테 손 벌려야 하는데? 나도 내 능력으로 먹고사는 거니까 부끄러울 거 없다고 생각해.”그 말을 들으니 하정현이 궁하긴 궁했나 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이런 사진은 정상적인 여성이라면 절대 찍지 않았을 거다.그 순간 뭔가 머리를 스쳐지나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설마 어디서 대출받은 건 아니죠?”하정현은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더 이상 이영미와 한 공간에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헐레벌떡 도망쳤다.그 와중에도 이영미는 나더러 자기 남편 꼭 데려오라고, 안 데려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윽박질렀다.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윤해철에게 전화했다.[수호 군, 나도 마침 자네한테 볼일 있었는데.]“무슨 일인데요?”[회사 일은 내가 이미 다 처리했으니 방법을 대서 우리 마누라한테 좀 전해줘. 내가 요즘 데리러 갈 거라고.]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이영미가 하고 싶다고 할 때 윤해철이 마침 이영미를 데리러 올 생각이었다니.나는 다급히 윤해철에게 말했다.“방금 사모님을 뵀는데 사모님도 회장님을 무척 그리워하셨어요.”[마침 잘됐네. 그럼 지금 당장 데리러 가지.]“윤 회장님, 잠깐만요.”[왜 그러나?]“사모님은 지금 집에 안 계세요. 밖에 있어요...”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러다 문득 내가 집을 나올 때 이영미가 보냈던 주소가 떠올라 나는 그 주소를 윤해철에게 보내고 그곳에서 이영미를 찾으라고 했다.어떻게 설명할지는 부부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다.이영미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내 임무도 완수한 셈이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뒤, 나는 마침 장을 보고 온 애교 누나와 마주쳤다.“수호 씨, 왜 여기 있어요?”나는 대충 얼버무려 상황을 무마하면서 애교 누나의 짐을 들어주었다.“애교 누나, 저 마침 가게에 나가볼 참이었어요. 형수는 수고스러운 대로 누나가 좀 돌봐줘요. 제가 가능한 빨리 도우미를 구할게요. 그러면 누나도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애교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도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태연이 돌보는 건 나한테 맡겨요. 내가 어려울 때 태연이도 항상 나를 도왔는데 지금은 태연이가 어려운 시기이니 당연히 내가 도와야죠.”“그런데 일 구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일은 뭐 구한다고 바로 구해지는 건가요? 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려고요. 나도 아버지 말고 나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요.”애교 누나
“그럼 얼른 누우세요. 빨리 끝낼게요.”이영미는 두말없이 소파 위에 엎드렸다.나는 먼저 이영미의 허리부터 주물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미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어머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나는 흠칫 놀라 손을 뒤로 뺐다.그랬더니 이영미가 발긋한 얼굴로 말했다.“남자가 내 몸 만지는 게 오랜만이라 흥분했나 봐.”“계속 그러면 제가 어떻게 주물러 드려요?”“이거 다 정상적인 반응이잖아. 의사라는 사람이 침착해야지.”나는 이런 목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침착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사람 혼을 쏙 빼놓는 듯한 목소리는 아마 내시가 들어도 견디지 못할 거다.“안 돼요. 계속 그러면 마사지 안 해드릴 거예요.”나는 참지 못해 난처한 상황이 생길까 봐 먼저 물러섰다.하지만 이영미는 그것조차도 반대했다.“안돼. 계속 해. 안 그러면 안 갈 거니까. 나도 이것저것 다 겪어본 사람인데 뭔들 못 봤겠어? 그러니 어색하지 마. 내 눈에 수호 씨는 꼬맹이나 다름없으니까. 난 괜찮아.”이영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나도 이제 성인이고 혈기 왕성한 나이인데, 어떻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여길 수 있냔 말이다.하지만 이영미는 한사코 내 팔을 꽉 잡고 어디 가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닿는 피붓결에 나는 마음이 더 콩닥거렸다.“알았어요. 그럼 잘 누워 있어요. 계속 마사지해 드릴게요. 하지만 소리 나지 않게 좀 참아주세요.”“그건 안 되지. 욕망을 억누르는 건 몸에 안 좋아.”이영미의 말은 예전에 남주 누나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영미는 내 마사지를 받으며 한편으론 감탄했다.“여자는 역시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니까. 혼자 하는 건 너무 재미없어. 남자도 마찬가지로 여자의 손길이 필요한 법이지. 안 그러면 조물주가 왜 남녀 성별을 따로 만들었겠어? 그것도 상호 보완할 수 있게. 안 그래?”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여기 느
이영미는 제비집이며 인삼 등 다양한 보양식을 가져왔다.“어머님, 이거 다 너무 귀한 것들이에요.”“이건 다 수호 씨 형수 주려고 가져온 것들이야. 지금 의식이 없다고 해서 죽만 먹이면 안 돼. 영양소를 많이 공급해 줘야지.”나는 형수 대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혹시 윤지은 씨는 함께 오지 않았어요?”그때 애교 누나가 불쑥 물어봤다.“그 계집애는 또 무슨 일인지 함께 내려오자고 하니까 기어코 싫다고 하지 뭐야.”이영미는 말을 마친 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혹시 우리 지은이랑 싸웠어?”“아니요.”“못 믿겠는데? 지은이가 말은 독하게 해도 마음씨는 착한 애야. 네 형수 줄 거라니까 이렇게 바리바리 준비해 준 걸 보면 네 형수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뜻이거든. 그런데도 기어코 직접 오지 않겠다는 걸 보면 이유는 하나야. 바로 너. 너희 둘 요즘 싸웠지?”나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어머님, 정말 아니에요.”하지만 이영미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아니긴 무슨. 두 사람 분명 문제 있는데.”그때 애교 누나는 내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얘기 나누세요. 저는 내려가서 뭐 좀 사 올게요.”역시 애교 누나는 내가 말하기 부끄러워할까 봐 배려해 주려고 자리를 피한 거였다.애교 누나가 떠난 뒤 이영미는 내 옆에 꼭 붙어 앉았다.“이제 다른 사람도 없으니 말할 수 있지? 대충 얼버무릴 생각하지 마.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나도 수호 씨 용서 안 할 거니까.”이영미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자 나는 할 수 없이 그날 병원에서 싸웠던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어머님도 제가 쓰레기 같아요?”“응. 조금. 내 딸과 사귀면서 다른 여자와도 사귄다니. 내 딸의 매력이 그렇게 부족해? 한 명으로는 만족하지 못 하는 거야?”이영미의 말에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어머님은 저와 지은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요. 우리는 각자 원하는 걸 교환한 것뿐이지 마음을 주고받고 결혼 얘기까지
나는 내가 예전에 살던 방을 들여다보았다.이곳은 내 추억이 너무 많이 깃든 곳이다. 상황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익숙한 물건들을 보니 나는 문득 형수와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고 형수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 모든 건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했다.“저 잠깐 형수 좀 보고 올게요.”나는 형수 방으로 향했다.혼자 얌전히 누워 곤히 잠든 형수의 모습은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았다.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이불을 덮은 모습은 진짜 그냥 자는 것 같았다.나는 젖은 수건으로 형수의 몸을 닦아준 뒤 면봉에 물을 묻혀 형수의 입을 적셔주었다.형수의 현재 상태는 기껏해야 죽 같은 음식밖에 먹일 수 없고 또 매일 많은 량을 먹을 수도 없다. 나도 당연히 형수가 빨리 깨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날 밤 이후로 내가 무슨 짓을 해서 자극해도 형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애교 누나가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내가 먹일게요. 수호 씨는 불편하면 가서 쉬어요.”“네. 애교 누나. 그럼 부탁할게요.”사실 나는 너무 아파 더 이상 형수를 돌볼 상황이 아니었기에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형수는 내 방을 예전 내가 떠나던 그날 그대로 남겨두었다.형수와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니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나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첫 번째는 나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형수의 일 때문이었다.원래 나비 일은 이제 그냥 묻어두려고 했는데 결국 어젯밤 또 그렇게 되어버렸다.솔직히 나 스스로도 내가 헛것을 봤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용천 호텔에서의 그날 밤 나와 잔 사람이 세 명 중 한 명이라면 아무리 해도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결국 나는 환각이라고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나는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고는 30분 동안 얕은 수면을 취했다.고작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잤다고 정신상태는 훨씬 나아졌다.침실에서 나와 보
그 순간 나는 머리가 띵했다. 나는 애써 눈을 뜨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눈꺼풀이 무거워 도저히 뜰 수 없었다.다만 그 와중에 약간의 의식은 존재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용천 호텔에서 나와 몸을 섞은 사람이 사모님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사모님 댁에서 지내면서 사모님 다리에 있는 나비 문신을 보고 내 추측을 확신했고.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게 사모님이든 아니든 무조건 사모님과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최면했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사장님께 미안한 행동은 할 수 없었으니까.하지만 오늘 저녁 나는 또 잠결에 그 나비를 보게 된 거다. 그 순간 나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뭐지?’오늘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날 용천 호텔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애교 누나뿐이다.하지만 애교 누나 몸에는 분명 나비 문신이 없다.게다가 나는 애교 누나 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애교 누나의 피부는 이 정도로 희지 않다.하지만 애교 누나가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인가?고아연? 아니면 고수연?그날 밤 나는 이 두 여자를 본 적이 없다.나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했고 상대가 누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무엇보다 오늘 너무 취해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눈을 뜰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로 애써 몸부림쳤지만 결국 의식이 점멸되어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그리고 나는 다음 날까지 푹 잠들었다.내가 바닥에서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깨어났다. 내가 그중 맨 마지막에 깨어난 듯했다.나는 아픈 머리를 문지르다가 테이블을 치우는 애교 누나를 발견했다.“누나, 다른 사람들은요?”애교 누나는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대답했다.“다들 일이 있다고 먼저 갔어요. 수호 씨를 방에서 자라고 하려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 아무리 깨워도 깨지 않더라고요.”“애교 누나, 어젯밤 혹시 안 잤어요?”나는 몸부림치며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그때 애교 누나가 입을 열었다.“늦게 잠들긴 했지만 안 잔 건 아니에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