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 상황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나는 아직 어리고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으니 경험이 전혀 없었다.그때 모태진이 말했다.“괜찮으니까 수호 씨는 가 봐요.”“그럼 아내분은...”“수호 씨가 방법을 대서 돌려보내 줘요. 나머지는 저녁에 돌아가서 처리하고 싶으니까.”“오후에 계속 출근할 거예요? 휴가 안 낼 거예요?”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계속 출근하려 하다니 정말 대단했다.모태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집에 애 둘이 있는데, 출근 안 하면 어떻게 내 자식 먹여 살리라고요?”‘하, 사람이 중년이 되면 마음대로 할 수 없구나.’나는 갑자기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무런 부담도 없이 스스로 돈 벌고 모으면 되니까.“그럼 잠깐 휴식해요. 내가 나가볼 테니까.”다시 로비에 도착해 보니 동료 몇 명이 이미 모태진의 아내를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소란을 피워댔다.이러다가는 가게 영업까지 지장 줄 수 있었다.하지만 이런 경험이 없는 나는 아무리 설득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결국 정 사장님이 나서서 그 여자의 마음을 달래주었다.모태진의 아내는 떠났지만 직원들은 뒤에서 모태진에 대해 수군댔다.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둥,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둥 하면서.소문은 참으로 무서웠다.모태진은 이곳에서 몇 년 동안 일했기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동료들은 알만큼 알고 있다.나 같은 신입마저 모태진이 절대 그런 일을 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 함께 오랫동안 일한 동료들이 이렇게 뒷담화하고 있다니.이게 인간인 듯싶다.남이 저보다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게 인간이다.마치 이렇게 남을 망가뜨리면 자기의 가치가 증명되기라도 하는 것처럼.이 선생님과 나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이 선생님도 이제 곧 간다.“이 선생님, 오늘 오후부터 일 그만둘 건가요?”이미 짐 정리를 마친 이 선생님을 보니 오후에 바로 떠나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이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
“무슨 임무요?”나는 너무 궁금했다. 그때 이 선생님이 정 사장님 사무실을 가리키며 말했다.“내가 떠나면 자네가 날 대신해 정 사장 좀 챙기게. 매일 제때에 약 챙겨 먹도록 상기시켜 주고.”“네? 정 사장님이 편찮으신가요?”“큰 문제는 아니라 걱정할 거 없네. 하지만 약은 끊으면 안 돼. 정 사장은 뭐든 다 좋아, 사람이 관대하고 직원들한테도 잘하지, 하지만 본인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내가 약 먹으라고 알려주지 않으면 먹을 생각을 안 하니 원. 그러니 반드시 누군가 상기시켜 줘야 하네.”‘아, 그렇구나.’나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신경 쓸게요.”“자네는 사람이 참 착해. 기대가 크니 잘해 봐. 혹시 아나? 언젠가 이 가게 일인자가 될지.”나는 마구 도리질했다.“무슨 그런 말씀을. 저 이제 출근한 지 며칠밖에 안 되는 신입이에요. 아직 배워야 할 것도 엄청 많아요.”이 선생님은 허허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심지어 우리가 배웅하겠다고 하는 것도 한사코 거절하시며 혼자 배낭을 메고 떠나갔다.왠지 모르겠지만, 이 선생님이 떠나니 내 마음 한 구석이 허전했다. 마치 연로하신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것처럼.내 마사지룸에 들어왔지만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나는 기분을 풀려고 애교 누나한테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한참 대화하다 보니 기분이 많이 좋아져 다시 일을 시작했다.잠깐 휴식할 때 보니 모태진도 일하고 있었다. 심지어 기분도 꽤 좋아 보였다.그걸 보니 나도 마음이 놓였다.하지만 그때, 익숙한 실루엣이 가게로 걸어 들어왔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한은솔이었다.아마 또 모태진을 찾아온 것일 거다.나는 황급히 물컵을 내려놓고 한은솔을 내 마사지룸으로 끌어 들였다.“여기가 어디라고 또 와요? 오늘 태진 선배 아내분이 가게까지 찾아온 건 알아요?”나는 한은솔이 떨어져 나가길 바라며 오늘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말했다.그랬더니 한은솔은 눈시울을 붉히며 흐느꼈
“그러고 나서 저를 호텔로 데려가 밤새도록 같이 있어 줬어요. 저는 침대에서 자고 모 선생님은 소파에 있었어요. 저희 정말 아무 짓도 안 했어요.”한은솔은 울며 계속 나한테 설명했다.그게 나로서는 와닿지 않아 그저 조용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태진 선배가 그렇게 좋은 사람인 걸 알면 더 멀리했어야죠. 태진 선배가 은솔 씨보다 나이도 한참 많고 아이도 벌써 초등학생이에요. 은솔 씨가 기분 안 좋다고 막 찾아오고 술 먹었다고 지켜달라고 하면 선배 아내는 어떻겠어요? 아이는 또 어떻겠어요?”나는 이 모든 문제가 한은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한은솔이 모태진한테 아무 감정도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우리 가게에 다른 마사지사도 많은데 하필 매번 모태진을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 자꾸만 둘이 있으려 하는 것도 그렇고, 문제가 없다는 게 이상하다.하지만 그렇다고 한은솔을 불여우라고 하기에는 또 아니다.한은솔의 외모와 조건으로는 훨씬 더 좋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으니까.모태진처럼 나이도 들고 처자식도 있는 사람한테 아직 20대인 젊은 처녀가 가질 목적이 뭘까?물질적인 요구 외에 아마도 정신적인 기탁일 거다.그게 가장 무서운 거다.그래서 내가 제때 막아야 한다.한은솔은 여전히 눈물을 주르륵 흘리고 있었다.솔직히 한은솔의 이런 모습을 보면 조금 짜증이 난다.우는 게 뭔 소용 있다고? 울면 뭐 문제가 해결되나?그때, 모태진이 내 마사지 룸으로 들어왔다.그건 내가 가장 보기 싫었던 장면인데, 역시나 벌어지고 말았다.“은솔 씨, 왜 그래요? 왜 그렇게 울어요?”모태진은 한은솔 앞에만 서면 항상 이렇듯 인내심 있고 다정한 모습만 보여준다.한은솔도 그런 모태진을 보자 단번에 그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모 선생님, 죄송해요. 저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흑흑흑...”‘이건 또 뭔 시츄에이션이지?’너무 충격이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면서 왜 품에 안기는데?’‘그렇게 우는 건 또 뭐고?’나는 눈을 똑바로 뜬 채 모태진을 바라보며 하
“또 운전기사 노릇이에요? 이번에는 또 어디 가는데요?”솔직히 말하면 썩 내키지 않았다.첫째, 운전도 하고, 물건도 나르는 건 아주 힘든 일이다. 가게에서 고객을 받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둘째, 이토록 아름다운 미녀들과 함께 있는데 보기만 하고 만질 수 없다면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다.차라리 아예 접촉하지 않고 가게에서 고객들 마사지나 해주고 오일이나 발라주는 게 더 낫지 않은가?소여정은 내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자 살짝 내 허리를 꼬집었다.“가라겸 가. 뭔 말이 그렇게 많아?”그 행동에 나는 흠칫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티를 낼 수 있는 건지?친구 두 명이 여기 있는데, 나를 막 터치하다니.사장 사모님은 이미 습관이 된 것처럼 아무 반응도 없었지만, 백연우는 우리를 계속 쳐다봤다. 그 눈빛에 등골이 오싹했다.마치 학교 교감쌤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느낌처럼.때문에 나는 백연우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다.“저 지금 출근해야 해요. 계속 저를 이렇게 사적으로 불러내면 사장님한테 너무 미안하잖아요.”소여정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그딴 이유로는 날 설득할 수 없어. 임유미도 괜찮다는데, 수호 씨가 왜 신경 써?”사장 사모님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보나 마나 이번 아이디어도 소여정이 낸 게 틀림없다.이 여자는 왜 맨날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지. 하루라도 안 괴롭히면 마음이 불편한가?“세분과 함께 다니기 싫다는 게 아니라 번거로운 일 찾아서 하기 싫은 것뿐이에요. 그리고 임천호가 아는지 마는지를 떠나서 친구분 윤지은 씨가 저한테 소여정 씨와 멀리하라고 계속 강조했거든요.”소여정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윤지은은 지금 없잖아? 수호 씨도 나도 말 안 하면, 예네 둘도 절대 말 안 할 거야. 그럼 윤지은이 알 리도 없고.”“그래도 안 됩니다. 만에 하나 알게 될 수도 있잖아요. 전 스스로 화를 자초하고 싶지 않습니다.”“그런 수호 씨 마음대로 안 되겠는데? 유미야, 네 차례야.”소여정
“용천 빌라. 나 거기서 하루 묵을 거거든.”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다급히 물었다.“그러면 저도 묵어야 하잖아요?”“그렇지. 수호 씨가 안 묵으면 누가 운전해 줘?”소여정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하지만 나는 싫었다.돌아가지 않으면 애교 누나한테는 어떻게 설명하라고?그리고 형수도 걱정돼 죽겠는데.“그럼 전 갈 수 없어요. 여자 친구가 오해할 거예요.”나는 차에서 내리며 진지하게 해명했다.그러자 소여정이 나에게 현금다발을 꺼냈다.“여자 친구한테 오늘 다른 일이 있어서 못 들어간다고 해.”“이건 돈 문제가 아니에요. 전 단 한 번도 외박한 적 없어요.”소여정은 또 현금다발을 꺼냈다.“하룻밤에 200만도 벌고 부자 체험도 해볼 수 있는데 설레지 않아?”소여정 손에 든 현금을 보고 설레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게다가 전에 용천 펜션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데, 강북에서 가장 유명한 펜션이다.펜션 안 인테리어는 별장급이고, 개인 수영장도 딸린 데다 파티장, 온천 등이 있다.내 돈을 내지 않고 이런 걸 체험할 수 있다면 당연히 가고 싶었다.“좋아요, 그럼 우선 여자 친구한테 전화해 볼게요.”나는 소여정이 건네는 돈을 받고 구석진 곳으로 와 애교 누나한테 전화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누나, 걱정하지 마요. 절대 몸 함부로 굴리지 않아요. 도착하면 영상통화 할게요.”애교 누나가 오해할까 봐 나는 일부러 설명을 덧붙였다.하지만 누나는 별다른 오해를 하지 않고 예전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수호 씨, 가고 싶으면 가요. 나한테 보고할 필요 없어요. 우리 아직 정식으로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 수호 씨는 아직 자유예요. 앞으로 하고 싶은 건 회보할 필요 없이 뭐든 해요.”“애교 누나가 저를 믿는 건 누나 일이고, 누나한테 회보하고 싶은 건 내 일이잖아요.”나는 강력하게 어필했다.이건 내가 진심으로 애교 누나와 결혼하고 싶다는 걸 알게 하기 위해서다.애교 누나는 내 말에 피식 웃었다.“그래요. 그 회보 받을게요. 오늘 저
이곳은 건물이 웅장하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서비스도 최고였다.문에 들어선 순간부터 안내원이 따라붙었다.소여정은 미리 핸드폰으로 예약을 마친 상태였다. 그것도 최고 VIP들만 누릴 수 있는 서비스로.때문에 접대할 때부터 펜션 측은 우리에게 과일과 와인을 준비해 주었다.심지어 일부 과일은 이름도 모르는 것들이었다.그 순간, 내가 한없이 초라해졌다. 보고들은 게 너무 없었으니까.여자 세 명이 안내원과 대화를 주고받을 때 나는 참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과 과일을 사진 찍었다.다른 뜻은 아니고 그저 기념용이었다.나도 이런 건 본 적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기념.게다가 용천 펜션 로비를 배경으로 셀카도 찍었다.우장하고 넓고 화려한 호텔에 들어오니 내가 마치 황궁에 있는 느낌이 들었다.역시나 이래서 다들 부자가 되려고 하는구나 실감했다.돈 많은 사람들은 정말 최고의 삶을 누릴 수 있으니까.세 명은 바로 모든 수속을 마쳤다.나는 그 사이 얼른 핸드폰을 거두었다. 세 사람에게 내가 몰래 사진을 찍었다는 걸 들키기 싫었으니까.세 사람이 내 모습을 발견했다면 분명 촌놈이라고 여길 테니까.그때 백연우가 내 그런 모습을 봤는지 한쪽 입꼬리를 비쭉 올리며 비웃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소여정이 허리를 살짝씩 움직이며 나에게로 걸어왔다.“이제 수속은 마쳤으니 수호 씨는 가서 우리 짐 가져와.”“이건 우리 세 명 거, 이건 수호 씨 거.”소여정은 나에게 색깔이 다른 카드키 두장을 건넸다.세 명의 것은 새까만 색이라 보기에도 귀티 나고 심플했지만, 내 것은 초록색이라 그다지 높지 않은 등급 같았다.딱 봐도 세 명의 방과 내 방은 달랐다.하지만 별것도 아니었다. 나는 운전기사로 온 것이니, 무료로 이곳에서 노는 것만 해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여기서 뭘 더 바라겠는가?나는 세 사람의 짐을 들고 로비를 막연하게 바라봤다.‘젠장, 어디로 가야지?’나는 이곳에 온 적이 없었기에 객실을 가려면 어디로 가
내가 어지러워 쓰러지려던 그때, 다행히 친절한 청소부 누님이 나에게 방향을 안내했다.방문을 열고 들어가 세 사람의 짐을 하나둘 차곡차곡 놓은 나는 참지 못하고 주위를 빙 돌아다녔다.이곳은 아주 커다란 로열스위트 룸이었다.방마다 개인용 화장실이 딸려 있었고, 욕조도 있었으며 창밖에 호수가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그야말로 환경이 너무 좋아 나는 또 사진 몇 장을 더 찍었다.내가 한평생 이런 곳에 올 기회가 얼마나 될까?나는 베란다도 한번 기웃거렸다.베란다는 쉴 수 있는 공간과 다과를 즐기는 공간도 있었다. 게다가 방안에 각종 신선한 과일과 와인이 구비되어 있었다.그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내 손에 쥐고 있던 초록색 카드키를 바라봤다. ‘내 방은 어떻지?’당장 가보고 싶었다.내 방 번호는 819라서 세 사람과 같은 층에 있지만 방향이 정반대였다.이번에는 노하우도 있었기에 단번에 내 방을 찾았다.바로 카드키를 긁고 안으로 들어갔다.놀랍게도 내 방도 꽤 컸다.물론 로열 스위트룸처럼 화려하지 않은데 보통 호텔보다는 훨씬 좋았다.심지어 안에는 여러 가지 와인과 신선한 과일 그리고 욕조가 준비되어 있었다. 다만 발코니가 조금 작았다.하지만 나한테는 이미 너무 큰 기쁨이었다.나는 내 방에 대고 찰칵찰칵 몇십 장의 사진을 찍어 몇 장은 애교 누나에게 보냈다.[애교 누나, 도착했어요. 이게 제 방이에요. 앞으로 기회 되면 누나도 데리고 올게요.]애교 누나는 나에게 짤막한 답변을 해 왔다.[제대로 즐겨요.]나른한 침대에 누운 나의 기분은 전례 없이 설렜다.내가 살아생전 이토록 화려한 호텔에 묵을 줄이야. 잠시 누워있다가 나는 소여정에게 문자를 보냈다.[물건은 이미 방에 넣어뒀어요. 그다음에 저는 뭘 하면 되죠?]소여정이 나에게 200만 원이나 주고, 여기에서 무료로 놀게 해줬으니, 나는 당연히 세 사람을 제대로 보살펴야 한다.얼마 지나지 않아 소여정의 답장을 받았다.[이젠 수호 씨가 할 일은 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해.]‘이제 내
어머니는 참 좋은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나를 무척이나 아꼈다.내 말에 어머니는 당연히 아주 기뻐하셨다.[우리 아들 능력자네. 엄마는 참 기뻐.]“엄마, 제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어머니랑 아버지 꼭 강북에 데려와 부자의 생활을 누리게 해줄게요.”[나랑 니 아버지는 됐다. 네 그 효심만 있으면 만족한다. 우리 같은 촌구석 양반들은 그런 곳에 가도 편히 못 있는다. 수호야, 너만 잘 지내면 나랑 네 아버지는 만족한다.]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성실하고 평범한 농부이며, 농부의 순박하고 진솔한 마음씨를 갖고 있다.한참 수다를 떨다가 대화 주제는 결국 나에게로 왔다.[수호야, 너도 일만 넘 신경 쓰지 말고, 시간 나면 여자 친구도 좀 만들고 그래. 나랑 네 아버지가 지금은 아직 젊으니 내도 봐줄 수 있잖아...]시골 사람들은 결혼을 일찍 한다, 때문에 어머니가 이리도 나를 재촉하는 건 이해할 수 있었다.나는 애교 누나의 일을 어머니께 말씀드릴지 말지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기로 했다.애교 누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했기도 했으니, 일찍 말하든 늦게 말하든 똑같았으니까.“엄마, 사실 저 여자 친구 있어요.”어머니는 그 말에 무척 좋아하셨다.[정말이야? 너무 잘됐네. 어떤 여자야? 몇 살이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데?]나는 어머니를 속일 생각이 없었기에 솔직히 대답했다.“제 여자 친구가 저보다 나이 좀 많아요. 이혼도 한 번 했고요. 하지만 사람은 엄청 좋아요. 저도 정말 그 사람과 결혼하고 싶고요.”[이혼했었다고? 뭐 별거 아니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다 오픈 마인드잖아. 두 사람만 좋으면 우리는 의견 없다. 시간 날 때 여자 친구 데려와 봐. 우리도 좀 보게.]역시 어머니가 이런 일로 나를 나무라지 않을 줄 알았다.나는 너무 기뻤다.“그래요. 며칠 뒤 마침 휴가인데, 그때 데려갈게요.”우리 부모님은 비록 시골 토박이지만 모두 깨어 있는 분들이시고, 나에 대한 태도도 느슨하신 분들이다.어머니와 한참 얘기를 하다 보니 기분이 좋
“보니까 은근히 지은이길 바라네?”나는 윤지은이라고 확신했기에 하정현의 표정은 눈치채지 못했다.그건 아마도 그 상대가 윤지은이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너무 커서였을 수도 있었다. 정말 윤지은이면 더 이상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생각하니 웃음이 흘러나왔다.“당연하죠. 그럼 더 이상 알아내려고 머리 굴리지 않아도 되니까요. 그동안 내가 이 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했는데,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 안심할 수 있겠어요.”“너무 쉽게 생각하네. 수호 씨가 비록 임유미 씨와 끝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딱 한 끗 차이였어. 본인이 키스했던 사람이 수호 씨라는 걸 발견했을 때 유미 씨 표정이 어땠는지, 수호 씨는 아마 모를 거야.”그 말은 단번에 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어떤 표정이었는데요? 놀라던가요? 아니면 실망하던가요?”“딱히 뭐라 말할 수는 없어. 놀라움과 실망감도 있긴 했지만 뭔가 더 있었어.”“뭐가요? 무슨 뜻인데요?”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그러자 하정현은 귀찮았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몰라. 나도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보지 못했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지. 유미 씨는 상대가 수호 씨라는 걸 발견한 뒤에도 수호 씨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계속할지 말지 고민했어.”“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사모님은 그런 사람 아니에요.”나는 사모님을 대신해 해명했다.하정현은 그 말에 키득키득 웃었다.“유미 씨가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수호 씨가 어떻게 알아?”“아무튼 알아요.”“그럼 내 친구 지은이는 그런 사람이고?”“그런 뜻 아니에요.”“정수호, 수호 씨는 항상 본인 입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더라. 그 사람을 진짜 알지도 못하면서. 지은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심지어는 수호 씨네 형수와 애교 씨도 제대로 알아본 적 없지? 두고 봐, 두려워할수록 그 일이 닥칠 테니까.”하정현의 애매모호한 말을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어 나는 마음이 초조했다.“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요?”“아무것도 아니야. 할 말은 다 했
“내 상체는 이미 봤지? 그러면 하체를 보여 줄게.”하정현은 말하면서 제 치마를 걷어 올렸다. 그녀는 섹시한 망사 스타킹을 신어 보일 듯 말 듯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하지만 망사 스타킹 아래는 새하얗기만 할 뿐 문신 같은 건 없었다.그럼 하정현도 배제할 수 있었다.그러면 그날 저녁 식사를 함께 한 사람 중에 유미 사모님만 남게 된 셈이다.그건 내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다.하정현은 또 뜸을 들이며 말했다.“어떻게 말해야 할지 생각 좀 해볼게.”나는 너무 초조해서 심장이 당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그만 뜸 들이고 얼른 말해요. 대체 누군데요?”“사실, 사실 그날 수호 씨랑 몸 섞은 사람은 한 명이 아니야.”“네?”그 대답은 내 예상 범위를 너무 벗어나 나는 한참 동안 반응하지 못 했다.“그럼 유미 사모님이 있었는지만 말해줘요.”“있었어. 하지만 사람을 착각해서 이상하다는 걸 발견한 뒤 도망가 버려서 실질적인 관계는 맺지 않았어.”그 대답을 들으니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었다.나와 사모님이 잔 게 아니라는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더 이상 죄책감 가질 필요도 사장님께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나는 심지어 그날 밤 나와 사모님이 나눴던 스킨십을 간과했다.그런 일은 나와 사모님만 입 밖에 꺼내지 않으면 점점 잊힐 테니까.“진짜 수호 씨와 관계를 맺은 사람이 누구인지 안 궁금해?”하정현의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싱긋 웃었다.“사모님만 아니면 다른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어요.”“만약 나라면?”나는 멍하니 하정현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진짜예요? 농담이죠?”“난 우선 수호 씨 진심이 듣고 싶어. 수호 씨는 누구였으면 좋겠어?”하정현은 문제를 나한테 던졌다.하지만 나는 누구이길 바란 적은 없다. 그저 그 사람이 절대 사모님만은 아니기를 바랐을 뿐이지.그 때문에 하정현이 그런 질문을 할 때 나는 약간 어리둥절했다.“소여정? 설마 그 여자인가
하정현의 말을 들으니 나는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하정현은 평소 무심하고 털털해 보이고 아버지가 잡혀갔다는 얘기를 농담하듯 가볍게 꺼냈지만 사실 그 모든 건 가짜였다. 나는 이제야 그간 하정현이 지은 미소가 모두 가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하정현은 사실 그 일로 계속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바보라고 하기에는 효심이 많고 똑똑하다고 하기에는 인터넷 대출을 받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 지금은 대출 빚을 갚으려고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길에 들어섰고.하지만 계속 이렇게 가면 하정현은 분명 망가질 거다.“이 일은 지은 씨한테 얘기해 볼게요.”나는 속으로 마음을 굳혔다.하지만 하정현은 다급히 내 팔을 잡아당겼다.“지은한테 알려주지 마. 지은이는 안 돼.”“왜요? 지은 씨한테 2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요? 말 한마디면 해결될 일인데 왜 본인 몸을 망쳐가면서까지 숨기는 거예요?”그 말에 하정현의 안색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내가 지은이한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빚지면 안 돼.”“그러 알아? 애초에 지은과 준휘를 연결해 준 사람도 나야. 준휘가 쫓아다닐 때 지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나서서 기호를 만들어 준 것 때문에 지은이는 모든 게 하늘의 뜻이라고 믿게 된 거라고...”하정현의 말에 나는 너무 놀라 한참 동안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러다 한참 고민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책임을 혼자 짊어질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지은 씨도 정현 씨를 탓하지 않을 거예요. 안 그러면 정현 씨를 자기 집에서 지내게 하지 않았을 테니까요.”“나도 지은이가 나를 탓하지 않는다는 거 알아. 지은이는 착한 사람이야. 말을 좀 독하게 해서 그렇지. 그런데 그래서 더 이상 폐 끼칠 수 없어.”“하지만 이 일은 정현 씨 혼자서 해결할 방법이 없잖아요. 계속 이러다가는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돼요.”“아무튼 이 일은 지은이한테 말하지 마. 동의하면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게.”“전 정현 씨의 비밀에 관
‘진짜 약도 없네. 지은 씨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그걸 또 몰래 찍었다고?’내가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하정현이 갑자기 제 핸드폰을 내 앞으로 쑥 들이밀었다.그 사진을 본 순간 나는 다급히 액정을 가렸다.“미쳤어요? 이렇게 노골적인 사진을 찍으면 어떡해요? 가족이 볼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하정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이게 뭐가 노골적이야? 가려야 할 곳은 다 가렸잖아.”‘이게 가린 거라고?’이런 사진은 섬나라에 수출해 봤자 삼류 축에도 못 낄 거다.나는 하정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아버지가 관직에 계셨고 가정 형편도 괜찮았으니 돈이 모자라면 집에 말하면 될 것인데, 왜 이렇게까지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이 사진들 당장 삭제해요. 이 사진은 얼굴도 나왔잖아요. 이 사진이 퍼지기라도 하면 앞으로 얼굴 어떻게 들고 다니려고요?”“하. 난 이런 말 들으려고 수호 씨 부른 거 아닌데. 나랑 같이 커플 사진 찍자...”“안 돼요. 절대 안 돼요. 저는 절대 이런 사진 찍지 않을 거예요.”나는 하정현의 생각을 아예 싹 잘라버리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그러자 하정현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졌다.“돈 주는데도 안 한다고? 사진 한 세트 찍으면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알아?”“저 지금 돈이 부족하지 않아요. 오히려 정현 씨야말로 돈이 부족하면 나한테나 친구한테 말해야지 왜 이런 짓을 해요?”“하.”하정현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내가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나 자이언트 베이비 아니거든. 그런데 왜 다른 사람한테 손 벌려야 하는데? 나도 내 능력으로 먹고사는 거니까 부끄러울 거 없다고 생각해.”그 말을 들으니 하정현이 궁하긴 궁했나 보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이런 사진은 정상적인 여성이라면 절대 찍지 않았을 거다.그 순간 뭔가 머리를 스쳐지나 내 눈은 휘둥그레졌다.“설마 어디서 대출받은 건 아니죠?”하정현은 내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더 이상 이영미와 한 공간에 있을 엄두가 나지 않아 헐레벌떡 도망쳤다.그 와중에도 이영미는 나더러 자기 남편 꼭 데려오라고, 안 데려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윽박질렀다.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윤해철에게 전화했다.[수호 군, 나도 마침 자네한테 볼일 있었는데.]“무슨 일인데요?”[회사 일은 내가 이미 다 처리했으니 방법을 대서 우리 마누라한테 좀 전해줘. 내가 요즘 데리러 갈 거라고.]타이밍이 참 기가 막혔다.이영미가 하고 싶다고 할 때 윤해철이 마침 이영미를 데리러 올 생각이었다니.나는 다급히 윤해철에게 말했다.“방금 사모님을 뵀는데 사모님도 회장님을 무척 그리워하셨어요.”[마침 잘됐네. 그럼 지금 당장 데리러 가지.]“윤 회장님, 잠깐만요.”[왜 그러나?]“사모님은 지금 집에 안 계세요. 밖에 있어요...”나는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그러다 문득 내가 집을 나올 때 이영미가 보냈던 주소가 떠올라 나는 그 주소를 윤해철에게 보내고 그곳에서 이영미를 찾으라고 했다.어떻게 설명할지는 부부가 만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일이었다.이영미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내 임무도 완수한 셈이었다.전화를 끊고 얼마 뒤, 나는 마침 장을 보고 온 애교 누나와 마주쳤다.“수호 씨, 왜 여기 있어요?”나는 대충 얼버무려 상황을 무마하면서 애교 누나의 짐을 들어주었다.“애교 누나, 저 마침 가게에 나가볼 참이었어요. 형수는 수고스러운 대로 누나가 좀 돌봐줘요. 제가 가능한 빨리 도우미를 구할게요. 그러면 누나도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까요.”애교 누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나도 어차피 할 일이 없으니 태연이 돌보는 건 나한테 맡겨요. 내가 어려울 때 태연이도 항상 나를 도왔는데 지금은 태연이가 어려운 시기이니 당연히 내가 도와야죠.”“그런데 일 구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요?”“일은 뭐 구한다고 바로 구해지는 건가요? 나 공무원 시험 준비하려고요. 나도 아버지 말고 나 스스로 능력을 증명하고 싶어요.”애교 누나
“그럼 얼른 누우세요. 빨리 끝낼게요.”이영미는 두말없이 소파 위에 엎드렸다.나는 먼저 이영미의 허리부터 주물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영미의 입에서 야릇한 신음이 흘러나왔다.“어머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나는 흠칫 놀라 손을 뒤로 뺐다.그랬더니 이영미가 발긋한 얼굴로 말했다.“남자가 내 몸 만지는 게 오랜만이라 흥분했나 봐.”“계속 그러면 제가 어떻게 주물러 드려요?”“이거 다 정상적인 반응이잖아. 의사라는 사람이 침착해야지.”나는 이런 목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침착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사람 혼을 쏙 빼놓는 듯한 목소리는 아마 내시가 들어도 견디지 못할 거다.“안 돼요. 계속 그러면 마사지 안 해드릴 거예요.”나는 참지 못해 난처한 상황이 생길까 봐 먼저 물러섰다.하지만 이영미는 그것조차도 반대했다.“안돼. 계속 해. 안 그러면 안 갈 거니까. 나도 이것저것 다 겪어본 사람인데 뭔들 못 봤겠어? 그러니 어색하지 마. 내 눈에 수호 씨는 꼬맹이나 다름없으니까. 난 괜찮아.”이영미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괜찮지 않았다.나도 이제 성인이고 혈기 왕성한 나이인데, 어떻게 아무 일 없다는 듯 여길 수 있냔 말이다.하지만 이영미는 한사코 내 팔을 꽉 잡고 어디 가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닿는 피붓결에 나는 마음이 더 콩닥거렸다.“알았어요. 그럼 잘 누워 있어요. 계속 마사지해 드릴게요. 하지만 소리 나지 않게 좀 참아주세요.”“그건 안 되지. 욕망을 억누르는 건 몸에 안 좋아.”이영미의 말은 예전에 남주 누나가 했던 말과 똑같았다.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이영미는 내 마사지를 받으며 한편으론 감탄했다.“여자는 역시 남자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니까. 혼자 하는 건 너무 재미없어. 남자도 마찬가지로 여자의 손길이 필요한 법이지. 안 그러면 조물주가 왜 남녀 성별을 따로 만들었겠어? 그것도 상호 보완할 수 있게. 안 그래?”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 여기 느
이영미는 제비집이며 인삼 등 다양한 보양식을 가져왔다.“어머님, 이거 다 너무 귀한 것들이에요.”“이건 다 수호 씨 형수 주려고 가져온 것들이야. 지금 의식이 없다고 해서 죽만 먹이면 안 돼. 영양소를 많이 공급해 줘야지.”나는 형수 대신 감사 인사를 전했다.“혹시 윤지은 씨는 함께 오지 않았어요?”그때 애교 누나가 불쑥 물어봤다.“그 계집애는 또 무슨 일인지 함께 내려오자고 하니까 기어코 싫다고 하지 뭐야.”이영미는 말을 마친 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혹시 우리 지은이랑 싸웠어?”“아니요.”“못 믿겠는데? 지은이가 말은 독하게 해도 마음씨는 착한 애야. 네 형수 줄 거라니까 이렇게 바리바리 준비해 준 걸 보면 네 형수를 친구로 생각한다는 뜻이거든. 그런데도 기어코 직접 오지 않겠다는 걸 보면 이유는 하나야. 바로 너. 너희 둘 요즘 싸웠지?”나는 더 이상 그 일을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어머님, 정말 아니에요.”하지만 이영미는 포기할 줄을 몰랐다.“아니긴 무슨. 두 사람 분명 문제 있는데.”그때 애교 누나는 내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다는 걸 눈치챘는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얘기 나누세요. 저는 내려가서 뭐 좀 사 올게요.”역시 애교 누나는 내가 말하기 부끄러워할까 봐 배려해 주려고 자리를 피한 거였다.애교 누나가 떠난 뒤 이영미는 내 옆에 꼭 붙어 앉았다.“이제 다른 사람도 없으니 말할 수 있지? 대충 얼버무릴 생각하지 마. 솔직히 말하지 않으면 나도 수호 씨 용서 안 할 거니까.”이영미가 계속 꼬치꼬치 캐묻자 나는 할 수 없이 그날 병원에서 싸웠던 일을 솔직히 털어놓았다.“어머님도 제가 쓰레기 같아요?”“응. 조금. 내 딸과 사귀면서 다른 여자와도 사귄다니. 내 딸의 매력이 그렇게 부족해? 한 명으로는 만족하지 못 하는 거야?”이영미의 말에 나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어머님은 저와 지은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잖아요. 우리는 각자 원하는 걸 교환한 것뿐이지 마음을 주고받고 결혼 얘기까지
나는 내가 예전에 살던 방을 들여다보았다.이곳은 내 추억이 너무 많이 깃든 곳이다. 상황만 그렇게 되지 않았어도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익숙한 물건들을 보니 나는 문득 형수와 있었던 일들이 하나둘씩 떠올랐고 형수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 모든 건 어제 벌어진 일처럼 생생했다.“저 잠깐 형수 좀 보고 올게요.”나는 형수 방으로 향했다.혼자 얌전히 누워 곤히 잠든 형수의 모습은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았다. 눈을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내며 이불을 덮은 모습은 진짜 그냥 자는 것 같았다.나는 젖은 수건으로 형수의 몸을 닦아준 뒤 면봉에 물을 묻혀 형수의 입을 적셔주었다.형수의 현재 상태는 기껏해야 죽 같은 음식밖에 먹일 수 없고 또 매일 많은 량을 먹을 수도 없다. 나도 당연히 형수가 빨리 깨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날 밤 이후로 내가 무슨 짓을 해서 자극해도 형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애교 누나가 죽 한 그릇을 들고 들어왔다.“내가 먹일게요. 수호 씨는 불편하면 가서 쉬어요.”“네. 애교 누나. 그럼 부탁할게요.”사실 나는 너무 아파 더 이상 형수를 돌볼 상황이 아니었기에 곧장 내 방으로 들어갔다.형수는 내 방을 예전 내가 떠나던 그날 그대로 남겨두었다.형수와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니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나는 침대에 누워 한참을 뒤척였지만 끝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첫 번째는 나비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형수의 일 때문이었다.원래 나비 일은 이제 그냥 묻어두려고 했는데 결국 어젯밤 또 그렇게 되어버렸다.솔직히 나 스스로도 내가 헛것을 봤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용천 호텔에서의 그날 밤 나와 잔 사람이 세 명 중 한 명이라면 아무리 해도 아귀가 들어맞지 않는다.결국 나는 환각이라고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나는 침대에 똑바로 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고는 30분 동안 얕은 수면을 취했다.고작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잤다고 정신상태는 훨씬 나아졌다.침실에서 나와 보
그 순간 나는 머리가 띵했다. 나는 애써 눈을 뜨려고 했지만 머리가 너무 어지럽고 눈꺼풀이 무거워 도저히 뜰 수 없었다.다만 그 와중에 약간의 의식은 존재했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용천 호텔에서 나와 몸을 섞은 사람이 사모님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사모님 댁에서 지내면서 사모님 다리에 있는 나비 문신을 보고 내 추측을 확신했고.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게 사모님이든 아니든 무조건 사모님과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최면했다.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사장님께 미안한 행동은 할 수 없었으니까.하지만 오늘 저녁 나는 또 잠결에 그 나비를 보게 된 거다. 그 순간 나는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뭐지?’오늘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그날 용천 호텔에 있었던 사람은 오직 애교 누나뿐이다.하지만 애교 누나 몸에는 분명 나비 문신이 없다.게다가 나는 애교 누나 몸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데 애교 누나의 피부는 이 정도로 희지 않다.하지만 애교 누나가 아니면 또 누구란 말인가?고아연? 아니면 고수연?그날 밤 나는 이 두 여자를 본 적이 없다.나는 이 상황이 어리둥절했고 상대가 누구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무엇보다 오늘 너무 취해 머리가 어지러웠기에 눈을 뜰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나는 정신도 차리지 못한 채로 애써 몸부림쳤지만 결국 의식이 점멸되어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그리고 나는 다음 날까지 푹 잠들었다.내가 바닥에서 일어났을 때 다른 사람들은 이미 모두 깨어났다. 내가 그중 맨 마지막에 깨어난 듯했다.나는 아픈 머리를 문지르다가 테이블을 치우는 애교 누나를 발견했다.“누나, 다른 사람들은요?”애교 누나는 테이블을 정리하면서 대답했다.“다들 일이 있다고 먼저 갔어요. 수호 씨를 방에서 자라고 하려 했는데 너무 깊이 잠들어 아무리 깨워도 깨지 않더라고요.”“애교 누나, 어젯밤 혹시 안 잤어요?”나는 몸부림치며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그때 애교 누나가 입을 열었다.“늦게 잠들긴 했지만 안 잔 건 아니에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