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우리 부모님과 뭔 상관인데요?”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그럼 우리 부모님과는 뭔 상관인데?”윤지은이 되물었다.그 물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하긴, 이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이다. 게다가 윤지은의 태도는 매우 명확했다. 그런데 내가 윤지은의 부모님까지 들먹인 건 윤지은의 요구를 거절하기 위해서다.나도 이 일의 핵심은 윤지은이라는 걸 알고 있다. 윤지은은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자기만의 생각이 있는 여성이다. 때문에 윤지은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면 윤지은의 부모님도 그녀를 설득할 수 없다.그런데 문제는 윤지은이 현재 나를 자기 손아귀에 쥐고 부숴버리려 하고 있다는 거다.나는 헤실 웃으며 아부하는 듯 다가갔다.“지은 씨, 농담하는 거죠?”“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여?”윤지은은 또 질문을 나에게 던졌다.나는 머리가 찌근거려 머리를 긁적였다.“사실 지은 씨랑 결혼하는 거, 안 될 것도 없어요. 하지만 우선 제 문제부터 처리해야 하지 않겠어요? 저도 쓰레기처럼 여자 친구와 헤어지지도 않고 지은 씨랑 결혼하고 싶지 않거든요.”윤지은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너 원래 쓰레기야. 그래서 내가 회수해주려는 것뿐이야. 누가 뭐 너랑 행복하게 살겠대?”‘이건 나더러 죽으라는 거잖아.’나는 한동안 반박할 이유를 찾지 못해 결국 뻔뻔하게 말했다.“내가 쓰레기라면 끝까지 쓰레기로 살래요. 결혼은 못 해요.”윤지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 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그때 윤지은이 또 툭 하고 내뱉었다.“꺼져.”나는 얼른 도망치듯 방문을 나섰다.“어? 수호 군, 어디 가나?”“수호 군, 신발 두고 갔어.”나는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단숨에 윤씨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차에 올라탄 뒤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나는 윤지은이 나한테 단단히 화났다는 걸 알고 있다. 때문에 그곳에서 도망치지 않으면 아마도 윤지은에게 갈가리 찢길지도 모른다.천수당에 도착한 뒤에도 나는
“나도 초조해. 나 선영이한테 여러 번 고백했는데 계속 차여. 나 어떡해야 해?”현성이도 자기만의 고민이 있었다.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두 사람 진도도 많이 뺐잖아. 그런데 왜 거절해?”“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아직은 아니래. 난 지금이 사귈 때인 것 같거든. 같이 밥도 먹고, 영화도 보고 손도 잡았는데 또 뭘 더 해야 하는데?”나는 문득 궁금했다.“두 사람 호텔 방 잡은 날 뭐 했는데?”“꼭 껴안고 잤어.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나 이래 봬도 매너 있는 남자야.”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밤새도록 참을 수 있어?”“어렵긴 했지. 그런데 선영이가 싫다는데 강제로 할 수는 없잖아. 수호야, 네가 나중에 선영이 생각 물어봐 줄 수 있어? 난 선영이가 거절할까 봐 걱정돼.”이건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기에 나는 단번에 승낙했다.내가 현성이와 한창 얘기하고 있을 때, 가게 직원이 갑자기 헐레벌떡 달려왔다.“사장님들, 큰일 났어요. 가게에 엄청 무섭게 생긴 사람이 와서 정 사장님을 찾아요.”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머릿속에는 임천호가 떠올랐다.무섭게 생긴 데다 나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임천호 외에 다른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아마도 어젯밤 일 때문인 듯싶다.임천호는 이태웅과 윤해철한테서 원하는 걸 얻지 못했으니 나에게 시비 걸러 찾아왔을 거다.예전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나는 무서워했을 테지만 지금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나는 얼른 중앙홀로 나갔다. 그랬더니 역시나 임천호와 강용재가 서 있었다. 하지만 소여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이건 아마도 임천호가 소여정을 오지 못하게 했거나 소여정 몰래 나를 찾아온 것일 테다.어느 쪽이든 가게에 왔으니 손님 대우를 해야 했기에 나는 웃으며 다가갔다.“임 회장님, 어서 오세요. 약 지으러 왔나요? 아니면 진찰받으러 왔나요?”강용재는 어두운 얼굴로 나를 밀쳤다.그 순간 나도 얼굴을 팍 구기며 말했다.“왜 사람을 밀치고 그러죠?”강용재는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어
하지만 나는 임천호가 단지 표면상으로만 인정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임천호는 통제욕이 강한 사람이라 자기 여자가 나와 엮이는 걸 절대 용납할 리 없다.다만 아직은 화를 낼 명분을 찾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데 만약 그 명분을 찾으면 분명 폭풍우가 휘몰아칠 게 뻔하다.나는 임천호와 대화하면서 가끔 강용재 쪽을 바라봤다.그때 강용재가 손가락으로 최상급 산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 야생 산삼은 얼마지?”현성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이건 최상급 야생 산삼이라 가격이 이 정도거든요.”현성은 손가락 8개를 내밀며 말했다. 그건 8천만 원이라는 뜻이었다.그러자 강용재는 고민도 없이 말했다.“이거 줘. 임 회장님이 살 거야.”현성은 나를 보며 눈빛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물었다.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건을 주라고 눈빛을 보냈다.현성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야생 산삼을 꺼냈다. 하지만 포장하려고 준비할 때 강용재가 갑자기 말했다.“우선 효과부터 확인해 봐야겠는데.”“우리 가게 약재는 모두 품질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전문가를 불러 감정해 봐도 돼요. 만약 가짜면 3배의 가격을 배상해 줄 수 있어요.”3배의 가격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임천호가 무슨 목적으로 찾아왔는지 계속 알 수 없었는데 이 순간 답을 찾은 것만 같았다.약재는 다른 상품과 달리 코드나 고유 번호가 따로 없다.때문에 임천호가 우리 가게에서 산 산삼과 자기가 가져온 가짜 산삼을 바꿔치기라도 하면 우리는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될 거다.게다가 한꺼번에 좋은 약재 몇 가지를 더 산다면 우리 가게 재정 상황을 뒤흔들기에도 충분하다.생각이 끝난 나는 얼른 다가가 산삼 사진을 몇 장 찍고 그 자리에서 설명하기 시작했다.“이 산삼은 88년짜리 야생 산삼이에요. 산삼 뿌리 부분을 보면...”나는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임천호가 바꿔치기할까 봐 모든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했다.그러자 바로 눈치챈 현성도 따라서 보충 설명했다.우리가 이렇게까지 할
현성은 서둘러 포장하지 않고 내 눈치를 살폈다.이에 나는 현성에게 포장하라고 눈빛을 보냈다.이정도 최상급 약재를 팔 수 있다면 우리 가게 매출은 평소의 두 배가량 될 수 있었다.이렇게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임천호가 누구인가? 그는 강북 3성에서 유명한 효웅이다. 그런 그가 묵묵히 손해를 감수할 리가 없었다.임천호는 돈을 지불할 때 현금도 카드도 아닌 수표를 꺼내 들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귀띔했다.“Y 머니 캐피탈에서 나한테 4억을 빚졌거든. 약값이 총 2억 4천만 원이라고 치고 나머지는 내가 주는 팁이라고 생각해. 자네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 여정이 몸이 그렇게 빨리 회복하지 못했을 테니까.”임천호는 역시 늙은 여우였다.고액의 수표를 줘서 내가 직접 돈을 받게 하고, 내가 가면 회사 직원더러 나를 괴롭히게 할 모양이었다.그렇게 되면 내가 나중에 뒷배를 찾아 도움을 청해도 이 임천호한테 돈을 받아낼 수 없다.때문에 나는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척 고민됐다.받는다면 임천호의 덫에 걸려들게 되고, 안 받으면 1억 6천 원을 공짜로 벌 기회를 잃게 된다.1억 6천 원!그건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옛말에 간 큰 놈은 배불러 죽고, 간이 작은 놈은 굶어 죽는다는 말이 있다. 나와 임천호의 원한은 오래 전에 생겼기에 하나 더 얹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때문에 생각을 마친 나는 그 수표를 순순히 받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임 회장님.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또 찾아주세요.”“하하. 그러지.”임천호는 호탕하게 웃으며 가게를 떠났다.임천호와 강용재가 떠난 뒤 현성이 다급히 말했다.“수호야, Y 머니 캐피탈은 강북이 아니라 S시에 있는 회사야. 아마도 임천호가 관리하는 회사일 수 있어.”“나도 예상했어.”내 대답에 현성이 또 물었다.“그럼 정말 S시에 가서 수표를 교환하려고? 네가 떠나 뒤 저 두 사람이 또 가게로 찾아오면 어떡해?”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수표 교
“어머,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워?”우리가 한창 대책 회의를 하고 있을 때 익숙한 실루엣이 문밖에서 걸어 들어왔다.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윤미화가 눈웃음을 치며 들어오고 있었다.“윤 사장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수호 씨 찾으러 왔지. 새로운 임무가 생겼거든. 조사 대상이 S시에 있어서 나랑 같이 갈 거야.”나는 그 순간 눈을 커다랗게 떴다.“S시요? 윤 사장님도 S시로 가려고요?”“응. 왜? 수호 씨도 가려고 했어?”“네. S시에 Y 머니 캐피탈이 있는데 이 지표를 그곳에서 현금화해야 하거든요.”“어머, 이런 우연이 다 있네. 마침 잘됐네. 같이 가.”윤미화가 같이 간다고 하니 너무 잘된 일이었다.윤미화는 비록 여자지만 보통 여자가 아니다.그도 그럴 게, 혼자 탐정 사무소를 꾸린 것도 모자라, 상대가 아무리 큰 인물이라도 모두 조사하니 그것만 봐도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게다가 수많은 직원을 거느리고 있어 윤미화와 함께라면 나는 안심할 수 있었다.상의 끝에 우리는 내일 출발하기로 결정했다.만약 4억을 현금화해 올 수 있다면 우리 가게는 대박 나는 셈이다. 이 돈이라면 옆 가게가 아무리 우리 고객을 빼앗아도 우리에겐 큰 지장이 없다.그날 오후 나는 월세방으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다만 남자라 챙길 게 별로 없었다. 나는 고작 갈아입을 옷 몇 벌과 운동할 때 필요한 아령을 챙겼다.비록 더 이상 변석훈의 가르침을 받지 않지만 나는 단련을 멈추지 않았다.목적에 달성하는 건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반드시 매일 견지해야 한다.그날 저녁, 나와 윤미화는 함께 식사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윤미화가 사람을 몇 명이나 더 데려갈지 묻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이번에 조사할 사람이 누구인지 묻기 위함이었다.“서나연.”“서나연? 어쩐지 좀 익숙하네요?”나는 갑자기 눈이 커다래졌다.“임천호의 아내? 서지예의 친언니요? 누가 서나연을 조사하라고 했는데요?”나는 순간 그 사람이 임천호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
나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소여정은 임천호에게 나를 지켜주려 한다는 걸 들키기 싫어 이런 우회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을 거다.만약 소여정이 정말 서나연을 조사하고 싶었다면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 않았을 거다.게다가 서나연은 소여정의 지위를 전혀 위협하지 못하고 있기에 몰래 서나연을 조사하라고 할 이유가 없다.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생각한 가능성에 힘만 실렸다.식사를 마친 뒤 나는 소여정에게 전화해 묻고 싶었지만 임천호의 의심을 살까 봐 결국 아무 문자도 보내지 못했다.그날 저녁, 주선영은 학교에서 돌아왔다. 나는 문득 현성이 낮에 했던 말이 떠올라 주선영에게 현성에 대한 일을 물었다.“선영아, 너 현성을 어떻게 생각해?”나는 직접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주선영의 얼굴은 갑자기 발그스름해지더니 부끄러워했다.“선배,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현성이 부탁했어. 몇 번이나 고백했는데 계속 거절해서 불안했나 봐.”나는 숨기지 않고 모두 진실대로 토로했다.“너 현성이가 마음에 안 들어?”나는 다른 방식으로 물었다.그러자 주선영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현성 선배 무척 다정하고 착해요. 저한테도 잘해주고요.”“그럼 왜 사귀기 싫은 건데?”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내 질문에 주선영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심지어 귀뿌리까지 후끈 달아올랐다.“저, 저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현성 선배 여자 친구가 되면 그걸 해야 하잖아요. 저, 전 그게 무서워요...”나는 그 이유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었다.“그 이유 때문이었어? 하하하.”주선영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선배, 왜 웃어요? 제가 우스워요?”“아니. 그 반대야. 너무 귀여워서 그래. 그럼 하나만 물을게. 너 왜 현성이랑 사귀고 싶어? 달콤한 연해가 해보고 싶어?”이번에 주선영은 숨기지 않고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이에 내가 말했다.“그럼 된 거 아니야. 달콤한 연애가 하고 싶으면서 또 무섭다고 하는 건 모순되잖아.”“그런데 그걸 안
“그, 그러면 고민 좀 해볼게요. 현성 선배한테 너무 조급해 말라고 전해줘요.”주선영은 말하는 내내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역시 연애를 못 해본 여자애는 단순한가 보다.우리는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주선영이 먼저 방으로 가 휴식을 취했고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웠다.그로부터 얼마 뒤, 핸드폰이 징징 울리더니 현성이 어떻게 됐냐고 묻는 문자가 도착했다.나는 주선영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모두 솔직히 말했다.[주선영도 너 좋아하는 거 같아. 그러니까 인내심 가지고 기다려. 시간을 좀 줘. 상대는 연애가 처음이고 경험이 없어 무서워하는 것도 정상이야.]내 대답에 현성은 무척 기뻐했다.[안 서두를게. 선영이 마음만 알면 돼. 나 참을 수 있어. 수호야, 너 진짜 엄청 도움 됐어. 나중에 내가 선영이랑 결혼하면 너한테 감사비 두둑하게 챙겨줄게.]우리는 한참 얘기하다가 대화를 끊었다. 이윽고 나는 소파에 누워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나는 임천호와 그렇게 얼굴을 맞대고 대화할 날이 오게 될 거라고 생각지도 못했다. 심지어 예전처럼 임천호가 두렵지도 않았다.사람은 많은 일을 겪어야 성장한다는 게 맞는 말인 듯싶다.나는 소여정을 떠올렸다가 윤지은을 떠올렸다, 한참 뒤에는 형수를 떠올렸다가 또 애교 누나를 떠올렸다.그렇게 이 사람 저 사람 떠올리다 보니 결국 저도 모르게 잠이 들고 말았다.다음 날, 곧바로 윤미화와 S시로 가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우리는 고속버스 터미널 앞에 있는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내가 먼저 도착해서 약 20분 정도 기다렸더니 윤미화의 차가 나타났다.“차는 한 대로 움직이자고. 그래야 갈 때 심심하지 않고 기름값도 아낄 수 있잖아.”마침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나는 우선 차를 주차한 뒤 윤미화의 차에 올랐다.윤미화는 탐정 사무소의 남직원도 데려왔다. 나까지 합치면 남자는 도합 4명이었다.가는 동안 우리 남자 넷은 서로 번갈아 가며 운전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내가 운전하고 윤미화가 조수석에 앉았다.윤미화는 오늘 운동
“여자를 엎어치기 한 거 아니에요?”“그건 너무 매너 없네.”직원들은 반전의 결말을 떠올리려고 토론하기 시작했다.그때 윤미화가 피식 웃으며 나를 봤다.“수호 씨는 어떨 것 같아?”“죄송하지만 이거 인터넷에서 봤어요. 결말은 남자가 여자를 둘러메고 경찰서로 갔어요. 여자애가 미성년자라고요.”“이것도 어려워하지 않다니. 좋아. 하나 더. 어느 날 혜성이라는 남자가 병원에 병 보러 갔는데 접수할 때 어떤 과로 접수해야 할지 몰라 간호사한테 도와달라고 했어.”“그러자 간호사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고, 혜성은 발끝 거기요라고 했어. 그 결과 어떻게 됐을까?”윤미화의 질문이 떨어지기 바쁘게 직원들은 머리를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발끝이면 정형외과지.”“그렇게 간단하면 문제로 안 냈겠지.”“분명 반전이 있을 거야. 생각해야 해.”윤미화는 나머지 세 명이 답을 알아 맞추지 못하자 또 나를 봤다.“수호 씨 대답은? 이번에도 답을 알아?”“미안하지만 이것도 인터넷에서 봤어요. 안 봤어도 답이 뭔지 알겠지만.”“재미없어. 왜 다 알아?”윤미화는 화가 난 듯 나를 째려봤다.‘내가 박학다식한 게 내 탓인가?’“수호 씨, 답이 뭔데?’그때 반나절이나 상의해도 답을 얻지 못한 나머지 세 명이 나에게 물었다.나는 웃으며 말했다.“정혀외과와 비뇨기과요.”“왜 비뇨기과인데?”“발끝... 거기. 발끝과 거기. 잘 생각해 봐요.”내 말을 듣고 잠시 되짚던 셋은 바로 깔깔 웃어댔다.나는 그런 셋이 너무 부러웠다. 나는 이제 이런 걸 봐도 웃기지 않은데 말이다.처음에 이걸 인터넷에서 봤을 때 나는 무척 부끄러워했고 반응이 이 세 명과 비슷했다.나는 문득 내가 이젠 늙어 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하. 경험이 많은 것도 좋은 일은 아니네.’윤미화는 오기라도 생겼는지 꼭 내가 모르는 걸 내겠다며 기를 썼지만, 윤미화가 몇 개를 내든 나는 모두 답을 알고 있어 재미가 없었다.“윤 사장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내요. 이번에는 정말 모를 수 있잖아요.”
윤미화는 위층에서 내려오는 사람은 막았지만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사람은 막지 못했다.그 사람들은 방을 한 칸 한 칸 수색하다가 결국 내가 숨어 있는 방에 쳐들어와 다짜고짜 나를 잡았다.그러고는 곧장 나를 8층 808호실로 끌고 갔다.놈들에게 끌려가면서도 나는 속으로 기뻤다.내 계획이 성공했으니 말이다.서윤기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내가 말했잖아. 발버둥 치지 말라.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내가 전에 사람 잘못 봤네. 서윤기 당신도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눈에 돈밖에 없는 인간이었어.”나는 서윤기를 비아냥거렸다.그러자 서윤기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돈 버는 게 나빠? 뭐 문제 있어? 난 상인이야. 상인이 돈 벌지 않고 설마 사람을 구할까?”“아무리 돈을 벌고 싶어도 최소한의 도리는 지켜야지. 약재 가격을 높이는 건 그렇다 쳐도 어떻게 안 좋은 약재와 좋은 약재를 섞어서 팔고 가짜 약재로 진짜 약재를 바꿔치기 할 수 있어? 이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이건 내가 가장 참지 못할 부분이다.약재는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약재상이 질이 안 좋은 약재를 섞어 팔고 가짜 약재로 수만 채운다면, 약은 제 약효를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환자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다.그때 서윤기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내가 예전에 정 사장이랑 같이 일할 때 항상 가장 좋은 약재를 가장 싼 가격에 팔았어. 그렇게 매일 개처럼 일했는데 결국엔 고작 몇 푼밖에 못 벌었다고.”“내가 지난 몇 년 동안 고생해서 번 돈이 동종업자들이 1년 동안 번 것보다 적었어.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놀리고 비꼬아 댔는지 알아? 병에 걸린 환자들도 약을 먹고 병이 나으면 의사한테 고마워하지, 누가 약재상한테 고마워해?”“양쪽에서 모두 찬밥 신세 당하면서 내가 왜 남 좋은 일만 해야 하는데? 내가 정 사장과 협력하지 않은 이후로 한 달에 얼마씩 버는 줄 알아?”“4억 가까이 돼. 전에는 1년에도 이 정도 못 벌었어. 매달 4억이면
그 행동을 본 순간 나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뭐 하는 거예요?”서윤기는 라이터를 의서에 가까이 가져갔다.“호텔 에어컨이 좀 춥지 않아요? 우리 따뜻하게 해요.”나는 다급히 의서를 빼앗았다.“미쳤어요? 의서에 얼마나 많은 난치병 치료 방법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걸 태우면 사람들의 희망을 태우는 거나 다름없어요.”서윤기는 라이터를 내려놓고 나를 향해 미소 지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난 장사꾼이지 의사가 아니에요.”“이...”나는 전에 서윤기가 유순하고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이 사람도 그저 돈만 밝히는 악덕 상인이라는 걸 알았다.나뿐만 아니라 정 사장님도 그동안 서윤기에게 깜빡 속았다.손에 든 의서를 그대로 포기하자니 나는 너무 아쉬웠다.이건 할아버지의 심혈이다. 의서 한 권을 집필하려고 우리 정씨 가문이 대대로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없다.하지만 이 의서를 건지려면 서윤기와 손을 잡아야 하고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게 된다.내 마음은 너무 복잡했다.그때 문득 대담한 생각이 떠올라 나는 의서를 챙긴 뒤 이를 악물고 밖으로 도망쳤다.하지만 얼마 못 가 호텔 직원이 내 뒤를 따라붙었다.어쩐지 내가 의서를 갖고 도망쳐도 서윤기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했더니 호텔 안팎에 이미 서윤기의 사람이 가득했다.나는 절대 잡히면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죽을 듯이 도망쳤다. 호텔 직원이 쫓아오면 그 사람을 발로 차고 때리면서 의서를 꼭 지켜내려고 아등바등했다.그와 동시에 나는 윤미화에게 전화했다.“지금 어디 있어요?”[호텔이지. 무슨 일인데?]“지금 누가 절 죽이려고 해요. 윤 사장님이 좀 도와줘요.”나는 도망치면서 되도록 일을 심각하게 설명했다. 그건 윤미화가 빨리 나를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헉. 무슨 일인데 그래? 지금 몇 층이야?]“8층에서 내려가는 중이에요. 계단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쫓아와요”나는 신속히 내 상황을 설명했다.그러자 윤미화는 잠깐 생각하더
서윤기의 말에 나는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하긴, 서윤기 같은 사장한테 몇천만 원은 돈도 아니다.만약 서윤기가 거래할 마음이 없다면 내가 모든 재산을 준다고 해도 절대 거들떠보지도 않을 거다.하지만 이렇게 포기하려니 내키지 않아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의서를 저한테 팔 건데요?”“이 의서는 나한테 필요해서 안 판다고 했을 텐데요.”서윤기는 끝까지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다.그 때문에 나는 계속 서윤기에게 끌려가기만 했다.“서 사장님은 그 의서로 저와 거래할 생각이죠?”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그러자 서윤기가 담담하게 웃으며 자기 잔에 와인을 따랐다.그 동작은 내 생각이 맞다는 걸 충분히 증명했다.하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서윤기를 보니 나는 마음이 불안해졌다.“강북 한약 상회 일이라면 전 결정권이 없어요. 정 사장님도 이미 건강을 회복했으니 상회 일은 사장님이 다시 맡고 있으니까요.”나는 먼저 내 생각을 내비쳤다.그제야 서윤기는 손에 든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입을 열었다.“돈은 나도 많아요. 돈 벌 루트가 필요한 거지. 하지만 난 내 파트너한테는 항상 관대하거든요. 파트너들과 함께 돈 버는 것도 좋아하고요.”서윤기는 애매모호하게 말을 흐렸지만 나는 단번에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서윤기는 내가 자신과 손을 잡으면 의서를 바로 주겠다는 뜻이었다.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서윤기를 바라봤다.“전 이제 상회 일도 관여하지 않는데 저랑 손잡아서 서 사장님한테 무슨 이득이 있죠?”“수호 씨가 상회 일에 관여하지 않지만 정 사장과 사이가 좋은 건 상회 사람들이 다 알고 있죠. 수호 씨가 나서면 정 사장의 뜻을 대변할 수 있을 거예요.”‘이 너구리 같은 인간이 이걸 노린 거였네.’나는 이제야 서윤기의 속내를 완전히 알았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렇다면 실망하시겠네요. 저는 정 사장님께 미안한 일은 안 해요.”서윤기는 의서를 꺼내 테이블 위
“아, 네. 들어와 앉았다 갈래요?”“그러죠.”서윤기는 사실 인사치레로 한 말이었지만 나는 냉큼 기회를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방금 봤던 여자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조금만 실수하면 속살이 다 노출될 지경이었다.여자는 이런 상황과 장소가 매우 익숙한 듯했다.그때 서윤기가 여자에게 돈을 한 웅큼을 던져주며 나가라는 눈치를 주자 여자는 아무 말없이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옷을 갈아입고 나오더니 엉덩이를 흔들며 방을 나갔다.서윤기는 그제야 나에게 와인 한 잔을 따라주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수호 씨는 강북에서 생활하지 않아요? 설마 호텔에서 지내요?”나는 서윤기가 나를 찔러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차분하게 대답했다.“저도 이제 사업하는 사람이니 이곳저곳 다니다 보면 호텔에 머무는 건 불가피한 일이에요. 집에 가는 게 오히려 더 어렵다니까요. 그런데 이곳에서 서 사장님을 만날 줄은 몰랐어요.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큰 사업을 하는 사장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가끔 재미를 보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나도 아예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아니다.서윤기는 내 말에 허허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하지만 몇 분만 더 일찍 왔더라면 큰일 났을 거예요.”‘늙은 여우 같은 것.’서윤기가 상회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으면 내가 끌려다닐 게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서윤기는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 내가 결국 먼저 말을 꺼내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이렇게 쓸데없는 얘기만 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할 테니까.나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서 사장님, 전에 조천석 사장님한테서 의서를 구매하셨죠?”“조천석? 어디 보자... 내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이 하도 많아서 기억이 나지 않네요.”‘이 자식 일부러 이러는 거네.’나는 결국 직접적으로 힌트를 줬다.“강북 경진당 사장 조천석 말이에요. 책 이름이 ‘고의문’인데 기억나시나요?”내가 이 정도로 알기 쉽게 말했는데 계속 모
현성과 민우는 내가 혼자인 게 시름이 놓이지 않고 걱정되어 돌아온 거엿다.무엇보다 내가 이번에 건드린 사람은 임천호다. 바로 그 S시 전체를 주름잡고 수많은 용병을 거느리고 있는 효웅이라 불리는 남자 말이다.우리는 그런 사람을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봤지 현실에서 만난 적이 없다.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우리 같은 새내기한테 그런 사람은 닿을 수도 없고 두려운 존재다.하지만 현성과 민우는 두려워하지 않고 내 곁에 있기로 했다.이건 단지 감동이라는 단어로 형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건 목숨을 나눈 우정과도 같다.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천수백 마디로도 우리의 우정을 표현할 수 없었으니까.나는 방 두 개를 현성과 민우에게 내어주고 혼자 거실에 누워 속으로 감탄했다.이 순간 흥분과 감동, 두려움과 무서움이 한데 섞여 내 마음은 복잡하기만 했다.하지만 이렇듯 신맛이 났다 단맛이 났다 쓴맛이 났다 매운맛이 나는 이런 과정이 바로 성장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다음 날, 우리 셋은 함께 천수당에 출근했다.나는 되도록 얼굴을 비추지 않으려고 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러다가 10시가 넘었을 때쯤 윤미화가 서윤기의 행방을 찾았다며 전화해 왔다.“어디 있는데요?”[샹젤리호텔. 내가 지금 마침 그곳에 가봐야 하니까 먼저 가서 확인해 볼게.]그 말을 들으니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뭐 하러 가는데요?”[고객이 거기서 기다려. 설마 내가 수호 씨랑 같이 가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다고 생각했어?]나는 순간 머쓱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그래요. 그럼 부탁할게요. 오해한 건 미안해요.”나는 윤미화를 단단히 오해했다는 걸 자각하고 다급히 사과했다.그러자 윤미화가 웃으며 말했다.[말만으로 미안하다면 다야? 실제 행동을 보여줘야지.]“사장님, 우리 한 식구 아니었어요? 뭐 하러 조목조목 다 따져요? 거리감 들게.”[누가 한 식구라는 거야?]“아니에요? 우리 탐정 사무소는 한 가족 아
“하지만 우리 언니 병 반드시 고쳐야 해.”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그러자 서지예는 다급히 나를 막아섰다.“뭐 하자는 거지?”“지예 씨 언니는 마음에 병이 있어요. 제가 심리 의사도 아니고 어떻게 무조건 낫게 한다고 장담하겠어요?”이건 너무 무리한 요구다.서지예도 자신의 요구가 좀 지나치다는 걸 알았는지 한발 물러섰다.“그럼 우리 언니랑 대화 많이 하면서 설득해 봐. 더 이상 죽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이제야 말이 되네요.”하지만 이것도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다.나는 한의학을 전공했지 심리학을 전공한 게 아니다. 더욱이 심리학 의사도 아니라 어떻게 서나연을 설득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서지예는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떠나기 전에 특별히 몸에 좋은 약재를 몇 가지 사갔다.그렇게 하루를 바삐 보내다 보니 어느덧 저녁 7시가 넘었다.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는 온종일 의미 없는 일만 한 것 같다. 다행히 민우와 현성은 뭐라 하지 않았지만.그날 저녁, 우리 셋은 함께 식사하며 S시에 다녀온 일을 얘기했다.그때를 떠올리니 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임천호 때문에 몇천만 원 손해 본 것도 모자라 앞으로 다른 사람한테까지 영향이 미칠지 모르겠어.”그 말에 현성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무서울 게 뭐 있어? 분명 해결 방법이 있을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우리랑 같이 이겨내면 되지.”민우도 내 어깨를 두드렸다.“걱정하지 마. 우리는 너랑 같이 일하기로 했으니 절대 널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두 사람의 감동적인 말에 나는 갑자기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하지만 민우와 현성이 옆에 있으니 확실히 마음이 편해졌다.“너희밖에 없다. 자, 짠하자.”우리 셋은 함께 식사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그러던 그때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내가 가게에 있으면 임천호는 절대 우리 가게를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앞으로 난 가게 나가는 횟수를 줄일 테니까
“마음 가는 대로 얘기해도 내용이 있을 거 아니야. 어떤 내용으로 대화했는데?”서지예는 끈질기게 추궁했다.하지만 한참을 생각해도 나는 그날 대화 내용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별것도 아닌 얘기를 내가 어떻게 기억해요?”결국 마음이 조급해진 서지예는 무의식적으로 내 팔을 잡아당겼다.“잘 좀 생각해 봐. 나한테는 중요한 거란 말이야. 우리 언니 평소 남들과 얘기 안 해. 내가 뭘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한다고.”“그런데 길게 대화했다는 건 진짜 놀라운 일이야. 정수호, 아니면 네가 우리 언니 좀 봐줄래?”나는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됐어요. 서씨 가문이 S시에서 어떤 가문인데요. 돈 있고 권력 있는 집안에서 설마 의사 하나 찾지 못하겠어요? 날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라면 포기해요.”나는 흙탕물 싸움에 끼어들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게다가 임천호가 만약 그 일을 알게 되면 더 골치 아파질 거다.그때 서지예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우리 언니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두고 볼 거야? 의사라며? 사람 살리는 게 의사의 본분 아니야?”“전 의사지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이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모두 구해줄 수는 없잖아요.”나는 이내 반박했다.그러자 서지예가 나를 매서운 눈빛으로 쏘아봤다.“그런데 이미 알면서 구하지 않으면 의사 자격 없는 거지.”“지예 씨도 의사면서 왜 본인이 구하지 않아요?”‘그리고 말은 왜 또 이렇게 듣기 거북하게 한담?’서지예는 초조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내가 할 수 있으면 이렇게 널 찾아와서 입 아프게 설득하겠어?”내가 꿈쩍도 하지 않자 서지예는 이내 말을 이었다.“우리 언니를 치료해주면 내가 큰 고객 많이 소개해 줄게.”만약 서지예가 돈을 준다고 했으면 난 마음이 동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큰 고객을 소개해 준다고 하니 내 마음은 결국 흔들리고 말았다.물고기를 주기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내가 필요한 건 인맥이지 눈앞에 보이는 돈이 아니었다.서지예는 서씨 가문 둘째 딸이고
나는 속으로 오늘 왜 이토록 재수 없는지 한탄했지만 결국 서지예를 따라나섰다.밖에 나오자마자 서지예는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봤다.“너 S시에 다녀왔어?”“네.”“뭐 하러 갔는데?”“돈 받으러 갔어요.”“거짓말. S시에서 우리 언니 만났잖아.”“지예 씨 언니를 만난 거랑 돈 받으러 간 거랑 모순되지 않잖아요.”나는 사실을 말했지만 서지예는 나를 믿지 않았다. 심지어는 나를 뚫어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봤다.“흥. 누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우리 언니에 대해 조사하러 갔겠지.”나는 너무 억울해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제가 왜 지예 씨 언니를 조사해요? 저랑 무슨 상관이라고요.”“너랑은 상관없지만 소여정과 상관있잖아. 솔직히 말해, 소여정이 우리 언니를 조사하라고 했지?”서지예의 엉뚱한 생각에 나는 화가 나 헛웃음이 나왔다.“증거 있어요? 소여정 씨가 저더러 지예 씨 언니 조사하라고 한 증거 있냐고요? 있으면 꺼내고 없으면 좀 가요.”나는 상대 체면도 고려하지 않고 축객령을 내렸다.그러자 서지예는 이를 갈며 나를 노려봤다.“나도 증거가 없으니까 따지러 왔잖아. 하지만 증거를 찾으면 그땐 죽을 줄 알아.”“우리 언니가 임천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나 해? 소여정이 자기를 조사하라고 했다는 걸 언니가 알면 죽으려고 할 거야.”서예지는 어찌나 걱정됐는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것만으로도 서예지가 언니의 안위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서나연의 상태를 떠올리니 확실히 안타까웠다. 귀하게 자랐을 부잣집 아가씨가 남자 하나 때문에 죽으려고 하다니.그때를 떠올리니 내 태도도 서서히 누그러졌다.“임천호는 지예 씨 언니를 사랑하지 않아요. 동생이면 언니가 그런 남자 때문에 죽으려고 하는 걸 내버려두지 말고 포기하게 설득해야죠.”“말이 쉽지. 너 같은 사람은 누구를 진심으로 사랑해 본 적 없지? 너도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봐, 놓겠다고 쉽게 놓아지나.”서예지는 여전히 언니 편을 들었다.역시나 친자매 아니랄까
서윤기의 행방을 찾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인지한 나는 윤미화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탐정 사무소로 향했다.윤미화는 강북에 돌아온 뒤로 계속 잠을 보충하다가 내가 찾아오니 그제야 나른하게 침대에서 일어났다.심지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얇은 잠옷 바람에 나를 맞이하는 윤미화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윤 사장님, 이미지 좀 생각하면 안 돼요?”윤미화는 하품을 하며 말했다.“다른 애들 다 일하러 나갔어. 여기 수호 씨뿐이야. 전에 못 봤던 것도 아닌데, 조심할 게 뭐 있어?”“그래도 조심해야죠. 사장님이잖아요.”나는 여전히 귀띔했다.그제야 윤미화는 대충 외투를 몸에 걸쳤다.“그래. 알았어.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야?”“저 대신 사람 좀 조사해 줘요.”나는 곧바로 이곳에 온 목적을 말했다.그 말에 윤미화는 눈이 커다래졌다.“뭐야? 나 사장이야. 직원이 사장한테 일 시킨다고?”“돈 낼게요.”“누가 돈 달래? 안 해. 얼른 나가.”윤미화는 손을 휘휘 저었다.이에 나는 싱긋 웃으며 윤미화 곁에 앉았다.“윤 사장님 이렇게 인정머리 없는 분 아니잖아요. 항상 말만 독하게 하지 마음은 누구보다 여린 거 알아요. 제발 도와줘요. 이 사람 저한테 정말 중요해요.”“흥. 난 돈에 매수당할 사람 아니야. 돈으로 날 매수하려 했다면 날 정말 얕잡아봤어.”나는 다급히 물었다.“그럼 뭘 원하는데요? 뭐든 말해요. 할 수 있는 거면 무조건 할게요.”“다리 좀 두드려 봐. 다리 아파.”“네.”나는 얼른 윤미화의 다리를 두드렸다.“이 정도 강도면 괜찮아요?”윤미화는 눈을 감고 빙그레 웃으며 마사지를 즐겼다.“좋네. 딱 좋아. 역시 한의학을 전공한 사람이라 다르네.”“그럼 아까 일은...”“아, 다리가 또 아프네.”나는 윤미화가 일부러 이런다는 걸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다리를 두드렸다.그러자 윤미화는 아예 나를 시종 취급하면서 차를 따르게 했다가 음식을 사 오게 했다가 이것저것 잔심부름을 시켰다.그렇게 약 2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