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백연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호 씨, 좋아요?”“당연하죠. 연우 씨처럼 농염한 여자를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어요?”곧이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그 순간 내 뇌는 새하얗게 질렸고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린 채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나는 다급히 그곳을 떠났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고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안 와서 다른 사람을 부른 건가?’‘우리는 처음부터 서로 즐길 목적으로 만난 건데 진지할 거 뭐 있어?’하지만 왠지 모르게 내 마음은 좋지 않았다.나는 차에 앉아 담배를 연거푸 몇 대를 태웠다. 하지만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그러다 결국 월세방으로 돌아갔다.그동안 조현성과 주현영이 월세방에서 함께 지냈다. 현성은 매일 가게에 나가보는 것 외에 온 신경을 주현영에게 쏟아부었다.그리고 현성의 끊임없는 노력 덕에 주현영은 확실히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내가 돌아왔을 때만 해도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앉아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를 본 현성은 실망한 의아한 듯 말했다.“수호야, 네가 왜 왔어?”여긴 분명 내 집인데 현성은 오히려 내가 손님인 것처럼 굴었다.하지만 나는 말하기 귀찮아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소파에 주저앉았다.“너무 피곤해 운전하기 싫어서 여기로 왔어.”현성은 곧바로 내 옆으로 다가와 내 목을 끌어안았다.“그럼 너 혼자 여기서 지내. 난 선영이 데리고 영화 보러 갈 거야.”“그러던가.”현성은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고 기분 나빠하고 있었다. 다만 이 기회에 주선영과 함께 영화를 보고 나서 호텔 방 하나 잡아...현성은 생각할수록 기뻤다.원래는 이곳에 돌아와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현성 이 자식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친구를 바로 버렸다.현성이 주현영을 데리고 가는 바람에 집에는 또 나 혼자 남았다. 그 순간 기분 나쁜 일들이 물밀듯 밀려왔다.하지만 내가 질투할 자격이 있을까? 나와 백연우는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백연우가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그건 왜요?][내가 남자의 다릿심에 관한 특집 하나 만들 거거든.]‘그런 거였구나. 난 또 나랑 뭘 해보자는 줄 알았네.’나는 두말없이 영상을 찍어 전송했다.[됐어. 나 이제 영상 편집해야 해서 얘기는 나중에 해.]어렵게 대화할 상대를 찾았나 싶었는데 몇 마디 나눠보지도 못하고 또 가버렸다.‘됐어. 그냥 영상이나 찾아보자.’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영상을 보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다.그러다 비몽사몽 중에 누군가 내 방으로 들어와 내 몸을 더듬는 걸 발견했다.그 순간 나는 번쩍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누구야?”“수호야. 나야.”그건 다름 아닌 민우의 목소리였다.“젠장. 깜짝 놀랐잖아. 걷는데 왜 소리도 없어? 내 몸은 왜 더듬는 건데?”나는 말하면서 침실의 불을 켰다.그러자 민우가 헤실 웃으며 내 옆에 앉았다.“난 현성인 줄 알았잖아. 너인 줄 몰랐어.”“왜? 너 현성이한테 관심 있어?”“아니거든. 전에 형성이 그 자식이 여자애랑 해본 경험이 없다고 기회가 되면 우리끼리 먼저 체험해 보자고 했거든.”그 말에 내 눈은 커다래졌다. “너희 변태야? 남자 둘이 어떻게 해?”“그냥 체험. 진짜로 하는 게 아니라. 수호야, 나 요즘 임설아랑 부쩍 가까워졌어. 이제 꼭 결혼할 거야. 사실 나도 설아랑 진도 더 빼고 싶은데 내가 이런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는데, 네가 좀 가르쳐줄래?”‘이 자식 뭐라는 거야? 남자를 상대로 어떻게 가르쳐달라는 거지? 난 남자를 보고 아무 느낌도 없는 건 물론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나는 두말없이 야동 하나를 공유했다.“네가 직접 봐.”“어. 이런 영상은 싫어. 너무 노골적이잖아. 좀 아름다운 영상은 없어?”“나도 섹스를 어떻게 아름답게 해야 하는지 몰라. 너 사람 잘못 찾아왔어.”나는 확실히 그런 방법 따위는 모른다. 나는 항상 하고 싶으면 바로 본론으로 직행하는 스타일이라.민우는 내 말에 투덜거렸다.“나 정말로 설아랑
왠지 모르겠지만 나는 애교 누나에게 이 문자를 보내고 싶었다.지금껏 애교 누나와 알게 된 이래 우리는 로맨틱한 기억이 없었다. 내가 한 번도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지 못했기에 그런 기억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내 유일한 추억이라고는 그저 애교 누나의 훌륭한 몸매와 다정한 모습뿐이다.이 모든 게 그저 욕망 때문이라면 내가 너무 나밖에 모르는 쓰레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문자를 보낸 뒤 나는 곧장 잠이 들었다.다음 날 아침, 애교 누나가 보낸 문자 한 통이 도착해 있었다.[좋은 아침이에요.]짤막한 한마디였지만 그걸 본 순간 내 기분은 유난히 좋았다.이게 바로 연애의 맛일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 나왔던 것처럼 단순한 연애의 맛.나는 침대에 누워 애교 누나와 문자를 주고받았다.그때 민우가 들어와서 아침에 뭘 먹을 건지 물었고 나는 ‘아무거나’라고 대충 대답을 흐렸다.그러자 민우는 아예 내 쪽으로 다가와 침대에 털썩 앉았다. 나도 민우를 피하지 않았기에 그는 나와 애교 누나의 대화 내용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아침부터 연애질이야?”민우는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무척 부러워했다.나는 헤실 웃으며 말했다.“네가 나더러 좀 배우라며? 그래서 실천 중이잖아. 그런데 기분은 진짜 좋네.”“수호야, 뭐 하나만 물어보자.”“뭔데?”“너 정말 애교 누나랑 결혼할 거야?”나는 되려 반문했다.“난 애교 누나랑 결혼하면 안 돼?”“어. 난 네가 그냥 누나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인 줄 알았지.”“왜 그렇게 생각하는데?”나는 민우가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알고 싶었다.지금껏 나는 내 감정에만 신경 쓰면서 다른 사람의 견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걸 알아내면 나도 이태웅의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그때 민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너 여자 친구 많잖아. 그 누나들과 모두 결혼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아? 그래서 네가 결혼하겠다고 한 건 그냥 여자 달래는 수법인 줄 알았지.”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보아하니 다른 사
주해진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난 괜찮아. 돈만 벌면 되니까. 네가 직접 봐 봐. 아직 정식으로 오픈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왔잖아.”“게다가 대부분 정 사장 소개로 온 사람들이야. 이것만 해도 넌 정수호 따라가려면 멀었어. 이런데도 승복하지 못하겠어?”김진호는 가게 안을 꽉 채운 사람들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주해진이 웃으며 김진호의 어깨를 두드렸다.“네가 남보다 못하다는 거 인정하는 거 어렵지 않아. 다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이잖아. 돈만 벌면 되지. 게다가 넌 신경도 쓸 필요 없이 연말마다 배당을 받을 수 있는데 이렇게 좋은 일을 어디서 찾아?”“저 자식들이 가게 일에 신경 쓰고 싶다고 하면 신경 쓰라고 해. 나를 좀 따라 배워. 사람은 마음을 비워야 해.”주해진은 말을 마친 뒤 허허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하지만 김진호의 마음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매일 할 일도 없이 술집 일만 돕다 보니 김진호는 자기가 참 쓸모없게 느껴졌다. 전에 주해진은 분명 천수당이 잘 자리 잡으면 방법을 대서 그를 꽂아주겠다고 했는데 지금 보아하니 주해진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그 때문에 김진호는 자기가 주해진한테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기 사촌형이 남을 편드는 것도 서러운데, 그 남이 하필 그의 철천지원수라니.김진호는 이 분노를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수호야, 모든 준비가 다 끝났어. 내일 개업하면 돼.”민우와 현성도 하루 종일 바삐 일했다.나는 모두를 휴식하게 하고 내일 개업하는 시간을 정했다.“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면 돼. 이제 다들 가서 휴식해. 내일 개업한 시간 전에 미리 도착하면 돼.”주해진은 허허 웃으며 다가왔다.“대단한걸. 아직 정식으로 오픈한 것도 아닌데 벌써 수입도 생겼네.”나도 웃으며 대답했다.“오늘은 지인 소개로 온 손님들이야. 이런 상태를 오래 유지하려면 우리 가게 평판이 좋아야 해. 그러니 가게에서 사용하는 약재도 좋은 걸 사용해야 해. 예전의 공급업체와는 더 이상 손잡
“너무 잘됐네요. 이러면 나도 취업 문제를 해결했고 수호 씨도 가게 문제를 해결한 셈이네요.”고수연은 어찌나 기뻤는지 특별히 반찬 몇 가지를 더 준비했다.물론 나는 그저 한번 시도해 보라고 했지 남을 수 있을지 말지는 고수연의 능력에 달렸다.우리 가게 장부는 반드시 세심히 정리해야 하기에 조금의 착오도 용납할 수 없다.그런데 몇 년 동안 일을 쉰 고수연이 단번에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하지만 어찌 됐든 발등에 떨어진 문제는 이미 해결한 셈이다.“그럼 하던 일 마저 해요. 저는 형수 잠깐 보고 올게요.”나는 침실에 들어가 형수의 상태를 살폈다.형수는 집에 돌아온 이후로 아무런 반응도 한 적 없다.그 사실만 떠올리면 나는 마음이 초조하고 조급했다.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매일 있었던 일을 형수한테 들려주어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려주는 것이었다.“형수, 얼른 일어나요. 저 가게 오픈했어요. 진동성도 더 이상 강북에 없고요. 앞으로 형수 괴롭힐 사람 없어요.”나는 형수의 손등을 살살 닦아냈다.그 시각 형수는 속으로 소리 지르고 있었다.‘수호 씨, 나도 일어나고 싶어요. 그런데 눈꺼풀이 봉인된 것처럼 떠지지 않아요.’형수는 사실 병원에 있을 때부터 이미 의식이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히 정신을 차릴 수는 없었다.매일 집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형수는 다 알고 있었다. 형수도 무척 깨어나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써도 일어날 수 없었다.나는 형수를 잠시 돌보다가 애교 누나가 보낸 문자를 받고 누나 집으로 향했다.“누나, 무슨 일로 저를 찾았어요?”애교 누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내가 저녁 준비했는데 수호 씨랑 같이 먹고 싶어서 불렀어요.”사실 나는 이미 저녁을 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애교 누나의 호의를 저버릴 수 없었기에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그러자 애교 누나는 닭 다리 하나를 짚어주었다.“수호 씨, 많이 먹어요. 그동안 가게 일 때문에 힘들었죠?”“아니에요. 매일 바쁘긴 했지만 그만큼 알찼어요.”“그
“잠깐만요. 여기에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어요.”그 쪽지를 꺼내 내용을 본 순간 내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어두워졌다.이 안에 든 물건은 왕정민이 보낸 것이었다. 게다가 이 물건은 애교 누나에게 보낸 게 아니라 나한테 보낸 거였다.왕정민은 쪽지에 모욕적인 욕설을 가득 적었다. 심지어 애교 누나가 중고라면서 나와 천생연분이라고 욕했다. 그러면서 우리를 가만두지 않겠으니 딱 기다리라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나는 곧장 그 쪽지를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왕정민 그 개자식이에요.”애교 누나는 여전히 놀라움이 가시지 않았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왕정민이 왜 이런 짓을 해요? 이미 떠났으면서 아직도 날 놔주지 않겠다는 거예요?”“아마도 우리는 점점 잘 사는데 본인은 하루하루 지옥에서 보내고 있으니 불만이 생긴 모양이에요.”왕정민은 전승빈을 해치려던 일이 실패한 뒤 어쩔 수 없이 강북을 떠나 다른 곳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의 사업은 모두 강북에 있었기에 그가 그렇게 떠나고 나니 회사는 하루아침에 몰락했다.그러니 원망하지 않을 리가 있을까?“제가 이거 버리고 올게요.”고작 이런 방식으로 겁을 주려 하다니 왕정민이 참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곧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물건을 버리고 돌아왔다. 하지만 애교 누나는 너무 충격이 컸는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몸은 여전히 떨고 있었다.나는 누나가 너무 안쓰러워 품에 꼭 안았다.“됐어요. 이제 괜찮아요. 왕정민은 강북에 없으니 그저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겁주려는 것뿐이에요. 앞으로 또 이런 택배가 오면 아예 받지 말고 거절해요.”애교 누나는 내 품에 꼭 기댔다.“수호 씨, 왕정민이 절대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난 그 인간이 강북에 다시 돌아와 두 배로 복수할까 봐 두려워요.”“두려울 거 뭐 있어요? 저 이제 많이 변했어요. 덤빌 테면 덤벼 보라죠.”내 말은 사실이다.지금의 나는 싸움 실력이든 개인 능력이든 모두 크게 향상했다. 오히려 왕정민은 집 잃은 개 신세가 되어버렸다.역시 사람 일
애교 누나는 그중 하나를 꺼내 바늘로 구멍을 뚫었다.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나는 콘돔 한 박스를 사서 다시 올라왔다.내가 돌아오자 애교 누나가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아까 서랍을 찾아봤는데 한 박스 있더라고요. 우리 이거 써요.”“다 돼요.”나는 두말없이 애교 누나를 덮쳤다. 그러고는 관계가 끝난 뒤 깊이 잠들었다.그때 애교 누나는 내 등 뒤에 누워 내 얼굴을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수호 씨, 미안해요. 이런다고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하늘의 뜻에 맡길래요.”애교 누나는 아이를 무척 좋아하기도 하고 나와 결혼해 우리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아이를 갖자고 하면 내가 당연히 거절할 걸 알았기에 이런 방법을 사용했던 거다.애교 누나는 아이만 있으면 나와 순조롭게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딸이 미혼모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테니까.애교 누나가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 건 요즘 들어 너무 불안했기 때문이다. 누나는 나와 결혼하지 못하고 결국 끝까지 함께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전에 누나가 먼저 나더러 경험을 많이 쌓으라고 한 건 내가 일찍 결혼하면 결혼을 족쇄라고 생각할까 봐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자기한테 흥미를 잃는 게 더 두려웠다.이렇게 노심초사하는 게 애교 누나는 매우 괴로웠다. 더군다나 오늘 밤 왕정민이 보낸 택배를 받은 탓에 애교 누나는 더욱 자극받았다.애교 누나는 내가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미안해요. 그러니까 나를 탓하지 마요.”애교 누나는 내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았다.나는 잠결에 애교 누나가 내 품을 그리워하는 줄 알고 누나를 품으로 끌어들여 꼭 안았다.드디어 천수당 개업식날이 되었다.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잠자리를 정리하고 7시쯤 천수당으로 향했다.7시 30분쯤 민우와 현성도 잇따라 도착해 우리는 함께 가게를 꾸몄다.그러다가 8시쯤 고수연이 아침을 사 들고 가게에 찾아왔다. 그와 동시에 나는 고수연을 우리 가게 회계사로
“그래요. 난처하게 굴지 않을게요. 물건 이리 주고 가보세요.”택배 기사는 그제야 떠나갔다.그때 현성이 다가와 누가 보낸 택배냐며 열어보지 않을 거냐고 물었다.하지만 나는 단번에 택배 상자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발가락으로 생각해도 상자 안에 든 건 좋은 물건이 아니었다.나는 왕정민이 어떻게 내가 천수당을 오픈한다는 걸 알았는지 의문이었다. ‘설마 강북에 누구를 심어두고 갔나?’이 일은 그다지 큰 파문을 일으키지도 않았기에 나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9시쯤 가게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여준휘, 바로 윤지은의 전남친이었다.심지어 딱 봐도 소란 피우러 온 모양이었다.“얼씨구. 이젠 병원에서 일 안 하고 직접 사장이 됐나 봐?”여준휘는 나타나자마자 나를 비꼬았다.맨 처음에는 나도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의 입에서 병원과 윤지은이 나오니 바로 알아챘다.“축하하러 온 거라면 환영하지만, 소란 피우러 온 거라면 적당히 해요.”예전에 여준휘가 병원에서 윤지은을 괴롭힐 때 내가 이 자식을 한바탕 두들겨 팬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나는 이 자식이 무섭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여준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냉소를 흘렸다.“내 여자 친구를 빼앗았으면서 나더러 축하해달라고? 물론 나도 소란 피우러 온 거 아니야.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소란 피우면 나도 손해잖아? 난 그냥 구경하러 았어. 개업식에 축하해줄 사람이 오나 보러.”옆에서 지켜보던 민우는 순간 욱해서 다가왔다.“저 자식 뭐야? 몸이 근질근질하다면 내가 때려줄 수 있는데.”나는 다급히 민우를 막아섰다.“됐어. 그냥 무시해. 너는 다른 준비 다 됐는지 확인해. 이제 곧 10시야. 개업식을 제대로 하는 게 다른 것보다 중요해.”민우는 내 말에 설득당해 성질을 죽였다.나는 여준휘를 가볍게 무시했다. 이 자식이 왜 갑자기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개업식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하지만
“나았어. 내 허리가 정말 나았다고.”“나도 마찬가지네. 훌라후프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아.”“수호 군, 의술이 참으로 대단하군. 정말 탄복하네.”어르신들은 하나둘씩 엄지를 추켜세우며 나를 칭찬했다.심지어 손태진마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실력은 있네요.”그때, 연상철이 손을 뻗어 모두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수호 군, 치료비는 얼마예요?”치료를 하면 치료비를 받는 건 당연하다, 때문에 나도 거절하지 않았다.“연 선생님 치료비는 조금 비싸요. 총 40만 원이고, 다른 분은 한 분당 20만 원이에요.”내가 제시한 비용은 딱 적당했다.그때 연상철이 말했다.“40만 원이라니. 십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힌 손목 통증을 치료했는데. 내가 다른 곳에서 치료한 것만 해도 40만 원은 족히 넘어요.”“저는 연 선생님이 저에게 인맥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나는 웃으며 내가 원하는 걸 말했다.그 대답에 연상철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수호 군 의술이 이렇게 뛰어난데, 말하지 않아도 손님은 소개해 줄 거예요.”“이렇게 하죠. 나는 천만 원, 나머지는 각각 5백만 원씩 낼게요.”“감사합니다, 연 선생님.”사실 이 정도도 비싼 건 아니다.다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돈을 입금했다.게다가 놀랍게도 연상철이 나와 민우를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이렇게 좋은 기회는 당연히 놓칠 수 없었다.연상철은 특별히 손태진에게 큰 프라이빗 룸을 예약하라고 당부했다.우리는 먹는 동안에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어르신들은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주면서, 앞으로 꼭 우리 한의관에 방문하겠다며 약속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술을 권하는 바람에 운전해야 하는 민우 대신 내가 모든 술을 받아 마셨다.다행히 정도를 아는 어르신들 덕에 나는 취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치자 때는 어느덧 9시가 넘어 우리는 연상철과 작별한 뒤 집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기대앉은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마음은 한껏 들떴다.연상철 같
“왜 그래?”연상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손태진이 대답했다.“정수호 씨가 선생님 손목을 치료한 게 우연일지 누가 알아요? 허리는 생명과 관련된 부위인데, 아무래도...”손태진은 여전히 나를 믿지 못했다. 심지어 방금은 그저 요행이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민우는 순간 욱해서 목소리를 높였다.“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수호가 그렇게 어려운 고질병도 고쳤는데 허리 디스크 하나 못 치료할까 봐요?”손태진은 쌀쌀맞게 말했다.“난 어르신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거예요.”손태진은 서화협회 회장, 부회장을 비롯한 어르신들이 모두 나이가 있는 분들이라 사고가 민첩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사람은 늙을수록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몇 년이라도 더 살려 한다. 그 때문에 어르신들을 노리는 전문 사기단도 많다.손태진은 서화협회의 가장 젊은 사람으로서 응당 어르신들의 안전을 지켜야 했다.결국 손태진과 민우는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다가 다투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내가 나서서 민우를 막아섰다.“됐어. 그만 싸워. 손 선생님, 선생님 마음은 이해해요.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선생님부터 치료할게요. 손 선생님이 저를 믿으면 그때 다른 분들을 치료하는 건 어때요?”“나요? 난 아프지도 않은데 뭘 치료하겠다는 거예요?”“어제 기혈이 부족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침 한 방에 바로 기혈을 회복할 수 있어요.”손태진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부터 치료해야 한다.손태진 같은 타입은 매사에 신중하지만 한번 믿음을 얻으면 마음을 주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스타일이다.내가 이 바닥에 들어오려는 이상 손태진은 가장 관건적인 인물이기에 절대 무시할 수 없다.내 말에 손태진은 콧방귀를 뀌었다.“침 한 방? 확실해요?”나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손태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어떻게 침 한 방에 내 기혈을 회복한다는 건지 한 번 보죠.”“자, 앉으세요.”손태진은 의자에 앉았다.내가 오른손을 내밀라고 하자 손태진은 고분고분 내 말을 따랐다.나는 묵묵
1초, 2초, 3초...족히 5초나 지났지만 연상철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이건 기적이나 다름없다.예전 같았으면 연상철은 손목을 찬 공기에 노출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손목을 얼음물에서 꺼낸 연상철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나았어. 정말 나았다고. 다들 봤나? 나 연상철의 손목이 정말 나았네!”이 순간 연상철은 흥분을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손목 통증은 그를 십몇 년 동안 괴롭혔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연상철은 밤마다 잠 못 이루고 뒤척였고, 매번 흐리고 추운 날이면 방 밖도 나가지 못했다.그런데 이 순간, 십 몇 년 동안의 고난과 고초는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나와 민우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치료에 성공했다는 건 우리의 계획이 제대로 먹혔다는 뜻이었다.이건 우리 천수당을 놓고 보면 커다란 수확이나 다름없다.그때 연상철이 흥분한 모습으로 내 앞에 다가와 허리 굽혀 인사했다.“연 선생님, 이러지 마세요.”그 대단하신 연상철 화백이 나 같은 사람한테 허리까지 굽힐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이런 대우까지 받는지 부끄러웠다.하지만 연상철은 당연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했다.“수호 군, 젊은 나이에 의술이 이렇게 대단할 줄 몰랐어요. 이 나이 먹고 참 놀라운 구경을 다 하네요.”“역시 세상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전진한다고, 어떤 직업이든 발전하려면 젊은이를 떠날 수 없네요.”연상철의 극찬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연 선생님, 과찬이십니다.”나는 겸손하게 말했다.그러자 연상철은 감격에 겨운 듯 내 손을 잡고 설렘과 믿음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수호 군, 오랜 세월 나를 괴롭혔던 손목도 낫게 했으니 내 허리는 치료할 수 있겠어요?”오랜 세월 앉아서 그림만 그리는 화가들은 손목과 허리가 가장 쉽게 문제가 생긴다.연상철은 자신의 고뇌뿐만 아니라 다른 원로들의 고민도 대변했다.그도 그럴 게, 이곳의 대부분 원로가 모두 허리 디스크를 않고 있었다.이건 마침 내가
연상철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계속해요.”나는 계속해서 여섯 번째 침을 놓았다.그러다 일곱 번째 침을 놓은 순간 연상철은 고통을 느끼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을 본 손태진은 바로 걱정했다.“연 선생님, 괜찮으세요? 참을 수 있겠어요?”연상철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 아직 참을 만해. 수호 군, 계속해요.”여덟 번째 침을 놓을 때 연상철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손태진은 결국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침 맞는 게 이 정도로 고통스러울 일인가요? 왜 선생님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거예요? 의술이 별로인 거 아니에요?”나도 손태진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인내심을 갖고 진지하게 설명했다.“이건 조금 특별한 침술 기법이에요. 침이 혈자리를 찌를 때는 아프지 않지만 효과가 돌면 손목 주변의 신경을 건드려 아픈 거예요.”“연 선생님 손목은 문제가 너무 심해 완전히 치료하려면 이런 과정을 피할 수 없어요.”연상철은 내 설명을 들은 뒤 손태진을 보며 말했다.“괜찮아. 아직 참을 수 있어.”“하지만 연 선생님, 저는 걱정돼서...”“걱정할 거 없어.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물러설 수 없어. 수호 군, 계속해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홉 번째 침을 꺼냈다.아홉 번째 침을 놓은 순간 연상철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효과가 돌수록 점점 고통이 가해지기에 나는 빠른 속도로 열 번째 침과 열한 번째 침을 놓았다.그리고 겨우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연 선생님, 곧 끝나요.”나는 혈자리를 확인한 뒤 빠른 속도로 열두 번째 침을 놓았다.고통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던 연상철은 그 순간 개운함을 느꼈다.“됐어요. 안 아파요.”서화협회 사람들은 하나둘씩 걱정되는 눈빛으로 연상철을 바라봤다.“연 선생님, 손목 괜찮아 요?”연상철은 손목을 돌려보더니 놀라고도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정말 안 아파. 고통이 사라졌네.”“나았어. 정말 나았다고.”연상철은 아이처럼 기뻐했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놀라운 표정을 지
“손 선생님, 저한테 부담 주지 마요. 이럴수록 제가 더 긴장해요.”나는 손태진이 나더러 신중해지라고 이 점을 강조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럴수록 내 긴장감만 더할 분이었다.내 말에 손태진은 나를 째려보더니 그제야 더 이상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나는 사무실로 향하는 동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연상철은 우리를 보자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수호 군, 왔네요.”나는 연상철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연 선생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걱정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바로 맞장구쳤다.“그래요.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만약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떡하시려고요?”“연 화백님은 우리의 기둥이에요. 협회에 화백님이 없으면 안 돼요.”“이제 곧 서화 대회가 열리는데, 그때 무대에 올라가 연설도 해야 하잖아요.”연상철은 손을 들어 사람들의 말을 잘랐다.“다들 나 걱정하는 거 아네. 나도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야. 알다시피 이 팔목이 이렇게 된 건 벌써 십 년 도 넘지 않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아파서 들지도 못해.”“난 날씨가 좋을 때만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어. 예전이라면 참을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그림을 더 그리고 싶어지네.”“좋은 날씨에만 그림 그릴 수 있는 거로는 이제 나도 만족할 수 없어. 나도 목숨이 끝나기 전에 유작이라도 많이 남겨 놓고 싶네.”연상철은 한평생 회화와 서예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서화는 연상철에게 목숨과도 같다.연상철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연상철이 존경스러웠다.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 일에 자기의 모든 심혈을 기울인다는 건 아주 위대하고 대단한 일이다. 연상철은 말을 이었다.“만약 실패하더라도 그게 운명이겠거니 받아들일 거네. 하지만 나도 시도해 보고 싶네.”“사람은 원래 자기를 위해 평생 싸우지 않나? 내가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아직 팔팔해.”마지막 한마디는 듣
서윤기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어릿광대들이 춤추는 게 뭐가 무섭다고 그래요? 내가 공급해 주는 게 비록 대체품이긴 하지만 아무 문제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사용해요.”“서 사장님, 아직은...”서윤기의 표정은 단번에 어두워졌다.“주 사장, 지금 내 명을 어기겠다는 거예요?”“아닙니다. 그럼 서 사장님 말대로 대체 약재를 보내줘요.”서유기의 덕을 보고 있는 주광덕은 서윤기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그러자 서윤기는 호탕하게 웃으며 떠나갔다.서윤기가 떠난 뒤 주광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돈 좀 모으면 나도 안 해. 내가 왜 남 눈치 보며 일해야 하는데?”...나는 이 사실을 모르는 데다 관심도 없었다.천수당에 돌아온 나는 연상철을 치료하러 갈 준비를 했다.이번 치료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조금의 착오도 있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나는 할 일이 없을 때면 침술을 연습해다.민우와 현성도 이번 일이 중요한 걸 알고 있었기에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나는 그렇게 혼자 사무실에서 몇 시간째 침술 연습만 하다가 점심까지 걸렀다.그러다가 1시가 넘었을 때, 나는 대충 음식을 챙겨 먹고 민우와 함께 서화협회로 향했다.가는 길에 민우는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수호야, 나 왜 이렇게 긴장되냐?”나는 웃으며 말했다.“연 선생님 치료하는 사람은 나인데, 네가 왜 긴장해?”“나도 모르겠어. 그냥 긴장되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우리 가게 오픈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큰 고객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잖아. 만약 이번에 치료를 제대로 못 하면 우리 밥그릇을 잃을지도 몰라.”나는 손을 들어 민우의 이마를 튕겼다.“다른 사람은 나 안 믿어도 되지만, 너도 나 안 믿어?”“아니. 널 안 믿는 게 아니라 연 선생님 신분이 워낙 특수하잖아. 난 그렇게 대단한 분과 교류해 보는 거 처름이야.”나는 민우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한의관을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 다 만날 텐데, 너처럼 담력이 없으면 앞으로 장사 어떻게 해? 난 앞으로 상류층 고개만 받을까
서윤기는 겉으로 보기에 친절해 보이지만 속내는 검은 인간이다. 심지어 지금까지 나한테 당한 걸 속에 두고 있다.서윤기가 볼 때 자신은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본 사장님인데,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회 샛내기한테 당했으니 분명 마음이 안 좋을 거다.때문에 내가 지금 고개를 숙인 건 서윤기의 용서를 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우월감만 더해주는 셈이다.서윤기는 이런 방식으로 나를 찍어 누르고 나한테 자기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역시나 내 생각은 거의 들어맞았다.서윤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봤다.“전에 기회를 줄 때 소중히 여기지, 지금은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 어때? 못 버티겠지? 그게 맞는 거야. 이제 시작이야. 더한 건 아직 뒤에 남았어.”“장사하고 싶지? 내가 못 하게 할 거야. 이건 나를 건드린 벌이야.”서윤기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나는 그의 눈빛에서 욕망과 통제욕을 보았다.서윤기도 처음에는 정 사장님과 마찬가지로 국민을 위해 생각했다지만, 결국 스스로 이익이라는 늪에 빠지게 되었다.지금의 서윤기는 눈에 이익과 돈, 그리고 남을 통제하려는 욕구만 남아 있었다.이럴 때마다 나는 정 사장님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항상 초심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그건 아주 위대한 일이다. 그런데 정 사장님은 그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이 세상에 아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나는 빙그레 웃으며 일어섰다.“가르침 고마워요. 그럼 난 이만.”목적에 도달한 나는 더 이상 서윤기와 마주 앉아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너무 힘들고 재미없었다.찻집에서 나와 천수당에 돌아오니 현성도 얼마 뒤 돌아왔다.나는 다급히 물었다.“그 영감 반응 어땠어?”“내가 그 영감한테 네가 서윤기 사촌 동생이라고 했더니 믿더라.”‘좋았어.’이제 우리 계획대로 또 한 발 나간 셈이다.‘서윤기, 네가 언제까지 날뛰나 두고 보자고.’한편, 주광덕 즉 우리가 늘 말하던 영감은 나와 서윤기의 사이를 확인한 뒤 불안
손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오후 두 시, 연 선생님이 협회에서 기다릴 거예요.”“네. 제때 도착할게요.”나는 직접 손태진을 배웅했지만, 손태진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손태진이 떠난 뒤 우리 셋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너무 잘 됐다. 연 선생님 팔목만 치료하면 우리는 연상철 화백이라는 인맥이 생기는 거잖아.”“연 선생님은 서화협회 협회장이라 인맥도 넓을 텐데.”민우는 잔뜩 흥분해서 보충했다.“지난번에 보니까 서화협회에 있는 분들 모두 어르신이더라고. 그 나이가 되면 몸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야.”“와. 만약 연 선생님 팔목을 치료한다면 우리 가게 다시 살아날 수 있어.”현성도 함께 감탄했다.그때 나는 두 사람을 일깨웠다.“이 일은 비밀로 해야 해. 우리 가게 직원들한테도 말하지 마. 안 그러면 누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연상철은 아주 최상급 고객이기에 가게를 방문하는 횟수가 적어도 필요할 때 분명 큰 금액을 쓸 수 있다.이렇게 우질 고객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적들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돈을 버는 거다.“됐어. 난 찻집에 가 볼게.”연상철과의 약속은 오후로 잡혔기에 나는 우선 서윤기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민우는 내가 뭐 하러 찻집에 가는지 몰랐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내가 찻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윤기가 나타났다.나는 이미 주문한 차를 서윤기에게 건넸다.“이 집 차 괜찮던데, 마셔 봐요.”서윤기는 내 앞에 앉았다.“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무슨 일로 찾았는데?”“서 사장이 나 엿 먹인 것도 내가 화 안 냈는데. 왜 본인이 도리어 화내실까?”나는 서둘러 본론을 말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우리 맞은편 가게는 비록 요즘 장사에 타격받았지만, 여전히 손님이 많아 영감은 이 시간쯤 가게에서 바삐 보내고 있을 거다. 때문에 나는 현성에게 충분한 시간을 줘야 했다.내가 고른 자리는 마침 맞은편 가게가 보이는 자리였다. 나는 이곳에서 현성의 신호만 기다리면 된다.“하
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안 될 거 뭐 있어요? 거래할 건 없어도 정은 남아 있잖아요. 파트너는 못해도 친구는 할 수 있죠.”서윤기는 콧방귀를 뀌었다.[난 네놈이랑 친구 못해!]“너무 극단적으로 얘기하지 마요. 적어도 마지막 선은 남겨 둬야 나중에 너무 껄끄러워지지 않죠. 사실 할 얘기가 있는데, 만나서 얘기할래요?”[관심 없어.]서윤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나는 서윤기가 이런 태도로 나올 거라는 걸 진작 알았다. 나한테 당한 게 있으니 기분 안 좋은 것도 당연했다.“사업에 관한 얘기인데, 정말 싫어요? 당신 같은 장사꾼들은 모두 이익이 우선이잖아요. 언제부터 감정적으로 굴었다고 그래요?”나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서윤기는 한참 고민하더니 결국 말을 바꾸었다.[주소 보내.]“당신이 이끌어주는 가게 맞은편에 찻집이 있어요. 그곳에서 기다릴게요.”나는 일부러 그곳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목적은 바로 그 영감이 나와 서윤기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서윤기는 흔쾌히 동의했다.[알았어. 바로 갈게.]서윤기와 약속을 한 뒤 나는 현성을 찾았다.“내가 서윤기랑 약속 잡았어. 저 가게 맞은편에 있는 찻집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이따가 방법을 대서 우리가 함께 있는 걸 영감이 보게 해.”“알았어.”나와 현성이 얘기하고 있을 때 민우가 걸어 들어왔다.“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이야?”민우는 그 말에 기분 좋은 듯 나에게 달려왔다.“서화협회의 손 선생님이 찾아왔어. 너를 만나고 싶대.”이건 참으로 의외의 수확이었다.얼른 로비로 나가 봤더니 손태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예의 있게 먼저 손태진에게 인사했다.“손 선생님, 어쩐 일로 직접 오셨어요?”“연 선생님이 시켜서 왔어요. 연 선생님이 수호 씨에게 기회를 한 번 주겠대요.”사실 손태진이 이곳에 나타난 순간 나는 연상철의 뜻을 대충 짐작했다. 하지만 그걸 손태진 입으로 직접 들으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언제쯤 편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