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았어. 내 허리가 정말 나았다고.”“나도 마찬가지네. 훌라후프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아.”“수호 군, 의술이 참으로 대단하군. 정말 탄복하네.”어르신들은 하나둘씩 엄지를 추켜세우며 나를 칭찬했다.심지어 손태진마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실력은 있네요.”그때, 연상철이 손을 뻗어 모두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수호 군, 치료비는 얼마예요?”치료를 하면 치료비를 받는 건 당연하다, 때문에 나도 거절하지 않았다.“연 선생님 치료비는 조금 비싸요. 총 40만 원이고, 다른 분은 한 분당 20만 원이에요.”내가 제시한 비용은 딱 적당했다.그때 연상철이 말했다.“40만 원이라니. 십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힌 손목 통증을 치료했는데. 내가 다른 곳에서 치료한 것만 해도 40만 원은 족히 넘어요.”“저는 연 선생님이 저에게 인맥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나는 웃으며 내가 원하는 걸 말했다.그 대답에 연상철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수호 군 의술이 이렇게 뛰어난데, 말하지 않아도 손님은 소개해 줄 거예요.”“이렇게 하죠. 나는 천만 원, 나머지는 각각 5백만 원씩 낼게요.”“감사합니다, 연 선생님.”사실 이 정도도 비싼 건 아니다.다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돈을 입금했다.게다가 놀랍게도 연상철이 나와 민우를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이렇게 좋은 기회는 당연히 놓칠 수 없었다.연상철은 특별히 손태진에게 큰 프라이빗 룸을 예약하라고 당부했다.우리는 먹는 동안에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어르신들은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주면서, 앞으로 꼭 우리 한의관에 방문하겠다며 약속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술을 권하는 바람에 운전해야 하는 민우 대신 내가 모든 술을 받아 마셨다.다행히 정도를 아는 어르신들 덕에 나는 취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치자 때는 어느덧 9시가 넘어 우리는 연상철과 작별한 뒤 집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기대앉은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마음은 한껏 들떴다.연상철 같
“그런데 어떻게 됐는지 알아? 연승호가 그 약물 자국이 안 지워진다고 했는데 내가 걸레로 몇 번 만에 지웠거든. 알고 보니 연승호가 직원들더러 벽을 아예 긁어내라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결국 그 손해는 모두 본인이 짊어지게 됐어.”“그 자식 그때 표정이 어땠는지 너희 못 봤지? 완전 똥 씹은 표정이었어.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와.”현성은 말하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그때 민우가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이거 수호 아이디어잖아. 화도 풀고 고소도 못 하게 했다니. 진짜 속 시원해!”“젠장. 얘기는 그만하고 얼른 해장국 좀 끓여.”비록 많이 마신 건 아니지만 나는 속이 메슥거려 참을 수 없었다.그도 그럴 게, 전에는 이 정도로 술을 마신 적이 없었으니까.현성은 진작 나를 위해 만들었던 해장국을 그릇에 가득 담아 나에게 가져왔다.나는 그걸 한꺼번에 원샷했지만, 속이 울렁거려 결국 얼마 뒤 모두 토해냈다.다행히 토해내고 나니 속은 한결 편해졌다.“사업하는 거 쉽지 않네. 남 비위 맞춰야지, 술도 마셔야지... 그래도 성취감은 있어.”그 일을 떠올리니 나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우리는 너무 기뻐 잠도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희망을 보았고 예전에는 하지 못했던 걸 했다는 성취감에 어릴 때로 돌아가 창업한다는 느낌이 들었다.그 덕에 민우와 현성은 여자를 꼬시는 것도 잊었다.우리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두 지쳐서 거실에 쓰러져 잠들었다.하지만 현성은 다음 날 아침 또 일찍 깨어나 주광덕의 가게에 글을 붙였고, 민우는 7시가 넘어서 깨어나 혼자 천수당으로 출근했다.두 사람 모두 나를 깨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어제 술을 마셔 푹 휴식하게 하기 위해서였다.오전 10시가 넘어서야 잠에서 깨어난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잠에서 깨자마자 핸드폰을 보니 문자 메시지 몇 개가 도착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확인했다.그중 하나는 서예지가 보낸 거였는데, 언니가 강북에 왔다면서 주소를 보내
이상한 눈빛으론 바라보는 서나연의 눈빛에 나는 온몸이 불편했다.나는 찻잔을 내려놓고 서나연을 마주 봤다.“서나연 씨, 물 마실래요?”“나 그쪽 알아요. 그 예술가잖아요.”서나연은 기억력이 뛰어났다. 그녀가 아니었다며 나는 내가 그때 했던 말까지 잊어버릴 뻔했다.나는 어색하게 웃었다.“맞아요. 그걸 다 기억할 줄은 몰랐네요.”“S시에 있는 거 아니었어요? 왜 여기 나타났어요?”“아... 전에는 S시에 영감 찾으러 간 거예요. 사실 저 강북 사람이에요.”나는 헛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서나연은 내 옆에 앉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나를 오롯이 쳐다보며 당황스러운 말을 내뱉었다.“거짓말. 예술가가 아니면서!”‘어디서 티가 났지?’나는 너무 당황해서 가슴이 벌렁거렸다.만약 상대가 정상인이라면 내가 이렇게 긴장할 건 없다. 문제는 서나연은 정상인과는 조금 다르다는 거였다. 그녀는 작은 자극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정서가 불안정해질 수 있으니까.그날 서나연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모습을 떠올리니 나는 서나연이 또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봐 불안해 다급히 설명했다.“서나연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이 옷차림이 예술가 같지 않아요? 저 오늘 일반인 컨셉이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하하...”나는 웃음으로 어색함을 감췄다.서나연은 나를 꿰뚫어 볼 것처럼 계속 쳐다봤다.“예술가 아니라 의사잖아요. 몸에서 한약 냄새 나요. 내 동생도 한의사라 당신과 똑같은 냄새가 나거든요.”서나연은 이 순간만큼은 정상인 같았다.아마 서나연이 정상인이라고 하면 나도 믿었을 거다.그렇다는 건 서나연의 상태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뜻이었다. 감정 기복이 심해 가끔 흥분했다 가끔 냉정했다 하니까.다시 말해서 현재는 정상과 미친 상태의 과도기에 있다는 뜻이라 아직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이게 바로 서씨 가문이 서나연을 강북에 데려오면서까지 나를 찾아온 원인이다.나는 속으로 서나연의 상태를 대략 가늠했다. 그리
“아주머니가 설명할 필요 없어요. 제가 설명할 테니...”“그래도 안 돼요. 회장님께서 아가씨를 저에게 맡겨 주셨는데. 아가씨한테 무슨 일 있으면 안 돼요.”가사 도우미는 내가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직접 달려들었다.나는 그 전에 막으려 했지만 아쉽게도 한발 늦어 가사 도우미는 어느새 서나연의 몸에 있던 침을 뽑아버렸다.“망했어. 이젠 망했다고!”나는 연신 울부짖었다.가사 도우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망하긴 뭐가 망해요? 지금 사람 놀리는 거죠? 아가씨 멀쩡하잖아요... 어머, 아가씨, 왜 이러세요?”서나연은 벌떡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몸이 목석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렸다.가사 도우미는 그제야 겁을 먹고 바닥에 주저앉았다.“아가씨, 놀리지 마세요. 얼른 정신 차려 보세요.”나는 다급히 달려갔다.“그러니까 가만두라고 했잖아요. 왜 말을 안 들어요?”“내가 어떻게 알아요? 이제 어떡해요?”가사 도우미는 어쩔 줄 몰라 했다.사실 나는 일부러 가사 도우미를 겁준 거였다. 서나연의 몸이 뻣뻣하게 굳고 미라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건 사실 정상적인 반응이다.하지만 내가 이렇게 겁주지 않으면 앞으로 또 이럴 저지를 테니 따끔하게 교훈을 줘야 했다.나는 서나연을 일으켜 세워 몸을 마사지해 주었다. 그러자 얼마 뒤 서나연은 정상으로 돌아왔다.짝!서나연은 정신이 들자마자 내 뺨을 후려갈겼다.나는 순식간에 멍하니 굳어버렸다.“서나연 씨, 왜 때려요?”서나연은 나를 밀쳤다.“감히 나를 찔러? 죽여버릴 거야!”서나연은 말하면서 갑자기 가위를 꺼내 들었다.나는 다급히 도망쳤다.“서나연 씨, 방금 그건 치료 과정이었어요. 지금 이게 머 하는 짓이에요? 얼른 가위 내려놔요. 죽을 수 있어요.”“안돼. 나를 질렀으니 나도 당신 찔러야 해!”나와 서나연은 티 테이블 주위를 빙빙 돌며 술래잡기했다.여자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나는 할 수 없이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문을 연 순간, 서광진이 눈에 들어왔다
서광진이 기뻐하기도 잠시, 서나연은 힘 빠진 듯 쓰러졌다.“나연아, 나연아, 왜 그래?”서광진의 미소는 순간 사라지더니 딸에 대한 걱정과 관심만 남았다.나는 얼른 앞으로 다가가 확인했다.“별일 아닙니다. 서나연 씨는 감정 소모가 심해 혼절한 겁니다.”“하, 다 내 탓이네. 내가 너무 섣불리 좋아했어. 이미 예전으로 돌아온 줄 알았는데.”“서나연 씨는 예전에 화끈한 성격이었나요?”나는 서나연이 온화하고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방금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랐던 거다.서광진은 딸을 눕히고 나서야 대답했다.“나연이는 예전에 엄청 활발하고 귀여웠네. 성격도 털털했고. 그런데 임천호를 만난 뒤로...”임천호를 언급하자마자 서광진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임천호를 만난 뒤로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네. 처음에 임천호가 잘해줄 때는 매일 기뻐했는데, 임천호의 사업이 성공하면서 우리 서씨 가문이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자 나연에 대한 태도가 순식간에 변하더군.”“그 뒤로 그렇게 활발하던 나연이가 매일 우울해하고 웃지도 않고 지금처럼 변했네.”딸이 사람을 잘못 만났던 일을 떠올리자 서광진의 눈에는 아픔이 번졌다.명문가의 귀한 딸로 태어난 서나연은 임천호를 만나지 않고, 모든 마음을 바쳐 임천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다.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공주가 지금은 한 맺힌 아줌마로 변해버렸다.그런 딸을 보며 슬퍼하지 않을 부모는 없다.“지예 말로는 자네가 나연이를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던데. 정말 방법이 있나?”서광진은 갑자기 나를 보면서 진지하게 물었다.나는 한의사라 몸은 치료할 수 있다. 하지만 서나연의 문제는 몸이 아닌 마음이다.나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다.“서 회장님, 서나연 씨 상태는 심리 치료예요. 약물은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없어요.”“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도 우리 딸을 치료할 수 없다는 뜻인가?”서광진은 갑자기 내 멱살을 잡으며 흉흉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따져 물었다.나는 흠칫 겁
“아직은 말하기 어려워요. 이따가 확인해 봐야 해요.”나는 솔직히 말했다.그러자 가사 도우미는 한숨을 푹 쉬었다.“가뜩이나 일하기 어려운데, 사직서라도 제출하고 싶어지네요.”“아주머니가 사직서를 내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나도 어디 말할 데 없어서 한탄하는 거잖아요. 있잖아요, 서 회장님 평소에 다정하고 친절해 보여도 화나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워요.”그 말에 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이 아주머니가 이곳에서 한동안 일했으니 서씨 가문에 대해 잘 알겠지?’나는 서씨 가문에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때문에 우선 식구들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했다.“또 아는 거 있으면 말해줄 수 있어요?”나는 궁금한 듯 물었다.그러자 가사 도우미도 평소에 재벌가 일화에 관심이 많았는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꺼냈다.“서 회장님은 두 따님을 엄청 아끼는데 아내분한테는 잘해주지 않는 것 같아요... 내가 서씨 가문에서 1년 넘게 일했는데 사모님은 본 적이 없거든요. 소문에 의하면 감금당했다는 말도 있고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어요...”그 말을 들으니 순간 등골이 오싹했지만 나는 애써 부인하려고 했다.‘이에 설마,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설마 사람을 때려죽이겠어?’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너무 무섭다.“지, 지금 험담하는 거 아니죠? 서 회장님 그런 사람 아닌 것 같던데요.”나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서광진이 내 목을 잡던 모습을 떠올리니 덜컥 겁이 났다.“나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는데, 어느 하루 밤중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다가 여자 울음소리를 들었어요. 그것도 바닥에서 나는 소리였어요.”“그때 내가 너무 놀라 바로 방에 들어갔는데, 비명이 계속 들렸어요. 마치 누구한테 맞는 것 같았거든요.”“됐어요. 그만 말해요. 질금 일부러 저 겁주려는 거죠?”나는 다급히 가사 도우미의 말을 잘랐다.“내가 왜 겁을 줘요?”나는 어른 반문했다.“서씨 가문이 그렇게 무서우면 왜 진작 도망가지 않았어요?”“나도 도망치고
‘응? 이건 무슨 수법이지?’나는 앞에 있는 은행 카드를 보니 마음이 살짝 동요했다.만약 예전이었다면 4억은 나한테 천문학적인 숫자였을 거다.하지만 지금은 이게 내 목숨을 앗아가는 부적 같았다.“서 회장님, 돈은 필요 없습니다. 저 이미 서지예 씨한테 최선을 다한다고 말씀드렸어요.”나는 적어도 살길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이 카드를 받으면 마지막 살길도 막히는 셈이나 다름없다.서광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적나?”“아닙니다. 서지예 씨가 저한테 손님을 소개해 준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회장님 돈까지 받겠어요.”역시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한순간도 경계를 늦추지 말고 머리를 굴려야 한다.서광진은 ‘하’하고 짤막한 웃음을 내뱉았다.“카드도 받게. 지예랑 한 거래는 나랑 상관없으니 따져 묻지 않겠네. 내 요구는 단 하나, 최선을 다해 나연을 치료하는 거네. 내가 나연이를 왜 이렇게 신경 쓰는지 어나?”서광진은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며 물었다.그걸 내가 알 턱이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서광진의 눈에서 순간 분노의 불꽃이 튀었다.“임천호 그 인간 때문이네. 나연이가 정상으로 돌아와야 임천호와 맞설 수 있으니까.임천호가 지금 자리에 오른 건 내 도움 없이는 안 됐을 거네. 그런데 그 자식이 은혜도 모르고 나연이와 나한테 미안한 짓을 했지.”“그런 자식이 아무렇지 않게 누비고 다니는 걸 내가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나? 난 나연이 혼자 모든 걸 감당하게 하지 않을 거네.”‘또 왜 임천호와 엮였지?’‘나는 정말 임천호와 악연일까? 왜 벗어나지 못할까?’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입을 꾹 다물었다.그때 서광진이 갑자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조사해 보니 임천호랑 원한이 있던데. 지난번에 S시에서 4억을 사기당했다지?”나는 너무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서광진이 나를 조사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서광진은 갑자기 껄껄 웃었다.“걱정하지 말게. 자네한테 뭘 하려
나는 서광진한테 말했다.“우선 서나연 씨한테 약을 처방하고 돌아가서 연구할게요. 제가 상세한 치료 방안을 짜면 다시 연락드리죠.”“알겠네. 그럼 정 선생의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네.”나는 겨우 눈앞의 일을 해결하고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왔다.비록 가사 도우미의 말이 조금 과장되었지만 서씨 가문 사람과 지내는 건 확실히 스트레스를 받고 압박감이 느껴졌다.나는 왠지 이 모든 게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처음부터 짜여진 판이었을지도 모른다.다만 나는 현재 그 판 안에 놓인 상태라 잘 보이지 않기에 한 걸음씩 가보면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백조의 호수에서 나온 나는 곧바로 가게로 향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마침 유미 사모님과 마주쳤다.사모님은 마트를 다녀온 모양인지 커다란 봉투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다만 발목을 삔 모양인지 고통스러워하며 일어섰다.나는 얼른 다가갔다.“사모님, 괜찮아요?”“수호 씨였군요. 방금 실수로 발을 삐었어요.”나는 몸을 쪼그리고 앉아 확인했다. 사모님의 발은 근육을 다친 듯 퉁퉁 부어 있었다.나는 얼른 사모님을 부축해 일어났다.“사모님, 발이 많이 다친 듯한데, 반드시 처리해야 해요. 제가 업어 드릴게요.”사모님의 얼굴은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랐고 목까지 빨개졌다.“어, 어떻게 그래요? 나 대신 짐이나 들어줘요. 혼자 걸을 수 있으니까.”나는 특별히 강조했다.“안 돼요. 근육을 다쳐서 더 걸으면 부상이 심해져요.”“괜찮아요. 힘 안 써요.”사모님은 여전히 보수적이라 과도한 스킨십을 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도 강요할 수는 없었다.나는 사모님 대신 짐을 들었고, 사모님은 이를 악문 채 절뚝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얼른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사모님에게 얼음찜질을 해주었다. 다만 사모님은 여전히 부끄러워했다.“수호 씨, 이러지 마요. 내가 직접 할게요.”나는 단호하게 시모님을 자리에 앉혔다.“사모님, 앉아서 가만히 계세요. 발목이 더 심해진 거 못 느꼈어요?”사모님도
여준휘도 사실 무서웠다.우리한테 증인과 물증 모두 있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불안했다.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연승호에게 또 혼나는 건 당연했다.결국 여준휘는 연승호의 다리를 잡고 애원했다.“도련님, 전 안 돼요. 저는 힘도 없고 백도 없는데 정수호 저놈이 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도련님이 나서주세요.”연승호는 당장이라도 여준휘를 차버리고 싶었다.평소에 쓸모없는 것도 모자라 중요한 타이밍에도 실수했으니. 이제는 도망치고 싶어도 나와 민우가 이미 문 앞에 도착해 노크하고 있는 탓에 도망칠 수도 없었다.그 시각.“수호야. 연승호가 문 열까?”민우는 문을 두드리다가 갑자기 싱글벙글 웃으며 물었다.“안 열면 차라리 더 좋아. 바로 경찰에 신고하면 되니까. 증거도 있는데 무서울 거 뭐 있어?”어찌 됐든 연승호는 이번에 도망칠 수 없다.연승호도 계속 숨어서 나오지 않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문을 열었다.그 순간 나는 우리가 잡은 높을 발로 걷어차 우리 넘어뜨렸다.“네 사람이야!”연승호는 겉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내 사람이라니?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는데?”“계속 잡아떼. 이 자식이 이미 다 불었어. 네가 우리 가게 앞에 쓰레기 터러와 똥 테러를 해서 우리 가게 이미지를 망치라고 지시했다고. 여기 영상 증거도 있는데 볼래?”민우는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핸드폰을 꺼내 영상을 재생했다.영상 속에서 놈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그걸 확인한 연승호는 갑자기 버럭 소리쳤다.“내가 지시했다고 하는데 증거 있어? 이 개자식이. 너 지금 나 모함하는 거지?”연승호는 말하면서 민우에게 달려들어 일부러 과장된 동작으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했다.그 순간 나는 얼른 민우를 뒤로 잡아끌었다.연승호는 때리는 척하면서 기회를 노려 민우 핸드폰을 뺏으려는 수작이었다.민우도 그걸 눈치채고 신속히 연승호와 거리를 두었다.“연승호, 증거 인멸하려고? 잘 들어. 소용없어. 이 자식이 네가 송금한 기록까지
“사실 다연이 좋은 아이예요. 평소 소통을 많이 하세요.”내가 이 선생님과 얘기하고 있을 때 민우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나는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봐 다급히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수신 버튼을 누르자마자 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호야, 네 말이 맞았어. 그 사람들 뭔가 문제 있어.]“혹시 무슨 일 있어? 넌 괜찮아?”[난 괜찮아. 그 사람들이 문제지. 그 자식들이 우리 가게 문 앞에 쓰레기 테러랑 똥 테러를 했어. 내가 소리를 듣자마자 뒤로 돌아 겁줬더니 소리 지르며 도망쳤어.]“사람은 잡았어?”[한 놈만 잡았어. 지금 가게에 묶어 놨어. 이 사람들 누가 보낸 것 같아?]“연승호야.”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민우는 내 대답에 놀란 듯 물었다.[어떻게 알았어?]“나 지금 당장 갈게. 너도 조심해.”나는 민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추측할 필요도 없었으니까.임천호는 그렇게 유치하고 비열한 수단은 쓸 리 없고 주광덕은 아직 내가 천수당 사람이라는 걸 모르니, 남은 건 연승호뿐이었다.연승호는 전에 나한테 당했으니 절대 그대로 넘어가지 않을 거다. 그 때문에 이런 유치한 방법으로 복수한 것일 테고.이건 역시나 막무가내 재벌2세가 생각할 법한 방법이긴 했다.다만 부하들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덜미를 잡혔을 뿐이다.나는 이 선생님 내외와 작별하고 곧바로 천수당으로 향했다.남자는 민우한테 입이 틀어 막힌 채로 묶여 있었다.“저 자식 불었어?”“다 불었어. 이렇게 돈 받고 일하는 놈들은 깡다구도 없어. 겁 좀 주니까 바로 불던데. 그래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모두 녹화했어. 연승호가 또 아니라고 잡아뗄까 봐.”영상을 확인했더니 놈은 역시나 모든 사실을 털어 놓았다. 영상 증거도 인고 증인도 있으니 일은 많이 쉬워졌다.“가자. 연승호 찾으러.”“늦었는데 그 자식이 아직도 가게에 있을까?”“큰 공을 들여서 이 짓을 준비했으니 분명 직접 지켜볼 거야.”민우는 내 말을 듣더니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 말했다
이다연은 반항심이 너무 강했기에 나는 인내심을 갖고 말했다.“왜? 놀 기분 아니야? 그럼 게임하지 말고 요즘 뭐 했는지 대화할까?”이다연은 침대에 엎드려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예기할 거 없어요. 친구도 없는데요, 뭘. 그냥 매일 먹고 자는 것뿐이에요.”“그래? 역시 심심했겠네. 혹시 뭐 해볼 생각 없어?”나는 계속해서 대화를 유도했다.그때 이다연이 갑자기 나를 발로 걷어찼다.“싫어요. 아무것도 하기 싫으니까 가요. 앞으로 오빠도 안 만날래요.”“그래. 그럼 갈게.”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척하면서 이다연의 반응을 살폈다.아니나 다를까 이다연은 내가 가려고 하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정말 가려고요? 이젠 나 상관 안 할 거예요?”나는 자리에 서서 이다연을 바라봤다.“나도 상관하고 싶은데 네가 협조 안 하는데 어떡해? 난 너를 치료하려고 하는데 넌 나한테 흑심이나 품고. 그러면 돼 안 돼?”나는 이다연의 마음을 단번에 들추었다.이럴수록 숨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대놓고 얘기해서 직접적으로 문제를 직면하게 하고 이런 일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려줘야 한다.사람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누구나 이런 일에 부딪히기 마련이니까.이다연의 얼굴은 단번에 빨개지더니 내 눈을 피했다.“어, 어떻게 알았어요?”“네가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아?”나는 이다연의 핸드폰을 주워 돌려주면서 말했다.“나도 너처럼 아무것도 몰랐던 적이 있어. 넌 지금 너무 자신을 꽁꽁 숨기고 있고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는 데다 평소에 가족과도 대화를 안 해서 부모님 사랑이 고프고 관심받고 싶을 때야.”“그래서 다른 사람이 조금만 잘해줘도 그게 사랑이라고 오해해. 하지만 그렇지 않아. 네가 깨닫지 못한 것뿐이야.”이다연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난 오빠 사랑해요. 오빠를 만나지 못하면 잠도 못 자요.”“난 어릴 때 집이 가난해서 다른 남자애들이 갖고 노는 총 장난감을 보고 나도 갖고 싶어 했어.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나한테 권총 장
돌다리도 두르려 보고 건너야 한다고 나는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나는 차에 오르자마자 민우에게 문자 했다.[너 잠시 돌아가지 마. 이따가 가게로 다시 가 봐. 무조건 인기척 내지 말고 몰래 확인해. 다른 사람이 너를 보지 못 하게.]민우는 곧바로 내 뜻을 알아차렸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나는 내 의심을 민우에게 말했다.그러자 민우는 곧바로 나에게 답장했다.[알았어. 지금 당장 돌아가서 확인할게.][조심해. 정 안 되면 도망치고.][알았어.]나는 이 모든 게 내가 너무 예민했던 것이었기를 바랐다.하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아 차 안에서 잠시 더 관찰하기로 했다.그렇게 심 몇 분 동안 확인했지만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해 나는 내가 너무 예민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민우가 이미 가게로 돌아갔으니 마음 놓고 이 선생님 집으로 출발했다.이 선생님은 나를 보자 매우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왔나? 우리 딸이 요즘 매일 자네를 찾으며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네.”“네? 대체 무슨 상황이에요?”이다연은 전에 이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다.이 선생님은 아무 설명도 없이 딸의 방문을 두드렸다.“다연아, 수호 오빠 왔어. 문 열어!”이다연은 순식간에 문을 열었다.“왜 이제야 와요? 얼른 들어와요. 계속 점수 좀 올려줘요.”이다연은 나를 방 안으로 끌어들이더니 문을 ‘쾅’ 닫아버렸다.사실 이다연은 게임이 목적이 아니라 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했다.그런데 내가 왔으니 오늘은 단둘이 오래 있을 생각이었다.나는 그런 이다연의 마음을 모르기에 심각한 표정으로 이다연의 맥을 짚어 보았다.“다행이네. 상태가 많이 안정됐네. 그런데 왜 이 선생님이 요즘 네가 밥도 못 먹고 잠도 안 잔다고 하는 거야?”이다연의 속내를 모르는 나로서는 의사의 각도로 문제를 볼 수밖에 없었다.이다연은 내 손을 덥석 잡았다.“오빠가 나 데리고 게임하지 않아서 그렇잖아요. 혼자서 너무 심심해서 막 이상한 생각이 든다고요.”“게임은 단지 오락 행위일 뿐이지 네
나는 그걸 보고는 바로 무시했다.하지만 임화영이 연달아 몇 번이나 친구 구가를 해왔다.그러다가 내가 계속 무시하자 화가 난 듯 버럭 화를 냈다.“정수호라는 사람 대체 뭐야? 내가 친구 추가를 세 번이나 신청했는데 왜 통과하지 않지?”주해진은 술을 마시며 말했다.“바쁜 거나 못 봤나 보지.”“그런데 1시간에 한 번씩 보냈단 말이야. 아무리 바빠도 핸드폰 볼 시간도 없어?”임화영은 내가 일부러 그런다고 확신했다.그때 주해진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이런 방법을 사용하려면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 너 내 여자야. 다른 놈 꼬시기 전에 내 마음은 어떨지 생각해 봤어?”임화영은 다급히 애교 부렸다.“꼬시는 거 아니야. 그냥 내가 마음껏 주무르려고 그런 거야. 남자는 여자한테 마음을 빼앗기면 아랫도리로만 생각해.”“그 세 명 걱정된다며? 내가 그렇다고 매일 그 가게에 붙어있을 순 없잖아. 우리한테 소식을 전해다 줄 사람을 만들면 좋은 거 아니야?”주해진은 임화영을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그런데 질투 나. 오늘 밤 어떻게 보상해 줄 거야?”임화영은 눈빛으로 프라이빗 룸을 가리켰다.“자기가 원하는 대로 보상해 줄게.”주해진이 시작하려고 할 때 임화영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내가 친구 추가를 동의한 거라고 확신하며 핸드폰을 꺼내던 임화영은 흠칫 놀랐다.“우리 남편이야!”알고 보니 임화영과 주해진은 부부가 아니었고 두 사람이 각자 가정이 있으면서 바람을 피우는 상태였다.“남편이 당장 집에 오래. 아이가 나 찾는다고.”임화영은 다급히 짐을 정리했다.그 순간 주해진은 언짢은 듯 기분이 팍 상했다.“오늘 밤은 나 보상해 주기로 했잖아. 이게 보상이야?”임화영은 다급히 주해진 품에 안겨 애교를 부렸다.“아잉, 왜 그래? 나 지금 집에 안 가면 들켜. 우리 사이 들키고 싶어?”두 사람이 얘기하던 그때 주해진의 핸드폰도 갑자기 울렸다.주해진이 꺼낸 핸드폰에 화면에 ‘마누라’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가 봐. 나중에 나 몇 배로 보상해
나는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나도 그동안 여자가 애교 부리는 모습은 수 없이 봐왔다. 남주 누나나 소여정, 혹은 백연우가 자주 애교 부렸으니까.그런데 누나들이 애교 부릴 때는 온몸이 짜릿했는데 임화정은 워낙 첫인상이 나빠서 그런지 욕망이 생기지 않았다.나는 차라리 임화영이 전처럼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았다.남자가 여자한테서 호감을 느끼려면 얼굴이나 몸매보다 느낌이 더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때문에 만약 여자한테 그런 느낌이 없다면 아무리 예쁘고 몸매가 좋아도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나는 임화영한테 넘어간 것처럼 열쇠를 내어주며 말했다.“됐어요. 가서 쉬기나 해요.”임화영은 생글생글 웃으며 열쇠를 받았다.“그럼 갈게요. 수호 씨도 힘들면 올라와요.”여자는 말을 마친 뒤 허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떠나갔다.임화영이 가자 현성과 민우가 바로 다가왔다.“대박. 이렇게 바로 저 여자를 해결한 거야?”민우는 농담조로 말했다.나는 두말없이 민우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내가 지금 나를 희생해서 너의 구한 거야. 그런데 그렇게 기뻐한다고? 내가 당장 저 여자 끌어내서 너희를 괴롭히게 할까?”“아니, 아니! 난 유부녀는 감당 못 해. 너 혼자 감당해.”“나도. 난 유부녀는 싫어. 나한테는 선영이처럼 어린애가 좋다고.”‘이거 왜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지?’“너희 지금 내가 유부녀를 좋아한다는 거야?”“아니. 우리 일 하러 가볼게.”‘저런 것도 친구라고.’나는 민우와 현성이가 무심코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기에 마음에 두지 않았다.임화영은 약 두 시간 정도 휴식하고는 일이 있다면서 다급히 떠났다.여자가 떠난 뒤에야 나는 다시 시무실로 올라갔다.할아버지가 남긴 의서 복사본이 사무실에 있기에 나는 서나연과 비슷한 상황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 했다.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이불이 구겨진 채 널브러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와, 나는 순간 열이 뻗쳤다.임화영은 사무실을 사용하고 정리하지도 않았다.안 그래도 평소에 침대가 지저
임화영은 씩씩거리며 구석에 앉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했다.우리 셋이 모두 자기를 적대시한다는 걸 눈치챈 임화영은 사람을 고용해 우리를 혼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다만 그녀 마음속에 나는 성깔이 나쁘고, 민우는 불같아 그나마 현성이 가장 만만해 보였다.직원들한테 수소문하여 우리 셋이 모두 싱글이라는 걸 알아낸 임화영은 자기처럼 매력 있고 성숙한 유부녀가 우리 같은 애송이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자신했다.목표를 정한 임화영은 바로 자기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그녀는 현성을 찾아가 일부러 팔로 현성을 툭 치고는 먼저 말을 걸었다.“현성 씨, 방금 나만 괜찮으면 같이 자자고 한 거 진짜예요?”현성은 이런 상황이 처음인지라 무척 당황했다. 그동안 항상 자신이 여자들을 쫓아다니고 항상 자기가 먼저 좋아하고 모든 걸 바쳐 좋아한 게 이미 익숙해진 탓이었다.때문에 임화영이 애교를 부리며 매력을 발산하자 현성은 버티지 못했다.물론 임화영의 매력에 홀랑 넘어갔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놀라 도망쳐 버렸다.“수호야. 큰일 났어.”현성은 나한테 달려와 도움을 요청했다.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현성은 임화영이 한 짓을 곧이곧대로 말했다.“그 여자가 왜 그러는지 갑자기 먼저 찾아와서 같이 자자고 해. 순수한 내 몸을 그 여자한테 바칠 수없어.”나는 잠깐 머리를 굴려본 끝에 임화영의 꿍꿍이를 대충 파악했다.“그 여자가 너를 자기 마음대로 휘둘러서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게 하려는 거야.”“그러니까 그게 왜 나야? 너 아니면 민우라면 모를까.”“왜긴 왜야? 네가 만만하니까 그렇지.”나는 내 생각을 말했다.그러자 현성은 퍽 기분 상한 듯 말했다.“난 단순한 거지 바보는 아니거든.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려고? 어림도 없지.”나는 순간 아이디어가 떠올라 현성에게 말했다.“현성아, 우선 이렇게 해... 그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처럼 맞춰 줘. 그러면 그 여자가 유령처럼 계속 가게를 돌아다니지 않을 거잖아.”“비록 방해하는 건 아니지만 계
민우는 나와 현성의 손을 잡으며 흥분한 듯 말했다.“자, 이리 와. 우리 사진 찍자!”이 순간은 우리한테 특별한 의미가 있다.그때 여자 한 명이 갑자기 튀어나와 끼어들려고 했다.“나도 같이 찍어요. 난 우리 남편을 대표하니까.”그 여자는 다름 아닌 임화영이었다.임화영이 끼어들자 민우와 현성은 바로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심지어 민우는 여자의 체면도 봐주지 않고 타박했다.“환자분이 우리 세 명한테 감사 패넌트를 선물한 건데 그쪽이랑 무슨 상관이죠?”“왜 상관없어요? 이건 우리 한의관이 따낸 영예나 다름없는데. 내가 주 사장 마누라인데, 파트너나 다름없잖아요. 그러니 나도 같이 영예를 누려야죠!”여자는 당연하다는 듯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민우는 너무 열이 뻗쳐 여자를 째려봤다.그때 현성도 맞장구치려 했지만 내가 막아섰다.“됐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데 일 크게 벌려서 좋을 거 없어. 사람들이 웃어.”나는 무엇보다 일을 크게 만들어 한의관 내부 직원끼리 불화가 있다는 걸 남한테 보여주기 싫었다. 이건 우리 한의관 발전에 불리하게 작용할 거다.결국 현성과 민우도 입을 다물었다.다만 갑자기 억지를 피우는 여자 때문에 우리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임화영과 사진을 찍은 뒤 우리 셋도 단독으로 사진을 남겼다.이건 우리만의 아름다운 추억이자 영광이었다.허대길이 준 태넌트 덕에 우리 가게 손님은 두 배 늘었다.허대길은 우리 셋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려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그날 이렇게 많이 받을 정도로 도움을 준 건 아니었으니까.“그래요, 그럼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또 찾아올게요.”우리 셋은 허대길을 배웅했다.문턱이 닳도록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보며 민우는 기뻐서 발을 어쩔 줄 몰라했다.“너무 잘 됐다. 역시 노력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나 봐!”“됐어. 이제 일하자.”민우와 현성은 각자 자리로 돌아가 일하기 시작했다.그때 임화영이 다가왔다.“이봐요, 나도 사무실 하나 마련해 줘요.”그 말에 나
임화영은 피식 웃었다.“상관하라고 해도 안 해요.”“그럼 좋아요. 그렇게 해요.”임화영과 주해진은 내가 그렇게 흔쾌히 승낙할 거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구석에 숨어 다시 수군대기 시작했다.임화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저 사람이 자기랑 김진호더러 한의관 일에 끼어들지 모하게 한다며? 왜 단번에 동의하는 건데?”주해진도 멍한 얼굴이었다.“나도 몰라. 알 게 뭐야. 우선 당심부터 안에 파고들어. 경고하는데 저 자식 성깔 더러우니까 절대 부딪히지 마.”임화영은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나에게 복수할 생각으로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주해진의 말을 들은 순간 자기 남편이 너무 겁이 많다고 생각했다.임화영은 어물쩍 넘어갔다.“알았어. 알았다고. 자기는 가서 일 봐.”주해진이 떠난 뒤 임화영은 나한테 그동안 정리한 장부를 요구했다.하지만 고수연이 오늘 휴가를 낸 탓에 나는 내일 그녀가 돌아오면 보여주겠다고 넘겼다.내 대답을 들었으면서 임화영은 떠나지 않고 계속 가게 안을 돌아다녔다.그래도 장사를 방해하지만 않으면 상관없었다.다행히 우리가 며칠 동안 계획을 실시한 덕에 가게 손님이 점점 많아지는 추세였다.현성은 나를 사무실로 불러들여 깔깔 웃으며 말했다.“수호야, 네 아이디어 진짜 짱이다. 주 사장네 그쪽 문제 터졌어. 오늘 가게에 손님들이 찾아와 소란 피웠대.”“다른 손님들도 그걸 보고 바로 도망갔고. 그래서 오늘 우리 가게에 손님이 많아졌나 봐.”이 모든 건 이미 예상했던 바다.가짜 약을 팔았으니 당연히 근본적으로 병을 고치지 못했을 거다. 비록 단기간에 수익을 냈겠지만 시간이 지나도 약효를 보지 못하면 고객의 불만은 당연히 커질 거다.게다가 내가 그동안 찾아가 신경을 긁은 것 때문에 워낙 예민했던 주광덕은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할 정신도 아니었다.나는 현성을 바로 경고했다.“아직 긴장을 풀지 마. 요즘 계속 계획대로 해서 저쪽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해야 해.”“알았어!”현성은 자기가 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