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난처하게 굴지 않을게요. 물건 이리 주고 가보세요.”택배 기사는 그제야 떠나갔다.그때 현성이 다가와 누가 보낸 택배냐며 열어보지 않을 거냐고 물었다.하지만 나는 단번에 택배 상자를 쓰레기통에 버렸다.발가락으로 생각해도 상자 안에 든 건 좋은 물건이 아니었다.나는 왕정민이 어떻게 내가 천수당을 오픈한다는 걸 알았는지 의문이었다. ‘설마 강북에 누구를 심어두고 갔나?’이 일은 그다지 큰 파문을 일으키지도 않았기에 나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9시쯤 가게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여준휘, 바로 윤지은의 전남친이었다.심지어 딱 봐도 소란 피우러 온 모양이었다.“얼씨구. 이젠 병원에서 일 안 하고 직접 사장이 됐나 봐?”여준휘는 나타나자마자 나를 비꼬았다.맨 처음에는 나도 상대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그의 입에서 병원과 윤지은이 나오니 바로 알아챘다.“축하하러 온 거라면 환영하지만, 소란 피우러 온 거라면 적당히 해요.”예전에 여준휘가 병원에서 윤지은을 괴롭힐 때 내가 이 자식을 한바탕 두들겨 팬 적이 있었다. 그때에도 나는 이 자식이 무섭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여준휘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냉소를 흘렸다.“내 여자 친구를 빼앗았으면서 나더러 축하해달라고? 물론 나도 소란 피우러 온 거 아니야. 여기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소란 피우면 나도 손해잖아? 난 그냥 구경하러 았어. 개업식에 축하해줄 사람이 오나 보러.”옆에서 지켜보던 민우는 순간 욱해서 다가왔다.“저 자식 뭐야? 몸이 근질근질하다면 내가 때려줄 수 있는데.”나는 다급히 민우를 막아섰다.“됐어. 그냥 무시해. 너는 다른 준비 다 됐는지 확인해. 이제 곧 10시야. 개업식을 제대로 하는 게 다른 것보다 중요해.”민우는 내 말에 설득당해 성질을 죽였다.나는 여준휘를 가볍게 무시했다. 이 자식이 왜 갑자기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개업식이 무엇보다 중요했기에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하지만
나는 연승호를 힘껏 밀쳤다. 그 순간 연승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나를 노려봤다.“개 같은 자식! 내가 누구인지 알아? 감히 나한테 손을 대?”나는 가슴을 펴고 두려울 것 없다는 듯 말했다.“그쪽이 누구든 내 구역에서 소란 피우면 가만 안 있어.”“어디서 겁도 없이 연 도련님께 함부로 말해?”옆에서 맞장구치며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여준휘였다. 여준휘도 보아하니 연승호 쪽 사람인 듯했다.‘어쩐지 떼로 쳐들어와서 소란 피운다 했더니 지시를 받았군.’이 순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가 들끓었다. 천수당이 개업하게 된 건 나 혼자만의 성과가 아니다. 이건 민우와 현성과 함께 이룬 성과다. 때문에 나는 절대 누군가 개업식을 망치도록 방치하지 않을 생각이었다.나는 두려울 것 없다는 듯 연승호를 노려보면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가장 멋진 일을 했다.“겁도 없이 구는 건 너희들이지! 벌건 대낮에 감히 내 구역에서 소란을 피워? 뭐 하자는 거야?”“민우야, 현성아. 경찰에 신고해.”“오늘 여기서 소란 피우는 놈은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민우는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수호, 대단한데! 너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어.”현성 역시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수호, 잘했어. 상대는 그냥 돈 좀 있는 부잣집 도련님일 뿐이야. 누구는 뭐 돈이 없는 줄 아나?”연승호가 미리 알게 된 정보에 따르면 나는 고작 여자 덕에 이 자리까지 오게 된 무능력한 찌질이였다. 그런 내가 이렇게 대놓고 저한테 반항할 거라고 연승호는 생각지도 못했다.연승호는 피식 냉소를 흘렸지만 낯빛은 점점 어두워졌다.“그래. 나 소란 피우러 왔다. 어쩔래?”“승호 씨!”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백연우가 웃으면서 걸어왔다.그 순간 연승호는 이내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연우 씨, 여긴 어쩐 일이에요?”백연우는 먼저 다가가 연승호의 팔짱을 꼈다. 그 동작 하나에 잔뜩 긴장해 있던 연승호는 단번에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
심지어 현재까지도 윤지은은 여준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아 그는 자신이 공기가 된 기분이었다.윤지은의 신분은 역시 만만치 않은지 항상 시건방지던 연승호마저 윤지은 앞에서 바보 같은 웃음만 흘렸다.“LC그룹 윤지은 씨였네요. 그런데 방금 천수당이 친구분이 운영하는 가게라고요?”윤지은의 차가운 눈빛이 내 몸에 떨어졌다.“그래요. 여기 있는 정수호가 내 친구거든요. 그러니 정수호한테 시비를 걸고 싶으면 나한테걸어요.”“하하. 시비 거는 게 아니라 그냥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랬어요.”연승호는 겁이 났지만 순순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윤지은은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안 좋은 일이 뭔데요? 어디 들어나 보죠. 듣고 나서 내가 대신 해결해 줄 수도 있고.”“내가 방금 이 자식한테 인사했는데 이 자식이 곱게 받지 않고 오히려 내 팔을 비틀었거든요. 이게 누구 잘못이에요?”윤지은은 서둘러 결론을 내리는 대신 나를 바라봤다.“정수호, 네가 말해 봐.”나는 바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이 사람이 먼저 손댔어요. 이 사람이 내 어깨를 힘껏 움켜잡아 난 그저 반격한 것뿐이에요.”윤지은은 단번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들었어요? 내 친구는 연승호 씨가 먼저 손댔다네요?”연승호의 안색은 단번에 어두워졌다.“지은 씨, 저 자식 주장만 믿으면 안 되죠.”그때 민우가 바로 반박했다.“안 되긴. 우리 가게 앞에 CCTV가 있는데 못 믿겠으면 영상 보여줄 수 있어요!”연승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흥! CCTV가 있으면 뭐? 난 그저 인사한 것뿐인데 저 자식이 내 팔 비튼 건 사실이라!”이런 일은 CCTV를 보더라도 제대로 밝히기가 어렵다. 연승호도 그걸 알고 있기에 내가 먼저 자기를 괴롭혔다고 우기면서 윤지은이 나를 감싸지 못하게 하는 거였다.윤지은의 얼굴은 더욱 무거워졌다.“보아하니 학교에 도서관은 필요 없나 보네? 그럼 지금 당장 우리 아버지한테 전화해 투자를 철회하라고 해야겠네.”윤지은의 말에 연승호의 얼굴빛은 바로 변했
“잠깐.”그때 내가 소리쳤다.연승호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나를 바라봤다.“또 뭐 하려고 그래?”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는 눈빛으로 연승호를 빤히 바라봤다.“연승호 씨, 나한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지 모르겠으나 한마디 경고하죠. 오늘 같은 일은 이번 한 번뿐이어야 할 겁니다. 만약 다음에 또 이러면 나도 가만있지 않아요!”연승호는 주먹을 꽉 그러쥐며 눈에서 불꽃을 뿜어냈다. 그가 화를 내려고 할 때 백연우가 얼른 그를 끌어당겼다.“승호 씨, 우리 가요. 얼른 쇼핑해요.”연승호는 화가 치밀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발산할 수 없었다.나는 윤지은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말했다.“고마워요.”“계속 이런 환경에 처하면 영향 안 받을 리 없잖아? 앞으로 조심해.”윤지은의 말속에는 뭔가를 내포하고 있었다.나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게 뭐 내 탓인가? 백연우가 먼저 나를 찾아왔고 그 때문에 연승호가 나를 질투하는 건데 뭐.’하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만약 연승호가 또다시 찾아와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도 두렵지 않다.작은 사고가 있고 난 뒤 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타났다.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임천호 옆에 있는 시커먼 떡대, 이제는 이름도 아는데 바로 강용재였다.나는 임천호가 사람을 보내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강용재는 선물도 가져오지 않고 임천호의 말만 전했다.“임 회장님께서 정수호 씨더러 시간 날 때 소여정 씨를 보러 오라고 하십니다.”나는 임천호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의문이었다. 나를 믿는 건지 아니면 시험하는 건지도 의문이었다.하지만 어떤 것이든 좋은 의도는 아니다.오늘은 천수당 개업일인데 수많은 사람 앞에서 거절하면, 사람들은 우리 천수당 의술이 별로라고 생각할 거다.때문에 잠깐 고민한 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민우는 다급히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수호야. 동의하면 어떻게? 임천호는 분명 좋은 의도가 아닐 거야.”현성마저 그렇게 얘기했다.그때 나는 내 생각을 말
그리고 이 순간 김진호는 희망을 보았고 서서히 자기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하지만 그것도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오늘이 개업 첫날이라 정 사장님은 많은 손님을 소개해 주며 한 명씩 소개해 주었다.“조 사장님, 안녕하세요!”“연 사장님, 안녕하세요!”“신 사장님, 안녕하세요!”나는 사장님들께 일일이 인사하며 접대했다.그러면서 모든 사람의 모습과 전화번호를 마음속에 기억했다.이왕 혼자 하기로 했으니 인맥과 관계는 가장 중요하다. 게다가 정 사장님이 나한테 소개해 준 인맥은 모두 어렵게 얻은 것이라 반드시 소중히 여겨야 했다.손님들을 한 바퀴 접대하고 나니 나는 목이 말라 타는 것 같았다.민우가 때마침 나에게 물 한 컵을 건넸다.“얼른 물 마셔. 너 목소리 갈라졌어.”나는 컵을 받아 물을 단숨에 마셨다. 그제야 조금 편해진 것 같았다.비록 피곤했지만 나는 아주 보람이 느껴졌다.이건 가게 발전에 두 도움 되는 것들이었다. 현성마저 엄지를 추켜세우며 나를 연신 칭찬했다.“수호, 너 정말 대단하네. 기억력 너무 좋다. 모든 사람을 제대로 기억하네. 난 사람 얼굴이 너무 헷갈려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겠어.”민우도 맞장구쳤다.“나도 사람 얼굴이 헷갈리는 것 같아. 문제는 다 비슷한 옷을 입기도 했고 생긴 게 정말 너무 비슷해.”솔직히 나도 이런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이 정도 할 수 없었을 거다.하지만 이제는 천수당의 발전을 등에 업고 수억을 투자한 이상 절대 돈 낭비해서는 안 된다.사람의 잠재력은 모두 극단적인 상황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오늘 이렇게까지 할 수 있던 건 나 스스로도 매우 놀라웠다.물을 마시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나는 또 귀한 손님들을 접대하러 갔다.민우와 현성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우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점심에 나는 민우더러 다연 한식당에 프라이빗 룸을 예약하라고 당부하고는 사장님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다.나는 당연히 함께 가야 했기에 다른 사람을 가게에 남겨두기로 했다
오후에는 그렇게 바쁘지 않았다. 사장님들을 모두 보낸 것도 있었고 손님도 오전보다 훨씬 줄었다.그제야 다들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우리가 돌아왔을 때 김진호는 배우 바삐 보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면서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민우는 그 모습이 무척 의외라는 듯 말했다.“저 자식 왜 저렇게 좋아해?”현성은 의아한 눈빛으로 김진호를 바라봤다.“저 자식 무슨 꿍꿍이지? 수호야, 차라리 저 자식 쫓아내는 건 어때?”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김진호도 주주야. 비록 비중은 작다고 해도 아예 무시하면 안 돼. 저렇게 하고 싶어 한다면 하라고 해. 그런데 너희 둘이 잘 지켜보면서 잡일거리면 시켜. 절대 기밀 손대게 해서는 안 돼.”나는 김진호에 대해 여전히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무슨 일이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래야 오래 가고.재무, 약재 구매 경로 그리고 중요한 고객 정보 등은 우리가 직접 관리하는 게 더 안전했다.김진호는 아직 그걸 깨닫지 못했는지 자기도 겨우 일할 수 있다고 좋아하며 만족해했다. 비록 땀투성이가 되어도 그는 여전히 흐뭇해했다.주해진은 그런 김진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너 이럴 필요 있어? 우리는 밖에서 맛있는 거 먹으며 즐기고 있을 때 혼자 여기서 땀 뻘뻘 흘리며 일하고 있고. 너 바보야?”김진호는 주해진이 가져온 밥을 먹으며 싱글벙글 웃었다.“형, 그건 틀린 말이에요. 내가 왜 남은 줄 알아요?”“지금 가게는 정수호가 권력을 쥐고 있고 우리는 아예 아무런 권한도 없잖아요. 우리도 이 가게 주주라고 말하고 다니지 않으면 가게 직원들이 우리를 알아나 봐요?”“그런데 내가 오늘 가게에 얼굴을 비추니 달라지더라고요. 모든 사람이 나와 형도 주주인 걸 알았어요. 이렇게 되면 나중에 가게가 안정되면 내가 다시 들어오는 것도 문제없잖아요.”주해진은 그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지었다.“너 이 자식, 그런 속셈이었구나. 몰라봤는데 너 은근히 머리 잘 굴리네?”김진호는 형의 칭찬에 더 흐뭇해하
나는 고수연이 만든 장부를 보고 있었다.고수연이 작성한 장부는 아주 명확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문외한인 나마저도 단번에 이해했다.보아하니 내가 참 보물을 찾은 모양이다.주해진이 다가오자 나는 장부를 얼른 고수연에게 건넸다. 나도 주해진을 조금 경계하는 마음이 있었다.이건 어쩔 수 없는 거다. 주해진과 김진호는 우리와 같은 마음이 아니니 경계할 수밖에.애초에 내가 자금만 충족했어도 두 사람과 손잡을 일은 절대 없다.남을 해치는 마음은 있으면 안 되지만 경계하는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모든 건 다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다.“수호, 잠깐 할 말이 있는데.”나는 휴게실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주해진도 이내 따라왔다.주해진은 방금 내가 장부를 내려놓는 걸 목격했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파트너인 자기마저 경계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때문에 김진호를 여기 붙여 놓는 건 정확한 결정이었다.우리는 각자 꿍꿍이를 갖고 있었다.그때 주해진이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아까 진호가 가게에서 일하는 게 너무 좋았다는데 앞으로도 진호한테 잡일거리라도 맡겨주면 안 될까? 도움이라도 될 수 있게.”“우리 술집은 너도 알잖아. 장사가 잘됐다 안 됐다 해서 요즘은 거의 손님도 없어. 진호가 거기 있어도 쓸모가 없고.”주해진은 눈을 접고 배시시 웃으며 내가 거절하지 못하게 뒷길마저 막아두었다.하지만 나도 내 생각이 있는지라 웃으며 말했다.“주해진, 애초에 약속했잖아. 가게 일은 내가 혼자 관리하기로. 직원 모집도 포함해서. 이건 다 계약서에 있는 내용일 텐데.”“알아, 나도 다 알아. 그래서 이렇게 상의하는 거잖아. 우리가 그래도 파트너인데. 이제 같은 배를 탄 사람 아니야? 그러니 예전 일은 이제는 내려놓을 때도 됐잖아.”“원수가 원한을 풀기는 쉬워도 친구가 되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 친구가 한 명이라도 더 있으면 원수가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역시 사회에서 구른 사람이라 그런지 말은 참 그럴듯하게 했다.나도
“형, 어떻게 됐어? 정수호가 동의해?”김진호는 온 신경이 이 일에 쏠려 있어 주해진이 다가오자마자 쪼르르 달려가 물었다.주해진은 돌아오는 길에 김진호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부터 고민했다. 때문에 이내 허허 웃으며 말했다.“아직은 가게 상황이 안정되지 않아 나중에 얘기하자고 하네.”“나중에? 나중에 언제? 이거 분명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거예요. 형, 우리도 계속 참을 수만은 없어요. 안 그러면 정수호가 우리를 점점 무시할 거라고요.”주해진은 김진호가 제 말을 들으면 분명 화를 낼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도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말했다.“우선 조급해하지 말고 앉아서 들어 봐.”“형. 제가 조급하지 않게 생겼어요? 천수당은 우리가 인수한 가게예요. 그런데 정수호 사람들만 가게에서 돌아다니고 우리는 공기처럼 아무 역할도 못 한다고요.”“지금 짜증 내 봐야 소용 있어? 짜증 낸다고 문제가 해결돼?”주해진은 이내 얼굴을 굳힌 채 물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말투를 누그러뜨리며 차분히 달랬다.“우선 앉아서 내 말 들어 봐.”주해진은 자기 생각을 말했다.“가게에 돌아오는 건 당연해. 하지만 정수호는 가게가 아직 안정된 기로에 서지 않았다는 말로 거절하는데 나라고 어떻게 하겠어? 우선 인내심을 갖고 한 달만 기다려 보자. 가게 장사가 안정되면 내가 무조건 너를 여기에 꽂아줄게.”“네 말이 맞아. 우리는 절대 가게를 완전히 정수호한테 맡길 수 없어. 안 그러면 그 자식들이 장부에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그 말을 들은 김진호는 형이 아직도 자기편을 든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한 달은 너무 길지 않아요? 형, 조금 더 앞당길 수는 없어요?”김진호는 마음이 조급해 한 달 동안이나 기다릴 수 없었다.주해진은 웃으며 김진호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큰일을 할 사람이 왜 이 정도도 못 받아들여? 한 달이면 마침 가게 월매출을 볼 수 있잖아. 그때면 나도 기회를 잡을 수 있고.”김진호는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었지만 형 말에 일리가 있어
“나았어. 내 허리가 정말 나았다고.”“나도 마찬가지네. 훌라후프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아.”“수호 군, 의술이 참으로 대단하군. 정말 탄복하네.”어르신들은 하나둘씩 엄지를 추켜세우며 나를 칭찬했다.심지어 손태진마저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실력은 있네요.”그때, 연상철이 손을 뻗어 모두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수호 군, 치료비는 얼마예요?”치료를 하면 치료비를 받는 건 당연하다, 때문에 나도 거절하지 않았다.“연 선생님 치료비는 조금 비싸요. 총 40만 원이고, 다른 분은 한 분당 20만 원이에요.”내가 제시한 비용은 딱 적당했다.그때 연상철이 말했다.“40만 원이라니. 십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힌 손목 통증을 치료했는데. 내가 다른 곳에서 치료한 것만 해도 40만 원은 족히 넘어요.”“저는 연 선생님이 저에게 인맥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나는 웃으며 내가 원하는 걸 말했다.그 대답에 연상철은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수호 군 의술이 이렇게 뛰어난데, 말하지 않아도 손님은 소개해 줄 거예요.”“이렇게 하죠. 나는 천만 원, 나머지는 각각 5백만 원씩 낼게요.”“감사합니다, 연 선생님.”사실 이 정도도 비싼 건 아니다.다들 그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반박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돈을 입금했다.게다가 놀랍게도 연상철이 나와 민우를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이렇게 좋은 기회는 당연히 놓칠 수 없었다.연상철은 특별히 손태진에게 큰 프라이빗 룸을 예약하라고 당부했다.우리는 먹는 동안에도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어르신들은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주면서, 앞으로 꼭 우리 한의관에 방문하겠다며 약속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술을 권하는 바람에 운전해야 하는 민우 대신 내가 모든 술을 받아 마셨다.다행히 정도를 아는 어르신들 덕에 나는 취하지 않았다.식사를 마치자 때는 어느덧 9시가 넘어 우리는 연상철과 작별한 뒤 집으로 향했다. 조수석에 기대앉은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마음은 한껏 들떴다.연상철 같
“왜 그래?”연상철은 이해할 수 없었다.그때 손태진이 대답했다.“정수호 씨가 선생님 손목을 치료한 게 우연일지 누가 알아요? 허리는 생명과 관련된 부위인데, 아무래도...”손태진은 여전히 나를 믿지 못했다. 심지어 방금은 그저 요행이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민우는 순간 욱해서 목소리를 높였다.“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수호가 그렇게 어려운 고질병도 고쳤는데 허리 디스크 하나 못 치료할까 봐요?”손태진은 쌀쌀맞게 말했다.“난 어르신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거예요.”손태진은 서화협회 회장, 부회장을 비롯한 어르신들이 모두 나이가 있는 분들이라 사고가 민첩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사람은 늙을수록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몇 년이라도 더 살려 한다. 그 때문에 어르신들을 노리는 전문 사기단도 많다.손태진은 서화협회의 가장 젊은 사람으로서 응당 어르신들의 안전을 지켜야 했다.결국 손태진과 민우는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다가 다투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내가 나서서 민우를 막아섰다.“됐어. 그만 싸워. 손 선생님, 선생님 마음은 이해해요. 그럼 이렇게 해요. 제가 선생님부터 치료할게요. 손 선생님이 저를 믿으면 그때 다른 분들을 치료하는 건 어때요?”“나요? 난 아프지도 않은데 뭘 치료하겠다는 거예요?”“어제 기혈이 부족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침 한 방에 바로 기혈을 회복할 수 있어요.”손태진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그부터 치료해야 한다.손태진 같은 타입은 매사에 신중하지만 한번 믿음을 얻으면 마음을 주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스타일이다.내가 이 바닥에 들어오려는 이상 손태진은 가장 관건적인 인물이기에 절대 무시할 수 없다.내 말에 손태진은 콧방귀를 뀌었다.“침 한 방? 확실해요?”나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손태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좋아요. 그럼 어떻게 침 한 방에 내 기혈을 회복한다는 건지 한 번 보죠.”“자, 앉으세요.”손태진은 의자에 앉았다.내가 오른손을 내밀라고 하자 손태진은 고분고분 내 말을 따랐다.나는 묵묵
1초, 2초, 3초...족히 5초나 지났지만 연상철은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이건 기적이나 다름없다.예전 같았으면 연상철은 손목을 찬 공기에 노출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손목을 얼음물에서 꺼낸 연상철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나았어. 정말 나았다고. 다들 봤나? 나 연상철의 손목이 정말 나았네!”이 순간 연상철은 흥분을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손목 통증은 그를 십몇 년 동안 괴롭혔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연상철은 밤마다 잠 못 이루고 뒤척였고, 매번 흐리고 추운 날이면 방 밖도 나가지 못했다.그런데 이 순간, 십 몇 년 동안의 고난과 고초는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나와 민우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치료에 성공했다는 건 우리의 계획이 제대로 먹혔다는 뜻이었다.이건 우리 천수당을 놓고 보면 커다란 수확이나 다름없다.그때 연상철이 흥분한 모습으로 내 앞에 다가와 허리 굽혀 인사했다.“연 선생님, 이러지 마세요.”그 대단하신 연상철 화백이 나 같은 사람한테 허리까지 굽힐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이런 대우까지 받는지 부끄러웠다.하지만 연상철은 당연하다는 듯 허허 웃으며 말했다.“수호 군, 젊은 나이에 의술이 이렇게 대단할 줄 몰랐어요. 이 나이 먹고 참 놀라운 구경을 다 하네요.”“역시 세상은 끊임없이 발전하고 전진한다고, 어떤 직업이든 발전하려면 젊은이를 떠날 수 없네요.”연상철의 극찬에 나는 몸 둘 바를 몰랐다.“연 선생님, 과찬이십니다.”나는 겸손하게 말했다.그러자 연상철은 감격에 겨운 듯 내 손을 잡고 설렘과 믿음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수호 군, 오랜 세월 나를 괴롭혔던 손목도 낫게 했으니 내 허리는 치료할 수 있겠어요?”오랜 세월 앉아서 그림만 그리는 화가들은 손목과 허리가 가장 쉽게 문제가 생긴다.연상철은 자신의 고뇌뿐만 아니라 다른 원로들의 고민도 대변했다.그도 그럴 게, 이곳의 대부분 원로가 모두 허리 디스크를 않고 있었다.이건 마침 내가
연상철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계속해요.”나는 계속해서 여섯 번째 침을 놓았다.그러다 일곱 번째 침을 놓은 순간 연상철은 고통을 느끼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을 본 손태진은 바로 걱정했다.“연 선생님, 괜찮으세요? 참을 수 있겠어요?”연상철은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 아직 참을 만해. 수호 군, 계속해요.”여덟 번째 침을 놓을 때 연상철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손태진은 결국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침 맞는 게 이 정도로 고통스러울 일인가요? 왜 선생님이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거예요? 의술이 별로인 거 아니에요?”나도 손태진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인내심을 갖고 진지하게 설명했다.“이건 조금 특별한 침술 기법이에요. 침이 혈자리를 찌를 때는 아프지 않지만 효과가 돌면 손목 주변의 신경을 건드려 아픈 거예요.”“연 선생님 손목은 문제가 너무 심해 완전히 치료하려면 이런 과정을 피할 수 없어요.”연상철은 내 설명을 들은 뒤 손태진을 보며 말했다.“괜찮아. 아직 참을 수 있어.”“하지만 연 선생님, 저는 걱정돼서...”“걱정할 거 없어.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물러설 수 없어. 수호 군, 계속해요.”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홉 번째 침을 꺼냈다.아홉 번째 침을 놓은 순간 연상철은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렸다.효과가 돌수록 점점 고통이 가해지기에 나는 빠른 속도로 열 번째 침과 열한 번째 침을 놓았다.그리고 겨우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연 선생님, 곧 끝나요.”나는 혈자리를 확인한 뒤 빠른 속도로 열두 번째 침을 놓았다.고통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던 연상철은 그 순간 개운함을 느꼈다.“됐어요. 안 아파요.”서화협회 사람들은 하나둘씩 걱정되는 눈빛으로 연상철을 바라봤다.“연 선생님, 손목 괜찮아 요?”연상철은 손목을 돌려보더니 놀라고도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정말 안 아파. 고통이 사라졌네.”“나았어. 정말 나았다고.”연상철은 아이처럼 기뻐했다.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놀라운 표정을 지
“손 선생님, 저한테 부담 주지 마요. 이럴수록 제가 더 긴장해요.”나는 손태진이 나더러 신중해지라고 이 점을 강조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럴수록 내 긴장감만 더할 분이었다.내 말에 손태진은 나를 째려보더니 그제야 더 이상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나는 사무실로 향하는 동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연상철은 우리를 보자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수호 군, 왔네요.”나는 연상철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저를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연 선생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 걱정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바로 맞장구쳤다.“그래요.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에요. 만약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떡하시려고요?”“연 화백님은 우리의 기둥이에요. 협회에 화백님이 없으면 안 돼요.”“이제 곧 서화 대회가 열리는데, 그때 무대에 올라가 연설도 해야 하잖아요.”연상철은 손을 들어 사람들의 말을 잘랐다.“다들 나 걱정하는 거 아네. 나도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야. 알다시피 이 팔목이 이렇게 된 건 벌써 십 년 도 넘지 않나.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아파서 들지도 못해.”“난 날씨가 좋을 때만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어. 예전이라면 참을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죽어간다고 생각하니 그림을 더 그리고 싶어지네.”“좋은 날씨에만 그림 그릴 수 있는 거로는 이제 나도 만족할 수 없어. 나도 목숨이 끝나기 전에 유작이라도 많이 남겨 놓고 싶네.”연상철은 한평생 회화와 서예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서화는 연상철에게 목숨과도 같다.연상철의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연상철이 존경스러웠다.한 사람이 평생 한 가지 일에 자기의 모든 심혈을 기울인다는 건 아주 위대하고 대단한 일이다. 연상철은 말을 이었다.“만약 실패하더라도 그게 운명이겠거니 받아들일 거네. 하지만 나도 시도해 보고 싶네.”“사람은 원래 자기를 위해 평생 싸우지 않나? 내가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아직 팔팔해.”마지막 한마디는 듣
서윤기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어릿광대들이 춤추는 게 뭐가 무섭다고 그래요? 내가 공급해 주는 게 비록 대체품이긴 하지만 아무 문제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사용해요.”“서 사장님, 아직은...”서윤기의 표정은 단번에 어두워졌다.“주 사장, 지금 내 명을 어기겠다는 거예요?”“아닙니다. 그럼 서 사장님 말대로 대체 약재를 보내줘요.”서유기의 덕을 보고 있는 주광덕은 서윤기의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그러자 서윤기는 호탕하게 웃으며 떠나갔다.서윤기가 떠난 뒤 주광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돈 좀 모으면 나도 안 해. 내가 왜 남 눈치 보며 일해야 하는데?”...나는 이 사실을 모르는 데다 관심도 없었다.천수당에 돌아온 나는 연상철을 치료하러 갈 준비를 했다.이번 치료는 아주 중요한 것이기에 조금의 착오도 있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나는 할 일이 없을 때면 침술을 연습해다.민우와 현성도 이번 일이 중요한 걸 알고 있었기에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나는 그렇게 혼자 사무실에서 몇 시간째 침술 연습만 하다가 점심까지 걸렀다.그러다가 1시가 넘었을 때, 나는 대충 음식을 챙겨 먹고 민우와 함께 서화협회로 향했다.가는 길에 민우는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수호야, 나 왜 이렇게 긴장되냐?”나는 웃으며 말했다.“연 선생님 치료하는 사람은 나인데, 네가 왜 긴장해?”“나도 모르겠어. 그냥 긴장되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우리 가게 오픈해서 지금까지 이렇게 큰 고객을 상대하는 건 처음이잖아. 만약 이번에 치료를 제대로 못 하면 우리 밥그릇을 잃을지도 몰라.”나는 손을 들어 민우의 이마를 튕겼다.“다른 사람은 나 안 믿어도 되지만, 너도 나 안 믿어?”“아니. 널 안 믿는 게 아니라 연 선생님 신분이 워낙 특수하잖아. 난 그렇게 대단한 분과 교류해 보는 거 처름이야.”나는 민우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한의관을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 다 만날 텐데, 너처럼 담력이 없으면 앞으로 장사 어떻게 해? 난 앞으로 상류층 고개만 받을까
서윤기는 겉으로 보기에 친절해 보이지만 속내는 검은 인간이다. 심지어 지금까지 나한테 당한 걸 속에 두고 있다.서윤기가 볼 때 자신은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본 사장님인데, 나같이 아무것도 아닌 사회 샛내기한테 당했으니 분명 마음이 안 좋을 거다.때문에 내가 지금 고개를 숙인 건 서윤기의 용서를 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우월감만 더해주는 셈이다.서윤기는 이런 방식으로 나를 찍어 누르고 나한테 자기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역시나 내 생각은 거의 들어맞았다.서윤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봤다.“전에 기회를 줄 때 소중히 여기지, 지금은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아. 어때? 못 버티겠지? 그게 맞는 거야. 이제 시작이야. 더한 건 아직 뒤에 남았어.”“장사하고 싶지? 내가 못 하게 할 거야. 이건 나를 건드린 벌이야.”서윤기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나는 그의 눈빛에서 욕망과 통제욕을 보았다.서윤기도 처음에는 정 사장님과 마찬가지로 국민을 위해 생각했다지만, 결국 스스로 이익이라는 늪에 빠지게 되었다.지금의 서윤기는 눈에 이익과 돈, 그리고 남을 통제하려는 욕구만 남아 있었다.이럴 때마다 나는 정 사장님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항상 초심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그건 아주 위대한 일이다. 그런데 정 사장님은 그 위대한 일을 하고 있다.이 세상에 아마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나는 빙그레 웃으며 일어섰다.“가르침 고마워요. 그럼 난 이만.”목적에 도달한 나는 더 이상 서윤기와 마주 앉아 연기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너무 힘들고 재미없었다.찻집에서 나와 천수당에 돌아오니 현성도 얼마 뒤 돌아왔다.나는 다급히 물었다.“그 영감 반응 어땠어?”“내가 그 영감한테 네가 서윤기 사촌 동생이라고 했더니 믿더라.”‘좋았어.’이제 우리 계획대로 또 한 발 나간 셈이다.‘서윤기, 네가 언제까지 날뛰나 두고 보자고.’한편, 주광덕 즉 우리가 늘 말하던 영감은 나와 서윤기의 사이를 확인한 뒤 불안
손태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오늘 오후 두 시, 연 선생님이 협회에서 기다릴 거예요.”“네. 제때 도착할게요.”나는 직접 손태진을 배웅했지만, 손태진의 태도는 여전히 차가웠다.손태진이 떠난 뒤 우리 셋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너무 잘 됐다. 연 선생님 팔목만 치료하면 우리는 연상철 화백이라는 인맥이 생기는 거잖아.”“연 선생님은 서화협회 협회장이라 인맥도 넓을 텐데.”민우는 잔뜩 흥분해서 보충했다.“지난번에 보니까 서화협회에 있는 분들 모두 어르신이더라고. 그 나이가 되면 몸에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야.”“와. 만약 연 선생님 팔목을 치료한다면 우리 가게 다시 살아날 수 있어.”현성도 함께 감탄했다.그때 나는 두 사람을 일깨웠다.“이 일은 비밀로 해야 해. 우리 가게 직원들한테도 말하지 마. 안 그러면 누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연상철은 아주 최상급 고객이기에 가게를 방문하는 횟수가 적어도 필요할 때 분명 큰 금액을 쓸 수 있다.이렇게 우질 고객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적들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돈을 버는 거다.“됐어. 난 찻집에 가 볼게.”연상철과의 약속은 오후로 잡혔기에 나는 우선 서윤기 일부터 처리하기로 했다.민우는 내가 뭐 하러 찻집에 가는지 몰랐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내가 찻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윤기가 나타났다.나는 이미 주문한 차를 서윤기에게 건넸다.“이 집 차 괜찮던데, 마셔 봐요.”서윤기는 내 앞에 앉았다.“빙빙 돌리지 말고 말해. 무슨 일로 찾았는데?”“서 사장이 나 엿 먹인 것도 내가 화 안 냈는데. 왜 본인이 도리어 화내실까?”나는 서둘러 본론을 말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다.우리 맞은편 가게는 비록 요즘 장사에 타격받았지만, 여전히 손님이 많아 영감은 이 시간쯤 가게에서 바삐 보내고 있을 거다. 때문에 나는 현성에게 충분한 시간을 줘야 했다.내가 고른 자리는 마침 맞은편 가게가 보이는 자리였다. 나는 이곳에서 현성의 신호만 기다리면 된다.“하
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안 될 거 뭐 있어요? 거래할 건 없어도 정은 남아 있잖아요. 파트너는 못해도 친구는 할 수 있죠.”서윤기는 콧방귀를 뀌었다.[난 네놈이랑 친구 못해!]“너무 극단적으로 얘기하지 마요. 적어도 마지막 선은 남겨 둬야 나중에 너무 껄끄러워지지 않죠. 사실 할 얘기가 있는데, 만나서 얘기할래요?”[관심 없어.]서윤기는 단호하게 거절했다.나는 서윤기가 이런 태도로 나올 거라는 걸 진작 알았다. 나한테 당한 게 있으니 기분 안 좋은 것도 당연했다.“사업에 관한 얘기인데, 정말 싫어요? 당신 같은 장사꾼들은 모두 이익이 우선이잖아요. 언제부터 감정적으로 굴었다고 그래요?”나는 여전히 침착하게 말했다.서윤기는 한참 고민하더니 결국 말을 바꾸었다.[주소 보내.]“당신이 이끌어주는 가게 맞은편에 찻집이 있어요. 그곳에서 기다릴게요.”나는 일부러 그곳을 약속 장소로 잡았다. 목적은 바로 그 영감이 나와 서윤기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게 하기 위해서였다.서윤기는 흔쾌히 동의했다.[알았어. 바로 갈게.]서윤기와 약속을 한 뒤 나는 현성을 찾았다.“내가 서윤기랑 약속 잡았어. 저 가게 맞은편에 있는 찻집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이따가 방법을 대서 우리가 함께 있는 걸 영감이 보게 해.”“알았어.”나와 현성이 얘기하고 있을 때 민우가 걸어 들어왔다.“둘이서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아무것도 아니야. 무슨 일이야?”민우는 그 말에 기분 좋은 듯 나에게 달려왔다.“서화협회의 손 선생님이 찾아왔어. 너를 만나고 싶대.”이건 참으로 의외의 수확이었다.얼른 로비로 나가 봤더니 손태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나는 예의 있게 먼저 손태진에게 인사했다.“손 선생님, 어쩐 일로 직접 오셨어요?”“연 선생님이 시켜서 왔어요. 연 선생님이 수호 씨에게 기회를 한 번 주겠대요.”사실 손태진이 이곳에 나타난 순간 나는 연상철의 뜻을 대충 짐작했다. 하지만 그걸 손태진 입으로 직접 들으니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언제쯤 편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