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장의 수가 놓인 화려한 곤룡포가 명덕전 대리석을 쓸고 지나갔다. 명덕전 황색 비단이 살짝 흔들리고, 용이 조각된 기둥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황실의 기세와 위엄을 드러냈다. 황제의 용상은 지척에서 조용히 우문호와 원경릉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황제와 황후가 들어서자 문무백관들과 귀빈들은 순서에 따라 명덕전으로 들어와 예부 관리의 지휘 아래 여러 차례 무릎을 꿇었다.우문호는 원경릉의 손을 잡고 황제의 보좌 앞에서 곤룡포를 펄럭이며 몸을 돌리자, 과거에 친구였든 신하였든 지금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군신의 예로 알현하고, 삼궤구배(三?九拜)로 절하며 큰소리로 만세를 외쳤다!우문호는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보위에 오른 기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고, 오직 황제와 신하의 경계가 분명함만 느껴질 뿐이었다. 원경릉은 그런 우문호의 손을 꼭 잡고 힘을 실어주었다.우문호는 덕분에 한껏 감정을 추스릴 수 있었다. “일어서..라!”하지만 목이 메인 것은 참을 수 없었다. 그러자 문무백관들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주 재상이 책봉 성지를 선포하는데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으므로 연호를 경초로 바꿔 우문호는 경초제가 되었다. 태상황은 성덕대인무상황이 되고, 명원제는 지성효성태상황이 되었다. 황귀비는 의덕모후황태후으로 봉서궁을 하사받았으며, 주 황후는 경민성모황태후로 황실 별장을 하사받았다.적귀비는 귀태비로 성모황태후와 함께 별장에 살도록 했다.손왕과 위왕의 어마마마는 자안귀태비로, 나머지 명원제의 비빈은 전부 태비로 봉했다. 이에 죽은 나귀빈도 아홉째 순왕의 어마마마이기에 나태비로 추존되었다.현비는 경유황태후로 추존되었는데 경유의 시호는 우문호 자신이 직접 붙인 것으로 현비가 경외함과 유순함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명덕전에서 원경릉을 북원황후로 책봉했는데 이 봉호도 우문호가 직접 붙인 것으로 북당 황제의 원황후란 뜻이었다. 원은 정실이란 뜻도 있고 황제의 유일한, 단 하나의 황후란 뜻도 있었다. 그렇기에 내일 거행될 황후 책봉례와 동시에
효성 태상황의 인생이 드디어 새로운 궤도에 접어들어 다른 삶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원씨 집안 네 식구도 명덕전 밖에서 소름이 쫙 끼치며 이 행사를 가만히 지켜봤다.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린 그 사람이 그들의 손자사위이자 사위이고, 매부이기에 이 자긍심은 그들이 어디 있더라도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성루에 횃불이 계속 비췄고 저녁이 되도록 불꽃은 계속 타올라 백성은 너도나도 거리로 나와 축하대열에 참여했다.즉위식 당일 저녁 연회는 다음 날 저녁으로 미뤄졌는데 내일이 바로 우문호가 고대하던 황후 책봉례를 진행하기 때문이었다.그렇기에 오늘 밤 우문호는 여전히 동궁에 머물렀다. 궁에서 더는 황후의 궁과 황제의 침궁을 나누지 않았다.방덕전을 소월궁으로 명칭을 바꾸어 앞으로 이 소월궁이 두 사람의 침궁이 된다.소월궁은 이미 모든 것을 새것으로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새 용봉 이불에 여기저기 붉은색으로 ‘기쁠 희’자 를 붙여놓아 어느 모로 보난 신방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효성 태상황은 황제 부부에게 인사를 올린 후 매화장으로 옮겨 오늘 밤은 젊은 남녀가 광란의 밤을 보낼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하지만 효성 태상황 생각은 틀렸다. 광란의 밤이 아니라 늙은 이목이 쏠린, 무상황을 필두로 한 노인 남자들이 유례없는 열정을 뽐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황후 책봉례와 혼례 준비에 큰 행사부터 작은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조사하고 확인했다. 특히 내무부가 준비한 용봉 화촉은 반드시 바꿔야 한다며 제일 큰 걸로 바꿨다. 신혼 초야의 화촉은 꺼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원경릉은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동서들이 내명부 부인 등을 데리고 와 동궁을 물 샐 틈 없이 둘러싸는 바람에, 원경릉은 화장할 때 엄마가 가져온 화장품을 썼는데 아주 고급이라 내명부 부인들이 보더니 이구동성으로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며 집에 하나 두어야겠다고 했다.원경릉은 그저 자신의 대모께서 가져오셨
여럿이 원경릉을 부축해 일으킨 뒤 기다란 봉황의 꼬리를 드리우고 한 바퀴 걸어보는데 안풍 친왕비가 들어와서 원경릉을 자세히 보더니 칭찬을 건넸다. “정말 예쁘다!”모두 예를 취하며 안풍 친왕비를 맞이했다.안풍 친왕비는 손에 든 비단 상자를 원경릉에게 건넸다. “두 사람이 혼인하는데 나도 뭔가 선물하고 싶었어. 근데 마땅한 게 없더라고. 이 귀걸이라도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원경릉이 감사히 받으며 비단 상자를 열었는데 상자 안에는 한 쌍의 이쁜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모두 다가와서 보더니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안풍 친왕비의 걱정과 달리 정말 예뻤다. 한 쌍의 물방울 다이아몬드 귀걸이로, 물방울 다이아몬드가 보기 드물게 컸다. 가운데에 놓여진 다이아몬드는 물방울 모양이나 백금 조각이 복사꽃 모양으로 빙 둘려 있었다. 귀걸이가 마치 복숭아 같은 모양처럼 생겼는데, 빛에 비추어 보면 다이아몬드가 휘황찬란하고 옆에 조각은 같이 빛을 반사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을 타고 복사꽃이 흘려 내려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이 물방울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원경릉의 오늘 메이크업과 매우 잘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이 귀걸이를 하고 가면 정말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하지만 원경릉은 한번 보더니 귀걸이를 얼른 안풍 친왕비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전 받을 수 없어요. 이건 너무 귀한 거잖아요..”안풍 친왕비가 귀걸이를 꺼내 들고 상자를 냅다 버려 버리더니 원경릉을 앉혔다. “앉아, 내가 해 줄게.”“그…. 그건 안 돼요. 이건 정말 너무 귀해 보여요.. 왕비 마마께서도….” 원경릉은 안풍 친왕비 본인도 부유하게 살지 않고 동가식서가숙하면서 지내는데, 이 다이아몬드는 가치만 해도 상당해 보였다. 만약 현대라면 순도가 이렇게 높고 흠이 없는 다이아몬드를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답게 세공하려면 20억 아니 200억이 들 정도였다. 원경릉은 보석 업계에 대해 모르지만 대충 들은 게 있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안풍 친왕비는 굴하지 않고 원경
하지만 원경릉은 여전히 이 귀중한 선물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은 가격을 모르지만, 자신은 대략 알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수십 수백억의 가치라 원경릉은 차마 받을 수 없었다. “왕비 마마, 혼례를 마치고 귀걸이는 돌려 드릴게요.”“가져, 농담이 아니라 이 귀걸이는 두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야. 앞으로 황제와 황후가 마음을 합쳐 북당을 잘 다스려준다면 내게 있어 그 가치가 천 쌍의 귀걸이보다 더 클테니까.” 안풍 친왕비가 힘차게 말했다.“원 언니, 그냥 받으세요. 이건 왕비 마마의 성의니깐요.” 원용의도 이 귀걸이가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거라는 것을 알고 옆에서 말을 보탰다. 원경릉이 가지면 자신은 한 번씩 와서 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았다. 모두 원경릉에게 받으라고 권하는 바람에 결국 진심으로 감사하며 진귀한 귀걸이를 받겠다고 했다. 웃어른이 준 결혼 선물을 무르면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길시가 되었다.우문호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와서 신부를 맞이했다. 원래 친영례는 생략할 수 있는 절차였으나 우문호가 하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려 결국 친영례를 하게 되었다.붉은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원경릉이 나가자 사람들의 물결이 인산인해를 이뤄 환호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컸다. 원경릉은 마치 구름을 밟듯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왔다. 우문호가 큰 손을 뻗어 원경릉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넣고 원경릉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같았는데 사람들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특히 제왕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누가 보면 제왕이 혼인하는 줄 알 정도였다. 원경릉은 수 많은 사람들 중 자신의 아이들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붉은 면사포가 덮여 있어 아이들을 보지도 못하고 대열을 따라 앞으로 걸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천지에 절을 올리는 곳은 천문궁으로, 원경릉은 전에 한두 번 와본 적 있었지만, 붉은 양탄자가 문 앞까지 깔려 있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원경릉은 우문호의 손에 이끌려 앞
천지에 절을 올리는 예식을 마친 뒤 원래는 신방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누군가 황후를 책봉하는 성지를 펼쳤다. 우문호는 원래 이렇게 줄 생각이 아니었다. ‘도대체 누가 저 사람 손에 줬어?’화가 나서 고개를 들어 책봉 성지를 건네는 손을 붙잡고 크게 소리쳤다. “너 이 손….”손의 주인은 다름 아닌 무상황이었다.그 순간, 장내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모두의 눈빛이 우문호와 우문호가 잡은 손을 바라봤다.우문호가 어색하게 손을 놓았다. “황조부!”무상황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 책봉 성지는 얘한테 주는 거 아니었어?”“당연히 원 선생에게 주는 거죠.” 우문호가 말했다.“그런데 왜 막아?” 무상황이 물었다.우문호는 어금니가 다 욱신거렸다. “안 막았습니다.”‘너무 아무렇게나 주잖아. 이렇게 아무렇게나 줘도 돼? 이렇게 주는 게 무슨 의식이냐고.’“그럼 됐어, 원이니 받아. 앞으로 네가 다섯째의 황후다.” 무상황이 함박웃음을 지었다.원경릉이 받아 들고 약간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예식이 정신없었으니 우문호도 화가 났었겠네.’그러든 말든 무상황은 즐거웠다. 다섯째의 혼례를 자신이 주관했고, 다섯째의 황후도 자신이 책봉하게 도와줬다. 더불어 황제와 황후의 예식도 마쳤겠다, 효성 태상황도 황제와 황후의 절을 받았으니, 몸을 뺄 적절한 타이밍이다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은 것이 혼란한 틈을 타 빠져나가려 했다. 태감은 효성 태상황의 가마가 움직인다고 고함을 질렀으나 징 소리와 북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하고, 덕분에 효성 태상황은 매끄럽게 궁에서 떠날 수 있었다.그러나 안왕이 지켜보더니 아바마마의 병색도 전혀 위중해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여기며 따라갔다. “아바마마….”효성 태상황이 안왕을 보고 말했다. “너 마침 잘 왔다. 아바마마를 매화장까지 보내 다오.”안왕이 놀라서 대답했다. “아바마마 오늘 가시게요?”“오늘 갈 거야, 이미 준비도 다 했어. 구사가 나서서 호송할 필요 없으니, 네가 해. 과인
일행이 탄 마차가 성을 나가자 규정에 따라 드나드는 사람을 검사를 해야 했다. 마차의 가리개를 젖히고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한 수문장들이 전부 무릎을 꿇고 효성 태상황이 성문을 나서는 것을 배웅했다.다행히 뒤를 돌아보는 효성 태상황의 눈가에 뿌듯함과 따스함이 배어 나왔다.안심이다!궁에서는 목여 태감이 매화장 방향을 향해 무릎을 꿇고 세 번 절을 올린 뒤 눈물을 흘렸다. ‘태상황 폐하, 안심하세요. 황제 폐하를 기필코 잘 모셔서 태상황 폐하를 근심시키지 않겠습니다.’밤이 되자 젊은이고 노인이고 전부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셨다. 새로운 황제의 축하연이 드디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성루에는 횃불이 타오르고 백성들의 경축 행사도 최고조에 이르러 이리 나리와 경조부가 복지 차원으로 경성의 모든 집에 고기를 한 근씩 나눠줬다.성 밖에는 죽 배급소를 설치해, 새로운 황제와 황후의 혼례를 경축하는 의미로 앞으로 사흘간 쉬지 않고 만두와 뜨거운 죽을 나눠주었다. 처음엔 다들 황제와 황후가 벌써 혼인을 한 사이라 황후 책봉식은 그냥 의식에 불과하다고 여겼으나, 경조부와 이리 나리가 복지 혜택을 집집마다 누리게 한 결과 온 거리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비록 혼례식은 혼란스러웠으나 궁중 피로연은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연회석에 맞춰 앉아 술잔이 오가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해 연회는 한 시간동안 계속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둘 취해갔다.무상황도 거의 취할정도로 마셔서 주디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았지만, 오늘 밤만은 그도 겁나지 않았다. 이렇게 경사스러운 날 주디가 말리면 그건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무상황은 옆에 있던 소요공을 부여잡고 딸꾹질하더니 홍시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십팔매, 나이 들어도 누가 잔소리해 주는 게 좋네 좋아.”소요공이 눈에 불을 켜며 무상황을 밀치더니 쩌렁쩌렁 울리게 말했다. “과음하셨어요. 폐하는 무상황이신데 누가 폐하께 잔소리합니까?”무상황은 여성스럽게 손짓하고 배시시 웃었다. “그런게 있어,
새로운 황제가 보위에 오른 후 무상황 일행은 숙왕부로 다시 이사를 가, 그들의 불타는 노년 라이프는 계속되었다.원경릉 부모는 이곳에서 한 달여 시간동안 머물었는데, 원경릉은 그들을 데리고 많은 곳을 놀러 다니며 북당의 풍토와 사람, 북당의 수려한 풍광을 누리고 견문을 넓혀드리기 위해 애썼다. 그들은 돌아갈 때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경호가 뚫려 있어 또 만날 기약이 있으니 안심했다.원경주는 현대에서 준비해 온 카메라로 혼례 전 과정을 몰래 찍었는데, 나중에 두 사람이 보고 싶을 때마다 보기 위해서였다.우문호는 역시나 좀 바빠졌다. 역시 등극 초기라 처리할 일이 많았지만, 매일 밤에 시간을 내서 아이들과 같이했고, 솔직히 말하면 태자이던 시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그때와 비교하면 원경릉이 우문호보다 바빠졌다. 원경릉은 할머니를 도와 의료 개혁을 진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의료 개혁은 우문호가 보위에 오른 뒤 시행하는 주요 정책으로 의료의 중요성은 의식주에 버금가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의료 개혁에는 선결 조건이 있었다. 바로 국력이 충분히 강해야 한다는 것으로 경제도 확실히 손에 잡히는 결실을 거두도록 진행해 나갔다.그래서 우문호는 이리 나리한테 눈을 돌리게 되었다. 냉 재상 등과 상의하자 이리 나리가 호부시랑직을 맡았으면 하고 관리들이 건의했다. 호부는 국가 재정을 맡아 지금 이미 상서가 있고 두 명의 시랑이 있는데 우문호는 세분화해서 이리 나리에게 경제 활성화 부분을 담당시키려는 것인데, 까놓고 말하자면 이리 나리의 사업수완을 빌어 나라 경제를 활성화하려는 것이다.하지만 이것도 여의찮은 것이 이미 이리 나리는 여러 개의 직책을 겸한 데다 조정에 도움을 주는 일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단 호부시랑직을 맡으면 막대한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기에 곤란해지고 만다. 나라의 관리는 장사를 할 수 없다는 조정의 규정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이리저리 머리를 굴린 끝에 우문호는 이리 나리를 궁으로 오라고 한 뒤 세세한 얘기를 나눴다. 바로 호부 시랑으로
이리 나리의 시종이 평범한 시종일 거로 생각한 건 아니겠지? 늑대파 정예 중에 선발한 무림의 고수로 이리 나리 시종은 출궁하자마자 말을 타고 목여 태감을 멀찍이 떨어뜨렸다. 목여 태감은 따라잡지 못할 것을 알고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방향을 바꿔 말을 달렸는데 바로 혜민서로 황후를 찾아갔다.공주가 이 북당에서 누구 말을 제일 들을까? 그야 당연히 황후이다.이리 나리의 시종이 제아무리 빨리 가서 문을 다 걸어 잠가도 황후가 가는 이상 열지 않을게 분명했다. 목여 태감은 먼저 혜민서에 도착해 원경릉에게 상황을 전해주었는데, 황후가 된 지 3개월 된 원경릉은 이전처럼 바깥을 다니는 게 익숙해서 가만있지를 못했기에 우문호와 일심동체로 나라와 관련된 일이란 소리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 내가 가서 얘기할게.”이리 나리는 현재 장사의 대부분을 사람을 시켜 살피게 해 정작 본인은 한가했는데, 꿀벌처럼 바빠야 사람들이 보기에 나라가 융성하고 발전하고 있음을 실감할 것이므로 그가 조정 일을 하는것에 원경릉은 특히나 찬성했다. 원경릉이 바라는 의료 개혁을 이루려면 경제적 중흥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이었다.궁에서 바둑을 두던 두 사람도 품은 마음이 각각 달랐다. 우문호는 자기가 승기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리 나리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숨겨져 있는 것이 그윽한 눈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문호는 이리 나리의 표정을 보고 왠지 작전에 걸려든 건 자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조건을 놓고 보면 그럴 리 없었다. 령이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고, 이리 나리는 령이가 동의하면 하겠다고 했으니 이 일은 분명 자신이 이긴 셈이었다.‘그런데 이리 나리의 저 웃음은 대체 뭐지?’한 편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한 편으로는 바둑판에서 대마를 포위해 이리 나리를 연속으로 몰아붙였다. 이리 나리를 깨끗하게 다 털어버린 줄 알았는데 역습을 당해버려 우문호는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이었다.“폐하 지셨습니다!” 이리 나리가 여유만만하게 찻잔을 들고 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냉정언이 물었다. "그렇다면 어찌 의원을 부르지 않은 것이냐?" 역 일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돈이 없다고 하셔서 해열에 좋은 약초를 조금 달여주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의원을 부르고 진료하고 약을 짓는 데에는 모두 돈이 필요했지만, 역에서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예산이 따로 없었다. "오계부의 부승이 상경하여 직무를 보고하러 왔는데, 돈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냐?" 냉정언이 놀라서 물었다. "나리께서 돈이 든 보따리를 도둑맞았다고 하셨습니다." "혼자 온 것이냐?" 냉정언이 물었다. "예. 관속이나 아전도 없이 혼자입니다." 경성과 꽤 멀리 떨어진 오계부의 부승이 그 먼 길을 수행 인원도 없이 홀로 와, 직무를 보고하는 것은 꽤 이상한 일이었다. 원경릉이 말했다. "내가 확인하겠소." "부인께서 의원이십니까?" "그렇다. 길을 안내하거라." 원경릉이 답했다. 역 일꾼은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북당에서는 여인이 의술을 익히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황후가 의학원을 세운 이후, 해마다 여인들이 입학하여 의술을 배우고 있었다. 우문호가 미색을 돌아보자, 미색이 바로 입을 열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원경릉은 약상자를 챙겨 들고, 역 일꾼의 안내를 받아 한 객실로 향했는데, 문이 세게 잠겨져 있었다. 일꾼이 문을 두드렸다. "제 대인, 제 대인. 의원께서 오셨습니다. 문 좀 열어주십시오." 하지만 방은 일꾼의 부름에도 여전히 잠잠했다. 이내 기침 소리가 들려왔고, 한참 기침을 하다, 쇳소리 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마." 말이 끝나자, 침대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솜으로 만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린 채, 핏발이 선 눈만 드러낸 관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피곤하고 지친 모습으로 문턱을 잡고 서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른 뒤
이번 순행에 서일이 동참하면서 사식이도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러나 고된 여정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기엔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원가에서 사식이가 서일과 함께 순행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원가는 서일 부부가 3년이든 5년이든 돌아오지 않더라도 아이를 잘 돌보겠다고 약속해주었다. 그 역시 아이들과 떠들썩하게 지내고 싶어 했던 터라 기뻤다.탕양도 순행에 참여했으나, 그의 부인은 맡은 직책이 있어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미색 또한 당연히 회왕을 따라갈 예정이었으나, 오랜만의 외출인 만큼 아이를 데리고 간다면 재미가 없을 테니, 아이를 데리고 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그녀의 시어머니인 태비도 흔쾌히 아이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이제 아이도 다 컸으니 힘들게 돌볼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그렇게 모두가 신나게 순행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원경릉은 순행을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숙왕부의 노인들이 걱정되었다. 비록 삼대 거두는 여행을 떠난 상황이긴 하지만, 숙왕부에는 아직 흑영 어르신들이 계셨다. 그리고 안정을 찾은 추 할머니마저 지속해서 약을 복용해야만 했다. 온갖 걱정에 흽싸인 원경릉 때문에 오히려 원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성가시다고 느꼈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그냥 편히 놀러 가면 되지, 뭘 그렇게 걱정하냐? 내가 있지 않느냐?"그 말에 원경릉은 할머니를 껴안으며 웃었다."맞아요. 제가 몸이 열 개라도 할머니는 못 이길 테니까요!"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원경릉이 비록 황후라고 해도, 숙방부에서의 위세가 그리 대단하지는 않았다.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때는 바로 주사기를 꺼낼 때 뿐이지만, 원 할머니는 달랐다. 그녀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빛 하나만으로 모든 사람을 제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최근 몇 년 사이, 그녀의 성격이 점점 난폭해져서, 틈만 나면 사람을 끌고 가서 주사를 놓았다. 원 할머니가 손수 만든 약이 한가득 담긴, 원경릉의 약상자에는 없는 귀한 약들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 약들은 수토불복, 고
조사가 끝난 후, 목을 쳐야 할 자는 목을 치고, 옥에 보내야 할 자는 옥에 보냈다. 그리고 오씨가 챙긴 돈은 전부 피해자 가족들에게 배상되었다.우문호는 신하들 앞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했다. 그는 탐관오리를 금지하고 청렴을 장려하는 법을 내렸으며, 부정부패 전담 조사 관아를 설립해 전국을 조사하라 명했다. 부정부패를 근절해야 백성들이 잘 살 수 있다고 강조했다.동시에 그는 신하들의 봉급 인상을 제안했다. "예전엔 나라가 가난해 관리들의 봉급이 적었지만, 이제는 나라도 번영하고 산업이 활성화되었으니 함께 잘 살아야 할 때다." 봉급을 높이면 부정부패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덧붙였다.조회가 끝난 후 우문호는 수보와 친왕들을 불러 오래 전부터 품어온 생각을 털어놓았다."과인은 순행하고자 하오!"나라가 태평하지만 황제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는 곳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왕과 태자 시절에는 백성들의 고통을 잘 알았지만, 지금은 점점 백성과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직접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보고 싶었고, 공무를 핑계로 원 선생과 북당 전역을 둘러보고 싶었다.냉정언이 적극 찬성하며 말했다."상소문만으로는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은폐된 사실, 억울한 사건, 고통받는 백성들을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옳은 말이네." 우문호는 최근 냉정언의 말이 마음에 들었다.그러나 냉정언이 갑자기 태도를 바꿨다."하지만 아직 각지에 위험한 도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폐하의 안전을 위해 소신이 대신 가는 것이..."그러자 우문호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수보의 말도 일리 있지만, 참 뻔뻔하구먼!" 그러고는 어명이 적힌 서찰을 건네며 덧붙였다."함께 순행할 명단이니 반포하시게!"냉정언은 자기가 제외될 줄 알았으나 명단에 자신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소신도 갈 수 있습니까?""가시게. 국정에 큰일이 없으니 내각에서 처리할 수 있네. 새로 양성한 인재들의 능력을 시험해볼 기회이기도 하고.""상산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