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잘못을 알았으면 됐어!” 원경릉이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그럼 앞으로 초왕부에서 탕 대인과 냉 대인께 도리를 잘 배우고 익히자. 앞으로는 쉽게 잘못을 범하지 않으면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도 여전히 예전처럼 널 귀여워 하실 거야.”십황자는 목이 메였다. “저 진짜 나쁜 아이가 되지 않을 거예요.”원경릉이 십황자의 눈물을 닦아 주며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자기 말을 기억했다가 앞으로 나쁜 짓하지 말고 다시는 제멋대로 굴지 말자.”“알았어요!” 십황자가 엉엉 울며 답했다.원경릉이 십황자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울지 마. 초왕부에 도착했는데도 또 울면 만두랑 애들이 놀릴 거야.”십황자는 얼른 눈물을 닦고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초왕부에 도착해 십황자는 만두와 애들을 보고 좋아서 같이 노느라, 방금 마차에서 울었던 건 완전히 잊었다. 건망증은 아이들 고유의 특성으로 슬픔도 다를 게 없었다.한편, 손왕은 늦은 시간에 몰래 초왕부에 들렀다. 문을 들어서자마자 탕양이 보이자, “우리 아내 여기 없나?”라고 하며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탕양이 의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손 왕비 마마는 오늘 안 오셨는데요. 왕야, 손 왕비 마마를 찾으십니까?”손왕이 그제야 안도하더니 허리를 꽂꽂이 세웠다. “태자비는? 태자비를 찾아왔다네.”“태자비 마마는 계십니다. 들어가서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바로 말씀 올리겠습니다.”원경릉이 막 십황자를 자리 잡아 준 뒤로, 탕양에게 손왕이 왔다는 말을 듣고 마음 속에 미묘한 의심이 들었다. “손왕 전하께서? 무슨 일로 오셨대?”“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럽게 들어오시더니 제일 먼저 손 왕비 마마께서 계신지부터 물으셨어요.” 탕양이 답했다.“그럼 아마 관아에서 바로 오셔서 아직 집에도 가지 않으신 것 같은데. 둘째 형님이 여기 계시다고 생각하시는 걸 보니… 됐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내가 직접 가서 볼게.”손왕은 본관에서 원경릉을 기다리다가 그녀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얼른 탕양에게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원경릉이 청진기를 내려놓고, “아주버님, 혹시 위가 안 좋으신가요?”“위는 문제 없다. 소화는 잘 돼!” 손왕이 절박한 눈으로 원경릉을 보더니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제수씨, 문제를 찾아냈어?”원경릉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어디가 불편하신지 말씀을 하셔야지 알 수 있어요.”손왕이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됐어, 이렇게 아프다 죽으면 그만이지, 뭐.”말을 마치고 벌떡 일어나더니 돌아섰다.그러자 원경릉이 다급하게 불러 세웠다. “아주버님, 도대체 어디가 불편하신 거예요? 저희 사이에말씀하지 못하실 게 뭐가 있어요?”“말 안해, 안 한다고. 짚어내지도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말해?” 그러고는 울적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밖으로 나갔다.손왕은 올 때도 의심스러웠는데 갈 때는 더 의심스러웠다. 원경릉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왕이나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탕양도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야의 행동을 봐서는 중병에 걸리신 것 같지는 않습니다.”“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내일 손 왕비에게 물어봐야겠구나!” 원경릉의 머릿속에는 온통 물음표로 가득찼다.“하지만 왕야께서 방금 오셨을 때 손 왕비 마마께서 여기 계신지 부터 먼저 물으셨던 것으로 보아 손 왕비 마마께서도 모르실 것 같습니다.”원경릉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정말 너무 이상해. 어디가 불편하시냐고 물어도 말씀도 없으시고, 그저 맥을 짚어보라고만 하질 않으시나. 내가 정말 신의라도 되는 줄 아시는 건가?”그러자 탕양이 잠시 생각해보더니 물었다. “그게.... 혹시 은밀한 곳이 불편하신 건 아닐까요?”원경릉이 뜨아했다. 방금 손왕의 거동을 돌이켜보니 그럴 가능성이 충분했다.하지만 만약 거기가 불편하면 손 왕비가 분명 알 것이다.다음 날, 원경릉은 손왕이 있는 확실한 시간대에 사람을 시켜 손 왕비를 편청으로 오라고 했다. “둘째 아주버님이 어제 밤에 오셨어요. 저한테 병을 좀 봐달라며 불편하다고만 하
그러자 손 왕비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답했다. “정상 비정상이 어디 있어? 오래된 부부한테.”그러고는 한참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 그이가 혹시 뭐라고 했어?”원경릉이 웃으며 답했다. “절 찾아오셔서 병을 봐달라고 하시는데 죽어도 자기가 어디가 불편한지 말씀을 안 하시니… 제가 그냥 넘겨짚어 본 거예요. 자기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낫고 싶은 신체의 질병이 뭘까하고요.”손 왕비가 곤혹스러워했다. “치료 하고 못하고가 뭐가 중요해? 오랜 세월 내내 그랬는데, 나아져봤자 바람밖에 더 피워? 역시 치료하지 않는 게 더 낫겠어. 내버려 둬!”원경릉은 전에 손 왕비에게 둘째 아주버님께서 계속 후궁을 맞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남자의 그 기능이 좀 약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한동안 그래왔는데 갑자기 왜 치료할 생각을 하셨는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마음에 드는 여자라도 생긴걸까?전에는 관공서에 근무하지 않았기에 만나는 사람도 적었고, 그저 식도락만 알았지, 지금은 몸매나 건강을 중시하는 게 어쩌면 정말 그 문제 때문일지도 몰랐다.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원경릉만의 추측으로 손 왕비에게는 따로 얘기하지 않고 그저 가서 어디가 불편한지 여쭤봐 달라고만 했다. 그래야 조기에 치료할 수 있으니 말이다.하지만 그 후로 손 왕비는 며칠 간 소식이 없었고 손왕도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원경릉도 그 일을 자연스럽게 잊어 버렸다.그런데 며칠 지나서 탕양을 통해 홍려시의 관원 하나가 집에서 목을 메고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원경릉이 대경실색해서 왜 자살을 했는지부터 재빨리 물었지만, 탕양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경조부에서 지금 조사 중이에요.”“그 관원이 홍려시에서는 어떤 직위를 맡고 있었지?” “소경으로, 3품 벼슬입니다. 그래서 경조부에서도 이렇게 중시하고 있고 황제 폐하께서도 성지를 내려, 경조부에서 철저히 조사하고 홍려시 쪽에도 조사에 협조하고 하셨답니다.”3품 관리가 아무 이유없이 집에
이때, 탕양이 제왕을 찾아가 물어보기도 전에 손왕이 허겁지겁 원경릉을 찾아왔다.결국 마침내 사실대로 실토했고, 자신이 그 병에 걸린 것 같다며 원경릉에게 얼른 처방을 해 달라고 했다.원경릉이 이 말을 듣고 왜 이제서야 사실대로 말하냐며 화를 냈다. 속으론 열이 받지만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지금 어떤 증상이 있으세요?”“없어, 아직 별 증상은 없어!” 원경릉의 질시와 분노의 눈빛을 받은 손왕은 고개를 푹 숙였다.원경릉이 손왕을 노려보며 다시 물었따. “그럼 왜 그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죽은 소경과 같이 잤던 여자와 아주버님이 관계를 하신 거잖아요? 어떻게 그럴.... 아니, 관기에게 옮았으면 한 두사람이 아닐 텐데, 왜 단 두 사람 뿐이죠?”손왕이 고개를 들고 사실대로 얘기했다. “난 그 여자들이랑 잔 적 없어. 단지 오소경이랑 같이 청루에서 목욕을 했을 뿐이야. 그 병에 대해서 어의에게 물어보니 같이 목욕을 하면 옮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원경릉이 이 말을 듣고 기분이 확 풀리며 다소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그 여자들이랑 관계 없어요? 그냥 오소경이랑 목욕만 한 거예요?”“제수씨를 찾아 온 그 날이 바로 오소경이 나한테 그 병에 걸렸다고 얘기한 날이야. 그제서야 같이 몇 번이나 목욕한 게 생각났지 뭐야! 목욕으로 그 병이 전염될 수 있다길래 바로 제수씨를 찾아온거고. 제수씨가 맥을 짚으면 병을 옮았는지 여부를 알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오소경이 죽고… 이 병은.... 휴, 요 며칠 몸이 영 좋지 않은 게 뭔가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예방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원경릉에게 당부했다. “이 얘기 절대로 아내한테는 말하면 안돼. 아내는 죽는다고 막 울거야!”원경릉이 답했다. “말 안해요. 그럼 지금은 아무 증상도 없고, 앓고 있는지 확실한 것도 아니고요.단지 목욕만 같이 했을 뿐인 거잖아요. 수건을 같이 쓴 게 아니면… 설마 그랬어요?”손왕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더니 잠시 후
이 병에 걸린 사람들 대부분은 몰래 치료하거나,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아무하고나 계속관계를 한다. 이런 병이 세상에 나도는 날엔 북당은 완전 망할 것이고, 우문호는 아마 펄쩍펄쩍 날뛰고도 남을 것이다.사실 예전부터 관리들도 정리가 필요했다. 주 재상이 물러난 지금까지 내우외환의 여파로 관리를 선발하는 데 소홀했기에 이제 전쟁에서 승리해 시국이 평화로우니 사치와 낭비 풍조가 점점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사치와 낭비의 풍조는 한번 성행하기 시작하면 바로 잡기 위해 뼈를 깎는 아픔을 겪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다. 탕양이 원경릉에게 말했다. “관기는 대부분 죄를 지은 집안의 여자들 중 예쁘장한 사람들로, 관기들을 총괄하는 교방에 들어가면 기적에 오르게 됩니다. 한번 기적에 오르면 황제 폐하의 사면이 없는 한 속량이 안됩니다. 또한 북당의 율례에 따라 관리는 민간이 개설한 기루에 가면 안 되며 단지 관비가 있는 교방의 기방만 출입할 수 있고 기방의 수익도 국고에 귀속됩니다. 조정이 이에 대해 과도한 통제도 하지 않지요.”“그렇다면 조정이 정기적으로 그녀들의 신체를 검사하는 기구가 없다는 말인가?”“예. 보통 없습니다. 교방에서 자체적으로 그녀들의 신체를 검사하는 사람을 따로 두긴 하는데, 병에 걸린 것이 발각되면 노역하는 곳으로 보내져서 다시는 손님의 시중을 들지 못합니다.”“병이 발견됐을 때는 이미 전염이 시작됐겠지.” 원경릉이 미간을 찡그렸다.“그럼 방법이 없어요. 병에 걸린 사람은 기방의 여자로 좌교방(左教坊)은 노래를 담당하고, 우교방춤을 담당하는데 오직 기방만 손님의 시중을 듭니다. 물론 실제로는 이렇게 엄격하게 나눠지지 않아서 대인들의 눈에 들기만 하면 제 아무리 좌우 교방의 관기라 할지라도 가능하지요. 반드시 기방의 관기만 시중을 들 수 있다고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이 병에 걸린 사람이 반드시 기방에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원경릉은 이 분야에 대해 느낀 바가 크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단번에 변화시킬
냉정언은 부득불 원경릉의 할머니를 찾아가 혜민서의 의녀를 기방으로 보냈다. 그리고 의녀들에게 관기들을 검사해 병을 앓고 있는 자가 몇 명인지 확인하도록 했다.이것도 원래 원경릉의 생각으로, 암암리에 의원을 찾아 치료를 하는 한이 있어도 검사에 협조하는 관리는 많지 않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검사 후 할머니는 너무 놀라 소름이 쫙 끼쳤다. 기방의 20여명의 여자나 병에 걸린 것으로 판명되었고, 이 20여명은 모두 이미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몰래 약을 사다가 방에서 좌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냉대인은 자신의 임기에 처음 진행하는 사안이 화류계 병에 걸린 관리를 찾아내는 것일 줄은 꿈에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다행히 교방에 있는 기록에 아가씨들이 시중을 들었던 관리가 하나하나 다 적혀 있었으므로 그 책자대로만 검사하면 전부 찾아낼 수 있었다.그런데… 하필 교방에 불이 나서 책자가 타 버렸다. 물적 증거에 따른 추적조사를 할 수 없으니 아가씨들에게 직접 탐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마치 미리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전부 대인들의 신분을 모른다고 잡아땠다.조사를 더 할래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조사를 그만 둔 냉정언은 조회에서 조정의 관리들을 살벌하게 꾸짖으며, 기방의 여자들과 잔 적이 있는 관리는 신체검사를 받고 만약 병이 있을 경우 반드시 치료해야 한다고 명했다.냉정언이 살벌하게 꾸짖었기에 조정의 누구 하나 감히 반박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치 냉대인의 말에 동조해야 자신은 그런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듯, 오히려 대부분의 관리들이 냉정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원래 이 일은 이렇게 쉽게 끝날 수 있었으나 하필이면 기방의 관기 중 명기로 소문난 취월이가 태자를 모신 적이 있다고 고했다. 그것도 태자 전하를 모신 것이 한 번이 아니라고 했다.이것은 태자가 관련된 일이라 냉정언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고, 냉정언은 물론 믿지 않았다. 태자의 품행이 고결해서가 아닌, 은자를 쓰는 일을 했을 리 만무하기 때
원용의가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는 그런 분이 아니세요. 태자 전하와 원 언니는 연리지와 비익조 같은 부부로 후궁도 들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어요?”“하지만 취월이는 분명히 그랬다고 했어.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취월이가 어떻게 감히 그런 소리를 했겠어?” “그 여자가 어떤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누가 알겠어요?” 원용의가 쌀쌀맞게 말했다. “전 아무래도 못 믿겠어요. 걔가 헛소리를 지껄인 거예요. 내일 걔보고 오라고 하세요. 제가 물어볼게요.”“일단 내일 우선 취월의 신분부터 확인해볼게. 오늘 보니까 외모도 반반하고 약간 거만한 게 아마도 기적에 들어가지 않은 관기지 싶어.”제왕이 말을 멈추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근데.. 이 일을 다섯째 형수님께 말씀드려야 할까? 취월이는 검사 받기 싫다고 해서 병에 걸렸는지 아닌지는 모르거든. 만약 형이 진짜 사고친 거면 형수에게 알려야 하지 않을까? 이 병은 전염 되는데..”원용의가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일단 말하지 마요. 내일 물어보고 다시 생각하자고요!”원용의는 태자가 그런 짓을 했다고 절대로 믿지 않았다.“그래, 그럼 당신 말대로 할게!” 제왕은 고분고분하게 원용의 옆에 앉으며 애교를 부렸다. “난 절대로 그런 여자들 불러서 술 안 마셔. 요즘 나 시간만 나면 바로 집에 와서 당신이랑 우리 애기랑 있잖아. 그런 여자들은 쳐다보지도 않아.”원용의가 삐진척 성을 냈다. “누가 신경 쓴데요? 가고 싶으면 가던지!”제왕이 원용의를 꼭 안고, “안 가, 난 당신 못 이겨.”“저리 가요!” 원용의가 슬쩍 웃으며 눈을 흘겼다. 다음날, 제왕이 관아에 가서 취월의 신분을 조사하자 홍주 지부인 상대천의 딸로 원래 이름은 상호접이었다고 했다. 상대천은 전에 우문군 문하의 신하로 나중에 홍주의 지부로 전근을 갔으나, 우문군이 죄를 지어 화를 당할 때 여자 가솔들은 기적에 올랐고 남자들은 관노비가 되었다.상대천의 자녀들도 죽거나 교방에 보내지거나 노비가 되었다.제왕이 당시에 이 사건을 처리한
제왕은 취월을 제왕부로 데려와 원용의에게 질문 하도록 했다.취월은 제흉유군(치마를 가슴까지 끌어올려 길게 늘어뜨려 입는 옷)을 차려입었다. 허리에는 거의 잿빛이 된 녹색 띠를 둘렀는데, 이 색은 기방 여자 특유의 색으로 반드시 몸에 지니고 있어 양가집 규수들과 구분이 가도록 해야 했다.같은 여자가 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원용의 눈 앞의 취월은 세상에 다시 없을 듯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비단 같은 머리에 이목구비가 아름답고, 흰 피부에 윤기가 돌며 눈과 눈썹은 그려놓은 듯, 입술엔 약간의 오만함이 느껴졌으며, 봉황의 눈매에 흰자가 많은 편이라 고고하지만 차가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한마디로 아름답지만 포악하고 고집이 세 보이는 여자였다. 취월은 일부러 예를 취하지 않고 원용의 앞에 꼿꼿이 서 있었다.“취월이더냐?” 원용의가 물었다.“왕비 마마께서는 벌써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왜 제게 굳이 물으십니까?” 완곡하나 차가운 말투였다. 거드름을 피우며 떼를 쓰는 모습이 전혀 아님에도 원용의는 듣기 불편했다.원용의는 취월과 따지려는 태도를 버리고, “왜 신체 검사를 받지 않느냐?”“병이 없으니, 받을 필요 없습니다!” 취월이 턱을 약간 치켜들고 자신의 고집을 관철하려는 듯 말했다.“손님을 맞은 적이 없느냐?”그러자 취월이 냉소를 지었다. “태자 전하 외에 그런 적이 없습니다.”원용의도 지지 않고 날카로운 말투로 답했다. ”허튼 소리 마. 태자 전하께서 어찌 너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수 있겠느냐?”원용의의 질문에 취월의 낯빛이 순식간에어두워졌다. “왕비마마의 말씀이 듣기 거북합니다. 그렇고 그렇다니요? 전하께서는 절 마음에 들어하셨고 전 신분이 미천하기에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원용의가 냉소를 지었다. “누군가와 이미 말을 맞췄느냐 아니면 협박을 당했느냐?”“기방의 여인이 협박을 당할 일은 없습니다.”“그런데 왜 다른 손님은 없었던 것이지?”취월이 비웃었다. “이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손님이 이 몸뚱이를 마음에 들어하
기다리고 기다리던 택란이 드디어 경성으로 돌아왔다. 우문호는 소월궁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서 목여 태감이 계속해서 설득했다. 그는 공주가 아직 어리니, 노는 것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며, 그저 택란이 다른 어린아이들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한 것뿐이라고 말했다. 목여 태감은 혹시라도 황제가 공주를 꾸짖을까 봐 걱정되어 공주를 감쌌다. 그의 약한 마음은 그런 걸 감당하지 못했다.마침내 택란과 원경릉이 도착했다.우문호는 작은딸이 원경릉의 뒤에 숨어 겁먹은 얼굴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원경릉이 딸의 손을 꽉 잡고 말했다.“가봐라, 아버지께서 기다리신다.”택란은 고개를 숙이고 아버지 앞으로 다가갔다. 우문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자기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바마마, 저 돌아왔습니다.”그러자 우문호는 딸의 손을 잡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뿌리치지도 않았다.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보는 눈빛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약도성에 얼마나 있었느냐?”택란은 거짓말을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솔직히 대답했다.“지난번 여름방학 때 집에 돌아온 후 바로 약도성으로 갔어요.”우문호는 큰 충격을 받았다.“모두가 알고 있었으면서, 나만 속였단 말이냐?”택란은 미안한 마음에 아버지를 껴안으며 말했다.“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안 그러겠습니다!”우문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원경릉이 다가가 말했다.“아이가 자네 선물을 많이 샀소. 한번 보시게.”“필요 없소!”우문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딸을 뿌리칠 마음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속았다는 사실에 너무 힘들었다.원경릉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텐데,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다. 서로 비밀이 없기로 약속했건만, 그 약속이 깨진 것 같아 화가 났다.원경릉은 그의 표정을 보고 더 걱정해야 할 사람이 자기라는 것을 깨달았다.오는 길 내내 택란만 걱정하며 우문호에게 딸을 변호해 주려 했지만, 정작 자신이 그를 속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한 일을 이야기하며 원경릉을 기쁘게 했다.다섯째는 이전에 다섯 개의 성을 위해 적어도 30년이나 50년의 계획이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 20년이 채 되지 않아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나아가 국경 방어뿐만 아니라 조정에 세금을 납부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보였다. 아이들이 현대의 경험을 참고하며 지내는 것이 다섯째의 큰 걱정을 해결해 준 것이었다. 약도성은 이번 지진으로 국고의 돈과 주변 주현의 자원을 사용했다. 북당과 약도성의 백성들의 마음이 끈끈히 묶여 있어 불행 중 다행이었다.중증 환자들이 회복된 후, 원경릉은 택란과 함께 경성으로 돌아갔다.출발하기 전에 비둘기를 통해 다섯째에게 소식을 전하며 심리적 준비를 하도록 시간을 주었다. 이렇게 하면 다섯째가 택란을 보았을 때 마음을 가라앉혀 덜 화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택란은 아버지가 화를 내거나 슬퍼할까 봐 사실 마음속으로 몹시 두려웠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녀또한 잘 알고 있었다.돌아가던 중 택란은 아버지에게 줄 선물을 사자고 제안했다. 원경릉은 딸의 강한 생존 본능에 웃음을 터뜨렸다. 딸이 아버지를 소중히 여기고 있었으니, 다섯째가 딸을 그렇게 아끼는 것이 헛된 일이 아님을 느꼈다.“너희 아버지께서는 특별한 취미가 없으시고, 그저 술 한잔하는 걸 좋아하시니까 좋은 술 몇 병 사 가는건 어떠냐?”그러자 원경릉이 먼저 제안했다.“좋습니다! 사요! 많이 사서 마차에 싣고 가겠습니다!”택란이 급히 대답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섯째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자상한데도 아이들이 그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물론 이는 두려움이 아니라 존경이고 사랑이지만 말이다.경성에서 우문호는 원경릉의 서신을 받자마자 열어보았다. 편지를 읽는 순간 그는 멍해졌다.“계란이가 약도성에 갔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이냐? 그렇게 얌전하던 딸아이가 몰래 약도성에 갔을 리가 없어.”더구나, 셋째와 넷째는
약도성의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백성들은 임시로 지은 오두막과 초가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폐허로 변한 도성은 눈에 보이는 곳마다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원경릉은 마음속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택란의 뜻으로 중증 환자들은 모두 저택으로 옮겨졌다. 원경릉은 계란이의 결정이 매우 옳다고 생각했다. 중증 환자들은 그녀와 몇몇 의원이 책임지고 돌보았고, 나머지 의원은 경증 치료를 맡았다.택란은 엄마 곁에 머물며 환자를 돌보는 것을 도왔는데, 기본적인 의술을 알고 있어서 소독과 붕대 감는 일을 도왔다. 부상자들은 대부분 통증이 심해 참기 어려웠고, 진통제를 먹이거나 진통 주사를 놓았다. 택란도 주사를 놓을 수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쉬지 않고 바쁜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본 환자들은 눈물을 참지 못했다.그들은 궁에서 자신들의 생사를 진정으로 걱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 황후마저 직접 왔으니, 예전의 대립과 적대감은 유치한 웃음거리로 느껴졌다.저녁 무렵, 아이들이 엄마를 찾아왔지만, 이야기를 나눌 여유도 없이 서로 포옹한 뒤 다시 각자 사람들을 구하러 나섰다.백성 중 자발적으로 음식을 만들고 약을 끓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저택 내 물자는 부족했으나 주변의 도움이 끊이질 않았다. 호명은 사람들을 조직해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의 약도성엔 인간의 이기심이 한순간에 사라진 듯했다.황후가 직접 약도성에 온 덕분에 서북 지역의 신하들도 직접 의원과 물자를 이끌고 약도성에 와서 돕기 시작했다.약도성은 전례 없는 관심을 받았고, 이는 약도성 백성들이 다섯 도시 중 가장 빠르게 조정을 인정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구하고 재난 이전의 상태로 빠르게 회복하는 데만 집중했다.재난이 발생한 지 반달이 지나면서 발견된 것은 모두 희생자뿐이었다. 인원을 파악한 후 한곳에 모아 장례를 치렀다.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5만여 명의 백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숫자는 매우 끔찍했지만, 택란의 사전
북당의 황후가 의원을 이끌고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믿지 않았다. 약도성의 백성들조차 믿을 수 없었고, 감히 믿을 엄두도 없었다.우문택란이 이미 약도성에 왔지만, 고작 여덟 살짜리 아이에 불과했다. 다들 그저 그녀가 약도성에 놀러 왔고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고 생각했다. 이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녀의 비범한 능력이 증명되었다. 그녀는 약도성의 성주로서 약도성에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러나 이번 지진으로 약도성은 초토화되었고, 재건하려면 조정이 막대한 인력과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북당의 조정이 약도성을 방치하고 자연적으로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어도 어쩔 수 없었다. 약도성 백성들은 줄곧 조정을 적대시하였기 때문에, 조정이 이들을 구할 이유가 없었다.그런데 황후가 직접 약도성으로 향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약도성은 조정이 이렇게까지 신경 쓸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지진 발생 열흘째 되던 날, 원경릉 황후가 이끄는 의원들이 약도성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낮없이 말을 갈아타며 전력으로 달려왔다. 약도성의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흥분하며 황후께서 약도성에 오신다고 얘기를 전했다.사람들의 생각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지진 이전까지만 해도 조정을 적대시하고 북당을 적국으로 여겼던 약도성 백성들이, 이제는 원경릉을 환영하며 열광적으로 맞이했다. 이는 택란이 지진을 미리 알아차린 것과 구조 활동 덕분이었다.원경릉은 백성들의 뜨거운 환영을 예상하지 못했다. 말을 타고 앞을 바라보니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었고, 그녀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어머니!”군중 속에서 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경릉은 단번에 딸을 찾아내고 말에서 내려 달려갔다. 택란은 엄마 품에 안기자마자 눈물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어머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너무 많아요!"택란이 흐느끼며 말했다.원경릉은 딸이 이렇게 슬프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원경릉은 딸을 품에 꼭 안
택란은 어릴 적부터 화염을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감정을 표정에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는 담담해 보였지만, 그녀는 내면의 감정을 철저히 억눌러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을 제어하지 못할 위험이 있었다. 스승님을 따른 후, 스승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약점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감정의 틈새가 생기면 많은 것을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녀는 항상 냉정한 태도를 유지하며, 모든 일을 담담히 대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진심 어린 감정을 흔들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녀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없었다.꼬마 봉황이 날개를 펼쳐 그녀를 품에 안고 위로해 주었다.그들은 수년간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성장해 왔고, 서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잠시 후, 택란은 다시 구조 현장으로 나갔고, 여전히 평온하고 흔들림 없는 얼굴로 사람들 앞에 섰다.위왕과 안왕은 어린 조카의 침착함에 깜짝 놀랐다. 겨우 여덟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아이의 천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그들은 택란이 애초에 아이로서의 천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태어난 후, 조금이라도 세상을 이해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녀는 빠르게 세상을 이해하며, 지혜롭고 노련한 어른처럼 모든 것을 맞서야 했다.사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그녀를 한두 살짜리 어린아이처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그에게는 아무런 기대나 요구가 없었으며, 능력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어머니처럼 그녀의 모든 행동을 걱정하고 감시하지 않았다.아버지 앞에서 그녀는 가면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약도성의 일이 안정된 후, 그녀는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돌아갈 계획이었다. 이번 약도성 방문은 그녀에게 있어 단순한 놀이가 아닌 실습이었다. 이곳은 그녀의 의지와 감정을 단련할 수 있는 장소였고, 실제로 그녀는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했다.구조 작업은 계속되었고, 지진이 발
한 마을 주민이 눈물을 닦으며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지원 같은 건 절대 없을 것이오. 조정은 우리를 모조리 죽이길 바라오. 우리가 죽어야 조정은, 이 약도성을 완전히 삼킬 수 있소. 아무도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소.”택란은 화가 나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인가? 내가 여기에 왔잖냐! 빨리 계속 파시게!”주민이 그녀를 힐끔 보며 물었다.“웬 꼬마가, 넌 누구냐?”택란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둠 속이라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린아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약도성의 성주, 우문택란이다!”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산사태가 난 지역을 향해 다시 걸어갔다. 작은 몸집이 시선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작아 보였다.황실의 공주라는 말에 사람들은 모두 놀라 얼어붙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공주가 이런 곳에 직접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공주는 저택 안에서 잘 보호받고 있어야 할 존재다.그녀는 알 수 없는 힘을 사용해 접근한 곳의 흙을 한 겹씩 옮겨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구조 요청이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녀를 따라가 급히 구조 작업에 참여했다.약도성의 지진은 강북부에서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낡은 집도 무너졌지만, 심각한 피해는 없었다. 약도성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위왕과 안왕은 신속히 구조 병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택란이 약도성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들 여태껏 택란이 스승과 함께 떠났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네 오빠들은 바로 병사를 데리고 약도성으로 향했다. 지진 발생 12 시진 후 약도성에는 8천 명 이상의 병사가 합류했다.약도성의 백성은 조정이 지원군을 보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조정이 약도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관심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과거에도 가뭄, 메뚜기 떼, 산사태 등의 재난이 일어났지만, 북막조정은 몇 포대의 쌀만 보내며 형식적인 구조를 했을 뿐이다.약도성
지진이 발생하기 전, 호명과 주 아가씨는 약도성 중심부에서 백성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새벽녘은 사람들이 가장 피곤할 시간이다. 억지로 잠에서 깨어난 백성들은 분노했다. 그중 한 집안은 도축업을 하는 홀아비가 어린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새벽 무렵에야 돼지를 잡고 고기를 나눠주고 돌아와 잠자리에 든 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잠에서 깨어난 데다 아이까지 깨우니,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옆집 사람은 칼을 들고 나가 저들을 쫓아내면 다시 잘 수 있다고 부추겼다. 남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상황이라 아들을 방으로 데려다 놓고, 즉시 칼을 들고 나가 주 아가씨와 맞섰다.그가 칼을 휘두르며 집안 식구들과 함께 밖으로 나온 그 순간, 지진이 발생했다. 그들은 자기 집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먼지가 자욱했고, 곁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옆집 역시 무너졌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이 집 처마 아래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깔려 있었다.“아들! 아들아!”홀아비는 그제야 안으로 데려다 놓았던 아들을 떠올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집은 이미 완전히 무너졌다. 겨우 세 살밖에 안 되는 아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했다.그는 미친 듯이 벽돌과 흙더미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주 아가씨와 호명도 서둘러 도왔다.지진은 단 몇 초 만에 일어났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갔고, 그 결과 무너진 집에 깔린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약도성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사방에서 울부짖음과 비명이 들려왔다. 평소 조정과 맞서던 이들은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 보였다. 그들의 처절한 울음소리는 듣는 이의 마음을 찢어지게 했다.홀아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다들 함께 벽돌을 치우고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도구가 없어서 맨손으로 작업해야 했다. 주 아가씨의 손은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흙벽을 밀어내고 벽돌을 옮겼다.반 시진 후, 주 아가씨가 마침내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는 다리를 크게 다쳐 엉엉 울고 있었다. 홀아
“그럼... 호명, 가십시다!”주 아가씨는 왠지 모르게 택란의 말을 믿었다.호명도 주 아가씨의 말을 듣고 동의했다. 그의 생각은 단순했다. 지진이 생기지 않으면 백성들을 귀찮게 한 정도로 끝날 테지만, 정말 지진이 발생한다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게다가 약도성의 백성들은 조정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더 미움을 사도 중요하지 않다.일행은 즉시 돌아가 병사들을 소집해 집마다 문을 두드리며 백성에게 넓은 곳으로 대피하라고 알렸다.한밤중에 잠에서 깨어난 백성은 역시나 원치 않았다.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병사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성주가 단호하게 명령한 일이었기에, 백성들은 마지못해 끌려 나갔다.그러나 문제는 강제로 밖으로 끌어낸 사람들을 계속 감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병사들이 떠난 후 많은 백성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게다가 일부 폭도들은 이를 계기로 병사들과 정면으로 맞서며 심각한 충돌을 일으켰다.부분 병사가 백성들이 소란을 피우는 마을로 향했다. 이곳에 있는 마을은 거의 조정을 적대시하는 곳이었다. 너무 외진 곳이고 여인도 적은 곳이라, 이곳 남자들은 혼사도 치르지 못하고 가난하게 지내고 있었다. 하루 세 끼를 유지하기조차 힘들었고, 금나라의 선동이 더해져 이 지역의 상황은 더욱 악화하였다. 이 몇몇 마을에서 15세 이하의 아이들은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병사들이 징과 북을 울리며 백성을 깨우자, 폭도들이 화를 내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몸싸움이 벌어졌고, 20여 명의 병사들이 이들에게 압도당해 심하게 얻어맞았다.결국 병사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약도성에서 대피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약 만 명 정도였다. 대부분 병사가 떠난 후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조정이 백성을 괴롭힌다고 욕하며 약도성에는 지진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이에 주 아가씨가 분노를 참지 못해 말했다.“성주께 말씀드려서 집을 전부 불태워버리자고 해야겠습니다! 정말 너무합니다.”호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녁 무렵, 그들 일행은 출발했다.약도성의 밤은 전혀 활기가 없었다. 해가 지고 나면 거리에서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수년간 치안이 매우 나빴다. 비록 저녁에 병사들이 순찰하고 있지만, 백성들은 이미 해가 지면 밖에 나가지 않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덕분에 이번 외출은 별다른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약도성이 가난하다 보니, 부유한 이들의 저택만 튼튼할 뿐, 대부분의 집은 돌집이나 흙집, 나무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초가 거의 다져지지 않은 상태여서 지진이 발생한다면, 대부분의 건물이 버틸 수 없을 것이다.택란은 이 점이 걱정되었지만, 아직 지진이라 단언할 수 없었다.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길한 예감이 계속해서 밀려왔다. 그녀는 꼬마 봉황에게 물어보았고, 꼬마 봉황이 하늘로 날아올라 몇 바퀴를 돌며 주변을 살폈다.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것을 본 꼬마 봉황은 택란에게 알렸다. 그녀의 불안감이 점점 더 커졌다.택란은 호명과 주 아가씨에게 자신의 걱정을 털어놓으며 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하지만 호명과 주 아가씨는 믿지 않았다. 약도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만 지진이 발생하였다.주 아가씨가 말했다.“오늘 밤하늘을 보니 지진운 같은 건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 걱정하신 것 같습니다.”“지진운은 믿을 수 없소. 강가로 한번 가보시게.”이곳에는 바다가 없고, 산을 따라 흐르는 큰 강만 있었다.다들 풍등을 들고 강가로 향했다.강물의 흐름은 빠르지 않았고, 눈에 띄게 가뭄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다. 물 높이는 겨울이나 봄에 비해 많이 낮아졌고, 어떤 곳은 강바닥이 드러나 있었다.택란은 풍등을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강물은 별문제가 없어 보였다. 아마도 수심이 얕기 때문일지도 모른다.“이곳에 샘물이 있소?”택란이 주 아가씨에게 물었다.“있습니다. 여기서 2리 정도 떨어진 곳에 큰 샘물이 하나 있는데, 근처 주민들이 그곳에서 물을 떠다 마십니다.”“좋소. 가보겠소!”택란이 말했다.일행은 다시 큰 샘물로 향했다. 주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