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재회한동안 서로 말없이 바라보더니 평남왕이 세자를 오라고 해서 선배들에게 인사시켰다.평남왕의 세자는 얼굴이 창백하고 억지로 앞으로 왔지만 거의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주재상이 물었다.“어떻게 된 겁니까? 아프십니까?”세자가 허약하게 말했다.“세숙(世叔, 아버지의 친구)께 아룁니다. 제가 별로 외출하지 않는데, 요 며칠 분주히 오느라 몸이 지탱 못하는 모양입니다. 이틀 전에 토하고 설사가 시작돼서 지금도 차도가 없고 그 때문에 여정이 지체되었습니다.”“세자께서 아버지보다 더 약해 보이십니다.” 소요공은 무예를 연마한 사람이라 젊은 사람이 이렇게 약한 걸 못 보고 한마디 했다.세자가 말했다.“아버지도 좀 불편하셨는데 약 드시고 좋아지셨습니다.”주재상과 소요공이 이 말을 듣고 얼른 평남왕에게 물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좋아지신 건가요?”“아주 좋아졌어. 괜찮아. 오는 길에 먹은 게 깨끗하지 못한 모양이야. 약 먹고 좋아졌어.” 평남왕이 웃으며 말했다.주재상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걱정했다.“그럼, 일단 우리 집으로 가서 쉬시다가 내일 입궁하시죠.”평남왕 세자가 말했다. \“마침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세숙께 폐를 좀 끼치겠습니다.”우문호는 원래 그들을 맞아서 궁으로 가려고 했으나 몸이 편치 않은 걸 보고 재상의 집에서 하룻밤 묵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고 환송했다.주재상과 소요공이 먼저 가서 묵으실 준비를 하고 평남왕 부자의 병을 살필 의원을 부르려고 하는데 우문호가 입을 열었다. “다른 의원을 부를 필요 없이, 태자비에게 오라고 하겠습니다. 태자비가 줄곧 왕야를 뵙고 싶어 했습니다.”주재상이 말했다.“그것도 좋지, 틀림없이 극이 형도 태자비를 얼른 보고 싶으실걸, 우리가 서신을 왕래하면서 태자비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 관계로 극이 형도 경성에 갈 기회가 되면 태자비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셨지.”주재상과 소요공이 평남왕에 대한 호칭을 극이 형이라고 부르는데 그 나이에 그렇게 부르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평남왕과 우문호 부부주재상이 껄껄 웃는데 조금은 젊은 시절의 풍채였다.곁에 중년이 한 명 서 있는데 원경릉에게 예를 취하면서 말했다. “태자비를 뵙습니다!”원경릉이 보니 이 사람은 마흔 남짓으로 키와 몸집이 크고 미간에 내 천(川)자 주름이 있는 게 평남왕처럼 평온하지 못한 사람으로 억압받고 원한이 깊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얼굴이 창백하고 눈 밑에 피로한 기색이 가득한 게 기운이 없어 보였다.평남왕의 양자인 것을 알고 얼른 인사를 올렸다. “황숙을 뵙습니다!”주재상이 말했다.“태자비 마마, 왕야 부자께서 여정 중에 깨끗하지 못한 음식을 섭취하셨는지 토사곽란이 이틀째라고 하니 두 분을 진맥하고 약을 처방해 드리시지요.”원경릉이 예하고 물러나 먼저 평남왕을 진찰했다.주로 문진을 통해 봤을 때 평남왕의 상태는 비교적 가벼웠으나 평남왕의 세자는 진찰하는 동안도 화장실을 참지 못할 정도로 상황이 비교적 심각했다.원경릉이 약을 처방하고 바로 복용하도록 했다.원경릉은 주재상과 소요공이 굉장히 긴장해서 평남왕 곁에서 계속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차와 탕 시중을 들 때도 소요공이 직접 하겠다고 하고 아주 싸고도는 느낌이었다.원경릉과 우문호가 서로 마주 보며 우문호도 삼대 거두와 평남왕이 함께 있는 상황을 본 적이 없어서 평남왕이 저들의 마음속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존재인지 몰랐다.하지만 원경릉과 우문호가 동시에 느낀 건 만약 평남왕 쪽에 무슨 문제가 생기거나 노신들의 추측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삼대 거두 입장에서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이란 사실이었다.평남왕이 약을 먹은 뒤 우문호 부부만 남긴 뒤 얘기했다.평남왕의 세자는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어서 먼저 물러가서 쉬었다.실내에 막 등을 밝히고 유리 등잔 아래 은은하게 비치는 평남왕의 안색은 한층 더 온화했고 우문호를 바라보는 눈빛에 마음에 들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네가 태자로 책봉되었다고 했을 때 오려고 했었는데 실수로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다쳐서 올 기회를 놓쳤던 거니
평남왕부와 임소이 말을 듣고 이번에는 우문호가 어리둥절해졌다.평남왕이 임소를 모른다고? 그런데 그가 분명 서신을 보내와서 태상황에게 임소가 자신의 집에 출입하니 사람을 보내 쫓아갔다고 했는데, 어떻게 임소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하는 거지?우문호가 평남왕을 보니 정말 모르겠다는 모습으로 안색도 눈빛도 멍하다.원경릉이, “왕야, 최근 일이 잘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그럼 오래된 예전 일은 아직 기억하시는지요?”“기억하지.” 평남왕이 미소를 지으며 얼굴에 아취가 다시 돌아왔다. “아주 오래 전의 일도 다 기억하지.”원경릉이 속으로 노인성 치매가 아닐까 생각했다.“그럼 태상황 폐하와 서신을 왕래하신 가장 최근이 언제입니까?” 우문호가 물었다.“내가 편지를 쓴 건 내가 경성으로 가겠다고 쓴 이번이야.”바꿔 말해 역시 최근 발생한 일이지만 임소의 일로 서신이 온 것도 최근 일로 전후 시간을 해도 고작 보름 차이에 불과한데? 어떻게 이건 기억하고 저건 기억을 못 하지? 단지 이번에 온 건 아바마마의 병환 때문이 아니라 성지를 보내 경성으로 와서 만나자고 해서인가?원경릉이 평남왕을 한참 보더니, “그럼 저희 부부가 들어왔을 때 뭘 여쭤보셨는지 기억하십니까?”평남왕이 원경릉을 흘끔 보고, “그야 물론 기억하지, 태상황이 몇 년 전에 큰 병을 앓았냐고.”셋이 안에서 잠시 얘기를 나눴다. 평남왕은 확실히 임소를 몰랐고 두 사람은 이점이 이상했다. 방을 나와서 우문호가 평남왕 세자를 찾아갔다.세자는 약을 먹은 뒤 누워 있는데 우문호가 오는 것을 보고 얼른 앉았다. 하지만 아직 배가 많이 불편한지 가슴에 이불을 안고 배를 누르고 있었다.우문호는 세자의 창백한 모습에, “세자 황숙, 약을 드셔도 차도가 없으십니까?”세자가 억지로 웃으며, “좀 좋아졌어, 하지만 여전히 괴롭네.”“그럼 저도 쉬시는 걸 방해하지 않고 몇 마디만 여쭙겠습니다. 큰할아버지께서 최근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으셨나요?” 세자가 똑바로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 아바마마 기억력은 늘
중독우문호가 공손하게 답하고 나갔다.우무호는 이 일은 수상한 곳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왕야가 임소를 모르는 건 이상하지 않은 게 줄곧 강호의 일에 관심이 없었고 조정의 일도 신경 쓰지 않아서 임소와 왕래할 이유가 없었다.선비족 시위는 따질 필요도 없이 선비는 큰 전쟁을 치르고 상당수의 피난민이 외부로 흘러나와 거지나 날품팔이가 되었으니, 저택에 와서 무공을 파는 일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하지만 임소 일은 좀 이상한 게 임소가 나중에 평남왕부에 다시 왔던 적이 있는 걸 세자 황숙이 몰랐든지 아니면 정보가 잘못됐든지 그것도 아니면 세자 황숙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하지만 세자 황숙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게 임소가 처음 평남왕부에 갔을 때 이미 태상황 폐하께 서신을 써서 상황을 분명하게 얘기했고 혐의를 파하고자 했으니, 임소가 오도록 자극할 리가 없었다. 임소 쪽은 계속 방치되어 있었는데 지금 보니 어쩌면 뭔가 거둘 수 있겠다 싶었다.주재상과 소요공이 밖에 있는데 우문호가 다가가서 두 사람에게 걸으면서 얘기하자고 했다.두 사람은 모두 평남왕의 기억력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소요공이 입을 열었다. “형이 기억 못 하는 건 젊었을 때 머리를 다쳤기 때문으로 멍하니 바보 상태로 몇 년은 있었어. 나중에 호전이 됐지만 늘 기억력이 좋지 않지, 태상황 폐하께서 병이 위중하실 때 형에게 알리지 않았어. 초조하고 괴로워할까 봐. 하지만 일이 지난 후에 서신을 보내 알렸지. 그리고 사부님이 2년 전에 평남에 가셨을 때 형께 알려드렸으니, 형은 이 일을 알고 있어. 아마 기억을 못 하시겠지만.”듣고 보니 별로 의심스러운 것도 아니었다. 사실 우문호는 계속 평남왕은 절대로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세자 황숙은…… 됐다. 일단 두고 보자.’ 임소 쪽이 요 이틀간 끄나풀을 어떻게 거둬들이는지 보기로 했다.가기 전에 우문호와 주재상은 한동안 얘기하며 주재상이 마지막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하시지요. 어떻게 할지 알겠습니다.“우문호가 깊
주재상을 독살한 자원경릉은 우문호가 얼굴은 굳어 있으나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것을 보고 물었다. “누가 한 건지 아는 거야?”우문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누가 한 건지 상관없어. 지금 전부 평남왕 전하께 뒤집어씌우려는 거니까. 방금 주재상이 중독됐다고 들었잖아, 평남왕 전하께서 했을 가능성부터 생각하지 않았어?”원경릉이 전혀 감추지 않고 말했다. “서일이 말하는 걸 듣고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어. 하지만 평남왕 전하께서 정말 나쁜 마음을 품고 있다면 자신이 주재상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손을 쓸 리 없을 거야. 이건 그야말로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백하는 꼴이잖아?”“그래, 그래서 평남왕 전하께서 주재상의 집에 묵는 것부터 주재상이 사고를 당하는 것까지 누군가 계획했을 가능성이 커.” 우문호가 이렇게 말하면 얼굴이 조금씩 풀어져서 마치 이미 누구인지 짐작이 선 것 같았다.“하지만, 누가 미리 평남왕 전하께서 주재상의 집에 묵을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겠어? 원래 계획대로면 평남왕 전하는 경성에 도착한 뒤 바로 입궁하는 거였잖아. 만약 평남왕 전하께서 주재상을 독살하려고 준비하는 것보다 태상황 폐하를 독살하는 게 낫지 않겠어?” 원경릉이 이해되지 않는 듯이 물었다.우문호가 차디찬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왜냐면, 그들은 태상황 폐하는 독살할 수 없지만 주재상을 독살할 방법은 있지.”원경릉은 우문호의 말에 담긴 행간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한 명이 떠올랐다. ‘주명양.’주재상에게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고 독약을 먹일 수 있는 사람은 분명 익숙한 사람일 것이었다. 주명양은 상당히 의심스러웠다.이게 임소의 목적이라면 주명양은 임소에게 약점을 잡혀서 임소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임소는 주명양에게 평남왕이 경성에 들어갈 때 주재상을 죽이라고 지시했다. 주명양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임소가 어떻게 평남왕이 주재상의 집에 묵을 거라는 걸 알았을까?’원래 계획대로라면 평남왕이 경성에 도착하면 바로
소복단우문호와 원경릉이 들어가자, 자동으로 양쪽으로 비켜서며 둘이 지나가도록 길이 생겼다.평남왕이 침상에 앉아 주재상의 손을 꼭 그러쥐고 있는데 안색이 무겁고 슬픔이 가득했다.주재상은 얼굴이 온통 새파랗고 입술은 검은 자주색으로 눈은 꽉 감겨 있는데 호흡도 거의 찾을 수 없을 지경으로 우문호가 다가가 작은 소리로 평남왕에게 말했다. “큰 할아버지, 잠시만 비켜주세요. 태자비가 의술을 아니 살릴 수 있는지 보겠습니다.”평남왕이 일어나 원경릉에게 진심으로 애원하며 목멘 소리로 말했다. “태자비 최선을 다해주게!”원경릉은 평남왕의 눈에서 절망의 깊은 고통을 보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원경릉이 다가와 호흡, 맥박, 심박을 재는데 모두 약하고 맥박은 거의 찾아낼 수 없는 상태로 심장이 워낙 미약하게 움직여서 몇 번이고 심장이 멈춘 줄 알고 응급조치하려고 하면 갑자기 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원경릉이 측정할 수 있는 수단에 한계가 있고 독에 대해서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피를 뽑아 검사할 수도 없었다.수액을 걸고 강심제가 독을 제거해 독이 위와 신장에 침식해 들어가는 속도를 느리게 하는 것으로, 남은 건 조어의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소요공이 급히 조어의를 데리고 왔다. 조어의는 진찰해 보더니 역시 무슨 독인지 모르겠다며 단지 비상과 독주는 아니라고 했다. 조어의가 약을 배합해 물에 탔으나 한 대접의 약을 몇 모금도 넘기지 못해 사람들의 마음이 다급해졌다.“이 독은 굉장히 심각하나 주재상께서 전에 소복단(銷服丹)을 복용하신 관계로 독약의 덜 퍼졌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벌써……” 조어의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원경릉이 물었다.“소복단은 어떤 약이죠?”조어의가 설명해 이어갔다.“소복단은 내상이나 외상을 치료하고 몸을 건강하게 해 기혈의 운행을 돕습니다. 주재상께서는 전에 몸이 좋지 않아 5일에 한 알씩 소복단을 복용하기 시작하셨는데 생각건대 그 약이 몸에 치료 효과를 발휘해 독이 퍼지는 것을 억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을 탄 사람은 누구인가소요공이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가만히 이 장면을 보며 눈가에 슬픔이 어리는 것을 원경릉은 봤다. 원경릉은 소요공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 둘은 인생 대부분의 풍파를 함께 겪어 왔는데 만약 주재상이 이번에 깨어나지 못하면 얼마나 침통한 충격이 될까?소요공이 이 정도인데 태상황과 희 상궁은?원경릉의 심정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고 무의식적으로 우문호를 보니 뒷짐을 지고 사람들 틈에서 주명양의 얼굴을 주목하고 있었다.얼굴에는 다소 슬픈 기색이 있지만 눈은 예리하게 번뜩이며 마치 어둠 속에서 조용히 매복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표범 같았다.원경릉이 의구심이 드는 것이 우문호는 주재상에게 굉장히 기대고 있는데 주재상에게 문제가 생기면 제일 걱정하고 제일 긴장되는 건 본인일 텐데 오히려 전혀 그렇지 않은 점이다.주재상의 집에서 나올 때가 문득 떠오르며 주재상과 우문호가 사적으로 몇 마디를 나눴는데 우문호는 주의하라고 주재상에게 알려준 거라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주재상이 이렇게 호락호락 당할 사람이 아니었다. 주명양은 최근 어쩌면 안분지족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원래 어떤 사람이며 어떤 사람과 접촉했는지 주재상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설마……’원경릉이 여전히 추측 중인데 제왕이 경조부 사람을 데리고 왔다.제왕은 지금 일 처리가 성숙하고 말끔해서 들어온 뒤 평남왕께 인사드리고 다시 주씨 가문 사람들에게 주재상이 중독된 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주씨 가문 가장이 입을 열었다.“아버님은 어젯밤 평남왕 전하, 소요공 이렇게 세 분이 얘기를 나누시고 소요공께서 한밤중에 떠나신 뒤 왕야와 계속 얘기를 나누셨습니다. 4경(새벽 1시~3시)이 돼서야 헤어지셨는데 그동안 차와 간식은 전부 따로 시중을 들었고 아버님은 방으로 돌아오셔서 독이 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용하신 그릇이나 모두 이미 깨끗하게 씻어서 차나 간식에 독이 있었는지 여부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제왕이 말했다.“만약 차나 간식에 독이 있었다면 왕야께
떠보는 주명양따라서 그들은 더욱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재상이 요일 년 동안 바쁜 재상의 자리에서 천천히 물러나 중요하게 하던 한 가지가 바로 모난 돌 때리며 주씨 가문을 단속하는 것이었다. 위치에 맞는 덕을 갖추지 못했으면 일률적으로 아래로 끌어내려 분수에 만족하며 살도록 잔소리했다.반대로 재주와 능력이 있으면 품행과 덕성을 배양해 천거해 드디어 모든 것이 성과를 드러내기 시작해 주씨 가문의 가풍도 슬슬 정돈되고 상당히 안분지족하게 되었다.그래서 제왕이 조사하려고 할 때도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았고 주 씨 집안사람들도 상당히 협력해 주었다.원경릉이 마당 바깥에서 우문호가 나오면 물어보려고 했는데 주명양이 복도에서 내려와 차갑게 독기를 품고 원경릉을 노려보며 말했다. “신의(神醫) 아닌가? 왜 우리 할아버지께서 중독됐는데 못 구해?”원경릉이 대답하고 싶지 않아 정자로 갔다.주명양이 다가와 원경릉의 팔을 잡자, 원경릉이 한 손으로 뿌리치며 무공이랄 것도 없지만 주명양도 별거 아니라 이 한 방에 주명양을 뒤로 물리쳤다.“말해봐, 우리 할아버지 살릴 수 있어 없어?” 주명양이 짜증을 냈다.원경릉은 주명양이 절대로 주재상을 걱정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을 증오하고 미워하면서도 틈을 봐서 몇 번이나 떠보는 걸 보니 주명양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원경릉이 담담하게 말했다. “재상은 복을 타고난 관상이라 괜찮을 건데 넌 뭐가 걱정인데?”주명양이 원경릉을 노려보며 말했다. “괜찮을 거라고? 그럼, 네가 가서 약을 써서 구해. 너 능력 있는 거 아냐?”“난 약을 썼어, 못 봤어?” 원경릉도 주명양 얼굴에 미세한 표정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쳐다봤다.주명양이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네가 쓴 약 효과가 없잖아. 할아버지께서 아직 깨어나시지 않았어. 심지어 우리 할아버지께서 무슨 독에 중독됐는지조차 너희는 모르잖아 안 그래?”원경릉이 뒤를 돌아 정자에 들어가 앉자, 주명양이 따라 들어와서 원경릉의 답을 기다리는데 원경릉이
며칠 뒤, 다섯째가 정말 아이를 데리고 궁에서 나왔다.원경릉은 이미 화를 풀었다. 그가 어찌 나쁜 마음을 품었겠는가? 그는 단지 딸과 단둘이 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그리고 사실이 증명하듯이, 계란이는 무상황을 만난 후 아버지를 금세 잊어버렸다. 그녀는 무상황을 태조부라고 부르며 함께 뜰을 산책하고, 함께 식사하며, 얼굴과 손을 닦아 주고, 함께 바둑도 두었다.이때 택란이가 조심히 원경릉에게만 말했다.“어마마마,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이 돈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금이고 은이고 다 주려 한다면, 틀림없이 아주 사랑한다는 증거일 것입니다.”원경릉은 순간 자신이 이 사실을 잊고 지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 무상황의 계란이에 대한 애정은 누구보다 특별했다.예전에 그녀는 무상황이 계란이를 너무 편애하여 다른 왕비들이 질투해, 형제자매 사이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했었다.실제로 손왕비가 몇 마디 불평하며 약간 질투를 내비치긴 했지만, 미색이 바로 반박했다. “뭘 안다고 그러십니까? 이 금을 계란이에게 준다면, 앞으로 조정에 돈이 필요할 때 계란이가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손왕비나 제가 받았다면, 돈을 내놓으려 하겠습니까?”이 말에 손왕비는 순식간에 화를 가라앉히고, 곧장 원경릉에게 사과했고, 그 이후로 원경릉도 더는 걱정하지 않았다.우문호와 원경릉은 함께 정원을 거닐며, 안풍친왕의 자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섯째도 이 소식에 안도하며 말했다.“그들을 만나보고 싶소. 삼촌이라고 불러야 하오? 아니면 작은아버지라고 불러야 하오?”아직 그는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은지 적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그들이 돌아온다고 들었지만, 언제가 될지는 모르오.”원경릉이 대답했다.“안풍친왕의 성격을 생각하니, 자녀들도 그를 닮았을지 궁금해졌소.”원경릉이 웃으며 여우 같은 한 가족이진 않을까 생각했다.안풍친왕의 자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원용의에게서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원용의가 아이를 낳았다.제왕은 아이를
“황조부님, 다섯째와 계란이가 왔습니까?”원경릉이 무상황에게 묻자, 무상황이 순간 하던 동작을 멈추고, 얼굴에 기쁨을 띄우며 말했다.“그들이 온다고? 그럼, 얼른 사람을 불러 음식을 더 준비하라 해서 둘이 술 한잔해야겠구나!”원경릉은 깜짝 놀랐다. 그의 말을 들으니, 그들 부녀가 아직 오지 않은 듯했다.그들은 그녀를 찾으러 궁을 나선 것이 아니었던가? 평소 바쁘던 그가, 오늘 이렇게 일찍 업무를 마쳤는데, 자신을 찾지 않았다면 대체 어디로 간 걸까?그녀가 궁을 나설 때, 그는 틈이 나면 왕부에 들르겠다고 약속했었다.무상황은 그녀가 말이 없자 물었다.“그래서 온다는 것이냐, 안 온다는 것이냐?”원경릉은 그들 부녀가 자신을 두고 나가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안 옵니다.”무상황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그래, 무슨 계란이를 데리고 나를 보러 오겠느냐?! 쓸데없는 생각이구나.”그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 같자, 원경릉이 더 기분 상할 틈도 주지 않게 서둘러 그를 달랬다. “분명 온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일이 많은 탓에 아직도 바삐 보내나 봅니다.”“거짓이다!”하지만 무상황은 여전히 믿지 않았다.“계속 바쁘면 직접 오지 않고, 사람을 시켜 아이만 보내면 되지 않느냐? 그놈은 계란이가 이곳에 오면 궁에 가지 않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계란이를 빼앗아 갈지 걱정해서지.”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딸에 대한 다섯째의 애정은 언제나 독단적이었다. 심지어, 어머니인 그녀의 자리를 탐낼 때도 있었다.원경릉이 서둘러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왕비님께 자녀가 있다고 들었는데, 조부님께선 알고 계셨습니까?”“알고 있지.”무상황이 순간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되물었다. “넌 몰랐단 말이냐?”“아무도 제게 말해주지 않았습니다.”원경릉은 억울해하며 답했다.“부부라면 자녀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걸 일일이 말해줘야 하는 것이냐?”무상황은 그녀를 약간 어리석게 여겼다.“……”원경릉은 잠시 생각하다
원경릉은 추 할머니와 함께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뒤, 이리 나리를 몰래 끌고 나가 조용히 물었다.“왕비께 자녀가 있습니까?”그러자 이리 나리가 되물었다. “예이와 진이를 말하는 것이냐?”원경릉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네, 예이와 진이입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북당에는 없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이미 추 마마를 보러 오라고 하셨다는구나.”추 할머니와 왕비가 같은 세대 사람이였기 때문에 이리 나리는 항상 추 할머니를 마마라고 불렀다.“그들이 돌아온다니… 정말입니까?”원경릉은 순간 이유 모를 흥분을 느꼈다. 그들에게 자녀가 있다는 것을 몰랐을 때, 북당이 그들을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아,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 자녀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정말 기뻤다.“그래. 돌아올지 말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돌아올 것 같다고 생각한다. 사부님이 명을 내렸으니, 감히 거역하지 못할 것이다.”“한번 만나보고 싶습니다. 아마 다섯째도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어찌 그들은 친왕과 왕비의 곁에서 지내지 않는 것입니까?”“상황을 대충 알고 있지 않느냐? 사부님께서 한때 황태자가 될 뻔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무상황도 장인어른께서도 황위에서 물러나 다섯째가 황제가 되었다. 상황이 변했으니, 그들도 이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혹시 그들이 너무 조심스러웠던 건 아닙니까? 굳이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될 것입니다.”원경릉이 답했다.이리 나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주 작은 위험이라도 있을 수 없다. 작은 일이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니 조정에 폐를 끼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동안 일이 참 많지 않았냐?”원경릉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라에 수많은 문제가 쌓여 있어 몇십 년 동안도 해결되지 않았으니, 굳이 더 많은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자세히 생각하니, 북당이 그들에게 빚진 것이 참 많은
하지만 원경릉은 거절했다. 모두가 시중을 들지 않는데, 그녀만 시중을 데리고 오면 괜히 특별한 척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후라는 신분도 숙왕부 사람들 눈에는 단지 어린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그녀는 짐을 다 챙긴 후, 계란에게 아버지를 잘 돌보라고 당부하곤, 서일의 보호를 받으며 궁을 나섰다.그러자 사식이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막 궁에 왔는데, 원경릉이 다시 나가버리니 앞으로 심심한 나날을 보내야 할 자신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원경릉이 숙왕부에 도착했을 때, 이리 나리 부부도 추선을 방문하기 위해 와 있었다.이리 나리도 추선과 정이 깊은 사이었다. 공주는 원경릉에게 이리 나리가 어렸을 때부터 왕비가 키웠다고 말해 주었다. 처음에는 왕비가 아이를 키우는 법을 모르기에 대부분 추할머니가 그를 돌보았는데, 나중에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도 추할머니 덕분에 엄한 왕비 곁에서 고생을 조금 덜 할 수 있었다고 했다. 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군요. 왕비께서 아이를 낳지 않으셨으니, 아이를 키우는 게 익숙하지 않으셨겠지요.""듣자 하니, 왕비께서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낳으셨다고 하네. 열몇 살에 어디론가 보내셨다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리도 그들을 몇 번 보지 못했다고 하더군.""왕비께서 아이를 낳으셨다니요?"원경릉이 살짝 놀란듯 물었다."저는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고 들었습니다. 예전에 보친왕..."공주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아니네. 정말 아니네. 왕비께서 직접 낳으신 아들딸이네. 쌍둥이고, 나리보다 훨씬 나이가 많네.""그렇습니까?"원경릉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거 왕비 부부가 은거하고 지낸 탓에 자녀를 보지 못한 것이 이해는 되었지만, 최근 몇 년간 그들은 경성에 머물러 있었고, 자녀들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관계가 아무리 나빠도 몇 년 동안 부모를 찾아오지 않을 수는 없을 텐데. 혹시나 부모와 자식 간에 어떤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의심 되었다. "그렇네. 나리가
추선의 방에서 나온 원경릉은 청우헌으로 가서 세 거두와 이야기를 나누고 혈압까지 재주었다.그녀는 그들의 말에서 추선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추선으로, 왕비의 옛 시녀였다. 그러나 가장 힘든 시절에 추선은 왕비와 왕부를 떠나지 않았고, 줄곧 평남왕 우문극을 돌봐왔다고 했다.그리고 그 두 명의 첩인 운 마마와 몽 마마는 실제로 왕비의 첩이라고 했다. 대체 왜 왕비의 첩이 되었는지 명확히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두 사람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그녀들은 이미 왕비의 첩으로 불렸다.세 거두는 추선의 병세를 물었다. 원경릉이 악성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자 충격을 받았다.현대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그들은 ‘악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그들의 얼굴에 한순간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아, 원경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왕비의 시녀라 하셨는데, 잘 아시는 것입니까?”무상황이 말했다.“숙왕부에서는 누구의 시녀인지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매미도 시녀를 그만두고, 모두와 함께 고생했다. 평생 혼인도 하지 않고.”“매미요?”“네가 말하는 추선이다.”원경릉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추선의 이름을 매미로 부르는 것도 어찌 보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추선이 큰 병에 걸렸다는 소식은 숙왕부 전체에 퍼졌고, 많은 사람이 원경릉에게 그녀의 병세를 물었다.원경릉은 검은 옷을 입은 노인들이 그렇게 침통한 표정을 짓는 것도, 누군가를 이렇게 걱정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평소 그들은 늘 차가운 태도를 보였고, 유일하게 열정을 보일 때는 식사 시간뿐이었으니 말이다.그날, 원경릉은 숙왕부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숙왕부의 식사 방식은 한 사람이 큰 사발 하나씩 받는 것이었다. 이날 집안사람들은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아, 남긴 음식이 가득했다.이런 일은 전례가 없었다.원경릉은 이로부터 추선이 그들 마음속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소요공에 따르면, 과거 추선은 적성루에서 음식을 배분하는 일을 맡았다고 했다. 고기를 얼마나 줄
“이전에 무슨 큰 병을 앓았습니까?”원경릉이 물었다.“폐결핵이었네. 의원을 불러 치료했지만, 몇 년 동안 건강이 계속 좋지 않았네.”왕비가 대답했다.“치료했던 의원의 능력이 뛰어났겠습니다. 누구였습니까?”“주진이요.”왕비가 말했다.주진의 이름을 들으니, 원경릉은 그녀가 왕비와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자라는 것을 확신했다.원경릉은 초능력을 사용해 노파의 폐 상태를 감지했다. 결절과 섬유화가 있었고, 심지어 종양으로 의심되는 덩어리도 발견했다. 나이가 많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많지 않았고, 우선 약물을 통해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그저 악성이 아니길 바라며 기도할 뿐이었다.우선 링거를 놓고 산소를 공급하며, 스테로이드를 사용해 기관지를 확장해 그녀가 조금 더 편하게 호흡할 수 있도록 했다.약물을 사용하자 노파의 안색이 서서히 나아졌고, 호흡도 훨씬 수월해졌다.그러자 노파가 감사의 말을 전했다.“이렇게 숨을 쉬어본 게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두 명의 나이 든 여성이 방을 드나들었다. 다들 원경릉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왕비가 그녀들을 소개해주었다.“모두 수년간 나와 함께해온 사람들이네.”그러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덧붙였다.“내 첩들이네.”그러자 원경릉은 자신이 잘못 들은건 아닌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첩인지 아니면 왕의 첩인지 궁금했지만, 차마 질문하기엔 입이 쉽게 열어지지가 않았다.잠시 후, 원경릉이 침대에 누워 있는 환자를 가리키며 물었다.“그럼, 이분은요?”“날 처음 모신 사람이네. 이름은 추선이야. 수십 년 동안 대부분 평남왕부에서 평남왕을 돌보며 지냈네.”왕비가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원경릉은 이해했다. 그들은 정말 이곳에 정착하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예전에 함께 지내던 사람들을 하나씩 데려와 함께 여생을 보내려는 것이었다.젊은 시절 함께 했던 사람들이니, 나이가 들어도 서로 곁에 머물고 싶어 했다.왕비는 원경릉과 함께 밖으로 나와 진지하게 말했다.“심각하다는 건
다섯째는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아이가 혼인을 올리지 않고 곁에 머무는 건 분명 기쁜 일이었고 효심이 있는 일이었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외로울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만약 자기와 원경릉이 저세상으로 떠난다면, 그녀가 혼자 어떻게 지낼 수 있을까 싶었다.그렇다고 해서 혼사를 허락하자니, 세상에 과연 걸맞은 사내가 있을지 걱정되었다.택란을 그녀보다 못 한 사내에게 보내는 건 그녀에게 너무 큰 희생이다.다섯째가 갈등하는 것 같자 원경릉이 웃으며 그를 다독였다.“택란은 이제 여덟 살이네. 너무 앞서 생각하지 마오.”다섯째가 그녀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자네는 모르네.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흘러가네. 벌써 여덟 살이니, 7년만 지나면 성인이 되오.”그는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흘렀으면 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두는 게 좋소. 너무 멀리 내다봐도 소용없네.”원경릉은 그의 손을 잡고 살며시 깍지를 꼈다.“아이도 운명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언젠가 자네만큼 훌륭한 남자를 만난다면, 그와 혼사를 해도 나쁠 게 없지 않겠소?”“그런 남자는 있을 리 없소!”우문호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이런 칭찬해도 우문호는 여전히 복잡해 보였기에, 원경릉은 자신이 그를 걱정하게 만든 것 같아 후회했다. 하지만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그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리 없었다.택란이 태어난 날부터 우문호에게는 새로운 적이 생겼다. 바로 택란과 혼인할 상대였다.그 적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몰랐지만, 그는 여전히 미워하고 있었다.더구나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혼사를 직접 언급했으니, 이제 그 적은 실체가 생겼고, 이에 따라 그는 한동안 신경을 곤두세우게 되었다.그 후 며칠간 택란은 매우 순진하고 착하게 행동했다. 아버지가 시간이 날 때마다 곁에 머물며 대화를 나누고, 놀고,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시간을 보냈다.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아부하는 법을 터득해, 다섯째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어 더 이상 화낼 수 없게 했다.다
”이제 화가 풀린 것이오?”원경릉이 웃으며 물었다.“화 풀렸네. 하지만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조심해야 하오. 어린 자식이, 정말 너무하오!”우문호는 선물을 하나 열었다. 안에는 알록달록한 도자기로 만든 정교한 인형이 있었는데, 머리카락까지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그는 미소를 멈출 수 없었다.“이 도자기 인형, 정말 우리 딸을 닮았구나. 예쁘오!”“내가 산 것이오!”원경릉이 질투라도 난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네가 산 것이니 더 좋소. 아주 좋아!”우문호는 선물을 하나씩 열어보며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몇 개를 연 후에야 그는 약도성의 상황을 묻기 시작했다.원경릉은 자리에 앉아 약도성에서 있었던 상황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특히 택란이 약도성에서 보여준 대처 방법에 대해 상세히 말했다.그러자 우문호가 매우 놀라며 말했다.“택란이 지진을 예측하고 백성들을 대피시켰다니. 이건 정말 대단한 일이오. 정말 대단하네. 원 선생, 난 택란이 약도성에서 놀기만 했을 줄 알았네. 몰래 이런 큰일을 해내다니.”“택란과 경단은 모두 자네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오. 자네가 걱정하지 않도록 말이네. 그래서 자네한테 말하지 않았던 거고. 이게 택란이 자네를 더 사랑한다는 이유요. 자네를 평생 아끼며 짐을 덜어주고 싶어 하오.”우문호는 그녀의 손을 놓고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원 선생,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소.”원경릉은 그의 팔을 감싸 안으며 웃으며 말했다.“그래, 우시오. 우리 큰 아기 울어도 괜찮네!”우문호는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자네가 날 ‘큰 아기’라고 부르니 눈물이 갑자기 멈추네요.”“그럼 울지 말고 어서 앉으시오. 약도성 백성들이 택란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말해주겠소.”원경릉이 그의 팔을 잡아 의자에 앉히고는, 약도성에서 한 달 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우문호는 그녀의 이야기에 몰입하며 감동하였다. 특히 약도성 백성들이 택란을 존경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믿기 어려워했
우문호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확 어두워지며 깜짝 놀랐다.“청혼? 누가 청혼을 한 것이오? 미친 것이오? 겨우 여덟 살인데!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이런 짓을……”그는 너무 충격을 받아 분노가 치밀었다. 겨우 여덟 살인 딸을 누군가 눈독을 들이고, 심지어 청혼까지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는 그자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반드시 혼쭐을 내겠다고 마음먹었다.원경릉이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이미 택란의 비밀을 다 털어놨으니, 이제 더 이상 나한테 화내면 안 되오.”“말하시오. 용서할 테니 더 말하시오!”우문호는 더 이상 원경릉에게 화를 낼 힘도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고, 복잡한 감정만이 뒤섞여 답답할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정들도 모두 사라지고, 이 터무니없는 사건이 더 중요해졌다.원경릉은 택란이 금나라에 가서 10만 냥을 얻은 전말을 설명했다. 특히 금나라의 어린 황제가 그녀에게 청혼했다는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고 전부 털어놓았다. 단 한 글자도 숨기지 않고 진실만 말했다.우문호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그건 너무 대담하잖소! 금나라에서 10만 냥을 빼앗았다니? 어찌 이야기가 이렇게 익숙한 것이오? 그래, 기화요! 어찌 스승이 이런 짓을 가르친 것이오? 그리고 그 금나라의 어린 황제는 이제 몇 살이오? 듣자 하니 겨우 열 살이라고……”“열셋이오. 금나라의 진국왕이 그의 권력을 누르려, 일부러 열 살이라고 소문낸 것이오.”우문호는 벌떡 일어나 뒷짐을 지고 방을 빙빙 돌며 어쩔줄 몰라했다. “열다섯이라도 안 되네! 금나라가 북당의 경성에서 얼마나 먼지 알고 있소? 아이가 그곳에 시집가면 1년에 한 번도 못 돌아올 것이네. 북당의 진국 공주를 부인으로 삼겠다니? 허망 된 꿈이요! 꿈!”“아이들의 농일 뿐이요.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네.”원경릉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농담이라도 안 되네. 황위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우리 귀한 딸을 부인으로 삼겠다니? 이런 녀석은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