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친왕의 체포다음날, 경조부에서 사람을 보친왕 집에 보내 보친왕을 데려왔다.우문호가 직접 사람을 데리고 갔는데 어쩌면 안풍친왕비가 막아 서서 그 자리에서 체면이 상할 수도 있기 때문에 원경릉을 시켜 개인적으로 안풍친왕비와 약속을 잡아 밖으로 불러 내라고 하고 본인이 직접 사람을 데리고 보친왕의 집으로 갔다.보친왕의 대외적 죄명은 병여도를 훔친 것으로 휘종제의 시체가 도난 당한 사건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그래서 체포영장에 쓰여 있는 건 그가 조정의 기밀을 훔쳐 역모 혹은 적과의 내통이 의심된다고 되어 있었다.보친왕은 반항하지 않고 경조부 사람이 오자 스스로 나와 오라를 받았다.보친왕이 우문호에게, “태자비를 시켜 형수를 데리고 나가줘서 고맙네, 형수에게 체포 당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거든.”우문호의 눈빛이 복잡해 져서 보친왕을 흘끔 보니 고개를 살짝 떨구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를 마차에 태워 체면을 세워주었다.원경릉은 안풍친왕비를 데리고 이리 나리 집에 손님으로 간 뒤 미색을 오라고 해서 같이 했다.안풍친왕비는 마음이 콩밭에 가 있고, 미색이 계속 추임새를 넣으며 웃기고 있는데 미색도 즐거운 얼굴이 아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길 기다렸다가 안풍친왕비가 원경릉에게, “내가 일이 좀 있어서 먼저 돌아가겠네.”원경릉은 지금쯤 이면 이미 보친왕을 데려갔을 테니 안풍친왕비가 돌아가셔도 무방할 듯해서, “제가 바래다 드릴 게요.”“그럴 필요 없어, 나 혼자 갈게.” 안풍친왕비가 말을 마치고 갔다.미색은 안풍친왕비를 무서워한다. 오늘 계속 시시덕거리며 농담을 했지만 안풍친왕비의 냉정하고 엄숙한 얼굴을 대하면 아직도 머리털이 쭈뼛이 선다. 이제 그녀가 갔으니 원경릉에게, “돌아가서 보친왕이 체포된 걸 보고 화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왕비마마께서 그렇게 똑똑하신 데 우리가 공모해서 호랑이를 산에서 유인해 낸 걸 분명 아실 거예요.”원경릉이 작게 한숨을 쉬며, “미색도 왕비 마마께서 똑똑하시다고 했지? 그런 마마께서 왜 모르시겠어.
안풍친왕비와 홍엽“그 말부터 이미 쓸데없어!” 안풍친왕비는 홍엽의 얼굴에 걸린 엷은 미소를 보며 차주전자를 가져다 자기 잔을 가득 채우고 차주전자를 밀어 놓더니, “말해!”홍엽공자는 약간 겸연쩍어 하며 방금 태연하던 모습도 약간 수그러들었다, “좋습니다. 왕비마마께서 직구를 좋아하시니 저도 말 돌리지 않죠. 오늘 왕비께서 이리 나리 저택을 가신 후 태자전하께서 사람을 데려와 보친왕을 잡아가셨습니다. 이 일은 틀림없이 마마께서도 속으로 생각이 있으셨을 것이고 제가 군소리할 필요 없을 겁니다. 보친왕은 어릴 때부터 마마께서 키우셨으니 형수와 시동생의 정이 모자의 정과 같다는데 보친왕이 사형을 언도 받는 것을 보고싶지 않으셨을 겁니다. 제가 방법이 있어 왕비 마마를 돕고 싶습니다.”“뭘 돕겠다는 건가?” 안풍친왕비의 눈빛이 빛났다.“그…… 당연히 왕비마마께서 보친왕을 구해내는 것을 돕겠다는 뜻입니다.” 홍엽이 말했다.“왜 걔를 구해야 하지?” 안풍친왕비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차갑게 물었다.홍엽이 웃으며, 좁고 긴 봉황 눈매에 예광이 번뜩이더니, “마마께서 저에게는 까놓고 말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마마께서는 빙빙 돌려 말씀하십니까? 제 뜻을 아시니 까놓고 얘기해도 무방할 것 같군요. 겉치레 말도 아끼고.”안풍친왕비가 살짝 화가 난 눈빛으로, “내 말은 분명하네. 왜 걔를 구해야 하지? 자네는 내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불법을 행하길 바라는가?”홍엽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하게, “그럼 마마께서는 두 눈 멀쩡히 뜨고 보친왕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걸 보시겠다는 겁니까? 아시지요, 보친왕이 저지른 일이 죽을 죄입니까?”안풍친왕비가 차갑게, “자네도 말하지 않았나, 그가 범한 일은 죽을 죄라고. 어차피 죽을 죄이고 국법에 따라 처리해야 하는 법, 태자가 걔를 잡아가서 판결을 하든 참수를 하든 그것도 그의 죄에 따른 응분의 대가니 누가 걔를 구한다면 국법을 무시하는 것이지.”홍엽공자는 왕비가 이런 식으로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순간 당황해서,
아이를 지우지 않으려는 주명양우문군과 주명양은 주씨 집안의 별장으로 이사를 갔는데 주명양이 이사 가기 전에 히스테릭 하게 한바탕 난리를 치고 억지로 마차에 묶여 보내진 뒤 후문으로 끌려 들어갔다.방에 들어가서 막 묶인 것이 풀리자 우문군이 약을 가지고 들어왔다.우문군이 먼저 들어와서 사람을 시켜 약을 가져오게 했는데 분량을 늘려 반드시 복중의 아이를 유산시키도록 했다.주명양은 우문군을 목도하고 안색이 확 변하며 뒤로 물러서더니, “어쩌려는 거예요?”우문군은 사람들을 문밖으로 쫓아낸 뒤 약을 탁자 위에 두고 평온한 어투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약을 마셔.”주명양은 짙은 검은 색에 붉은 빛이 도는 약을 보니 김이 무럭무럭 난다. 우문군의 험악하게 변하기 시작한 얼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를 부여잡고 고개를 흔들며, “싫어요!”“마셔,” 우문군의 말투가 살벌한데, “당신이 마시는 게 모두에게 이로워. 궁이 이런 욕을 먹을 필요가 뭐가 있어? 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으로 할 수 있으니, 아이를 지우기만 해.”주명양이 다급하게 고개를 흔들며, “싫어요, 이 아이는 태자의 아이예요, 얘는 천명을 받은 황제라고요. 앞으로 황제가 될 아이에게 이럴 수는 없어요.”우문호의 눈에 냉혹함이 비치며, “그거 알아? 네 배속에 아이가 아바마마의 아이라고 하면 내가 차라리 믿겠어. 하지만 우문호의 아이라니 절대 믿을 수가 없어.”“바로 그이 아이예요, 태자 아이라고요.” 주명양이 의자 뒤로 숨으려고 하는데 어지러운 눈빛으로, “알아요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게 당신에게 미안한 일인 거. 하지만 난 정말 그를 좋아해요. 아이를 살리게 해주세요. 이 아이만 살릴 수 있으면 뭐든 다 할 게요.”방안은 어두운 가운데 창살에 비치는 약간의 빛 줄기가 우문군의 옆 얼굴을 비춰 더욱 냉정하고 포악하게 보였다. “이건 상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내 한계를 도발하지 않는 편이 좋아. 주재상에게 널 죽이지 않는다고 약속했지만, 나한테는 네가 죽는 것만 못하게 살 게 할 방
박원이 깨어나나?박씨 집안 사람은 제왕의 말에 반신반의하는데 특히 박씨의 어머니는 하도 많이 실망을 한 지라 매번 눈을 뜰 때마다 깨어나나 싶다가 실망하길 반복 했다.그리고 제왕이 와서 함께할 때 아무도 옆에서 시중을 들지 않아 직접 말하는 걸 들은 사람은 제왕밖에 없다.원경릉이 살짝 그의 팔을 치면서, “알겠어요, 긴장하지 말고 계세요, 제가 들어가서 볼 게요.”“예, 그래요!” 제왕이 원경릉의 말에 장단을 맞추며 여전히 긴장한 상태다.원경릉이 문을 밀고 들어가자 계집종이 지키고 있다가 원경릉을 보고 얼른 자리를 비켰다.박원은 침대에 누워 있고 이때는 눈을 감고 있는데 원경릉이 약상자를 열어 청진기를 꺼내고 일단 심장소리를 들은 뒤 눈을 뒤집어 보았다. 곁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서 숨죽이고 지켜보는데 박씨 부인은 대인에게 기대서 긴장한 나머지 얼굴이 새파랗다.원경릉이 검사를 하고 있는데 박원이 갑자기 스스로 눈을 떴다.눈을 뜬 것을 보고 원경릉이 웃으며 마음을 놓은 게, 그 눈빛이 초점이 있어 원경릉의 얼굴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표정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는데 거의 막연한 상태지만 원경릉이 손을 뻗어 그의 눈 앞에서 움직이자 그의 눈동자도 천천히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었다.“어때요? 깨어난 겁니까?” 제왕이 긴장하며 물었다.원경릉이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보고 눈웃음이 지으며, “맞아요, 깨어나는 조짐이 보여요.”“정말인가요?” 박씨 부인이 입을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오열이 터져 나왔다.“다들 우선 나가 있으세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으면 안되요. 제가 다시 몇 가지 검사를 해보려고요, 완전히 소생하는 것이든 아니든 이건 획기적인 진보예요.”“예, 그러죠!” 박씨 부인이 얼른 밖으로 사람들을 내보내고, “다들 우선 나가자, 나가.”제왕이 마치 이제서야 자신의 신분을 깨달었는지 가장 긴장하면 안 되는 걸 느끼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밖으로 나갔다. 마당으로 나가니 원용의가 달려왔다.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얼굴이 벌겋고
박원을 해친 자는 누구인가원경릉이, “못 알아보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혼수상태였기 때문에 어쩌면 단기 기억에 공백이 생겼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해요 서두르지 마시고.”“살아나기만 하면 됩니다.” 박씨 부인이 두 줄기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기억하던 못 하던 살아나기만 하면 돼요.”사람들이 여러 조로 나뉘어 들어가는데 일단 박대인 부부가 들어가 침대 곁에 앉아 박원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한없이 바라봤다.그들이 나오고 박씨 집안 다른 사람도 들어가더니 마지막에 원용의와 제왕만 남았는데 둘이 마주보더니 제왕이 작은 소리로, “난 안 들어가니, 들어 가요.”원용의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요!”원용의가 들어간 뒤 침대가에 앉아 박원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웃더니, “아직 날 기억해요? 저 원용의예요, 우리 전에 같이 사냥하고 낚시도 하고 싸우기도 했죠. 기억나요?”박원이 원용의를 보고 눈가가 촉촉해 진다.원용의는 순간 입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제왕이 문밖에서 보다가 묵묵히 돌아서서 갔다.박씨 집안 사람들은 아무도 만류하지 않는데 다들 기쁨에 휩싸여 그가 가는지 조차 발견한 사람이 없었다.저녁에 우문호가 돌아와 박원이 깨어났다는 애기를 듣고 너무 기뻐서 바로 그를 보러 가는 김에 몇 마디 말도 물어보겠다고 했다.원경릉이, “자기는 우선 가지 마, 지금 그에게 물어도 아무것도 당신에게 대답하지 못해. 말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기억한다고 할 수는 없어. 뇌에 산소결핍이 있었기 때문에 뇌 신경 세포가 손상을 입었거든, 시간이 좀 지나면 어쩌면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몰라.”우문호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어서, “그러니까 기억을 잃었다는 말이야? 앞으로 기억해 낼 수 있을까?”원경릉이, “예상할 수 없어. 무과 장원은 확실히 무과 장원이야, 투철한 의지에 감탄 했어.”우문호가 한숨을 쉬며, “지금도 기쁜 일이긴 한데 기억할 수 있으면 더 기쁠 텐데 말이야. 보친왕이 자신은 박원에게 중상을 입히지 않았다고 했거든. 바꿔 말해
깨어난 박원, 찾아온 홍엽“푸른 옷을 입은 자는 조사해도 별게 나오지 않을 것 같아. 홍엽은 분명 당신이 사람을 보내 자기를 지켜본다는 걸 알고 있어. 그자가 나타나서 홍엽을 만났다는 건 아무 일에도 관련이 없을 게 틀림없어.” 원경릉이 말했다.우문호가 생각에 잠기더니, “홍엽이 이번에 직접 온 건 아마도 병여도 때문일 거 같아. 병여도의 관건은 보친왕이라 홍엽이 안풍친왕비를 찾아간 거지, 안풍친왕비가 그의 말을 거절했으니 다음 단계로 그가 누구를 찾을까?”“어쨌든 우리 초왕부 사람일 리는 없어.” 원경릉이 돌아와서, “좀 나아졌어?”“많이 좋아졌어!” 우문호가 한손으로 원경릉을 끌어안고 가슴에 품더니 제멋대로, “확실히 좀 느슨하게 해야 겠어.”원경릉이 다음날 계속 박씨 집으로 갔다. 박원의 진전은 크지 않았지만 시선과 표정으로 그와 이 세계가 단절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원경릉이 박씨 집안에 한의사를 찾아보라고 건의하며, 박원에게 침이나 뜸을 뜨는 게 어떨지 조심스럽게 추천했다. 한의학 각도에서 침이나 뜸으로 혈자리를 자극하는 게 일정한 작용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다시 이틀이 지나고 박원은 삼키는 동작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건 엄청난 진보로 계속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박원은 드디어 콧줄로 연명하던 삶에서 벗어났다.이날 원경릉의 마차는 박원 집에서 나와 곧 초왕부로 돌아오기 전에 골목에서 저지당했다.마차를 모는 건 만아로, 가리개를 젖히고 원경릉에게, “홍엽공자라는 사람인데요.”원경릉이 놀라서 만아가 젖힌 가리개 틈으로 내다보니 과연 붉은 옷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홍엽이 마차 앞에서 예를 취하고 잘 생긴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우더니, “지난 번 헤어진 뒤로 태자비께서는 안녕하십니까?”“잘 지냅니다!” 원경릉이 답하고, “제가 좀 바빠서 마차에서 내려 공자와 인사를 나누지 못합니다.”말 뜻은 분명했다. 길 막지 말고 얼른 비키라는 것이다.홍엽공자는 전혀 파악을 못한 체하며, “전에 댁에
초왕부를 구경하는 홍엽할머니는 원경릉의 암시를 알아 듣고,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홍엽공자가 만나자고 하는 걸 거절했다. 그리고 만아에게 홍엽공자에게 다음에 몸이 좀 좋아지면 직접 홍엽공자를 찾아가서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전하게 했다.만아가 나와서 보고하니 원경릉이 상당히 유감이라며,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노마님께서 몸이 불편하셔서 나와서 만나 뵙기 어렵다고 하시니 공자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홍엽공자가 친절한 눈빛으로, “노마님은 괜찮으십니까? 제가 의술을 약간 압니다만 제가 직접 가서 노마님 진맥을 해 드리는 게 어떤 지요?”원경릉이 미소를 지으며, “공자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만, 노마님 본인이 의원이십니다. 공자를 번거롭게 할 필요 없으니 나중에 노마님께서 쾌유하시면 찾아 봬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홍엽공자가, “그러는 수 밖에요.”홍엽공자가 일어나 예를 취하고, “초왕부는 처음 와봤는데, 듣자 하니 초왕부의 경치가 아름답다면서요? 여기저기 둘러봐도 될까요?”원경릉은 홍엽이 일어서자 헤어질 줄 알았는데 초왕부를 돌아다니겠다고 할 줄 상상도 못했다. 살짝 놀라 홍엽을 보는데, 속으로 도대체 무슨 꿍꿍이를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선물을 가져온 손님이고 두 나라가 지금 관계가 나쁘지 않아서 밖으로 쫓아내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게 뻔하다. ”그거 좋군요, 사람을 시켜 공자님을 모시고 여기저기 둘러보시게 하겠습니다.”홍엽이, “태자비 마마께서 함께 하실 수는 없으십니까? 주인의 도리를 다할 겸 저에게 인정을 베푸시는 것으로, 저에 대한 노마님의 마음의 빛을 갚으시는 셈 치고 어떠십니까.”홍엽의 목소리가 부드러운데, 원래 이런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 지기 마련인데 원경릉은 오히려 아주 불편했다. 홍엽의 말은 반박할 수 없게 강요하는 말투로 거의 납치당하는 수준이다.주인의 도리 어쩌고, 마음의 빚이 저쩌고 하면 거절할 수 없다.원경릉은 원래 별로 같이 있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까지 강요하는데 숨으면
홍엽의 회상홍엽의 아름다운 얼굴이 시름으로 살짝 덮여 경건하고 엄숙하다. 붉은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고 머리에는 관을 쓰지 않아 검고 긴 머리를 등 뒤에서 질끈 묶어 한층 소탈해 보였다.홍엽은 인공 산을 보다가 갑자기 원경릉에게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어릴 때 걸핏하면 인공산에서 뛰어내려서 호수에 잠수하곤 했죠. 물고기와 웃고 노는 거보다 즐거운 게 없거든요.”원경릉이 천천히 걸어가 인공산을 보니 물이 호수로 떨어지며 하얀 물거품을 튀기는데 아주 멀리 있다 보니 물고기가 거기서 놀고 있는지 보이지 않아 별 생각없이, “그래요? 선비족도 정원에 인공산과 폭포를 만드는 걸 좋아했군요?”“전 북당에서 자랐어요.” 홍엽공자가 돌아서서 인공산을 뒤로 하고 원경릉을 바라보더니, 눈동자가 적갈색에 가느다란 남색 줄이 있는 호박 보석처럼 빛을 내며, “제가 처음 태자비 마마를 봤을 때는 궁중 연회였습니다.”원경릉이, “그래요, 우리는 궁중 연회에서 처음 만났죠.” 홍엽이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뜬금없는 게 마치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 같지만 하여간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그 한번 이후로 태자비 마마를 다시 만나고 싶었죠, 그래서 북당에 잠시 머무르며 태자비 마마와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기억 못 하시겠죠?”원경릉이 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가요?”홍엽공자가 원경릉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밝지 않은 표정으로, “태자비 마마,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전 태자비 마마께 헛된 마음 품지 않았고 그저 마마의 생김새가 제 옛 친구를 매우 닮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보고 싶었던 거죠.”“보고싶으신 거면 왜 직접 그 분을 찾아가 보지 않으시나요?” 원경릉이 물었다.홍엽공자가 눈을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제 친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이생에 다시는 볼 수 없죠.”원경릉이 놀라 홍엽을 쳐다봤다.홍엽의 눈에서 슬픔과 애수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이, 그 얘기는 진실이며 조금도 연기 같지 않았다. 게다가 눈가가 촉촉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