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경릉을 찾아 온 원륜문희망은 깨끗하게 사라졌다.원경릉이 초왕부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원륜문이 왔다는 전갈을 들었다.원경릉이 원륜문의 얼굴을 보니, 희고 깨끗한 고상한 얼굴에 벌건 손바닥 자국이 나 있고, 한 쪽 볼이 부어 올라 있다. 정후는 무장 출신으로 따귀를 한 대 때리면 사람이 반쯤 넋이 나가곤 한다.원륜문은 화가 났지만 방법이 없어 원경릉에게: “이 일은 아버지와 말이 통하질 않아, 아버지는 둘째 동생이 무사히 시집 가도록 주씨 집안에 꼬리치느라 정신이 없으시다.”원경릉이 가볍게 탄식하며 녹주에게, “빙고에 가서 얼음 한 조각 꺼내 수건으로 싸서 가져오너라.”녹주가 명을 받들고 나가서 잠시 후 얼음을 가지고 돌아오자, 원경릉이 수건으로 싸서 원륜문 얼굴에 얼음찜질을 했다.원륜문이 원경릉을 보고, “동생, 아직 방법이 있을까? 왕야께 도움을 구해볼 수 없을까?”“구해봤어, 그 죽일 놈이 싫데.” 원경릉이 말했다.원륜문이 꾸짖으며, “동생, 왕야를 그렇게 말하면 안돼, 왕야는 좋으신 분이야.”“오빠는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판단하길래 그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야?” 원경릉이 불쾌하다는 듯 말했다. 오빠도 혹시 초왕의 권세에 아부하고 있는 거 아냐?“왕야는 나라를 위해 전쟁에 나가 싸우고, 아무런 공도 다투지 않는데 어찌 좋은 사람이 아니냐?” 원륜문은 평소처럼 원경릉을 흘깃 보며, “설사 너를 잘 대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네 자업자득이야, 네가 왕야의 앞길을 망쳐 놓았으니.”맞는 말이다. 이게 어떻게도 씻을 수 없는 원경릉의 원죄다.원경릉은 화제를 돌릴 겸, “이 혜정후라는 사람이 정말 그렇게 악랄해?”그렇게 철저하게 악한 사람이라면 도대체 낯짝이 얼마나 두껍길래 이 세상을 멀쩡히 살아가는 거야?“잘 모르지, 하지만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혜정후가 삼방부인을 학대해서 죽였고, 또 이 인간이 여색을 밝히는데 마음에 드는 촌 아가씨나 신분이 낮은 여자는, 반드시 사로잡아 가는데 안타깝게도 증거가 없다고.”원경릉은 가슴
원경릉의 이상한 행동이 미친 생각이 원륜문이 간 뒤에도 계속 자라났다.원경릉이 방에서 약 상자를 점검했다. 마취제, 있고, 거즈, 있고, 지혈제, 있고, 응급처치용 도파민, 있고, 아트로핀, 있고, 그 외 각종 자질구레한 약품들.비수, 없다. 서일한테 빌릴 수 있을 것이다.준비는 끝났다. 조사만 하면 된다.원경릉은 혜정후가 어디 자주 나타나는지, 언제 어떤 길을 지나는지, 신변을 보호하는 자가 얼마나 있는지, 무슨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는지 조사해야 한다.서일이 생각하기에 요즘 왕비마마께서 이상하시다. 한번은 와서 비수를 빌려줄 수 있냐고 물어보시고, 한번은 와서 다른 암기는 없냐고 물어보시고, 한번은 남자의 가장 도드라진 특징이 뭐냐 고 묻질 않나.앞에 두 가지 경우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맨 뒤에 그건 사실 말로 하기 쉽지 않다.왕비는 정말 엄청나게 단순하다.어느 날 왕비마마께서 참신하게 남장을 하고 문밖을 나서는 것을 보고, 심지어 녹주나 상궁 둘을 데려가지 않고 후문으로 나가시는 것을 목격했다.서일은 이상하게 여겼지만 묻기가 죄송했다. 왕비께서 이런 취미를 가지고 계셨 다니, 이거 정말 송구하구만.둘째 날, 왕비는 찐빵 두개를 들고 또 밖으로 나갔는데 이날은 하루 종일 걸려 날이 어둑어둑 해서야 돌아오셨다.셋째 날도 마찬가지 였다.서일 생각에 왕야께 말씀드릴 필요가 있겠다.우문호는 붓기를 가라앉힌 후 바로 경조부로 가서 인수인계를 하고 정식으로 경조부 부윤 직을 맡았다.새로운 인사는 한바탕 질서있는 정돈이 필요한 법, 경조부 관원 수십명은 얽히고설켜서 인맥은 꼬일 대로 꼬여 있고, 스스로 세력권을 가지고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건 조금도 과장해서 말하는 게 아니다.우문호는 최대한 빨리 각종 업무를 숙달해야 했기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이 바빴다.이날 초왕부에 돌아오니 서일이 와서: “왕야, 요즘 왕비마마께서 이상하십니다.”우문호는 본래 상처가 있는 상태에다가 원경릉 얘기를 들으니 조금도 흥미가 생기지 않아, “왕비나 원
원경릉과 혜정후 눈이 마주치다우문호는 ‘응’하더니, “아첨하는 게 원경릉의 주특기 아니냐.”원경릉은 며칠 조사를 계속하며, 혜정후가 경성(傾城) 기생집에 노래를 들으러 자주 간다는 걸 알아냈다.하지만 날짜를 정해서 가는 게 아니라, 짬이 나면 가고 매일 가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군영에서 귀가길에 경성을 지나며 기생집에 들러 몇 곡을 듣는다.원경릉은 처음엔 들어갈 수 없었던 게 들어가서 노래를 들으려면 차 값과 상여금이 필요한데,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아 밖에서 배회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혜정후는 말을 타고 귀가하는데 보통 두 사람만 데리고 다닌다. 이 두사람은 허리에 칼을 차고, 엄숙한 얼굴로 한 명은 안으로 따라 들어가고 한 명은 밖에서 기다린다.이날은 원경릉이 돈을 가지고 있어 들어가서 노래를 들었다.청색 남자 옷을 위아래로 빼 입은 남자는 허리에 띠를 묶고 출렁이는 아름다운 머리에 제갈공명 모자를 썼다. 화장을 안 했는데도 붉은 입술, 하얀 이, 눈썹도 깔끔해 일거수일투족이 전부 여성스럽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눈썹을 약간 두껍게, 눈꼬리는 날듯이 가늘게 그려 부드러움 속에 패기를 약간 더하는 느낌이다.원경릉은 초왕부에서 서일의 걷는 자세를 배운 적이 있는데, 정말 온갖 고생을 다했다. 가슴을 동여매고 허리를 펴고, 걸음은 안정적으로 걷는 것으로 서일은 칼을 찼지만 원경릉은 쥘부채를 꽂은 게 서생(書生)이 무장의 행색으로 분장한 느낌이라 오히려 자연스러웠다.하지만 오늘 나올 땐 시간을 약간 지체한 것이, 원경병이 초왕부로 온다 길래 같이 밥을 먹고 왔기 때문이다. 원경릉은 식사를 하며 원경병을 보니, 눈에 수심이 가득한 지라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넸다.그러고 경성 기생집에 도착했을 때 혜정후의 시종 하나가 밖에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뛸 듯 기뻤다. 그 말은 혜정후가 안에 있다는 소리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려, 겨우 혜정후와 근거리에서 접촉할 수 있게 되니 원경릉의 심장이 미친듯이 쿵쾅거렸다.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혜정후와 원경릉의 아슬아슬한 대화원경릉은 자신이 혜정후의 시선에 잡힌 것을 알고, 차분 하려고 애를 썼다.원경릉의 계획은 혜정후가 먼저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사람이 많은 데서는 손을 쓸 수 없으므로 혜정후가 손을 쓸 수 있을 만한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그런데 막상 때가 닥치니 혜정후를 일망타진하듯 한 방에 잡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원경릉은 이즈음에서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일어섰다.서일이 탕양의 분부에 따라 요 근래 계속 원경릉의 뒤를 미행했는데 원경릉이 경성 기생집으로 들어서자 서일도 옆문으로 들어갔지만 앉지는 않고, 문에 기대서 쳐다보고 있었다.원경릉이 걸어 나와 주변을 보며, 요 며칠사이 부근 길이 상당히 익숙해 졌으나 오늘처럼 마음 먹고 찬찬히 고대의 거리 풍경을 바라본 적은 없는 것 같다.북당의 수도는 참으로 번화해서, 가게와 온갖 진귀한 물건이 가득 하고, 업종마다 번창한데 비단가게, 보석가게, 쌀가게, 화장품가게 모두 손님들이 가득하다.원경릉이 걸으며 정신없이 쳐다보느라 뜻밖에도 마차 한 대가 원경릉 옆에 멈춰선 것을 알지 못했다.마차 그림자가 보이자 원경릉은 놀라서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가리개가 걷히고 혜정후가 보인다.원경릉이 요 며칠 바빴던 건 다 이 사람 때문이라, 비록 가슴은 철렁했지만 그다지 놀란 척 하지 않고 약간 당황한 듯 혜정후를 봤다.마음 속으로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드는게 그동안 계속 말을 타고 다니더니 오늘은 왜 마차일까.“공자,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혜정후가 말했다.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습니다, 집이 별로 멀지 않아 금방 도착합니다.”지금은 아직 때가 아니다. 원경릉은 지금 아무런 방비도 없고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방금 공자와 경성 기생집에서 노래를 들었는데, 공자도 음악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시니, 어떻습니까? 술집에서 한잔 하시는 건?” 혜정후가 웃으며 물었다. 그가 뿜어내는 기색은 상당히 올바른 기운으로 마치 진짜 지인을 만난 것처럼 진실하게 임하고 있다.원경릉은 여전히 미
혜정후에게 납치된 원경릉“뭐 하시려는 겁니까? 풀어주십시오!” 원경릉이 몸을 일으키며 차분하지만 노기를 띠고 말했다.혜정후는 침략자의 눈빛으로 원경릉을 마치 도철(饕餮, 식탐이 심한 전설속의 짐승)의 먹이감처럼 바라보는데 눈 속에 이글대는 욕망을 전혀 감출 생각이 없다.큰 손으로 원경릉의 턱을 잡는데, 그 힘이 엄청나서 너무 아픈 나머지 눈물이 찔끔 나고 이 인간이 폭력 성향이 있다는 생각이 나자 마음이 초조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혜정후는 갑자기 손을 풀더니, 원경릉의 얼굴을 따라 매만지다가 갑자기 한 손으로 모자를 벗기니 아름다운 머리칼이 쏟아져 내렸다.“원래 계집이었군.” 혜정후의 웃음이 더 음흉해지고, 입술이 다가오며 입김을 원경릉 얼굴에 뿜는다. 입냄새가 심해서 토할 지경이다.원경릉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폭력 성향의 사람이 반항에 부딪히면 어떻게 하더라, 상대의 반항이 거세면 거셀수록 마음 속의 폭력 요소를 자극한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반항할 수 없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원경릉은 혜정후가 설마 백주대로에서 손을 쓸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는 도대체 얼마나 오만 방자하고 제멋대로인 걸까?방금 공중에 붕 떠오른 걸 보면 속도가 빨라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 같고, 설사 봤더라도 눈앞에 사람 모습이 휙 사라진 정도가 고작으로 마차를 타는 사람이 민가의 여자를 납치해서 겁탈할거라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원경릉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냉정을 되찾았다.몸을 뒤로 한 걸음 물리고, 손으로 마차 돗자리를 짚고 입술을 깨물고 고운 미소를 띤 채, “계집이 어때서요? 여자 무시하세요?”혜정후는 머뭇거렸으나 여자의 수법에 닳을 대로 닳아서 실실 웃으며, “여자를 무시하다니? 우리집에 가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노래에 대해 얘기나 좀 나눠보지 그래?”“이런 방식으로 만나는 게 싫지만, 성의를 봐서 이번은 용서하죠.” 일사천리로 쏟아내는 모습이 천진하다.원경릉은 자신이 기방의 새끼마담에 될 잠재력이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혜정후
원경릉의 납치 사실을 안 우문호서일은 머리를 푹 수그리고 들어가 감히 우문호의 노기어린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소인이 요 이틀동안 계속 왕비마마의 뒤를 따라다녔는데 마마께서 오늘 남장을 하시고 경성 기생집에서 노래를 들은 후 혜정후를 만나고 헤어지셨을 때 혜정후의 마차가 마마님을 낚아채 갔는데 두 분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소인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왕비께서 두어 마디 답하시고 가시기에 저도 뒤를 미행했는데 혜정후의 마차가 바람같이 달려서 지나가더니 곧 왕비마마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소인은 마마께서 혜정후에게 납치되신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듭니다.”“남장? 신선이라도 되겠다는 거야?” 우문호는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원경릉은 천지사방이 이미 다 적인 걸 모르고 있나? 어디 감히 남장을 하고 밖을 나가.이런 인간은 진짜 죽어야 정신을 차리지.“신경 쓰지 마라. 죽든지 말던지.” 우문호는 쌀쌀맞게 말했다.탕양이 권하듯: “왕야, 지금 화를 내실 때가 아닙니다. 왕야께서도 혜정후가 어떤 사람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또한 혜정후는 지금 왕비마마의 신분을 모르니 만약 왕비께서 그의 수중에 떨어지면 죽는 게 차라리 낫다고 여길지도 모릅니다.”“그건 자업자득이지, 누가 함부로 돌아다니라 더냐.” 우문호는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아니다, 혹시 자기가 혜정후에게 접근한 거 아닌가? 동생 혼사때문에.”탕양이 우문호의 대담한 추리에 펄쩍 뛰면서 그럴 리 없다는 듯: : “그럴 리가요? 왕비께서 그 정도로 대담하시진 않으십니다.”“대담하진 않지만, 멍청하지.” 우문호가 화가 나서 말했다.서일이 묻길: “그럼 이제 어떻게 합니까? 직접 혜정후부에 가서 사람을 찾을까요?”“안 가!” 우문호가 차갑게 말했다.탕양도: “왕야께서 사람을 데리고 혜정후부로 가는 건 다시 위험합니다. 어쨌든 서일의 추측에 불과하니까요, 만약 마마께서 혜정후부에 없으시면 왕야의 입장이 그야말로 난처해 집니다. 왕야께서 경조부 일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채로 이런 과실
원경릉의 신분잡혀가는 도중 원경릉은 천천히 안정을 되찾고 혜정후와 얘기를 시작했다. “이렇게 나를 마차에 태우고 가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 않아요?”혜정후는 사악한 눈빛으로 원경릉을 보고, “마음이 끌린 게 중요하지, 누구인지가 중요한가?”원경릉이: “당신은 혜정후죠?”혜정후는 원경릉이 알고 있다는 것에 전혀 놀라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오며, “무서운가?”혜정후는 얼굴을 바로 앞까지 들이미는데, 이글거리는 눈의 불꽃, 특별히 좋아하는 장난감을 만났을 때의 불꽃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린 모습이 조금도 웃고 있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비틀리고 악독하고 폭력적이란 느낌이 든다. 이 사람, 전신에서 폭력적인 요소가 뿜어져 나온다.원경릉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입술을 깨물고, “무서워요. 이렇게 가까이 오는데 당연히 무섭죠.”원경릉은 두 손을 소매 속으로 숨기고, 약 상자를 열어 어디 한 번 해보자고 뭔가를 꺼내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그러나 혜정후가 이미 알아채고 차가운 눈으로 원경릉의 손을 흘끔 보더니 피식 웃으며 그녀가 잔꾀를 부리지 못하게 막자, 원경릉은 날쌔게 손수건을 휘날리며 방긋 웃고 그의 앞을 지나갔다.헤정후는 원경릉의 턱을 잡아 억지로 얼굴을 들어 자신과 마주보게 하더니 제멋대로 냉소를 지으며, “초왕비, 며칠 내 시중을 드는데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원경릉은 이번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혜정후가 어떻게 그녀의 신분을 알지?혜정후는 원경릉의 신분을 알면서 길거리에서 그녀를 납치한 것이라면, 맙소사, 이 인간 방자하게 날뛰는 게 이지경까지 이르렀단 말인가?원경릉은 자신이 조사하는 게 완전히 비밀을 유지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애진작에 혜정후의 주의를 끌었을 줄 꿈에도 모르고 혼자 쓴 웃음을 지으며 너무 자신만만했던 게 생명의 위험을 불러들였다.“아니면, “ 혜정후가 손에 힘을 더 주자 원경릉의 턱뼈가 거의 바스러질 지경으로 더욱 위험해 지며, “초왕이 시키 더냐?”원경릉은 고통을 참으로 힘겹게: “초왕이랑
혜정후의 집에 갇힌 원경릉원경릉이 혜정후부 후문으로 끌려 들어가는데, 남장을 하고 긴 머리를 산발한 여자를 보고도 혜정후부 사람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심지어 익숙해 보였다.혜정후부에 혜정후의 이런 성향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난 가서 일을 좀 할 테니, 너희들은 잘 감시해!” 혜정후는 원경릉을 방안에 내던지고 몸종에게 분부했다.“예!” 두 명의 몸종이 몸을 굽히며 답했다.원경릉이 볼 때, 이 두 여자의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한 것이 무술을 연마한 사람이다.이 두 사람의 손에서 도망가려면 결코 무력으로는 불가능하단 사실을 알았다.하지만…… 원경릉은 소매 속의 약 상자를 더듬자 문득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다.“언니들, 나 볼 일 좀 보고 싶은데, 화장실 어딨어요?” 원경릉이 물었다.이 두 몸종은 남장 여자인 원경릉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없고, 원경릉의 눈썹이 어떤 모양인지 보더니 기방이나 놀잇배에 딸린 아가씨가, 자기가 원해서 온 줄 알고, 그래도 혜정후가 잘 감시하라고 했으니, “병풍 안쪽으로 가면 요강 있어요.”“화장실 없어요?” 원경릉이 미간을 찌푸렸다.“너무 멀어서. 나리께서 이 방에서 나가면 안된다고 분부 하셨어요. 집안에 맹견이 아가씨를 놀라게 할 수도 있어요.”맹견? 원경릉은 이 집에 들어올 때 확실히 개가 짖어 대는 소리를 들었다. 집 지키는데 맹견을 키우는 것이 틀림없다. 됐다, 병풍 뒤에서도 약 상자를 꺼낼 수 있으니까, 몸종들이 용변보는 데까지 들어와서 쳐다보진 않겠지?원경릉은 병풍 뒤로 가서 요강에 쭈그리고 앉아 바깥의 동정을 자세히 살폈다. 두 명의 몸종은 꼼짝 앉고 서있지만 안으로 들어오진 않았다.원경릉은 가볍게 약 상자를 꺼내고 제일 먼저 서일에게 빌린 비수를 약 상자에 넣었으나 약 상자를 다시 넣으려고 하니 비수가 있어서 그런지 작아 지질 않아 결국 비수는 안에 넣지 못했다.지금 보니 마취약이 그녀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다.하지만 마취약은 딱 주사기 하나 뿐이고 그나마 한 사람 마
잔뜩 긴장한 채로 앞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었던 주 지부는 우렁찬 상대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렸다. 그는 이내 팔을 뻗어 망루의 기둥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공에서 멈추고 말았고, 그대로 몸이 앞으로 쏠려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말에서 빠르게 날아올라,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달려갔다. 상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주 지부가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그를 안고 빙 돌아서 바닥에 착지했다.주 지부는 깜짝 놀라서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반짝거리는 눈망울에, 품위 있는 모습의 젊고 잘생긴 사내였다. 주 지부는 그를 황제의 호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새도 없이 그에게 예를 올렸다.“대인,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그때 말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서일이 먼저 말에서 내려,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괜찮으십니까?”우문호도 매우 놀란 듯했다. 조금만 늦었다면, 주 지부는 정말 죽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숨을 들이쉬었다.“괜찮다.”그러고는 주 지부를 보며 물었다.“자네는 누구요?”주 지부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누가 황제인지 추측했다.황제는 올해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알려져 있었기에 위엄이 넘쳐 보일 것이었다. 그는 일행 중, 냉 수보와 홍엽을 만난 적 있었기에, 거친 모습을 한 이 인물은 아마도 호위로 추측된다. “묻지 않았소? 자네는 누구요? 어찌 죽으려고 하는 것이오?”서일은 그가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큰 소리로 다시 물었다.주 지부는 울 지경이었다. 냉 수보가 그를 보고 있으니, 예를 올려야 하지만, 황제도 자리에 있으니, 바로 냉 수보에게 예를 올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대체 누가 황제란 말인가?그는 황제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어, 결국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고는 그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은 목소
원경릉의 말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고, 자리에 있던 관리들은 기쁨과 동시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 대인은 땅에 엎드려 온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는 살아생전에 자신이 황제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평소 차분하고 신중한 주 지부도, 그도 감정이 격해져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다.황후를 만난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라 생각했는데, 황제까지 오신다는 소식에 그의 마음은 흥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원경릉은 평생을 경성에서 다섯째와 함께 있었기에, 그녀는 그저 그가 온다는 사실을 간단히 전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다들 걱정 없이 역병을 치료하고, 언제나 황제가 그들의 뒤를 든든히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보니, 황제가 직접 오는 것이, 지방 관리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원경릉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폐하게서는 그저 역병 때문에 온 것이니, 모두 각자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네.”“예, 예, 마마의 명을 따르겠습니다.”주 지부가 눈물을 닦으며 답했다.그렇게 관아와 의서가 협력하여, 오계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원 할머니는 역병을 치료할 수 있는 처방을 몇 가지 내렸다. 경증 환자는 약차를 계속 마시고, 증상이 악화하거나 중증 환자는 그녀의 처방을 사용하도록 했다.전에 이미 근처 주부에 연락해 약을 보내라 명했고, 오계부에서 구비한 약까지 있으니, 이번 역병을 대처할 수 있었다.오계부 의서는 이번 역병을 과거의 역병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한 것 외에는 준비가 충분했다.원경릉은 황제 일행이 저녁 무렵 오계부에 도착할 것이라 예상했다.주 지부는 원래 여러 관리와 함께 황제를 맞이할 예정이었지만, 원경릉이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녀는 황제가 미복 순행 중이니, 과하게 맞이하여 백성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그 말에 주 지부는 당황했다.황제가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맞이하지 않는다니, 어찌 그럴 수 있다는 말인가?그러나 그는 황
약을 쓰자, 주 지부의 열이 단번에 내려갔다.열이 내려가니 정신이 맑아져, 그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애써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마마에게 예를 올리겠다고 고집 피웠다.원경릉은 그에게 누워 있으라고 말한 후, 역병에 관해 이야기하며 주 지부에게 이를 중시할 것을 당부했다.주 지부는 이를 듣고 깜짝 놀라 말했다.“소신은 매일 의서에 사람을 보내, 역병의 상황을 보고받고 있사옵니다. 매일 보고된 상황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역병이 발생했지만, 작년과 비슷한 정도였고, 약재도 충분한데, 어찌 이렇게 심각해진 것입니까?”“매년 역병이 발생했으나, 대대적으로 퍼지지 않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네.”원경릉이 답했다.“의서의 이 대인을 불러, 상황을 확인하겠습니다.”주 지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어제 이미 그를 찾아가,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조사하라 명했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것이네. 자네가 사람을 보내, 관아에 와서 상황을 보고하도록 하게.”“예!”주 지부는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푸른 옷을 입은 남자는 관아에서 일하는 관리였기에, 그는 반 시진도 채 되지 않아, 관아 내에서 병에 걸린 자가 얼마나 되는지 통계해냈다.관아 내에서 역병 증상을 보인 사람은 총 열여덟 명이었고, 그중 두 명은 병세가 심각하여 이미 집에서 쉬고 있는 상태였다. 주 지부는 관아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병에 걸린 줄 몰랐고, 관리의 보고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았다.의서의 이 대인은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바삐 움직였다. 서관 대인이 직접 오셨으니, 어떻게든 시키는 일을 완성해내야 했다.그는 사실 역병이 그다지 심각하지 않고, 그저 작년과 비슷하다고 여겼었다.하지만 여러 지역과 의원을 돌아보고 나서야, 이번 역병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처음엔 그저 서관 대인에게 보고만 하려고 했지만, 병세가 심각해지자 그도 조급해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인원수를 통계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다섯째 일행은 여전히 도착하지 않았다.그래서 원경릉과 할머니는 다른 의관을 더 둘러보기로 하고, 몇 군데 더 돌아본 뒤 관아에도 갈 계획을 했다.그런데 한 의관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옷을 입은 중년 남자가 다급히 뛰어오며 말을 걸었다. “수 의원, 대인께서 병세가 위중합니다. 어서 봐주셔야 합니다.”의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약상자를 집어 들고 다른 환자들을 그냥 남겨둔 채, 푸른 옷의 중년 남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원경릉이 그를 막아 세우며 말했다.“의관에 있는 환자들을 돌봐야 하지 않소? 우리 할머님께서도 의원이니, 지부 대인의 병은 할머님께서 봐 드릴 것이오.”푸른 옷의 사내는 초조한 듯 원경릉을 향해 소리쳤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오!““대인의 병세가 급박한데, 혹여라도 지체되면 당신들이 책임질 수나 있겠소?”바로 그때, 원 할머니가 호패를 꺼내, 그의 눈앞에 들이밀며 단호하게 말했다.“길을 안내하거라!”조급한 표정을 짓던 푸른 옷의 사내는 호패를 보자마자 표정이 얼어붙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그는 곧장 허리를 굽혀 예를 올리며 말했다.“서관 대인께서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무례를 범해 송구하옵니다.”“그만 사과하고 길 안내나 하시오.”원경릉이 말했다.“예, 예!”사내는 급히 물러서서, 예를 갖춰서 길을 가리켰다.“마차가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서관 대인, 이쪽으로 오시지요.”원경릉은 할머니를 부축해 마차에 올랐고, 곧장 관아로 향했다.지부 대인은 따로 사저가 없어 관아의 뒷마당에서 거주 중이었다. 혼자 지내는 데다 관아가 워낙 가까워 편리했기 때문이다.관아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마스크를 착용하고 안으로 들어갔다.주 지부는 병세가 꽤 심각해져 있었다. 그는 어지럼증과 흉통에 시달려, 침대에 누운 채 말을 꺼낼 힘도 없었다.원경릉은 직접 치료에 나섰고, 약상자를 열어 체온 측정기와 청진기를 꺼냈다.푸른 옷의 사내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가씨께서도 의원이십니까?”그러자 곁에 서
이 대인이 원경릉에게 의학을 잘 모른다고 반박할 틈도 없이, 원 할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대로 하게. 하루만 줄 테니, 그 안에 역병에 관한 모든 자료를 가져오게. 사망자 수도 포함되어야 하네." 이 말까지 듣자, 이 대인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비록 조사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서관 대인이 멀리서 오계부까지 왔으니, 시키는 일은 해야지 대인의 마음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을 보내 조사를 명한 후, 이 대인은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원경릉이 말했다. "괜찮습니다. 의서에 의원이 많지 않으니, 대인도 바쁘실 텐데요. 저희가 직접 오계부를 돌아보겠습니다." 이 대인은 그녀가 원 할머니의 힘을 빌려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대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에 답도 하지 않고, 원 할머니에게 예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머무실 계획이 있으시면, 부디 저에게 알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 대인을 잘 대접하라, 명을 내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일이나 보게." 원 할머니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원경릉에게 말했다. "먼저 좀 돌아보다, 객사를 찾아 머물자꾸나." "예!" 두 사람은 역병을 조사하기 위해 다급히 이곳을 찾아왔기에, 먼저 각지의 의원을 직접 돌아보려 했다. 아마 다섯째 일행은 빨라야 내일이나 모레쯤 도착할 것이었다. 두 사람이 의서를 나서자, 이 대인은 뒤따라 나오려다 원 할머니의 날카로운 눈빛에 움찔하며 발길을 멈췄다. 두 사람은 오계부의 거리로 향했다. 거리가 꽤 번화했고, 사람들도 제법 많아, 대낮에는 조금 붐볐다. 그들은 곧장 의원으로 향했다. 의원 앞에는 약차가 많이 진열되어 있었지만, 환자는 얼마 없었다. 겉보기엔 역병이 퍼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원경릉은 안으로 들어가 의원에게 상황을 물었다. 그러자 의원은 요즘 들어 약차가 잘 팔리고 있고, 하루에 천 봉지가 넘게 팔린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도 역병
늦게 출발한 원경릉은 신속하게 오계부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오계부 근처 주현에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현지 혜민서로 가야 한다며 잠깐 멈추자고 했다. 그러고는 혜민서에 오계부로 약을 공급할 준비를 하게 했고, 명을 받으면 바로 오계부로 보낼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당부했다. 혜민서 산하의 의료기관들은 지난 몇 년간 개혁을 통해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고, 지역 간의 연결도 긴밀해졌다. 특히 역병을 상대하는 체계가 가동되면 상부에서는 전력을 다해 의원과 약을 지원해줄 수 있었다. 신신당부한 뒤에야 원경릉과 할머니는 오계부로 재빨리 향했다. 곧이어 오계부에 도착했는데, 우문호 일행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계부는 인구가 500만 명에 이르는 곳으로, 두 개의 주부가 통합된 지역이었다. 열대에 있어, 경작지가 많고 산이 많아 농업을 위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조정은 이곳을 서부의 주요 곡창지대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지역은 상대적으로 경제도 번화했고, 현지 백성들은 벼 외에도 감, 자두, 리치 등을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리치는 신선할 때 먹을 수도 있고, 말려서 건과로 만들어 팔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지역 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었다. 오계부는 백월국과 인접해 있었는데, 백월국은 북당의 속국으로 사이가 우호적이며 경제 교류도 활발했다. 이는 양국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오계부의 지부는 장씨 성을 가진 오계부 출신이었다. 장 지부는 훌륭한 관리이며 지역 백성들로부터 존경받고 있었다. 원경릉과 원 할머니는 오계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지역 혜민서를 찾았다. 할머니는 혜민서의 서관(署館) 신분을 밝혔다. 그녀는 북당 각 주부의 의서를 총괄하는 인물이고, 총책임자이기도 했다. 혜민서의 이 의원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두 사람을 안으로 청한 후, 바로 예를 올렸는데, 마치 신선이라도 본 것처럼 목소리까지 떨고 있었다. "소인은 이자옥이라 합니다. 어르신께서 친히 오신 줄도
그녀는 일단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냉 대인이 자세한 상황을 묻는 사이에 제 대인의 피를 뽑았다. 약상자는 기능이 꽤 다양하기에, 바이러스 검사도 문제없었고, 안에는 양여혜가 준 소형 현미경도 있었다. 하지만 바이러스 관찰이나 세균 배양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오계부로 향하고, 그녀는 이곳에 남아 제 대인을 치료하고 검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면 바이러스든, 세균 감염이든, 결과가 나와야 제대로 된 치료 방안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미색이 말했다. "저도 이곳에 함께 남겠습니다. 제가 환자를 돌보는 것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괜찮으니 먼저 가거라. 어쩌면 내가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으니깐." 원경릉이 말했다. 그녀는 혼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지만, 미색까지 데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먼저 출발하는데, 어찌 더 일찍 도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미색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가능한 일이다. 원 선생은 늘 기적을 만들어내니." 우문호가 말했다. 그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원경릉에게 다가가 조심하라고 몇 마디 당부했다. "알았소. 지체하지 말고, 어서 떠나시오. 오계부에 도착하면 곧바로 관아를 찾아가, 의원의 빠른 대처를 명하라 하시오. 만약 내가 먼저 도착한다면, 내가 관아를 찾아가겠소." "알겠소. 그럼, 먼저 가겠소!" 우문호는 그녀와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보는 이가 많으니 그저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서일은 황후를 홀로 두고 가는 것이 걱정되어, 우문호를 따라나서며 계속 물었다. "정말 황후를 이곳에 혼자 남겨도 되는 것입니까?" "그럼, 네가 남을 것이냐?" 우문호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너도 원 선생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회왕 부부도 걱정은 되었지만, 다섯째의 여유로운 모습에 자신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다섯째 부부는 늘 비밀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들은 더 이상 신경
원경릉은 밖으로 나가, 오계부에 역병이 생긴 것 같다고 전했다. 오계부는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기후가 더운 탓에 가끔 역병이 생기긴 했었지만 백성들은 고뿔 치료에 쓰이는 약초로 끓인 차를 즐겨 마시기에, 대규모로 역병이 돈 적은 없었다. 냉 대인이 말했다. "오계부에서는 이 상황을 조정에 알리지 않았습니다. 비록 해마다 역병이 생기긴 하지만, 빠르게 통제해 왔으니, 이번에도 예전과 같은 상황이지 않겠습니까?" 원경릉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이번엔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제 대인의 형도 역병으로 돌아가셨고, 그와 가까이 지낸 사람들도 병에 걸렸습니다. 이렇게 관아에만 역병에 걸린 자들이 많으니, 예전보다 더 심각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해마다 역병이 생겼으니, 그에 대한 대응책도 이미 있을 것입니다." 원경릉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해마다 역병이 생겼지만, 대대적으로 유행하지 않았기에, 현지 관리들이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쉽게 통제될 것이라 생각하고, 방심할 수도 있으니깐요." 우문호가 물었다. "원 선생, 역병을 어떻게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하오?" "역병 상황이 안 좋을 것이라 추측할 뿐, 정말 오계부의 상황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네. 제 대인은 여전히 고열에 시달리고 있어, 수액을 맞히고 해열제를 먹였소. 냉 대인과 함께 들어가 상황을 자세히 물어봐야겠소. 하지만 꼭 마스크를 끼고, 병을 막아야 하오." 원경릉은 유행성 독감이나 변이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일 것이라 의심하고 있었다. 그녀가 살던 세계에서는 A형 독감의 대규모 변이가 십수 년마다 한 번씩 발생했는데, 그런 변이 독감은 현대에서도 의료 체계에 큰 부담이 되곤 했다.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역병이 다시 시작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통제해야만 했다. 원경릉의 말을 우문호와 냉 대인은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도
원경릉은 청진기를 꺼내 그의 폐를 확인해 보았는데, 남녀가 가까이 접촉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한 제 대인은 이내 손을 뻗어 그녀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병세가 심해 아픈 데다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묘한 위압감을 풍기는 의원의 단호한 눈빛과 기운에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원경릉은 앞쪽을 청진한 뒤, 그에게 옆으로 돌라고 한 다음에 꼼꼼히 살피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며칠을 아프신 것입니까?" 제 대인은 꽉 막힌 코 때문에 콧소리를 내며 천천히 몸을 돌리고 답했다. "며칠 사이의 일입니다. 오계부를 떠날 때도 멀쩡했는데, 밤새 달리고, 말을 오래 타다 보니 고뿔에 걸렸나 봅니다." "기침 말고, 가슴 통증도 있습니까?" "예. 이곳이 아픕니다!" 제 대인은 가슴 근처를 손으로 누르며 말했다가, 숨쉬기가 어려운 듯 손바닥을 움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도 아프고, 온몸 뼈마디도 다 아픕니다." 그러자 원경릉은 더 자세히 증상을 확인한 뒤 말했다. "약을 준비할게요. 수액을 좀 맞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액이요?" 제 대인은 멍하니 원경릉을 바라보았다. "예. 질문은 하지 마시고, 그저 치료에 협조만 해주십시오. 병세가 꽤 심각한 편입니다." 원경릉은 제 대인이 폐렴이라 확신했고, 중증 폐렴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 대인은 병이 심하다는 말에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다급히 말했다. "의원 나리, 제발 최선을 다해 치료해 주십시오… 저에게는 아직 모셔야 할 노모가 있습니다. 지난달 병으로 형님께서 세상을 떠난 터라, 형님의 자식들도 제가 돌봐야 하니, 절대 이대로 목숨을 잃을 수는 없습니다." 원경릉이 답했다. "최선을 다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치료에만 집중하시지요!" 제 대인은 감동을 받은 듯 감사 인사를 올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원경릉은 곧바로 약을 지어 수액을 준비했다. 수액을 맞는 동안, 제 대인은 여전히 놀란 모습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