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 몰수를 앞두고우문호는 아이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자기들이 어릴 때, 아바마마도 이렇게 몰래 자기들이 자는 모습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가슴이 뭉클해지며 천천히 물러나왔다.우문호는 원경릉과 방에서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두 사람은 사실 몸은 너무 피곤했지만 머리는 이상할 정도로 더없이 맑았다. “아바마마께서 사실 큰 형을 편애 하셨어, 큰 아들이잖아. 자연스럽게 거는 기대가 두터웠지. 오늘 감옥에서 아바마마께서 원래 자신을 다음 황제로 생각하고 키우셨다는 말, 지금 자세히 생각해 보니 아바마마께서는 분명 그러셨던 것 같아. 어쩌면 그런 생각 뿐만이 아니고 그런 행동도 있었을 거야. 그러니 어릴 때부터 그렇게 길러졌겠지. 하지만 다음 황제 자리를 정하는 것을 계속 늦춰지고 큰형은 마음이 조급해 졌지. 이번에 저지른 많은 실수가 아바마마를 실망시켰어, 만약 형이 예전의 그때처럼 오직 국사와 군대의 일에 전력을 다하고, 아바마마의 근심을 덜어드렸다면 큰형이 태자의 자리를 맡았을지도 몰라.”원경릉이 우문호의 손을 잡고 당연히 그렇지 않았겠어? 30여년 황제의 장자로 사는 생애를 통틀어 본인이 화를 자초하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쭉 승승장구했을 것이다.자신을 파멸시키는 것은 적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이다.“내일 기왕부에 가봐.” 우문호가 원경릉에게 이렇게 말했다.원경릉이 작게, “그래!”시키지 않아도 원경릉은 갈 것이다. 기왕비는 강인한 사람으로 혼자 많은 것을 버텨왔지만 어쨌든 그녀도 한 명의 여인으로 지칠 때가 있다.원경릉은 다음날 일찍 만아와 사식이를 데리고 기왕부로 갔다.어젯밤 서일이 와서 사전에 귀띔해 주었지만 딱히 챙길 물건도 없는 것이 재산을 몰수한다는 것은 재물이 전부 국유화한다는 뜻이다.명원제의 성지에 만약 역모죄가 밝혀지면 온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고 참수한다고 했으니 이러나 저러나 재산 몰수는 정해진 일이다. 사람은 달아날 수 없고 자신의 개인 물품을 챙길 수 있을 뿐 계속 기왕부 내에 살아야 하며
기왕부 재산 몰수의 날기왕비는 간단한 요기거리를 먹으면서도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하나라도 씹어 삼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눈가가 살짝 붉어지며, “쟤들이 태자비를 따라가면 고생하지 않을 거 알아요, 분명 억울한 일도 안 당하겠지만 태자비를 고생시켜서.”“이 상황에 그런 말 하지 마요. 낙관적으로 보자고요.” 원경릉은 기왕비의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괴로웠다.“낙관적이라!” 기왕비가 손을 닦고, “난 낙관적이예요, 적어도 이 순간까지는. 아직도 두 딸을 잘 돌봐줄 수 있는 사람에게 쟤들을 시집 보내는 걸 지켜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고 있죠. 부모가 살아가는 힘은 아이에요. 마지막 순간이 오지 않았으니 희망의 불도 꺼질 수 없죠.”기왕비의 눈엔 안개가 깔리듯 눈물이 스며들면서도 웃으며, “사실 이게 최고의 결말은 아닐지 모르겠지만 만약 기왕이 하는 대로 내버려 뒀다간 여전히 딸을 팔아 영화를 구할 게 틀림없고, 이 기왕부도 조만간 못 버티고 무너지겠죠. 그러니 날 위로할 필요 없어요. 지금 생긴 이 모든 일을 전 받아들일 수 있어요.”원경릉이 진심으로 감탄하며, “진짜 강인해요. 희열이도 희성이도 다 당신을 본보기로 삼았을 거라고 확신해요.”기왕비가 웃으며, “아뇨, 역시 태자비를 본보기로 삼는게 좋겠어요. 사실 전에 저는 특히 당신 같은 사람을 무시했죠. 어질고 정의로운 마음이란 바보 같다고. 자기가 알아서 챙기지 않으면 세상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말을 신봉했죠.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 나니, 당신에게 벌어진 일들 하나하나가 인과의 순환이고 매번 흉한 일을 만나도 길하게 바꿨는데, 그건 전부 태자비가 심어 놓은 은혜의 씨앗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사람 답게 사는 건 역시 열심을 가지고 큰 뜻을 품는 게 제일이란 걸 말이죠. 사실 저만 봐도 그래요. 만약 계속 태자비랑 적으로 지냈으면 오늘 두 딸을 맡길 곳이 없었겠죠.”원경릉이 쓴 웃음을 지으며, “그런 말 마요. 뭐 챙길 거 없어요? 기념할 가치가 있으면 가져갈
황실여인들의 술 자리손왕비의 기왕비에 대한 미움을 기왕비는 잘 알고 있다.그래서 지금 손왕비가 이런 애기를 하며 기왕비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기왕비는 황실에 시집에 간 것도 허탕은 아니었구나 싶은 것이다.미색이, “우리 왜 여기 서있어요? 술은요? 이렇게 추운 날 어떻게 술을 안 마셔요? 그리고 재산 몰수가 몇 번이나 돼요?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마셔요?”“있어요, 있어!” 기왕비가 웃으며 말했다.원경릉도 웃으며, “맞아요, 한 잔 하러 가요.”네 명의 동서가 일제히, “거긴 안돼!”우문호가 사람을 데리고 올 때는 여인들이 이미 한창 마시고 있을 때였다.우문호는 자기가 왔을 때 침울한 분위기에 조카들이 놀라서 울고불고 할 것을 보게 될 거라고 예상했으나 여인들은 탁자에 둘러앉아 신나게 술을 마시고 있었다.제일 놀라운 것은 원경릉이 옆에서 주모처럼 동서들에게 술을 따르고 시중을 들고 있는 것으로,기왕비도 반쯤 취기가 올라 우문호가 온 것을 보고도 입가에 웃음을 거두지 않고, “다섯째 도련님, 하실 일 하세요, 저희 술 마시는 것만 방해하지 마시고요.”우문호가 원경릉을 흘끔 보자 원경릉이 우문호를 끌고 나와 작은 소리로, “최대한 움직임을 최소로 해줘. 안에 있는 분들이 놀라지 않게. 안에도 몰수하는 장면을 봐도 못 본 척 하라고 할 테니까.”“너도 마셨어?” 우문호가 원경릉에게서 킁킁 냄새를 맡는데 술 냄새가 약간 나는 것도 같다.“안 마셨어, 못 마시게 해!” 원경릉이 토라졌다.손왕비가 고함을 치며, “태자비, 어디 갔어? 얼른 술 따라야지. 안왕비가 또 졌다니까. 벌칙 놀이를 이렇게 못해서야. 술에 푹 절여버리자고.”원경릉이 대답하며, “갑니다 가요!”원경릉이 우문호를 밀치며, “가봐, 걱정하지 말고, 여긴 우리가 같이 있을 거야. 최대한 덜 괴롭게.”우문호가, “그럼 다행이다. 난 갈게. 넌 마시면 안돼.”“알았어, 알았다고.” 원경릉이 우문호를 쫓아내고 자기는 안으로 돌아가 계속 주모 역할을 했다.기왕비는 손에
안쪽 분위기는 비장하고 장렬하다. 바깥에서 재산 몰수 중인 우문호도 조용조용 진행하고 있는데 절대로 큰 소리를 내지 말고 값 나가는 물건만 밖으로 들어내 마당에 모은 뒤 점검하여 장부에 기록하기로 했다.우문호가 경조부를 지휘한 이래 처음으로 재산 몰수하는 일이 생긴 것으로, 설마 처음으로 재산을 몰수하게 되는 게 자기 큰 형의 집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본관에는 웃음소리가 들리고 전부 떠들썩한데 일부러 저렇게 크게 웃고 떠드는 건 바깥에 어떤 소리도 들리는 것을 막고 싶은 의도다.원래 침울하고 처참한 장면일 텐데 여인들이 와서 유쾌하게 만들어 준 덕에 우문호 마음 속의 어두운 안개가 적지 않게 사라졌다.유쾌한 듯한 건 겉모습일 뿐 참담한 마음은 모두의 마음 안쪽에 눌려 있다.이제 마지막으로 본관 안에 있는 골동품과 서화, 그리고 값나가는 가구 전부 들어내야 한다.다른 곳은 전부 다 들어내 앞마당에 쌓아 두고 정리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보좌관과 포도대장은 감히 안으로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우문호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문호가 담담하게, “일단 마당의 것들부터 점검하고 남은 건 저분들이 다 드신 후에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예!” 보좌관이 대답했다.기왕부의 하인은 전부 후원에 갇혀 당분간 나갈 수 없으며, 재산 점검을 마치면 나가서 몸수색을 받고 개인적으로 숨긴 물건이 없는지 확인한다.점검 과정은 신속하고 조용했다.원경릉이 밖을 보니 점검 중이라 본관도 비워줘야 한다는 걸 알고 미색에게 눈짓을 보내며, “맞아, 미색, 이리 나리께서 경성에 장신구 가게를 여셨다면서? 우리 구경하러 가자.”“조치라!” 미색은 영리한 사람이라 단박에 응수하며, “그럼 언니가 나가서 아주버님께 우리가 큰 형님 모시고 가서 해질녘에는 딱 모셔다 드린다고 전해 주세요.”“알겠으!” 원경릉이 얼른 일어나 우문호를 찾아 얘기했는데 안 그래도 어떻게 본관에서 물건을 정리할지 막막했던 차라 얼른 동의했다.마차가 밖에 대기하고 있어 원경릉과 동서들이 기왕
희열이와 희성이다들 아무 말 없이 기왕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본관에 이름있는 탁자와 의자는 전부 가져가고 걸상 몇 개와 등받이 없는 의자가 놓여 있는데, 원래는 없던 것으로 우문호가 자상하게 옮겨 놔 준 것이다.기왕비가 눈물을 닦고 웃으며, “군주들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애들이 봤으면 놀라 자빠졌을 걸요.”원경릉이 기왕비 손을 잡고 작은 소리로, “아니면 자기도 우리집에서 좀 묵는게 어때요?”“아뇨, 죄인의 몸으로 어디 감히 초왕부에 들어갈 수가 있어요? 다섯째 아주버님께 폐가 되지 않게 전 여기서 마지막 성지를 기다릴 게요.” 기왕비가 고개를 흔들었다.미색이, “정리가 끝났으니 일상용품을 채워드릴 게요. 그건 규칙에 위배되지 않는 데요.”“그럴 필요 없어요. 수고하실 필요 없어요.” 기왕비는 긴 걸상에 걸터앉았는데 걸상이 좀 삐그덕 거려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 한 걸 미색이 얼른 손을 뻗어 부축했다.말은 안 했지만 여전히 허리를 곧게 펴고 있는 기왕비는 마지막 남은 일말의 존엄을 유지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다들 가요, 전 혼자 좀 걷고 싶어요.” 다들 알고 있다. 이 때 그들이 곁에 있으면 오히려 안 좋다는 걸, 그러면 계속 즐거운 척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줘야 해서 너무나도 고통스럽다.그래서 다들 자리를 떠났다.기왕부가 재산 몰수를 당했다는 얘기는 경성에 큰 반향을 끼쳤는데 아무리 경조부가 은밀히 일을 처리했다고 해도 문 밖에 병사들이 지키고 있고, 마차에 물건을 실어 내가지를 않나, 기왕부의 문패마저 떨어지고 없으니 백성들도 전부 어떻게 된 일인지 직감하고 구경하러 몰려들었다.원래 다 그렇지만 누군가가 재난을 당한 모습은 곁에서 호박씨나 까 먹는 사람들에겐 그저 구경거리에 불과하다.재산 몰수 다음 날 경성엔 ‘기왕부에 도둑이 들어 경조부에서 왔다가 밀실에 저주인형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소문이 쫙 퍼진 것이 당시 현장에는 기왕부 하인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현 황제 폐하와 태자 전하를 저주하는 것은 대
기왕을 만난 기왕비다음날 원경릉은 기왕비를 이리 저택으로 부르고 자신은 희열이와 희성이를 데리고 갔다.출발 전 자매에게 결코 어마마마 마음 아프게 눈물을 흘리면 안된다고 신신당부 했다.희열이가 어젯밤 동생과 같은 침대에 누워서 애기한 덕분에 희성이는 오늘 결연한 태도다.기왕비를 보니 눈가가 붉어지긴 했지만 젖 먹던 힘을 다해 눈물을 참고 있었다.희성이는 기왕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고 아빠가 보고싶다고 하면서 아바마마가 걱정되니 어마마마가 가서 상황을 좀 봐 달라고 했다.기왕비는 기왕이 별채에 계시며 고생하지 않는다고 얘기해 주고, 기왕을 보고 오겠다고 희성이에게 약속했다.이리 저택에서 한 시진(2시간)정도 있으며 같이 밥도 먹고 헤어질 때 기왕비는 진중한 모습으로 두 딸에게, “잠시 초왕부에 있지만 매사에 작은 아버지와 숙모 말씀 잘 듣고 아무렇 게나 행동하지 말고 울고 불고 해서는 절대 안되고 집에 있을 때보다……”원경릉이 옆에서 듣다가 끼어들며, “얘들한테 뭐 라는 거예요? 초왕부가 자기 집보다 편해야지, 전에 집에서 하던 대로 초왕부에서도 하면 돼요. 기왕비는 맘 푹 놔요.”기왕비는 감격해서, “감히 고맙다는 말도 못하겠네요, 이 은혜는 갚을 길이 없지만 다음 생애는……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꼭 보답할 게요.”“누가 뭐 라는 거야 하나도 안 들리네.” 원경릉이 눈을 흘기고, “됐어요, 우선 애들 데리고 갔다가 내일 다시 기왕부로 보러 갈게요.”기왕비는 기왕부에 자주 출입하는 건 좋지 않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딸들이 있어서 걔들이 걱정할 까봐 말을 아꼈다.대리사, 형부에서 경조부와 함께 우문군의 병여도 절도 사건을 심리하기 시작했다.이 사건의 심리는 사실 삼사(三司)를 무척 난감하게 만드는 안건으로 방증 없이 밀실에서 병여도를 찾아냈을 뿐이며, 기왕은 죽어도 인정하지 않고 계속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래서 처음 재판은 형식적으로 대강대강 끝이 났다.우문군이 옥으로 다시 보내질 때 우문호가 인계하며 사람을 통해
기왕비의 토로우문군은 기왕비가 너무 증오스러워 목을 졸라 머리를 창살에 밀어붙이자 기왕비의 두 다리는 바닥에서 떨어졌다.기왕비는 전혀 반항하지 않고 우문군이 목을 조르는 대로 가만 있더니 눈에 흰자가 희번덕거리며 넘어가서야 우문군은 기왕비를 내려놨다.기왕비는 바닥에 무너지며 컥컥 숨을 쉬는데 머리가 어지럽고 순간 토할 것 같았다.또 기왕비가 정신을 차리자 우문군은 제일 먼저 기왕비 따귀를 때려 기왕비는 바닥에 나가 떨어지고 머리가 찬합에 부딪혔다.“말해, 왜 나를 모함 했어?” 우문군이 한 손으로 기왕비의 머리채를 쥐고 억지로 고개를 들어올리고, 분노와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결혼을 잘못 했어. 자기가 왕비 손에 이렇게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그 사실이 우문군을 열 받게 했고 분노하게 한 것이다.기왕비의 입에서 선혈이 베어 나오는데 이를 악물고 두피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눈에는 똑같은 증오가 가득한 채로, “내려놔…… 날 어서. 그럼 왜 그랬는지 얘기해 줄 테니.”우문군은 기왕비를 풀어주면서 한대를 또 내리쳐 기왕비는 정신을 잃고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옥졸이 밖에서 보고 기왕비가 간섭하지 말라고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만 해!”우문군이 문득 길길이 날뛰며 기왕비의 배를 밟아 뭉개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얼굴로 옥졸에게, “뭐하는 새끼가 감히 이 몸에게 명령질이야?”기왕비는 배를 감싸 쥐고 바닥을 구르며 옥졸에게 손을 내저었다.10년이 넘는 부부생활을 했는데 어떻게 우문군의 인간성을 모를 수가 있을까? 반항하지 않고 분이 풀릴 때까지 놔두면 끝나지만, 옆에서 누가 나서면 기왕비만 더 힘들어질 뿐이다.옥졸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어 물러나 한쪽에 서 있었다.기왕비가 고통을 참으며 찬합을 열자 안에 음식들이 다 엎어졌는데 기왕비가 잘 수습해서 바닥에 차려 내 놓았다.우문군이 그것을 보고 발로 차며 반찬을 사방에 흩뜨리고, “왜? 내가 안 죽으니까 독살이라도 하게? 이 독한 년, 죽어라 이년!”광분한
진실을 안 기왕우문군은 소리를 지르며, “그럼 누가 날 모함 했어? 누구야?”우문군은 기왕비를 밀치고 미친 사람처럼 벽을 발로 차자 회벽이 얼룩덜룩 떨어져 내리고 몇 번 차니 흙먼지가 뿌옇게 일며 옥중은 먼지 구덩이가 됐다.기왕비가 목이 잠겨 기침을 하고 심호흡을 몇 번 하고 기왕을 봤는데, 올 때 사실 기왕을 욕할 말을 잔뜩 생각했으나 한마디 하고 싶어도 지금 이 꼴을 보니 말해도 소용없고, 욕을 먹어도 말귀를 알아 먹지 못하는 상태다. 그냥 묻어버리고 지나가자. 괜히 입만 아프지.우문군은 한바탕 하고 나니 정신이 돌아와서 바닥에 앉아 지푸라기를 한줌 들고 바닥을 정리하더니 눈엔 핏발이 서고 이를 갈며, “도대체 누구 날 해치려 한 거야? 우문호인가?”고개를 들어 기왕비를 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난 정말 모르겠어, 부부는 같은 입장인데 왜 팔이 밖으로 굽는 거지? 네가 전처럼 날 돕기만 했어도 나도 희열이를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고. 전부 네가 자초한 거야. 넌 매정하고 냉담한 인간이라고. 어떻게 외부인을 도와줄 지언 정 남편을 돕지 않을 수가 있어, 내가 앞으로 보위에 오르면 널 섭섭하게 할 것 같아?”기왕비는 그 말을 듣고 기가 차서, “앞으로 당신이 보위에 오르면 날 섭섭하지 않게 해? 당신이 대업을 이루면 내 목숨도 못 건질까 걱정이네. 내가 더이상 이용가치가 없다고 느꼈을 때 후궁에게 지위를 넘겨주려고 나한테 약 먹였던 거 기억 안나? 왕야님께서 기억력이 영 부실하시네. 자기가 한 짓도 기억을 못하시고.”우문군이 냉랭하게, “네가 안 죽었으면 됐지? 여자는 당최 큰 일을 못한다니까. 이런 옹졸한 거나 기억해서 분란이나 일으키고.”기왕비가 천천히 일어났다. 14년간 봐온 얼굴이 이토록 낯설구나, 극도로 이기적이고 오만과 광기가 갈 데까지 갔다. 그래. 죽지 않았으니까 계속 자기를 위해 이용당해야 한다는 게 이 인간의 생각이었던 거야.기왕비의 마음이 순간 평온해 졌다. 작은 소리로, “내가 이번에 온 건 희성이가 가보라
세월이 흘러, 택란이 열한 살 되던 해에 드디어 만두가 돌아왔다.어린 나이에 집을 떠난 그는 이제 완전한 청년으로 성장해 돌아왔다. 그리고 떡들 세 명은 만으로 따지면 이미 열일곱 살이 되었다.만두는 도착하자마자 먼저 황제의 허락을 받고 군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비록 국경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국력이 항상 군사력의 안정에 의해 뒷받침되기 때문에 군 경험이 매우 중요했다.나라를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면 먼저 군심을 얻어야 한다.우문호는 그의 선택을 전폭 지지하며, 국가에 대한 소속감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를 작은 병사로 임명하여 군에 들여보냈다. 약도성은 이미 재건이 대부분 완료된 상태였다. 백성들도 마음을 다잡았고, 이제는 본격적인 발전만 남아 있었다. 이리 나리와 홍엽이 이곳에 왔을 때, 냉명여를 약도성에 남겨두었는데, 호명이 챙기려 했으나, 냉명여는 택란 곁에서 그녀를 보호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꽤 고집이 센 아이기에 그는 그저 놔두기로 했다. 변경은 심지를 단련하기에 좋은 곳이었고, 호명이 보살펴 주며 저택 안에 거주했기에 큰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한편, 금나라에서는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진국왕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황제가 본격적으로 조정을 이끌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도는 원래 약도성 접경 지역에 새롭게 지은 곳으로 옮겨졌고, 이름 또한 량주로 바뀌었다. 금나라는 이제 공식적으로 량주를 수도로 정했다.이 소식이 약도성에 전해지자, 택란은 무척 기뻐하며 주 아가씨에게 물었다.“이제 본격적으로 채굴을 시작해도 될 것 같소. 금나라에 한 번 가볼 생각인데, 자네도 같이 가는 것이 어떻소?”그 해 택란은 훌쩍 성장해 주 아가씨보다 조금 더 커 있었다. 주 아가씨는 때때로 그녀를 보며, 대나무가 환생한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며칠 사이에 또 훌쩍 자란 것이다.택란의 아이 같던 분위기는 사라졌고, 훨씬 차분하고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약도성의 거센 바람과 강한 햇빛 때문에 원래 하얗던 피부는 건강한 빛을
우문호는 정정이 계란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마음이 조금 놓였다. 보아하니 혼인 문제에 있어 두 사람은 합의를 봐 더는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 같았다.정정 대장군 부부는 경성에서 반 달 동안 머물렀고, 그동안 정정과 우문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말을 타거나, 군영과 산을 누비며 백성들을 살폈다.대두는 아이들과 즐겁게 지냈다. 비록 처음 이틀 동안은 계속 만두를 보고 싶다고 떼를 썼지만, 이제는 만두를 완전히 잊은 듯했다.그는 란이와도 갈등을 풀었고, 오히려 제일 친해져서 무엇을 하든 항상 함께했다.그렇게 2주가 지나 정정이 작별을 고하기 전, 우문호에게 대두의 배필을 찾은 것 같다고 말하며, 대두는 그녀가 자랄 때까지 잘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그의 말에 우문호가 어리둥절하며 물었다.“누구요?”정정이 웃으며 말했다.“지금은 말할 수 없소. 아직 확정된 일이 아니라, 나중에 잘못되면 감정이 상할 수도 있네.”“우리 사이에 말 못 할 게 어딨소?”우문호는 그의 말에 이미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그러자 정정이 더욱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들으면 자네가 조급해질까 봐 그러네!”우문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난 지금 이미 엄청 조급하네.”정정은 크게 웃으며 그의 어깨를 철썩 때리며 위로했다.“걱정하지 마시게. 계란이는 아니네. 계란이는 내 딸이기도 하니, 절대 며느리가 될 수 없소.”다른 남자가 계란이를 자기 딸이라 부른 건 처음이었지만, 우문호는 반감 없이 오히려 매우 기뻐, 활짝 웃으며 말했다.“맞네, 자네 말이 맞아. 계란이는 자네 딸이기도 하네. 우리 모두의 착한 딸이지.”근영군주는 이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원경릉에게 말했다.“보아하니, 우리가 여기서 제일 쓸모없는 존재 같습니다…”“맞는 말입니다!”원경릉이 진지한 표정으로 맞장구치자 근영군주가 그녀를 가볍게 안으며 말했다.“앞으로는 자주 만나지 말고, 1년에 한 번만 봅시다! 시간이 어찌 이리 빨리 흐른다는 말입니까?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눈
목장에서는 전보다 훨씬 뛰어난 전투마들을 사육했기에, 우문호는 마치 보물을 자랑하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당장이라도 정정과 함께 보러 가고 싶어 했다.그러자 근영군주가 웃으며 말했다.“폐하께서 아직도 소년 같은 순수함을 지니시고 있다니, 참 보기 드물고 귀한 일이군요.”하지만 원경릉의 귀에는 이 말이 남편이 어린아이 같다는 말로만 들렸다.그녀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하하하. 사내들이 가끔 저렇게 유치할 때가 있잖습니까.”근영군주도 깊이 공감하며 말했다.“예. 평소엔 유치하다가도, 필요할 때는 놀라운 배짱과 결단력을 보여주지요. 집안을 지탱하기도 하고, 나라를 떠받치기도 하고. 안 그렇습니까?”원경릉도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남자들이 말을 타러 나가자, 원경릉과 근영군주는 궁전 안에서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두가 몹시 심심해하자 원경릉은 친왕비들에게 아이를 궁으로 데려와 아이들끼리 놀게 했다.대주의 손님을 정성껏 대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친왕비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궁에 들어왔다.사실 대두와 비슷한 나이의 아이는 많지 않았다. 미색의 두 아이와, 원용의의 아이 모두 대두보다 어렸지만, 놀 벗이 없는 상황에 나이가 어린 것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대두는 외동아들로 자라 성격이 다소 거칠었다. 하지만 미색의 딸인 란이 역시 성격이 강하고 고집스러웠다. 어머니인 미색을 닮아 태생이 강한 성격을 타고난 것이었다.게다가 그녀에게 무술을 배워 한창 센 척을 할 시기라 대두와 몇 마디 말다툼 끝에 결국 몸싸움으로 번져 버렸다.란이가 대두를 때리자, 대두는 얼굴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맞으면서도 전혀 반격하지 않고 그저 참고만 있었다. 끝까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란이는 평소 늑대파에서 무술 대련을 했기에 상대가 반격하지 않고 그저 제자리에서 맞고만 있는 멍청한 모습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에, 부어오른 대두의 뺨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며 물었다.“어찌... 반격하지 않는 것입니까?”대두는 화난 표정으로 대답했다.“어찌
생각해 보면 이렇게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혼사를 정하는 것이 얼마나 황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이가 남녀인지도 모르면서 성급한 부모들이 충동적으로 혼사를 결정해 버리다니 말이다. “대두가 아직 이리도 어린데, 벌써 혼사를 이야기하다니요, 우리 만두는 아직 애 입니다.”우문호는 괜히 기분이 답답해졌다.현대로 다녀온 뒤, 사람들이 늦은 결혼과 출산을 선호하는 것을 본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 열몇 살에 혼사를 하는 것은 성장의 억압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혼사 이야기를 한다고 당장 하는 건 아니오. 그저 약속만 하고, 몇 년 후에 하겠다는 거네.”“어찌 이리도 태연한 것이오?”우문호가 원경릉의 여유로운 표정을 보며 그녀가 그들이 빚을 받으러 온 걸 모르는 건가 싶었다.“난 걱정 없소. 딸을 보내고 싶지 않으면 당신처럼 쓸데없는 부담감 없이 그냥 바로 거절할 것이오. 형제간의 정이 거절로 인해 상할까 봐 고민한다니, 억지로 혼사를 성사하는 것이 더 정을 상하게 할 것이오.”그러자 우문호가 말했다.“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마음이 편치가 않소.”후궁에서의 우문호는 조정에서의 단호하고 강력한 모습과는 완전히 딴 사람이었다. 조정에 나서기만 하면 단호하고 과감하며, 마치 번개 같은 결단력을 보여주는 반면, 후궁에서의 그는 망설임도 많고 잔소리도 많은 사람이었다. 원경릉이 다른 왕비들과 대화할 때, 그들도 가끔씩 이 얘기를 꺼내곤 했었다. 다들 다섯째의 평소 잔소리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며 놀라했다. 하지만 다른 친왕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그가 예전보다 훨씬 결단력이 있어졌다고 말했다.이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리 나리는 한숨을 쉬며, 결국 결단력 넘치는 황제도 결국 자식들 문제에서는 고민에 빠지는구나 싶었다.8월 14일, 정정 대장군 가족이 북당의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초왕부에 머물렀다.그들은 초왕부에 머문 직후 탕양의 안내로 우문호를 만나기 위해 궁으로 들어갔다.아무리 큰 걱정도 오래된 벗 앞에서
예전에 원가에서 온 가문이 강북부로 이주한 적이 있었다.북쪽은 바람과 모래가 거셌지만 원가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았고, 오히려 고향과 비슷한 정감을 느끼게 했다.이리 나리는 원가의 사업을 줄이도록 도우며, 관리하기 쉬운 몇몇 가게만 남겼다.탕양은 일곱째 아가씨에게 장사를 내려놓아도 괜찮은지 물은 적 있었는데, 그때 일곱째 아가씨가 말했었다.“그런 말 마시오. 내 능력을 충분히 증명했으니 이제 만족스럽소. 열심히 해서 큰 성과를 얻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오. 평생 바삐 지낼 수도 없잖소.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뭐 하겠소? 다 잘 살기 위해 번 것이오. 가업을 나눠 받은 돈만 해도 평생 다 못 쓸 만큼 많소. 그리고 가게들도 계속 돈을 벌 텐데 뭐가 아쉽겠소?”탕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손에 익은 일이라, 혹시라도 아쉬워할까봐 걱정했소. 사실 나도 당신이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 싫었소. 당신만 괜찮다면 다행이오.”일곱째 아가씨는 미소를 지었고, 그의 말에 모두가 기뻐했다.“한가해지는 것도 괜찮소. 1년에 두세 달은 약도성에 가서 지내면 얼마나 여유롭겠소.”하지만 탕양이 눈살을 찌푸렸다. 1년에 두세 달이면, 왕복하는 시간까지 더해 최소 반년은 걸릴 것이고, 그 말은 반년 동안이나 그의 곁에 없다는 뜻이었다.게다가 그도 경성을 몇 달씩 떠나는 건 불가능했다. 지금은 황제 곁을 하루라도 떠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하지만 그는 그녀가 행복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물론 그는 늘 함께하고 싶었지만, 오래된 부부였기에 항상 붙어있을 필요는 없었다.북당은 점점 부유해지고 있었다. 원가가 일부 사업을 매각하면서 그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가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싸웠고, 좋은 위치에 있는 가게들은 더더욱 귀한 존재가 되었다.원래 원가는 모든 가게를 이리 나리에게 넘기려 했지만, 이리 나리는 거절했다.그리고 안풍친왕이 먼저 나서서 이리 나리가 이미 너무 많은 가게를 보유하고 있고, 특히 경성에서의 비중이 지나치게 높아 독점 우
원경릉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일곱째요? 일곱째는 분명 원용의에게 말할 것이고, 원용의는 또 사식이에게 얘기할 것이고, 사식이도 분명 서일에게 전할 것일 텐데요. 만약 서일이 알게 되면, 이제 북당 전체가 다 알게 될 것이오.”우문호는 순간 당황해하며 말했다.“그건 내가 생각지도 못했네.”원경릉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아마 지금쯤 황실 친왕들 사이에서 이미 탕양의 이야기가 뒷말로 오가고 있을 것이었다. 겨우 부인을 얻었는데, 밤에 함께 자지 못한다니 참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할 것이다.우문호는 탕 대인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들 뒤에서 탕양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여인들이 수군거리니, 남자들은 그를 도우려 했다.물론 부부 사이의 일에 직접적으로 간섭할 수는 없었기에, 대신 탕양을 술자리로 초대해 술로 고민을 푸는 방법을 제안했다.그렇게 며칠째 술을 마시던 탕양은 자신의 비밀이 모두에게 알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아 한숨을 쉬며 말했다.“제 탓입니다. 폐하가 비밀을 지키지 못한다는 걸 깜빡했습니다.”제왕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이런 일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여인은 때로 달래줄 필요가 있는 법이다.”그러자 탕양이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말했다.“제가 폐하께 이 이야기를 했을 땐, 혼례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알고 있다. 서두르지는 말거라.”모두가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탕양을 바라보았지만, 탕양은 더 이상 해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그들은 이미 혼인했지만, 오랜 부부 생활을 한 터라, 남녀 간의 정이 때로는 하루아침에 급격히 발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탕 대인은 돌아가자마자 일곱째 아가씨에게 이 일을 전했다.그러자 일곱째 아가씨가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이지, 어찌 허구한 날 남의 부부 일에만 관심을 가지니, 할 일이 없나 보오.”“신경 쓰지 마시오. 우리가 잘 살면 그만이니.”탕양은 일곱째 아가씨를 안으며 자신감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경릉은 궁으로 돌아와 이 일을 다섯째에게 이야기했다. 그러자 다섯째가 말했다.“사실 한 번 돌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소? 그저 경성만 한 바퀴 둘러보면 되지 않소.”“아이들을 데려다줄 때 휘종제 어르신께서 슬퍼하셨소. 이번 생에 고향으로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돌멩이 하나를 건네주니, 그걸 안고 울었소.”“정말 안타깝소!”다섯째는 증조할아버지 생각에 마음 아파했지만,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하지만 큰할아버지께서 그를 데려오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이오. 휘종제 어르신을 잘 아는 것도 아니지 않소? 몇 번 만나보니, 활달하고 산만한 성격에 무슨 사고를 일곱째인지 모를 것 같은 느낌이 들었소.”“맞소.”원경릉도 깊이 공감했다. 특히 그가 전화로 끈질기게 설득할 때는 정말 무서울 정도였다.“다른 일은 없었소? 부모님 건강은 어땠소? 처남은 여자 친구가 생겼소? 만두는 공부를 잘하고 있소?”다섯째가 끊임없이 질문했다. “괜찮소. 부모님 건강도 괜찮긴 하지만, 아버지께서 고혈압이 생겨서 약을 오래 드셔야 하오. 오빠는 여자 친구가 없네. 주진과 아직도 서로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은 상황이오. 만두는 걱정 안 해도 되네. 내년에 돌아올 것이니.”“다행이오!”다섯째가 기뻐해 하며 말했다. 그는 늘 만두의 능력을 눈여겨보았기에, 그가 돌아오면 나라의 일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록 많은 부담을 짊어지진 못하지만 그래도 괜히 기대가 되었다.“추 할머니 병은 어떠하신가?”다섯째가 또 물었다.“아직은 괜찮소. 아주 좋아졌네. 약에 내성이 생기지만 않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원경릉이 말하자 다섯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분들이 늘 건강해지시길 바랄 뿐이오.”평범한 사람들조차도 적성루 사람들에게 감동하기 쉬운데, 하물며 북당의 황제인 자신은 오죽하겠는가.“계란은 소식 왔소?”원경릉이 물었다.“왔네. 보시오!”다섯째는 소매 안에서 구겨진 편지를 꺼냈는데, 비둘기를 통해 받은 그 편지에는 몇 줄의 짧은
“별다른 뜻은 없소. 오늘 밤에 유난히 감성적이라 그저 한마디 해본 거네. 사실 너무 감동해서 그러네. 비록 항상 탕 대인에게 빨리 혼인하라고 재촉하긴 했지만, 그가 일곱째 아가씨와 혼인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소.”“괜찮소!”원경릉은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말했다.“어쨌든 탕양은 우리와 함께 걸어온 사람이오. 그러니 그가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하게 된 건 우리 모두에게 기쁜 일이오.”우문호는 벌써 술에 취한듯 머리가 약간 어지러웠다. 술에 취하면 항상 눈앞의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곤 했는데, 익숙한 천장, 익숙한 사람, 익숙한 탁자와 의자. 취기가 돌며 모든 것들이 꿈처럼 느껴졌다.그는 마치 다시 초왕 우문호로 돌아간 듯했고, 갓 원경릉과 마음이 통했던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그 당시 외부 정세는 불안정했고, 태자 자리를 둘러싼 다툼이 막 시작되었던 때였다. 형제끼리 반목하며, 치열하게 싸웠던 시절을 돌아보면 잃지 않고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얻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었다.우문호가 원경릉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원 선생, 몇 년간 아주 긴 꿈을 꾼 것 같지만, 되돌아보니 정말 다행이라고 느껴지네. 사실 모든 행운과 행복은 원 선생의 잘못된 연구에서 비롯된 것이오. 원 선생이 오지 않았다면 내 인생이 어땠었을까 싶네.”그러자 원경릉이 말했다.“누군가가 이 세상에 몇 시간과 공간이 존재한다고 했소.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 수도 있네. 아마도 어떤 공간에서는 내가 없는 대신 다른 사람이 당신과 함께 있을 수도 있소.”우문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그 세상 속의 나는 정말 불쌍할 것이오.”“그건 모르오. 어쨌든 그곳의 당신은 나를 모르고, 우리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도 모를 것이오. 각자가 행복을 정의하는 방식은 다르오. 어떤 사람들은 매 끼니 고기가 있는 게 최대의 행복일 수도 있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봉급이 오르길 바랄 것이오. 또 가족이 화목하고 건강하기를 바라기도 하고
우문호는 혼인을 하사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는 탕양의 혼사에 화룡점정을 더하는 일이었다.온 경성 사람들이 탕양이 황제를 모시는 신하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혼사에 주목했다.탕양은 왕부에서부터 황제를 지지해 온 충신이었으며, 군신 간의 정은 형제의 관계에 못지않았다.거기에 황제가 직접 혼인을 하사했으니, 이는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었다. 그래서 다들 두터운 예물을 준비해 축하하러 왔다.혼례는 초왕부에서 열렸다. 비록 초왕부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이번 경사에 많은 지원이 몰렸다. 여러 왕부에서 사람을 보내왔고, 미색은 돈에 힘까지 보태며 혼사 지출의 3할이나 부담했다.희상궁도 돌아와 모든 일을 총괄했다. 희상궁은 비록 나이가 많았지만, 여전히 일 처리 능력이 뛰어났다. 그녀는 여러 왕부에서 온 사람들을 지휘하며 완벽하게 일을 조율했다.혼례 당일, 황제와 황후도 참석했다.신부가 도착하여, 혼례를 올릴 때 우문호와 원경릉은 상석에 앉아 신랑 신부의 절을 받고는, 그 다음으로 기상궁도 절을 받았다.우문호가 원경릉의 손을 잡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탕 대인이 드디어 철이 들었고, 가정을 이루었으니 정말 기쁘네.”원경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 마음이 풀립니까? 그러니 앞으로는 더 이상 잔소리하지 마시지요.”“잔소리는 계속할 것이다. 이젠 아이를 낳으라고 해야지.”우문호는 걱정이 끝이 없다는 듯 말하자, 원경릉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아이 낳는 일은 하늘에 맡겨야 하네.”“그래도 몇 가지 비법을 전수해 줄 수는 있소.”우문호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좀 더 크게 말해보시오. 다른 사람들이 못 들을까 봐 걱정이오?”원경릉이 그를 흘겨보았다.주변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바라보며 부러움 섞인 표정을 지었다. 많은 사람이 첩을 두고도 황제만큼 자식을 많이 두지는 못했지만, 황제는 복도 많고 자식도 많은 사람이었다. 저녁 연회에서 우문호는 과음했지만 원경릉은 그를 막지 않았다. 이런 노부의 감격은 술로 달래야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