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진은 소이연이 천씨 가문에게 적대적이기에 오랫동안 알고 지낸 그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냉담했다.“나를 인정하는 건가요?”천우진은 한참이나 진정한 후 입을 열었다.“항상 인정했어요.”“이제야 표현하나요?”“자만할까 봐요.”그녀의 대답에 천우진은 낮게 웃었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했다.“먼저 몸조리해요. 육현경이랑 다시 시작하든 아니면 천씨 집 일을 해결하든지 모두 건강이 우선이에요.”“당신도요.”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뭐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맞다, 문헌 씨가 깨어나면 나한테 오라고 해요. 할 얘기가 있어요...”“여기 있어요.”문 앞에서 들리는 심문헌의 목소리에 소이연과 천우진이 돌아보았다.“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잘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대화를 엿듣지 못했어요.”“들어도 상관없어요. 속일 얘기도 없어요.”“먼저 나가 볼게요.”천우진은 그들을 두고 병실을 나왔다.“민아, 삼촌이랑 나갈래? 병원에서 며칠이나 지냈잖아.”“좋아요.”육민도 눈치가 빨랐다.병실에는 소이연과 심문헌 두 사람만 남았다.소이연이 한숨을 내쉬었다.“내 선택을 알거라고 생각해요.”“이제 나는 끝인가요?”심문헌은 그녀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가볍게 말했다. 그의 모든 아픔을 그녀에게 숨긴 것이다.“나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낭비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리고 내가 버림받았다고 생각지도 않아요.”심문헌의 말에 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육현경이 함께 하겠다고 해요?”“...”심문헌은 조금 고소했다.“임아영과 결혼할 건데 뺏을 자신이 있나요? 임아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에요.”심문헌의 말에 소이연은 반박할 수 없었다.“육현경이 임아영과 결혼하면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거예요?”“그럴 필요는 없죠. 죽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과 결혼 한 건데,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심문헌의 말은 너무나 냉정했다.“육현경의 죽음은 나에게는 나쁜 일이 아니에요. 죽지도 않은 그가
이틀 후, 소이연은 천우진의 부름에 천씨 어르신 병실로 갔다. 정확히 말하면 천씨 가문 모두가 불려 갔다.그러나 어르신은 소이연과 천우진만 보려 했고 다른 이들은 밖에서 기다렸다.중환자실은 유리로 막혀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유리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그래서 어르신이 일어난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등을 대고 있었기에 얼굴은 볼 수 없었다.어르신이었기에 누구도 돌아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 또한 천우진이 똑똑한 점이었다.아무도 어르신이 다른 사람일거라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각도에서 보면 어르신과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소이연은 천우진과 중환자실에서 가짜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었다.그렇게 반 시간이 지나 둘은 병실을 나왔다.어르신은 피곤한지 침대에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그들이 병실을 나오자 집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할아버지가 뭐래?”천정엽이 다급히 물었다.“피곤하셔서 다른 사람들은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네요. 이제 깨었으니 걱정 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몸이 괜찮아지면 천씨 집으로 갈거라고 해요. 걱정 말고 하실 일 하시래요.”천우진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할아버지를 만날 거야.”“삼촌, 할아버지가 명확하게 말했어요. 피곤해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대요. 휴식을 원하시는데 들어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요.”“내 아빠가 어렵게 깨셨는데 아들로서 보러도 못가? 그저 얼굴만 보겠다는데.”“이건 할아버지의 뜻이에요. 왜 이렇게 준비하셨는지는 퇴원하고 물어보세요.”“왜 퇴원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지금 가도 되잖아.”“삼촌.”“우진이 네가 계속 막는 걸 보니 무슨 비밀이 있나 본데?”천정엽은 비아냥거렸다.“할아버지 곁에서 수년간 돌봤는데 삼촌이 나를 의심하다니. 이건 나를 의심하는 건지, 아니면 할아버지를 의심하는지 모르겠네요.”천우진의 강한 말투에 천정엽은 말을 멈추었다.그러나 천정엽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나는 아빠를 관심하는 거야. 나는 보러 가야겠어. 비켜.”말을 마치며 천정엽은 밀고 들어
“네가 뭔데...”“잊었나 본데 할아버지가 다친 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어쩌면 천씨의 누군가에 의해 다치신 거예요. 모든 조사를 마치기 전에 할아버지는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어요.”“왜? 나를 의심하는 거야?”천정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그 정도는 아니지만 삼촌이 지금 할아버지의 화를 돋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진실이 들어난 후에 만나도 늦지 않아요.”천우진의 말에 천정엽은 얼굴이 굳어졌다.그러나 더 이상 강압적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어르신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시는 건 누구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계속 들어간다면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이다.천정엽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말이 없었다.“아까 할아버지가 말하셨어요. 자주 올 필요 없다고요. 할아버지의 몸이 나으시면 퇴원하고 돌아가실 거예요.”“다른 얘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천정엽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다른 일은 전달할 필요가 없으시대요.”“천우진!”천정엽은 화가 났다. 어르신은 천우진을 더욱 신뢰하여 다른 사람은 안중도 없이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삼촌, 할아버지는 다 계획이 있으세요. 존중하셨으면 좋겠네요.”“천우진, 아버지가 모든 일을 너에게 맡긴 거지?”천정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아니요, 할아버지가 건강을 되찾으면 직접 해결하실 거예요.”“거짓말하지 마!”천정엽은 믿을 수 없었다.“그래, 너는 장손이고 아버지가 키우셨으니 너를 더 좋아하시겠지. 앞으로 네가 천씨의 권력을 쥐면 삼촌을 잊지 마라.”“삼촌, 너무 갔어요.”천우진은 너무 비굴하지 않게 천천히 말했다.“할아버지가 아직 건강하시니 은퇴하시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 삼촌은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누구도 편애하지 않으니까.”“너는 정말 아버지를 닮았네. 됐어, 너랑 얘기 그만할거야. 아버지가 만나기 싫으면 가야지.”천정엽은 그의 무리를 이끌고 돌아갔다.“형님, 할
천우진은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소이연은 침착했다.“포기하지 않을 거예요.”“같이 가 줘요?”“괜찮아요.”소이연은 웃으며 답했다.“있으면 더 불편할 것 같아요.”“뭐 할 거예요?”천우진의 얼굴이 굳어졌다.“얼굴이 정말 빨리 바뀌네요.”“소이연, 적당히 해요.”“...그래요.”소이연은 천우진의 안색이 나빠지자 꼬리를 내렸다.딸을 시집보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진지하다니.“먼저 갈게요. 민이 부탁해요.”“아들도 버리네요.”“나는 엄마를 응원해요.”육민이 곁에서 거들자 소이연은 웃음이 터졌다.그녀는 스스로 휠체어를 끌고 떠났다. 어떻게 이미 다른 여자가 생긴 육현경을 대해야 할지도 몰랐다.지금 가서 육현경과 임아영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소이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녀는 자신에게 육현경은 이미 기억을 잃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대담하게 행동해도 된다고 주문을 걸었다.임아영은 확실히 육현경의 생명의 은인이었다.그녀는 휠체어를 밀며 힘겹게 육현경의 병실에 도착했다.역시 그는 없었다.아마 옆 병실에 있을 것이다.그래도 그녀는 병실로 들어갔다. 임아영의 병실에서 육현경이 있는 모습과 갖은 노력으로 그를 남기게 하는 그녀의 행동이 더욱 싫었다.소이연은 저절로 한숨을 내쉬었다.한 번도 자신이 남자를 빼앗기게 될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인생관에서 남자를 뺏는 것은 제쳐두고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것도 불가능했다.그녀가 고귀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남녀 간의 관계에서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이건 어린 시절 가정의 영향 탓이다.지금은 육현경이 다른 여자와 놀고 난 후 자신한테 돌아오길 바라는 지경에 도달했다.소이연은 육현경의 침대에 앉아 핸드폰으로 연예 뉴스를 들여다보았다.요새 자신의 교통사고, 천씨 가문의 사건, 육현경 때문에 다른 일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지금 정신이 돌아와 예수진의 일에 대해 알고 싶었다.굳이 검색하지 않아도 예수진 관련 뉴스는 가
소이연은 보다가 지쳤는지 핸드폰을 내려다 놓았다. 그때 문밖의 육현경을 발견했다.육현경은 정신을 차리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일부러 자신과 거리를 두는 걸 느꼈지만 무시했다.“돌아왔어요?”소이연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무슨 일이에요?”“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나요?”육현경은 소이연에게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보지 말자’는 말은 뱉을 수 없었다.결국 그녀를 보내기 싫은 것이다.지금이라도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날 구해줬는데 감사의 인사도 못 하나요?”“필요 없어요.”“다른 사람이었다 해도 똑같이 행동 했을 거예요.”“임아영은 옆에서 가만히 지켜봤어요.”소이연의 가시 돋친 말에 육현경은 침묵하며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소이연의 자신과 오래 함께 하길 바랐다.“어떻게 감사를 표할지 알고 싶지 않아요?”소이연은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어떻게요?”“이리 와 봐요, 알려 줄게요.”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육현경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천천히 소이연에게 걸어갔다.“조금 낮춰 봐요. 키가 너무 커서 내가 얼굴을 보려면 너무 힘들어요.”소이연의 말에 육현경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몸을 아래로 구부리며 그녀와 같은 높이를 유지했다.“이러면 돼...”육현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입술을 가로막았다.소이연이 입술이 그의 손등에 찍혔다.소이연은 자신이 이렇게 거절을 당하자 마음이 너무 아팠다.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그래도 너무 아팠다.두 사람은 그렇게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봤다.육현경은 몸을 일으켜 뒤로 한 걸음 후퇴해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이렇게 할 필요 없어요.”소이연은 그 때문에 자신의 원칙을 깨지 않았어야 했다.그녀는 타인의 감정을 파괴하는 사람을 싫어했다.자신의 엄마가 다른 사람에 의해 결혼 생활이 파괴당했고 그녀 또한 연애가 다른 사람에 의해 파괴당했다.그 때문에 그녀 또한 그런 사람이 된
육현경은 자신이 평생을 걸쳐 꿈에도 가지고 싶었던 여자의 입에서 고백을 들을 줄 몰랐다.그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다.한순간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녀를 꽉 안고 싶었다.그러나 심아윤의 일을 겪은 후 그런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임아영은 심아윤보다 더 악질이었기에 소이연과 육민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없었다.“임아영은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버릴 수 없어요.”육현경은 결국 냉담하게 그녀를 대했다.소이연의 가슴 한쪽이 쓰려왔다.육현경이 기억을 잃어 이렇게 말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가슴이 아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사랑이 아닌 감사함으로 함께 하는 건 결국 행복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갈등도 더욱 심해질 거예요. 당신은 지금 그녀를 해치는 거예요.”“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예요.”“그렇게 무서워요?”“말했잖아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생명의 은인... 그래서 그 사람에게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는 거죠?”“그래야만 해요.”“그럼 나는요? 당신한테 버림받는 건가요?”“미안해요.”육현경의 사과는 그녀를 자극했다.“루카스, 당신의 진짜 신분을 알아요? 누구인지...”“알고 싶지 않아요. 아는 게 많아질수록 더 힘들어 질거예요. 이연 씨,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그의 냉담한 말에 소이연은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다가 눈물이 차올랐다.육현경의 모습은 소이연의 가슴을 후벼팠다.“인정해요. 내가 먼저 당신을 흔들었죠. 바람피운 거나 다름없어요. 한때는 아영 씨를 버리고 당신과 함께하겠다는 생각도 했었죠.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영원히 아영 씨를 사랑할 거예요.”육현경의 말에 소이연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그를 가지는 건 쉽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그녀의 오만이었다.“이연 씨, 당신한테 너무 미안해요.”육현경은 가슴 아픈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었다.“당신이 누군지 알면 분명히 후회...”“말했죠,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고요. 나한테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나를 내버려둬요.
소이연은 일부러 그의 병실 앞에서 넘어졌다.그런 그녀에게 관심을 주게 될거라 생각했다.그렇다, 그녀는 결국 야비한 수단을 쓴 것이다.육현경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멈추었다.그렇게 소이연은 바닥에 넘어졌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냉담한 눈빛의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일어나기 힘들면 간호사를 불러올게요.”“도와주면 안 되나요?”육현경의 반응에 소이연은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물었다.“남녀가 엄연히 다른데.”“이제라도 임아영에게 충성하겠다는 건가요?”“정신적으로 바람을 피웠던 게 미안해서요.”“하.”소이연은 콧방귀를 꼈다.그래도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자신의 애인이 다른 여자를 위해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하다니.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몸을 일으켰다.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이번에는 진짜로 두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두 팔의 힘으로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그녀가 바닥에서 허둥대는 모습을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둘은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간호사를 불러올게요.”소이연의 그녀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음을 발견한 것이다.“필요 없어요!”그녀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껏 소리쳤다. “누구도 필요 없어요.”“그럼 맘대로 해요.”육현경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차갑게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소이연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는 어쩌다가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게 된 걸까.심지어 그녀는 그가 아까 병실은 들어오던 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되었다.마치 그가 자신의 모든 감정을 깨닫고 최후의 선택을 한 것처럼 말이다.사람 감정이 이렇게 쉽게 변한단 말인가!“쾅!”병실 문이 열리며 심문헌이 육현경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소이연은 그가 언제 왔는지 알 수 없었다.그의 주먹의 힘에 육현경은 뒤로 밀려났다. 옆에 벽이 없었다면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나는 당신을 계속 존경했어. 그런데 오늘부터 당신을 경멸해! 어떤 상황에서도 남자로서 자
소이연은 깜짝 놀랐다.그녀는 바닥에 누워 있었기에 그들의 싸움을 막을 수 없었다.그들의 싸움은 점점 격렬해졌다.심문헌은 미친 것처럼 육현경에게 주먹을 휘둘렀다.육현경은 상처가 있었기에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심문헌! 그만해요!”소이연은 만류는 들리지도 않는 듯 심문헌은 눈이 빨개져 육현경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쳤다.‘이 얼굴로 소이연을 꼬신 거지?’육현경도 심문헌의 강도가 점점 세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도 잘못이 있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그러나 점점 그의 분노도 끌어올라 심문헌에게 반격을 날리기 시작했다.그렇게 둘은 혼연일체가 되었다. 옆에서 보는 소이연은 급해져 소리를 질렀으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그녀는 더 이상 볼 수 없어 핸드폰을 들어 천우진에게 전화를 걸었다.2분 후, 천우진과 육민이 급하게 병실로 들어왔다.“멈춰요!”천우진은 심문헌을 당겼지만 그는 멈추지 않고 다시 육현경에게 달려들었다.육현경도 물러서지 않고 맞섰다.천우진은 급히 두 사람의 중간에 끼어들었지만 심문헌은 거침없이 주먹을 뻗어 천우진의 코를 가격했다.그의 코에서는 쌍코피가 흘렀다.그 모습에 심문헌은 어안이 벙벙했다.그런 심문헌의 모습에 육현경도 주먹을 멈추었다.“됐어요?”천우진은 얼굴의 피를 닦으며 물었다.심문헌을 그런 그의 모습에 입술을 깨물었다.그와 육현경의 얼굴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됐냐고요?”답이 없자 천우진은 더 높은 목소리로 되물었다.“아니요.”심문헌은 천우진 때문에 다시 화가 일렁거렸다.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만약 육현경이 소이연을 잘 보살폈다면 때리지 않았을 것이다.“그럼 날 때려요.”천우진이 차갑게 말했다.“당신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요?”천우진을 한 대 때린 것이 미안했던 것인지 심문헌은 퉁명스럽게 물었다.“어른은 주먹으로 일을 해결하는 게 아니에요.”“됐어요, 그만할게요.”“그만 말해요, 듣기 싫으니까.”말을 마치며 심문헌은 육현경을 돌아보았다.“후회할 날이 올 거야.”그리고는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