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천우진은 소이연의 병실로 갔다.“문헌 씨는요?”심문헌은 어제 그녀의 병실을 나간 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답지 않았다.육현경이 살아있다는 것을 안다면 이렇게 가만있을 그가 아니었다.“자고 있어요.”“어디 아픈 거예요?”“아니요, 취했어요.”“...”“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술 좀 먹고 잠들었어요. 그리고 아직 깨우지 않았어요. 만나고 싶으면 가서 깨울게요.”“괜찮아요.”소이연은 다급히 거절했다. 그냥 그의 안부를 물은 것이다.답을 하며 그녀는 천우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왜요?”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천우진이 물었다.“문헌 씨한테 지극정성이네요.”천우진은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그냥 딱해 보여서요.”천우진의 대답에도 소이연은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그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다크서클도 심했다. 어젯밤 잘 휴식하지 못했을 것이다.심문헌이 병실에 있는데 잘 쉬지 못했다고?“할 말이 있어요.”천우진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말해요.”“할아버지를 대체할 사람을 찾았어요.”그의 말에 소이연은 깜짝 놀랐다.“많이 찾아봤지만 똑같은 사람은 찾지 못하고 비슷한 사람만 찾았어요. 가까이에서 보면 할아버지가 아닌 걸 보아낼 수 있어요.”“그래서요?”“오늘 할아버지를 비밀리에 안전한 곳으로 모실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을 부를 거예요. 구체적인 건 내가 준비할 거예요.”소이연은 별다른 말 없이 천우진의 말을 따랐다.“당신과 육현경은 어떤 생각이에요?”어제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어 물어보지 못했지만 지금 그녀의 생각을 물어야 했다.“노력할게요.”소이연은 천우진에게 숨기지 않았다. 애초에 숨겨지지도 않았을 것이다.“노력한다면 문제에 맞서도 되나요?”“괜찮아요.”소이연은 강경하게 답했다.“마음대로 해요.”“반대하는 건가요?”“반대하면 들으실 건가요?”천우진이 반문했다.“아니요.”“다른 건 다 괜찮은데 당신이 나를 밀어내는 건 견딜 수 없어요.”천우진의 말에 소이연은 감동을
천우진은 소이연이 천씨 가문에게 적대적이기에 오랫동안 알고 지낸 그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냉담했다.“나를 인정하는 건가요?”천우진은 한참이나 진정한 후 입을 열었다.“항상 인정했어요.”“이제야 표현하나요?”“자만할까 봐요.”그녀의 대답에 천우진은 낮게 웃었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했다.“먼저 몸조리해요. 육현경이랑 다시 시작하든 아니면 천씨 집 일을 해결하든지 모두 건강이 우선이에요.”“당신도요.”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뭐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맞다, 문헌 씨가 깨어나면 나한테 오라고 해요. 할 얘기가 있어요...”“여기 있어요.”문 앞에서 들리는 심문헌의 목소리에 소이연과 천우진이 돌아보았다.“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잘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대화를 엿듣지 못했어요.”“들어도 상관없어요. 속일 얘기도 없어요.”“먼저 나가 볼게요.”천우진은 그들을 두고 병실을 나왔다.“민아, 삼촌이랑 나갈래? 병원에서 며칠이나 지냈잖아.”“좋아요.”육민도 눈치가 빨랐다.병실에는 소이연과 심문헌 두 사람만 남았다.소이연이 한숨을 내쉬었다.“내 선택을 알거라고 생각해요.”“이제 나는 끝인가요?”심문헌은 그녀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 가볍게 말했다. 그의 모든 아픔을 그녀에게 숨긴 것이다.“나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낭비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그리고 내가 버림받았다고 생각지도 않아요.”심문헌의 말에 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육현경이 함께 하겠다고 해요?”“...”심문헌은 조금 고소했다.“임아영과 결혼할 건데 뺏을 자신이 있나요? 임아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에요.”심문헌의 말에 소이연은 반박할 수 없었다.“육현경이 임아영과 결혼하면 누구와도 만나지 않을 거예요?”“그럴 필요는 없죠. 죽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과 결혼 한 건데,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심문헌의 말은 너무나 냉정했다.“육현경의 죽음은 나에게는 나쁜 일이 아니에요. 죽지도 않은 그가
이틀 후, 소이연은 천우진의 부름에 천씨 어르신 병실로 갔다. 정확히 말하면 천씨 가문 모두가 불려 갔다.그러나 어르신은 소이연과 천우진만 보려 했고 다른 이들은 밖에서 기다렸다.중환자실은 유리로 막혀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 유리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그래서 어르신이 일어난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등을 대고 있었기에 얼굴은 볼 수 없었다.어르신이었기에 누구도 돌아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 또한 천우진이 똑똑한 점이었다.아무도 어르신이 다른 사람일거라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각도에서 보면 어르신과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소이연은 천우진과 중환자실에서 가짜 어르신과 대화를 나누었다.그렇게 반 시간이 지나 둘은 병실을 나왔다.어르신은 피곤한지 침대에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그들이 병실을 나오자 집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할아버지가 뭐래?”천정엽이 다급히 물었다.“피곤하셔서 다른 사람들은 만나지 않겠다고 하시네요. 이제 깨었으니 걱정 말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몸이 괜찮아지면 천씨 집으로 갈거라고 해요. 걱정 말고 하실 일 하시래요.”천우진은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할아버지를 만날 거야.”“삼촌, 할아버지가 명확하게 말했어요. 피곤해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대요. 휴식을 원하시는데 들어가면 좋지 않을 것 같아요.”“내 아빠가 어렵게 깨셨는데 아들로서 보러도 못가? 그저 얼굴만 보겠다는데.”“이건 할아버지의 뜻이에요. 왜 이렇게 준비하셨는지는 퇴원하고 물어보세요.”“왜 퇴원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지금 가도 되잖아.”“삼촌.”“우진이 네가 계속 막는 걸 보니 무슨 비밀이 있나 본데?”천정엽은 비아냥거렸다.“할아버지 곁에서 수년간 돌봤는데 삼촌이 나를 의심하다니. 이건 나를 의심하는 건지, 아니면 할아버지를 의심하는지 모르겠네요.”천우진의 강한 말투에 천정엽은 말을 멈추었다.그러나 천정엽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나는 아빠를 관심하는 거야. 나는 보러 가야겠어. 비켜.”말을 마치며 천정엽은 밀고 들어
“네가 뭔데...”“잊었나 본데 할아버지가 다친 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어쩌면 천씨의 누군가에 의해 다치신 거예요. 모든 조사를 마치기 전에 할아버지는 누구도 만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어요.”“왜? 나를 의심하는 거야?”천정엽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그 정도는 아니지만 삼촌이 지금 할아버지의 화를 돋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모든 진실이 들어난 후에 만나도 늦지 않아요.”천우진의 말에 천정엽은 얼굴이 굳어졌다.그러나 더 이상 강압적으로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어르신이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아 하시는 건 누구도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계속 들어간다면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이다.천정엽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말이 없었다.“아까 할아버지가 말하셨어요. 자주 올 필요 없다고요. 할아버지의 몸이 나으시면 퇴원하고 돌아가실 거예요.”“다른 얘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 기다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천정엽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다른 일은 전달할 필요가 없으시대요.”“천우진!”천정엽은 화가 났다. 어르신은 천우진을 더욱 신뢰하여 다른 사람은 안중도 없이 모든 일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삼촌, 할아버지는 다 계획이 있으세요. 존중하셨으면 좋겠네요.”“천우진, 아버지가 모든 일을 너에게 맡긴 거지?”천정엽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아니요, 할아버지가 건강을 되찾으면 직접 해결하실 거예요.”“거짓말하지 마!”천정엽은 믿을 수 없었다.“그래, 너는 장손이고 아버지가 키우셨으니 너를 더 좋아하시겠지. 앞으로 네가 천씨의 권력을 쥐면 삼촌을 잊지 마라.”“삼촌, 너무 갔어요.”천우진은 너무 비굴하지 않게 천천히 말했다.“할아버지가 아직 건강하시니 은퇴하시지 않으실 거예요. 그러니 삼촌은 걱정하지 마세요. 할아버지는 누구도 편애하지 않으니까.”“너는 정말 아버지를 닮았네. 됐어, 너랑 얘기 그만할거야. 아버지가 만나기 싫으면 가야지.”천정엽은 그의 무리를 이끌고 돌아갔다.“형님, 할
천우진은 소이연을 바라보았다.소이연은 침착했다.“포기하지 않을 거예요.”“같이 가 줘요?”“괜찮아요.”소이연은 웃으며 답했다.“있으면 더 불편할 것 같아요.”“뭐 할 거예요?”천우진의 얼굴이 굳어졌다.“얼굴이 정말 빨리 바뀌네요.”“소이연, 적당히 해요.”“...그래요.”소이연은 천우진의 안색이 나빠지자 꼬리를 내렸다.딸을 시집보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진지하다니.“먼저 갈게요. 민이 부탁해요.”“아들도 버리네요.”“나는 엄마를 응원해요.”육민이 곁에서 거들자 소이연은 웃음이 터졌다.그녀는 스스로 휠체어를 끌고 떠났다. 어떻게 이미 다른 여자가 생긴 육현경을 대해야 할지도 몰랐다.지금 가서 육현경과 임아영이 알콩달콩한 모습을 마주하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소이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그녀는 자신에게 육현경은 이미 기억을 잃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대담하게 행동해도 된다고 주문을 걸었다.임아영은 확실히 육현경의 생명의 은인이었다.그녀는 휠체어를 밀며 힘겹게 육현경의 병실에 도착했다.역시 그는 없었다.아마 옆 병실에 있을 것이다.그래도 그녀는 병실로 들어갔다. 임아영의 병실에서 육현경이 있는 모습과 갖은 노력으로 그를 남기게 하는 그녀의 행동이 더욱 싫었다.소이연은 저절로 한숨을 내쉬었다.한 번도 자신이 남자를 빼앗기게 될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그녀의 인생관에서 남자를 뺏는 것은 제쳐두고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것도 불가능했다.그녀가 고귀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남녀 간의 관계에서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다.이건 어린 시절 가정의 영향 탓이다.지금은 육현경이 다른 여자와 놀고 난 후 자신한테 돌아오길 바라는 지경에 도달했다.소이연은 육현경의 침대에 앉아 핸드폰으로 연예 뉴스를 들여다보았다.요새 자신의 교통사고, 천씨 가문의 사건, 육현경 때문에 다른 일들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지금 정신이 돌아와 예수진의 일에 대해 알고 싶었다.굳이 검색하지 않아도 예수진 관련 뉴스는 가
소이연은 보다가 지쳤는지 핸드폰을 내려다 놓았다. 그때 문밖의 육현경을 발견했다.육현경은 정신을 차리고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그 모습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일부러 자신과 거리를 두는 걸 느꼈지만 무시했다.“돌아왔어요?”소이연은 억지로 웃어 보였다.“무슨 일이에요?”“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나요?”육현경은 소이연에게 ‘우리 사이에 더 이상 보지 말자’는 말은 뱉을 수 없었다.결국 그녀를 보내기 싫은 것이다.지금이라도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날 구해줬는데 감사의 인사도 못 하나요?”“필요 없어요.”“다른 사람이었다 해도 똑같이 행동 했을 거예요.”“임아영은 옆에서 가만히 지켜봤어요.”소이연의 가시 돋친 말에 육현경은 침묵하며 반박하지 않았다. 아니, 반박하고 싶지 않았다.그는 소이연의 자신과 오래 함께 하길 바랐다.“어떻게 감사를 표할지 알고 싶지 않아요?”소이연은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어떻게요?”“이리 와 봐요, 알려 줄게요.”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육현경은 경계 어린 시선으로 천천히 소이연에게 걸어갔다.“조금 낮춰 봐요. 키가 너무 커서 내가 얼굴을 보려면 너무 힘들어요.”소이연의 말에 육현경은 어이가 없었다.그는 몸을 아래로 구부리며 그녀와 같은 높이를 유지했다.“이러면 돼...”육현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자신의 입술을 가로막았다.소이연이 입술이 그의 손등에 찍혔다.소이연은 자신이 이렇게 거절을 당하자 마음이 너무 아팠다.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그래도 너무 아팠다.두 사람은 그렇게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봤다.육현경은 몸을 일으켜 뒤로 한 걸음 후퇴해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이렇게 할 필요 없어요.”소이연은 그 때문에 자신의 원칙을 깨지 않았어야 했다.그녀는 타인의 감정을 파괴하는 사람을 싫어했다.자신의 엄마가 다른 사람에 의해 결혼 생활이 파괴당했고 그녀 또한 연애가 다른 사람에 의해 파괴당했다.그 때문에 그녀 또한 그런 사람이 된
육현경은 자신이 평생을 걸쳐 꿈에도 가지고 싶었던 여자의 입에서 고백을 들을 줄 몰랐다.그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다.한순간 그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그녀를 꽉 안고 싶었다.그러나 심아윤의 일을 겪은 후 그런 모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임아영은 심아윤보다 더 악질이었기에 소이연과 육민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없었다.“임아영은 내 생명의 은인이에요. 버릴 수 없어요.”육현경은 결국 냉담하게 그녀를 대했다.소이연의 가슴 한쪽이 쓰려왔다.육현경이 기억을 잃어 이렇게 말하는 것임을 알고 있음에도 가슴이 아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사랑이 아닌 감사함으로 함께 하는 건 결국 행복하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갈등도 더욱 심해질 거예요. 당신은 지금 그녀를 해치는 거예요.”“그렇지 않으면 죽을 거예요.”“그렇게 무서워요?”“말했잖아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생명의 은인... 그래서 그 사람에게 남은 인생을 바치겠다는 거죠?”“그래야만 해요.”“그럼 나는요? 당신한테 버림받는 건가요?”“미안해요.”육현경의 사과는 그녀를 자극했다.“루카스, 당신의 진짜 신분을 알아요? 누구인지...”“알고 싶지 않아요. 아는 게 많아질수록 더 힘들어 질거예요. 이연 씨,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그의 냉담한 말에 소이연은 눈시울이 점점 붉어지다가 눈물이 차올랐다.육현경의 모습은 소이연의 가슴을 후벼팠다.“인정해요. 내가 먼저 당신을 흔들었죠. 바람피운 거나 다름없어요. 한때는 아영 씨를 버리고 당신과 함께하겠다는 생각도 했었죠.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영원히 아영 씨를 사랑할 거예요.”육현경의 말에 소이연은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그를 가지는 건 쉽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그녀의 오만이었다.“이연 씨, 당신한테 너무 미안해요.”육현경은 가슴 아픈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뱉었다.“당신이 누군지 알면 분명히 후회...”“말했죠,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다고요. 나한테 아무런 이득이 없어요.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나를 내버려둬요.
소이연은 일부러 그의 병실 앞에서 넘어졌다.그런 그녀에게 관심을 주게 될거라 생각했다.그렇다, 그녀는 결국 야비한 수단을 쓴 것이다.육현경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으려다가 멈추었다.그렇게 소이연은 바닥에 넘어졌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냉담한 눈빛의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일어나기 힘들면 간호사를 불러올게요.”“도와주면 안 되나요?”육현경의 반응에 소이연은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물었다.“남녀가 엄연히 다른데.”“이제라도 임아영에게 충성하겠다는 건가요?”“정신적으로 바람을 피웠던 게 미안해서요.”“하.”소이연은 콧방귀를 꼈다.그래도 여전히 가슴이 아팠다.자신의 애인이 다른 여자를 위해 그녀와 거리를 두려고 하다니.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몸을 일으켰다.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이번에는 진짜로 두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았다. 두 팔의 힘으로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그녀가 바닥에서 허둥대는 모습을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었다.둘은 그렇게 한참이나 서로를 바라보았다.“간호사를 불러올게요.”소이연의 그녀의 힘으로 일어설 수 없음을 발견한 것이다.“필요 없어요!”그녀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힘껏 소리쳤다. “누구도 필요 없어요.”“그럼 맘대로 해요.”육현경은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차갑게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소이연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는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그는 어쩌다가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게 된 걸까.심지어 그녀는 그가 아까 병실은 들어오던 때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되었다.마치 그가 자신의 모든 감정을 깨닫고 최후의 선택을 한 것처럼 말이다.사람 감정이 이렇게 쉽게 변한단 말인가!“쾅!”병실 문이 열리며 심문헌이 육현경의 얼굴로 주먹을 날렸다.소이연은 그가 언제 왔는지 알 수 없었다.그의 주먹의 힘에 육현경은 뒤로 밀려났다. 옆에 벽이 없었다면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나는 당신을 계속 존경했어. 그런데 오늘부터 당신을 경멸해! 어떤 상황에서도 남자로서 자
송문수를 따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가지고 갔던 생리대로도 부족했었는데 양까지 많았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생각을 마치고 나니 심심해진 하지수는 자연스레 티비를 켜고 법률 채널을 틀어놓았다.주방에서 돌아치는 송문수는 진작에 잊은 하지수가 전형적인 판례들을 넋 놓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는 마침내 흑설탕물을 다 끓여냈다.맛없는 걸 가져다주는 건 안 하느니만 못하다고 먹어보고 괜찮으면 그때 가져다주라는 소이연의 당부가 있었기에 송문수는 맛을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그런데 생각보다 괜찮은 맛이어서 그는 용기를 내어 그걸 하지수에게로 들고 갔다.“이게 뭐야?”하지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 친구의 행동에 어리둥절해 하며 물었지만 송문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흑설탕물이야. 뜨거울 때 마셔.”“뭐?”“생리 기간에는 이런 거 마셔야 하는 거 아니었어?”“나 주려고 당신이 직접 만든 거야?”“당연하지, 내가 생리 올 리는 없잖아.”진지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려버렸다.어떨 때는 신기하리만치 제 마음을 몰라주다가 또 이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저를 위해주는 걸 보면 그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송문수는 정말 밉지만 싫어할 수가 없는 존재였다.“고마워.”낮에 있었던 그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살짝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흑설탕물 한번 가져다줬다고 하지수의 화는 또 사르르 풀려버렸다.“어때?”그런데 하지수가 마셔보려고 컵을 든 순간 송문수는 맛을 물으면서 자연스레 채널을 돌려버렸다.한창 판례를 보고 있었는데 또 제 의사는 묻지도 않고 멋대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그의 행동에 하지수는‘사랑이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는 것과도 같다’라는 가사에 깊은 공감이 가 순간 한숨을 쉬어버렸다.정말 송문수에게는 기대를 품으면 안 되는 것 같았다, 기대하는 족족 그것들이 실망으로 이어지니 말이다.한편 미간을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쉰 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황하며 물었다.“맛없어?”“내가 먹어볼 때는 맛있었는데? 너 생리만 아니었으면 내가 다 마
가슴을 졸이며 부둣가에 도착하니 술을 마신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역시나 운전석에 앉아야만 했다.진짜 이런 데이트를 하는 건 자신밖에 없을 것 같아 생각할수록 기분이 나빴던 하지수는 집으로 가는 동안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삐진 티를 내고 있었지만 송문수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따라부르며 드라이브를 즐기고 있었다.송문수는 오늘이 아주 완벽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집으로 돌아온 하지수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송문수는 그 속도 모르고 또 그녀를 붙잡았다.“왜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좀 앉아있지.”아직 이른 시간이라 송문수 딴에는 하지수와 함께 티비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나 씻고 싶어.”“나중에 씻어.”“보트 탈 때 몸이 다 젖어버려서 아직도 추워. 나 생리 와서 생리대도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거면 그냥 씻고 싶어.”하지수의 말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여자가 생리 기간일 때는 더욱더 신경 써서 몸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어제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간만의 데이트라 너무 신난 탓에 그만 까먹어버린 것이다.“먼저 보고 있어, 나 금방 씻고 나올게.”“응.”하지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송문수는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생리 기간에는 어떤 걸 신경 써줘야 하는 거예요?][송문수, 너 생리 기간도 못 참고 하려고 그러는 거야? 짐승 같은 놈.][날 좀 좋은 쪽으로 생각해주면 어디 덧나니? 나 그런 놈 아니거든.][그럼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생리 때는 체온 유지에 신경 써줘야 해서 춥게 굴면 안 되고 피곤하지 않게 많이 쉬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술이랑 찬 건 되도록이면 안 먹는 게 좋고요. 하지만 지수 씨 성격이라면 남한테 기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이 정도는 알아서 했을 거예요 이미.]소이연은 이내 송문수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문수 씨는 흑설탕물이나 끓여주세요. 피도 잘 통하게 해주고 생리통 푸는 데에도 효과적이에요. 그리고 흑설탕물은 달달하
하지만 그리 남사스러운 말은 아니라서 하지수는 한마디 더 보탰다.“좀 그런 것 같기도 하고.”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려고 일부러 더 너스레를 떨었다.“내가 매력이 넘치는 걸 어떡하겠어.”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하지수는 굳이 반박하지 않고 웃어 보였다.“하지수, 내가 전에 좀 막살았던 건 인정하는데 그래도 한번 결정한 일은 끝까지 하는 사람이야 나. 내가 너랑 잘 만나보겠다고 약속한 이상 절대 너한테 미안할 짓은 안 해.”“응, 알겠어.”하지수는 송문수가 하는 말이라면 뭐든 다 믿었다, 아니 다 믿고 싶었다.그리고 지금은 자신을 실망시키는 사람일지라도 언젠가는 바뀔 걸 알기에 그녀는 기다릴 수 있었다.“네가 나한테 맞춰주는 만큼 나도 너 실망시키지 않을게.”“알았어.”우쭐대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송문수의 말이라면 늘 이렇게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바로 하지수였다.밥을 다 먹고 난 둘은 해변가를 거닐었는데 붉은 태양이 바다에 걸쳐져 있어 노을이 아주 예쁘게 져 있었다.주변 환경은 별로였지만 그래도 경치는 봐줄 만해서 하지수의 기분도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날에 좀 있으면 파도가 더 거세질까 봐 걱정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보며 말했다.“문수 씨, 우리 이제 가자.”“가고 싶어?”“응.”“좀 더 있다 가자, 여기 좋잖아.”“좀 있다 보트도 타야 하잖아, 저녁엔 위험할 것 같아서 그래.”낮에 올 때도 무서웠는데 밤엔 더할 것 같아 하지수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무서워?”송문수는 그런 하지수가 웃긴지 입꼬리를 씰룩이며 물었다.“응. 무서워.”“그럼 가자.”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에 송문수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하지만 그가 이렇게 제 의견을 바로 수락해줄 줄 몰랐던 하지수는 어벙벙한 채로 그를 따라 걷고 있었다.사실 집에 가고 싶다는 말도 원래의 그녀였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소이연이 했던 말이 떠올라 한평생 참고 살
“왜 안 먹어?”송문수의 재촉에 하지수는 손으로 게를 잡고 뜯었는데 다른 곳보다는 맛있었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들였던 노력에 비하면 그리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어때? 맛있지?”“맛있어.”하지만 기대에 찬 송문수를 보며 차마 그런 말을 내뱉을 수는 없어 하지수는 웃으며 말했다.“역시 네가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하지수를 긍정을 듣고서야 드디어 먹기 시작한 송문수는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하도경이랑 여기 자주 왔었는데 현경이랑 지원이는 바빠서 같이 몇 번 못 왔었어.”“그랬구나.”“술 마실래?”“나 생리 왔잖아.”영혼 없이 답을 하던 하지수는 신나서 술을 제안하는 송문수에 또 체념한 듯 말했다.반복되는 실망에 기대를 하지 않다 보니 송문수의 무관심이 이젠 원망스럽지도 않았다.“아, 맞다. 그럼 음료수라도 마실래?”“물 줘 그냥.” 그녀의 대답에 송문수는 직원에게 물과 맥주를 부탁했다.지금 술을 마시면 좀 있다 돌아갈 때 운전은 또 하지수의 몫이 되겠지만 오랜만에 신난 송문수를 위해 하지수는 한 번 더 참기로 했다.상대방의 행복을 위해 한 사람만 계속 참는 건 좋은 연애가 아니라고들 하는데 하지수는 송문수가 기뻐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하지수는 정말 상대방에게 아주 관대한 사람이었다.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는 간간이 소이연과 예수진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다.어디에서 데이트하는지 많이 궁금하길래 솔직하게 알려주니 예수진이 바로 답장을 보내왔다.[진짜 송문수답다, 연애 고자잖아 이건.][지수 씨, 문수 씨한테 거기 별로라고 얘기 못 했어요?][안 했어요, 뭐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니까 나도 문수 씨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보고 싶어요.][알아가는 건 좋은데 그렇다고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건 아니죠. 지수 씨, 부부 사이에는 그렇게 내외할 필요 없어요.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사인데 불편한 게 있으면 용기 내서 말해야죠.]소이연의 말에 고개를 들어 본 하지수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거야.”“친구들 말고는 다른 사람 데려간 적도 없는 곳이야. 네 기억에 남을 만한 맛집이니까 기대해.”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하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또 괜히 기대를 하기 시작했다.영화는 별로여도 식당은 좋은 데로 찾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차가 부둣가에 도착하고 송문수와 함께 차에서 내린 하지수는 울퉁불퉁한 길을 하이힐을 신은 상태로 걷자니 발이 아파왔지만 얼마나 대단한 맛집일까 싶어 애써 참으며 그를 따라 걸었다.그런데 식당은커녕 눈에 보이는 건 보트에 타라고 저를 향해 손짓하는 송문수뿐이어서 하지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바다에서 먹는 거야?”역시나 기대를 하지 말아야 했었던 걸까.송문수는 하지수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끌며 보트에 태웠다.곧이어 출발한 보트는 물살 때문에 심하게 휘청였는데 워낙 물을 무서워하던 하지수는 난간을 꽉 붙잡고 몰아치는 파도를 버텨내고 있었다.“와아!”송문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신나 보였지만 하지수는 도저히 소리를 지를 정신이 아니었다.밀려오는 파도에 온몸이 다 젖어버린 그녀는 번진 화장부터 열심히 세팅한 머리까지 지금 걱정투성이였다.데이트한다고 치마까지 꺼내입었는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제 남자 친구 때문에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게다가 생리까지 하고 있는데 여기는 화장실도 하나 없었다.도통 무슨 생각으로 이곳을 데이트코스로 선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중에라도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라고 본인을 위로하며 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하지수가 기대한 서프라이즈는 아니었지만 다른 의미의 놀라움은 끊이지 않았다.파도를 헤치며 달리던 보트는 똑같이 아무것도 없는 해변에 멈춰 섰는데 해변가에 세워진 집으로 가려면 맨발로 거기를 걸어가야 했기에 딱딱한 모래 때문에 하지수는 안 그래도 아픈 발이 더 아파왔다.그래도 아무 말 없이 송문수를 따라갔더니 그 힘든 과정을 거쳐 도착한 곳이 바로 시골 식당이었다.두 사람은 허름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
그 말에 더 신이 난 송문수는 평소에는 그냥 사진도 찍기 싫어하던 사람이 하지수와 함께 필터가 잔뜩 씌여진 카메라 앞에서 바보같이 웃어 보였다.사진을 다 찍은 두 사람은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는데 아직 영화가 시작하기 전이라 하지수는 빠르게 인스타를 올려버렸다.아무 문구도 없이 올려버린 셀카에 하도경이 곧바로 댓글을 달았다.[내 눈이 이상한 거 아니죠?][이 바보같이 웃고 있는 게 진짜 송문수에요?]계지원과 육현경도 이내 좋아요를 눌렀고 예수진은 본인다운 댓글을 달았다.[이젠 남자 친구 생겼다고 나랑은 영화 안 본다는 거지?][송문수 웃는 거 진짜 바보 같긴 하다.][무슨 영화 봐요? 재밌어요?]소이연까지 댓글을 달고 회사 사람들도 수많은 좋아요를 보내며 각양각색의 축하 인사를 해오자 하지수는 깜짝 놀라버렸다.평소에 감명 깊게 본 문구나 올리던 하지수가 갑자기 일상을 올려버리니 사람들의 반응이 폭주해버린 것 같았다.그에 하지수는 답장이라도 하려 했지만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송문수에 핸드폰을 가방에 찔러넣을 수밖에 없었다.“영화 곧 시작하는 데 뭐해?”“아무것도 아니야.”처음에는 송문수와의 데이트라는 생각에 설레어 영화에 집중을 못 했지만 영화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갈수록 하지수는 점점 그 내용에 깊이 빠져들어 버렸다.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상영관의 불이 켜졌을 때도 넋을 놓고 있었는데 저를 흔드는 송문수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영화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끝났으니까 이제 가자.”차에 올라타서도 아무 말도 안 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그녀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며 물었다.“왜 영화 보고 나와서 한마디도 안 해?”미간을 찌푸린 채 묻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오히려 본인이 더 따져 묻고 싶었다.누가 데이트하러 나와서 를 보냐고.너도 날 죽일 거냐는 질문을 할 수는 없으니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하지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설마 나도 널 죽일 거냐 뭐 그런 질문이 하고 싶은 거야?”그런데 그때 송문수가 헛
처음에는 그냥 곁눈질로만 보던 송문수는 제 눈에 들어온 낯선 하지수의 모습에 고개를 돌려 그녀를 제대로 보기 시작했다.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그녀의 옷차림에 그의 심장은 빠르게 쿵쾅대기 시작했다.이게 연애라는 건가 싶어서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뻘쭘했던 하지수가 물어왔다.“나 별로야?”역시나 이런 여성스러운 원피스는 저한테 안 어울리는 건가 싶어 예수진의 말을 믿은 걸 후회하는 하지수였다.“나 옷 갈아입고... 아!”본인도 이런 착장이 어색해 옷을 갈아입으려고 했는데 그 순간 송문수가 하지수의 팔을 잡더니 그녀를 품에 안았다.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란 하지수는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 소리가 상대방에게 들릴 것만 같아 애써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문수 씨, 왜 그래?”제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들며 물어오는 하지수를 바라본 송문수는 그녀와 한참 동안 시선을 맞추다가 말했다.“나 못 참을 것 같아.”“응?”“못 참겠어.”의문문이 서술문으로 바뀌는 순간, 둘의 상황도 완전히 변해버렸다.그녀를 눈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안 그래도 괴로웠는데 치마까지 입으며 자신을 유혹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그녀를 집어삼킬 듯이 키스를 퍼부었다.“영화 보러 안 가?”미간을 찌푸리며 항의하는 그녀의 모습조차 예뻐 보였던 송문수는 그딴 영화는 개나 줘버리고 그저 그녀의 위에서 사랑을 나누고 싶었지만...망할 놈의 생리 때문에 또 한 번 자신의 욕구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이 상황이 죽을 만큼 힘들었던 송문수는 예전에 누렸던 방탕했던 생활에 대한 벌을 이렇게 받는 건가 싶기도 했다.“가자.”“나가자 이제.”송문수와의 키스가 싫은 건 아니었지만 이 상태로 더 있다가는 그가 이성을 잃고 자신을 덮쳐 피가 사방으로 흐르게 될까 봐 하지수는 그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잠깐만.”“왜?”하지만 송문수는 허리에 두른 팔을 풀 생각이 없는지 괜히 시간을 끌며 하지수 쪽으로 점점 더 다가갔다.훅 들어온 얼굴 공격에 볼이 빨개진 하지수는 속으로
핸드폰을 돌려받은 송문수가 아무런 해명도 없이 바로 방에 들어가 버리자 혼자 남은 하지수는 화해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다시 전처럼 쌀쌀맞게 구는 송문수에 고민 상담이라도 하려고 예수진과 소이연이 함께 있는 단톡방에 문자를 보내보았다.[다들 바빠요?]한참 지나서 소이연이 답장을 보내왔다.[아니요, 왜 그래요 지수 씨?]어젯밤만 해도 멀쩡했었는데 왜 갑자기 태도가 변한 건지 알 수 없었던 하지수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키보드를 켠 채 고민만 하고 있었다.[지수 씨?][왜 그래 지수야?]예수진까지 답장을 보내오자 하지수는 그냥 자신의 느낌을 그대로 말해버렸다.[문수 씨가 또 바람을 피우는 것 같아.]그에 예수진은 토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왔고 소이연도 물음표 하나를 보내왔다.[문수 씨도 오늘 출근 안 하니까 같이 시간 좀 보내려고 했거든. 그런데 밥 먹을 때도 핸드폰만 붙잡고 있는 거야. 누구랑 얘기하는지 가끔가다 웃기도 하고. 그러다가 문자가 너무 많이 와서 내가 핸드폰 전해주려고 잠깐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한테 소리치는 거 있지? 다른 여자랑 문자 하는 거 내가 볼까 봐 그런 사람처럼 너무 이상하잖아.]하지수가 말한 다른 여자들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이었기에 소이연과 예수진은 깜짝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그나마 반응이 빠른 예수진이 빠르게 소이연에게 개인 톡을 보냈다.[지수가 문수를 오해한 것 같은데, 어떡하죠? 그냥 사실대로 말할까요?][잠깐만요, 일단 너무 충동적으로 그러진 말아요 우리.][문수 씨가 서프라이즈 하려고 얼마나 많이 신경 썼는데 우리가 이렇게 스포 해버리면 엄청 화낼 거에요.][그럼 어떡해요? 지수 울 것 같은데.][그냥 문수 씨한테 주의하라고 알려주죠?][아무튼 송문수는 진짜 바보라니까요.]화끈한 성격답게 욕부터 내뱉은 예수진은 셋이 함께 있는 단톡방 안에서 송문수에게 따로 주의를 주고는 다시 아까의 톡방으로 돌아가 하지수도 위로해주었다.그렇게 하지수가 한창 예수진과 소이연한테 하소연을 하고 있을 때
혼자 술을 마시던 하도경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아서 먼저 나가떨어져 버린 셋을 비웃고 있었다.아무래도 평소에 술을 많이 마시지 않던 사람들이라 주량이 턱없이 약한 것 같았다.알딸딸한 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난 하도경은 몸은 휘청거렸지만 그래도 정신줄은 잡고 있어 다행히 두 발로 걸을 수는 있는 정도였다.입구를 향해 걸어가던 하도경은 예수진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싶어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미 끝난 사이에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 같아 그저 밖으로 나갔다.자신이 예수진을 완전히 잊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처도 무뎌지니 전만큼 아픈 것 같지는 않았다.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온 하도경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빠르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술기운까지 더해져 잠에 들려던 찰나, 둘둘씩 짝을 지어 제 앞을 벗어나던 친구들이 떠올랐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씩씩거렸다.여자친구 있는 게 별것도 아닌데 혼자만 없으니 괜히 더 서러운 것 같았다....다음날, 효율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수진은 원활한 교류를 위해“비밀작전팀”이라는 단톡방을 개설했는데 거기에 소이연과 송문수를 초대하고 아침부터 문자를 쉴 새 없이 보내고 있었다.예수진이 보내온 로맨틱한 프러포즈 장소가 하도 많아 송문수는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뭐가 이렇게 많아? 그냥 하나로 통일하면 안 돼? 나 이거 다하다가는 힘들어서 죽어.][누가 다하래? 여기서 고르라고.][조금 복잡하긴 하네요.]송문수가 어이없어하자 소이연이 나서서 정리하기 시작했다.[일단 셋 다 별로인 것부터 빼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들로 몇 개만 추려보죠.][난 이연 씨말에 동의, 역시 이연 씨가 나서야 좀 믿음이 간다니까요.][송문수, 너 말 똑바로 안 하면 나 여기 나간다?][아, 미안해. 그놈의 성질 진짜.]예수진 앞에서는 늘 기고 들어가야 했던 송문수는 이번에도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계획 빨리 짜고 프러포즈에 필요한 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