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예수진이 은하그룹 다음 시즌의 패션 앰배서더 포스터와 광고를 촬영하는 날.소이연은 아침 일찍부터 촬영장으로 가, 직접 예수진에게 스타일링을 해주었다.이번 런칭은 그녀가 은하에 입사하고 첫 신제품 런칭이고, 그녀와 은하그룹에도 모두 아주 중요했기 때문에,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예수진의 옷도 그녀가 예수진의 사이즈에 맞춰 단독으로 디자인해, 직접 입으니,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어울렸다.“저번에 은하 디자인을 보여주시긴 했지만, 실제로 입으니까 더 놀랍네요. 지금까지 제가 입어본 사복 중에 제일 예뻐요. 디자인 감도도 좋고, 개성도 있고.” 예수진이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아낌없는 칭찬을 했다. “이번 디자이너한테 보너스 좀 넣어드려야겠어요.”소이연은 웃으며 말했다. “수진 씨가 인정하다니, 영광인데요?”“저는 다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예수진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만약 나중에 이 디자인으로 은하 패션이 유명해지지 않으면, 제 호소력이 부족한 거예요. 옷 때문은 절대 아닐 거예요.”소이연은 예수진에게 위로를 받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비록 자신의 디자인에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지만, 정식으로 출시했던 적은 없으니, 시장에서 진짜로 받아들여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예수진은 그런 그녀에게 의욕을 심어주었다.정말 가까이에서 예수진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영원히 모를 것이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밝고 아름다운 여배우가, 사적인 자리에서는 오히려 무덤덤한 성격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것을.“오늘 촬영 끝나면 은하그룹의 앰배서더가 되었다는 걸 밝힐 거예요. 그리고 오늘 촬영 에피소드도 인스타그램, 유튜브, 기사에 올려서 예열할 거고요. 당연히 에피소드랑 카피라이팅은 사전에 수진 씨 사무실로 전달해서 컨펌받을 거예요.” 소이연이 말했다.“원래 계획된 대로 진행해 주시면 돼요. 저는 다 협조할게요.” 예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소이연은 예수진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놀라울 만큼 쉽다고
“문서인이 잘 만들었죠.” 소이연이 아니꼬운 듯 말했다.전에 그녀는 문씨 가문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했지만, 결국 마지막 공은 전부 문서인에게 돌아갔다.사귀는 사이였으니, 한 번도 따지지도 않았다.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부질없는 일이었다.“이연 씨랑 문서인 씨는 어떻게 헤어졌어요? 그 큰 사건 때문에 감정이 식은 건 아니죠?!”“문서인이 제 의붓여동생을 좋아하게 됐어요.”“소나은이요?” 예수진이 아니꼬운 듯 웃었다. “그 여우 같은 년.”“수진 씨가 보기에도 걔가 나빠 보여요?”“눈이 보이면 다 그렇게 봐요. 근데 남자들은 10명 중에 8명은 눈먼 사람이에요.”소이연은 웃었다. 예수진의 말이 아주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속으로는 감동했다.그녀와 예수진은 고작 몇 번 만나본 사이지만, 두 사람은……말 못 할 관계였다. 하지만 그녀들은 잘 맞는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그녀 주변에는 친구들이 얼마 없었다.당연히, 가장 친한 친구 한두 명 쯤은 있었는데, 18살 스캔들 이후에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피했다. 마치 그녀와 어울리면 본인들도 더럽혀지는 것처럼.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녀는 혼자인 것이 익숙했다.그녀는 심지어 혼자 해외에서 지내면서 너무 외로운 탓에 그렇게 쉽게 문서인을 좋아하게 되었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끝까지 그들 사이에는 절대 끊어지지 않는 감정이 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두 사람은 이야기를 하며 술을 마셨다.술에 취할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둘이 너무 잘 맞는 탓에 술을 많이 마셨다.소이연의 휴대폰이 울리고, 화면을 보니 “장 비서”라고 쓰여 있었다.“이사님, 수진 씨 촬영 에피소드랑 공식 홍보 카피라이팅 휴대폰으로 보내드렸습니다. 문제 있는지 확인해 주시고, 문제없으면 마케팅팀 통해서 수진 씨 소속사에 연락해 확인하고 저녁 10시 10분에 시간 맞춰 발행하겠습니다.”“알겠습니다.” 소이연은 전화를 끊고 휴대폰의 카피라이팅,
소이연은 예수진을 데리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예수진은 거의 차에 도착하자마자 잠들었고, 너무 깊게 잠들어 불러도 불러도 일어나지 않아, 데려다주고 싶어도 그녀의 집이 어딘지 알 수 없었다.주차장에 도착했다.소이연은 한참을 낑낑대서야 예수진을 부축해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녀를 부축해 집으로 가 침대에 눕혔다.여태까지 그녀는 계속 혼자 살았기 때문에, 비록 방은 2개였지만 침대는 1개였다.예수진은 그녀의 침대에 누워 편안한 듯 몸을 돌려 깊은 잠에 들었다.그녀가 이때를 틈타 예수진을 업어다 팔아도 모를 것 같았다.도대체 그녀가 겁이 없는 건지 신뢰가 쌓인 건지 모르겠다.소이연은 깊게 숨을 내쉬고 예수진에게 꿀물을 타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자신은 샤워를 했다.샤워를 하고 나오니 그제야 진동 모드인 휴대폰 화면이 계속 빛나는 것이 보였다.소이연은 휴대폰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소이연, 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문서인의 비꼬는 목소리가 전화 저편에서 들려왔다. “예수진이랑 은하 패션 앰배서더 계약을 해?! 왜, 시녀 둘이 남자 하나 받드니까 좋아?! 너 진짜 역겹다.”“나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축하할 일이 없었어. 애초에 약혼 연회에서도 깎아내리기나 하고, 만약 내가 진짜 너한테 시집갔으면, 대대로 땅을 치면서 후회했겠지.”“네가 나한테 뭐라고 할 자격이 있어?! 넌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어? 18살에 미혼모로 지금은 다른 여자랑 같이 남편을 공유하질 않나, 소이연, 너 진짜 천박하고 더러워.” 문서인은 하찮다는 듯 말했다.“네 생각에 너는 깔끔하다고 생각하나 보지? 너랑 소나은이 한 침대에 있을 때, 넌 네가 얼마나 더러웠는지 생각해 본 적 있니? 문서인, 너도 그렇게 잘난 건 아닌 것 같은데, 너 스스로 고상하고 순진한 척 하지마, 적어도 너한텐 진짜 안 어울리니까.” 소이연도 문서인에게 어느 정도의 여지는 남겨두어야 했다.“네가 내 호의를 못 받아들이겠다면, 난
“침대에서 좋은 냄새가 나요.” 예수진이 덧붙였다.소이연은 웃었다.예수진이 샤워를 하고 소이연의 잠옷을 입고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소이연의 집을 둘러보며 말했다. “방은 한 개네요.”“지금 후회해봤자 늦었어요.” 소이연은 주방의 테이블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그녀는 보통 아주 늦게 잠들었다. 12시도 안 되었으니, 잠도 오지 않았다.예수진도 자고 일어나니 잠이 오지 않았다.“무슨 후회요?” 예수진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요.”소이연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예수진은 갑자기 반응해 급히 해명했다. “저 성적 취향 정상이에요!”소이연은 웃으며 내린 커피를 예수진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저는 설탕이 안 들어간 블랙커피를 좋아해요. 너무 쓰면 여기 각설탕 있으니까 넣어 먹어요.”“괜찮아요, 저도 보통 블랙커피로 마셔요. 특히 정신 좀 차려야 할 때는요.”두 사람은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TV는 마침 예능 채널이 틀어졌고, 예수진이 출연한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진짜 제 팬이신가 봐요!” 예수진이 조금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사실 그런 것도 아니다.예능 프로그램을 보는 것은 시간을 때우면서 힐링하기 위함이었다.당연히 본인 앞에서는 반박하지 않을 것이다.두 사람은 늦은 시간까지 예수진이 출연한 프로그램을 보았다.예수진의 휴대폰이 울렸다.그녀는 한 번 보고 받지는 않았다.그리고 소이연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휴대폰을 보더니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계 감독님.”예수진은 소이연을 한 번 보고는 다시 TV 화면에 집중했다.“오늘 예수진이 은하 패션 광고 찍으러 온다면서요?”“맞아요.” 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진 씨 찾아요? 지금 제 옆에 있는데.”“지금 옆에 있다고요?” 계지원이 되물었다.“네. 오늘 저녁에 저랑 술을 좀 마셨는데, 저희 집에서 잔다고 해서요.”“아, 네.” 계지원이 짧게 대답했다.아마도 한숨을 쉰 것 같았다.“무슨 일 있어요? 전화 바꿔드릴
“계 감독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요?” 소이연이 물었다.“아니요.” 예수진이 대충 대답했다.하지만 누가 봐도 그리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예수진은 왜 계지원의 전화를 받지 않은 걸까.원래대로라면 감독의 전화는 보통 다 받아야 하지 않나?설마 예수진이 인기가 많아서?결국 이 작품은 A급 정도이고 S급까지는 아니라고 듣기는 했다. 게다가 지금 예수진의 연예계 몸값이나 지위는 S급의 작품을 마음대로 받을 수 있는 정도이다.그래서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거구나.하지만 예수진은 애초에 마음대로 할 사람은 아닌데.“졸려요.” 예수진은 하품을 하더니 말했다. “저 먼저 잘게요.”“네.”다른 사람의 사생활이니 소이연도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어쨌든 그녀는 예수진과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어떻게 “같은 침대, 같은 베개”를 공유하는 사이가 된 건지는 모르겠다.......이튿날 아침.소이연은 일어나 아침 준비를 했다. 간단하지만 예수진의 몫도 같이 준비했다.예수진은 잠이 덜 깬 채로 눈을 게슴츠레 뜨며 거실로 나왔다. 식탁 위의 아침밥을 보고 하품을 하며 말했다. “전 안 먹어요. 다이어트 해야 돼요.”소이연에게 미안한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소이연도 궁금해졌다. 예수진은 모든 사람에게 다 이렇게 대하는 걸까?“......어제 밤에는 신나서 잘 먹은 거 아니었어요?”“그러니까 다이어트 해야죠.” 예수진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아침밥 거르면 위에 안 좋아요.”“저도 알아요. 제 매니저가 삶은 계란이랑 무지방 우유 가져올 거에요. 이따가 차에서 먹으면 돼요.”“이제 가려고요?”“어제 대단하신 계 감독님께서 오늘 절대 늦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제가 어떻게 감히 감독님 말을 안 듣겠어요.”어제 감독님 전화는 안 받았으면서…“어젯밤에는 감사했어요.” 예수진이 소이연에게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이연 씨 결혼하실 때 제가 큰 거 하나 해드릴게요.”“......” 누구랑 결혼을 하라는 말인지.......예수진은 은하 그룹과의 계약
문서아는 사실 누가 촬영을 하든 상관없었다. 저번 육씨 연회에서 계지원은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았고, 그때의 일로 속으로는 감정이 남아있었다.조금 뒤.계지원이 촬영장에 나타났다.간단히 설명한 뒤, 촬영을 시작했다.“Action!”계지원은 카메라 앞에 앉아 눈썹을 찡그렸다.“컷!”촬영이 갑자기 중단되자, 문서아는 낯빛이 어두워졌다.“왜요, 감독님?” 부감독이 급히 물었다.“눈빛이 부족해. 동선도 안 맞고, 카메라도 느낌이 안 살고, 스타일링도 별로야.” 계지원이 말했다. “이렇게 해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절대 안 나와.”문서아는 계지원의 말을 듣고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그녀는 집안 때문에 살면서 한번도 누군가가 그녀에게 이렇게 대한적이 없었다.“소품팀 메이크업 좀 고쳐주시고, 저는 널리고 깔린 인플루언서 같은 느낌은 싫습니다. 배우분은 대본 다시 보시고 느낌 좀 잡아주세요.” 계지원은 예의를 갖춰 말했다. “저는 먼저 옆 촬영에 좀 다녀오겠습니다. 금방 올게요.”말이 끝나자, 계지원은 바로 자리를 떴다.“계지원!”문서아는 바로 달려갔다.오랜 시간 동안 촬영을 했어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혹평을 받아 본 적은 없었다.계지원은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이렇게 하실거면 직접 시범을 보여주시죠!”“저는 감독입니다. 배우가 아닙니다.” 계지원은 직설적으로 말했다. “당연히 저도 리허설을 할 순 있죠. 하지만 지금은 제가 너무 바빠요.”한마디 말만 남기고, 계지원은 몸을 돌려 걸어갔다.문서아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그동안의 감정이 쌓이고 쌓여, 그녀는 앞으로 나아가 계지원을 잡았다.계지원은 상상도 못 했다는 듯, 몸이 휘청댔고, 그대로 옆에 있던 임시 철근 구조물에 부딪혔다. 오늘 촬영에만 쓰일 예정이었던 구조물은 대충 고정되어 있었고, 그 순간 수많은 쇠 파이프가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조심해!”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문서아는 너무 놀라 그대로 얼어붙었다.그대로 눈만 뜨고 쇠 파이프가 그
육현경이 퇴원했다.첫날부터 밤마다 소이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퇴원할 때 데리러 오라고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각종 화제를 찾았다. 예를 들면 지금 바쁜지, 계속 알려주었다. 의사는 회복이 잘 되었다며, 퇴원해도 된다고 했다.정말이지 퇴원할 때 그녀가 데리러 올 이유 수천 가지를 생각했다.소이연도 그의 노력을 아는지, 아침 일찍부터 병원으로 갔다.명진은 퇴원 수속과 물건 정리를 위해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육현경은 환자복을 갈아입고 편안한 하늘색 셔츠와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평소의 셔츠와 구두에 비해 근엄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캐주얼함과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유일한 공통점은 여전히 잘 생겼다는 점이다. 잘 생겨서 눈이 부실 정도였다.이때 그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산과 같이 미동도 없고 얼굴색도 좋지 않았다.소이연이 도착하기 전까지는.명진은 정말 진심으로 하늘과 땅과 사모님께 감사드렸다.사모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오늘은 또 대표님께 어떤 “수모”를 당하게 될지 몰랐다.원래 빙산 같던 대표님이 순간 녹아내려 물처럼 변했다. 심지어 온천 같았다.“정리 다 하셨어요?” 소이연이 명진에게 물었다.“거의 다 됐습니다.” 명진은 급히 대답했다. “저도 주차장에 주차했습니다. 대표님, 퇴원하시면 됩니다.”육현경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동도 없이 있었다.소이연은 눈썹을 찡그렸다.회복이 잘 됐다고 한 게 아니었나?!몸도 못 일으키는 것 같은데?소이연은 명진이 부축하기를 기다렸다.명진은 눈치채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큰 보폭으로 자리를 떴다.웃기시네, 지금 부축을 하면 목숨을 내놓은 거나 마찬가지지!소이연은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육현경을 부축할 수밖에 없었다.육현경은 몸에 체중을 실어 소이연의 몸에 기댔다.진짜 무거워!쇳덩이 같아!소이연은 이를 악물고 육현경을 부축해 그의 전용 벤츠에 앉혔다.자동차는 사우스 타운을 향했다.차 안은 정적만이 가득했다.육현경이 조수석에 앉은 명진에게 분위기를 띄우라고
말 못 할 마음, 그런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무시할 수 있었다.자동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소이연은 아직 입을 열지 않았지만, 육현경이 말했다. “민이가 집에서 당신 기다려.”턱 밑까지 차오른 말은 그대로 삼켜버렸다.“도련님, 이연 아가씨, 오셨습니까.” 문씨 아저씨가 정중하게 마중 나와 인사했다.그래서 지금 육민이랑 문씨 아저씨가 이 집에서 같이 산다고?!그럼, 저번에 왔을 때 문씨 아저씨를 같이 쫓아낸 게 아니었나?“엄마.” 육민이 작은 몸으로 방에서 뛰어나와 소이연의 품에 안겼다.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빠가 병원에 엄마 보러 못 가게 했어요!”이르는 것이 분명했다.소이연은 몸을 낮춰 말했다. “아빠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육민이가 가면 아빠는 육민이도 돌봐줘야 하니까, 치료를 할 수가 없어서 그래.”“거짓말.” 육민이는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아빠는 내가 엄마를 독차지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거예요. 아빠는 나눌 줄 몰라요.”소이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나누다.” 이 단어는 여기에서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문씨 아저씨도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번에는 도련님 편에 섰다.그래도 와이프이니, 나눠줄 수는 없지.“민아.” 육현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육민은 그래도 육현경을 아직 무서워했다. 육현경의 한마디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신발장에서 핑크색 슬리퍼를 꺼내 반듯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엄마 이거 신어봐요! 이거 나랑 아빠랑 엄청 오랫동안 고민해서 고른 거예요.”소이연은 마음 한편이 풀렸다.그녀는 사실 자주 오지 않지만, 그들은 그녀를 위해 신발까지 세심하게 준비했다.그녀는 저번에 육현경이 그녀의 집에 찾아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결국 스스로 준비했다.소이연은 슬리퍼를 신었다. 푹신푹신하고 부드럽고 사이즈도 딱 맞았다. “너무 예쁘다.”“엄마가 좋아하실 줄 알았다니까요. 엄마 빨리 들어오세요. 우리 집 소개해 줄게요. 우리 집 진짜 크고 진짜 예뻐요.” 육민이 열정적으로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