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못 할 마음, 그런 느낌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무시할 수 있었다.자동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소이연은 아직 입을 열지 않았지만, 육현경이 말했다. “민이가 집에서 당신 기다려.”턱 밑까지 차오른 말은 그대로 삼켜버렸다.“도련님, 이연 아가씨, 오셨습니까.” 문씨 아저씨가 정중하게 마중 나와 인사했다.그래서 지금 육민이랑 문씨 아저씨가 이 집에서 같이 산다고?!그럼, 저번에 왔을 때 문씨 아저씨를 같이 쫓아낸 게 아니었나?“엄마.” 육민이 작은 몸으로 방에서 뛰어나와 소이연의 품에 안겼다.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빠가 병원에 엄마 보러 못 가게 했어요!”이르는 것이 분명했다.소이연은 몸을 낮춰 말했다. “아빠는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육민이가 가면 아빠는 육민이도 돌봐줘야 하니까, 치료를 할 수가 없어서 그래.”“거짓말.” 육민이는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아빠는 내가 엄마를 독차지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거예요. 아빠는 나눌 줄 몰라요.”소이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나누다.” 이 단어는 여기에서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문씨 아저씨도 참지 못하고 웃었다.이번에는 도련님 편에 섰다.그래도 와이프이니, 나눠줄 수는 없지.“민아.” 육현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육민은 그래도 육현경을 아직 무서워했다. 육현경의 한마디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신발장에서 핑크색 슬리퍼를 꺼내 반듯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엄마 이거 신어봐요! 이거 나랑 아빠랑 엄청 오랫동안 고민해서 고른 거예요.”소이연은 마음 한편이 풀렸다.그녀는 사실 자주 오지 않지만, 그들은 그녀를 위해 신발까지 세심하게 준비했다.그녀는 저번에 육현경이 그녀의 집에 찾아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는 결국 스스로 준비했다.소이연은 슬리퍼를 신었다. 푹신푹신하고 부드럽고 사이즈도 딱 맞았다. “너무 예쁘다.”“엄마가 좋아하실 줄 알았다니까요. 엄마 빨리 들어오세요. 우리 집 소개해 줄게요. 우리 집 진짜 크고 진짜 예뻐요.” 육민이 열정적으로
소이연은 육현경을 흘끗 쳐다보았다.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육민 앞에서 하고 싶지 않았다.육민도 육현경의 시야 안에 있으니, 더 물어볼 수도 없었다.소이연은 육현경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육민을 달래 낮잠을 재운 뒤에야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육현경이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었다.명진이 운전을 했다.육현경과 소이연은 뒷좌석에 앉아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육현경.” 소이연이 입을 열었다.“응.” 육현경이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확실히 난 과거에 오점이 많아.” 소이연이 말했다. “하지만 난 그렇게 막 나가는 사람은 아니야.”“......” 육현경은 조금 얼떨떨했다.“나도 네가 잘난 거 알아, 그것도 아주 많이. 게다가 널 좋아해 주는 사람도 많지. 나도 부정 안 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에 대해 동경해. 만약 정말 너나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더라도, 그냥 내 가치관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어. 우리 사이에, 만약 친구가 될 수 있다면, 난 정말 영광이야. 다른 관계는 난 못 해.”차가 소이연의 동네에 멈춰 섰다.소이연은 차 문을 열고 아무렇지 않은 듯 성큼성큼 걸어갔다.남겨진 육현경은 아주 당황한 듯한 얼굴이었다.그는 명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 명진은 온몸에 힘이 들어갈 만큼 긴장했다.그도 나이가 있으니, 젊은 사람들의 사랑 얘기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하지만 이연 아가씨의 말을 듣자 하니, 명진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도련님께서 바람둥이 기질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닐까요?”“내가 그래 보여?” 육현경이 눈썹을 찌푸렸다.“겉으로만 보기에는 그렇죠...... 저는 도련님께서 인물이 훤칠하시기도 하니 여자들이 느끼기에 안정감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지 않나 해서…”“......”그래서.그녀에게 뽀뽀를 했다? 아니다.그녀에게 몸을 보여주었다? 역시 아니다.지금 너무 잘 생겼다? 그것도 아니다.......지난번의 “불쾌함” 이후로,소이연
“회장님, 1차 판매 보고 차트 나왔습니다.” 장문기가 정중하게 말했다.“주세요.” 소이연은 침착해 보였다.장문기가 서류를 건네며 흥분한 채 보고했다. “판매량이 예상보다 훨씬 많습니다. 오늘 아침 10시 정각에 판매 개시했고, 온라인에서는 인기 제품 여러개가 불과 몇 초 만에 품절이었습니다. 나머지 제품들의 판매량도 기존 기록의 300%를 갱신했습니다. 오프라인 매장 판매 현황은 아직 통계 중이고, 전국 각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매장마다 문전성시로 너무 바쁘고 옷이 없어서 못 판답니다.”소이연의 입꼬리는 참지 못하고 올라갔다.“방금 판매팀 총감독 정운 씨가 장안시에서 가장 큰 쇼핑몰에 직접 현장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여기 전달받은 사진입니다.” 말을 하면서 장문기는 iPad를 꺼내 갤러리를 열었다. “이건 저희 은하의 매장이고, 나머지는 저희 매장과 같은 층에 있는 동일 가격대 브랜드 매장입니다. 저희 매장 외에는 거의 사람이 없습니다. 정 감독님께서 다른 층에도 가보셨지만, 모든 매장이 썰렁했다고 합니다.”이번 은하 패션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은하뿐만 아니라, 다른 동종 업계에서도 이렇게 좋은 결과를 낼 줄 상상도 못했다.문서인은 소식을 듣고, 손에 들려있던 서류를 사무실 책상 위에 내팽개쳤다.그는 애초에 소이연이 정말 은하 패션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 당연히 오늘 런칭한 가을 신제품도 은하 패션의 3분의 1정도 밖에 안됐다. 장안시의 거의 독점 현지 패션 회사가 어떻게 이런 취급을 당할 수 있겠는가.문서인은 또 씩씩대며 노트북을 켜, 마음속의 분노를 참으며, 은하 패션의 신제품을 보았다.처음에는 예수진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고, 애초에 은하의 디자인은 보지도 않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은하에서 인기 제품이 나온 걸 본 적이 없었으니, 소이연이 간다고 뭔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은하의 디자인을 처음 본 이때, 얼굴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은하의 이번 가을 신제품의 수준은 인정할
“그게 무슨 뜻이야?”문서인이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하지만 소나은은 여전히 불쾌했다.방금 자신에게 쏟아부었던 풍자와 욕설을 생각하니 불쾌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전엔 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참고 견뎠지만 지금 손톱만큼의 관심도 남아 있지 않는 이상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점점 짜증이 밀려왔다.“나은, 내가 방금 너무 흥분했어. 마음에 두지 마.”문서인 자신도 방금 말투가 과격했다는 걸 느꼈다.소나은의 말투를 보니 아직 뭔가 남았을 것 같아 바로 태도를 바꾸었다.“네가 언니한테 당하면서도 계속 돈을 벌어줄까 봐 걱정돼서 말한 거야.”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넘어갈 소나은이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문서인에게 아직 이용 가치가 남아 있기에 더 따지지 않았다.“지금 은하패션이 흥행세를 보이는 건 다 긍정적인 뉴스와 언론, 네티즌들이 극찬을 아끼지 않은 덕이지. 이 시기에 은하패션에서 스캔들이라도 난다면 지금처럼 흥행할 수 있을까? 난 두 가지 막장 드라마가 나올 거라 확신해.”문서인은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하지만 은하그룹에 무슨 스캔들이 있겠어? 그룹 내부에 인사변동이 있다고 해도 피해를 줄만한 것이 없잖아.”“은하그룹엔 없지만 우리 언니한테 있어.”“무슨 스캔들?”문서인이 살짝 경계를 하더니 불쑥 말을 내던졌다.“난 내 명의까지 내세워서 소설 쓰고 싶은 생각이 없어. 이건 밑지는 장사야!”보다시피 문서인은 자신의 체면을 엄청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다.소나은이 자신과 소이연을 엮어서 스캔들 낼까 봐 은근 걱정되는 모양이다.어찌했든 그런 피해는 입고 싶지 않았다.“서인 오빠 걱정 마. 오빠 명성에 먹칠하지 않을 거야. 내가 전에 보내줬던 사진 기억해?”소나은의 말에 문서인이 기억을 되새겨 보았다.“네 말은…”“바로 그 사진이야. 그것만 있으면 언니의 명성이 한순간에 바닥칠 수 있어. 필경 전부터 평판이 안 좋았으니 사람들이 쉽게 믿을 거야.”문서인은 그래도 망설여졌다. 이렇게 사진을 내놓는다면 너무 비도덕적인 것
그 뒤로 두 사람은 사탕발린 소리를 하다가 통화를 끊었다.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소나은의 표정이 음흉하게 변했다.방금 문서인에게 말한 것처럼 단순히 언니의 스캔들을 폭로하는 것으로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을 통해 언니에 대한 육현경의 마음을 철저히 접게 만들고 자신의 남자로 만들 계획이었다.…은하패션이 일주일 동안 불티나게 팔리더니 곳곳에 품절 대란이 일어났다.소이연은 단호하게 대규모 생산을 실시했다.그렇다고 헝커마케팅은 하지 않았다.이번에 예산이 부족했던 것은 이렇게 잘 팔릴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패션에 대한 이념은 소이연의 어머니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옷을 입게 만드는 것이었다. 대생산을 투입한 뒤 두 번째 물량을 판매할 시기에 갑자기 뉴스에서 스캔들이 터졌다.“은하그룹 회장 소이연 ‘수치스러운’ 성공의 길” 뉴스에 실린 내용을 대략적으로 이랬다.‘소이연과 문서인이 교제할 당시, 소이연은 문서인 몰래 여러 남자들과 바람이 났다. 그 관계를 통해 성공적으로 은하그룹을 손에 넣었고 또 그 남자들의 도움으로 은하그룹 패션도 흥행하여 돈방석에 앉는 데 성공하였다.’뉴스가 뜨자마자 온 누리꾼들이 욕설을 퍼부었다.[소이연 너무 역겹다. 무슨 바람을 이렇게 많이 피웠대? 문서인이 무슨 호구냐!][화려한 과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서인이 기꺼이 약혼을 해주겠다는데 감사하지도 않나 봐.][은하패션에서 생산한 옷들이 요 근래 유행하는 디자인을 앞섰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멋진 옷이라고 해도 더러운 마음과 비교할 수 없네.”[은하패션을 강력히 거부한다. 언니들, 한 벌도 사지 말자!][나 이미 반품 신청했음.] [겨우 한 벌 건졌는데 다시 사 입나 봐라!]동시에 문서인은 자신의 SNS에 이런 글을 올렸다.‘저와 소이연은 오래전에 서로 합의하에 헤어졌습니다. 공공 자원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소이연에 대해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저에게 사적으로 메시지를 보내주
영업부 총감독 유봉이 씩씩거리며 사무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그제야 소이연은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고 유봉을 바라보았다.“회장님 이제 어떡합니까? 지금 쇼핑몰에서 고객들이 반품해달라고 난리랍니다. 전국 모든 오프라인 매장에서도 항의하는 사람들로 꽉 차고 여러 백화점에서도 우리에게 불만을 토로하면서 반드시 해결방안을 내놓으라고 독촉합니다.”“회장님!”구매부 매니저 김상문도 뒤를 따라 들어왔다.“방금 공급업체에서 대금을 보충해 달라고 연락 왔습니다. 아니면 법정에서 보게 될 거랍니다.”“회장님! 고객센터에서 더는 감당하지 못하겠답니다. 민원 전화가 폭주하고 고객들이 전혀 설명을…”소이연은 눈앞에서 펄쩍 뛰는 고위급 간부들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10분 뒤에 회의를 합시다.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면적인 배치를 해야 되니 모든 고위급 간부들이 참석하라고 하세요. 지금은 먼저 나가주세요.”“네.”모두 침울한 표정으로 사무실에서 나갔다.지금 상황에서 생산한 제품이 팔리지 않는다면 은하그룹 자금이 원활하게 돌아가지 못한다. 게다가 시간을 끌면 끌수록 파산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소이연은 다시 뉴스를 들여다보았다.뉴스에 홍보 모델 예수진도 언급되었다. 누리꾼들이 그녀의 SNS에 들어가 그저 돈만 주면 무슨 제품이라도 대변한다고 악성 댓글을 달았다.한순간에 예수진마저 누리꾼들 입에 오르며 그녀가 출연한 드라마와 프로그램도 영향을 받았다.소이연이 예수진에게 연락했다.“언니.”“죄송해요. 수진 씨한테도 영향이 미칠 줄은 몰랐어요. SNS에 우리 계약을 끝냈다고 설명하세요. 저희 측에서 전력을 다해 협조할게요.”소이연이 진심으로 사과했다.“이연 언니, 나를 뭘로 보고, 내가 그렇게 의리 없는 사람 같아요?”예수진은 왠지 화가 치밀었다.“누가 모함했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내가 알아서 처리할 수 있어요. 그래도 나 예수진을 따르는 팬들이 많거든요. 헛소문에 휘둘리는 인간들 필요하지 않아요. 언니 스캔들이나 잘 처리해요.
그저 서로에게 스쳐가는 인연일 뿐이다.“뉴스는 내가 어떻게 해볼게. 일단 계좌 불러줘. 부족한 금액을 보내줄 테니까.”육현경의 덤덤한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았다.“해외에 비교적 전문적인 위기관리팀을 알고 있어. 내일 아침에 장안에 도착하니까 시간을 내주면 그 사람들 데리고 당신 만나러 갈게.”소이연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솔직히 누가 도와줄 거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전부터 수없이도 겪어왔기 때문이다.18살에 누구한테 비웃음을 당할 때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친아버지는 수치라고 여기면서 자신의 명성에 먹칠할까 봐 어딘가 보내려고 했다. 지금 상황도 똑같다. 모든 사람이 자신과 관계를 끊으려고 할 때 오직 육현경과 예수진만 나서주었다.순간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키며 대체 그와 어떤 관계인지 정리할 수 없었다.“됐어. 내가 처리할 수 있어.”“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그 말이 유독 차갑게 들렸다.소이연은 살짝 흔들리는 가슴을 억누르려고 입술을 깨물었다.“믿지 못하겠어.”어차피 육현경과 아무런 결과도 없을 테니 서로에게 여지를 줄 필요가 없다 생각했다.육현경이 손가락을 파르르 떨었다.이명진이 옆에서 대표님의 분노를 감지했다. 당장이라도 화산처럼 폭발해 그 불똥이 곧 자신한테 튀길 것 같았다.“나 자신 말고 누구도 믿지 않아.”소이연이 단호한 말투로 보충했다. “당신 호의만 감사히 받고 내 일은 내가 처리할게. 굳이 나 때문에 불필요한 일에 엮이는 거 원하지 않거든.”육현경의 안색이 심각하게 굳었다.“회의 있어서 이만 끊을게.”소이연이 종료 버튼을 눌렀다.이명진이 똑똑히 봤다. ‘통화 종료’를 응시하던 대표님의 안색이 검정색 액정보다 더 어두워졌다.갑자기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결국 사모님이 대표님의 호의를 저버렸다.사모님의 스캔들이 나오자마자 사장님은 바로 스피드하게 처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각 언론사에 전화를 돌려 신세를 지자면서 당장 사모님의 뉴스를 내리라고 부탁했다.그리고 자신의
이명진의 말에 위로 받은 듯 금색 펜을 꽉 움켜쥐던 손이 그제야 느슨히 풀렸다.이명진도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영리해서 다행이지 아니면 파란만장한 날들이 그를 기다릴 것이다.“대표님, 제가 수시로 사모님에 대해 알아볼게요. 절대 나쁜 놈들이 해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그래.”육현경이 짧게 대답을 하더니 그제야 모니터를 보며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은하그룹 고위급 간부들이 회의실에 모였다.분위기는 생각보다 엄숙했다.오랫동안 경영해 왔던 은하그룹은 대기업에 속하지 않았지만 줄곧 평탄한 길을 걸어 이처럼 큰 위기에 닥쳐본 경험이 없었다.모든 간부들은 마음이 심란할 뿐 속수무책이었다.“언니, 어떻게 해결할지 방안을 구해봤어요? 이대로 간다면 은하가…”소나은이 일부러 말끝을 흐리며 걱정하는 척했다.소이연이 그런 소나은을 쳐다봤다.스캔들을 터뜨린 장본인이 누군지 짐작이 갔다.‘문서인은 기껏해야 공범이겠지.’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소나은의 수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소이연이 모든 간부들을 둘러보며 말했다.“모든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반품 접수하고 처리해주세요. 이미 입었거나 하자 있는 제품이라도 무조건 받으세요.”“그러면 안 됩니다.”유문은 조금 긴장되었다.“회장님, 지금까지 저희 가을 시즌 상품은 전국에서 판매량이 적어도 5만 건이나 됩니다. 그걸 다 받아준다면 우리 은하가 자금을 감당할 수 없게 됩니다!”“먼저 제 말을 들어주세요.”소이연은 줄곧 평정심을 유지했다.은하에서 일정한 규모가 확대된 이래 대다수 고층 간부들은 진심으로 소이연을 위해 일을 했다.지금 은하그룹에 사건이 터진 건 소이연의 책임이니 그들의 의견이 분부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소이연의 평정심에 그들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겨우 스무 다섯밖에 안되는 여자가 이렇게 큰 일을 당하고도 냉정하게 대처를 하다니 그 넓은 아량은 이미 여기 모인 사람들을 능가했다.그러니 마음속으로 흔쾌히 소이연의 안배를 따르기로 마음먹었다.“반품을 접수하는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