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눈을 올려 그를 쳐다봤다.그는 아직도 숨이 조금 차는 듯해 보였다.볼이 자연스레 빨개진 것도 느껴졌다.소이연은 입술을 오므렸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씻으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척했다.육현경도 걸어 나갔다.소이연은 손을 씻으며 넋이 나갔다.뇌리에는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소이연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물기를 닦은 뒤 화장실을 떠났다.육현경은 침실에 없었다. 언뜻 드레스룸 안에 그림자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소이연은 드레스룸을 향해 걸어갔다.그녀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동작으로 드레스룸에 들어섰다.육현경은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지금 그는 아까 그것과 비슷한 검은색 트렁크만 입고 있었다.육현경은 앞에 놓인 전신 거울을 통해 소이연을 보았다.눈빛엔 놀라움이 스쳐 지났고 이어 입을 열었다."옷 갈아입고 바로 나갈게.""옷 입을 수 있겠어?"소이연이 물었다."응.""상처에 닿지 않아?""조심할게... 음..."육현경의 목젖이 저도 모르게 굴러갔다.소이연의 따뜻하고 작은 손이 등 뒤에 닿은 것처럼 느껴졌다.소이연은 지금 이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는 듯했다."미안해."소이연이 갑자기 사과를 했다."민이에 관한 일엔 내가 좀 민감해서, 그날엔 당신 시끄럽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육현경은 목이 타왔다.목소리마저 잠긴 듯했다."그래서 몸으로 갚는 방식으로 내 마음을 위로해 주려고?"육현경이 웃으며 물었다.농담이 느껴지는 어투였다.희망을 품은 적은 없었다.육현경은 잘 알고 있다. 심아윤과 철저히 선을 긋기 전까진, 소이연이 죽어도 본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그래서 가끔은 인내가 극에 달해도, 마지막엔 그저 혼자 소화를 했었다."그럴 수 있다면."소이연의 얼굴이 그의 등에 맞닿았다.목소리는 아주 낮았다.아주 많이 낮았지만, 육현경은 들었다.선명하게 들려왔다.그의 몸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심지어 소이연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장난을 치는 게 아닌지 의심되었다.하지만
이렇게까지.소이연이 이렇게까지 말을 했지만 육현경은 움직이기 두려웠다.그때 그녀의 몸에 손을 댄 이후로, 소이연은 남자에 대해 무척 배척을 하고 있고,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 오래도록 미워하게 만들었는데.지금 다시 그녀를 만지면 소이연을 평생 못 만날까 봐 두려웠다.소이연은 그를 그녀의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육현경은 차라리, 참으려 했다."싫어?"육현경의 대답을 듣지 못한 소이연이 물었다."두려워."육현경은 진심이 담긴 대답을 내뱉었다.소이연은 멈칫했다.마음속엔, 알 수 없는 느낌이 생겨났다.웃기기도 하면서 조금 짠했다.그녀의 손이 갑자기 불안해졌다.이미 경직의 최고봉에 달한 그의 몸 위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소이연이 말했다."이번엔, 미워하지 않을 거야.""소이연, 당신 대체... 왜 그래?"육현경은 그녀의 불안한 손을 단번에 잡았다.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 보았다.붉어진 얼굴을 보아, 그녀도 생각만큼 태연하진 않은 듯했다.그리고 그녀의 손이 떨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한테 사과하거나, 구해줬다고 보답하는 거, 필요 없어.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너의 보답은 필요 없어. 내가 널 위해 하는 모든 일에, 미안함 느낄 필요 없다고. 모든 건 다 내가 원해서야, 알겠어?"육현경이 진지하게 말했다.소이연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소이연이 원하지 않는다면 평생 이렇게 지내도 괜찮았다."나 원해."소이연은 육현경과 시선을 맞췄다.마주 보는 눈빛은 아주 진지했다.마치, 둘 사이에 있던, 그 말 못 할 장벽이 사라진 듯했다.지금의 그녀는 진짜 마음을 열고 진심을 다하고 있다."소이연... 읍."육현경이 눈을 크게 떴다.소이연은 갑자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발끝을 겨우 들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육현경이 하고 싶은 말들은, 전부 막혔다.그는 믿을 수 없었고 움직이기 무서웠다.그렇게 소이연이 한참을 키스하도록 내버려 두었다.육현경은 자신을 억눌렀다.소이연은 한참을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이 옆 사람을 깨운 게 분명했다.정확히 말하면, 놀라서 깨어난 게 아니다.그는 계속 깨어 있었고 소이연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배고파?"육현경이 물었다.분위기 있는 목소리엔 가벼움도 조금 묻어 있었다.그는 지금 생기가 넘쳐나며 기분이 상쾌해 보였다.하지만 소이연은 온몸이 나른하고 노곤해 죽을 듯했다."몇 시야?"소이연이 물었다."저녁 10시.""이렇게 늦었어?"소이연은 놀랐다."그렇지?"육현경은 웃으며 답했다. 목소리는 희열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민이는?""민이가 이젠 자기도 다 컸다고, 혼자 잘 수 있대. 그래서 지금 착하게 자러 갔어."육현경이 답했다. 그리고 곧장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민이가, 자긴 오빠 역할이 어울린대."소이연은 육현경을 바라봤다.그녀는 허둥대며 몸을 일으켰다.육현경은 그런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몸 위를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떨어졌고, 하얀 피부 위의 파랗고 자줏빛이 도는 흔적들이 괜히 흉해 보였다.소이연은 고개를 홱 돌려 육현경을 쳐다봤다.육현경은 어색하게 말했다."일어날 거야?""응.""옷 가지러 갈게.""고마워."육현경은 이불을 열어젖혔다.분명 일찍 일어났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이렇게 이불을 열어 젖히다간...소이연은 얼굴을 홱 돌렸다.육현경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못 본 데가 어딨다고 그래?"소이연은 반응하지 않았다."우린 대낮에...""그만 좀 말 할래?"소이연이 참다못해 다그쳤다.육현경은 웃으며 방을 떠났다.소이연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는 뒷모습에서 까지도 그때의 행복함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은 가라앉았다, 깊게.둘은 옷을 입고 방을 나섰다.도우미가 저녁식사를 준비했다.둘은 조용하게 먹고 있었다.소이연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나, 장안에 돌아가고 싶어졌어."나이프를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멈칫했다.그녀가 몸을 허락한 게, 그저, 떠나고 싶어서였나."그렇게
"우린 성인이야, 나도 육체적인 수요가 있고. 이젠 과거의 트라우마도 끝내고 싶었어, 철저하게."육현경을 쳐다보는 소이연은 유난히 차가웠다.육현경은 냉소를 지었고, 계속 그렇게 웃고만 있다."우린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잘못이었어. 육현경, 내가 전에도 말했지, 서로한테 제일 좋은 방법은, 당신이 심아윤한테 돌아가고,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라고."소이연은 단호하게 그를 쳐다봤다.감정은 없고 그저 결별뿐."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한치의 흔들림도 없어?"육현경이 물었다.지금까지 왔는데, 한 번이라도 바뀌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걸까?"없어."소이연이 확답했다."날 그저 무섭고 불안하게 했어. 언제 또 심아윤을 건드려서, 언제 또 죽음을 당할지! 모함당하고, 암살당하고, 지금은 또 민이로 협박까지... 육현경, 나 이젠 지겨워.""곧 끝날 거야."육현경이 확신에 찬 어투로 답했다."끝은 없어."소이연이 냉랭하게 말했다."끝이 있더라도... 그저 폭풍전야의 고요함일 뿐이야.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끝나기 전에 발생할, 예상치 못할 참담한 일들. 나도 사람이야, 목숨의 손해까지 견딜 순 없어.""소이연...""내가 진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 거라면, 이렇게 자꾸 떠나려 하지 않을 거야. 내가 결정한 일은 다 심사숙고한 뒤 깨달은 것들이야. 그리고, 또 하나 고백할게 있어."소이연은 멈칫했다.육현경은 그녀를 바라봤다.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보았다."그때, 어르신께서 육씨 그룹 기념일 날, 육씨 저택으로 날 데리고 가 많은 얘기들을 하셨어. 육민이가 내 아이란 걸, 그때 나와 하룻밤을 보낸 게 당신이라는 걸 알게 해주셨고, 당신 곁에서 떠나라고 강요하셨어.""할아버지가...""마저 들어봐."소이연이 말을 끊었다.육현경은 입술을 앙다물었다."맞아, 난 그저 당할 사람은 아니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어. 하지만 어르신께서 조건을 제시하셨고, 난 받아들였어.""무슨 조건인데?""어르신
그도 입맛이 없는 듯했다.소이연은 눈앞에 놓인 음식을 꾸역꾸역 다 먹고야 말았다.엄마로서, 본인의 신체를 막 다룰 자격이 없었다.그녀는, 육민을 잘 챙겨줘야 한다.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소이연은 침실로 돌아갔다.육민이는 이미 잠들었다.천진난만하고 깊게 잠든 그의 모습을 보며 소이연은 생각했다. 자신이 한 결정이 무엇이든 후회하지 않는다고.다음날 이른 아침.소이연은 육민과 잠깐의 이별을 했다.육현경이 심아윤과 결혼을 하기 전까진, 육민은 여전히 육현경의 소유다.그녀는 당장 육민을 데려갈 만큼 잔인하지 않았다.더군다나, 지금은 육민이 육현경 곁에 있는 게 더 안전했다."밖에 차가 왔어."육현경이 귀띔했다."응."소이연은 육민의 작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며칠 뒤면 개학이니까, 장안으로 돌아가면 엄마 다시 만날 수 있어.""응응."육민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어제 일로 엄마와 아빠가 영원히 함께 있을 줄로 알았다.하지만 육민은 어릴 때부터 철이 빨리 들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얌전히 말을 들었다.마음 아플 만큼 얌전했다."이거."육현경이 약 한 알을 소이연에게 건넸다.소이연은 한번 보았다.사후 피임약이었다.사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3일 안에 먹기만 하면 약효가 있는 터라, 오늘 떠난 뒤 혼자 약국에 가서 사려 했다.하지만 그가 주동적으로 건네니, 그녀도 거절하지 않았다."차에서 기다릴게."육현경은 몸을 돌려 떠났다.어제의 애정 어림부터 오늘의 차가움까지.이게 바로 어른들 사이의 현실이다.소이연은 약을 먹고 육민과 다시 작별 인사를 한 뒤 떠났다.육민은 엄마가 아빠의 차에 타는 걸 빤히 쳐다보았다.육민이의 작은 몸을 보고 있자니 소이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에 가득 찼다.앞으론, 앞으로는 꼭 육민을 자신의 곁에서 데리고 지낼 것이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마음을 평온히 다잡았다.곁에 앉은 육현경은 시종일관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이 저택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소이연은 육현경의
소이연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그녀는 사실 육현경의 만나러 가지 않고 그저 멀리서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어졌다.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심장이 떨어져 나가듯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헬리콥터는 30분 맴돌다가 교외의 공터에 착륙했다. 심문헌의 검은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자동차 한 대뿐이 아니었다. 사고 이후 심문헌은 주변을 더욱 철저히 지키게 했다. 소이연은 헬리콥터에서 내렸다. 지팡이를 짚고 있어 불편한 그녀 앞에 하얗고 큰 손이 나타났다. 소이연은 고개를 들어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심문헌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보아하니 그때의 교통사고로 그는 크게 다친 것 같았다. 소이연도 사양하지 않고 심문헌의 팔 잡고 헬기에서 내린 뒤 그를 따라 검은색 승용차에 탔다. 그들이 승용차에 타자 차가 출발했다. 헬기도 떠나갔다. 소이연은 왜 육현경이 그의 별장이 안전하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별장은 첫째, 찾기도 어려웠고 하늘에서는 추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둘째, 설령 찾았다고 해도 산에서 침입한 사람이 유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소이연은 멍하니 헬리콥터가 떠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운해요?" 심문헌이 물었다. "아니에요." 소이연은 눈빛을 감추며 부인했다. 심문헌은 그녀의 평온한 뺨을 바라보았다. 소이연이 잘 감추었다 해도, 사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육현경 씨 곁에 왜 있지 않은 거예요? 그는 정말 이연 씨를 잘 지켜주는데." 심문헌이 솔직하게 말했다.. "실망하게 했어요." 소이연은 심문헌을 바라보며 말했다. "육현경과 심아윤은 함께 하기로 했어요.” 심문헌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이연 씨가 옳다고 생각하면 돼요. 우린 협력 관계일 뿐이에요. 당신이 선택한 거예요. 하물며 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저도 사실 큰 기대를
그들에게 다가가기만 했을 뿐인데 압박감을 느꼈다. 소이연이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던 한 사람이 안에 있는 사람에게 무전기로 보고하자, 안에서 그녀에게 자 방문을 열어주었다. VIP룸 일반 룸과는 달랐다. 고급스러운 장식이 눈길을 끌었지만, 소이연은 지금 이곳의 화려함을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힘들게 커피 테이블로 걸어갔다. 이 순간 테이블 앞에 앉아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은 심아윤이었다. 심아윤의 뒤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문 앞에도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녀가 경계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심아윤은 그녀가 혼자 나타나자 깜짝 놀랐지만, 재빨리 표정을 숨겼다. "앉아요." 심아윤이 말했다. 소이연도 거절하지 않았다. "소이연 씨는 뭘 마시겠어요?” “블루마운틴.” 커피 주문한 뒤 두 사람은 여전히 마주 보고 있었다. 심아윤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소이연 씨가 혼자 나올 줄 몰랐어요. 좀 놀랐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소이연이 한 번 만나자고 했을 때, 정말 놀랐다. 이렇게 똑똑한 소이연이 자신이 몰래 무엇을 했는지 모를 리 없다. 계속해서 그녀를 죽이려고 했는데, 감히 이렇게 대담하게 그녀를 만나러 오다니?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면서도 거절할 수 없었고, 소이연이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보고 싶어 초대에 응했다. 어쩔 수 없이 왔지만 이번 싸움은 소이연에게 좀 버겁긴 했다. 그녀가 한순간 그녀가 별것 아닌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심아윤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심씨 가문에서 본 적이 없는 큰 장면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소이연 씨, 오늘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한 거죠?" 심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심아윤 씨에게 나와 육현경의 관계를 설명하러 왔어요.” 심아윤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지금 그녀를 협박하러 온 것인가? 육현경이 소이연을 사랑하고 자신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소이연의 휴대전화를 집어든 심아윤은 휴대전화에 찍힌 사진을 보고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아무리 자신의 감정을 숨길 줄 아는 그녀라 하더라도 이번에는 표정을 숨기기가 힘들었다. "이게 무슨 의미죠?” 심아윤이 소이연에게 물었다. 방금 육현경과 헤어졌다고 말하면서 육현경과 잠자리에 든 사진을 보여준다?! 장난하는 거야? 자랑하는 거야? 그녀와 육현경은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며 약혼을 발표했어도, 그들은 여전히 손도 못 잡아 봤고 아무런 스킨십도 없었다. 그녀는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소이연 씨, 내가 당신을 건드리지 못할 거로 생각하지 말아요!" 심아윤이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사진을 보여준 건 나와 육현경 사이의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증명하려는 것도 아니고, 당신 앞에서 생색내는 것도 아니에요. 단지 심아윤 씨에게 말해주는 거예요. 나도 내 선이 있어요. 날 잘못 건드리면,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어요." 소이연은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심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소이연을 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당신이 내 가장 중요한 사람을 건드리면 나도 모든 것을 망칠 수 있어요. 우리 셋의 이런 떳떳하지 못한 관계를 사람들에게 알릴 수도 있어요. 나는 당신이 심씨 가문도 체면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바라요.” 심아윤의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소이연은 오늘 그녀를 협박하러 온 것이다. 며칠 전 그녀는 일부러 육민을 이용해 소이연을 협박을 했고, 소이연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되갚는 중이었다."난 어차피 외톨이에요. 내 사업이 어느 정도 성장했다 해도 심씨 가문과 육씨 가문에 비하면 하찮을 뿐이죠. 난 내가 망가지는 일을 신경 쓰지 않아요. 어쨌든 이번이 처음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심씨 가문과 육씨 가문은...... 손해를 헤아리기 어려울 거예요.” "소이연 씨, 생각보다 똑똑하시네요." 심아윤은 비꼬며 말했다. "만약 당신이 그를 이렇게 모략하고, 목숨을 잃더라도 소이연 씨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