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현경은 방 안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약상자는 이미 준비되었다.그러니까 소이연이 안 들어왔으면 육현경은 혼자 약 바를 생각이었나?하지만 다친 건 그녀 때문이기도 했기에 결국 소이연은 마다하지 않았다.그녀는 소독 용액과 연고를 찾아내어 몸을 웅크려 육현경의 다리 상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확실히 감염된 것 같다."조심 좀 하지?"소이연은 묻는다."이런 곳에서 주의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육현경은 어쩔 수 없는 듯하였다.소이연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진지하게 그의 상처를 처리해 준다."쓰읍!"육현경은 상처가 아픈지 엄살 소리를 낮게 냈다."아파?"소이연이 묻는다. "안 아파. "육현경은 고집불통이라 부정했다.사실상 허벅지 안쪽을 다쳐서 무척 아팠을 것이다.소이연은 신경 써서 살살 다루었다.방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소이연은 너무 상처 처리에 몰입한 나머지 주변을 아예 의식하지 못했다.그녀는 육현경의 다리를 소독한 후 하얀색의 면포로 둘둘 싸주었다. 마침 고개를 들어 보니 육현경이 바로 눈앞에 보였는데 그 눈빛은 심상치 않았다.그녀의 마음은 조금 흔들렸다.그제야 지금, 이 자세가 다소 애매하다는 걸 알아챘다.소이연은 벌떡 일어서면서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고 일부러 침착한 척하면서 말했다. "다 됐어, 물에 절대 적시게 하지 말고 걸을 때도 부딪치지 않게끔 주의해. ""응..."육현경은 대답했다.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소이연은 몸을 돌려 약상자 정리하면서 못 본 척 못 들은 척했다.그녀는 약상자에 있는 약통들을 정리하면서 물었다. "계지원은 지금 어때?"정직한 얘기를 나누면 어느 정도 열기라도 내릴 순 있다."해외 전문 의료 기지에 도착하고 나서 잘 되면 목숨에는 위험이 없을 거야. 단 계속 혼수상태에 빠져 있고 뇌에 핏덩어리가 누르고 있어. 전문가 얘기로는 핏덩어리는 자기절로 없어지지 않는대. 뇌수술 하게 되면 뇌를 여는 거니까 덩어리를 꺼내는 그 위험성은 지금보다 클 거야. 함부로 시도해서는
소이연은 눈을 올려 그를 쳐다봤다.그는 아직도 숨이 조금 차는 듯해 보였다.볼이 자연스레 빨개진 것도 느껴졌다.소이연은 입술을 오므렸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씻으며,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척했다.육현경도 걸어 나갔다.소이연은 손을 씻으며 넋이 나갔다.뇌리에는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소이연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물기를 닦은 뒤 화장실을 떠났다.육현경은 침실에 없었다. 언뜻 드레스룸 안에 그림자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소이연은 드레스룸을 향해 걸어갔다.그녀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동작으로 드레스룸에 들어섰다.육현경은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지금 그는 아까 그것과 비슷한 검은색 트렁크만 입고 있었다.육현경은 앞에 놓인 전신 거울을 통해 소이연을 보았다.눈빛엔 놀라움이 스쳐 지났고 이어 입을 열었다."옷 갈아입고 바로 나갈게.""옷 입을 수 있겠어?"소이연이 물었다."응.""상처에 닿지 않아?""조심할게... 음..."육현경의 목젖이 저도 모르게 굴러갔다.소이연의 따뜻하고 작은 손이 등 뒤에 닿은 것처럼 느껴졌다.소이연은 지금 이 행동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모르는 듯했다."미안해."소이연이 갑자기 사과를 했다."민이에 관한 일엔 내가 좀 민감해서, 그날엔 당신 시끄럽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육현경은 목이 타왔다.목소리마저 잠긴 듯했다."그래서 몸으로 갚는 방식으로 내 마음을 위로해 주려고?"육현경이 웃으며 물었다.농담이 느껴지는 어투였다.희망을 품은 적은 없었다.육현경은 잘 알고 있다. 심아윤과 철저히 선을 긋기 전까진, 소이연이 죽어도 본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그래서 가끔은 인내가 극에 달해도, 마지막엔 그저 혼자 소화를 했었다."그럴 수 있다면."소이연의 얼굴이 그의 등에 맞닿았다.목소리는 아주 낮았다.아주 많이 낮았지만, 육현경은 들었다.선명하게 들려왔다.그의 몸은 눈에 띄게 경직되었다.심지어 소이연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장난을 치는 게 아닌지 의심되었다.하지만
이렇게까지.소이연이 이렇게까지 말을 했지만 육현경은 움직이기 두려웠다.그때 그녀의 몸에 손을 댄 이후로, 소이연은 남자에 대해 무척 배척을 하고 있고,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 오래도록 미워하게 만들었는데.지금 다시 그녀를 만지면 소이연을 평생 못 만날까 봐 두려웠다.소이연은 그를 그녀의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육현경은 차라리, 참으려 했다."싫어?"육현경의 대답을 듣지 못한 소이연이 물었다."두려워."육현경은 진심이 담긴 대답을 내뱉었다.소이연은 멈칫했다.마음속엔, 알 수 없는 느낌이 생겨났다.웃기기도 하면서 조금 짠했다.그녀의 손이 갑자기 불안해졌다.이미 경직의 최고봉에 달한 그의 몸 위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소이연이 말했다."이번엔, 미워하지 않을 거야.""소이연, 당신 대체... 왜 그래?"육현경은 그녀의 불안한 손을 단번에 잡았다.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 보았다.붉어진 얼굴을 보아, 그녀도 생각만큼 태연하진 않은 듯했다.그리고 그녀의 손이 떨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한테 사과하거나, 구해줬다고 보답하는 거, 필요 없어. 내가 무슨 일을 해도, 너의 보답은 필요 없어. 내가 널 위해 하는 모든 일에, 미안함 느낄 필요 없다고. 모든 건 다 내가 원해서야, 알겠어?"육현경이 진지하게 말했다.소이연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소이연이 원하지 않는다면 평생 이렇게 지내도 괜찮았다."나 원해."소이연은 육현경과 시선을 맞췄다.마주 보는 눈빛은 아주 진지했다.마치, 둘 사이에 있던, 그 말 못 할 장벽이 사라진 듯했다.지금의 그녀는 진짜 마음을 열고 진심을 다하고 있다."소이연... 읍."육현경이 눈을 크게 떴다.소이연은 갑자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녀는 발끝을 겨우 들어, 그의 입술에 키스했다.육현경이 하고 싶은 말들은, 전부 막혔다.그는 믿을 수 없었고 움직이기 무서웠다.그렇게 소이연이 한참을 키스하도록 내버려 두었다.육현경은 자신을 억눌렀다.소이연은 한참을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이 옆 사람을 깨운 게 분명했다.정확히 말하면, 놀라서 깨어난 게 아니다.그는 계속 깨어 있었고 소이연이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배고파?"육현경이 물었다.분위기 있는 목소리엔 가벼움도 조금 묻어 있었다.그는 지금 생기가 넘쳐나며 기분이 상쾌해 보였다.하지만 소이연은 온몸이 나른하고 노곤해 죽을 듯했다."몇 시야?"소이연이 물었다."저녁 10시.""이렇게 늦었어?"소이연은 놀랐다."그렇지?"육현경은 웃으며 답했다. 목소리는 희열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민이는?""민이가 이젠 자기도 다 컸다고, 혼자 잘 수 있대. 그래서 지금 착하게 자러 갔어."육현경이 답했다. 그리고 곧장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민이가, 자긴 오빠 역할이 어울린대."소이연은 육현경을 바라봤다.그녀는 허둥대며 몸을 일으켰다.육현경은 그런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몸 위를 덮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떨어졌고, 하얀 피부 위의 파랗고 자줏빛이 도는 흔적들이 괜히 흉해 보였다.소이연은 고개를 홱 돌려 육현경을 쳐다봤다.육현경은 어색하게 말했다."일어날 거야?""응.""옷 가지러 갈게.""고마워."육현경은 이불을 열어젖혔다.분명 일찍 일어났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이렇게 이불을 열어 젖히다간...소이연은 얼굴을 홱 돌렸다.육현경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못 본 데가 어딨다고 그래?"소이연은 반응하지 않았다."우린 대낮에...""그만 좀 말 할래?"소이연이 참다못해 다그쳤다.육현경은 웃으며 방을 떠났다.소이연은 그런 그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그는 뒷모습에서 까지도 그때의 행복함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녀의 눈빛은 가라앉았다, 깊게.둘은 옷을 입고 방을 나섰다.도우미가 저녁식사를 준비했다.둘은 조용하게 먹고 있었다.소이연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나, 장안에 돌아가고 싶어졌어."나이프를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멈칫했다.그녀가 몸을 허락한 게, 그저, 떠나고 싶어서였나."그렇게
"우린 성인이야, 나도 육체적인 수요가 있고. 이젠 과거의 트라우마도 끝내고 싶었어, 철저하게."육현경을 쳐다보는 소이연은 유난히 차가웠다.육현경은 냉소를 지었고, 계속 그렇게 웃고만 있다."우린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잘못이었어. 육현경, 내가 전에도 말했지, 서로한테 제일 좋은 방법은, 당신이 심아윤한테 돌아가고,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라고."소이연은 단호하게 그를 쳐다봤다.감정은 없고 그저 결별뿐."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한치의 흔들림도 없어?"육현경이 물었다.지금까지 왔는데, 한 번이라도 바뀌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걸까?"없어."소이연이 확답했다."날 그저 무섭고 불안하게 했어. 언제 또 심아윤을 건드려서, 언제 또 죽음을 당할지! 모함당하고, 암살당하고, 지금은 또 민이로 협박까지... 육현경, 나 이젠 지겨워.""곧 끝날 거야."육현경이 확신에 찬 어투로 답했다."끝은 없어."소이연이 냉랭하게 말했다."끝이 있더라도... 그저 폭풍전야의 고요함일 뿐이야.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끝나기 전에 발생할, 예상치 못할 참담한 일들. 나도 사람이야, 목숨의 손해까지 견딜 순 없어.""소이연...""내가 진짜 당신과 함께 있고 싶은 거라면, 이렇게 자꾸 떠나려 하지 않을 거야. 내가 결정한 일은 다 심사숙고한 뒤 깨달은 것들이야. 그리고, 또 하나 고백할게 있어."소이연은 멈칫했다.육현경은 그녀를 바라봤다.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보았다."그때, 어르신께서 육씨 그룹 기념일 날, 육씨 저택으로 날 데리고 가 많은 얘기들을 하셨어. 육민이가 내 아이란 걸, 그때 나와 하룻밤을 보낸 게 당신이라는 걸 알게 해주셨고, 당신 곁에서 떠나라고 강요하셨어.""할아버지가...""마저 들어봐."소이연이 말을 끊었다.육현경은 입술을 앙다물었다."맞아, 난 그저 당할 사람은 아니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어. 하지만 어르신께서 조건을 제시하셨고, 난 받아들였어.""무슨 조건인데?""어르신
그도 입맛이 없는 듯했다.소이연은 눈앞에 놓인 음식을 꾸역꾸역 다 먹고야 말았다.엄마로서, 본인의 신체를 막 다룰 자격이 없었다.그녀는, 육민을 잘 챙겨줘야 한다.젓가락을 내려놓은 뒤 소이연은 침실로 돌아갔다.육민이는 이미 잠들었다.천진난만하고 깊게 잠든 그의 모습을 보며 소이연은 생각했다. 자신이 한 결정이 무엇이든 후회하지 않는다고.다음날 이른 아침.소이연은 육민과 잠깐의 이별을 했다.육현경이 심아윤과 결혼을 하기 전까진, 육민은 여전히 육현경의 소유다.그녀는 당장 육민을 데려갈 만큼 잔인하지 않았다.더군다나, 지금은 육민이 육현경 곁에 있는 게 더 안전했다."밖에 차가 왔어."육현경이 귀띔했다."응."소이연은 육민의 작은 얼굴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며칠 뒤면 개학이니까, 장안으로 돌아가면 엄마 다시 만날 수 있어.""응응."육민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어제 일로 엄마와 아빠가 영원히 함께 있을 줄로 알았다.하지만 육민은 어릴 때부터 철이 빨리 들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저 얌전히 말을 들었다.마음 아플 만큼 얌전했다."이거."육현경이 약 한 알을 소이연에게 건넸다.소이연은 한번 보았다.사후 피임약이었다.사실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3일 안에 먹기만 하면 약효가 있는 터라, 오늘 떠난 뒤 혼자 약국에 가서 사려 했다.하지만 그가 주동적으로 건네니, 그녀도 거절하지 않았다."차에서 기다릴게."육현경은 몸을 돌려 떠났다.어제의 애정 어림부터 오늘의 차가움까지.이게 바로 어른들 사이의 현실이다.소이연은 약을 먹고 육민과 다시 작별 인사를 한 뒤 떠났다.육민은 엄마가 아빠의 차에 타는 걸 빤히 쳐다보았다.육민이의 작은 몸을 보고 있자니 소이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아쉬움에 가득 찼다.앞으론, 앞으로는 꼭 육민을 자신의 곁에서 데리고 지낼 것이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마음을 평온히 다잡았다.곁에 앉은 육현경은 시종일관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이 저택을 떠날 때가 되어서야 소이연은 육현경의
소이연의 눈시울이 약간 붉어졌다. 그녀는 사실 육현경의 만나러 가지 않고 그저 멀리서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어졌다.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마치...... 심장이 떨어져 나가듯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헬리콥터는 30분 맴돌다가 교외의 공터에 착륙했다. 심문헌의 검은색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물론 자동차 한 대뿐이 아니었다. 사고 이후 심문헌은 주변을 더욱 철저히 지키게 했다. 소이연은 헬리콥터에서 내렸다. 지팡이를 짚고 있어 불편한 그녀 앞에 하얗고 큰 손이 나타났다. 소이연은 고개를 들어 휠체어에 앉아 있는 심문헌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보아하니 그때의 교통사고로 그는 크게 다친 것 같았다. 소이연도 사양하지 않고 심문헌의 팔 잡고 헬기에서 내린 뒤 그를 따라 검은색 승용차에 탔다. 그들이 승용차에 타자 차가 출발했다. 헬기도 떠나갔다. 소이연은 왜 육현경이 그의 별장이 안전하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의 별장은 첫째, 찾기도 어려웠고 하늘에서는 추적하기가 쉽지 않았다. 둘째, 설령 찾았다고 해도 산에서 침입한 사람이 유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소이연은 멍하니 헬리콥터가 떠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운해요?" 심문헌이 물었다. "아니에요." 소이연은 눈빛을 감추며 부인했다. 심문헌은 그녀의 평온한 뺨을 바라보았다. 소이연이 잘 감추었다 해도, 사실 그녀가 울음을 터뜨렸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육현경 씨 곁에 왜 있지 않은 거예요? 그는 정말 이연 씨를 잘 지켜주는데." 심문헌이 솔직하게 말했다.. "실망하게 했어요." 소이연은 심문헌을 바라보며 말했다. "육현경과 심아윤은 함께 하기로 했어요.” 심문헌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상관없어요. 이연 씨가 옳다고 생각하면 돼요. 우린 협력 관계일 뿐이에요. 당신이 선택한 거예요. 하물며 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저도 사실 큰 기대를
그들에게 다가가기만 했을 뿐인데 압박감을 느꼈다. 소이연이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있던 한 사람이 안에 있는 사람에게 무전기로 보고하자, 안에서 그녀에게 자 방문을 열어주었다. VIP룸 일반 룸과는 달랐다. 고급스러운 장식이 눈길을 끌었지만, 소이연은 지금 이곳의 화려함을 감상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힘들게 커피 테이블로 걸어갔다. 이 순간 테이블 앞에 앉아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은 심아윤이었다. 심아윤의 뒤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고 문 앞에도 두 명이 서 있었다. 그녀가 경계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심아윤은 그녀가 혼자 나타나자 깜짝 놀랐지만, 재빨리 표정을 숨겼다. "앉아요." 심아윤이 말했다. 소이연도 거절하지 않았다. "소이연 씨는 뭘 마시겠어요?” “블루마운틴.” 커피 주문한 뒤 두 사람은 여전히 마주 보고 있었다. 심아윤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소이연 씨가 혼자 나올 줄 몰랐어요. 좀 놀랐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소이연이 한 번 만나자고 했을 때, 정말 놀랐다. 이렇게 똑똑한 소이연이 자신이 몰래 무엇을 했는지 모를 리 없다. 계속해서 그녀를 죽이려고 했는데, 감히 이렇게 대담하게 그녀를 만나러 오다니?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면서도 거절할 수 없었고, 소이연이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보고 싶어 초대에 응했다. 어쩔 수 없이 왔지만 이번 싸움은 소이연에게 좀 버겁긴 했다. 그녀가 한순간 그녀가 별것 아닌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물론 심아윤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심씨 가문에서 본 적이 없는 큰 장면을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소이연 씨, 오늘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한 거죠?" 심아윤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심아윤 씨에게 나와 육현경의 관계를 설명하러 왔어요.” 심아윤의 안색이 약간 어두워졌다. 지금 그녀를 협박하러 온 것인가? 육현경이 소이연을 사랑하고 자신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다는
“너 내일 후회할 거야.”이런 하지수를 앞에 두고 참는 건 송문수에게도 곤욕이었다.온몸이 떨릴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것보다 자신의 마음을 억누르는 게 더 힘들었다.“후회 안 해.”“딱 하나 후회되는 게 있다면 내가 이 나이 먹도록 한번 밖에 못 해봤다는 거야. 그리고 그 한 번도 진짜 별로였어.”“뭐?”아까부터 한번을 강조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그 한 번도 다 너한테 맞춘 거였잖아.”고작 한 번이라니, 그럴 리가.그런데 또 곱씹어 보니 둘이 함께 잔 건 한 번뿐인 것 같긴 했다.하지만 송승우와 그렇게 오래도록 사귀면서 송승우 방까지 들락날락하던 게 하지수인데 그런 그녀의 인생에서 저와 한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이번엔 내가 움직일 거야.”하지수는 잔뜩 풀린 눈으로 당차게 말했지만 그녀의 말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나 또 밀어내면 그땐 진짜 물어버릴 거야.”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닥에 눕힌 뒤 그 위에 올라탔다.“반항하지 마.”곧바로 하지수의 입술이 자신에게 다가왔지만 송문수는 정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이 상황에 그녀를 밀어내면 하지수가 정말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그녀의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기에 송문수는 그냥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그렇게 내일 그녀의 원망도 다 받아낼 심산으로 송문수는 하지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뜨거운 하룻밤을 보낸 뒤, 아침이 밝아오자 하지수는 몸을 뒤척였다.온몸에 차에 깔리기라도 한 듯 무거웠고 발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던 그녀는 힘겹게 눈부터 떠보았다.익숙하고도 낯선 이곳은 그녀의 기억 속에 있던 송문수의 집이었다.그리고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니 어제의 기억 조각들이 하나하나 수면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그것들이 마침내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대담한 모습을 그녀는 차마 깊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술이 깬 지금에 와서는 절대 못 할 일이
송문수는 자신마저도 취해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입술을 뗀 하지수가 오랜만에 얌전해진 송문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자신의 키스에 몸을 맡기며 가만히 있기만 하는 그에 하지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문수 씨, 내가 하는 키스가 그렇게 별로야?”별로라니, 흥분해서 자칫하면 이성이 끊길뻔했는데.여기서 입을 열면 더 이상은 참지 못할 것 같아 송문수는 이번에도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하지 않았다.“어디가 별론지 얘기해주면 내가 고칠게, 응?”송문수는 아까부터 마른침만 삼키고 있었다.부단히도 움직이는 그의 울대가 그의 초조함을 대변하고 있었다.하지수 앞에서만큼은 속절없이 무너지는 송문수라 하지수가 한마디만 더 하면 그는 정말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지수...”그래서 그만하라고 말하려 하는데 하지수가 본인의 손가락을 송문수의 입에 가져다 댔다.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진 지 아는 송문수는 지금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힘을 주며 간신히 참고 있었다.이대로 가면 정말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은데, 그걸 다 알면서도 그는 하지수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그런데 하지수는 점점 과감해지는 건지 이젠 하다 하다 손까지 집어넣어 송문수의 몸 곳곳을 어루만지고 있었다.그녀의 손길이 지나간 곳이면 그게 어디든 불에 덴 듯 뜨거워 났다.송문수 역시 술을 마신 몸이라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그래서 그는 자신이 느슨해져서 이 상황을 즐기는 일이 없게 온몸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하지 마 하지수는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점점 더 깊은 곳까지 손을 움직여왔다.“아!”그러다 결국 송문수에게 손이 잡혀버린 그녀는 울망울망한 눈으로 송문수를 올려다봤다.자칫하면 그곳까지 갈 수도 있었는데 뭐가 아쉬워서 저런 표정을 짓는지.송문수는 심호흡으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그만해 하지수.”“왜?”“별장에 데려다줄게.”저 순진무구한 눈을 보고 있으면 송문수도 빨려 들어갈
술에 취한 하지수의 고집을 당해낼 수 없었던 송문수는 결국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밤늦은 시간에 별장에 들어가면 다른 가족들을 깨울 수도 있으니 집에서 잠만 재운다는 핑계를 대가며 말이다.송문수가 하지수를 침대에 눕히고 자리를 뜨려 하자 하지수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가지 마.”손끝에서 느껴지는 하지수의 온기에 송문수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하지수, 잘 봐. 나 송문수야.”“알아, 네가 송문수인 거. 나 버린 무책임한 놈이잖아 너!”풀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말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송문수가 감히 컨트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왜 날 송승우한테 넘긴 거야? 내가 물건이야? 네가 뭔데 날 송승우한테 준다 만다냐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지수는 침대에 올라 선 채 송문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 그러다가 넘어져.”“안 넘어져.”하지수는 송문수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 질문만 퍼부었다.“왜 날 밀어내는 건데! 내가 어디가 별로야? 몸매가 별로야 아니면 내가 못생겼어? 뭘 그렇게 일일이 다 따지고 들어? 넌 보는 눈이 그렇게 높아?”“일단 누워.”“싫어.”송문수가 그녀를 잡아주려고 손을 뻗으면 하지수는 곧장 몸을 돌려 피하곤 했다.그렇게 휘청대는 하지수를 보는 게 송문수는 조마조마하기만 했다.“내 말에 대답부터 해. 왜 날 싫어하는 거야?”“난 너 싫어한다고 안 했어.”그의 대답에 송문수를 향해 손가락질하던 하지수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넌 그냥 내가 싫은 거잖아! 나 말고 밖에 있는 그 못된 여자들을 더 좋아하는 거잖아. 나도 그 여자들처럼 변하면 나 좋아해 줄 거야?”“그런 거 아니야.”“변명하지마! 넌 그냥 몸매 좋고 능숙한 그런 여자들만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혼자 화를 내는 하지수가 송문수는 어이없기만 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아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니
예수진:[저 둘이 나랑 지원 씨보다 더한 것 같아요.]소이연:[수진 씨도 본인들이 너무했다는 건 아네요.]예수진:[... 송문수랑 지수 얘기나 해요.]소이연:[일단 오늘은 지수 씨도 스트레스 풀게 그냥 놔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해봐요.]예수진:[그래요.]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하지수는 5병의 맥주를 모두 비워냈다.이미 한계에 다다른 그녀는 해롱해롱해지고 몸에 힘도 빠지자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속도 쓰리고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아팠다.누가 자신을 억누르는 것만 같은 느낌에 하지수는 당장이라도 속 시원히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녀는 습관적으로 또 참아내고 있었다.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탓에 늘 불안에 떨며 살아와서 그런지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본 적이 없었다.감정을 숨기고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이는 게 하지수라는 사람이었다.“다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이제 일어나.”예수진이 말을 꺼내자 소이연도 남편을 보며 말했다.“현경아, 시간도 늦었는데 우리도 이만 갈까?”아내 바라기였던 육현경은 이미 입가에 가져다 댄 술잔도 바로 내려놓고는 그녀를 따라나섰다.그들이 떠나고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던 하도경 역시 예수진의 눈짓에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그럼 나도 갈게.”아직 술을 덜 마신 게 아쉽긴 했지만 예수진의 눈빛을 당해낼 수 없었던 하도경은 결국 소이연 부부의 뒤를 따라갔다.모두가 자리를 뜨자 예수진은 그제야 술을 퍼마시고 있는 송문수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수 집에 좀 데려다줘.”“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가라고 해.”“안돼, 난 손님 집에서 안 재워.”“하도경은 너희 집에서 잤잖아.”“지수랑 하도경이랑 같아? 걔는 내 남편이 될뻔한 사이였잖아.”아무 말이 막 하는 예수진 때문에 계지원은 마음이 아파왔다.하룻밤 사이에 두 남자의 마음을 후벼 파 놓은 예수진은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터뜨리는 송문수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어쨌든 아직은 이혼 전이니까 네가 지수 남편이야. 지수 안전은 너한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지자 예수진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너랑 나랑은 다르지.”“뭐가 다른데?”“난 너 안 좋아하니까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야.”그런 아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예수진에 하도경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헤어질 때 준 상처로는 부족했는지 만날 때마다 이렇게 하도경의 가슴을 후벼 파는 예수진이었다.“진짜 사랑했던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없어, 내 말이 맞지 지수야?”일부러 하지수를 언급했지만 그녀는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고 오히려 송문수가 대답을 가로챘다.“그냥 친구로 지낼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그럴 수도 있지.”하지수는 입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고 예수진은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막 뱉는 송문수를 노려보며 저 싹수면 이혼당할 만하다고 생각했다.“우리 진짜 오랜만에 모인다, 다음에 만날 때쯤이면 우리 애도 다 태어났겠어.”“도경아, 오늘은 진짜 취하기 전엔 아무도 집에 보내지 말자.”계지원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하자 하도경도 눈치 있게 대꾸했다.“좋아.”어차피 예수진 때문에 마음고생을 너무 해서 더 다칠 마음도 없었기에 하도경은 공허한 제 가슴에 술이나 퍼부으려고 맥주를 따기 시작했다.그렇게 남자들 앞에 한 병씩 놓아준 하도경은 여자들을 보며 물었다.“우리 여자분들은 물, 우유, 음료수 중에 고르세요.”“전 물 마실게요, 알아서 마실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전 맥주 주세요.”평소엔 술을 즐기지도 않고 예수진과 소이연이 마실 때만 한 잔씩 같이 마시던 하지수가 갑자기 맥주를 요구하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저도 한잔하고 싶어서요. 요즘 송승우 옆에만 있느라 또 언제 나올지도 모르잖아요.”“송승우는 좀 어때?”궁금한 건 못 참는 예수진이었기에 말 나온 김에 하지수를 향해 물었다.“아직도 죽겠다고 난리야?”“아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다 큰 남자가 왜 자기 목숨으로 가족들 협박하는 거야?”처음에는 송승우를 안타까워
그 한 달 동안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부모님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집으로 불러도 송문수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말은 그렇게 해도 본인이 내키지 않아서 안 온다는 걸 허영지와 송기명은 알고 있었다.불행 중 다행으로 송승우의 회복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송씨 집안 주치의가 매일같이 검사를 진행하며 회복속도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두 달 뒤에 바로 의족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소견도 듣게 되었다.그 말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내 큰 시름을 덜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송승우와의 교제를 약속한 하지수도 매일 그의 옆을 지키며 함께 재활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렇게 별장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하지수는 예수진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곧 출산하는 데 그러면 산후조리원에 가야 해서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지 못하니 그전에 한 번 만나서 원 없이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었다.그 말을 들은 하지수는 자신에게도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지금 본인의 상태가 우울한 건지는 잘 몰랐지만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송문수도 가는 거야?”예수진과 밥을 먹으러 간다는 얘기를 송승우에게 했을 때 그가 던진 첫마디가 바로 저것이었다.송문수와 예수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송문수와 하지수가 따로 만날까 봐 걱정돼서 한 질문인 것 같았지만 하지수는 바로 대답했다.“몰라요, 그건 안 물어봤어요.”“그런데 문수 씨가 간다고 해도 내가 못 갈 이유는 없잖아요. 송문수 때문에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안 볼 순 없어요.”하지수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당황했던 송승우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속 아프니까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네.”그날 저녁 하지수는 바로 예수진의 집으로 향했다.그때 집에는 예수진의 가족뿐이었는데 안 본 사이 더 커진 배를 보니 두
이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둘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 숨 막힌 정적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송문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송문수는 하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을 나서버렸다.서울을 떠날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시야가 흐려졌다.하지수는 뿌얘진 시야에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이튿날, 하지수는 약속대로 송문수와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는데 송문수는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하지수가 차에서 내리며 안에 앉아있는 또 다른 이와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그 안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송승우일 것이기에 송문수는 시선을 돌리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대화를 마친 건지 종종걸음으로 송문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오래 기다렸어? 미안해.”“아니야, 내가 빨리 온 거야.”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송문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들어가자.”“그래.”그렇게 둘은 법원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송문수가 합의서를 건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작성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USB 챙겼으니까 여기서 고칠 수 있어.”사실 어젯밤 송문수가 파일을 보내와서 하지수는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싸움도 없었고 이익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니 재산분할에도 큰 문제 없었다.그럼에도 제게 40억을 주겠다는 송문수를 하지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차피 큰돈도 아니라서 헤어지는 대가로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 그저 받기로 했다.송문수한테는 정말 적은 돈이긴 하니까.그리고 돈으로서 둘 사이를 깔끔히 정리하는 걸 송문수도 원할 것 같아 하지수는 결국 그걸 받는 조건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이다.이혼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다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핸들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임에도 송문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하지수는 송승우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송승우의 몸은 껌딱지처럼 하지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그를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히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마치 매일 하던 행동인 것 마냥, 그래서 몸에 배어버린 것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하지수, 송문수, 송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 도착해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보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집이 그리웠던 허영지와 송기명은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편한 호텔에서 자도 제집만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잠부터 청했다.그리고 송승우도 피곤해해서 하지수는 휠체어를 밀며 그를 방에 데려다주었다.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송문수는 소파에 앉아 하지수를 기다렸다.원래는 송문수를 데려다주고 나가려 했는데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하지수 때문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솔직히 하지수가 언제 내려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잠에서 깬 다음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송문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하지수가 보이자 송문수의 심장박동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몸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며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하지수가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부부인데도 부부답지 않았고 가족임에도 가족 같지 않은 둘의 애매모호한 사이 때문이었다.이렇게 보니 제 인생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것 같아 송문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뭐야?”송문수는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하지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난 충동적인 적 없어요, 그리고...”하지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송승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그럼 너 나랑 다시 사귈 수 있어?”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하지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송승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내가 아닌 송문수를 좋아한다는 걸 난 못 믿겠어. 난 아직도 네가 그때 내가 말도 떠난 일로 화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다시 사귀자. 6개월만 만나보고 그때도 네가 송문수를 선택한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하지수는 자신이 송승우를 다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완벽히 포기해야 끝나는 싸움이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하지수는 이제 송승우와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좋아요.”하지수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자신만만했던 송승우의 얼굴에는 바로 미소가 번졌다.자신이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송승우는 그래도 하지수의 사랑을 다시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송승우는 단 한 번도 송문수를 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지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저를 놔두고 멍청한 송문수를 선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건이 하나 더 있어.”“말해요.”“문수랑 이혼부터 해.”“네가 나랑 사귀겠다고 했잖아.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게 싫으니까 당당하게 너랑 만나고 싶어.”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생각에 잠겼다.송문수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송승우와 만나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존중을 깨는 거라서 하지수도 썩 내키진 않았다.“알겠어요.”하지수가 이혼만 하면 저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기에 송승우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뭐든 말만 해.”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하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송승우는 하지수는 어차피 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일주일 뒤, 송승우가 퇴원하자 드디어 가족들이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