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진의 거만한 모습에 문서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저 여자는 또 무슨 자격으로 연회에 참가했지?설마 풍향 드라마를 촬영했다고 육 어르신께 춤추고 노래 부르면서 흥을 돋우러 왔나?연예계에서 문서아는 비록 별 볼일 없는 연예인이지만 가문의 영향으로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예수진도 포함해서 말이다.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암묵적으로 거래했으면 오늘 예수진이 이 정도로 유명해졌을까?그러니 날 웃을 자격이 없다.“서아 씨. 자중하세요.”계지원이 끝까지 쪽지를 받지 않고 가버렸다.문서아는 화가 나서 치가 다 떨렸다.오늘 연회에서 열 받은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한편, 소나은은 감히 문서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자칫하다 문서아가 창피를 당할 때 자신한테 불똥이 튈까 봐 걱정되어 아예 피해버렸다.그때 연회장에 사회자 목소리가 들렸다.생일 연회가 드디어 시작되었다.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무대를 향해 다가갔다.육민은 케익 두 입만 먹고 누가 데리러 왔다.“여러분 좋은 밤입니다. 전 오늘 연회에서 사회자를 맡은 유문이라 합니다. 바쁘신 와중에 육씨 어르신의 칠순 생일을 잊지 않으시고 축하하러 와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사회자가 격정적이고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말을 했다.“다음으로 오늘 연회의 주인공 육청수 어르신을 모시겠습니다.”연회장 내에 열렬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육청수와 뒤에서 휠체어를 미는 육현경 그리고 얌전한 육민이 무대위에 올라섰다.모든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순간 문서인의 얼굴이 굳어버렸다.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 정도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어느덧 일흔 살이 되었습니다. 저도 은퇴할 나이가 왔네요. 오늘 내 생일에 내 손자 육현경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앞으로 현경이 장안에 남게 될 것이니 여러분에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육 어르신은 연세가 있어도 목소리가 우렁차고 힘이 있었다.그 말은 앞으로 육씨 그룹을 육현경에게 맡긴다는 뜻이다.사회자가 마이크를 육현경에게 건넸다.육현경은 기품이 늠름하고 얼굴
이럴 수가!육현경이 이렇게나 잘생겼다고?하지만 그들 눈앞에 서있는 사람은 육현경이 틀림없었다. 소이연과 스캔들이 났던 남자가 육현경이라니!어쩐지 그 여자의 오기가 하늘을 찌른다 했어! 육현경이 직접 그 여자를 육씨 연회장에 요청해서 들어올 수 있었던 거였어. 어쩐지...아니.난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소이연이 장안시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육현경과 스캔들이 났단 사실을 절대 받아 못 들인다고!“와! 육씨 도련님은 우리가 생각하던 배만 나온 중년 아저씨가 아니었어!”그의 외모는 뭇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어머, 너무 잘생겼잖아!”“장안시에서 제일 잘생긴 것 같아.”“너무 의외야.”“그의 아들도 어쩜 이렇게 잘생겼을까. 동화 속 어린 왕자 같아.”육현경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뽐냈다. 연회장은 삽 시에 사람들의 감탄과 칭찬으로 채워졌다.소이연은 사람들 사이에서 키가 훤칠하고 점잖으며 오관이 뚜렷한 이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안정된 목소리로 연설하고 있었는데 태도는 아주 겸손했다. 하지만 그의 압도적인 분위기는 그가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었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짧지만 강렬했던 연설이 끝나자 연회장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청수 할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종래로 웃지 않고 늘 엄숙했는데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함박웃음을 지었다.육현경은 청수 할아버지를 무대 중앙에서부터 모시고 내려와서 휠체어를 청수 할아버지의 비서에게 맡겼다.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문서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문서인의 얼굴은 이미 사과가 되어있었다.육현경이 그를 향해 다가가자 그는 몸 둘 바를 몰랐고 뒷걸음만 쳤다.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육현경만 바라보았다.육현경의 신분이 알려진 이상, 그의 언행은 모두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육현경은 문서인 앞에서 멈추었고 그의 키는 문서인보다 훨씬 컸다. 그는 먼저 문서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문씨 도련님. 육현경이라고
“소이연!”문서인은 소이연의 말에 극도로 분노했다.“그렇게 소리치면 더 주목받을 텐데. 더 망신당하고 싶다면 계속해보든지.”소이연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말했다.“너!”문서인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는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속이 울렁거렸고 수치스러운 마음에 그는 연회장을 빠져나왔다.문서인을 바라보던 소이연의 표정이 삽 시에 굳어졌다.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육현경을 발견한 그녀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육현경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에 초대해 주었으니 참가한 것이고 온 김에 민이를 보려 했던 참이었다. 다 만났으니 더 이상 남아있을 필요도 없었다.그녀는 보통 이런 술잔이 오고 가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면 모를까.“소이연 씨.”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명진이었다.“저는 육현경 씨 비서 이명진이라고 합니다. 곧 만나러 오니 기다려 달라고 전하셨습니다.”소이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내가 가려던 건 어떻게 안 거야!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나를 신경도 안 쓸 것 같더니.“전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세요.”이명진을 육현경의 말을 전달한 후 자리를 급히 떠났다.소이연이 거절할까 봐 그랬던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이명진의 말을 듣고 있던 소이연의 표정이 굳어있었다.하지만 소이연은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이때 육민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엄마, 역시 여기 계셨네요. 저랑 같이 있어주려고 그런 거죠?”“그럼.”소이연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가려던 참이었는데 말이다.“엄마, 아빠가 그러는데 연회장 안이 답답하면 뒷문 쪽에 가든으로 가래요. 그네도 있는데 엄마랑 같이 타고 싶어요. 같이 가주세요, 네?”육민은 기쁨에 젖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육민은 소이연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갔다.그들 앞으로 걸어오던 웨이터가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들고 있던 와인잔과 샴페인이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떨어졌다.소이연은 재빨리 육민을
소이연은 인상을 찌푸렸다.소이연이 어쩔 수 없이 연회장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문서아는 기고만장해서 뒤돌아갔다.그런데 이때.“지지직!”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문서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녀는 탑 브라 디자인인 드레스를 입었는데 찢어지는 바람에 살색의 가슴 패드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았기에 그녀는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곁에 있던 소나은도 식겁했지만 문서아를 가려주지 않았다. 쳐다만 보다가 그녀와 좀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문서아는 자신의 가슴을 막고는 육민을 노려보았다.문서아의 치마 자락 끝에는 깨끗하고 윤기도는 작은 구두가 있었다. 육민이 저지른 것이다.그는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아줌마, 설마 어린 저한테 배상하라고 하시는 건 아니죠? 저 이제 여섯 살밖에 안되었는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화가 치밀어 오른 문서아는 목까지 빨개졌다.이 애새끼가 날 골탕을 먹이려고 내가 했던 말을 반복해?육현경의 아들이 아니었으면 오늘이 네 제삿날이었을 거야.“아줌마, 드레스가 다 찢어졌는데 연회장에 계속 남아있는 건 실례 아닌가요? 저의 할아버지와 아빠한테 실례인 것 같은데요.”육민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면서 순진무구하게 말했다.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역시 유전자의 힘인가?여섯 살짜리 애가 이렇게 잘 대처할 줄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야. 정말 똑똑하다니깐.복수를 할 생각도 없었는데 속이 시원하다!“아!”문서아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못 이겨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어린애한테도 질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문덕수와 임지효는 딸의 고함소리에 제꺽 달려왔다. 딸의 처참한 행색에 두 사람의 낯빛은 어두워졌다.문덕수는 정장 외투를 벗어 문서아한테 걸쳐주었고 그로 하여 더 이상의 노출을 막을 수 있었다.“아빠, 쟤가 저의 드레스를 일부러 밟았어요. 흑.”문덕수를 본 문서아는 목놓아 울었다.문덕수와 눈이 마주친 육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서아는 제자리에 얼어있었다. 육현경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적잖게 놀란 모습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소리를 질렀다.“육현경 씨, 소이연이 뭐 좋은 여자인 줄 아나 본데요. 금방 귀국해서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이 년이 얼마나 남자를 후리고 다녔는지 모르죠? 알아주는 걸레라고요! 18살 때부터 걸레라고 소문이 자자했고 아니나 다를까 아빠도 없는 애를 임신했어요. 지금도 봐봐요. 저의 오빠랑 헤어지지도 않았으면서 현경 씨한테 꼬리치는 것 좀 봐요! 이 년한테 속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저 여자가 소이연이었어. 육 씨 도련님을 어떻게 꼬셨기에... 대단하네요.”“입고 있는 드레스만 17억이라잖아요. 꼬시려고 애쓴 게 티 나네요. 이런 큰돈을...”“육 씨 작은 도련님이 소이연이라는 여자한테 엄마라고 하던데. 설마 저 여자 육씨 작은 도련님 마음부터 사로잡은 게 아닐까요?”“보통 여자가 아닌 건 확실하군요.”문서아는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입꼬리를 올렸다.소이연, 기분이 어때? 육현경 씨 앞에서 정체가 폭로된 기분 말이야.현경 씨가 소이연 너 같은 여자와 더 엮이고 싶을까? 그럴 리가!소이연 너, 절대 육현경 씨랑 잘될 수 없어. 절대 용납 못해!“소이연 씨는 18살에 안 좋은 일을 겪어서 임신했을 뿐입니다. 이 일은 이연 씨 인생에서 가장 아픈 상처이자 트라우마이지 오점이 아닙니다. 그녀의 아픈 과거를 안아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처럼 조롱하고 상처를 들추기 보단요!”육현경의 차가운 목소리는 모두에게 경고하는 것 같았지만 소이연에 대한 애정이 묻어있었다.“현경 씨는 이 년한테 속은 거예요! 이 여자는 걸레...”문서아는 되려 흥분해서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지금 이 순간부터 제 귀에 소이연 씨에 관한 조롱이거나 험담이 들린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것은 결국 저를 손가락질하는 것과 같으니깐요. 제가 무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
“미안해요.”문서아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오늘 느낀 수치심은 한평생 잊기 힘들 것이다.“괜찮아.”소이연은 더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는데 그 모습은 사람들에게 대인배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문서아는 그녀의 모습에 더더욱 괴로워했다.문덕수는 문서아가 사과한 뒤 육현경에게 물었다.“육 씨 도련님, 저희 이만 가봐도 될까요?”“앞으로 이런 일은 없도록 하세요.”“네! 제가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문덕수는 문서아를 끌어당기더니 초라한 뒷모습만 남기고 떠났다.그들이 떠난 후, 연회장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하지만 육현경과 소이연을 지켜보는 눈길은 여전히 존재했다.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두 사람이 어떻게 진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오늘 좀 바빠서요. 좀만 기다려 줘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저 혼자 가도 되는걸요...”“기다려 줘요.”육현경은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그의 말에는 거절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자상한데 박력 넘치기까지 한 이 남자를 어쩌면 좋아...“민아, 엄마 곁에 꼭 붙어있어.”육현경은 아들에게 당부했다.“네! 맡겨만 주세요!”육민은 차렷 자세를 하고서 대답했다.육현경은 만족한단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났다.소이연은 걸음을 재촉하는 육현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사색에 잠겼다.그렇게 바쁜데도 나 때문에 와준 거라고?감동이긴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엄마, 그네 타러 가요.”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육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민아, 아까는 고마웠어.”“괜찮아요, 엄마. 아빠가 그러셨어요. 남자라면 엄마를 보호해 줘야 된다고요.”육민은 앳된 목소리로 당차게 말했다.그 바람에 소이연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내렸다.그녀는 육민의 고사리 같은 손을 쥐고는 연회장을 나섰다.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소나은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여유롭고
“계 감독님, 오랜만에 뵙네요.”소이연이 먼저 잔을 들었다.“이연 씨는 위도 안 좋으시니 적당히 즐기시는 게 좋겠어요.”계지원도 함께 잔을 들었다.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친한 사이가 아니라 그런지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현경이 말이에요.”계지원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참 괜찮은 애에요.”현경? 아, 육현경.소이연은 그제야 계지원이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았다.계지원은 청수 할아버지의 양아들이라 육현경과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소이연은 육현경에 대해 말하기 싫었기에 대꾸하지 않았다.“늦었으니 먼저 가볼게요.”계지원은 와인잔을 우아하게 내려놓았다.청수 할아버지도 댁으로 돌아가셨고 육현경만이 연회장에 온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조심히 들어가세요.”소이연은 미소를 지었고 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어 보였다.계지원 이 남자는 이름이 주는 느낌만큼이나 젠틀하고 지성미가 넘쳐나는 사람이기에 쉽게 호감을 사는 유형이었다.계지원이 떠난 후, 하도경과 송문수도 집으로 돌아갔다. 연회장을 나서기 전에 모두 소이연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소이연은 못 본 척 했다.아직도 육현경 이 인간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취기가 올라서 힘든데...이때 그녀는 마침 육현경이 가든으로 가는 것을 보았지만 따라가지는 않았다.가든.“예수진.”육현경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예수진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이거 놔.”“어디에 있었던 거야? 전화도 안 받고.”“신경 꺼.”예수진은 육현경의 손을 뿌리쳤다.“비서 차에 타고 집으로 가.”육현경은 어린애를 달래듯 말했다.예수진은 인상을 찌푸렸다.“싫어. 이 시간에 집 가는 사람이 어딨어? 좀 있다 친구랑 약속 있어.”“몇 시인데 친구를 만나? 이 늦은 밤에 약속이라고?”“21세기 사람 맞아? 11시밖에 안되었는데 뭐라는 거야.”“너 내일 촬영 있어.”“알아. 제시간에 도착...”“명진아.”육현경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
소이연과 육현경은 거리를 둔 채 걷고 있었다.선남선녀라 그런지 뒷모습도 보기 좋았다.그들의 외모는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모두 소이연과 육현경이 연인일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차 안.소이연은 머리가 어지러웠다.아, 너무 많이 마셨나 봐...그녀는 다른 때와 달리 과음했다. 문서인과 사귀고 있을 때 그리고 문 씨 그룹에 출근할 때는 이런 적이 없었다.그런데 오늘 밤은...오늘 밤은 감성에 취해있었던 것 같다.나는 내가 다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마저도 내 착각이었지. 날 비판하는 목소리가 하나 둘 들려올 때마다 흔들리는 내 모습이 싫어.그녀가 사색에 잠긴 사이,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육현경은 차창에 기대 곤히 잠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 그리고 아기 같은 숨소리.육현경은 차에서 내려 소이연을 안았다.소이연은 불편함을 느꼈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이 풀린 탓에 인상만 찌푸릴 뿐, 반항은 하지 못했다.“비밀번호 뭐예요?”육현경은 그녀를 안고서 물었다. 섹시한 중저음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소이연은 기분 탓인지 아니면 취해서인지 몸을 가눌 수 없었다.“제 생일...”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도어록이 열렸다.“문이 열렸습니다.”도어록의 알림음과 함께 육현경은 문을 열어 그녀와 함께 들어갔다.신발 수납장에는 두 켤레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육현경은 저도 몰래 미소를 지었고 남성용 슬리퍼를 꺼내 신고 소이연의 집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푹신한 침대에 누운 소이연은 불편한 듯 끙끙거렸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육현경의 정장 외투와 몸에 딱 맞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육현경은 그녀가 신고 있는 하이힐을 벗겨주었다.뽀얀 속살과 함께 드러난 것은 발목에 난 상처였다. 하이힐을 신어서 껍질이 벗겨진 것이다.육현경은 일어나서 소이연이 걸친 검은색의 정장 외투를 벗겼으나 몸에 딱 붙는 드레스에 손을 낼 엄두가 나지 않아서인지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
하지만 원체 쇼핑을 싫어하는 송문수의 성격을 알고 있던 하지수는 그의 냉담함에 실망하지 않았다.이렇게 앉아서 옷을 갈아입는 저를 봐주는 것도 그의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문수 왔구나.”허영지의 부름에 송문수가 짤막하게 답했다.“좀 있다 모임 있어서 지수 데리러 왔어요.”“그래,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모임에 나가면 좋지.”전에는 송문수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거절은 안 해도 표정은 굳어지던 허영지가 너그럽게 대꾸하는 것도 의외였다.“아직 이르니 너도 정장 한번 입어보고 가.”“바로 가야 되는데 갈아입기 귀찮아요.”“얼른 갈아입어.”“엄마, 나 온종일 일해서...”“지수가 너 준다고 한참 고른 건데 와이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줘?”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목석같기만 한 제 아들을 보며 허영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엄마의 말을 들은 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하지수는 다급히 말했다.“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르긴 했는데 갈아입기 싫으면 그냥 보기만 해. 맘에 들면 당신 사이즈로 맞출게.”“입어볼게, 맘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송문수가 하도 담담하게 대답해서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주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옷을 골라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놀라는 중이었다.기쁜 마음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송문수가 나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진짜요?”송문수가 직원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자 하지수가 나서며 말했다.“진짜야. 진짜 너무 멋있다.”“그래?”하지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해 하며 대꾸했다.“다 내가 잘 생겨서 그런 거야. 옷이랑은 큰 상관 없지.”이렇게 가끔 자아도취 하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에게로 다가가 넥타이를 정리해주었다.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송승우만은 아주 언짢아하
생일파티에 관한 일을 다 의논한 뒤 하지수는 허영지와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러 갔는데 하지수의 드레스도 같이 맞추자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그녀도 옷을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하필 그때 송승우가 송문수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옷을 다 입어보고 나서도 시어머니와 쇼핑을 하느라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하지수는 송문수에게서 연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송승우가 이번에도 자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하지수가 그걸 보고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그녀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버렸던 송승우는 이내 송문수가 자신이 올린 인스타를 봤을 생각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신문에 고정한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수 씨.”송문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지수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이 재회할 때나 나올법한 목소리에 송승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아직도 바빠?”“어머니 모시고 드레스 피팅해보고 있었어. 지금은 디자이너님이랑 디테일 얘기하고 있어. 나도 아까 하나 입어봤는데 사진 보내줄게.”“지금 데리러 갈 건데 어디야?”잔뜩 신나서 말하던 하지수는 이제 고작 4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했다는 송문수가 의아하여 놀라며 물었다.“퇴근했어?”“주말이라서 일찍 퇴근했어.”“회사도 좀 안정돼서 직원들도 앞으로 주말은 다 쉬기로 했어.”“그래.”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불러준 하지수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허영지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송문수와 하지수가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송승우는 화도 내지 않는 송문수에 혹시 그가 하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송문수는 인스타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화에 핸드폰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하지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심정이 굴뚝같은데 그런 그녀가 옛날에 좋아하던 송승우와 함께 있는 걸 본 이상 그는
결국 송승우에게 차 키를 내어준 하지수가 허영지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자연스레 뒷좌석에 타려 하는데 송승우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지수야, 넌 앞에 타.”“어머니랑 같이 앉을게요.”“장안시에 길은 나도 잘 몰라서 알려줄 사람이 필요해.”단호한 그의 말을 하지수가 거절하기 어려워하자 허영지가 나서며 말했다.“그럼 내비게이션 켜. 바로 윌런 호텔로 갈 거야, 호텔 사장이랑 얘기 다 끝나서 아마 우리 기다리고 있을 거야.”말을 마친 허영지는 또 일부러 하지수를 보며 말했다.“지수는 나랑 같이 타자, 말동무해줘.”“네, 어머니.”제 옆에 앉지 않아도 된다고 저렇게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좋아하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표정을 굳힌 채로 운전석에 올라탔다.그렇게 내비게이션을 켜고 윌런 호텔로 출발하자 허영지가 하지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수야, 어제 내가 한 말 그냥 흘려듣지 말고 잘 생각해봐.”“무슨 말이요?”“너랑 문수 아이 얘기 말이야.”“아, 네.”“그냥 대답만 하지 말고 노력을 해야 애가 생기지.”허영지가 거리낌 없이 남사스러운 말을 하자 하지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답했다.“어젯밤에 문수 씨랑도 얘기했어요.”“문수도 알겠대?”“네.”“그럼 난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지?”하지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허영지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그럼 나는 할머니 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게.”그런 허영지와 반대로 하지수가 송문수의 아이를 낳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송승우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갈고 있었다.윌런 호텔에 도착한 뒤 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장 사무실로 향해 파티 당일의 규모와 배치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비즈니스적인 자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꺼리던 송승우는 얘기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그렇게 심심해하던 송승우는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허영지와 하지수도 담긴 사진이었지만 그 둘은 파티 준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
“하지수, 변호사 일할 때는 똑똑하더니 연애에는 영 소질이 없나 봐?”자는 척하고 자신을 놀려먹은 건 송문수인데 오히려 바보라고 핀잔을 듣자 화가 난 하지수가 얼굴을 붉혔다.“네가 나한테 뽀뽀하는 게 좋으니까 계속하라고 가만히 있은 거잖아!”송문수가 언성을 높여 말해서야 이유를 알게 된 하지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표정에 어이가 없어진 송문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렇게 바보 같아서 어떡해, 누가 너 팔아넘겨도 모르겠다.”“누가 누구한테 바보래. 내가 당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인 줄 어떻게 알고...”말을 채 끝맺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입을 맞춰오며 진득한 키스를 이어나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눈을 크게 떴다.“아...”아까 자신이 한 건 그저 뽀뽀이지 이렇게 치열을 훑고 지나가는 키스는 아니었는데 입속 깊은 곳까지 뜨겁게 만드는 키스는 옆에서 핸드폰이 울리건 말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송문수도, 하지수도 그 벨 소리를 무시한 채 키스를 이어나가다 둘의 입술이 다 번들번들해질 때가 되어서야 송문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지수를 놓아주었다.송문수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진 하지수는 나른한 눈빛으로 송문수를 보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보던 송문수는 갑자기 욕설을 내뱉더니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달려들어 갔다.그의 샤워 소리가 들릴 때에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도 시간을 보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변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규칙적이고 자율적인 일상을 보내왔던 하지수였기에 그녀는 자신이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송문수를 만난 뒤부터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송문수가 만약 자신을 팔아넘겨도 그를 도와 돈을 세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었다.생리대부터 바꾸러 제 방으로 돌아간 하지수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송문수도 옷을 갈아입은 채로 거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평소에는 7시에 일어나서 8시 정도면
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새 깨어난 지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송문수는 다정한 눈을 한 채 떨리는 손으로 제 옆에 누운 하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하지수는 방금 일어난 탓에 낯선 주위를 한참이나 둘러보고서야 여기가 송문수의 방임을 기억해냈다.관계 빼고는 별짓 다 한 어젯밤이 떠오른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혼자 자는 게 습관 되어있어 송문수의 품에 안긴 뒤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아마도 바쁜 일정 때문에 피곤했던 것 같다.완전히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송문수를 바라보았다.자고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처럼 차갑지 않고 쫙 펴진 미간 덕분에 오히려 부드러워 보여 공격성이 다분하지도 않았다.왜 눈을 뜬 모습과 감은 모습이 이렇게 다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송문수의 얼굴을 찬찬히 보던 하지수는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전에는 그 눈빛이 마음속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아 두려웠었는데 지금의 하지수는 더 이상 잠들어있는 송문수도, 깨어있는 송문수도 두렵지는 않았다.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깨어있는 송문수를 마주할 때는 하지수가 주동적으로 입을 맞출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잠들어있을 때는 그야말로 하지수 세상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송문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하지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입을 맞추다가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릴 때가 돼서야 행동을 멈추었다.물론 자의로 멈춘 건 아니고 입맞춤을 하던 와중에 눈을 떠버린 송문수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깜짝 놀라 잠시 멈칫한 것이었다.당황한 하지수는 빠르게 도망가려 했지만 자신을 눌러버린 송문수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분명 방금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송문수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몽롱한 느낌은 전혀 없는 눈으로 그는 하지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의 진득한 눈빛을 당해내지 못한 하지수는 서둘러 눈을 피했
“미안해 문수 씨... 평소엔 이때가 아니라서 나도 몰랐어...”“응.”이 일은 애초에 하지수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던 송문수는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한탄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수를 만나는 날만 기다리며 3년 동안 아무와도 관계를 하지 않았던 그인지라 오늘에서야 비로소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겠다고 기뻐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또 일주일을 더 기다리게 된 이 상황에 송문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한숨을 쉬는 송문수를 본 하지수는 그가 자신에게 실망한 줄로 알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다음에 다시 할까?”하지수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이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해? 생리 끝나면 당장 해.”자신한테 자꾸 일이 생겨버려 송문수가 다른 사람을 찾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던 하지수는 확신에 찬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며 청심환을 하나 먹고는 말했다.“그럼 편히 자, 난 내 방 가서 잘게.”“어디 간다는 거야?”“내 방 가야지.”“하지수, 네 발로 직접 내 방 찾아와 놓고 이제 돌아가겠다는 거야?”갑자기 터진 생리 때문에 관계를 못 가진 것도 화가 나는데 사람까지 가버리겠다는 말을 들은 송문수는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나 생리 와서 어차피 못하잖아.”“그게 왜?”“아까 문수 씨도 생리 끝나면 하자고 했잖아. 지금 하는 건 나도 좀...”송문수가 되묻자 하지수는 아주 난감해하며 답했다.“하지수, 넌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아까 너 안 놔줬으면 여기 진작에 피바다 됐어.”“...”“관계까지 할 사이에 뭘 내외를 하고 그래. 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앞으로 쭉 같이 자자고? 나랑?”“왜, 싫어?”“아니.”당연히 싫진 않았지만 하지수는 그저 송문수가 관계도 없는 잠을 자신과 함께 자겠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그렇게 순진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빨리 와서 자. 아까 너무 움직였더니 피곤해.”송문수가 먼저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눕자 하
송문수의 입술이 하지수의 입술을 지나 그녀의 귓가에 닿을 때, 이런 식의 스킨십은 처음 해보는 하지수는 온몸이 떨려왔다.태어나서 딱 한 번, 송문수와 차에서 해본 게 전부인 그녀는 송문수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하고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목에 자신의 고개를 비볐다.그렇게 하지수를 안달 나게 하던 송문수는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걸 확신하고는 점차 행동을 대범하게 하기 시작했다.자연의 섭리인 것마냥 물 흐르듯 움직임을 이어나가던 송문수가 갑자기 멈췄을 때 하지수는 온몸이 뜨거워 나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온몸이 나른해진 그녀는 송문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참 지나 송문수가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가 그를 보며 물었다.“왜 그래?”제 아래에 누워있는 하지수를 보며 정말 이성을 잃을까 봐 걱정된 송문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문수 씨?”하지만 하지수는 아까는 그렇게 늑대처럼 달려들던 사람이 갑자기 말도 안 하고 거친 숨만 연신 내뱉는 게 이상했다.“문수 씨...”“지수야.”송문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자 그 숨결에 의해 뜨겁게 달궈진 피부에는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곧 자신이 상상했던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아주 아름다운 순간이었는데 다른 여자들한테는 다 곁을 내주면서 왜 자기 앞에서는 갑자기 멈추는 건지 하지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본인이 여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져서 송문수가 싫어하는 걸까 봐 자연스레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송문수가 잔뜩 실망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너 생리 왔어.”“뭐?”송문수의 말에 깜짝 놀란 하지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송문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속옷에 피 묻어있어, 아마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수치스러움에 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이틀 뒤가 예정일인데 왜 갑자기 오늘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민망해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하마터면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