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이 육민을 데리고 연회장 한 켠으로 걸어갔다.경호원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뒤를 따랐다.작은 도련님이 너무 가까이 가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다.소이연은 육민이 먹을 케이크를 열심히 골랐다.“언니, 어떻게 얘까지 데리고 왔어?”마침 그곳에서 소나은과 문서아가 디저트를 먹고 있었다.겨우 화를 가라앉혔는데 또 소이연과 부딪쳤다.“소나은. 아버지가 오늘 연회에서 무례하게 굴면 안 된다고 당부했잖아. 계속 생트집을 잡는다면 내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겠어.”소나은의 얼굴색이 변하더니 정말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오히려 문서아는 두려워하지 않았다.하지만 갑자기 계지원을 발견하고 벌떡 일어서 다가갔다.문서아가 연회장에 온 목적은 계지원을 만나기 위해서다.계지원은 육씨 산하 그룹 풍향 엔터테인먼트 유명한 감독으로서 지난번 맡은 배역을 교체해 버린 것이다. 일개 감독이 이런 연회에 올 리가 없지만 계지원의 다른 신분은 어르신이 입양한 고아라는 사실. 어려서부터 육 어르신 곁에서 자랐기에 어르신의 신임을 듬뿍 받았다.“계 감독님.”문서아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계지원이 문서아를 보았다.모두 연예계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당연히 알고 있었다.“서아 씨.”계지원이 정중하게 인사했다.“왜 갑자기 배역을 바꾸게 되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문서아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그건 윗선의 결정입니다. 저도 잘 몰라요.”“풍향 엔터테인먼트에 지분이 있지 않아요?”“제 말은 육씨 그룹에서 결정한 겁니다.”계지원이 설명했다.“육씨요?”문서아의 안색이 굳어졌다.“설마 진짜 하도경이 한 짓이야?”문서아가 중얼거렸다.지난번에 하도경을 찾아가 따졌을 때 딱 잡아 아니라고 했었다.“아니면 하도경을 찾아가서 물어보세요.”계지원은 상대하기 귀찮아 뒤쪽을 가리켰다.마침 하도경과 송문수가 연회 입구에서 들어왔다.이 몇몇 사람들은 엄숙한 연회에 참석하는 걸 질색했다. 하지만 오늘은 육현경의 중요한 날이기에 늦게 오긴 했지만 그래도 참석은 했다.
예수진의 거만한 모습에 문서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저 여자는 또 무슨 자격으로 연회에 참가했지?설마 풍향 드라마를 촬영했다고 육 어르신께 춤추고 노래 부르면서 흥을 돋우러 왔나?연예계에서 문서아는 비록 별 볼일 없는 연예인이지만 가문의 영향으로 누구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예수진도 포함해서 말이다.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암묵적으로 거래했으면 오늘 예수진이 이 정도로 유명해졌을까?그러니 날 웃을 자격이 없다.“서아 씨. 자중하세요.”계지원이 끝까지 쪽지를 받지 않고 가버렸다.문서아는 화가 나서 치가 다 떨렸다.오늘 연회에서 열 받은 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것 같았다.한편, 소나은은 감히 문서아에게 다가가지 못했다.자칫하다 문서아가 창피를 당할 때 자신한테 불똥이 튈까 봐 걱정되어 아예 피해버렸다.그때 연회장에 사회자 목소리가 들렸다.생일 연회가 드디어 시작되었다.모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무대를 향해 다가갔다.육민은 케익 두 입만 먹고 누가 데리러 왔다.“여러분 좋은 밤입니다. 전 오늘 연회에서 사회자를 맡은 유문이라 합니다. 바쁘신 와중에 육씨 어르신의 칠순 생일을 잊지 않으시고 축하하러 와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사회자가 격정적이고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말을 했다.“다음으로 오늘 연회의 주인공 육청수 어르신을 모시겠습니다.”연회장 내에 열렬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육청수와 뒤에서 휠체어를 미는 육현경 그리고 얌전한 육민이 무대위에 올라섰다.모든 시선이 그들을 향했다.순간 문서인의 얼굴이 굳어버렸다.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 정도 분위기는 알 수 있었다.“어느덧 일흔 살이 되었습니다. 저도 은퇴할 나이가 왔네요. 오늘 내 생일에 내 손자 육현경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앞으로 현경이 장안에 남게 될 것이니 여러분에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육 어르신은 연세가 있어도 목소리가 우렁차고 힘이 있었다.그 말은 앞으로 육씨 그룹을 육현경에게 맡긴다는 뜻이다.사회자가 마이크를 육현경에게 건넸다.육현경은 기품이 늠름하고 얼굴
이럴 수가!육현경이 이렇게나 잘생겼다고?하지만 그들 눈앞에 서있는 사람은 육현경이 틀림없었다. 소이연과 스캔들이 났던 남자가 육현경이라니!어쩐지 그 여자의 오기가 하늘을 찌른다 했어! 육현경이 직접 그 여자를 육씨 연회장에 요청해서 들어올 수 있었던 거였어. 어쩐지...아니.난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소이연이 장안시에서 가장 높은 신분을 가진 육현경과 스캔들이 났단 사실을 절대 받아 못 들인다고!“와! 육씨 도련님은 우리가 생각하던 배만 나온 중년 아저씨가 아니었어!”그의 외모는 뭇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어머, 너무 잘생겼잖아!”“장안시에서 제일 잘생긴 것 같아.”“너무 의외야.”“그의 아들도 어쩜 이렇게 잘생겼을까. 동화 속 어린 왕자 같아.”육현경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뽐냈다. 연회장은 삽 시에 사람들의 감탄과 칭찬으로 채워졌다.소이연은 사람들 사이에서 키가 훤칠하고 점잖으며 오관이 뚜렷한 이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안정된 목소리로 연설하고 있었는데 태도는 아주 겸손했다. 하지만 그의 압도적인 분위기는 그가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었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짧지만 강렬했던 연설이 끝나자 연회장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청수 할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종래로 웃지 않고 늘 엄숙했는데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함박웃음을 지었다.육현경은 청수 할아버지를 무대 중앙에서부터 모시고 내려와서 휠체어를 청수 할아버지의 비서에게 맡겼다.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문서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문서인의 얼굴은 이미 사과가 되어있었다.육현경이 그를 향해 다가가자 그는 몸 둘 바를 몰랐고 뒷걸음만 쳤다.연회장 안의 사람들은 모두 육현경만 바라보았다.육현경의 신분이 알려진 이상, 그의 언행은 모두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육현경은 문서인 앞에서 멈추었고 그의 키는 문서인보다 훨씬 컸다. 그는 먼저 문서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문씨 도련님. 육현경이라고
“소이연!”문서인은 소이연의 말에 극도로 분노했다.“그렇게 소리치면 더 주목받을 텐데. 더 망신당하고 싶다면 계속해보든지.”소이연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말했다.“너!”문서인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는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속이 울렁거렸고 수치스러운 마음에 그는 연회장을 빠져나왔다.문서인을 바라보던 소이연의 표정이 삽 시에 굳어졌다.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육현경을 발견한 그녀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육현경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에 초대해 주었으니 참가한 것이고 온 김에 민이를 보려 했던 참이었다. 다 만났으니 더 이상 남아있을 필요도 없었다.그녀는 보통 이런 술잔이 오고 가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면 모를까.“소이연 씨.”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명진이었다.“저는 육현경 씨 비서 이명진이라고 합니다. 곧 만나러 오니 기다려 달라고 전하셨습니다.”소이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내가 가려던 건 어떻게 안 거야!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나를 신경도 안 쓸 것 같더니.“전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세요.”이명진을 육현경의 말을 전달한 후 자리를 급히 떠났다.소이연이 거절할까 봐 그랬던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이명진의 말을 듣고 있던 소이연의 표정이 굳어있었다.하지만 소이연은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이때 육민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엄마, 역시 여기 계셨네요. 저랑 같이 있어주려고 그런 거죠?”“그럼.”소이연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가려던 참이었는데 말이다.“엄마, 아빠가 그러는데 연회장 안이 답답하면 뒷문 쪽에 가든으로 가래요. 그네도 있는데 엄마랑 같이 타고 싶어요. 같이 가주세요, 네?”육민은 기쁨에 젖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육민은 소이연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갔다.그들 앞으로 걸어오던 웨이터가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들고 있던 와인잔과 샴페인이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떨어졌다.소이연은 재빨리 육민을
소이연은 인상을 찌푸렸다.소이연이 어쩔 수 없이 연회장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문서아는 기고만장해서 뒤돌아갔다.그런데 이때.“지지직!”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문서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녀는 탑 브라 디자인인 드레스를 입었는데 찢어지는 바람에 살색의 가슴 패드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았기에 그녀는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곁에 있던 소나은도 식겁했지만 문서아를 가려주지 않았다. 쳐다만 보다가 그녀와 좀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문서아는 자신의 가슴을 막고는 육민을 노려보았다.문서아의 치마 자락 끝에는 깨끗하고 윤기도는 작은 구두가 있었다. 육민이 저지른 것이다.그는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아줌마, 설마 어린 저한테 배상하라고 하시는 건 아니죠? 저 이제 여섯 살밖에 안되었는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화가 치밀어 오른 문서아는 목까지 빨개졌다.이 애새끼가 날 골탕을 먹이려고 내가 했던 말을 반복해?육현경의 아들이 아니었으면 오늘이 네 제삿날이었을 거야.“아줌마, 드레스가 다 찢어졌는데 연회장에 계속 남아있는 건 실례 아닌가요? 저의 할아버지와 아빠한테 실례인 것 같은데요.”육민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면서 순진무구하게 말했다.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역시 유전자의 힘인가?여섯 살짜리 애가 이렇게 잘 대처할 줄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야. 정말 똑똑하다니깐.복수를 할 생각도 없었는데 속이 시원하다!“아!”문서아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못 이겨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어린애한테도 질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문덕수와 임지효는 딸의 고함소리에 제꺽 달려왔다. 딸의 처참한 행색에 두 사람의 낯빛은 어두워졌다.문덕수는 정장 외투를 벗어 문서아한테 걸쳐주었고 그로 하여 더 이상의 노출을 막을 수 있었다.“아빠, 쟤가 저의 드레스를 일부러 밟았어요. 흑.”문덕수를 본 문서아는 목놓아 울었다.문덕수와 눈이 마주친 육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서아는 제자리에 얼어있었다. 육현경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적잖게 놀란 모습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소리를 질렀다.“육현경 씨, 소이연이 뭐 좋은 여자인 줄 아나 본데요. 금방 귀국해서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이 년이 얼마나 남자를 후리고 다녔는지 모르죠? 알아주는 걸레라고요! 18살 때부터 걸레라고 소문이 자자했고 아니나 다를까 아빠도 없는 애를 임신했어요. 지금도 봐봐요. 저의 오빠랑 헤어지지도 않았으면서 현경 씨한테 꼬리치는 것 좀 봐요! 이 년한테 속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저 여자가 소이연이었어. 육 씨 도련님을 어떻게 꼬셨기에... 대단하네요.”“입고 있는 드레스만 17억이라잖아요. 꼬시려고 애쓴 게 티 나네요. 이런 큰돈을...”“육 씨 작은 도련님이 소이연이라는 여자한테 엄마라고 하던데. 설마 저 여자 육씨 작은 도련님 마음부터 사로잡은 게 아닐까요?”“보통 여자가 아닌 건 확실하군요.”문서아는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입꼬리를 올렸다.소이연, 기분이 어때? 육현경 씨 앞에서 정체가 폭로된 기분 말이야.현경 씨가 소이연 너 같은 여자와 더 엮이고 싶을까? 그럴 리가!소이연 너, 절대 육현경 씨랑 잘될 수 없어. 절대 용납 못해!“소이연 씨는 18살에 안 좋은 일을 겪어서 임신했을 뿐입니다. 이 일은 이연 씨 인생에서 가장 아픈 상처이자 트라우마이지 오점이 아닙니다. 그녀의 아픈 과거를 안아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처럼 조롱하고 상처를 들추기 보단요!”육현경의 차가운 목소리는 모두에게 경고하는 것 같았지만 소이연에 대한 애정이 묻어있었다.“현경 씨는 이 년한테 속은 거예요! 이 여자는 걸레...”문서아는 되려 흥분해서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지금 이 순간부터 제 귀에 소이연 씨에 관한 조롱이거나 험담이 들린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것은 결국 저를 손가락질하는 것과 같으니깐요. 제가 무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
“미안해요.”문서아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오늘 느낀 수치심은 한평생 잊기 힘들 것이다.“괜찮아.”소이연은 더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는데 그 모습은 사람들에게 대인배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문서아는 그녀의 모습에 더더욱 괴로워했다.문덕수는 문서아가 사과한 뒤 육현경에게 물었다.“육 씨 도련님, 저희 이만 가봐도 될까요?”“앞으로 이런 일은 없도록 하세요.”“네! 제가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문덕수는 문서아를 끌어당기더니 초라한 뒷모습만 남기고 떠났다.그들이 떠난 후, 연회장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하지만 육현경과 소이연을 지켜보는 눈길은 여전히 존재했다.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두 사람이 어떻게 진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오늘 좀 바빠서요. 좀만 기다려 줘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저 혼자 가도 되는걸요...”“기다려 줘요.”육현경은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그의 말에는 거절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자상한데 박력 넘치기까지 한 이 남자를 어쩌면 좋아...“민아, 엄마 곁에 꼭 붙어있어.”육현경은 아들에게 당부했다.“네! 맡겨만 주세요!”육민은 차렷 자세를 하고서 대답했다.육현경은 만족한단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났다.소이연은 걸음을 재촉하는 육현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사색에 잠겼다.그렇게 바쁜데도 나 때문에 와준 거라고?감동이긴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엄마, 그네 타러 가요.”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육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민아, 아까는 고마웠어.”“괜찮아요, 엄마. 아빠가 그러셨어요. 남자라면 엄마를 보호해 줘야 된다고요.”육민은 앳된 목소리로 당차게 말했다.그 바람에 소이연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내렸다.그녀는 육민의 고사리 같은 손을 쥐고는 연회장을 나섰다.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소나은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여유롭고
“계 감독님, 오랜만에 뵙네요.”소이연이 먼저 잔을 들었다.“이연 씨는 위도 안 좋으시니 적당히 즐기시는 게 좋겠어요.”계지원도 함께 잔을 들었다.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친한 사이가 아니라 그런지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현경이 말이에요.”계지원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참 괜찮은 애에요.”현경? 아, 육현경.소이연은 그제야 계지원이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았다.계지원은 청수 할아버지의 양아들이라 육현경과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소이연은 육현경에 대해 말하기 싫었기에 대꾸하지 않았다.“늦었으니 먼저 가볼게요.”계지원은 와인잔을 우아하게 내려놓았다.청수 할아버지도 댁으로 돌아가셨고 육현경만이 연회장에 온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조심히 들어가세요.”소이연은 미소를 지었고 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어 보였다.계지원 이 남자는 이름이 주는 느낌만큼이나 젠틀하고 지성미가 넘쳐나는 사람이기에 쉽게 호감을 사는 유형이었다.계지원이 떠난 후, 하도경과 송문수도 집으로 돌아갔다. 연회장을 나서기 전에 모두 소이연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소이연은 못 본 척 했다.아직도 육현경 이 인간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취기가 올라서 힘든데...이때 그녀는 마침 육현경이 가든으로 가는 것을 보았지만 따라가지는 않았다.가든.“예수진.”육현경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예수진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이거 놔.”“어디에 있었던 거야? 전화도 안 받고.”“신경 꺼.”예수진은 육현경의 손을 뿌리쳤다.“비서 차에 타고 집으로 가.”육현경은 어린애를 달래듯 말했다.예수진은 인상을 찌푸렸다.“싫어. 이 시간에 집 가는 사람이 어딨어? 좀 있다 친구랑 약속 있어.”“몇 시인데 친구를 만나? 이 늦은 밤에 약속이라고?”“21세기 사람 맞아? 11시밖에 안되었는데 뭐라는 거야.”“너 내일 촬영 있어.”“알아. 제시간에 도착...”“명진아.”육현경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
예수진:[그럼 너랑 지수 다 서울에 있는 거야? 아직 병원이야?]예수진:[부모님은 좀 어떠셔? 충격이 크시지?]그들의 문자에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송문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누구한테 일어나도 참혹한 비극인데 그 일이 제 형한테 일어났으니 송문수는 어떻게 송승우를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근심 속에서 밤이 깊어지자 하지수가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자?][아니.][병원에서 잘 수 있으면 어디서 눈이라도 좀 붙여. 문수 씨도 쉬어야지,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티시면 남은 건 당신뿐이야.][알아 나도. 넌 왜 아직 안 자? 시간 늦었는데.][당신이 걱정돼서.][뭐하러 날 걱정해, 난 괜찮아. 송승우가 문제지...]그의 문자에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하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송문수도 그만 대화를 끝내려 했다.[늦었으니까 얼른 자.][응.][나 대신 부모님 좀 잘 챙겨줘, 엄마 아빠 쓰러질까 봐 나 너무 무서워.][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핸드폰을 내려놓은 송문수는 중환자실 앞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중환자실에서 나온 송승우가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병원에서 VIP 병실을 열어줬지만 송문수는 그 편한 곳도 마다하고 굳이 송승우 옆을 지키고 있었다.아무리 송승우라 해도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 봐.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아침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던 송문수는 간호사의 친절한 부름에 서서히 눈을 떴다.“보호자분?”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몸을 일으킨 송문수는 의아한 눈으로 간호사를 바라보았다.“환자분이 보호자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송승우 씨가요?”중환자실을 가리키며 당황한 듯 묻는 송문수를 향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송문수 씨가 중환자실로 와줬으면 하세요.”“면회 안된다면서요?”“좀 전에 선생님이 또 몸 상태 체크하셨는데 이젠 다 정상수치로 돌아와서 면회 가능하시대요. 대신 시간만 좀 주의해주세요. 아직 몸이 약하셔서 이럴 때는 저희도 환자분 부탁이라면 뭐든 다
시부모님의 몸 상태를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하지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송기명은 더욱이 쓰러진 지 얼마 안 된 터라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다가는 정말 큰 일이 날 것 같았다.“아버님, 어머님, 여긴 문수 씨한테 맡기도 우린 먼저 호텔에 가 있어요.”하지수의 거듭되는 권유에 송기명과 허영지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송문수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알겠다니까요. 걱정 마시고 가세요. 제가 입구까지 모셔다드릴게요.”송기명과 허영지를 차에 태운 송문수는 조수석에 앉은 하지수를 바라보았다.모든 감정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녀도 송문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의 눈엔 미련이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방향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송문수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중환자실 복도에 앉은 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리고 핸드폰을 켜보았다.역시나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그의 알림창을 꽉 채우고 있었다.다른 문자는 싹 다 무시한 송문수는 친구들과의 방, 그리고 소이연, 예수진이 함께 있는 단톡방, 이렇게 두 곳에만 답장을 했다.육현경:[대체 무슨 일이야?]계지원:[문수야, 너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아저씨 생신 파티는 왜 취소하는 거야?]하도경:[말 좀 해봐, 전화도 안 받고. 이러다가 다들 답답해 죽겠어,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또 다른 단톡방에 있던 소이연과 예수진 역시 걱정스러운 문자를 보내왔다.소이연:[문수 씨, 무슨 일 있는 거죠?]예수진:[송문수, 답장 안 해? 기사 보니까 아줌마 안색도 엄청 안 좋던데 무슨 일이 나긴 난 거지?]예수진:[말 좀 하라고 이 자식아!]소이연:[수진 씨 진정해요 일단. 문수 씨랑 지수 씨가 바빠서 답장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급한 일 다 보고 나면 우리한테도 알려줄 거에요.]예수진:[알겠어요, 기다려봐야죠 뭐.]자신의 화면을 가득 채운 문자를 보던 송문수는 손가락을 움직여
송문수가 사 온 물을 건네도 부모님은 고개만 저으며 손을 모으셨다.그래서 하지수에게 건네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을 받아들었다.서울에 온 뒤 송씨 일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줄곧 자리를 지키며 송승우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송승우가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는 받아든 물이라 몇 모금 마시기는 했지만 물을 마시면서도 신경은 온통 송승우에게 쏠려있었다.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송승우의 몸을 보게 되었다.너무 아파서인지 아니면 힘이 없어서인지 몸은 미세한 떨림 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송승우의 눈이 서서히 떠지고 있어 하지수는 잔뜩 흥분한 채 외쳤다.“승우 오빠 일어났어요!”“문수, 문수야! 얼른 의사 불러와!”하지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부모님이 송문수에게 의사를 데려오라 했고 송문수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의사는 중환자실에서 각종 검사를 진행했다.방음효과가 워낙 좋은 중환자실이라 의사와 송승우의 대화를 듣지 못했던 가족들은 또다시 초조해 났다.한참이나 지나서 중환자실 빠져나오는 의사에 허영지가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아들은 좀 어떤가요?”“방금 검사 진행했는데 생명엔 아무 지장 없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하지만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여기서 며칠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일반병실로 옮겼다가 세균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거든요.”“알겠습니다, 입원은 며칠 하든 상관없으니까 저희 애 잘만 치료해주세요. 그런데 저희가 들어가서 같이 있어 주는 건 괜찮을까요?”“아직은 들어가지 마세요. 환자분도 방금 깨어나셔서 머리가 어지러울 겁니다. 오늘은 그냥 쉬게 놔두시고 내일 상태 좀 나아지면 그때 들어가 보시게 도와드릴게요.”“감사합니다 선생님!”“아닙니다.”감격 어린 허영지의 말에 의사가 한마디 더 보탰다.“환자가 아직은 본인 몸 상태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면회하실 때도 다리 절단한 사실은 일단 말하지 마세요. 환자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그 말에 허영지는 대성통곡을 했고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끄떡없던 송기명마저 아들 일에 눈물을 보였다.평소에 사이는 안 좋았지만 그래도 친형이었기에 송문수도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고 하지수 역시 송승우가 다리를 잃는다는 말에 눈물을 떨어뜨렸다.상황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는데.어릴 때부터 본인 잘난 멋에 살던 사람이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되려 죽겠다고 난리를 칠 것 같아 하지수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하지만 목숨이 다리 한쪽보다는 더 중요했기에 결국 사인을 한 송기명은 온몸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기분 좋게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인 줄로만 알았는데 갑작스레 닥친 비극에 송문수도 아버지를 부축하며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그 뒤로도 한참 동안 이어지는 수술에 다들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고요한 복도에 갑자기 인기척이 들리더니 수술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걸어 나왔다.가족들 못지않게 속을 태우던 장지석은 피곤한 듯 마스크를 벗는 의사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가 물었다.“승우는 좀 어떻습니까?”그제야 가족들도 정신을 차리고 하지수와 송문수가 어머니 아버지를 부축한 채 의사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다른 말보다 먼저 나온 게 의사의 한숨이라 허영지는 쓰러질뻔한 걸 간신히 버텨내며 물었다.“왜 그래요 선생님, 우리 아들 잘못된 거 아니죠?!”“생명엔 지장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런데...”“그런 데라뇨!”“환자분이 다리를 잃었으니 깨어나시고 나서도 정서적으로 많이 불안정할 겁니다. 가족분들도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게 좋습니다. 오른쪽 다리 외에도 몸 각 부위가 다 강한 충격을 받아서 일단은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의식 돌아오고 모든 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오면 그때 일반병실로 옮길 겁니다.”의사의 말에 허영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고 송기명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지금 그들은 전부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있었다.그들도 송승우가 다리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
만약 하지수가 송승우의 교통사고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제가 그런 하지수를 제대로 바라볼 수나 있을지 송문수는 지금 모든 게 미지수였다.송승우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그를 정말 친오빠처럼 생각했던 하지수는 역시나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채 당황스러워하며 물었다.“서울 가장 좋은 병원에 입원해 있대.”“나 서울 가야겠어.”“그래요 여보.”마침내 정신을 차린 허영지가 입을 열자 송기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갈 거면 다 같이 가야죠. 오늘 파티는 일다 취소하죠.”부모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송문수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파티장 취소할 테니까 지수 너는 서울 가는 티켓이랑 차량 좀 준비해줘.”“알겠어.”이미 혼이 반쯤 나간 부모님을 모시려면 본인이라도 정신을 차려야 했기에 하지수는 바로 기사에게 연락하며 공항까지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그리고는 한 시간 뒤에 출발인 항공편까지 끊어놓았다.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송문수는 서둘러 파티를 취소하고 있었는데 직원을 시켜 손님들께 나중에 아버지와 직접 찾아뵙고 취소이유를 말씀드리고 사과까지 드린다는 말도 전하게 했다.공항에 도착한 뒤에도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송문수는 여러 가지 일을 지시하느라 바삐 돌아치고 있었는데 그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침착하고 차분했다.하지만 다들 송승우를 걱정하고 있어서 확 달라진 송문수에게 주의를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1시간이 넘는 비행을 마치고 서울공항에 내린 송씨 일가는 바로 대기 중이던 차를 타고 서울 대학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하자 이미 나와 있던 송승우의 동료가 그들을 맞아주었다.“아주머니, 아저씨 오셨어요? 저는 승우 형 직장 동료 이찬혁이라고 합니다. 형은 안에서 수술 중이에요.”“우리 아들 많이 심한가요 지금?”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걱정을 멈출 수 없었던 송기명이 이찬혁을 붙잡고 묻자 그는 최대한 말을 아꼈다.“저도 좀 전에 연락받고 온 거라 상태가 어떤지는 정확히 몰라요. 형이 실려 올 때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니까 아마도...”
문자를 본 허영지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지자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기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사모님, 무슨 일이라도 난 겁니까? 왜 그러십니까?”특종을 잡은 것마냥 달려드는 기자들에 송씨 일가 사람들도 다 같이 허영지를 주목했다.안색이 눈에 띄게 창백해진 그를 보며 송기명이 물었다.“여보, 왜 그래요?”아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시울만 붉히고 있자 조급해 난 송기명이 다시 한번 물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요?”“엄마, 무슨 일 있어요?”남편에 이어 아들까지 긴장한 채로 물어왔지만 허영지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을 후두둑 떨어뜨리기 시작했다.그에 미간을 찌푸린 송문수는 아직 켜져 있는 엄마의 핸드폰을 가져와 문자를 확인했는데 그 역시 문자를 보자마자 표정을 굳혔다.“송 대표님, 무슨 일입니까? 핸드폰으로 뭘 봤길래 사모님이 저러시는 겁니까?”기자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그는 바로 허영지의 핸드폰을 들고 기자회견장을 벗어났다.“대표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무슨 일인지 한 말씀 해주세요!”하지만 그런 무시에도 굴하지 않는 기자들이 송문수를 따라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경호원들이 몸을 던져 그들을 막기 시작했다.송문수의 표정으로부터 심상치 않은 일임을 알아챈 하지수도 입술을 말아 물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가 복도로 나오자 송문수는 이미 통화 중이었는데 통화가 거듭될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송문수의 표정이 저 정도로 굳어있다는 건 무언가 큰일이 났다는 뜻이었다.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도 본 적 없던 표정이라 하지수는 자연스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음주운전으로 잡혀갈 때도 침착하기만 하던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 때문에 저러는지 하지수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한참 동안 통화를 하다 전화를 끊은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문 채 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하지수에게로 다가갔다.밖으로 나온 허영지와 송기명도 그저 장난 전화이길 바라며 송문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는 가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
“오해 아닙니다, 전에는 저 그런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변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송 회장님의 입원 때문입니까?”“제 우상이시던 아버지가 쓰러지신 것도 하나의 이유죠. 제 눈에 아버지는 늘 이 집안을 지키는 영웅이셨고 절대 늙지도 않을 것 같던 분이셨는데 갑자기 아프다고 하시니까 그때 이 집안을 책임질 사람은 저뿐이더라고요.”이젠 다 커서 자신의 고초도 이해해주는 어엿한 아들을 보며 송기명은 아주 감동스러워했다.“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제 아내인 하지수 씨입니다.”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모든 카메라도 그녀에게 집중되었다.갑작스러운 이목에 놀랄 새도 없이 송문수는 말을 이어나갔다.“제 아내가 저를 많이 도와줬어요. 회사를 지키기 위해 같이 밤을 새우면서도 불평불만 한마디 없었던 사람입니다. 성격 안 좋은 저를 보듬어주고 격려해주면서 제가 일에 집중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줬어요. 그래서 저는 제 아내한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저를 언급하며 고맙다고 하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심장은 아주 빠르게 뛰고 있었다.“소문에 의하면 두 분 사이가 좋지 않아서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하던데, 진짭니까?”“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저희 사이좋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철이 없어서 아내한테 상처 주는 일도 많이 해서 사이가 위태로웠겠지만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지금 혹시 사모님한테 고백하시는 겁니까?”기자의 능청스러운 질문에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을 붉히는 송문수를 보며 다들 제 눈을 의심했다.파파라치한테 찍힐 때도 이미지 따위는 신경도 안 쓰고 욕설을 퍼부으며 주먹까지 휘두르던 사람이 언제 이렇게 쑥스러움이 많아졌나 싶어 다들 당황해하고 있는데 하지수는 그의 모습을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면 그간의 이상하던 태도와 관계를 피했던 이유도 더 이상은 따지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송승우 씨는 왜 오지 않으신 겁니까, 오늘은 불참하시나요?”“두 분은
화장을 마치고 머메이드 드레스로 갈아입은 하지수는 불빛 아래에서 더 반짝이는 드레스를 보며 아무래도 자신이 허영지를 가리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시 한번 송문수를 불러보았다.“문수 씨, 이게 진짜 괜찮다고?”정말 아닌 것 같아서 한 질문이었지만 송문수는 역시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걱정 마, 이거 네 거 맞다니까.”“진짜 어머님이 준비하신 거 맞지?”“너 나 안 믿을 거야?”송문수가 목소리를 깔며 말하자 하지수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 입을게.”정말 허영지의 뜻이라면 하지수도 걱정할 게 없었다.사실 평소 하지수에게 검소하다는 말을 자주 하던 허영지였기에 그녀가 이런 드레스를 준비했다 해도 이상할 건 전혀 없었다.이번 기회에 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시어머니의 마음인가보다 하며 하지수는 나갈 준비를 마쳤다.“가자 이제.”“엄마가 인터뷰 있다고 빨리 오래. 사진도 찍어야 한대.”“그래.”차에 탄 뒤에도 송문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리를 덜덜 떨며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했다.평소와는 다른 모습에 하지수가 그를 부르자 송문수는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문수 씨.”“어?”“더워?”에어컨을 틀어 시원한 차 안에서도 땀을 흘리는 게 이상해서 한 질문인데 송문수는 연신 고개를 저으며 강하게 부정했다.“아니.”“땀 나는데?”“그래?”제 이마에 묻은 땀을 훔치던 송문수가 또 말을 바꾸자 하지수는 그를 수상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좀 더운 것 같기도 해.”“오늘 왜 이래? 당신 좀 이상한 것 같아.”“아무것도 아니야.”송문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쉽게 넘어갈 하지수가 아니었다.“어디 아파?”“그럴 리가, 나 소처럼 건강한 남자야, 병도 잘 안 걸린다고.”“...”누가 봐도 오바하는 것 같았지만 사정이 있겠지 싶어 하지수도 더는 묻지 않았다.그들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도 이른 시간이었지만 매체들에서는 더 빨리 와 있었기에 기자들과 송기명, 허영지 모두 그들 부
아침 일찍 디자이너를 불러 단장을 마친 송기명과 허영지는 나이 들면 가만히 잊지 못한다는 말이 맞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른 시간부터 호텔로 향했다.그리고는 아들이 아닌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었다.어차피 송문수는 전화를 잘 받지 않으니 그들은 무슨 일이 생기면 하지수에게 연락을 하는 것이 이미 습관처럼 몸에 배 있었다.좀 전에 일어나서 스타일링을 받고 있던 하지수는 시부모님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다급히 통화버튼을 눌렀다.“네, 저희 일어났어요. 문수 씨는 씻고 있고 저는 화장하고 있어요.”“네, 먼저가 계시면 저희도 금방 갈게요. 8시 전엔 도착할 거에요.”통화를 마친 하지수는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너무 과한 게 아닌가 싶었다.본인이 주인공도 아닌데 화장이 너무 화려한 것 같았다.게다가 원래는 송문수와 커플룩으로 어머니께서 맞춰주신 복고풍 드레스를 입기로 했으니 어찌저찌 의상을 수정하다 보니 오늘 입어야 할 건 민소매인 머메이드 드레스가 되어버렸다.예쁘긴 예쁘지만 꾸민 티가 너무 많이 나서 고민됐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불렀다.“문수 씨, 나 진짜 이거 입어? 이거 어머니가 골라주신 것도 아닌데...”오늘 아침은 하지수보다도 더 빨리 일어난 송문수는 아까부터 소파에 앉아있었다.그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 알람 소리에 눈을 뜬 하지수는 제 옆에 없는 송문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었다.출근할 때도 알람이 몇 번이나 울려서야 화를 내며 일어내던 사람이 오늘은 웬일인가 싶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60세 생일파티라 신경을 쓰는 건가 싶어 하지수도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았었다.“뭐라고?”그런데 제가 한참 불러서야 모습을 드러낸 송문수가 혼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덜덜 떨고 있자 하지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당신 오늘 뭐 발언이라도 할 거야?”“아니, 왜?”“그런데 왜 이렇게 긴장해?”“내, 내가? 아, 아니야! 그럴 리가!”“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래!”송문수는 말까지 더듬으며 손사래를 쳤고 하지수는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