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문서인은 소이연의 말에 극도로 분노했다.“그렇게 소리치면 더 주목받을 텐데. 더 망신당하고 싶다면 계속해보든지.”소이연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말했다.“너!”문서인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는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속이 울렁거렸고 수치스러운 마음에 그는 연회장을 빠져나왔다.문서인을 바라보던 소이연의 표정이 삽 시에 굳어졌다.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육현경을 발견한 그녀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육현경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무대에 초대해 주었으니 참가한 것이고 온 김에 민이를 보려 했던 참이었다. 다 만났으니 더 이상 남아있을 필요도 없었다.그녀는 보통 이런 술잔이 오고 가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는다. 꼭 참석해야 하는 자리면 모를까.“소이연 씨.”갑자기 그녀 앞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명진이었다.“저는 육현경 씨 비서 이명진이라고 합니다. 곧 만나러 오니 기다려 달라고 전하셨습니다.”소이연은 인상을 찌푸렸다.내가 가려던 건 어떻게 안 거야!사람들한테 둘러싸여서 나를 신경도 안 쓸 것 같더니.“전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편하신 대로 하세요.”이명진을 육현경의 말을 전달한 후 자리를 급히 떠났다.소이연이 거절할까 봐 그랬던 것이다.그도 그럴 것이 이명진의 말을 듣고 있던 소이연의 표정이 굳어있었다.하지만 소이연은 결국 기다리기로 했다.이때 육민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엄마, 역시 여기 계셨네요. 저랑 같이 있어주려고 그런 거죠?”“그럼.”소이연은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가려던 참이었는데 말이다.“엄마, 아빠가 그러는데 연회장 안이 답답하면 뒷문 쪽에 가든으로 가래요. 그네도 있는데 엄마랑 같이 타고 싶어요. 같이 가주세요, 네?”육민은 기쁨에 젖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육민은 소이연의 손을 꼭 잡고 걸어갔다.그들 앞으로 걸어오던 웨이터가 발을 삐끗하는 바람에 들고 있던 와인잔과 샴페인이 위태롭게 흔들리다가 떨어졌다.소이연은 재빨리 육민을
소이연은 인상을 찌푸렸다.소이연이 어쩔 수 없이 연회장에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문서아는 기고만장해서 뒤돌아갔다.그런데 이때.“지지직!”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문서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랐다.그녀는 탑 브라 디자인인 드레스를 입었는데 찢어지는 바람에 살색의 가슴 패드가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았기에 그녀는 수치스러울 수밖에 없었다.곁에 있던 소나은도 식겁했지만 문서아를 가려주지 않았다. 쳐다만 보다가 그녀와 좀 떨어진 곳으로 물러났다.문서아는 자신의 가슴을 막고는 육민을 노려보았다.문서아의 치마 자락 끝에는 깨끗하고 윤기도는 작은 구두가 있었다. 육민이 저지른 것이다.그는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아줌마, 설마 어린 저한테 배상하라고 하시는 건 아니죠? 저 이제 여섯 살밖에 안되었는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화가 치밀어 오른 문서아는 목까지 빨개졌다.이 애새끼가 날 골탕을 먹이려고 내가 했던 말을 반복해?육현경의 아들이 아니었으면 오늘이 네 제삿날이었을 거야.“아줌마, 드레스가 다 찢어졌는데 연회장에 계속 남아있는 건 실례 아닌가요? 저의 할아버지와 아빠한테 실례인 것 같은데요.”육민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면서 순진무구하게 말했다.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었다.역시 유전자의 힘인가?여섯 살짜리 애가 이렇게 잘 대처할 줄은...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야. 정말 똑똑하다니깐.복수를 할 생각도 없었는데 속이 시원하다!“아!”문서아는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못 이겨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다.어린애한테도 질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문덕수와 임지효는 딸의 고함소리에 제꺽 달려왔다. 딸의 처참한 행색에 두 사람의 낯빛은 어두워졌다.문덕수는 정장 외투를 벗어 문서아한테 걸쳐주었고 그로 하여 더 이상의 노출을 막을 수 있었다.“아빠, 쟤가 저의 드레스를 일부러 밟았어요. 흑.”문덕수를 본 문서아는 목놓아 울었다.문덕수와 눈이 마주친 육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서아는 제자리에 얼어있었다. 육현경의 강압적인 분위기에 적잖게 놀란 모습이었다.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소리를 질렀다.“육현경 씨, 소이연이 뭐 좋은 여자인 줄 아나 본데요. 금방 귀국해서 잘 모르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이 년이 얼마나 남자를 후리고 다녔는지 모르죠? 알아주는 걸레라고요! 18살 때부터 걸레라고 소문이 자자했고 아니나 다를까 아빠도 없는 애를 임신했어요. 지금도 봐봐요. 저의 오빠랑 헤어지지도 않았으면서 현경 씨한테 꼬리치는 것 좀 봐요! 이 년한테 속지 마세요!”그녀의 말에 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저 여자가 소이연이었어. 육 씨 도련님을 어떻게 꼬셨기에... 대단하네요.”“입고 있는 드레스만 17억이라잖아요. 꼬시려고 애쓴 게 티 나네요. 이런 큰돈을...”“육 씨 작은 도련님이 소이연이라는 여자한테 엄마라고 하던데. 설마 저 여자 육씨 작은 도련님 마음부터 사로잡은 게 아닐까요?”“보통 여자가 아닌 건 확실하군요.”문서아는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입꼬리를 올렸다.소이연, 기분이 어때? 육현경 씨 앞에서 정체가 폭로된 기분 말이야.현경 씨가 소이연 너 같은 여자와 더 엮이고 싶을까? 그럴 리가!소이연 너, 절대 육현경 씨랑 잘될 수 없어. 절대 용납 못해!“소이연 씨는 18살에 안 좋은 일을 겪어서 임신했을 뿐입니다. 이 일은 이연 씨 인생에서 가장 아픈 상처이자 트라우마이지 오점이 아닙니다. 그녀의 아픈 과거를 안아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처럼 조롱하고 상처를 들추기 보단요!”육현경의 차가운 목소리는 모두에게 경고하는 것 같았지만 소이연에 대한 애정이 묻어있었다.“현경 씨는 이 년한테 속은 거예요! 이 여자는 걸레...”문서아는 되려 흥분해서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지금 이 순간부터 제 귀에 소이연 씨에 관한 조롱이거나 험담이 들린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그녀를 손가락질하는 것은 결국 저를 손가락질하는 것과 같으니깐요. 제가 무례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
“미안해요.”문서아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오늘 느낀 수치심은 한평생 잊기 힘들 것이다.“괜찮아.”소이연은 더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는데 그 모습은 사람들에게 대인배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문서아는 그녀의 모습에 더더욱 괴로워했다.문덕수는 문서아가 사과한 뒤 육현경에게 물었다.“육 씨 도련님, 저희 이만 가봐도 될까요?”“앞으로 이런 일은 없도록 하세요.”“네! 제가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문덕수는 문서아를 끌어당기더니 초라한 뒷모습만 남기고 떠났다.그들이 떠난 후, 연회장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하지만 육현경과 소이연을 지켜보는 눈길은 여전히 존재했다.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두 사람이 어떻게 진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오늘 좀 바빠서요. 좀만 기다려 줘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저 혼자 가도 되는걸요...”“기다려 줘요.”육현경은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그의 말에는 거절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자상한데 박력 넘치기까지 한 이 남자를 어쩌면 좋아...“민아, 엄마 곁에 꼭 붙어있어.”육현경은 아들에게 당부했다.“네! 맡겨만 주세요!”육민은 차렷 자세를 하고서 대답했다.육현경은 만족한단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났다.소이연은 걸음을 재촉하는 육현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사색에 잠겼다.그렇게 바쁜데도 나 때문에 와준 거라고?감동이긴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엄마, 그네 타러 가요.”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육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민아, 아까는 고마웠어.”“괜찮아요, 엄마. 아빠가 그러셨어요. 남자라면 엄마를 보호해 줘야 된다고요.”육민은 앳된 목소리로 당차게 말했다.그 바람에 소이연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내렸다.그녀는 육민의 고사리 같은 손을 쥐고는 연회장을 나섰다.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소나은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여유롭고
“계 감독님, 오랜만에 뵙네요.”소이연이 먼저 잔을 들었다.“이연 씨는 위도 안 좋으시니 적당히 즐기시는 게 좋겠어요.”계지원도 함께 잔을 들었다.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친한 사이가 아니라 그런지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현경이 말이에요.”계지원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참 괜찮은 애에요.”현경? 아, 육현경.소이연은 그제야 계지원이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았다.계지원은 청수 할아버지의 양아들이라 육현경과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소이연은 육현경에 대해 말하기 싫었기에 대꾸하지 않았다.“늦었으니 먼저 가볼게요.”계지원은 와인잔을 우아하게 내려놓았다.청수 할아버지도 댁으로 돌아가셨고 육현경만이 연회장에 온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조심히 들어가세요.”소이연은 미소를 지었고 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어 보였다.계지원 이 남자는 이름이 주는 느낌만큼이나 젠틀하고 지성미가 넘쳐나는 사람이기에 쉽게 호감을 사는 유형이었다.계지원이 떠난 후, 하도경과 송문수도 집으로 돌아갔다. 연회장을 나서기 전에 모두 소이연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소이연은 못 본 척 했다.아직도 육현경 이 인간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취기가 올라서 힘든데...이때 그녀는 마침 육현경이 가든으로 가는 것을 보았지만 따라가지는 않았다.가든.“예수진.”육현경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예수진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이거 놔.”“어디에 있었던 거야? 전화도 안 받고.”“신경 꺼.”예수진은 육현경의 손을 뿌리쳤다.“비서 차에 타고 집으로 가.”육현경은 어린애를 달래듯 말했다.예수진은 인상을 찌푸렸다.“싫어. 이 시간에 집 가는 사람이 어딨어? 좀 있다 친구랑 약속 있어.”“몇 시인데 친구를 만나? 이 늦은 밤에 약속이라고?”“21세기 사람 맞아? 11시밖에 안되었는데 뭐라는 거야.”“너 내일 촬영 있어.”“알아. 제시간에 도착...”“명진아.”육현경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
소이연과 육현경은 거리를 둔 채 걷고 있었다.선남선녀라 그런지 뒷모습도 보기 좋았다.그들의 외모는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모두 소이연과 육현경이 연인일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차 안.소이연은 머리가 어지러웠다.아, 너무 많이 마셨나 봐...그녀는 다른 때와 달리 과음했다. 문서인과 사귀고 있을 때 그리고 문 씨 그룹에 출근할 때는 이런 적이 없었다.그런데 오늘 밤은...오늘 밤은 감성에 취해있었던 것 같다.나는 내가 다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마저도 내 착각이었지. 날 비판하는 목소리가 하나 둘 들려올 때마다 흔들리는 내 모습이 싫어.그녀가 사색에 잠긴 사이,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육현경은 차창에 기대 곤히 잠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 그리고 아기 같은 숨소리.육현경은 차에서 내려 소이연을 안았다.소이연은 불편함을 느꼈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이 풀린 탓에 인상만 찌푸릴 뿐, 반항은 하지 못했다.“비밀번호 뭐예요?”육현경은 그녀를 안고서 물었다. 섹시한 중저음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소이연은 기분 탓인지 아니면 취해서인지 몸을 가눌 수 없었다.“제 생일...”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도어록이 열렸다.“문이 열렸습니다.”도어록의 알림음과 함께 육현경은 문을 열어 그녀와 함께 들어갔다.신발 수납장에는 두 켤레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육현경은 저도 몰래 미소를 지었고 남성용 슬리퍼를 꺼내 신고 소이연의 집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푹신한 침대에 누운 소이연은 불편한 듯 끙끙거렸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육현경의 정장 외투와 몸에 딱 맞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육현경은 그녀가 신고 있는 하이힐을 벗겨주었다.뽀얀 속살과 함께 드러난 것은 발목에 난 상처였다. 하이힐을 신어서 껍질이 벗겨진 것이다.육현경은 일어나서 소이연이 걸친 검은색의 정장 외투를 벗겼으나 몸에 딱 붙는 드레스에 손을 낼 엄두가 나지 않아서인지
“제가 너무 늦었죠.”육현경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중저음 목소리에는 그녀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었다.소이연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딱 좋아요.”모든 것이 딱 좋았다.육현경의 심장이 더 거칠게 뛰었다. 소이연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그는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볼을 쓰담아주었고 눈물을 닦아주었다.소이연의 몸이 조금씩 달아올랐다.두 사람의 시선이 한곳에서 엉켰다.묘한 기류 속에서 무언가가 불타고 있었다...육현경은 소이연에게로 다가갔고 그녀는 싫지 않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남녀, 한 공간 그리고 늦은 시간.숨겨왔던 감정이 불타올라 엉키는 지금.육현경은 소이연의 부드럽고 윤기 있는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려 했다.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볼 뽀뽀가 되긴 했지만 육현경의 뜨거운 눈빛은 오로지 소이연에게로 향했다.“미안해요.”소이연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육현경은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앉았다.“제가 너무 급했네요.”그의 말에 소이연은 움찔했다.분명 아무 사이도 아닌데.분명 육현경이 화를 낸 것도 아닌데.그런데 그녀는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마치 그녀가 누군가의 마음을 짓밟은 것처럼 말이다.육현경은 말을 마치고 나서 나가려 했다.“저는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해요.”소이연은 다급히 해석했다.육현경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소이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제가 18살 되던 해, 저의 술잔에 누군가 약을 탔어요. 그러고 나서 모르는 남자와 성관계를 했고 깨어난 후 저는 메스꺼움만 느낄 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했어요.”육현경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그 뒤로 어떤 남자와 신체 접촉이 있어도 몸이 거부반응을 해요. 마음이 불편하고 몸도 굳어져요. 본능적인 거부반응이죠.”소이연은 조심스럽게 육현경을 쳐다보았다.“현경 씨한테만 그런 게 아니에요.”그녀는 벌떡 일어서더니 욕실로 달려갔고 급한 마음에 욕실 문을 제대로 닫지 못했다. 욕실에서는 고통스러운 구역질 소리가 들려왔
한 편.예수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육 씨 저택에 돌아왔다.그녀는 들어가는 길에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지수야, 너 왜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 파티에 안 왔어? 송문수 그 개자식은 어쩌고.”“나 오늘 야근이야. 아직도 퇴근 못했어.”“네가 그런다고 송 씨 가문에서 알아줄 것 같아? 송문수 그 자식이 너한테 감사해할 것 같냐고. 걔 주변에 널린 게 여자야!”“딱히 송문수를 위해 하는 건 아니야. 나를 위해서 하는 거지.”“입만 살아가지고는.”예수진은 이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몸에 딱 붙어서 불편했던 드레스를 벗기 위해 휴대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고는 손을 등 뒤로 뻗었다. 드레스가 허리춤까지 벗겨지던 찰나.욕실의 문이 갑자기 열렸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계지원이 문 앞에 서있었다.예수진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으나 못 본 척 하고는 드레스를 벗었다.“아무튼 송문수 그 개자식을 생각하면 네가 백배 더 아까워.”“알아.”“아, 말이 길어졌네. 나 요즘 장안시에서 촬영해. 시간 되면 만나자. 그 말 하려고 전화한 거야.”“그래.”“나 금방 집에 도착했어. 너도 그만하고 퇴근해. 집에 가서 푹 쉬란 말이야.”“응. 끊을게.”전화를 끊은 예수진은 자신을 등지고 서있는 계지원을 쳐다보았는데 귀가 새빨개져있었다.그녀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걸었다.“계 감독님은 그 많은 여자를 봤으면서 왜 이러시는 거죠? 감독님 답지 않게.”계지원은 쑥스러워했다.“내 방의 욕실에 물이 새서... 그리고 네가 돌아올 줄 몰랐어.”그는 왜 그녀의 욕실에서 샤워했는지 설명했다.“오빠가 하도 난리를 쳐서요.”예수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근데 문서아랑 함께 있을 시간 아닌가? 빨리 끝났나 봐요? 시시하게.”계지원은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저 씻고 쉬어야 하니까 욕실 다 쓰셨으면 나가주세요, 외삼촌.”예수진의 말에 그는 대답했다.“너 옷 갈아입고...”“갈아입었어요.”계지원은 다시 그녀를 마주향해 섰다.예수진은 박시한 사이즈의
“하지수, 너 미쳤어?” 송문수는 하지수의 등을 강하게 바라보며 눈이 금세 충혈되었다. 그의 표정은 분노라기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더 컸다.하지수가 자신이 바람을 피우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의 여러 가지 반응을 떠올려보았다. 송문수를 때리며 분을 풀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수의 성격을 생각했을 때, 그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둘째, 침대에 있는 여자를 쫓아낼 수도 있었다.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다. 셋째, 돌아서서 그냥 떠날수도 있었다.이 세 번째 가능성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상관없다면 아무 반응도 없을 것이다. 사실 하지수는 방금 떠났었다. 그런데 왜 다시 돌아온 거지?그리고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다니, 송문수는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송문수는 서둘러 하지수의 옷을 올려주며 말했다.“하지수, 너 미쳤어?” 하지수는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억울한 모습에 송문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송문수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울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갑자기 이렇게 울어버리다니. 하지수가 버림받은 듯 처참한 마음이었다.그런데 하지수는 송승우를 좋아하는 것 아닌가?송문수는 하지수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서 있었다. “송문수, 나도 할 수 있어.”하지수는 절규하듯 말했다. “뭐?”송문수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송문수의 눈에는 오직 하지수의 눈물만 보였고, 닦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도 너와 함께 잘 수 있어.”하지수는 울먹이며 말했다. 슬픔에 차서 그녀는 계속 흐느꼈다. 송문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하지수를 더 울릴 것 같았다. 송문수는 갑자기 그녀가 울어버릴까 두려워졌다. 어릴 적처럼. 그는 사실 매번 하지수를 울리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수의 시선이 항상 송승우에게 향해 있었기에 그가 장난을 치지 않으면 하지수는 그를 전혀 주목하
이렇게 보니 그 여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방금 송문수가 침대에 누웠을 때 하지수도 그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설마... 하지수는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송문수는 찡그린 얼굴로 하지수의 행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송문수는 하지수가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하지수가 갑자기 돌아왔으니... “아!”여자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하지수가 여자의 이불을 잡아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이 침대는 어젯밤 하지수가 덮었던 것이고 지금은 다른 여자가 그 이불을 품고 있었다. 송문수는 정말 더럽지 않은가? 정말 더럽다고 느끼지 않는가? 다른 장소로 옮길 수는 없었나?굳이 그녀가 잤던 침대에서 하겠다는 것인가?굳이 이렇게 그녀와 마주쳐야만 하는가? “뭘 하는 거야!”송문수가 하지수를 힘껏 잡아당겼다. 힘이 세서 하지수는 비틀거리며 거의 바닥에 넘어질 뻔했다. 송문수는 본능적으로 하지수를 받쳤다. 다음 순간 그는 즉시 하지수를 놓아버렸다. “나가.”송문수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송문수는 바로 몸을 돌렸다. 하지수는 송문수의 냉담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지수는 방금 송승우에게 송문수가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었다. 지금 이렇게 큰 타격을 받았다. 정말 아프게 맞았다. 하지수는 입술을 깨물어 하얗게 변했다. 조용한 방에서 하지수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옷을 벗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있던 여자는 하지수의 행동에 놀랐다. 이 여자는 그들과 함께하려는 건가?이건 너무 자극적 아닌가?아직 준비가 안 되었었다. 송문수는 하지수의 등 뒤를 바라보며 하지수가 나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송문수는 하지수가 돌아온 걸 알고 있었다. 송승우가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송승우는 그들 사이에 감정이 없다면 더 이상 엉켜 있지 말라고 했다. 그는 하지수가 예전의 일로 송문수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를 위
“지수야, 너는 좋은 아이라는 걸 알아. 네가 얼마나 착한지도 알아. 하지만 네가 이렇게 집착하는 건 원하지 않아.”송승우가 좀 더 진지해졌다.“너의 방식은 너 자신을 다치는 것뿐만 아니라 문수에게도 상처를 주고 있어.” 하지수는 잠시 멈칫하며 송승우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알다시피 너와 문수의 결혼은 네가 이끌어 가고 있는 거야. 네가 이혼하지 않는 한 부모님은 너희를 이혼할 수 없어. 그런데 네가 이렇게 송문수와 얽히고 있으면 그의 감정을 생각해 본 적 있어? 그는 이혼하고 싶지만 이혼할 수 없고 놀고 싶어도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돼. 지금 문수도 진퇴양난이야.” “하지만 나는 송문수가...” “그가 너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니? 그날 밤 음주 운전까지 하면서 너를 만나러 오려 했던 거?”송승우가 물었다.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실제로 송문수가 자신을 어느 정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왜 그런 일을 했을까? 술을 마셨는데도 쉽게 떠날 수 없었던 그는 그녀의 전화를 받고 빗속을 뚫고 오는 데 두려워하지 않았다.그때 그녀의 마음이 흔들렸다고 인정한다.송문수에게 처음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 그녀는 그가 출소하기를 기다리며 진심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어 했지만 송문수 계속 거절했다. “지수야, 너는 너무 순수해.”송승우가 말했다.“이런 일이 누구에게나 일어나면 당연히 신경 쓰게 돼. 송문수가 네 사고 이후에 너를 찾아온 건 인간적인 걱정일 뿐이고, 그의 음주 운전은 법을 무시한 행동이었을 뿐이야. 혼동하면 안 돼.” “하지만...” “지금 나는 너를 강요하지 않아. 네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시간을 줄게.”송승우가 하지수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눈빛을 보냈다.“나는 네가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지만 지금 보니 너는 끝까지 가봐야만 마음을 바꿀 것 같아.” 하지수는 침묵했다. 그래. 하지수는 더 노력하고 싶었다. 하지수는 송문수와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었다.
송문수는 차갑게 물었다.하지수는 송문수가 술을 마셨는지 전혀 몰랐고, 그냥 주소를 알려주었다.말을 마친 후 차 안에서 오랫동안 송문수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사실 전화를 끊고 나서 하지수는 후회와 놀라움을 느꼈다. 왜 송문수에게 전화했을까? 가장 도와주지 않을 사람은 송문수였다. 하지수는 경찰에 전화했야 했다. 아니면 보험사나 4S 매장에 전화해야 했다. 아마도 그때부터 하지수는 이미 송문수와 잘 지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송문수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결국 송문수는 오지 않고 전화로 물었다.“심각하게 다쳤니?” “크게 다친 것 같진 않아. 차 앞부분이 가드레일에 부딪혔고, 내 머리도 좀 긁힌 것 같아.” “우선 경찰에 신고하고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가. 그리고 보험 회사와 4S 매장에 연락해 손해를 평가받아.”송문수는 말을 마친 후 전화를 끊었다. “안 오니?”하지수가 그에게 물었다. 그 순간 그녀는 눈물이 핑 돌았다. 사실 하지수는 이렇게 하는 게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변호사이기 때문에 정해진 절차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냥 사고가 나서 의지할 누군가가 필요했다. 오늘 밤의 사고는 하지수에게 세상을 떠난 부모님을 떠올리게 했다.“안 갈 거야.”송문수가 차갑게 말했다.“하지수, 너는 변호사잖아. 사고 후의 절차를 더 잘 알지 않을까?” 말을 마친 송문수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때 그녀는 송문수에게 정말 실망했다. 어떤 정도로 실망했냐고? 하지수는 그들 사이에 다시는 발전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심지어 이혼도 생각했다. 그 후 그녀는 모든 일을 스스로 처리한 후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 온몸이 피투성이인 송문수를 만났다. 옆에는 두 명의 경찰이 있었다. 하지수는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해 달려가서 물었다. “송문수,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피투성이야?” “내 피가 아니야.”송문수는 무관심하게 대답했다. “그럼, 누구 거야?”
송승우는 잠시 얼어붙었다. 그는 놀라서 물었다.“이제 막 한 관광지를 갔는데 다른 두 곳도 준비했어. 먼 곳도 아니야. 왜 벌써 피곤해? 아니면 오후에 일이 있어?” “아니에요.”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놀다 가자.”송승우가 농담처럼 말했다.“걱정하지 마, 미아로 만들지는 않을게.” “승우 오빠, 우리 서로 거리를 두는 게 좋겠어요.”하지수는 솔직하게 말했다. 송승우의 얼굴에 있는 미소가 서서히 굳어졌다. “지수야, 내가 그렇게 싫어?” “우리 사이에는 더 이상 가능성이 없어요. 오빠에게도 나에게도 송문수에게도 오해를 주고 싶지 않아요.” “왜?”송승우가 하지수에게 물었다.“나는 네 마음을 알아. 너는 송문수를 좋아하지 않고 나를 좋아했잖아. 그런데 왜 지금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데 다시 거부하는 거야? 부모님이 강요한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부모님에게 잘 설명할게. 어떤 일이든 내가 감당할 거야.” “부모님 때문이 아니에요.”하지수가 그의 말을 끊었다.“이제는 오빠를 좋아하지 않아요.” 송승우는 멍해졌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충격에 그는 당황함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잘못 들었는지 의심했다. “지수야, 너 뭐라고 했어?” “예전에 오빠를 정말 좋아했어요. 결혼 준비 중에 오빠가 떠나서 많이 힘들었어요. 왜 갑자기 결혼식에 도망갔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송문수와 결혼하기로 한 것뿐이에요. 오빠 부모님이 나를 키워주신 은혜도 있지만 오빠한테 화가 난 게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왜...” “하지만 그건 예전 일이고 지금은 송문수와 잘 지내고 싶어요.”하지수가 한 단어씩 강조하며 말했다.“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감정은 식기 마련이고 오빠를 향한 그리움은 이제 없어요. 지금은 송문수와 함께 있고 싶어요.” “송문수한테 미안해서 그래?”송승우가 하지수에게 물었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없었다. 송승우가 하지수를 계속 사
맛이 아주 좋았다. 송승우는 하지수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감동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송승우와 송문수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하지수는 두 사람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맛있어?” “아주 맛있어요.” “다 먹을 수 있어?”송승우가 물었다. “다 못 먹어요.”하지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가득 찬 작은 만두 한 바구니에서 그녀는 많아야 절반 정도만 먹을 수 있었다.“괜찮으면 하나만 줘. 나도 아침을 안 먹었거든.”송승우가 말했다. “오빠 아침 안 먹었어요? 기다리는 동안 먹을 수도 있었잖아요.”하지수는 놀라서 물었다. “열고 나면 김이 빠져서 식으면 맛이 없잖아. 그리고 나도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았어.” 하지수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만두를 집어 송승우의 입술에 내밀었다. 만두가 작아서 송승우는 한 입에 물었다. 송승우의 입술이 하지수의 손가락에 닿았다. 하지수의 손가락이 잠시 굳었다. 그리고 그녀는 만두를 옆의 팔걸이에 놓았다.“편할 때 다시 먹어요.” 송승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입가에는 분명한 미소가 떠올랐다. 방금의 접촉이 지수도 부끄러워하겠지. 목적지에 도착했다. 서울에는 특별히 재미있는 곳이 없지만 유적지가 많았다. 송승우는 첫 번째로 하지수를 성벽으로 데려갔다. 하지수는 체력이 괜찮았다. 송승우과 함께 오랫동안 걸었다. 송승우는 역사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은 고대 인들이 남긴 지혜를 감상하며 하지수는 송승우의 설명을 들었다. 가이드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우리도 인증샷 찍자.”송승우가 말했다. “네?” 송승우는 스마트폰을 꺼내 셀카 모드로 전환했다. “지수야, 조금 더 들어와야 찍혀.” 하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송승우의 카메라에 나왔다. 하지만 거리를 두기로 했다. “웃어봐.”송승우가 말했다. “웃으면 안 예뻐요.”하지수가 거부했다. “말도 안 돼 너 웃으면 제일 예뻐.”송승우는
“가식 떨지 마!”송문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수는 송문수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녀는 송문수를 바라보며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정말로 호의로 말했다.“빨리 나가. 내 잠 방해하지 마!” 하지수는 입술을 깨물며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돌려 나갔다. 그녀는 원래 호텔 고객 서비스에 전화를 걸어 아침을 준비해 주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송문수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아마도 하지수가 그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전화한 것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수가 나가자 송문수는 화난 기색으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하지수에게 깨어난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가 전화를 받는 소리를 듣고 송승우가 전화한 것임을 눈치챘다. 어젯밤 송승우가 전화를 걸어 오늘 하지수와 함께 서울을 구경하자고 했을 때 그는 아무 생각 없이 거절했다. 그는 하도경과 약속이 있다고 했다. 사실 본능적으로 거부한 것이었다. 송승우는 송문수가 안 가면 자기가 하지수와 놀러 가겠다고 말했다.송문수는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송승우는 그에게 알리기 위해서만 말한 것 같고 하지수와의 관계 때문에 그에게 체면을 세워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체면을 참 중시하는구나!송문수는 소파에서 내려와 침대로 갔다. 하지수는 어떻게 사귀던 연인과 비밀 데이트를 할 수 있는데 자기는 소파에서 자야만 하는 것인가. 송문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큰 침대 위에 하지수의 냄새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송문수는 더욱 짜증이 났다. 원래 그는 하지수가 거절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하지수가 최근 보여준 호의에 변화를 기대하고 착각한 것이었다.어쩌면 진짜 감정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결국 송문수는 스스로를 모욕한 것이었다. 하지수는 어릴 적부터 송승우를 좋아했으니 그녀가 자신을 사랑할 리가 없다!하지수는 급히 호텔 출입구로 나갔다.그녀는 지각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
송문수가 욕실에서 나왔다. 송문수의 몸에서 은은한 샴푸 향이 남아 있는 듯했다. 하지수는 살짝 긴장했다. 결혼한 지 이렇게 오래되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침대에 누운 적은 단 한 번이었다. 그때는 매우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그 후 두 사람 사이의 친밀한 접촉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이불 속에 누운 하지수는 몸이 경직되어 숨조차 내쉬기 어려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녀는 그 향기가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송문수가 침대에 오지 않는 것을 느끼며 방의 조명이 어두워진 것 같았다. 하지수는 몰래 눈을 뜨고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그때 송문수가 방금 자신이 누워 있던 의자에 몸을 눕히는 모습을 보았다. 송문수는 애초에 하지수와 같은 침대에서 잘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래서 하지수를 침대에 옮긴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그가 자고 싶었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남자답게 예의를 지키려는 것 같았다.송문수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그녀를 소파에서 자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하지수의 마음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방금 생긴 작은 기대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오해했을 뿐이었다. 그날 밤 하지수는 불안한 잠을 잤다.사실 송문수 역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송문수에게는 큰 키와 체격 때문에 소파가 고역이었다.그는 몸을 뒤척이는 것도 두려웠고, 떨어질까 봐 불안했다. 게다가 다리를 펼 수도 없어 쭈그려 웅크리고 자야 해서 매우 불편했다. 더 중요한 것은 하지수가 큰 침대에서 편하게 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수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송문수의 긴장감이 커졌다. 하도경 말이 맞아, 그렇게 많은 여자와 사귀던 남자가 정말 달라졌네! 다음 날. 하지수는 핸드폰 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녀는 서둘러 음소거를 해제한 뒤 송승우의 전화라는 것을 확인하고 잠시 망설였다. 송문수 역시 전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밤새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자마자 전화 소리에 깨
하지수는 송승우가 보낸 메시지를 보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답장을 보냈다.“지나갔으면 지나가야지.”하지수는 그와 다시 시작할 생각은 없었다.송승우는 더 이상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하지수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그녀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았다.사실 조금 피곤했지만 침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그저 마음이 허전해지는 느낌으로 누워 있었다.송문수가 방에 들어섰을 때, 하지수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이 여자는 도대체 자기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지?오후에도 소파에서 두 개의 담요조차 덮지 않고 자고 있었고, 지금도 핸드폰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핸드폰이 이불이 되냐?송문수는 짜증이 났다. 그는 큰 몸을 움직여 하지수를 안았다.하지수는 주위의 움직임을 느껴 이마를 찡그리며 불편하게 몸을 비틀었다.송문수는 순간 가슴이 멈췄다.그는 하지수를 바라보며 긴장했다. 하지수가 곧 깨어날 것 같은 모습이었다.왜 그녀를 안았는지 모르겠다. 화가 나서 그랬나?이때야 하지수를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수가 깨어나기라도 한다면... 송문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마치 돌처럼 굳어버렸다. 다음 순간, 하지수가 그의 품에서 편안한 자세를 찾은 뒤 다시 잠이 든 것을 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고요한 모습으로 자는 것을 보고 송문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마음속에 혼잣말이 흘렀다. 뭐야, 대변호사라면서 경계심이 높다고?잠들어서 팔려 가고도 모르겠지. 송문수는 하지수를 안아 침대로 옮겨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 모든 것을 끝낸 후 그는 도둑질이라도 한 듯 불안한 마음으로 깊이 숨을 내쉬었다. 이럴 수가!불안해할 이유가 없었는데...하지수에게는 단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렇게 한 것이고, 누구에게라도 똑같이 했을 것이다. 송문수는 돌아서서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떠나자 하지수는 눈을 뜨고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녀는 방금 깨어났었다. 순간적으로 공중에 떠오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