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문서아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오늘 느낀 수치심은 한평생 잊기 힘들 것이다.“괜찮아.”소이연은 더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해 주었는데 그 모습은 사람들에게 대인배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문서아는 그녀의 모습에 더더욱 괴로워했다.문덕수는 문서아가 사과한 뒤 육현경에게 물었다.“육 씨 도련님, 저희 이만 가봐도 될까요?”“앞으로 이런 일은 없도록 하세요.”“네! 제가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문덕수는 문서아를 끌어당기더니 초라한 뒷모습만 남기고 떠났다.그들이 떠난 후, 연회장은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하지만 육현경과 소이연을 지켜보는 눈길은 여전히 존재했다.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두 사람이 어떻게 진지한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오늘 좀 바빠서요. 좀만 기다려 줘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저 혼자 가도 되는걸요...”“기다려 줘요.”육현경은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그의 말에는 거절할 수 없는 마력이 있었다.자상한데 박력 넘치기까지 한 이 남자를 어쩌면 좋아...“민아, 엄마 곁에 꼭 붙어있어.”육현경은 아들에게 당부했다.“네! 맡겨만 주세요!”육민은 차렷 자세를 하고서 대답했다.육현경은 만족한단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떠났다.소이연은 걸음을 재촉하는 육현경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사색에 잠겼다.그렇게 바쁜데도 나 때문에 와준 거라고?감동이긴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엄마, 그네 타러 가요.”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육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민아, 아까는 고마웠어.”“괜찮아요, 엄마. 아빠가 그러셨어요. 남자라면 엄마를 보호해 줘야 된다고요.”육민은 앳된 목소리로 당차게 말했다.그 바람에 소이연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내렸다.그녀는 육민의 고사리 같은 손을 쥐고는 연회장을 나섰다.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소나은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여유롭고
“계 감독님, 오랜만에 뵙네요.”소이연이 먼저 잔을 들었다.“이연 씨는 위도 안 좋으시니 적당히 즐기시는 게 좋겠어요.”계지원도 함께 잔을 들었다.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혔다.친한 사이가 아니라 그런지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 흘렀다.“현경이 말이에요.”계지원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참 괜찮은 애에요.”현경? 아, 육현경.소이연은 그제야 계지원이 누구를 말하는지 깨달았다.계지원은 청수 할아버지의 양아들이라 육현경과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소이연은 육현경에 대해 말하기 싫었기에 대꾸하지 않았다.“늦었으니 먼저 가볼게요.”계지원은 와인잔을 우아하게 내려놓았다.청수 할아버지도 댁으로 돌아가셨고 육현경만이 연회장에 온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었다.“조심히 들어가세요.”소이연은 미소를 지었고 계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어 보였다.계지원 이 남자는 이름이 주는 느낌만큼이나 젠틀하고 지성미가 넘쳐나는 사람이기에 쉽게 호감을 사는 유형이었다.계지원이 떠난 후, 하도경과 송문수도 집으로 돌아갔다. 연회장을 나서기 전에 모두 소이연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소이연은 못 본 척 했다.아직도 육현경 이 인간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야?취기가 올라서 힘든데...이때 그녀는 마침 육현경이 가든으로 가는 것을 보았지만 따라가지는 않았다.가든.“예수진.”육현경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겼다.예수진은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이거 놔.”“어디에 있었던 거야? 전화도 안 받고.”“신경 꺼.”예수진은 육현경의 손을 뿌리쳤다.“비서 차에 타고 집으로 가.”육현경은 어린애를 달래듯 말했다.예수진은 인상을 찌푸렸다.“싫어. 이 시간에 집 가는 사람이 어딨어? 좀 있다 친구랑 약속 있어.”“몇 시인데 친구를 만나? 이 늦은 밤에 약속이라고?”“21세기 사람 맞아? 11시밖에 안되었는데 뭐라는 거야.”“너 내일 촬영 있어.”“알아. 제시간에 도착...”“명진아.”육현경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
소이연과 육현경은 거리를 둔 채 걷고 있었다.선남선녀라 그런지 뒷모습도 보기 좋았다.그들의 외모는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했다.모두 소이연과 육현경이 연인일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차 안.소이연은 머리가 어지러웠다.아, 너무 많이 마셨나 봐...그녀는 다른 때와 달리 과음했다. 문서인과 사귀고 있을 때 그리고 문 씨 그룹에 출근할 때는 이런 적이 없었다.그런데 오늘 밤은...오늘 밤은 감성에 취해있었던 것 같다.나는 내가 다 꿰뚫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마저도 내 착각이었지. 날 비판하는 목소리가 하나 둘 들려올 때마다 흔들리는 내 모습이 싫어.그녀가 사색에 잠긴 사이,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육현경은 차창에 기대 곤히 잠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빨갛게 달아오른 두 볼 그리고 아기 같은 숨소리.육현경은 차에서 내려 소이연을 안았다.소이연은 불편함을 느꼈지만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이 풀린 탓에 인상만 찌푸릴 뿐, 반항은 하지 못했다.“비밀번호 뭐예요?”육현경은 그녀를 안고서 물었다. 섹시한 중저음이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다.소이연은 기분 탓인지 아니면 취해서인지 몸을 가눌 수 없었다.“제 생일...”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도어록이 열렸다.“문이 열렸습니다.”도어록의 알림음과 함께 육현경은 문을 열어 그녀와 함께 들어갔다.신발 수납장에는 두 켤레의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육현경은 저도 몰래 미소를 지었고 남성용 슬리퍼를 꺼내 신고 소이연의 집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푹신한 침대에 누운 소이연은 불편한 듯 끙끙거렸다.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육현경의 정장 외투와 몸에 딱 맞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으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육현경은 그녀가 신고 있는 하이힐을 벗겨주었다.뽀얀 속살과 함께 드러난 것은 발목에 난 상처였다. 하이힐을 신어서 껍질이 벗겨진 것이다.육현경은 일어나서 소이연이 걸친 검은색의 정장 외투를 벗겼으나 몸에 딱 붙는 드레스에 손을 낼 엄두가 나지 않아서인지
“제가 너무 늦었죠.”육현경은 진심으로 사과했다. 중저음 목소리에는 그녀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었다.소이연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딱 좋아요.”모든 것이 딱 좋았다.육현경의 심장이 더 거칠게 뛰었다. 소이연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그는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볼을 쓰담아주었고 눈물을 닦아주었다.소이연의 몸이 조금씩 달아올랐다.두 사람의 시선이 한곳에서 엉켰다.묘한 기류 속에서 무언가가 불타고 있었다...육현경은 소이연에게로 다가갔고 그녀는 싫지 않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남녀, 한 공간 그리고 늦은 시간.숨겨왔던 감정이 불타올라 엉키는 지금.육현경은 소이연의 부드럽고 윤기 있는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려 했다.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볼 뽀뽀가 되긴 했지만 육현경의 뜨거운 눈빛은 오로지 소이연에게로 향했다.“미안해요.”소이연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육현경은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앉았다.“제가 너무 급했네요.”그의 말에 소이연은 움찔했다.분명 아무 사이도 아닌데.분명 육현경이 화를 낸 것도 아닌데.그런데 그녀는 이유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마치 그녀가 누군가의 마음을 짓밟은 것처럼 말이다.육현경은 말을 마치고 나서 나가려 했다.“저는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두려워해요.”소이연은 다급히 해석했다.육현경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소이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제가 18살 되던 해, 저의 술잔에 누군가 약을 탔어요. 그러고 나서 모르는 남자와 성관계를 했고 깨어난 후 저는 메스꺼움만 느낄 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지 못했어요.”육현경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그 뒤로 어떤 남자와 신체 접촉이 있어도 몸이 거부반응을 해요. 마음이 불편하고 몸도 굳어져요. 본능적인 거부반응이죠.”소이연은 조심스럽게 육현경을 쳐다보았다.“현경 씨한테만 그런 게 아니에요.”그녀는 벌떡 일어서더니 욕실로 달려갔고 급한 마음에 욕실 문을 제대로 닫지 못했다. 욕실에서는 고통스러운 구역질 소리가 들려왔
한 편.예수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육 씨 저택에 돌아왔다.그녀는 들어가는 길에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지수야, 너 왜 우리 외할아버지 생신 파티에 안 왔어? 송문수 그 개자식은 어쩌고.”“나 오늘 야근이야. 아직도 퇴근 못했어.”“네가 그런다고 송 씨 가문에서 알아줄 것 같아? 송문수 그 자식이 너한테 감사해할 것 같냐고. 걔 주변에 널린 게 여자야!”“딱히 송문수를 위해 하는 건 아니야. 나를 위해서 하는 거지.”“입만 살아가지고는.”예수진은 이층으로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몸에 딱 붙어서 불편했던 드레스를 벗기 위해 휴대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고는 손을 등 뒤로 뻗었다. 드레스가 허리춤까지 벗겨지던 찰나.욕실의 문이 갑자기 열렸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계지원이 문 앞에 서있었다.예수진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으나 못 본 척 하고는 드레스를 벗었다.“아무튼 송문수 그 개자식을 생각하면 네가 백배 더 아까워.”“알아.”“아, 말이 길어졌네. 나 요즘 장안시에서 촬영해. 시간 되면 만나자. 그 말 하려고 전화한 거야.”“그래.”“나 금방 집에 도착했어. 너도 그만하고 퇴근해. 집에 가서 푹 쉬란 말이야.”“응. 끊을게.”전화를 끊은 예수진은 자신을 등지고 서있는 계지원을 쳐다보았는데 귀가 새빨개져있었다.그녀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걸었다.“계 감독님은 그 많은 여자를 봤으면서 왜 이러시는 거죠? 감독님 답지 않게.”계지원은 쑥스러워했다.“내 방의 욕실에 물이 새서... 그리고 네가 돌아올 줄 몰랐어.”그는 왜 그녀의 욕실에서 샤워했는지 설명했다.“오빠가 하도 난리를 쳐서요.”예수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근데 문서아랑 함께 있을 시간 아닌가? 빨리 끝났나 봐요? 시시하게.”계지원은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저 씻고 쉬어야 하니까 욕실 다 쓰셨으면 나가주세요, 외삼촌.”예수진의 말에 그는 대답했다.“너 옷 갈아입고...”“갈아입었어요.”계지원은 다시 그녀를 마주향해 섰다.예수진은 박시한 사이즈의
그녀 방안의 책상 위에는 컵이 놓여있었다. 노란 끼가 도는 것으로 보아 꿀물인 것 같았고 종이도 한 장 남겨져있었다.“꿀물이 숙취에 좋대요. 깨나서 아침 꼭 먹어요. 빈속에 토하면 위에 안 좋으니깐요. 저 일주일 동안 출장 가요. 저를 기다려 줘요.”정갈한 글씨체는 육 씨 연회 초대장에 쓰여 있는 글씨체와 똑같았다.소이연은 꿀물을 한 모금 마셨다.목 넘김이 부드러운 건지 마음속이 따뜻한 건지 알 수 없었다.설레는 감정이 드는 게 얼마만인지.어제 육현경이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다 한 게 설마... 일주일 동안 출장 가서 날 못 보니까 그런 건가?소이연은 컵을 내려놓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더럽혀진 드레스를 벗고는 샤워했다.더럽혀진 드레스는 쓰레기통에 넣었다.공짜로 얻은 거라 그런지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그녀는 객실의 소파에 누워 잠을 청했다. 숙취 때문인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육현경이 남긴 말이 생각났다.“깨나서 아침 꼭 먹어요. 빈속에 토하면 위에 안 좋으니깐요.”그녀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간단하게 식사를 준비하던 중, 그녀의 전화가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한 그녀는 휴대폰을 무음으로 설정하고는 한쪽에 놓았다.접시에 잘 담아서 식탁에 앉아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는데 문서인이 보낸 카카오톡 문자가 떴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문자를 확인했다.여러 장의 사진이었는데 사진 속 육현경은 예수진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으나 예수진은 인상만 찌푸릴 뿐, 다른 반항은 없었다.묘한 관계임을 나타내는 사진이었다.문서인은 또 문자를 보내왔다.“소이연, 말 좀 들어. 육현경이 너한테 진심일 것 같아? 네가 좀 이쁘장하니까 놀아보는 거지. 내가 장담하는 데, 육현경 같은 남자한테 널린 게 여자야. 넌 그중 한 명일 뿐이고.”그녀는 육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육현경이 예수진을 좋아한다던 그 말.소이연은 토스트를 먹으면서 그에게 답했다.“애도 아닌데 놀아보면 뭐 어때?”그러고는 문서인을 삭제했다.문 씨 별장.문서인은 일찍 일
“소이연이 이미 육현경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도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면, 너랑 소나은 사이의 일도 머지않아 공개될 거다. 지금까지 계속 밝히지 않았던 건 소이연이 소란을 피울까 봐 그랬던 거고, 그녀가 스스로 약혼을 취소하도록 하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이제 그럴 걱정은 없겠다. 그리고 이 일을 이렇게 계속 미루다가는 우리 문씨 가문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거다.”문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나은이한테 한마디만 하면 밝힐 거에요.”“소나은이랑 아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려서 어제 구긴 체면을 다시 살리는 거야.” 문덕수는 어제 일을 언급하며, 여전히 화를 감추지 못했다.“알겠어요.”문덕수는 지시를 하고 자리를 떴다. 문서인은 바로 소나은에게 전화를 걸었다.같은 시각 소나은은 이제 막 잠에서 깨 침대에 앉아 신문과 SNS를 보고 있었다.어제 육씨 가문 연회에서 발생한 일이 유출된 곳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단 한 글자도 찾지 못했다. 역시 육씨 가문은 다른 가문과는 다르게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은 점 하나라도 공개적인 곳에 노출하지 않는구나.전화가 오는 걸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리고는 전화를 받았다. “서인 오빠.”“일어났어?”“방금 깼어.” 소나은은 일부러 하품을 했다. “어젯밤에 몇 시에 간 거야, 엄마, 아빠랑 같이 올 때 오빠 못 봤는데.”“조금 늦었어.” 문서인은 더 이상 어젯밤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대충 대답했다. “방금 아버지가 우리 관계도 일찍 공개하라고 하시네,”“뭐?” 소나은은 유난히 흥분하며 대답했다.“왜, 공개하기 싫어?”“아니.” 소나은은 황급히 부인했다. “우리 언니가 시끄럽게 할까 봐 걱정된다며? 나중에 가서 시끄럽게 하면 우리 두 가문 다 힘들어질 거야.”“소이연이 육현경한테 붙잡혀 있는데, 걔가 시끄럽게 할 것 같아?!” 문서인이 비꼬듯 말했다.소나은은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공개하기 싫어졌다.심지어 이런 감정이 더 이상 필요 없다
주말이 지나가고, 이틀 연속 야근했다.소이연은 진지하게 사무실에 앉아 기획안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녀는 디자인팀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소나은의 부하들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수화기를 들어 내선을 연결했다. “장 비서, 임원들 전부 소집해, 디자인팀 총괄 위로 전부 다. 30분 뒤에 회의할 거야. 주제는 다음 시즌 신제품 디자인 초안이고, 빠지는 사람 없게 해.”“네.”30분 뒤, 은하 그룹 VIP 회의실.모든 임원들이 시간에 맞춰 도착했지만, 이것도 단지 보여주기 위한, 즉 소이연이 그들의 꼬투리를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복종일 뿐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중요한 일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은하 그룹에 발을 담그고, 소이연이 내쫓기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며칠 간의 밤샘 작업 끝에 디자인팀이 드디어 다음 시즌 신제품 디자인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저는 아주 만족스러웠고, 임원분들께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소이연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단 한 번도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녀가 말을 시작하기 무섭게 모든 임원들이 제각기 속닥거리기 바빴다.소나은 역시 당황스러웠다.디자인팀은 최근 진행된 디자인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소이연은 디자인 초안이 완성되었다고 했다. 진행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번 주 내로 끝내지 못한다면 다음 판매 시즌에 맞추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녀는 소이연이 조롱당할 것이라 생각했다.소나은은 무표정으로 소이연이 가져온 디자인 초안을 훑어보았다.첫 번째 스타일부터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다른 모든 임원진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은하그룹이 고집해 오던 디자인을 완전히 새롭게 수정했을 뿐만 아니라 선명한 컬러와 유행 지난 빈티지를 과감하게 사용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고, 글로벌한 요소를 접목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트집을 잡으려던 임원들도 이 순간 모두 입을 꾹 닫았다. 언급할 수 있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디자인팀의 관리자들도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