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이 이미 육현경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도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면, 너랑 소나은 사이의 일도 머지않아 공개될 거다. 지금까지 계속 밝히지 않았던 건 소이연이 소란을 피울까 봐 그랬던 거고, 그녀가 스스로 약혼을 취소하도록 하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이제 그럴 걱정은 없겠다. 그리고 이 일을 이렇게 계속 미루다가는 우리 문씨 가문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될 거다.”문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나은이한테 한마디만 하면 밝힐 거에요.”“소나은이랑 아주 화려한 결혼식을 올려서 어제 구긴 체면을 다시 살리는 거야.” 문덕수는 어제 일을 언급하며, 여전히 화를 감추지 못했다.“알겠어요.”문덕수는 지시를 하고 자리를 떴다. 문서인은 바로 소나은에게 전화를 걸었다.같은 시각 소나은은 이제 막 잠에서 깨 침대에 앉아 신문과 SNS를 보고 있었다.어제 육씨 가문 연회에서 발생한 일이 유출된 곳이 있는지 찾아봤지만, 단 한 글자도 찾지 못했다. 역시 육씨 가문은 다른 가문과는 다르게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일은 점 하나라도 공개적인 곳에 노출하지 않는구나.전화가 오는 걸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리고는 전화를 받았다. “서인 오빠.”“일어났어?”“방금 깼어.” 소나은은 일부러 하품을 했다. “어젯밤에 몇 시에 간 거야, 엄마, 아빠랑 같이 올 때 오빠 못 봤는데.”“조금 늦었어.” 문서인은 더 이상 어젯밤의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대충 대답했다. “방금 아버지가 우리 관계도 일찍 공개하라고 하시네,”“뭐?” 소나은은 유난히 흥분하며 대답했다.“왜, 공개하기 싫어?”“아니.” 소나은은 황급히 부인했다. “우리 언니가 시끄럽게 할까 봐 걱정된다며? 나중에 가서 시끄럽게 하면 우리 두 가문 다 힘들어질 거야.”“소이연이 육현경한테 붙잡혀 있는데, 걔가 시끄럽게 할 것 같아?!” 문서인이 비꼬듯 말했다.소나은은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공개하기 싫어졌다.심지어 이런 감정이 더 이상 필요 없다
주말이 지나가고, 이틀 연속 야근했다.소이연은 진지하게 사무실에 앉아 기획안을 정리하고 있었다.그녀는 디자인팀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소나은의 부하들이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수화기를 들어 내선을 연결했다. “장 비서, 임원들 전부 소집해, 디자인팀 총괄 위로 전부 다. 30분 뒤에 회의할 거야. 주제는 다음 시즌 신제품 디자인 초안이고, 빠지는 사람 없게 해.”“네.”30분 뒤, 은하 그룹 VIP 회의실.모든 임원들이 시간에 맞춰 도착했지만, 이것도 단지 보여주기 위한, 즉 소이연이 그들의 꼬투리를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한 복종일 뿐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중요한 일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은하 그룹에 발을 담그고, 소이연이 내쫓기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며칠 간의 밤샘 작업 끝에 디자인팀이 드디어 다음 시즌 신제품 디자인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저는 아주 만족스러웠고, 임원분들께도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소이연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단 한 번도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그녀가 말을 시작하기 무섭게 모든 임원들이 제각기 속닥거리기 바빴다.소나은 역시 당황스러웠다.디자인팀은 최근 진행된 디자인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소이연은 디자인 초안이 완성되었다고 했다. 진행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번 주 내로 끝내지 못한다면 다음 판매 시즌에 맞추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녀는 소이연이 조롱당할 것이라 생각했다.소나은은 무표정으로 소이연이 가져온 디자인 초안을 훑어보았다.첫 번째 스타일부터 그녀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다른 모든 임원진들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은하그룹이 고집해 오던 디자인을 완전히 새롭게 수정했을 뿐만 아니라 선명한 컬러와 유행 지난 빈티지를 과감하게 사용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었고, 글로벌한 요소를 접목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트집을 잡으려던 임원들도 이 순간 모두 입을 꾹 닫았다. 언급할 수 있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디자인팀의 관리자들도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예수진?!” 소나은은 유난히 흥분해 말했다. “예수진은 연기도 그렇고 인기도 그렇고 거의 TOP 급이잖아, 연예계에서도 아주 핫하고, 우리 브랜드랑 협업하려면 할 수는 있겠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아, 최소 몇십억은 될 거야. 우리 그만큼 투자할 수 있어?”“우리가 투자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너는 신경 안 써도 돼. 난 그냥 네 의견이 궁금했을 뿐이야.”예수진은 확실히 패션계의 사랑을 받고 있고, 심지어 평소 사복으로도 걸어 다니는 아이콘이라고 불리고 있다. 그녀가 앰배서더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은하그룹의 패션 분야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인식될 것이다.“언니 마음에 든 사람이라면 당연히 부족하진 않겠지.” 소나은은 동의했다.소이연은 사실 속으로 예수진과의 협업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좋아.” 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됐어, 가서 볼일 봐.”소나은은 소이연을 응시하며 오늘 소이연의 행동이 지나치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오늘 디자인에 대해 물어보려 했지만, 결국 묻지 않았다.오늘 그 디자인은 확실히 은하그룹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만약 그 작품이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그녀도 업계에서 환대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지금 물어봤다가 전부 물거품으로 만드느니, 모른 척 어물쩍 넘어가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소나은이 사무실에서 나왔다.“나은아, 잠시만.” 소이연이 문 앞까지 나와 그녀를 불렀다.“왜 그래?”“오늘 일은 우선 비밀로 해, 확정되기 전까지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소이연은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곧 대답했다. “언니 걱정 마. 나도 다 이해해.”소이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짓으로 소나은을 배웅했다.그녀가 떠난 뒤, 소이연은 눈동자를 움직여 곁눈질로 한 직원이 비서실에서 자문하는 것을 보았다. 사실상 누군가의 스파이였다.오늘 그녀와 소나은의 교류는 분명 다른 임원들의 주의를 끌었다.그녀가 바라던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소이연은 진지하게 이 일들을 생각해보
사실 어떤 사람들은 추천할 필요도 없이 공짜로 앰배서더를 따낼 수 있다.“제가 볼 땐 계 감독님이 제일 적합한 사람인데요.” 소이연은 확신에 가득 찼다.계지원도 거절하지 않았다. “제가 우선 예수진 씨 촬영 일정부터 확인해 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감사합니다.”“별말씀을요.”전화를 끊고, 계지원은 카메라 앞에 앉았다. 방금 막 촬영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요 며칠 예수진 씨 촬영 일정 좀 가져다줘.” 계지원이 주변에 있던 스태프에게 말했다.“네. 감독님.”계지원은 촬영 일정을 자세히 보고 또 보다가 몸을 일으켜 촬영장 구석으로 걸어갔다.전화가 연결됐다. “현경아.”“응.”“소이연이 방금 나한테 전화 왔었어.” 계지원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전화 건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계지원이 살짝 웃었다. “나한테 예수진이랑 자리 좀 만들어달래. 앰배서더 따고 싶다고.”“그래?”“알겠다고 했어. 별일 없으면 오늘 저녁에 만날 거야.”촬영은 이제 막 시작해, 일정에는 여유가 있었다.“너 걔랑 되게 친하네.” 육현경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몹시 화난 목소리였다.“아니, 우연히 알게 된 거지.” 계지원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냥 너한테 얘기해 줘야 할 것 같아서, 나 다시 일하러 간다.”전화는 곧바로 끊어졌다.계지원은 다시 한번 웃었다. 예상대로 쪼잔했다.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카메라 자리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니 예수진이 보였다.예수진은 그의 웃음 가득한 얼굴을 보며 아무런 감정 없이 그를 지나쳤다.“수진 씨.” 계지원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예수진은 걸음을 멈췄다.“오늘 오후에 두 장면밖에 없으니까 4시 정도면 끝나겠네요?”“그래서요?” 예수진은 무심하게 물었다.“제 친구가 그쪽이랑 앰배서더 관련 얘기 좀 하고 싶다는데, 저녁에 시간 되면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저 지수랑 같이 밥 먹기로 했어요.” 예수진은 바로 거절했다. “앰배서더 얘기하시려면 제 매니저한테 연락하시면 돼요. 저희 매니저님 연락처 가지고
2시, 소이연은 장문기를 데리고 장안시 외곽에 있는 촬영장으로 갔다.사극 촬영이기 때문에 사극 세트장을 새로 지었다.그녀는 스태프의 인도 하에 계지원을 찾아갔다.계지원은 카메라 앞에 앉아 감독하고 있었다.소이연이 온 것을 보고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업무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소이연도 그를 방해하지 않고 근처에 앉아 촬영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예수진과 남자 주인공 안홍준이 같이 등장하는 장면을 촬영 중이었다.배우분들 준비하세요.“제3장, 1번 카메라, 1회차, 액션!”안홍준이 예수진을 매섭게 벽으로 몰아붙여 두 사람은 초밀착 상태로 서로를 바라봤다.소이연도 촬영장 방문은 처음이라, 배우들이 빠르게 각자의 배역에 몰입하는 것을 보니 조금은 존경스러웠다.특히 예수진의 사람을 사로잡는 눈빛 연기가 빛났다.바로 이때.안홍준이 예수진의 입술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힘이 들어간 눈빛도 잠시, 예수진의 눈도 스르륵 감겼다.한줄기 눈물이 예수진의 눈에서 흘러내렸다.입술이 포개지려는 순간, 예수진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피했다.두 배우는 카메라에서 벗어났다.“컷!”계지원은 촬영을 중단했다.“죄송합니다.” 예수진은 눈물을 닦으며 스태프들에게 사과했다.원래 이 장면은 키스신이었다.명백한 그녀의 NG였다.“배우분들 조금 쉬다 갈게요.” 계지원이 말했다. “다음 장면 먼저 찍읍시다.”예수진은 곧장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매니저는 급히 앞으로 나가 그녀에게 물을 건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수진 언니, 왜 그래요?”“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 예수진이 대답했다.“오자마자 키스신이라니, 아직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하라는 거야. 수진 언니, 아니면 다인 언니한테 부탁해서 감독님한테 키스신 좀 나중에 찍자고 해볼까요?”“아니야.” 예수진이 말했다.보통 제작진은 남녀 주인공이 빨리 가까워질 수 있도록 키스신을 앞쪽에 배치한다.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서로 잘 아는 사이이건 말건 상관없는 일이다
소이연은 깊은숨을 들이켰다. 공과 사는 별개이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고개를 떨구고 휴대폰을 보니 메시지 알림이 왔다. 여전히 무시를 선택했다.낙성시.육현경은 육씨 그룹 지사의 고급스러운 사무실에 앉아 어두침침한 얼굴로 미동도 없는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명진은 그런 그의 옆에서 숨죽이고 있었다.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이번 긴급 지사 점검은 분명 모든 지표가 아주 만족스러웠는데 대표님의 얼굴은 어두침침한 게, 마치 먹구름 같았다.“명진아.”“네, 대표님.”“내일 장안시로 가는 제일 빠른 비행기표 예약해 줘.”“내일은 나성 관계자들과 식사 일정이 있습니다.” 검사도 할 겸, 손님도 치를 겸이었다.“그럼, 내일 저녁 비행기.” 육현경은 말을 바꿨다.내일은 꼭 돌아가야 해.“……네.” 명진이 정중하게 대답했다.내일 저녁 접대가 끝나면 한밤중일 텐데!사모님 때문이겠지?!나성에 온 뒤로 계속 휴대폰만 확인하고, 회의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까만 화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역시 사랑에 빠진 남자는 정상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긴 어렵다.......장안시, 촬영 세트장.두 번째 키스신 촬영.예수진은 감정을 가다듬고, 안홍준은 그 옆에서 대화를 이어가려 노력하고 있었다. 서로에게 빨리 익숙해지면 어색함을 그나마 덜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스크립터가 말했다. “제3장, 1번 카메라, 2회, 액션!”두 배우는 빠르게 연기에 몰입했다.첫 번째 촬영의 동선은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바로 키스신으로 들어가면 되었다.안홍준은 예수진을 벽으로 몰아세우고 고개를 숙여 키스했다.입술이 다가가는 그 순간……“죄송합니다.” 예수진은 또 피했다.안홍준도 조금 당황스러웠다.“컷!”계지원이 카메라 앞에서 일어서 예수진과 안홍준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예수진 씨 잠시 나와보세요.”예수진은 입술을 문지르며 계지원의 뒤를 따라갔다.두 사람은 촬영장 구석으로 갔다.“제가 키스신 삭제해 드릴 테니까 다음 장면 준비하세요.” 계지원이 입
드디어 두 사람이 키스했다.줌아웃에서 줌인, 이어서 클로즈업까지.클로즈업 부분에서는 안홍준이 혀를 내미는 것까지 명백히 보였다……예수진이 몸이 굳어갔고, 주먹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지만 밀어내지 않았다.“컷!” 사인이 떨어지기 전까지는.예수진은 안홍준을 세게 밀어냈다.안홍준은 예수진이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있었다. 방금은 그도 모르게 저지른 일이었다.예수진은 외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입술도 부드러워서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었다.감독이 컷 사인을 주지 않았거나, 예수진이 본인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계속 이어갔을 것이다.예수진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이번에는 통과인지 아닌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안홍준은 재빨리 쫓아갔다. “수진 씨.”예수진은 차가운 얼굴로 돌아봤다.“죄송합니다. 제가 방금……” 안홍준은 사과하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감독님께서 저한테 좀 더 깊게 연기하라고 하셨고, 이렇게 하면 더 잘 나올 거라고 하셨어요. 물론 저희도 더 빨리 캐릭터에 몰입할 수 있고요.”“계지원 감독님이 혀를 내밀라고 하셨다고요?” 예지원이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안홍준은 갑자기 예수진의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는 것을 느꼈다.아까는 화가 난 정도인 것 같았는데, 지금은 증오로 바뀐 것 같다.이 순간 갑자기 눈시울도 붉어졌다.“계 감독님도 작품을 위해서죠.” 안홍준은 침묵했다.“허.” 예수진은 또 웃었다.아까는 키스신을 삭제해 준다고 하더니, 뒤에서는 남자 배우한테 여자를 조롱하라니.계지원의 위선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매니저를 데리고 휴게실로 돌아가 메이크업을 지워냈다.소이연은 이미 촬영장 밖의 차에서 예수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그 키스신은 그녀도 보고 있었고, 당연히 안홍준의 고의적인 행위도 지켜보았다.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메라 앞에 앉아있는 계지원의 낯빛이 안 좋아진 것 같았다.“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예수진이 차에 타며 말했다.“아니요, 원래 오늘 할 일도 없었어요.” 소이연이
“예전에는 저희 아버지께서 은하그룹을 운영하셨어요. 그래서 이제는 제가 맡게 된 거고요.” 소이연도 질질 끌지 않고 본론부터 얘기했다. “솔직히 말해서, 예전의 은하 패션은 확실히 평범하긴 했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수진 씨 이건 다음 시즌 저희 제품 디자인인데 한번 둘러보세요.”예수진은 소이연을 한번 쳐다보았다. 이 여자에 대해 확실히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들은 바가 있었다. 예전에 아주 큰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진의 눈에 소이연은 남자한테 매달리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게다가 다시 그녀의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문서인과 항상 묶여 있었다.하지만 방금 나눈 몇 마디 말로 소이연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매끄럽고 시원시원한 일 처리, 거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태도.역시 소문은 다 믿을 게 안 된다고 느껴졌다.예수진은 소이연이 건네준 노트북을 받아 디자인을 쭉 훑어보더니, 눈이 번쩍 뜨였다.소이연과 저녁을 먹으며 앰배서더 관련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으니, 사실 그녀는 쉬는 동안 휴게실에서 은하 패션에 대해 찾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녀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앰배서더 자리를 거절할 수 없을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오빠가 강요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새로운 디자인은 은하 패션에 대한 인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방금 소이연이 말한 “지금은 아니에요.”라는 말은 잘난 척이 아니었다.“너무 좋은데요.” 예수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만약 수진 씨도 우리 은하그룹의 패션 앰배서더 자리가 마음에 드신다면, 비용에 대해 이야기 나누시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소이연은 대화를 주도했다.“얼마나 주실 수 있는데요?” 예수진이 물었다.“제가 알기로 수진 씨의 앰배서더 비용은 보통 40억 선이죠.” 소이연은 예수진을 보며 말했다. “은하 그룹은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할인 해드릴게요.” 예수진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소이연은 의아했다.“할인 안 해드리면 제 다리 하나 부러져서 집에 못 가는 거 아니에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
하지만 원체 쇼핑을 싫어하는 송문수의 성격을 알고 있던 하지수는 그의 냉담함에 실망하지 않았다.이렇게 앉아서 옷을 갈아입는 저를 봐주는 것도 그의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문수 왔구나.”허영지의 부름에 송문수가 짤막하게 답했다.“좀 있다 모임 있어서 지수 데리러 왔어요.”“그래,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모임에 나가면 좋지.”전에는 송문수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거절은 안 해도 표정은 굳어지던 허영지가 너그럽게 대꾸하는 것도 의외였다.“아직 이르니 너도 정장 한번 입어보고 가.”“바로 가야 되는데 갈아입기 귀찮아요.”“얼른 갈아입어.”“엄마, 나 온종일 일해서...”“지수가 너 준다고 한참 고른 건데 와이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줘?”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목석같기만 한 제 아들을 보며 허영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엄마의 말을 들은 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하지수는 다급히 말했다.“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르긴 했는데 갈아입기 싫으면 그냥 보기만 해. 맘에 들면 당신 사이즈로 맞출게.”“입어볼게, 맘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송문수가 하도 담담하게 대답해서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주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옷을 골라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놀라는 중이었다.기쁜 마음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송문수가 나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진짜요?”송문수가 직원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자 하지수가 나서며 말했다.“진짜야. 진짜 너무 멋있다.”“그래?”하지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해 하며 대꾸했다.“다 내가 잘 생겨서 그런 거야. 옷이랑은 큰 상관 없지.”이렇게 가끔 자아도취 하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에게로 다가가 넥타이를 정리해주었다.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송승우만은 아주 언짢아하
생일파티에 관한 일을 다 의논한 뒤 하지수는 허영지와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러 갔는데 하지수의 드레스도 같이 맞추자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그녀도 옷을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하필 그때 송승우가 송문수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옷을 다 입어보고 나서도 시어머니와 쇼핑을 하느라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하지수는 송문수에게서 연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송승우가 이번에도 자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하지수가 그걸 보고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그녀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버렸던 송승우는 이내 송문수가 자신이 올린 인스타를 봤을 생각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신문에 고정한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수 씨.”송문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지수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이 재회할 때나 나올법한 목소리에 송승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아직도 바빠?”“어머니 모시고 드레스 피팅해보고 있었어. 지금은 디자이너님이랑 디테일 얘기하고 있어. 나도 아까 하나 입어봤는데 사진 보내줄게.”“지금 데리러 갈 건데 어디야?”잔뜩 신나서 말하던 하지수는 이제 고작 4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했다는 송문수가 의아하여 놀라며 물었다.“퇴근했어?”“주말이라서 일찍 퇴근했어.”“회사도 좀 안정돼서 직원들도 앞으로 주말은 다 쉬기로 했어.”“그래.”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불러준 하지수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허영지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송문수와 하지수가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송승우는 화도 내지 않는 송문수에 혹시 그가 하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송문수는 인스타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화에 핸드폰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하지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심정이 굴뚝같은데 그런 그녀가 옛날에 좋아하던 송승우와 함께 있는 걸 본 이상 그는
결국 송승우에게 차 키를 내어준 하지수가 허영지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자연스레 뒷좌석에 타려 하는데 송승우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지수야, 넌 앞에 타.”“어머니랑 같이 앉을게요.”“장안시에 길은 나도 잘 몰라서 알려줄 사람이 필요해.”단호한 그의 말을 하지수가 거절하기 어려워하자 허영지가 나서며 말했다.“그럼 내비게이션 켜. 바로 윌런 호텔로 갈 거야, 호텔 사장이랑 얘기 다 끝나서 아마 우리 기다리고 있을 거야.”말을 마친 허영지는 또 일부러 하지수를 보며 말했다.“지수는 나랑 같이 타자, 말동무해줘.”“네, 어머니.”제 옆에 앉지 않아도 된다고 저렇게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좋아하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표정을 굳힌 채로 운전석에 올라탔다.그렇게 내비게이션을 켜고 윌런 호텔로 출발하자 허영지가 하지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수야, 어제 내가 한 말 그냥 흘려듣지 말고 잘 생각해봐.”“무슨 말이요?”“너랑 문수 아이 얘기 말이야.”“아, 네.”“그냥 대답만 하지 말고 노력을 해야 애가 생기지.”허영지가 거리낌 없이 남사스러운 말을 하자 하지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답했다.“어젯밤에 문수 씨랑도 얘기했어요.”“문수도 알겠대?”“네.”“그럼 난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지?”하지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허영지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그럼 나는 할머니 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게.”그런 허영지와 반대로 하지수가 송문수의 아이를 낳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송승우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갈고 있었다.윌런 호텔에 도착한 뒤 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장 사무실로 향해 파티 당일의 규모와 배치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비즈니스적인 자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꺼리던 송승우는 얘기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그렇게 심심해하던 송승우는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허영지와 하지수도 담긴 사진이었지만 그 둘은 파티 준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
“하지수, 변호사 일할 때는 똑똑하더니 연애에는 영 소질이 없나 봐?”자는 척하고 자신을 놀려먹은 건 송문수인데 오히려 바보라고 핀잔을 듣자 화가 난 하지수가 얼굴을 붉혔다.“네가 나한테 뽀뽀하는 게 좋으니까 계속하라고 가만히 있은 거잖아!”송문수가 언성을 높여 말해서야 이유를 알게 된 하지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표정에 어이가 없어진 송문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렇게 바보 같아서 어떡해, 누가 너 팔아넘겨도 모르겠다.”“누가 누구한테 바보래. 내가 당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인 줄 어떻게 알고...”말을 채 끝맺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입을 맞춰오며 진득한 키스를 이어나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눈을 크게 떴다.“아...”아까 자신이 한 건 그저 뽀뽀이지 이렇게 치열을 훑고 지나가는 키스는 아니었는데 입속 깊은 곳까지 뜨겁게 만드는 키스는 옆에서 핸드폰이 울리건 말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송문수도, 하지수도 그 벨 소리를 무시한 채 키스를 이어나가다 둘의 입술이 다 번들번들해질 때가 되어서야 송문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지수를 놓아주었다.송문수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진 하지수는 나른한 눈빛으로 송문수를 보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보던 송문수는 갑자기 욕설을 내뱉더니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달려들어 갔다.그의 샤워 소리가 들릴 때에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도 시간을 보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변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규칙적이고 자율적인 일상을 보내왔던 하지수였기에 그녀는 자신이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송문수를 만난 뒤부터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송문수가 만약 자신을 팔아넘겨도 그를 도와 돈을 세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었다.생리대부터 바꾸러 제 방으로 돌아간 하지수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송문수도 옷을 갈아입은 채로 거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평소에는 7시에 일어나서 8시 정도면
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새 깨어난 지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송문수는 다정한 눈을 한 채 떨리는 손으로 제 옆에 누운 하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하지수는 방금 일어난 탓에 낯선 주위를 한참이나 둘러보고서야 여기가 송문수의 방임을 기억해냈다.관계 빼고는 별짓 다 한 어젯밤이 떠오른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혼자 자는 게 습관 되어있어 송문수의 품에 안긴 뒤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아마도 바쁜 일정 때문에 피곤했던 것 같다.완전히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송문수를 바라보았다.자고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처럼 차갑지 않고 쫙 펴진 미간 덕분에 오히려 부드러워 보여 공격성이 다분하지도 않았다.왜 눈을 뜬 모습과 감은 모습이 이렇게 다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송문수의 얼굴을 찬찬히 보던 하지수는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전에는 그 눈빛이 마음속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아 두려웠었는데 지금의 하지수는 더 이상 잠들어있는 송문수도, 깨어있는 송문수도 두렵지는 않았다.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깨어있는 송문수를 마주할 때는 하지수가 주동적으로 입을 맞출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잠들어있을 때는 그야말로 하지수 세상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송문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하지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입을 맞추다가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릴 때가 돼서야 행동을 멈추었다.물론 자의로 멈춘 건 아니고 입맞춤을 하던 와중에 눈을 떠버린 송문수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깜짝 놀라 잠시 멈칫한 것이었다.당황한 하지수는 빠르게 도망가려 했지만 자신을 눌러버린 송문수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분명 방금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송문수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몽롱한 느낌은 전혀 없는 눈으로 그는 하지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의 진득한 눈빛을 당해내지 못한 하지수는 서둘러 눈을 피했
“미안해 문수 씨... 평소엔 이때가 아니라서 나도 몰랐어...”“응.”이 일은 애초에 하지수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던 송문수는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한탄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수를 만나는 날만 기다리며 3년 동안 아무와도 관계를 하지 않았던 그인지라 오늘에서야 비로소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겠다고 기뻐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또 일주일을 더 기다리게 된 이 상황에 송문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한숨을 쉬는 송문수를 본 하지수는 그가 자신에게 실망한 줄로 알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다음에 다시 할까?”하지수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이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해? 생리 끝나면 당장 해.”자신한테 자꾸 일이 생겨버려 송문수가 다른 사람을 찾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던 하지수는 확신에 찬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며 청심환을 하나 먹고는 말했다.“그럼 편히 자, 난 내 방 가서 잘게.”“어디 간다는 거야?”“내 방 가야지.”“하지수, 네 발로 직접 내 방 찾아와 놓고 이제 돌아가겠다는 거야?”갑자기 터진 생리 때문에 관계를 못 가진 것도 화가 나는데 사람까지 가버리겠다는 말을 들은 송문수는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나 생리 와서 어차피 못하잖아.”“그게 왜?”“아까 문수 씨도 생리 끝나면 하자고 했잖아. 지금 하는 건 나도 좀...”송문수가 되묻자 하지수는 아주 난감해하며 답했다.“하지수, 넌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아까 너 안 놔줬으면 여기 진작에 피바다 됐어.”“...”“관계까지 할 사이에 뭘 내외를 하고 그래. 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앞으로 쭉 같이 자자고? 나랑?”“왜, 싫어?”“아니.”당연히 싫진 않았지만 하지수는 그저 송문수가 관계도 없는 잠을 자신과 함께 자겠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그렇게 순진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빨리 와서 자. 아까 너무 움직였더니 피곤해.”송문수가 먼저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눕자 하
송문수의 입술이 하지수의 입술을 지나 그녀의 귓가에 닿을 때, 이런 식의 스킨십은 처음 해보는 하지수는 온몸이 떨려왔다.태어나서 딱 한 번, 송문수와 차에서 해본 게 전부인 그녀는 송문수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하고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목에 자신의 고개를 비볐다.그렇게 하지수를 안달 나게 하던 송문수는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걸 확신하고는 점차 행동을 대범하게 하기 시작했다.자연의 섭리인 것마냥 물 흐르듯 움직임을 이어나가던 송문수가 갑자기 멈췄을 때 하지수는 온몸이 뜨거워 나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온몸이 나른해진 그녀는 송문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참 지나 송문수가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가 그를 보며 물었다.“왜 그래?”제 아래에 누워있는 하지수를 보며 정말 이성을 잃을까 봐 걱정된 송문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문수 씨?”하지만 하지수는 아까는 그렇게 늑대처럼 달려들던 사람이 갑자기 말도 안 하고 거친 숨만 연신 내뱉는 게 이상했다.“문수 씨...”“지수야.”송문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자 그 숨결에 의해 뜨겁게 달궈진 피부에는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곧 자신이 상상했던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아주 아름다운 순간이었는데 다른 여자들한테는 다 곁을 내주면서 왜 자기 앞에서는 갑자기 멈추는 건지 하지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본인이 여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져서 송문수가 싫어하는 걸까 봐 자연스레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송문수가 잔뜩 실망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너 생리 왔어.”“뭐?”송문수의 말에 깜짝 놀란 하지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송문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속옷에 피 묻어있어, 아마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수치스러움에 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이틀 뒤가 예정일인데 왜 갑자기 오늘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민망해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하마터면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