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자리를 마무리할 때는 이미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소이연도 어지러워 눈앞이 흐렸지만, 본인이 주선한 자리인 만큼 그들을 바래다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딸꾹.” 예수진이 술에 취해 딸꾹질을 했다. 역시 그녀도 흐린 눈을 하고 말했다. “됐어요, 지수가 데려다주면 돼요. 어차피 우리는 같은 방향이니까.”말을 하면서 예수진은 하지수를 끌고 룸을 나갔다.소이연은 허둥지둥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세 사람 모두 취해있었지만, 주정을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특히 하지수는 정신이 아주 멀쩡했다.소이연도 원래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이지만, 예수진과 처음 같이하는 술자리인 만큼 예수진에게 맞춰주었고, 예수진도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멈출 줄 모르는 술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지수는 그런 예수진 앞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컨트롤했다.예수진은 하지수와 함께 검은색 승용차에 올랐다. 소이연은 그들을 배웅한 뒤에야 이승윤의 차로 돌아와 뒷좌석에 기대앉았다. 속이 조금 불편했다.그녀의 눈빛은 덤덤하게 창밖의 장안시의 야경을 향해 있었다. 네온사인 불빛이 하늘에 비쳤다.갑자기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소이연은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았다.메시지에는 “집 도착하면 꿀물 꼭 마셔.”라고 쓰여있었다.소이연은 답장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육현경이 떠난 후 그는 거의 매일 그녀에게 두세 통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모두 못 본 척하기로 했다.......승용차가 육씨 저택에 멈춰 섰다.예수진은 뒷좌석에 기대어 잠들었다.방금까지만 해도 차에서 육현경에게 전화해 오늘 소이연을 어떻게 취하게 했는지 자랑을 있는 대로 하더니 바로 곯아떨어졌다.하지수는 예수진이 술에 취하면 바로 잠들고, 일어나면 바로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생활할 수 있는 게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는 진정한 술꾼이었다.하지수가 차에서 내려 예수진을 방에 데려다주려던 그때였다.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계지원은 예수진을 그녀의 침대에 눕혔다. 눕히고 나서도 바로 자리를 뜨지 않았다.그의 눈에는 그녀의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과 새빨간 입술을 보고 있었다.머릿속에 갑자기 오늘 촬영한 예수진의 키스신이 떠올랐다……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 기다란 손가락을 그녀의 입술에 올려 살포시 쓸어내렸다. 마치 그녀의 입에 묻은 더러운 무언가를 닦아내는 듯했다.그는 한참을 진지하게 닦아냈다.닦다 보니 그녀의 입술이 조금 부어오른 것 같았다.손가락을 치우려던 그때 계지원의 몸이 아래로 기울었다. 아주 미세하게 기울었다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자리를 떴다.방문이 닫혔다.깊게 잠든 그녀의 눈에서 한줄기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 것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소이연은 머리가 조금 아팠다.술에 취한 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하려니 정말 끔찍했다.예수진은 정말 술을 너무 잘 마셨다.그녀가 돌아간 뒤 거의 밤새도록 토했다. 정말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것 같았다.그녀는 커피를 마시며 해장을 했다.“이사님, 계약서 준비됐습니다. 예수진의 매니저 다인 씨도 전화로 계약서 작성하자고 했고요.” 장문기가 정중하게 말했다.소이연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도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가자.”비록 어제는 예수진이 이랬다저랬다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육현경과의 관계가 있으니 이번 앰배서더 일은 너무 순조로워서 조금 불안하다.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전까지는 마음속의 큰 돌을 내려놓지 못할 것 같다.“공식 홍보 전에는 우선 비밀로 해주세요.” 소이연은 장문기에게 신신당부했다.자연스럽게 예수진의 매니저에게도 말해두었다.“네.” 장문기는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비서를 바꿔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아무 일도 지켜내지 못했을 것이다. 즉, 무슨 일이든 생겼을 것이다.소이연이 눈을 찡긋했다.갑자기 지금 회사의 대부분의 직원들은 아직도 아버지의 손바닥 안에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확실히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소이연은
“잘게.”“미안, 내가 방해했구나.”육현경이 사과할 때마다 전혀 성의가 느껴지지 않았다.그저 인사치레로 하는 말 같았다.나중에도 계속 ‘미안’할짓을 할 거면서 말이다.“무슨 일 있어?”“그냥 돌아왔다고 말하러 왔어.”“알았어.”소이연이 쌀쌀맞게 대했지만 육현경의 지친 모습을 보고 이내 목소리가 누그러졌다.“전화로 얘기하면 되는데 굳이 이 밤에 오고.”“너 휴대폰이 고장난 줄 알았어.”그 말 뜻은 자신의 메시지를 무시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다,“요즘 정신없었어.”소이연이 대충 핑계를 댔다.“소연아...”“늦었어. 얼른 집에 가서 쉬어.”소이연이 바로 말을 잘라버렸다.“내일 출근해야 돼.”육현경은 뒷말을 삼키고 침묵했다.“조심히 가.”소이연이 문을 닫아버렸다.육현경은 이렇게 문전 박대를 받으면서 문이 닫히는 걸 보고만 있었다.‘착각이 아니야. 소연이 나를 피하고 있어.’그날 저녁에 느낄 수 있었다. 소이연이 점점 자신을 받아준다고 생각했었는데 무슨 일 때문에 또 천리 밖으로 밀어내는 건지 알 수 없었다.육현경은 어쩔 수 없이 단지에서 나왔다.단지 입구까지 바래다주었던 택시는 이미 떠나고 없다.침울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이명진이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대표님.”“어디 있어?”육현경의 목소리가 싸늘했다.“사모님 댁에 가신 게 아니었어요?”“당장 튀어 와!”“네. 알겠습니다.”이명진은 기사에게 방향을 틀라고 손짓했다.대표님 혹시 쫓겨난 거야?사모님 대박, 정말 특이하신 분이라니까.다른 여자들은 대표님과 하룻밤이라도 자려고 옷을 막 벗고 달려드는데!이명진은 불이 나게 육현경 앞에 도착해 공손하게 문을 열어주었다.육현경이 노려보는 시선에 등골이 오싹했다.아, 분위기 어쩔 거야역시 공기는 한기가 들 정도로 추웠다.“휴대폰이랑 지갑 줘.”육현경의 분부에 이명진은 돈을 덜덜 떨며 건네주었다.“가죠!”택시가 떠나고 이명진이 홀로 떡하니 도로에 남겨졌다.지금 시간은 새벽 3시, 멀리 사
소이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패기 있게 회의실에서 나갔다.유봉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마흔을 넘은 나이에 새파랗게 어린 여자한테 위협을 당할 줄이야.홧김에 바로 소승영에게 연락했다.“상관하지 말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해.”소승영은 전혀 소이연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져.”“알겠습니다.”유봉이 그제야 사악하게 웃었다.소이연, 너 언제까지 까불 수 있는지 두고 보자.…소이연은 장문기를 데리고 은하그룹 공장으로 갔다.노동자들이 파업을 해?갑자기 파업을 할 이유가 없었다.공장이 외곽에 있어 꽤 거리가 있었다.소이연은 점심도 먹지 않고 공장장 이창덕을 만나러 갔다.이창덕의 태도는 무례했다.생각하지 않아도 유봉과 한 통속이고 소승영의 사람이라는 걸 알수 있었다.“새 회장님께서 매우 젊으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젊은 분이실 줄은 몰랐습니다.”이창덕은 회장님이라도 부르면서 오히려 비꼬는 말투로 말했다.“제 딸 나이와 비슷해 보입니다. 제 딸은 아직 아버지한테 애교만 부리는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다니. 정말 분통하네요.”소이연은 못 알아들은 척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유 부장님 말로는 노동자들이 파업했다고 하던데 무슨 일입니까?”“왜겠습니까? 월급이 너무 적아서 그러죠.”“은하그룹에서 주는 월급은 용역 일대에서 주는 것에 비해 합리적이고 복리후생도 다른 공장보다 더 좋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그런데 회장님께서 서둘러 생산을 하라고 하면 노동자들이 밤을 새면서 해야 합니다. 야근수당도 없는데 누가 가만 있겠습니까?”소이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누구도 이런 말을 보고하지 않았다. 특수한 상황이라면 무조건 특수한 방법으로 처리했을 텐데 말이다.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지금은 꼭두각시처럼 소승영에게 계속 끌려 다니는 신세다.“회장님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없으면 저 일보러 가겠습니다.”이창덕이 나갈 때까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소이연은 입을 꾹 다물고 공장에서 나왔다.공장 입구에 도착하자
공장 2층 사무실 창가에서 이창덕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그 장면을 보고 있었다.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연락했다.“소 선생님. 소이연이 이미 직원들에게 잡혔습니다. 아마 쉽게 돌려보내지 않을 겁니다.”소승영은 소씨그룹 사무실에 앉아 시가를 피우며 전화를 받고 있다.“버릇을 고쳐줘야지.”“걱정 마십시오.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목적에 달성한 소승영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늙은 생강이 더 맵다고 감히 자신한테 덤벼들다니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지.“아버지. 소이연이 정말 공장으로 갔어요?”소나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참 겁도 없어. 그런 인간들 무리에 혼자 가다니. 그 인간들은 수준도 떨어지고 야만적인 걸 몰라? 그러게 왜 거기 가서 갇혔대?“상관하지 마라.”소승영은 전혀 소이연의 걱정을 하지 않았다.“오늘 네게 할 얘기가 있어서 불렀다.”“네.”소나은이 얌전하게 다가와 소승영 앞에 섰다.“문씨 가문에서 내게 연락이 왔다. 대외적으로 너와 문서인의 관계를 알리고 약혼식을 올리자고 하던데 왜 너는 망설이는 거냐?”소나은이 입술을 깨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아비에게 숨기는 게 있어?”“아버지, 지금은 문서인과의 관계를 밝히고 싶지 않아요.”“왜? 싫은 거야?”“좋아하지만… 우리 집안 상황이 걱정이 돼요.”소나은이 일부러 심호흡을 하며 마저 설명했다.“지금 언니와 육현경 사이를 알고 계시죠? 그때 육씨 어르신 칠순 생일에 아버지도 보셨을 거예요.”“육현경이 이연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다.”소승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육현경은 물론 육씨 가문에서도 스캔들로 더러워진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거다.”“근데 제 눈에는 보였어요. 육현경이 언니를 좋아해요.”“이연이 꼬셨겠지. 남자들이란 예쁘게 생긴 여자들에게 워낙 저항력이 없다. 아빠도 다 지나온 사람…”소승영이 말끝을 흐렸다.딸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기엔 조금 껄끄러웠다.“아무튼 육현경은 그저 호기심에 그랬을 거다. 호기심이 사라지면 그땐 가차없
은하공장에서 소이연이 어떻게 설명을 해도 노동자들은 고집을 부렸다.소승영의 지시에 따르고 고의적으로 물의를 일으킨다는 걸 잘 알고 있다.오늘 목이 나갈 정도로 설득을 해도 이 사람들을 위로할 수 없다.소이연은 결정을 내렸다.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아 슬며시 장문기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밖에 나가서 경찰을 불러와.”“근데 회장님 혼자서…”“걱정 마. 나 정도는 챙길 수 있어.”“알겠어요.”장문기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천천히 소이연과 떨어졌다.노동자들의 목표는 소이연이지 장문기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장문기가 그 틈을 타 인파속을 비집고 나와 경찰에게 신고했다.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멘탈을 부여잡고 신고할 생각을 한 회장님에게 탄복했다.방금까지만 해도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몰라 당황했었다.그저 오늘은 퇴근을 못하겠다는 한심한 생각만 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렌 소리가 들리자 노동자들이 더 격노했다.“경찰이 떴다!”“분명 소이연이 신고한 거예요. 어떻게 신고를 할 수가 있어요?!”“우리 일을 처리해줄 마음이 없었던 거야!”노동자들은 초조했다.경찰들이 들어오며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공장 입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소이연은 그 틈을 이용해 빠져나왔다.“회장님 조심하세요!”장문기는 줄곧 소이연만 주시했다. 혹시라도 모를 사고가 일어날까 봐.한 노동자가 격분하면서 쇠막대기를 들고 소이연의 등을 향해 내리치려고 했다.소이연도 위험을 느끼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저 쇠막대기로 맞으면 전치 8주는 나올 것 같았다.하지만 경찰이 워낙 멀리 있어 막아줄 수도 없었다.탕!탁한 소리가 들린 순간 주변이 쥐 죽든 듯이 조용해졌다.쇠막대기를 들고 내리 치던 노동자도 깜짝 놀랐다.경찰이 달려와 그 노동자를 제압하고 꼼작 못하게 붙들었다.소이연은 두려웠지만 천천히 눈을 떴다.왠지 전혀 통증은 없고 누군가 자신을 꼭 안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고개를 돌려 봤더니 육
소이연은 망설이다가 육현경과 함께 차에 올랐다.“저기요!”그때 경찰이 다가와 닫으려는 차문을 잡았다.“같이 경찰서에 가셔서 진술하고 합의라도 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장 비서. 네가 경찰서에 가. 승윤이 차가 여기서 기다릴 거야.”“알겠습니다. 회장님 먼저 병원으로 가세요.”소이연과 이명진이 양측에서 육현경을 부축하고 마이바흐 고급차에 올라탔다.정안시립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명진이 미리 육씨 개인 의사에게 연락했다.육현경은 뒷좌석에 기대 앉아 두 눈을 감고 있다.쇠막대기로 어디를 맞은 거야?소이연은 창백한 얼굴을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뼈와 장기도 다쳤나?차마 아래까지는 보지 못하고 택시 네이비만 쏘아봤다.빨리 달리라고 재촉하듯이 말이다.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의사들이 입구에 줄을 서 있었다.차에서 내리자 간호자들이 부축했다.“으윽.”육현경의 신음 소리에 소이연이 주먹을 꽉 쥐었다.많이 아픈 거야?소이연은 의사 뒤를 따라 응급실로 들어갔다.“걱정 마.”오히려 육현경이 위로를 해왔다.소이연은 아랫입술을 물고 안쓰럽게 쳐다보았다.육현경이 출장을 갔다 온 후 한 달이나 싸늘하게 대했다.육민이 있는 접대 자리에만 나가서 육민하고 놀아주고 육현경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그래도 육현경은 늘 육민을 데리고 집에 왔었다.육민의 외로움을 달려주려고 데려오는 줄 알았는데.예상치도 못하게 오늘 육현경이 공장에 나타났다.걱정이 되어 수술실 앞에서 두 주먹을 꽉 쥐고 기다렸다.세 시간이 지나 드디어 수술실 문이 열렸다.간호사들이 육현경을 밀고 나왔다,이명진이 먼저 다가가 다급하게 물었다.“의사 선생님. 저희 대표님 괜찮으십니까?”소이연은 어떤 답이 나올지 너무나 무척 긴장되었다.“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 등이 심하게 다쳤는데 근육 대부분이 손상되고 오른쪽 갈비뼈에 금이 가고 허리 부분이 스쳐서 3-4주 동안 입원하셔야 합니다.”그제야 이명진이 안심하고 소이연도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켰다.“병실로 옮기겠습니다.”“감
소이연의 가슴이 떨렸다.감동받지 않았다면 순 거짓말이다.하지만…애써 자신의 정서를 누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다른 사람한테도 그러니?”다른 여자들한테도 목숨을 거냐고?“너.한.테.만.”육현경이 한 글자마다 강조하며 말했다.“그래서 내가 좀 특별하다는 건가?”육현경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왠지 질문에 다른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근데 공장에는 왜 왔어?”육현경이 대답하기 전에 소이연이 화제를 돌려버렸다.그의 개인적인 일을 물을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이승윤이 네가 공장에 갔다고 했어. 네가 당할까 걱정이 돼서 간 거야. 그 시간에 도착해서 다행이지.”아니면 이 침대에 누워 있을 사람은 소이연이다.만약 정말 그랬다면 얼마나 슬퍼할지 상상도 못하겠다.소이연의 눈동자가 순간 싸늘하게 변했다.“아버지가 직원들을 매수해서 그렇게 시킨 거야.”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예전부터 내가 은하그룹을 인수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어. 나를 쫓아내기 위해서 그런 꿍꿍이를 꾸민 거야.”“내가 도와줄까?”“네가 끼어드는 게 싫어.”소이연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육현경이 바로 눈을 감아버렸다.그게 무슨 뜻인지 소이연은 알고 있다.“너까지 다치게 하다니 두고 봐. 내가 반드시 벌을 받아 마땅한 자들은 한 명이라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소이연의 눈빛이 점점 싸늘해졌다.소씨 가문에 대한 참을성도 이젠 한계를 넘어섰다.전에 성한 곳이 없이 상처를 받았지만 복수란 건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다.어쨌든 소 씨 성을 가진 이상 서로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다 생각했었다.그런데 양보를 하면 할수록 이 인간들은 염치도 모르고 계속 괴롭혔다.이런 인간들에게 애초부터 선한 마음을 갖지 말았어야 했다.“알았어.”육현경이 대답했다.소이연의 결정을 존중하기로 하고 시선이 닿는 범위 내에서 눈 감아 주기로 했다.그때 소이연의 휴대폰 소리가 울렸다.번호를 확인하니 베란다로 가서 받았다.“회장님. 진술은 끝났습니다. 회장님을 해쳤던 유걸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
하지만 원체 쇼핑을 싫어하는 송문수의 성격을 알고 있던 하지수는 그의 냉담함에 실망하지 않았다.이렇게 앉아서 옷을 갈아입는 저를 봐주는 것도 그의 노력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문수 왔구나.”허영지의 부름에 송문수가 짤막하게 답했다.“좀 있다 모임 있어서 지수 데리러 왔어요.”“그래, 젊은 사람들이야 그런 모임에 나가면 좋지.”전에는 송문수가 밖에 나가겠다고 하면 거절은 안 해도 표정은 굳어지던 허영지가 너그럽게 대꾸하는 것도 의외였다.“아직 이르니 너도 정장 한번 입어보고 가.”“바로 가야 되는데 갈아입기 귀찮아요.”“얼른 갈아입어.”“엄마, 나 온종일 일해서...”“지수가 너 준다고 한참 고른 건데 와이프 위해서 그 정도도 못 해줘?”남녀 사이에 있어서는 목석같기만 한 제 아들을 보며 허영지가 미간을 찌푸렸다.엄마의 말을 들은 송문수가 하지수를 바라보자 하지수는 다급히 말했다.“잘 어울릴 것 같아서 고르긴 했는데 갈아입기 싫으면 그냥 보기만 해. 맘에 들면 당신 사이즈로 맞출게.”“입어볼게, 맘에 안 들 수도 있으니까.”송문수가 하도 담담하게 대답해서 떨리는 그의 손가락을 주의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사실 그는 하지수가 자신을 위해 옷을 골라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놀라는 중이었다.기쁜 마음 반 당황스러움 반으로 옷을 갈아입은 송문수가 나오자 직원들은 일제히 그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너무 잘 어울리세요, 손님 더 멋있어 보이는 것 같아요.”“진짜요?”송문수가 직원들의 말을 반신반의하자 하지수가 나서며 말했다.“진짜야. 진짜 너무 멋있다.”“그래?”하지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송문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득의양양해 하며 대꾸했다.“다 내가 잘 생겨서 그런 거야. 옷이랑은 큰 상관 없지.”이렇게 가끔 자아도취 하는 송문수를 보며 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에게로 다가가 넥타이를 정리해주었다.그 둘의 다정한 모습을 보던 주위 사람들은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송승우만은 아주 언짢아하
생일파티에 관한 일을 다 의논한 뒤 하지수는 허영지와 함께 그녀의 드레스를 맞추러 갔는데 하지수의 드레스도 같이 맞추자는 시어머니의 권유에 그녀도 옷을 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그래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인데 하필 그때 송승우가 송문수의 전화를 받게 된 것이다.옷을 다 입어보고 나서도 시어머니와 쇼핑을 하느라 굳이 핸드폰을 보지 않았던 하지수는 송문수에게서 연락이 온 줄도 모르고 있었다.다시 한번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을 때 송승우가 이번에도 자신이 받으려고 했는데 하지수가 그걸 보고 빠르게 핸드폰을 낚아채 갔다.그녀의 행동에 표정이 굳어버렸던 송승우는 이내 송문수가 자신이 올린 인스타를 봤을 생각에 다시 입꼬리를 올리며 시선을 신문에 고정한 채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문수 씨.”송문수의 이름을 부르는 하지수의 목소리에는 기대와 반가움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잠시 떨어져 있던 연인이 재회할 때나 나올법한 목소리에 송승우의 표정은 한층 더 어두워졌다.“아직도 바빠?”“어머니 모시고 드레스 피팅해보고 있었어. 지금은 디자이너님이랑 디테일 얘기하고 있어. 나도 아까 하나 입어봤는데 사진 보내줄게.”“지금 데리러 갈 건데 어디야?”잔뜩 신나서 말하던 하지수는 이제 고작 4시밖에 안 됐는데 퇴근했다는 송문수가 의아하여 놀라며 물었다.“퇴근했어?”“주말이라서 일찍 퇴근했어.”“회사도 좀 안정돼서 직원들도 앞으로 주말은 다 쉬기로 했어.”“그래.”고개를 끄덕이며 주소를 불러준 하지수는 웃는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허영지에게로 다가갔다.하지만 송문수와 하지수가 싸울 것이라 예상했던 송승우는 화도 내지 않는 송문수에 혹시 그가 하지수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하지만 사실 송문수는 인스타를 보자마자 차오르는 화에 핸드폰을 손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다른 사람이 채갈까 봐 하지수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심정이 굴뚝같은데 그런 그녀가 옛날에 좋아하던 송승우와 함께 있는 걸 본 이상 그는
결국 송승우에게 차 키를 내어준 하지수가 허영지와 함께 밖으로 나간 뒤 자연스레 뒷좌석에 타려 하는데 송승우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웠다.“지수야, 넌 앞에 타.”“어머니랑 같이 앉을게요.”“장안시에 길은 나도 잘 몰라서 알려줄 사람이 필요해.”단호한 그의 말을 하지수가 거절하기 어려워하자 허영지가 나서며 말했다.“그럼 내비게이션 켜. 바로 윌런 호텔로 갈 거야, 호텔 사장이랑 얘기 다 끝나서 아마 우리 기다리고 있을 거야.”말을 마친 허영지는 또 일부러 하지수를 보며 말했다.“지수는 나랑 같이 타자, 말동무해줘.”“네, 어머니.”제 옆에 앉지 않아도 된다고 저렇게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좋아하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표정을 굳힌 채로 운전석에 올라탔다.그렇게 내비게이션을 켜고 윌런 호텔로 출발하자 허영지가 하지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지수야, 어제 내가 한 말 그냥 흘려듣지 말고 잘 생각해봐.”“무슨 말이요?”“너랑 문수 아이 얘기 말이야.”“아, 네.”“그냥 대답만 하지 말고 노력을 해야 애가 생기지.”허영지가 거리낌 없이 남사스러운 말을 하자 하지수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대답했다.“어젯밤에 문수 씨랑도 얘기했어요.”“문수도 알겠대?”“네.”“그럼 난 그냥 기다리고만 있으면 된다는 말이지?”하지수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허영지는 아주 기뻐하며 말했다.“그럼 나는 할머니 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게.”그런 허영지와 반대로 하지수가 송문수의 아이를 낳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송승우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를 갈고 있었다.윌런 호텔에 도착한 뒤 세 사람은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사장 사무실로 향해 파티 당일의 규모와 배치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비즈니스적인 자리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를 꺼리던 송승우는 얘기에는 참여하지 않고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그렇게 심심해하던 송승우는 문득 무슨 생각에서인지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허영지와 하지수도 담긴 사진이었지만 그 둘은 파티 준비에 열과 성을 다하고
“이연 언니가 왔다고?”오랜만에 들려온 소이연의 소식에 하지수는 흥분하며 답했다.“그럼 당연히 가야지, 오랫동안 못 봐서 안 그래도 궁금했는데. 육현경 씨랑 이연 언니가 나 엄청 많이 도와줘서 직접 만나서 감사 인사 하고 싶었어.”“계지원 씨 집에서 모이기로 했어. 예수진 씨 배도 점점 불러서 움직이기 힘드니까 그냥 거기서 보기로 했어.”“그래. 그럼 퇴근할 때 연락해. 나는 먼저 어머님이랑 아버님 생일파티 준비하고 있을게.”“응.”밥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각자 알아서 집을 나섰고 하지수는 바로 송 씨 가문별장에 시어머니를 모시러 갔다.하지수가 안으로 들어가자 송승우가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게 보였다.그와 단둘이 만나는 건 아직 어색했기에 하지수도 입을 다물고 있었는데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송승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엄마 모시러 온 거야?”“네.”“집에 계속 계시는 거예요?”“나갔으면 좋겠어?”헛웃음을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다급히 해명했다.“아뇨, 그냥 전에는 계속 일로 바쁘셨던 분이 계시니까 물어본 거예요.”“전에는 연구과제 때문에 바빴는데 이제는 나 없이도 잘 돌아가서 한가해.”“아, 네.”고개를 끄덕이는 하지수를 보며 그녀가 저를 불편해하는 걸 느낀 송승우는 올라오려는 화를 참으며 물었다.“문수는?”“출근했어요.”“주말에도 출근해?”“요즘이 회사한테 중요한 시기라서 일요일만 쉬기로 했대요. 내일은 안나가요.”사실 송문수에게는 거의 휴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처리해야 할 일이 매일 산더미여서 그는 시간만 나면 사무실에 틀어박혀 있었다.“송문수 많이 변했네.”“송문수가 변해서 너도 걔를 다시 보게 된 거야?”냉소를 흘리며 묻는 송승우에 하지수가 고개를 저었다.“잘 모르겠어요. 감정이라는 게 원래 언제 생겼는지도 모르게 생기는 거잖아요.”감정이라는 건 애초에 기척 없이 생겨서는 헤어나오지 못할 정도로 한 사람을 옭아매는 것이다.하지수의 말로부터 그녀가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를
“하지수, 변호사 일할 때는 똑똑하더니 연애에는 영 소질이 없나 봐?”자는 척하고 자신을 놀려먹은 건 송문수인데 오히려 바보라고 핀잔을 듣자 화가 난 하지수가 얼굴을 붉혔다.“네가 나한테 뽀뽀하는 게 좋으니까 계속하라고 가만히 있은 거잖아!”송문수가 언성을 높여 말해서야 이유를 알게 된 하지수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 표정에 어이가 없어진 송문수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이렇게 바보 같아서 어떡해, 누가 너 팔아넘겨도 모르겠다.”“누가 누구한테 바보래. 내가 당신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인 줄 어떻게 알고...”말을 채 끝맺지도 못했는데 갑자기 입을 맞춰오며 진득한 키스를 이어나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눈을 크게 떴다.“아...”아까 자신이 한 건 그저 뽀뽀이지 이렇게 치열을 훑고 지나가는 키스는 아니었는데 입속 깊은 곳까지 뜨겁게 만드는 키스는 옆에서 핸드폰이 울리건 말건 오래도록 지속되었다.송문수도, 하지수도 그 벨 소리를 무시한 채 키스를 이어나가다 둘의 입술이 다 번들번들해질 때가 되어서야 송문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하지수를 놓아주었다.송문수의 키스에 정신이 혼미해진 하지수는 나른한 눈빛으로 송문수를 보고 있었는데 핸드폰을 보던 송문수는 갑자기 욕설을 내뱉더니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가 욕실로 달려들어 갔다.그의 샤워 소리가 들릴 때에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도 시간을 보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변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누구보다 규칙적이고 자율적인 일상을 보내왔던 하지수였기에 그녀는 자신이 아주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송문수를 만난 뒤부터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사람이 돼버린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송문수가 만약 자신을 팔아넘겨도 그를 도와 돈을 세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있었다.생리대부터 바꾸러 제 방으로 돌아간 하지수가 준비를 마치고 나오자 송문수도 옷을 갈아입은 채로 거실에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평소에는 7시에 일어나서 8시 정도면
말을 마친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새 깨어난 지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고 송문수는 다정한 눈을 한 채 떨리는 손으로 제 옆에 누운 하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이튿날 아침, 눈을 뜬 하지수는 방금 일어난 탓에 낯선 주위를 한참이나 둘러보고서야 여기가 송문수의 방임을 기억해냈다.관계 빼고는 별짓 다 한 어젯밤이 떠오른 하지수는 얼굴을 붉혔다.혼자 자는 게 습관 되어있어 송문수의 품에 안긴 뒤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울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눈을 감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아마도 바쁜 일정 때문에 피곤했던 것 같다.완전히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고개를 돌려 아직도 곤히 자고 있는 송문수를 바라보았다.자고있는 그의 모습은 평소처럼 차갑지 않고 쫙 펴진 미간 덕분에 오히려 부드러워 보여 공격성이 다분하지도 않았다.왜 눈을 뜬 모습과 감은 모습이 이렇게 다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송문수의 얼굴을 찬찬히 보던 하지수는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전에는 그 눈빛이 마음속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아 두려웠었는데 지금의 하지수는 더 이상 잠들어있는 송문수도, 깨어있는 송문수도 두렵지는 않았다.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깨어있는 송문수를 마주할 때는 하지수가 주동적으로 입을 맞출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하지만 잠들어있을 때는 그야말로 하지수 세상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송문수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한 번으로는 부족했는지 하지수는 그 뒤로도 여러 번 입을 맞추다가 누군가의 핸드폰이 울릴 때가 돼서야 행동을 멈추었다.물론 자의로 멈춘 건 아니고 입맞춤을 하던 와중에 눈을 떠버린 송문수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깜짝 놀라 잠시 멈칫한 것이었다.당황한 하지수는 빠르게 도망가려 했지만 자신을 눌러버린 송문수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분명 방금 눈을 떴는데 이상하게 송문수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몽롱한 느낌은 전혀 없는 눈으로 그는 하지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의 진득한 눈빛을 당해내지 못한 하지수는 서둘러 눈을 피했
“미안해 문수 씨... 평소엔 이때가 아니라서 나도 몰랐어...”“응.”이 일은 애초에 하지수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던 송문수는 하늘이 불공평하다고 한탄하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수를 만나는 날만 기다리며 3년 동안 아무와도 관계를 하지 않았던 그인지라 오늘에서야 비로소 원하던 바를 이룰 수 있겠다고 기뻐했는데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또 일주일을 더 기다리게 된 이 상황에 송문수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한숨을 쉬는 송문수를 본 하지수는 그가 자신에게 실망한 줄로 알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다음에 다시 할까?”하지수의 말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이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그걸 말이라고 해? 생리 끝나면 당장 해.”자신한테 자꾸 일이 생겨버려 송문수가 다른 사람을 찾기라도 할까 봐 두려웠던 하지수는 확신에 찬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웃음을 터뜨리며 청심환을 하나 먹고는 말했다.“그럼 편히 자, 난 내 방 가서 잘게.”“어디 간다는 거야?”“내 방 가야지.”“하지수, 네 발로 직접 내 방 찾아와 놓고 이제 돌아가겠다는 거야?”갑자기 터진 생리 때문에 관계를 못 가진 것도 화가 나는데 사람까지 가버리겠다는 말을 들은 송문수는 언짢은 티를 팍팍 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나 생리 와서 어차피 못하잖아.”“그게 왜?”“아까 문수 씨도 생리 끝나면 하자고 했잖아. 지금 하는 건 나도 좀...”송문수가 되묻자 하지수는 아주 난감해하며 답했다.“하지수, 넌 날 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아까 너 안 놔줬으면 여기 진작에 피바다 됐어.”“...”“관계까지 할 사이에 뭘 내외를 하고 그래. 앞으로는 나랑 같이 자.”“앞으로 쭉 같이 자자고? 나랑?”“왜, 싫어?”“아니.”당연히 싫진 않았지만 하지수는 그저 송문수가 관계도 없는 잠을 자신과 함께 자겠다는 게 신기했을 뿐이다.그렇게 순진해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는데.“빨리 와서 자. 아까 너무 움직였더니 피곤해.”송문수가 먼저 침대 한쪽에 자리를 잡고 눕자 하
송문수의 입술이 하지수의 입술을 지나 그녀의 귓가에 닿을 때, 이런 식의 스킨십은 처음 해보는 하지수는 온몸이 떨려왔다.태어나서 딱 한 번, 송문수와 차에서 해본 게 전부인 그녀는 송문수의 유혹을 당해내지 못하고 서서히 그에게로 다가가 그의 목에 자신의 고개를 비볐다.그렇게 하지수를 안달 나게 하던 송문수는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였다는 걸 확신하고는 점차 행동을 대범하게 하기 시작했다.자연의 섭리인 것마냥 물 흐르듯 움직임을 이어나가던 송문수가 갑자기 멈췄을 때 하지수는 온몸이 뜨거워 나고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온몸이 나른해진 그녀는 송문수의 움직임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한참 지나 송문수가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가 그를 보며 물었다.“왜 그래?”제 아래에 누워있는 하지수를 보며 정말 이성을 잃을까 봐 걱정된 송문수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문수 씨?”하지만 하지수는 아까는 그렇게 늑대처럼 달려들던 사람이 갑자기 말도 안 하고 거친 숨만 연신 내뱉는 게 이상했다.“문수 씨...”“지수야.”송문수가 한참 만에 입을 열자 그 숨결에 의해 뜨겁게 달궈진 피부에는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곧 자신이 상상했던 일이 현실이 될 수 있었던 아주 아름다운 순간이었는데 다른 여자들한테는 다 곁을 내주면서 왜 자기 앞에서는 갑자기 멈추는 건지 하지수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본인이 여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져서 송문수가 싫어하는 걸까 봐 자연스레 눈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송문수가 잔뜩 실망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너 생리 왔어.”“뭐?”송문수의 말에 깜짝 놀란 하지수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송문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속옷에 피 묻어있어, 아마 온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그제야 정신을 차린 하지수는 수치스러움에 빨개진 얼굴로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이틀 뒤가 예정일인데 왜 갑자기 오늘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민망해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하마터면 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