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지원은 그렇게 예수진의 다급한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쓸쓸하게 웃으면서.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 자신뿐이었다.그는 몸을 일으켰다.마치 온몸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그는 자리를 뜨려 했다.하지만 귀신이 들린 듯, 예수진의 뒤를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갔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날씨도 이렇게 춥고, 길에 사람들도 거의 없는데, 예수진 혼자, 혼자는... 위험하니까.그는 그렇게 거리를 유지하며 예수진의 뒤를 따라갔다.예수진은 정말 누군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떡볶이만 빨리 먹고 돌아갈 생각뿐이었다.빠른 걸음으로 포장마차에 가서 떡볶이 1인분을 외쳤다.사장님은 그녀와 수다도 떨었다. “오늘은 왜 남자친구랑 안 왔어?”“일이 있어서요.”예수진은 자신의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비록 꽁꽁 둘러 싸맸지만, 그래도 예전에는 꽤 유명한 사람이었으니, 들키고 싶지 않았다.“남자친구가 엄청 잘해주던데. 저번에 와서 너 준다고 떡볶이 사 가는데, 식을까 봐 옷 속에 품고 가더라. 방금 나온 떡볶이가 얼마나 뜨거운 지 아니?”예수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어떨 때는 그녀가 밖에 나오고 싶지 않아서 하도경이 사다 주었다...진작 알았으면 일찍이 하도경이랑 사귀는 거였다.도대체 그때는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혼자 끙끙 앓았을까.“천천히 먹어, 뜨거워.” 사장님이 그녀에게 떡볶이를 건네주며 말했다.“감사합니다.”예수진은 떡볶이를 먹으며 하도경에게 전화를 걸었다.두 사람의 달콤한 대화는 물론 심지어 방금 사장님과 예수진의 대화까지도 계지원은 다 들었다.그는 사실 정말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하지만 그녀는 정말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떡볶이를 다 먹고, 예수진은 자신을 다시 꽁꽁 싸매고 자리를 떴다.역시 하도경과 계속 통화하고 있었다.이때 하늘에서 갑자기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올해 장안시의 첫눈이었다.예수진은 조금 흥분해서 말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하도경과 기쁨을 나누면서 길을 건너고 있었다.“끼익
계지원은 찰과상을 입었다.기사가 브레이크를 제때에 밟아서 너무 심하게 다치지 않았다.바닥에 마찰할 때 피를 꽤 많이 흘렸지만 다른 치명상은 없었다.그래도 혹시나 후유증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입원하며 관찰해 보기로 했다.의사가 설명을 마친 후 병실에 계지원과 예수진만 남게 되었다.예수진은 입원 수속을 하면서 받은 영수증과 약을 병상 옆 서랍장에 올려 놓았다.“이건 영수증이고 이건 약과 교체할 약들이에요. 여기 놓을게요. 휴대폰 혹시 고장 났어요?”계지원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녀는 담담하고 낯설게 대했다.“아니면 내 휴대폰으로 육씨 저택에 전화할래요?”예수진이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필요 없어.”계지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녀도 강요하지 않았다.아무튼 계지원은 육씨 가문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걸 싫어했다.필경 육씨 식구들 앞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유지해야 하니 절대 먼저 육씨 가문에게 귀찮은 일을 만들어주지 않았다.“내가 간호사 불러올까요?”예수진이 또 물었다“됐어.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야.”계지원이 거절했다.“알았어요.”예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별일 없으면 나 먼저 갈게요.”예수진이 돌아서 나가려고 할 때였다.“수진아.”계지원이 불러서 그녀가 뒤돌아보았다.“손바닥 상처는 치료하고 가.”계지원이 말했다. 당시 그가 밀쳐낼 때 예수진이 넘어지면서 손바닥이 바닥에 마찰했다.그 바람에 손바닥에 핏자국이 났다.“알아요.”“너 지금…”그때 마침 예수진의 휴대폰이 울렸다.계지원이 하던 말을 삼켜버렸다.“도착했어?”예수진이 물으면서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계지원을 대하는 태도와 완전 하늘과 땅 차이었다.그가 시선을 돌려버리고 그녀가 전화하는 소리만 들었다.통화를 마치고 예수진이 휴대폰을 내리며 그에게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아니야.”계지원이 고개를 저었다.그 말에 예수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늦은 시간이라서 돌아갈 때 조심하라고.”계지원이 말하자 예수진이 바로 직언했다.“내 남
한 달 동안 소이연은 육현경을 보지 못하고 메시지와 소식도 전달받지 못했다.그녀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솔직히 그동안 바쁘게 보냈다. 한 달 동안 은하 그룹의 고급 의류를 순조롭게 출시하여 사회에서 아무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은하 그룹의 주가도 상승하여 짧은 시간 내에 기업 가치가 올라 장안시에서 수많은 상류 그룹을 초과하기도 했다. 이 그룹에서도 몇 대를 거쳐 이어온 사업이라 소이연이 갑자기 기세가 높아지자 상업계에서 모두 향후 10년 동안 최고의 다크호스라고 여겼다.상업계에서 전설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외계에서 그녀에 대한 평가가 너무 높아 소이연은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명성이 높을수록 다른 사람의 시기를 받는다는 도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심지어 누군가 일부러 추켜 세운다고 의심했다.그녀가 상황을 통제할 수 없으면 순응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본인 외에도 자신의 파트너를 책임져야 하니까.심문헌과 협력한 한 달 동안, 그는 장안에 올 시간이 많지 않아 대부분 메일로 교류했다.그녀는 마케팅 기획안과 수익 보고서를 제때에 심문헌에게 보내주면서 계속 업무를 진행하다 보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소이연은 일주일 동안의 매출 보고서를 심문헌에게 제출한 후, 그의 전화를 받았다.“낙성에 올래요?”심문헌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한 달 동안 접촉한 후 심문헌은 겉으로는 점잖지만 일 처리하는 속도가 절대 꾸물거리지 않고 번개처럼 빠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시간을 굉장히 소중하게 여겼다.“네?”“할아버지가 이연 씨를 만나고 싶어 하셔요.”“왜요?”소이연이 물었다.“아마도 이연 씨가 마음에 드시나 보죠.”심문헌이 웃었다.“문헌 씨, 우리 협력은 비즈니스 가치를 기반으로 하고 심아윤이라는 공통 목표가 있기 때문이에요. 다른 누구도 연루시킨다고는 하지 않았어요.”“걱정 마세요. 할아버지가 잡아먹지 않아요.”“죄송해요. 거절할게요.”“다음 주에 심아윤의 가문에서 낙성시에 자선 파티를
”왜?”소이연은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며 물었다.“돌아가서 설명할게.”“결혼 날짜를 발표하는 거야?”소이연이 직설적으로 말했다.그러자 그가 한참을 침묵했다.“예상했던 결과야. 나한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아.”소이연이 분명하게 말했다.“그것만은 아니야.”“육현경, 가끔 넌 정말 무서울 정도로 이기적이야.”소이연이 또박또박 말을 끊어서 했다.육현경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너와 심아윤의 결혼이 어쩔 수 없다고 쳐. 그래도 심아윤 입장에서 두 사람이 연인 사이이고 정당한 관계야. 이렇게 나한테 집착하고 놓아주지 않으면 심아윤에게 공평할까? 물론 나도 너그럽지 못해서 나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을 동정하지는 않아. 난 그냥 너의 무책임함이 지겨워서 그래. 심아윤한테도 그렇고 나한테도.”“난 심아윤과 결혼하지 않을 거야.”육현경이 다시 반복했다.말투가 강한 것이 분노를 억누르는 것 같았다.“그건 네 일이야. 어떻게 하든 다 네가 선택할 일이야. 나 지금은 열심히 노력해서 내 인생을 살고 싶어. 더는 날 방해하지 않으면 안 돼?”소이연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낙성에 오지 마. 내가 약속할게. 내 개인적인 일을 해결하기 전에 다시는 널 귀찮게 하지 않을게.”육현경이 약속했다.“누가 나한테 초대장을 보냈어? 심태섭이야?”소이연이 물었다.“그래.”“내가 심태섭을 거절하면 상업계에서 계속 몸을 담을 수 있을까?”“지금은 너의 칼끝을 거두어야 할 때야.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너를 노리고 있어.”“내가 칼끝을 거두면 그 사람들이 날 노리지 않을까? 육현경, 내가 뭘 하든 다른 사람에겐 눈엣가시야. 이 모든 것이 다 너 때문이고.”“내가 다 보상할게.”“필요 없어!”소이연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무조건 낙성에 갈 거야. 자선 파티에도 갈 거야. 너와 심아윤이 결혼 날짜를 발표하든 말든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소이연, 내 충고를 들어. 감정적으로 그러지 말고.”“너는 내가 화풀이하려고 낙성에 가는 줄 알아? 내가
”현경은 이연 씨를 해치지 않아요.”“근데 정말 내 한계를 건드렸어요!”소이연이 벌컥 문을 닫아버렸다.계지원도 소이연이 화났다는 걸 알고 있다.육현경의 처사 때문에 그녀가 쉽게 용서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소이연은 속에서 불이 나는 것 같았다.그래도 자신을 계속 진정시키며 어떻게 나갈 방법이 없는지 냉정하게 생각했다.그녀의 세계에서 육현경이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그 누구라도 허락하기 싫었다!소이연이 눈을 찔끔 감고 심문헌에게 전화했다.“몇 시에 도착해요? 내가 마중하러 갈게요.”심문헌이 전화를 받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누가 길을 막아서 가지 못해요.”상대방의 당황함이 휴대폰 너머로 느껴졌다.“육현경인가요?”“네.”“내가 도와줄까요?”“네.”“지금 바로 갈게요.”심문헌은 고민도 하지 않고 말했다.“알겠어요.”소이연이 전화를 끊었다.유일한 희망은 심문헌밖에 없었다.점심 시간이 되자 소이연이 문을 열었다.계지원이 아직도 밖에 서있고 몇몇 경호원들도 여전히 공손한 자세로 서있었다.“들어오세요.”소이연이 계지원을 집으로 불렀다.계지원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점심 드세요.”“네.”계지원은 거절하지 않고 소이연의 집으로 들어갔다.“면 끓이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드실래요?”소이연이 물었다.“고마워요.”소이연이 주방에 들어가서 국수 두 그릇을 들고 왔다.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 아주 점잖게 먹기 시작했다.“육씨 저택에서 나왔어요?”소이연이 먼저 물었다.“네.”“가능성이 없다면 떠날 필요도 없잖아요.”“될 대로 되겠죠.”계지원이 담담하게 말했다.왠지 속세를 다 꿰뚫어본 느낌이 들었다.마치 자신이 잘 지내든 안 지내든 어떻게 지내든 상관없는 것 같았다.슬픔은 마음이 죽은 것보다 더 컸다.“수진이 지금 잘 지내고 있어요.”소이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밥할 줄도 알아서 시간이 되면 자기 음식 솜씨를 맛보라면서 집에 지수 씨랑 나를 초대하기도 해요.”“네.”계지원
점심을 먹은 뒤, 소이연은 계지원을 쫓아내지 않았다.계지원도 자발적으로 나가지 않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소이연은 서재에서 일을 처리하고 두 사람은 겉보기엔 화기애애했다.계지원이 소파에 앉아서 계속 하품을 했다.그동안 계속 불면증에 시달렸고 가끔 밤새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졸려서 안절부절못하지는 않았다.그냥 텔레비전을 보는 게 너무 지루해서 졸린다고 생각했다.계지원은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보다가 또 뉴스도 검색했다.뉴스에 온통 오늘 저녁 심씨 그룹에서 여는 자선 파티에 대한 소식으로 가득했다.보다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계지원은 결국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쥔 채로 잠들어버렸다.그때 소이연이 서재에서 나왔다.계지원이 소파에 쓰러져 고르게 숨을 쉬는 것을 확인했다.소이연이 그에게 수면제를 먹인 것이다.평소 그녀도 불면증이 있어 수면제를 집에 챙겨 놓고 있었다.수면제의 효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빨랐다.적어도 30분에서 1시간은 기다려야 완전히 숙면을 취할 거라 생각했다.계지원이 엊저녁에 제대로 자지 못해서 몸이 피곤하여 효과가 빨리 퍼진 것 같았다.“지원 씨.”소이연이 그를 불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그저 미간을 찌푸리는 게 다였다.계지원은 이미 깊은 잠에 들어서 눈을 뜨지도 못했다.소이연은 그가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문 쪽으로 향했다.심호흡을 한 뒤 벌컥 문을 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빨리 들어와 보세요. 지원 씨가 갑자기 쓰러졌어요.”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두 남자는 서로 멀뚱히 쳐다보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빨리 들어와서 병원에 데려가세요! 혹시 죽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질 거예요?”소이연이 다급하게 재촉했다.두 남자가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소이연이 잡아당겼다.그들도 따라서 집으로 들어갔다.계지원이 소파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계 선생.”한 경호원이 그를 불렀다.계지원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 눈을 뜰 수가 없었
앞에서 검정색 승용차에서 두 사람이 내리더니 차 앞을 막았다.“내가 나가서 볼게.”뒷좌석에 앉은 경호원이 그들을 발견하고 차에서 내렸다.귀찮은 일을 빨리 해결하고 병원에 가려고 했다.소이연은 손잡이를 잡은 손에서 식은땀이 났다.경호원이 내려서 몇 걸음 가는 것을 확인하더니 재빨리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운전석에 앉은 경호원이 눈치를 채고 차에서 내려 그녀를 막으려고 했다.하지만 소이연은 이미 뒤를 따라오던 검정색 차량에 앉은 뒤였다.경호원에 달려간 순간 승용차는 이미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떠나버렸다.어쩔 수 없는 경호원은 얼굴을 찡그리며 휴대폰을 들고 보고했다.“육 선생. 소이연 씨가 도망쳤어요.”…소이연은 심문헌의 승용차에 올라탔다.가슴이 지금도 두근거렸다.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자신을 진정시켰다.심문헌은 옆에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싱긋 웃었다.소이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봤다.재미난 구경이라도 보는 것 같은 태도에 기분이 언짢았다.“소이연 씨의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했어요.”심문헌이 입을 열었다.“육현경이 철저하게 감시해도 이렇게 쉽게 빠져나오다니.”소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쉽게 빠져나온 것이 아니라 계지원이 무방비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그녀는 자신을 믿는 사람을 속인 것이다.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결국은 거절해버렸다.소이연은 심문헌과 같이 그의 개인 비행기를 타고 낙성시에 도착했다.심문헌은 그녀를 데리고 낙성시에서 최고급 개인 병원으로 향했다.“가시죠.”심문헌이 말했다.“당신을 믿어도 되는 거죠?”“오늘 나와 낙성시에 오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연 씨는 나를 믿었어요.”심문헌은 자랑으로 여기며 미소를 지었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며 그를 따라 병원으로 들어갔다.지금 그녀가 만나러 가는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다.바로 심문헌의 할아버지, 심태정이다.소이연은 심태정을 본 적도 없고 뉴스에서 그의 사진을 본 적도 없다.하지만 병상에 누운 사람이 그렇게 큰 살상력이
심씨 자선회 현장.연회장 밖은 이미 인산인해로 들끓었다.기자, 팬, 경호원 그리고 둘러싼 군중들로 시끌벅적했다.이런 자리는 어떤 연예인의 콘서트에도 뒤쳐지지 않았고 오히려 지나치기까지 했다.검정색 롤스로이스 한 대가 레드 카펫 끝자락에 멈춰 섰다.심문헌은 옆에 앉은 소이연을 바라봤다.병원에서 나온 뒤 그녀를 따라 드레스르 갈아입으러 갔다.지금 그녀는 연두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그 모습이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워서 자꾸 시선이 갔다.“내릴까요?”심문헌이 물었다.하지만 그는 보통 사람처럼 정신력이 나약하지 않았다.소이연에게 매우 담담하게 대했다.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도 여전히 불안했다.육현경이 오지 말라고 했지만 그녀는 온갖 수단을 써가며 와버렸다.그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네.”소이연이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희미한 불빛이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비추었다.마치 수많은 별들이 눈부시게 빛나는 것 같았다.“뭐예요?”소이연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그제야 심문헌이 정신을 차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하지만 그 웃음은 희미해서 눈에 띄지 않았다.그가 눈짓을 하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차에서 내려 뒷좌석으로 오더니 공손하게 문을 열어줬다.심문헌이 가슴을 쭉 펴며 차에서 내렸다.내리자마자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다.카메라 플래시가 그의 주변에서 요란하게 반짝거렸다.심문헌은 반대편 차문에 다가가더니 신사처럼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가늘고 흰 손이 그의 손바닥에 살포시 얹혀졌다.현장은 1초 동안 정지되었다.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차에서 내리는 여주인공을 기다렸다.심씨 큰 도련님이 직접 현장에 데려오고 직접 허리를 굽혀 손을 잡으려고 하는 여자가 누군지 궁금하기도 했다.왜냐면 그동안 심문헌은 공식적인 자리에 여자 파트너를 데려온 적이 없고 그 흔한 스캔들도 없었기 때문이다.어떤 사람들은 심문헌의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지 않는지 의심했다.필경
술에 취한 하지수의 고집을 당해낼 수 없었던 송문수는 결국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밤늦은 시간에 별장에 들어가면 다른 가족들을 깨울 수도 있으니 집에서 잠만 재운다는 핑계를 대가며 말이다.송문수가 하지수를 침대에 눕히고 자리를 뜨려 하자 하지수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가지 마.”손끝에서 느껴지는 하지수의 온기에 송문수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하지수, 잘 봐. 나 송문수야.”“알아, 네가 송문수인 거. 나 버린 무책임한 놈이잖아 너!”풀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말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송문수가 감히 컨트롤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왜 날 송승우한테 넘긴 거야? 내가 물건이야? 네가 뭔데 날 송승우한테 준다 만다냐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지수는 침대에 올라 선 채 송문수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서 있지 말고 일단 앉아, 그러다가 넘어져.”“안 넘어져.”하지수는 송문수의 말을 듣지도 않고 계속 질문만 퍼부었다.“왜 날 밀어내는 건데! 내가 어디가 별로야? 몸매가 별로야 아니면 내가 못생겼어? 뭘 그렇게 일일이 다 따지고 들어? 넌 보는 눈이 그렇게 높아?”“일단 누워.”“싫어.”송문수가 그녀를 잡아주려고 손을 뻗으면 하지수는 곧장 몸을 돌려 피하곤 했다.그렇게 휘청대는 하지수를 보는 게 송문수는 조마조마하기만 했다.“내 말에 대답부터 해. 왜 날 싫어하는 거야?”“난 너 싫어한다고 안 했어.”그의 대답에 송문수를 향해 손가락질하던 하지수가 금세 눈시울을 붉혔다.“넌 그냥 내가 싫은 거잖아! 나 말고 밖에 있는 그 못된 여자들을 더 좋아하는 거잖아. 나도 그 여자들처럼 변하면 나 좋아해 줄 거야?”“그런 거 아니야.”“변명하지마! 넌 그냥 몸매 좋고 능숙한 그런 여자들만 좋아하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혼자 화를 내는 하지수가 송문수는 어이없기만 했다.술을 마신 하지수는 아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으니
예수진:[저 둘이 나랑 지원 씨보다 더한 것 같아요.]소이연:[수진 씨도 본인들이 너무했다는 건 아네요.]예수진:[... 송문수랑 지수 얘기나 해요.]소이연:[일단 오늘은 지수 씨도 스트레스 풀게 그냥 놔두고 내일 다시 이야기해봐요.]예수진:[그래요.]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하지수는 5병의 맥주를 모두 비워냈다.이미 한계에 다다른 그녀는 해롱해롱해지고 몸에 힘도 빠지자 그대로 테이블에 엎드렸다.속도 쓰리고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아팠다.누가 자신을 억누르는 것만 같은 느낌에 하지수는 당장이라도 속 시원히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녀는 습관적으로 또 참아내고 있었다.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탓에 늘 불안에 떨며 살아와서 그런지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본 적이 없었다.감정을 숨기고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이는 게 하지수라는 사람이었다.“다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이제 일어나.”예수진이 말을 꺼내자 소이연도 남편을 보며 말했다.“현경아, 시간도 늦었는데 우리도 이만 갈까?”아내 바라기였던 육현경은 이미 입가에 가져다 댄 술잔도 바로 내려놓고는 그녀를 따라나섰다.그들이 떠나고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던 하도경 역시 예수진의 눈짓에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그럼 나도 갈게.”아직 술을 덜 마신 게 아쉽긴 했지만 예수진의 눈빛을 당해낼 수 없었던 하도경은 결국 소이연 부부의 뒤를 따라갔다.모두가 자리를 뜨자 예수진은 그제야 술을 퍼마시고 있는 송문수를 향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수 집에 좀 데려다줘.”“오늘은 그냥 여기서 자고 가라고 해.”“안돼, 난 손님 집에서 안 재워.”“하도경은 너희 집에서 잤잖아.”“지수랑 하도경이랑 같아? 걔는 내 남편이 될뻔한 사이였잖아.”아무 말이 막 하는 예수진 때문에 계지원은 마음이 아파왔다.하룻밤 사이에 두 남자의 마음을 후벼 파 놓은 예수진은 아무렇지 않게 웃음을 터뜨리는 송문수를 보며 말을 이어나갔다.“어쨌든 아직은 이혼 전이니까 네가 지수 남편이야. 지수 안전은 너한
그 말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어색해지자 예수진이 다급히 말을 받았다.“너랑 나랑은 다르지.”“뭐가 다른데?”“난 너 안 좋아하니까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거야.”그런 아픈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예수진에 하도경은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헤어질 때 준 상처로는 부족했는지 만날 때마다 이렇게 하도경의 가슴을 후벼 파는 예수진이었다.“진짜 사랑했던 사람들은 친구가 될 수 없어, 내 말이 맞지 지수야?”일부러 하지수를 언급했지만 그녀는 입술만 말아 물고 있었고 오히려 송문수가 대답을 가로챘다.“그냥 친구로 지낼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그럴 수도 있지.”하지수는 입까지 올라온 말을 삼켜냈고 예수진은 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막 뱉는 송문수를 노려보며 저 싹수면 이혼당할 만하다고 생각했다.“우리 진짜 오랜만에 모인다, 다음에 만날 때쯤이면 우리 애도 다 태어났겠어.”“도경아, 오늘은 진짜 취하기 전엔 아무도 집에 보내지 말자.”계지원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하자 하도경도 눈치 있게 대꾸했다.“좋아.”어차피 예수진 때문에 마음고생을 너무 해서 더 다칠 마음도 없었기에 하도경은 공허한 제 가슴에 술이나 퍼부으려고 맥주를 따기 시작했다.그렇게 남자들 앞에 한 병씩 놓아준 하도경은 여자들을 보며 물었다.“우리 여자분들은 물, 우유, 음료수 중에 고르세요.”“전 물 마실게요, 알아서 마실 테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전 맥주 주세요.”평소엔 술을 즐기지도 않고 예수진과 소이연이 마실 때만 한 잔씩 같이 마시던 하지수가 갑자기 맥주를 요구하자 다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오랜만에 보는 거니까 저도 한잔하고 싶어서요. 요즘 송승우 옆에만 있느라 또 언제 나올지도 모르잖아요.”“송승우는 좀 어때?”궁금한 건 못 참는 예수진이었기에 말 나온 김에 하지수를 향해 물었다.“아직도 죽겠다고 난리야?”“아니,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다 큰 남자가 왜 자기 목숨으로 가족들 협박하는 거야?”처음에는 송승우를 안타까워
그 한 달 동안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부모님이 같이 밥이라도 먹자고 집으로 불러도 송문수는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가족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았다.말은 그렇게 해도 본인이 내키지 않아서 안 온다는 걸 허영지와 송기명은 알고 있었다.불행 중 다행으로 송승우의 회복속도는 눈에 띄게 빨랐다.송씨 집안 주치의가 매일같이 검사를 진행하며 회복속도를 체크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면 두 달 뒤에 바로 의족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소견도 듣게 되었다.그 말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내 큰 시름을 덜었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송승우와의 교제를 약속한 하지수도 매일 그의 옆을 지키며 함께 재활 치료를 진행하고 있었다.그렇게 별장에서만 지내던 어느 날, 하지수는 예수진의 전화를 받게 되었다.곧 출산하는 데 그러면 산후조리원에 가야 해서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지 못하니 그전에 한 번 만나서 원 없이 밥이나 먹자는 연락이었다.그 말을 들은 하지수는 자신에게도 기분전환이 필요하다 싶어 더 고민할 것도 없이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지금 본인의 상태가 우울한 건지는 잘 몰랐지만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송문수도 가는 거야?”예수진과 밥을 먹으러 간다는 얘기를 송승우에게 했을 때 그가 던진 첫마디가 바로 저것이었다.송문수와 예수진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송문수와 하지수가 따로 만날까 봐 걱정돼서 한 질문인 것 같았지만 하지수는 바로 대답했다.“몰라요, 그건 안 물어봤어요.”“그런데 문수 씨가 간다고 해도 내가 못 갈 이유는 없잖아요. 송문수 때문에 내 가장 친한 친구를 안 볼 순 없어요.”하지수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 당황했던 송승우는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속 아프니까 술은 너무 많이 마시지 마.”“네.”그날 저녁 하지수는 바로 예수진의 집으로 향했다.그때 집에는 예수진의 가족뿐이었는데 안 본 사이 더 커진 배를 보니 두
이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둘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 숨 막힌 정적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송문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송문수는 하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을 나서버렸다.서울을 떠날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시야가 흐려졌다.하지수는 뿌얘진 시야에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이튿날, 하지수는 약속대로 송문수와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는데 송문수는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하지수가 차에서 내리며 안에 앉아있는 또 다른 이와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그 안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송승우일 것이기에 송문수는 시선을 돌리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대화를 마친 건지 종종걸음으로 송문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오래 기다렸어? 미안해.”“아니야, 내가 빨리 온 거야.”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송문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들어가자.”“그래.”그렇게 둘은 법원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송문수가 합의서를 건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작성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USB 챙겼으니까 여기서 고칠 수 있어.”사실 어젯밤 송문수가 파일을 보내와서 하지수는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싸움도 없었고 이익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니 재산분할에도 큰 문제 없었다.그럼에도 제게 40억을 주겠다는 송문수를 하지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차피 큰돈도 아니라서 헤어지는 대가로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 그저 받기로 했다.송문수한테는 정말 적은 돈이긴 하니까.그리고 돈으로서 둘 사이를 깔끔히 정리하는 걸 송문수도 원할 것 같아 하지수는 결국 그걸 받는 조건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이다.이혼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다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핸들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임에도 송문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하지수는 송승우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송승우의 몸은 껌딱지처럼 하지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그를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히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마치 매일 하던 행동인 것 마냥, 그래서 몸에 배어버린 것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하지수, 송문수, 송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 도착해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보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집이 그리웠던 허영지와 송기명은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편한 호텔에서 자도 제집만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잠부터 청했다.그리고 송승우도 피곤해해서 하지수는 휠체어를 밀며 그를 방에 데려다주었다.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송문수는 소파에 앉아 하지수를 기다렸다.원래는 송문수를 데려다주고 나가려 했는데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하지수 때문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솔직히 하지수가 언제 내려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잠에서 깬 다음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송문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하지수가 보이자 송문수의 심장박동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몸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며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하지수가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부부인데도 부부답지 않았고 가족임에도 가족 같지 않은 둘의 애매모호한 사이 때문이었다.이렇게 보니 제 인생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것 같아 송문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뭐야?”송문수는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하지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난 충동적인 적 없어요, 그리고...”하지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송승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그럼 너 나랑 다시 사귈 수 있어?”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하지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송승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내가 아닌 송문수를 좋아한다는 걸 난 못 믿겠어. 난 아직도 네가 그때 내가 말도 떠난 일로 화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다시 사귀자. 6개월만 만나보고 그때도 네가 송문수를 선택한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하지수는 자신이 송승우를 다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완벽히 포기해야 끝나는 싸움이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하지수는 이제 송승우와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좋아요.”하지수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자신만만했던 송승우의 얼굴에는 바로 미소가 번졌다.자신이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송승우는 그래도 하지수의 사랑을 다시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송승우는 단 한 번도 송문수를 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지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저를 놔두고 멍청한 송문수를 선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건이 하나 더 있어.”“말해요.”“문수랑 이혼부터 해.”“네가 나랑 사귀겠다고 했잖아.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게 싫으니까 당당하게 너랑 만나고 싶어.”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생각에 잠겼다.송문수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송승우와 만나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존중을 깨는 거라서 하지수도 썩 내키진 않았다.“알겠어요.”하지수가 이혼만 하면 저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기에 송승우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뭐든 말만 해.”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하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송승우는 하지수는 어차피 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일주일 뒤, 송승우가 퇴원하자 드디어 가족들이 전부
“네.”“회사 일을 이제는 문수가 다 책임지고 있으니까 빨리 가는 것도 맞지, 승우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이제 매일 간호할 필요도 없잖아.”하지수를 직접 키워온 허영지는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그래서 빈말이지만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네.”그런 허영지의 노력을 보아낸 건지 하지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저 이제 중환자실에서도 나오고 의사 선생님도 별문제 없다고 했으니까 두 분은 먼저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며칠만 더 있으면 퇴원도 가능하다고 하잖아요.”“그래.”송승우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고 또 지금 하지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아들의 속내가 너무 눈에 훤해서 허영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우린 그럼 먼저 갈게. 지수야, 승우 잘 부탁해. 네가 고생이 많다.”말이야 친절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하지수의 발을 여기 묶어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네.”하지수 역시 제 시어머니의 의도를 알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하지수의 대답을 들은 허영지는 마음이 한결 놓여 송기명을 밀며 병실을 빠져나갔다.송기명은 등 떠밀려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데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허영지와 송기명이 나간 병실에는 하지수와 송승우 둘뿐이었다.“과일 좀 먹을래요?”“응, 고마워.”하지수가 먼저 그 어색한 정적을 깨며 묻자 송승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배를 집어 든 하지수는 열심히 깎기 시작했는데 송승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지나 껍질을 다 깎아낸 하지수는 배를 작게 썰어 송승우의 앞에 놓아주었다.“천천히 먹어요.”“넌 안 먹어?”“입맛 없어요.”송승우는 입맛 없다는 하지수에게 굳이 권하지 않고 천천히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도도하고 자신만만하던 송승우의 모습을 다시 본 하지수는 송승우의 말대로 거기에 자신의 공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송승우의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송문수를 기다리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그래도 작별인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차 문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송문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그냥 차에 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가 그를 불러세웠다.“문수 씨.”“장안시로 돌아가면 서울엔 다시 올 거야?”“안 올 것 같아 아마. 송승우도 많이 나았으니까 얼마 안 있으면 퇴원하겠지. 그럼 엄마 아빠가 송승우 집에 데려가서 보살피려 할 텐데 내가 뭐하러 여기까지 와 힘들게.”“그래서 나 혼자 여기 버려두겠다는 거구나.”하지수가 내뱉은 담담한 한마디에 송문수는 심장박동이 멎는 것만 같았다.숨을 내쉴 수조차도 없이 가슴이 아파와서 그는 이를 악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여전히 침묵만 유지하는 송문수에 마지막 기대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송문수 말대로 자신은 그저 그가 마음을 다잡을 때 마침 옆에 있었던 여자일 뿐이니,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도 욕심인 것 같았다.아무리 노력해봐도 송문수의 마음은 저를 향하지 않으니 하지수는 이제 그와의 사이를 끝내려 했다.“조심히 가.”이렇게라도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했으니 하지수는 그거면 된 것 같았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저 짤막한 한마디만 내뱉고 웃으며 돌아섰다.그 작은 몸통이 외로이 돌아서는 걸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왔다.정말 제가 하지수를 버린 것만 같아서, 또 하지수를 혼자만 남겨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려왔다.주먹을 꽉 말아쥔 채 온몸을 떨어대던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제 충동을 잠재우며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수에게는 송승우가 있었으니, 그녀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혼자일 리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했다.한편 한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