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가 극에 달했다. 그는 예수진이 혼자서 어두운 계단을 걸어가는 것이 마음에 걸려, 그녀를 찾아 헤매다가 이 광경을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감히 예수진에게 뭘 팔라고? 젠장! 하도경은 그 남자의 행동이 납득되지 않아, 다시 한번 주먹으로 남자의 머리를 세게 쳤다. 몸이 빈약한 그 남자는 하도경에게 맞고 땅에 쓰러져 용서를 빌고 있었다. "때리지 마세요, 제발... " 남자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안고 끊임없이 사정했다. 예수진은 그 순간 하도경이 남자를 때려죽이도록 놔두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면 일이 커진다. 예수진은 하도경을 끌어당기며 말렸다 하도경은 씩씩거리며 거칠게 숨을 쉬며 그를 그만 때렸다. 정말 그를 때려죽이고 싶었다! 남자는 땅바닥에서 신음소리를 내며 겨우 벽을 짚고 일어섰다. 예수진은 손에 들고 있던 돈가방을 그에게 던지며 말했다. "6천만 원이에요. 이 돈을 가지고 나서도 다시 우리를 찾아와 귀찮게 하면, 그때는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남자는 돈을 받을 줄 몰랐다는 듯 어리둥절했다. 옆에 있던 가연도 황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이 많은 돈을 어디서 구했어? 네가 써야지 왜 저 사람을 줘. 왜 이렇게 멍청해...” 그렇게 말하며 가연은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는 가방을 열고 돈을 확인하고, 몸에 생긴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절뚝거리며 나가면서 말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게. 다시는 안 와...” 그녀가 생각을 바꿀까 봐 두려워 그는 빠르게 사라졌다. 남자가 가자마자 집안이 조용해졌다. 예수진은 하도경을 보며 말했다. "너도 빨리 가.” "저 남자에게 돈을 주려고 했던 거야? 저 남자가 누군데?" 하도경이 화내며 물었다. 짐승 같은 그 남자에게 예수진이 당할 뻔한 일들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하도경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예수진도 하도경에게 솔직하게 자초지종을 말했다. "내가 그 새끼를 때려 죽였어야 했어." 하도경은 짜증 내며 말했다. "죽여도 괜찮았겠어?" 예수진이 대꾸했다
다음날. 소이연의 소송 건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이미 3일 전부터 떠들썩하기 시작했고, 이날은 더욱 시끄러웠다. 인터넷 검색어 상위 10위 중 절반은 소이연에 관한 것이었다. 아침 8시, 하지수는 소이연과 함께 법정에 도착했다. 법정으로 들어가는 건물 계단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제가 처리할까요?" 하지수가 소이연에게 물었다. "아니에요”. 하지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차 문을 열고 소이연과 함께 내렸다. 그녀들이 도착하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하지수는 최선을 다해 소이연을 감싸며 자신의 뒤로 보냈다. 두 사람은 기자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였다. "소이연 씨, 이번 소송에 대해 어떻게 예상하십니까?” "몇 년 형을 받을 것 같습니까?” "창창했던 미래가 하루아침에 망가졌는데, 범죄를 저지른 걸 후회하나요?” "며칠 전 소씨 가문 기념일에 왜 안 갔습니까? 유백희 씨가 소이연 씨와 소씨 가문은 관계를 끊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인가요?” "소씨 가문에서 당신을 이렇게 대해서 섭섭하신 가요? 소씨 가문에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기자들이 많은 질문을 했지만, 현장이 너무 시끄러워서 소이연은 질문을 잘 들을 수 없었다. "소이연 씨, 대답 좀 해주세요." 기자는 끝까지 그녀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소이연은 심호흡을 하고 큰 소리로 대답했다. "결과는 재판을 해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생각합니다. 판결은 법원에서 해주 실 것입니다. 저는 법이 공평하다고 믿습니다.” “미스 소…” "소씨 가문과의 관계는." 소이연은 질문을 끊고, 기억나는 질문에 관해 큰소리로 답했다. "그들은 어떤 관계라고 말하든, 저는 그들의 의사를 존중합니다.” "그 일에 관해 불만은 없나...” "대답할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대답해 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재판시간을 지체하여 이미 많은 분들께 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이제 비켜주세요!"소이연은 그렇게 말하고 하지수와 함께 기자들을 뚫고 지나갔다. 기자들이
언젠가는 그녀도 맨 위에 서서 발 밑에 있는 모두를 짓밟을 것이다. "육현경 씨, 소이연의 소송을 직접 보러 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육현경 씨와 소이연 씨는 그냥 지인 아닌가요? 바쁜 일정에도 시간을 내서 직접 현장에 오신 이유가 있나요?” "내가 육현경 씨에게 같이 오자고 부탁했어요.” 질문이 이어지자 심아윤이 끼어들었다. "육현경 씨는 약혼녀와 함께 오신 것이군요. 그럼 심아윤 씨는 왜 소이연 씨의 소송을 보러 오셨나요?" 기자가 긍정적으로 물었다. "소이연 씨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육씨 가문은 장안시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그 사업을 소이연과 함께 할 생각이 있었지만 갑자기 사고가 나서 아쉽게 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오늘 그녀의 마지막 결과를 보고 싶어 참석한 것뿐입니다" 심아윤은 의례적으로 대답했지만, 예의 바르고 관대해 보이게 만들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심아윤 씨, 장안시에서 사업을 크게 확장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됩니까?” "그렇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앞으로 장안시에 있을 시간이 많을 것입니다.” "심아윤 씨는 장안시의 예비 며느리로서 자연스럽게 장안시에서 살게 될 것 같은데, 심아윤 씨와 육현경 씨의 결혼 날짜는 확정되었습니까? 언제입니까?" "아직은 결정된 것이 없습니다. 결정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발표하겠습니다." 심아윤은 성격이 좋아 보였다 "육현경 씨, 심아윤 씨 축하합니다.” 기자들이 그녀의 비위를 맞추며 인사를 건넸다. "소이연 씨의 재판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이제 길을 내어 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심아윤이 정중하게 말했다. 기자들도 더 이상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그들 중 아무도 육씨와 심씨 가문의 사람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함께 법정으로 들어갔다. 법정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공개 재판인 데다, 장안시에서 소이연은 유명인이라 사회적 지위가 좀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참석해 있었다. 육현경과 심아윤은 앞쪽에 자리 잡았
잠시 후。 법정은 조용해졌다. 법정 담당 직원들이 법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소이연과 하지수는 법정으로 들어와 지정된 좌석에 앉았다. 육현경이 소이연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모습을 본 심아윤의 눈빛에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육현경이 소이연을 도와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큰 성과가 없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육현경이 짧은 시간 동안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소이연이 실형을 선고받으면, 육씨 가문이 죽어라 반대하지 않아도 육현경이 소이연과 다시 함께 있을 수 없다. 게다가. 소이연이 형이 확정되고 감옥에 가면 ‘사고’로 그녀를 죽게 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이 있다. 심아윤은 속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서기가 법정에서 지켜야 할 규율과 질서를 낭독하고 판사가 법정에 들어왔다. “일동 기립. 앉아주십시오.”판사가 개정을 선포했다. 공소를 제기한 검사 하석진이 사건을 진술했다. "지난 3일 검찰에 접수된 익명의 제보자가 은하 그룹 소이연 씨의 뇌물 16억, 탈세 100억 등 뇌물 공여와 탈세를 제보하였습니다. 익명의 제보자는 뇌물 공여 내역, 뇌물 공여자와 뇌물 수여자의 식사 사진 그리고 은하 그룹의 세무신고 내역서를 제출했습니다. 이에 검찰은 11월 4일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소이연 씨를 소환 조사했으며 범죄 사실이 명확해 같은 날 오후 행정 부서에 넘겨 구금했고, 이에 따라 검찰은 기소했습니다.” 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소가 성립됩니다. 검찰 측은 피고인의 범죄 증명서를 재판석에 넘겨주십시오.” "네." 하석진이 담당 직원에게 공손히 건넸다. 직원이 서류를 재판석으로 건네주었다. 하석진은 판사를 향해 말했다."재판장님, 익명의 제보자 유상구 씨의 증인 출석을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합니다.”유상구가 증인석에 섰다. 법정에 출두하기 전에 아무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는 철저히 숨어서 소이연이 그를 조사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어 소이연의 재무 담당자 장민혜를 증인석에 세웠다. "소이연 씨가 이 계좌에 10억을 계속 보내라고 했습니까?" 하석진이 물었다. "네." 장민혜는 소이연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재무 신고서도 소이연이 당신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까?” "네." "당신이 한 증언이 모두 사실인가요?” "네, 사실입니다." 장민혜이 확고한 말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하석진은 재판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판장님, 검사 측 심문은 여기까지입니다.” "검사는 제자리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네." 재판관은 하지수에게 말했다. "피고인 측 변호인, 공소에 대해 진술하세요.” 하지수는 고개를 들어 판사를 힐끗 보았다. 그녀는 방금 검사가 심문할 때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자료를 보고 있었다. 검사 측이 제시한 증거와 증인 진술에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무관심한 듯하여 참석한 사람들이 보기에 이미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판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자료에서 눈을 떼었다. 안경을 쓰고 검은색 슬림한 정장을 입는 하지수는 지성 넘치는 변호사처럼 보였다. 그녀는 재판 석 앞으로 나가 말했다. "제 의뢰인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그녀의 말에 장내가 시끌시끌해졌다. 맞아 죽어도 싼 일을 해 놓고도 뻔뻔스럽게 무죄를 주장하다니!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하지수를 다시 한번 보았다. 하지수는 사실 법정에서 변론하는 일을 많이 하지 않았고, 대부분이 송씨 가문의 분쟁을 해결해 왔기 때문에 변호사계에서는 유명하지 않았다. 변호사들은 소이연의 변호사가 하지수라는 말을 듣고 비웃으며 재판을 보러 오기도 했고, 변호사 사회 내부적으로 소이연의 사건을 이미 패소한 사건이라고 생각해다. 다른 변호사뿐 아니라 방청석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모두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소나은 역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법정에서는 녹화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법정 모독 현행범으로 잡
“첫 번째, 유상구는 세무서의 직원이며, 그가 은하 그룹의 세무 신고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발견한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어떻게 국장의 개인 계좌를 조사할 수 있었을까요?”“두 번째, 장민혜는 제 의뢰인이 그녀의 계좌를 통해 유혁에게 송금을 했고, 증거 중에 제 의뢰인의 은행 카드에서 10억이 움직였다고 했습니다. 게다가 은행에서 갑자기 CCTV가 고장 나, 이 카드를 만든 날의 영상을 제공할 수 없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세 번째, 장민혜는 제 의뢰인이 은하 그룹의 재무 보고서를 보고하도록 시켰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은하 그룹의 전자 서명은 비서가 처리하고 있고, 종이로 보관하고 있는 서류도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인재들이 있고, 서체를 모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요. 결론적으로, 저는 제 의뢰인이 무죄인 것을 변호할 이유가 있습니다!”하지수는 또박또박 조리 있게 세 가지 의문을 제시했고, 장내는 아수라장이 되었다.하도경은 참지 못하고 송문수에게 귓속말을 했다. “네 와이프 진짜 안 울면 다행이다. 울면 폭발이야!”송문수는 대꾸도 하지 않았고,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법정에서 유상구는 급히 입을 열었다. “제가 부국장님의 통장 내역을 알고 있는 건, 부국장님께서 전에 저한테 대신 입금을 부탁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도 마음이 생겨서 잔액 조회를 해봤더니 그렇게 큰돈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하지수는 웃음을 터뜨렸다.눈에 띄게 풍자하는 말이었다.그녀가 말했다. “유혁은 분명 자신이 몇 억의 뇌물을 받은 걸 알고 있었을 텐데, 이 통장을 가지고 가서 입금을 하라고 했다고요? 이건 당신한테 내 계좌 좀 보세요. 저 뇌물 10억 받았어요. 빨리 경찰에 신고하세요! 하는 거랑 똑같아요.”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사람들이 하지수의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정숙하세요!” 재판장이 꾸짖었다.사람들은 그제야 조용해졌다.“당당한 부국장으로서, 이 자리에 올라 이렇게 높은 지위와 무거운 권력
갑자기 이 사건에 일말의 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소나은의 낯빛도 뜻을 이룬 것 같던 얼굴에서 긴장한 얼굴로 바뀌었다.여전히 내색이 없던 심아윤은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구부려 주먹을 쥐고 있었다.소이연은 역시 그녀의 생각보다 훨씬 똑똑했다.그녀가 이 상황을 계획했을 때, 소이연이 현장에 없었다는 증거를 제출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재판장님, 제 의뢰인이 은행에 가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출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지수가 요청했다.“허가합니다.”하지수는 USB를 꺼내, 화면에 연결해 동영상을 재생하며 말했다.“이 카드가 개설된 지점은 성서 은행 지점이고, 개설 일시는 9월 15일 오전 10시입니다. 그리고 이 시각, 제 의뢰인은 은하 그룹에서 오전에는 계속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제 의뢰인의 당일 영상 기록이며, 시간 단축을 위해 4배속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진지한 얼굴로 영상을 보았다.영상이 재생되자, 소이연은 은행 카드가 그녀의 것이라는 혐의를 거의 벗었다.“이상입니다.” 하지수는 영상을 끄고 재판장에게 말했다. “저는 제 의뢰인이 죄를 뒤집어썼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반대합니다.” 하석진이 또 일어나 말했다.“은행 카드는 본인이 가지 않았어도, 은행원이 뇌물을 받고 뒷거래를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소이연은 유혁에게도 뇌물을 준 사람인데, 은행원이라고 뇌물을 주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고로 이 영상은 이 카드가 소이연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하석진의 해명으로 소이연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하지수는 당황하지 않고 부정할 것을 예상한 듯 재판장에게 말했다. “제가 장민혜 씨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허가합니다.”하지수는 장민혜를 마주 보며 물었다. “당신은 당신의 세무 신고서와 개인적으로 유혁에게 뇌물을 준 것도 제 의뢰인의 지시했다고 하셨습니까?”“네.”“그녀가 당신에게 어떤 혜택을 주며 불법적인 일을 지시했나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장민혜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그럼 당신 계좌로 입금된 돈들은 다 어디에서 온 겁니까?” 하지수가 압박했다.“저, 저...” 장민혜는 설명하지 못했다.하지수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몸을 돌려 재판장에게 말했다. “재판장님, 제 증인 1명을 더 출정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허가합니다.”60살은 되어 보이는 남자가 법정에 올랐다. 눈앞의 법정의 위엄에 놀라 불안해 보였다.더욱 불안해 보이는 건 장민혜였다. 남자를 본 그 순간, 낯빛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하지수는 남자에게 다가가 직설적으로 말했다. “여긴 법정이에요. 무서워하지 마시고, 진실한 대답만 하시면 돼요.”“네.” 남자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이름이 뭡니까?”“정의민입니다.”“무슨 일을 하십니까?”“모사가입니다.”“주로 어떤 걸 모사하십니까?”“오래된 그림, 명화 등입니다.” 정의민은 이어서 대답했다. “가끔 서체도 모사합니다.”“현장에서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정의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재판장님, 저는 피고 측 변호사가 계속 시간을 끄는 것에 반대합니다.” 하석진이 또 일어섰다.“시간을 끄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에 중요한 단서입니다.” 하지수가 확신했다.재판장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 “피고 측 변호사는 효율을 생각해 주십시오.”“네.” 하지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을 통해 소이연에게 종이와 펜을 주며 말했다. “서명해 주세요.”소이연은 자신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서명한 뒤, 하지수는 정의민에게 주며 말했다. “현장에서 보여주실 수 있나요?”“네.”정의민은 펜을 들고 소이연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두 개의 이름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모든 사람들이 놀랐다.장혜민은 옆에서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여기 계신 모두에게 정의민의 모사 능력을 보여드린 것으로 하겠습니다.”“반대합니다.” 하석진이 말했다. “정의민은 피고 측에서 고의로 가짜 증명을 하게끔, 사전에 연습하여 나온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