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누구도 그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를 것이다.그녀의 유혹에 죽을 지경인데 차마 건드릴 수 없었다.더군다나 떠날 수도 없어서 계속 옆에서 약발이 사라질 때까지 곁을 지켜줬다.그녀가 자신을 해칠까 봐 노심초사하고 또 자신이 그녀를 덮칠까 봐 중요 부위를 진정시켰다.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간신히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나자마자 그녀에게 억울함을 당했다.하나님도 노할 판이다.그의 말을 듣던 소이연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왠지 믿어지지 않았다.몸이 구석구석 다 아픈 것이 꼭 지난번과 똑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육현경의 몸에 생긴 상처들을 봐도 그걸 했다고 증명해 주고 있었다.“못 믿겠으면 병원에 가서 검사해. 집에는 콘돔도 없고 네가 달려드는데 내가 나가서 콘돔 살 여유가 있었겠어?”육현경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그 부분에 대해 설명했다.그녀가 믿지 못해도 탓하지 않았다.하지만 지금 상황은 아무리 봐도 섹스할 때 남긴 흔적들이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었다.18살 때 잠자리를 한 남자가 본인이라는 사실을 숨겼지만 그동안 그의 인품과 자존심, 교양을 지켜본 결과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었다.게다가 그녀를 속인 사실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먼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지금 소이연은 이런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될지 몰랐다.어쩌면 더는 육현경을 받아들이기 싫어서 마음을 닫아버리고 가장 나쁜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어젯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그 이유는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고 그의 다정함을 아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마음을 닫아 버리기로 했다.“지금 당신 몸에 상처가 생기고 아픈 건 어젯밤에 너무 반항해서 내가 말리느라 힘 조절을 못해서 생긴 거야. 그리고 내 몸에 상처들은 만족시키지 못했다고 당신이 복수한 흔적이야.”소이연이 입술을 오므렸다. 더는 들어줄 수 없었다.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이제 믿어?”육
소이연은 화내지 않았다.육현경의 몸에 남긴 걸작들만 봐도 어젯밤에 자신이 얼마나…갑자기 얼굴이 뜨거워졌다. 귀까지 빨개진 것 같았다.“기다려. 내가 나가서 입을 옷을 사 올게.”소이연이 침대에서 일어서며 조용히 말했다.“어제 구해준 보답이라고 쳐.”생사를 오갔는데 옷으로 퉁 치겠다고?알았어. 날 미워하지만 않으면 되지 뭐.옷 한 벌 얻어 입었다는 게 어디야. 돈 절약했네.소이연이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그녀가 방에서 나가려고 문을 열었을 때 예수진이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해서 화들짝 놀랐다.육현경이 다급하게 이불을 들고 벌거벗은 몸을 가렸다.“수진 씨?”소이연은 궁둥 방아를 찧은 예수진을 부축했다.예수진이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재빨리 해명했다.“난 아무것도 듣지 못했어요. 그냥 오빠와 언니가 너무 자는 것 같아서 깨우려고 온 거예요. 오후 4시예요. 어젯밤에 그렇게 고생했는데 배고프지 않아요?”일어나자마자 하늘이 무너질 것만 같아서 배고픔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일어났으면 됐어요. 나와서 밥 먹어요. 내가 최고급 보신탕을 주문했거든요. 무조건 기력을 되찾을 거예요.”예수진이 흥분하며 말했다.“먼저 나갔다 올게요.”소이연이 입술을 오므렸다.“어딜 가요?”“수진 씨 오빠 옷을 사려고요.”그 말에 예수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과장된 표정은 마치 소이연이 엊저녁에 육현경을 어떻게 잡았으면 그 정도냐고 묻는 것 같았다.사실이지만 다행히 마지막까지 가지는 않았다.소이연은 설명하기도 귀찮았다.본인도 믿기 힘든 일을 남에게 믿으라고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그저 침묵하며 방에서 나갔다.예수진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왠지 전보다 걸음걸이가 요염해진 것 같았다.역시 막 경험한 여자는 자태부터 남달랐다.예수진이 재빨리 방으로 쳐들어갔다.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육현경의 앞으로 다가갔다.“오빠, 언니랑 화해했어?”그의 모습을 보던 예수진이 당사자들보다 더 흥분했다.“아니야.”육
”오빠는 되고 왜 나는 안 되는데?”예수진이 투덜거렸다.육현경의 앞에서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들었다.자기는 21살에 애 아빠가 됐으면서!“나가.”육현경이 명령조로 말했다. 그녀와 쓸데없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예수진은 내키지 않았지만 습관적으로 말을 고분고분 들었다.나가려고 할 때 갑자기 돌아서 한마디 던졌다.“오빠, 그렇게 꽁꽁 싸매지 마. 숨 막히겠어!”육현경은 듣는 척도 안 하고 오히려 더 단단히 이불로 감쌌다.그제야 예수진은 소이연이 옷을 사러 나간 것이 생각났다.뭐야, 홀딱 벗은 거야?얼마나 격렬하게 했으면!그래서 이연 언니 외에 누구한테도 알몸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거야? 동생인 나도 안 된다고?육현경이 이런 남자였다니, 모든 남자들의 본보기네! 칭찬할 만해!예수진이 방에서 나올 때 문을 닫는 것도 잊지 않았다.육현경의 성격에 좀만 훔쳐봐도 죽일 듯이 달려들 것이다.예수진이 거실에서 빈둥거리는 사이 소이연이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다.“사이즈 맞는지 봐봐.”소이연이 침실로 들어가 옷을 침대 위에 던졌다.육현경이 힐끗 쳐다봤다.검정 코트, 희색 티, 카키색 캐주얼 바지, 검은색 팬티에 양말까지 사 왔다.그가 이불을 젖히자 소이연이 급하게 몸을 돌렸다.조금 화가 났다.“바바리맨이야?”부끄러운 줄을 몰라.“이연 씨한테만 이러거든?”그녀에게 영광스러워하라는 말투였다.“다 봤으면서 새삼스럽게.”육현경이 능글맞게 웃자 소이연이 주먹을 꽉 쥐고 나가려고 했다.“문 열지 마. 아직 안 입었어. 수진이 밖에 있는데 보면 난처하잖아.”그가 제지했다.난처한 걸 알면 드레스룸에 가서 입어!소이연이 꾹 참았다.한참 뒤에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다 입었어.”그제야 소이연이 천천히 돌아섰다.또 어린이에게 적합하지 않는 장면을 볼까 봐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방금 백화점에 가서 닥치는 대로 옷을 사 왔다.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사이즈만 말하고 종업원이 옷을 골라줬다.그런데 이렇게
”밥 먹어요.”예수진이 주방으로 들어가서 두 사람을 불렀다.소이연은 그녀가 계속 기다렸다는 것을 눈치채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오빠. 안 먹을 거야?”예수진은 떡하니 서있는 육현경을 보며 물었다.소이연이 같이 먹자는 말을 안 해서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어젯밤에 고생하고 오늘 하루 종일 굶었더니 오빠 근육이 빠진 거 같아. 내가 특별히 보신탕을 시켰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예수진은 적극적으로 그를 챙겼다.하지만 여전히 소이연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그때 육현경의 배에서 밥 달라는 소리가 들렸다.“당신 동생이 시킨 거니까 먹고 가.”그제야 소이연이 입을 열었다.무표정이던 육현경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예수진도 간사한 웃음을 지었다.소이연은 왠지 두 남매가 연합하여 자신을 골탕 먹이는 것 같았다.외향적인 예수진이 눈앞에 차려 놓은 음식들을 열정적으로 소개했다.“이건 언니 주려고 주문한 거예요. 능이 백숙 오골계탕은 자음 보신 효과가 있어요. 밤을 새워서 다크서클이 장난이 아닌데 이걸 먹으면 생기를 되찾을 거예요.”“그리고 이건 오빠 위해서 주문한 구기자를 넣은 한우탕이야. 효능은 말 안 해도 되겠지?”말을 하면서 육현경을 향해 윙크했다.그는 어이가 없었다.어젯밤에 참느라 죽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신경을 건드려?“얼른 먹어요.”예수진이 친절하게 그릇에 떠주었다.“수진 씨도 먹어요.”소이연은 육현경을 무시하고 예수진한테만 말을 걸었다.“난 그런 복을 타고나지 않아서 눈으로만 볼게요. 난 저칼로리 식단을 주문했어요. 배우가 되려면 신경 써야 되거든요.”“누가 배우하라고 했어? 그만두고 회사에 돌아와서 출근해.”육현경이 입을 열었다.“맨날 진부하게 출퇴근하고 누가 시키는 일만 하는 거 싫어. 차라리 굶어 죽는 게 나아.”육현경이 째려보았지만 예수진은 보는 척도 하지 않았다.소이연이 국물을 떠주며 화제를 돌렸다.“어제저녁에 어디 갔어요?”“방해될까 봐 호텔에서 잤어요. 요 며칠 휴가 냈거든요. 어차피 마지막 장면
밥을 먹은 뒤 소이연은 예수진과 거실 소파에 앉아 후식으로 과일과 커피를 마시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연예계에 종사하면서 예수진의 웃음 포인트는 생각보다 너무 낮았다.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요란하게 뒤로 넘어지면서 웃어 댔다.하지만 잘 웃는 사람과 있으면 팍팍한 삶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게 되는 것 같았다.소이연이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했다.출근하지 않아도 업무는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그녀는 숨넘어가는 예수진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업무 메시지에 답장했다.웃음소리가 그렇게 시끄럽지도 않았다.모든 답장을 마치고 뉴스를 검색했다.갑자기 소이연의 표정이 변했다.한바탕 웃어젖히던 예수진이 커피를 마시려고 일어날 때 그녀의 표정을 보고 다급하게 물었다.“또 무슨 일이에요?”소이연이 눈살을 찌푸릴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눈살을 찌푸렸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은 아니니까.“어제 문서인과 같이 있었던 일이 언론에 터졌어요.”소이연이 생각보다 차분하게 말했다.하지만 예수진은 차분하지 않았다.소파에서 벌떡 일어서서 소리를 질렀다.“어제 문서인한테 당한 거예요?”예수진의 관심사는 항상 남들과 달랐다.“네.”소이연이 짧게 대답했다.“쓰레기 같은 자식. 전에는 그래도 인간 취급을 해줬는데 이제 보니 완전 저질이네.”예수진이 욕을 퍼부었다.소이연은 대꾸도 하지 않고 뉴스만 주시했다.뉴스에는 그냥 문서인이 소이연을 억지로 더럽히려다가 경찰에 구속되었다고만 써져 있고 두 사람이 침대에 있는 사진이 몇 장 올라와 있었다.사진만 봐도 그녀가 반항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뉴스가 업로드되자마자 바로 실시간 검색에 올랐다.육현경이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론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문서인을 감옥에 처넣을 수 있으니까.가슴을 진정시킨 뒤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했다.육현경이 구하러 왔을 땐 그녀는 이미 반항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니 육현경이 이 사진을 찍었을 리가 없다. 심지어 어두운 곳에 숨어서 마지막에야 나타날 사
그때 소이연의 휴대폰에서 메시지 한 개가 떴다.육현경이 보낸 것이다.“뉴스 내릴까?”언론은 그들에게 유리하지만 소이연이 받아들이지 못할까 봐 걱정된 모양이다.“내버려 둬.”소이연이 바로 답장했다.비록 소나은의 처사가 잔인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해친 그녀를 동정할 만큼 착하지는 않았다.앉아서 결과가 나오길 기다리기로 했다.“알았어.”소이연이 휴대폰을 놓고 소파에서 일어섰다.아직도 쑤시는 몸을 스트레칭하며 흥분하며 뉴스를 보는 예수진을 보며 말했다.“먼저 들어가 누워있을게요.”예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제 너무 피곤했죠. 얼른 가서 쉬세요.”휴대폰에서 눈도 떼지 않고 한창 네티즌과 함께 열심히 욕하고 있었다.소이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예수진은 연예인보다 가십거리 기자가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았다.소 씨 가문.뉴스를 보던 소승영이 너무 기쁜 나머지 껄껄 소리를 내며 웃었다.“문서인 녀석, 이런 스캔들로 발목 잡히면 나은은 자연스럽게 피해자가 되지. 그럼 난 정정당당하게 융자를 주지 않아도 되겠군. 심지어 콧대를 들고 문 씨를 욕해도 되겠네. 참 묘한 계략이야.”소나은의 기분도 좋았다.원래 계획대로라면 문서인이 확실하게 소이연을 더럽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침대에 오른 순간 그녀를 배신하고 바람을 피우는 꼴이 되니 문서인의 명성이 나락하는 것은 물론 소이연도 같이 봉변을 당하는 것이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도에 육현경이 쳐들어오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다. 몰래 설치한 카메라를 통해 그 장면을 봤을 때 그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육현경, 결혼 발표했잖아?근데 어떻게 소이연을 구하러 갔지?그가 쳐들어온 순간 문서인이 맞아 죽는 줄 알았다.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육현경은 소이연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그렇다면 소이연을 해치면 안 되었다. 아니면 육현경이 찾아와 그녀에게 복수하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니까.어쩔 수 없이 소이연이 피해자라는 입장으로 뉴스를 내보내야 했다.여론을 떠들
서교 구치소.소이연은 절차를 마치고 문서인을 만났다.그를 동정해서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소이연은 누구를 먼저 해치지 않지만 절대 누구한테 당하면서 살지 않았다.만약 누가 상처를 주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아줬다.하룻밤만에 문서인은 얼굴이 많이 상하고 초췌했다.완전히 그녀의 예상을 뛰어넘었다.문서인은 신중한 사람이었다. 해외에 있을 때 그에게 마음이 끌렸던 것도 항상 깨끗한 하얀 셔츠 아니면 하얀 티를 입고 소년처럼 웃던 순진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상쾌했다.하지만 지금은 구질구질하고 더려워졌다.좋아했던 감정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서 지금 비참하기 그지없는 꼴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여긴 왜 왔어?”문서인이 물었다.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하룻밤을 겪고 나니 워낙 도도하던 문서인에게 굴하지 않는 고집까지 더해졌다.그녀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더더욱 그녀에게서 비웃음 당하고 싶지 않았다.“네가 얼마나 비참한지 보고 싶어서.”소이연이 직설적으로 말했다.하지만 그가 비참하다고 해서 마음이 약해지는 건 아니다.“소이연! 재수없는 너하고 엮인 내가 미쳤지. 그러니까 입 닥치고 있어!”문서인은 갑자기 불이라도 붙은 듯 폭발하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앉으세요!”소이연이 입을 열기 전에 교도관이 봉을 들고 호통쳤다.문서인은 경찰이 든 봉을 보고 당황했다.생각하지 않아도 어제 많은 경험을 한 모양이다.육현경도 그를 가만 둘리 없으니까.갑자기 고분고분해졌다.교도관이 문서인을 제압하더니 시선을 돌려 소이연을 바라봤다.계속 심문을 할 건지 묻는 눈치였다.교도관은 소이연에게 매우 정중하게 대했다.아마 육현경과 아는 사이인 것 같았다.육현경은 오늘 소이연이 무엇을 할지 알고 있었다.소이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교도관이 공손하게 한쪽으로 물러섰다.그녀가 다시 문서인을 보았다.비록 전보다 얌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소나은에게 놀아났어. 네가 여기 갇힌 뒤에 뉴스 보지 않았지?”소이연이 자신의 휴대폰으로 뉴스를 검색하고 문서인의 앞으로 내밀었다.“감상해 봐.”문서인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한 것 같았다.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소이연, 비꼬아서 속이 시원하냐?”“비꼬는 게 아니야. 굳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틀리지는 않았어.”문서인은 참을성이 한계에 도달했다.“그보다 지금 네 상황이 어떤지 알고 있어?”소이연은 뉴스에 올라온 사진을 터치해서 문서인에게 보여줬다.“이 사진들 봐.”문서인은 끝내 이기지 못하고 사진을 보았다. 그의 눈이 커지더니 점점 더 벌겋게 충혈되었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나 아니면 현경 씨가 이 사진을 발설했다고 생각할 만큼 둔하지 않겠지? 이 장면은 현경 씨가 오기 전에 발생한 거잖아.”“소이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문서인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아직도 모르겠어? 소나은이 너랑 헤어지려고 짜 놓은 판이잖아. 너를 망가트리고 파산하게 만들고 모든 사람들의 질타를 받게 만들었어.”“거기에 없었는데 어떻게 이 사진을 찍었단 말이야?”문서인이 반박했다.여전히 소나은을 위해 변명하고 자신을 위해 변명했다.“네가 그랬잖아. 나를 끌고 간 곳이 소나은과 네가 만나는 장소라면서 소나은 외에는 누구도 모른다고 했잖아. 그렇다면, 소나은은 네가 하려는 일이 뭔지 알고 미리 방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우리가 무슨 짓을 하는지 찍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소이연이 논리적으로 설명했다.“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문서인은 믿지 않았다.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소나은이 자신을 배신하고 모함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소나은은 그를 목숨을 버릴 정도로 사랑해서 그가 조금이라도 상처를 받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고 믿었다.소이연은 조용히 앉아 문서인의 반응을 살폈다.분명 속으로 알고 있으면서 인정하기 싫어하는 모습이었다.소나은을 위해 미련한 짓을 많이 했고 그녀의 손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