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은 말을 마치고 조용히 문서인을 쳐다봤다.그는 납득하기 어려워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았지만 의외로 잘 참고 있었다.필경 이런 곳에서 성격을 죽이지 않으면 더 비참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하룻밤 사이에 아주 큰 교훈을 얻은 셈이다.“잘 지내.”소이연이 한마디 던졌다.솔직히 어떤 말로 두 사람의 결말을 표현했으면 좋을지 몰랐다.참담함을 말하자면 문서인은 이미 참담하기 그지없었다.그가 감옥에 가게 되면 가뜩이나 위태로운 문씨 가문이 곧 파산하게 될 것이다.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게다가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문씨의 죄인이 되어 평생 괴로울 것이다.그러니 더는 그의 분노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그녀가 일어서려는 순간 문서인이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소이연, 날 좋아한 적은 있어?”소이연이 입술을 오므렸다.마지막 만남에서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전에도 물어본 것 같았는데 대답하지 않았었다.왜냐면 그땐 문서인이 자신의 분토를 터트리는 상황이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은…진심으로 그 대답을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알고 있었을 텐데? 난 그리 착한 사람이 아니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서 매일 접대 자리에 나가고 밤새우면서 일하지 않아.”문서인이 주먹을 꽉 쥐었다.그랬다.그는 애초에 소이연이 진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다만 갑자기 육현경이 나타나서 열등감 때문에 견딜 수 없었을 뿐, 그때 소이연은 너무나 눈부시게 빛났다.그래서 자신을 속이는 핑계를 찾았다. 헤어지길 잘했으니 후회하지 말자, 소이연은 워낙 지조 없는 여자라서 처음부터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돈을 보고 접근한 것이라고…하지만 그녀를 실망시킨 것은 본인이었다.그것도 소나은 때문에.문서인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한동안 들지 않았다.순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소이연은 그가 후회한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세상에는 후회를 치료하는 약은 없고 얼마나 후회하는냐만 있으니까.앞으로 그가 겪어야 할 모든 일은 그녀와 아무런 관
소나은이 해맑게 웃으며 다정하게 불렀다.“언니.”소이연은 오히려 궁금했다. 소나은이 아직도 문서인을 관심해서 보러 온 건가?아니면 본인 입으로 자신이 얼마나 나쁜 인간인지 말해주러 왔나?소이연은 그녀처럼 가식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아는 체하지 않았다. 구치소에서 나오자 입구에 기자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순간 왜 모여들었는지 깨달았다.쇼를 하지 않으면 소나은이 완벽하게 매듭을 짓지 못하겠지.소이연은 기자들이 눈치채기 전에 재빨리 승용차에 올라타고는 조용히 떠났다.…구치소 내에서 소나은과 문서인이 마주 앉아 있다.초췌한 문서인을 본 소나은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당해도 싸다고 생각했다. 병신처럼 자신의 잔꾀에 놀아나고 이 결과를 초래한 것도 자업자득이니 자신과 전혀 상관없다고 여겼다.“나은아.”문서인이 조용히 불렀다.그러면서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방금 소이연이 한 말들이 전부 사실이지만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자신을 속이면 적어도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하지만 그의 손이 닿기 전에 소나은이 피하면서 한마디 했다.“더러워.”문서인이 소나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인상을 찌푸리며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내고 있었다.전에 다정하고 진심으로 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문서인이 주먹을 불끈 쥐고 손을 거뒀다.“확실하게 말해줄 것이 있어서 왔어. 우리 헤어져. 앞으로 오빠와 문씨 가문의 일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소나은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더는 문서인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쇼를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끌었다.“내가 무엇을 하든 용서해 준다고 했잖아. 지금 나와 선을 긋겠다는 거야?”문서인이 코웃음을 쳤다.“그럼 뭐겠어? 난 자선가가 아니야. 오빠가 다시는 일어설 수 없고 문씨 가문도 망하게 생겼는데 나도 같이 매장당해야 돼? 지금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 거울 좀 봐.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해?”소나은이 인상을 쓰며 그를 경멸했다.“하하.”그 말에 문서인이
”소나은!”문서인은 치가 떨리도록 원망스러웠다.살면서 지금처럼 후회한 적이 없었다.소이연을 포기하고 소나은을 선택한 것이 너무나 후회되었다.만약 소이연과 약혼식을 올리고 결혼했더라면 지금처럼 비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어쩌면 아이마저 생겼을지도 모른다.문서인의 눈동자가 벌개졌지만 소나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싸늘하게 말했다.“완전 미친개 됐네. 앞으로 개 우리에서 천천히 미쳐가! 문서인, 육현경이 나선 이상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썩다가 뒤져!”소나은은 재빨리 떠났다.문서인이 미치고 펄쩍 뛰어도 상관하지 않았다.지금은 그의 면상만 봐도 구역질이 났다.솔직히 문서인을 싫어하면서부터 얼굴을 보는 것이 역겨웠다.이제 더는 이 역신을 보지 않아도 된다.소나은이 구치소에서 나올 때 딴 사람 마냥 표정을 바꾸었다.억지로 눈물을 짜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픈 표정을 지었다.“나은 씨. 이 지경이 됐는데 문서인을 보러 온 거예요? 이런 남자 때문에 눈물 흘릴 가치가 있을까요?”“나은 씨. 문서인은 지금 어때요? 후회하고 있어요?”“나은 씨, 이번에 문서인이 배신하고 소이연을 겁탈한 것에 대해 할 말이 있어요?”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오자 그녀는 허둥대며 어쩔 바를 몰랐다.한참 뒤에야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문서인과 저희 언니 일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요. 뉴스를 보지 않았더라면...”그녀는 이런 충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말끝을 흐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기자들이 서둘러 위로했다.그제야 소나은은 자신을 진정시키고 사과했다.“미안해요. 문서인과 저희 언니 일이 타격이 너무 커서 제가 추태를 보였네요.”기자들이 나서서 그녀를 다독였다.소나은이 말했다.“내 언니에게 그런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미워하지 않았을 거예요.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를 배신한다 해도 언니만 아니었다면 용서해줄 수 있었어요. 필경 감정이 없는 사람을 옆에 붙잡아 둘 수 없잖아요. 하지만 그 사람이 내 가
소이연이 눈살을 찌푸렸다.“제대로 운전 못 해요?”“아가씨. 미안해요.”기사가 서둘러 사과하면서 상황을 설명했다.“앞에 차가 갑자기 들어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급정거를 했어요.”“조심하세요.”소이연이 쌀쌀 맞게 굴었다.그 순간 앞 차에서 검정색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다가와 차창을 두드렸다.남자의 키가 너무 커서 위협적으로 느껴졌다.소이연이 당황했다. 왠지 납치당할 것 같았다.“그냥 가요!”소이연이 격동하며 소리 질렀다.“아가씨. 앞뒤로 다 막았어요.”그 말에 소나은은 깜짝 놀라 경찰에 신고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다.마침 휴대폰이 울려서 허둥지둥 통화 버튼을 눌렀다.“나은 씨. 저 심아윤이에요.”소나은이 멍해졌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내 경호원과 같이 저희 농원으로 오세요. 나은 씨와 만나서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심아윤이 담담하게 말했다.“걱정 마세요. 심씨는 지저분한 짓거리를 하는 가문이 아니에요. 소나은 씨의 안전과 재산에 위협되는 일은 더더욱 하지 않아요.”소나은은 어쩔 바를 몰랐다.심아윤이 계속 말했다.“당신은 똑똑한 사람이니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도리를 알고 있겠죠?”말을 마치고 통화를 끊었다.어려서부터 잔꾀가 많은 소나은이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그녀는 다급하게 차에서 내려 검정 옷을 입은 사람을 따라 다른 차에 올라탔다.차는 정안 외곽으로 달려 고풍스러운 차 농원에 멈추었다.차 농원에 들어서는 순간, 옛날 시대에 온 것 같았다.석목 조각과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공예품은 현대 작품이 같지 않았다.그녀는 하인을 따라 다실로 들어갔다.안에서 심아윤이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나은 씨.”심아윤이 먼저 다정하게 불렀다.“아윤 씨. 반가워요.”소나은이 예의를 갖추었다.“앉으세요.”“고마워요.”두 여자가 마주 앉았다.심아윤은 다예사더러 소나은에게 차를 따르게 한 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내가 왜 나은 씨에게 연락해서 보자고 했는지 알고 있겠죠. 나를 도와 소이
”나은 씨. 어때요?”심아윤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했다.소나은은 자리에서 펄쩍 뛰며 큰소리로 웃고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소승영이 주식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유백희와 양화랑이 나서서 반대하는 바람에 울화통이 터졌지만 계속 참았었다. 소준환은 개뿔도 없으면서 무슨 자격으로 소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물려 받아?아들이라는 이유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다른 사람은 개처럼 일해야 되겠냐고?꿈 깨셔!내가 원하는 건 절대 누구한테도 뺏기지 않아.가족이 다 뭐라고, 내 앞 길을 막는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할게요.”소나은이 갑자기 대답했다.“뭘 하면 되죠?”“난 정말 나은 씨처럼 시원시원한 사람과 일하는 걸 좋아해요. 뭘 할지는…”심아윤이 싸늘하게 웃었다.소나은에게 계획을 말하자 그녀가 경악했다.심아윤이 이렇게 살벌할 줄은 몰랐다.소이연을 완전히 골로 보내는 계획이지만 속으로 은근 통쾌했다.개털이 된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흥분되기 시작했다.하지만 소나은도 생각이 깊은 사람이다.“성공한 뒤에 소씨를 나한테 넘기지 않으면 어떡하죠? 당신 신분이 높아서 내가 해칠 수도 없고, 게다가 이 일은 원래 정당하지 않은 일이라 나만 손해 보잖아요. 뭐, 아윤 씨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협조하려면 서로 신뢰해야 성공할 확률도 높잖아요.”“이건 소씨 10% 주식이에요.”심아윤이 바로 서명한 주식 계약서를 소나은에게 넘겼다.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 진작에 알고 있었다.소나은이 주식 계약서를 보더니 또 화색을 띄었다.“나은 씨 아버지는 50% 주식을 갖고 있었어요. 소이연에게 10% 넘겨줘서 지금은 40% 남아 있고요.”심아윤은 차분하게 말했다.“이 10% 주식은 소씨 다른 주주들 손에서 산 거니까 걱정 마세요. 아버지가 눈치채지 못했어요. 계획이 성공하면 다시 30% 사서 줄게요. 그러면 나은 씨는 소씨 가문에서 최대 주주가 될 테니 모든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소나은은 기뻐서 어쩔 바를 몰랐다.심아윤이 자신과 손을
그 소식을 들은 소이연은 조금 놀랐다.가장 비참한 결말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래 봤자 문서인이 10년, 20년 감옥살이를 할 거라 여겼는데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돌이켜 보면 그도 참 불쌍했다.한 여자한테 놀아나서 문씨 가문까지 파산되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으니 낭패한 모습으로 사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아니면 죽음을 선택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려 한 건가?소이연은 이런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그렇다고 가책을 느낀 것은 아니다.필경 그를 해친 것은 자신이 아니니까.동정심도 아니다.문서인은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그저 생명은 소중한 것인데 귀한 목숨을 포기했다는 것에 조금 안쓰러웠을 뿐이다.문서인이 자살하자 SNS에서도 그에 대한 비난이 줄어들었다.대부분 사람들이 죽은 문서인에게 경의를 표했다.언론도 보름만에 막을 내렸다.소이연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할 때 육현경에게서 연락이 왔다.받아야 하나?그녀는 망설였다.보름 동안 육현경은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문서인이 자살했던 날에 메시지 하나만 보낸 것이 다였다.“괜찮아?”하지만 답장해 주지 않았다.그 뒤로는 방해하지 않았는데 오늘 갑자기 연락이 왔다.소이연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현경 씨.”공손한 호칭으로 인해 두 사람의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민이 학교에 남았어.”육현경이 본론만 말했다.소이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육민을 언급하면 저도 모르게 긴장되었다.주말이면 육현경이 빠짐없이 육민을 데리고 그녀 집에 왔었다.또한 고맙게도 소이연이 학교에 육민을 데리러 가는 것을 막지 않았다.“무슨 일이야?”소이연이 다급하게 물었다.“국어를 못해서 어떻게 배워줘도 소용이 없대. 내가 학교에 갔었는데 담임 말로는 민이가 한글을 떼지 못해서 학과 진도에 지장을 준다고 하더라.”“이제 1학년이야. 뭐가 그리 심각해? 귀족사립학교도 아니고 사립학교가 무슨 공부를 빡 세게 시켜?”소이연은 불쾌했다.
소이연은 퇴근하고 바로 육현경의 집으로 향했다.집에 들어서자 식탁에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그제야 지금 저녁 시간이고 밥을 먹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 생각났다.문씨 아저씨가 소이연을 다정하게 부르며 같이 식사하자고 했다.육민도 그녀의 다리를 껴안고 애교를 부렸다.“엄마, 엄마. 보고 싶었어요. 같이 밥 먹어요. 아저씨가 맛있는 거 엄청 많이 해줬어요.”육민의 애교에 이기지 못하기도 했지만 전에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 쓰러지는 바람에 문서인에게 기회를 제공한 것을 생각하면 더는 이런 저급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먹었다.지금 문서인은 이 세상에 없지만 육현경이 아직 살아 있다.육현경은 문서인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다.소이연이 식탁에 앉았다.육현경은 오히려 그녀가 들어와서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고상한 자세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소이연은 상이 부러질 정도로 차려 놓은 음식들을 보았다.대부분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하지만 그의 입맛도 그녀와 비슷해서 별로 놀랄 것도 없었다.소이연이 젓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식사하는 내내 육민이 깔깔 웃는 소리만 들렸다.소이연이 집에 온 것이 얼마나 기쁜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육민이 계속 그녀에게 반찬을 짚어주면서 연신 맛있냐고 물었다.그녀가 젓가락을 놓으려 할 때마다 더 먹으라고 요구했다.그러면서 밥을 잘 먹고 건강해야 여동생을 낳아줄 수 있다고 말했다.소이연은 그 말에 하마터면 사레에 걸릴 뻔했다.평생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아들이 생긴 이후로 더더욱 생각이 없었으니 둘째를 낳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엄마는 민이 하나면 충분해.”소이연이 육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육민이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였을 때 그녀가 먼저 말했다.“엄마 이젠 배불러. 더 먹으면 속이 불편해. 민이는 한창 클 나이니까 많이 먹어.”“알았어요.”육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내가 어른이 되어서 아빠처럼 키가 크게 되면 엄마를 보호할 수 있어요. 그때면
소이연은 혼자 있고 싶었다.여태까지 육민이 무엇을 하든 잘못을 하든 괜찮다고 여기면서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았다.소이연은 육민의 방에서 나와 심호흡부터 들이마셨다.한참이나 자신을 진정시킨 뒤에 물을 마시러 갔다.저녁 내내 기역만 읽었더니 목이 엄청 말랐다.거실에 나오자 육현경이 테이블에 앞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그것도 안경을 쓰고 말이다. 육현경이 안경을 쓴 모습은 처음 본다.겉보기엔 세상 점잖지만 속은 시커먼 놈.그는 업무를 처리하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아마 방금 한 행동과 표정을 다 본 모양이다.소이연은 그가 거실에 있는 줄 몰랐다.업무는 서재에서 보라고!“잘 되고 있어?”육현경이 물었다.왠지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아들이 담임 선생님한테 꾸중을 들었는데 그는 여전히 태연했다.“아니.”소이연이 솔직하게 말했다.“내가 도와줄까?”육현경이 물었다.“기역자 알아?”“그게 뭔데?”모르면 찌그러져 있어.소이연이 힐끗 노려봤다.“물은 어디 있어?”“내가 따라줄게.”“어디 있는지만 말해. 내가 알아서 마실게.”소이연이 단호하게 거절했다.하지만 육현경은 이미 주방에 들어가 그녀가 마실 물을 들고 나왔다.따뜻한 물이었다.소이연은 화를 가라앉힐 찬물이 필요했다.“월경이 왔을 땐 따뜻한 물 마셔.”육현경이 진작에 눈치를 챘다.소이연이 입술을 오므렸다.이 인간은 어떻게 모르는 게 없어?“나도 우연히 알았어.”그가 설명을 덧붙였다.뭐야, 독심술도 할 줄 알아?소이연은 물을 마시고 컵을 돌려줬다.“고맙네요.”“좀 쉬어야 되지 않아?”육현경이 물었다.“아니.”소이연이 짧게 대답했다.“그렇게 급할 거 없어. 민이는…”“뭐가 안 급해? 반에서 혼자 못하면 친구들한테 비웃음을 당한다고!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아? 트라우마가 평생 남아서 앞으로도 영향을 미칠 거라고!”소이연은 매우 격동했다.육현경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