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지원이 나타나서 문서아를 데리고 가자 소나은도 적잖게 놀랐다.하지만 계지원과 문서아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열애설을 공개적으로 오픈한 뒤로 데이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그런데 계지원이 문서아가 난감한 상황에 나타나 대중들이 보는 앞에서 데리고 간 것이다.남친 역할 제대로 하는데?모든 여자들이 기대하고 부러워하는 남친상이 이런 게 아니야?소나은은 속으로 은근 샘이 났다.문서인은 뭐 하고 있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네.비록 이번 대회에서 졌지만 다행히 명예를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문서아가 간 뒤, 소나은은 기자들 앞에서 동정심을 유발하려 했다.그런데 기자들이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전부 스쳐 지나갔다.이를 악물며 부르르 떨었지만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소이연 씨, 이번 대회에서 문서아의 모함을 당했는데 소감 한마디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많이 괴롭고 받아들이기 힘든 가요?”“상처를 받으셨죠? 문서아는 전 남친의 여동생인데 어떻게 이렇게 대할 수 있어요?”“소이연 씨, 왜서 lovely 신분을 숨긴 겁니까?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이번 대회에서 소나은이 디자인한 옷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기자들이 흥분하며 질문 공세를 퍼붓자 소이연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제가 모함을 당했지만 괴로운 사람은 따로 있을 겁니다. 마지막에 진상이 밝혀졌기 때문에 난처하게 된 건 제가 아니까요. 그리고 저보다 상처를 더 많이 받은 사람도 있잖아요.”소이연이 말한 상처를 더 많이 받은 사람은 문서아를 가리킨다.여태 절친이라고 여겼던 자매한테서 배신을 당했으니 소나은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lovely 신분을 감춘 것인 온전히 사적인 이유로서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부디 양해를 부탁드릴게요.”그녀는 더는 기자들과 얽히기 싫어 떠나려고 했지만 기자들이 나갈 틈을 주지 않고 더 몰려들었다.“소이연 씨, 혹시 이번 일이 문서인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까?”“한때 문서인과 연인 사이였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책스럽게 마음이 또 들뜨기 시작했다.소이연이 손을 내밀어 육현경의 손바닥에 얹었다.그의 입술선이 살짝 올라가더니 손을 꼭 잡고 기자들 속에서 떠났다.다들 두 사람이 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파격적인 드레스를 입은 소이연은 훤칠한 남자의 옆에 서 있으니 몸매가 한층 더 돋보였다.마치 부잣집 아내가 도망쳤다가 잡혀가는 그림을 보는 듯했다.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듯한 장면을 현실에서 보고 있으니 기분이 짜릿할 정도로 아름다웠다.기자들이 다시 카메라를 들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찍느라 분주했다.헬리콥터가 떠나자 카메라 셔텨음이 점점 사라졌다.…헬리콥터에 탄 소이연은 창밖으로 멀어지는 지면을 바라보았다.이렇게 요란하게 등장해서 데리고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계지원처럼 차를 타고 올 것이지.큰 소동을 일으켰으니 내일 뉴스에 어떤 글들이 올라올지 생각하지 않아도 상상이 갔다.그래도 가슴은 생각과 다르게 점점 빠르게 뛰고 있다.마치 수면 위에서 파도가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소이연 씨, 축하드려요.”귓가에 쉰 남자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이 고개를 돌려 육현경과 눈을 마주쳤다.잘생긴 얼굴을 이렇게 보고 있으니 조금 쑥스러웠다.그때 꽃다발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소이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이 남자 서프라이즈는 정말 잘 한다니까.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꽃다발을 받았다.“고마워.”“대표님께서 직접 만든 겁니다. 오전 내내 꽃다발을 만드느라 진땀을 빼셨어요.”이명진이 뒤에서 불쑥 끼어들었다.“…”그 바람에 소이연이 깜짝 놀랐다. 뒤에도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요염하게 물든 붉은 장미꽃을 보다가 장미꽃보다 더 설레게 만드는 육현경을 바라보았다.소이연이 갑자기 몸을 기울이며 그의 볼에 뽀뽀를 했다.육현경의 몸이 움찔했다.그녀는 뽀뽀한 뒤에 왠지 후회가 되었다.빤히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어쩔 바를 몰랐다.이명진까지 뒤에서 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감동을 억제 못하고 충동적으로 뽀
예수진은 승합차를 타고 촬영장을 떠났다.하루 내내 감정기복이 심한 야간극을 찍었더니 주인공의 역할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차에 올라탄 뒤 진정시킬 겸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오늘 매니저가 데리러 와서 지금 한창 옆에 앉은 실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다인 언니, 저녁에 ‘솔로디자인쇼’를 보셨어요?”실장이 물었다.“오는 길에 띄엄띄엄 봤어.”“저도 띄엄띄엄 보긴 했는데 오늘 소이연과 소나은의 대회가 너무 드라마틱하더라고요. 드라마를 본 것보다 반전이 더 많았어요. 지금 뉴스에 숱한 글들이 올라왔는데 궁투극보다 더 재미있어요.”실장의 말에 예수진의 눈꺼풀이 살짝 움직였다.오늘 소이연의 대결이 있다는 걸 새까맣게 잊어버렸다.촬영에만 집중하느라 대회를 챙겨보는 걸 까먹었다.그녀가 눈을 뜨고 물었다.“소이연이 이겼어?”“당연하죠. 그것도 아주 통쾌 상쾌하게 이겼어요. 오늘부터 나 소이연 팬 할래요.”실장이 흥분하면서 말하더니 이내 한마디 덧붙였다.“물론 수진 언니가 내 마음속에 최고이긴 하지만요.”알랑방구쟁이!그래도 예수진은 소이연이 이겨서 기분이 좋았다.만약 소나은이 이겼다면 얼마나 콧대를 쳐들고 다닐지 상상이 갔다.“수진 언니, 촬영하느라 아직 뉴스를 못 봤죠? 오늘 저녁 대회 현장에 문서아가 소이연을 모함하려다가 대중들 앞에서 들통났잖아요. 그때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10년 묵은 체중이 쫙 내리는 기분이에요.”실장은 말하면 말할수록 격동했다.“그래?”예수진도 가십거리를 논하기 좋아했다.실장의 말을 듣고 갑자기 흥분되기 시작했다.피곤해서 손가락 움직일 힘도 없지만 그래도 휴대폰을 들고 뉴스를 검색했다.대회에 관한 뉴스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다.한창 신나게 보고 있을 때 한 뉴스 제목이 눈에 띄었다.“계지원은 문서아의 스캔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들 앞에서 당당하게 여친을 보호했다”예수진이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뉴스를 터치했다.먼저 글을 대충 훑어보다가 사진을 주시해 보았다.계지원이 인파를
소이연에게 전화했더니 전원을 꺼버렸다.전원을 끄고 다닐 사람이 아닌데?다급하게 오빠한테 전화를 했더니 또 전원이 꺼져 있다.두 사람 설마 납치된 거 아니야?그럴 일은 없겠지만 은근 긴장이 되었다.망설이다가 하도경에게 연락했다.“우리 오빠 어디 갔는지 알아? 연락이 안 돼!”“나도 몰라.”하도경이 대답했다.“이연 씨와 축하 파티하고 있겠지. 오늘 저녁 이연 씨 그렇게 예쁘던데 남자라면 못 참는 게 당연해. 내가 네 오빠래도 주저없이…”“우리 오빠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예수진은 무서운 오빠 바라기였다.“그래도 남자들은 다 똑같아.”그저 답답한 면이 있다 뿐이다.“모르면 됐어.”예수진은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어 바로 끊어버리려 했다.“예수진.”그때 하도경이 불렀다.“뭐?”“술 마시러 나올래?”하도경이 불쑥 물었다.그 말에 예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시간에 무슨 술이야, 미쳤어?“내일 촬영 있어.”예수진이 딱 잘라 거절했다.“다음에 마시자. 이번 촬영이 끝나면 며칠 쉴 거야. 그때 이 누나가 실컷 마셔 줄게.”하도경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그깟 술을 마시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게 아니라 예수진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말한 것이다.“그럼 일찍 쉬어.”“응.”예수진이 통화를 끊고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하도경의 말을 들어보니 소이연이 육현경과 같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다시 마음이 가라앉았다.한 사람을 잊는데 얼마나 걸릴까?아마 오래오래 지나야 하나도 아프지 않겠지.…소이연과 육현경은 8시간 비행기를 타고 발리에 도착했다.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전용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그랜드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가 조금 지났다.소이연이 이동 중에 잠들어서 호텔에 도착했는데도 눈을 뜨지 못했다.결국 육현경이 안고 방으로 이동했다.조심스럽게 그녀를 푹신한 베개에 눕히자 더 깊이 잠들었다.육현경이 자는 모습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씻으러 가려고 할 때 소이연의
소이연이 잠에서 깼다.지금 몇 시지?아직 잠이 덜 깨서 정신이 몽롱하고 몸이 나른했다.방 안의 전등도 희미하고 다 처음 보는 물건들이었다.심지어 어떻게 여기에 들어와서 또 어떻게 침대에…침대?소이연이 갑자기 이불을 홱 젖히고 자신의 옷을 확인했다.다행히 멀쩡하게 잠옷을 입고 있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그것도 잠시 다시 긴장되었다.올 때 잠옷을 입지 않았는데?누가 갈아 입혔지? 설마 육현경?이번엔 잠옷을 들추어 브래지어를 입었는지 확인했다.없다…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어떻게 이것도 모르고 잘 수 있어?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녔는데?육현경이 옆에 있다고 경계심을 놓은 건가?그 인간이 더 위험한 인물인데 말이야.“혹시 머릿속에 이상한 상상을 한 건 아니지?”그때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이 화들짝 놀라며 입구 쪽에 여유롭게 기대어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육현경은 그런 그녀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그녀가 퉁명스럽게 물었다.“볼 거 안 볼 거 다 봤어.”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치명적이었다.볼 거 안 볼 거를 다 봤다고?그럼 내 옷을 벗겼단 말이야?존중하기로 했잖아!역시 남자는 믿을 게 아니야. 다 짐승이야!“일어났으면 밥 먹으러 나와.”당황한 소이연과 반대로 육현경은 차분해 보였다.그가 떠나기 전에 한마디 던지고 갔다.“짐은 옷장에 있어. 다 정리했으니까 나올 때 속옷 챙겨 입어.”“…”정말 생각 같았으면 혀를 깨물고 쓰러지고 싶었다.소이연은 이불을 홱 집어 던지고 일어나 낯선 방을 둘러보았다.방도 침대도 엄청 크고 천장에 별들이 반짝거렸다.총총한 별들이 넓은 공간에서 반짝이는 것이 마치 우주에 있는 것 같았다.이번에 창밖으로 다가가 커다란 창문을 열었더니 끝없이 푸른 바다가 보였다.파도가 잔잔하게 밀려올 때마다 바닷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쳤다.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기는 밤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기분이 상쾌했다.한참 동안
통유리창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파도가 일렁거릴 때마다 유리창에 부딪쳤다.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은 아마도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진수성찬이 줄지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종업원이 선홍색 와인을 길쭉한 글라스에 따르고 각자 두 사람의 앞에 놓았다.고급진 식재료를 보던 소이연은 그제야 슬슬 배고팠다.“먹자.”육현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전혀 사양하는 기색이 없이 포크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배가 고팠는지 두 사람 모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했다.조금 배가 채워지자 소이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 며칠 놀아?”“넌 얼마나 놀고 싶은데?”육현경이 되물었다.“내가 말하면 들어줄 거고?”소이연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이연이 점점 똑똑해지네.”칭찬 소리에 소이연은 어이가 없었다.“아마 일주일?”아마?소이연이 눈살을 찌푸렸다.“떠나기 아쉬우면 어쩌려고?”육현경이 농담 소리를 했다.“육현경. 나 회사 일도 제대로 인계하지 않았어. 이번 대회에 우승을 따냈으니 방송국에서 은하패션과 본격적으로 협업할 건데 내가 없으면 계약도 못해.”“걱정 마. 명진이 처리할 거야.”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일주일 동안 놀기만 해.”“…”소이연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육현경의 앞에서는 그 어떤 협상도 통하지 않았다.저녁 식사를 마친 소이연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하루 종일 잤더니 그다지 졸리지도 않았다.예수진에게서 걸려온 부재 전화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였다.“수진한테 이미 얘기했어. 신경 안 써도 돼.”육현경에게 투시안이 달린 것 같았다.분명 휴대폰 액정을 보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꿰뚫고 있었다.소이연은 대꾸도 하지 않고 예수진에게 연락했다.예수진이 첫 번째 촬영을 마치고 두 번째 촬영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소이연한테서 연락이 왔다.“두 사람 이제 다 잤어요?”“…”“콜록콜록, 내 말은 깨어났냐고요.
예수진이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솔직히 소이연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그렇다고 육현경도 입이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오빠도 이연 언니를 쫓느라 정신이 없는데 내 사적인 감정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어.그래서 예리한 소이연이 많은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방금 소이연이 말을 삼킨 것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침묵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예수진은 이렇게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친구를 알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라 생각했다.반면, 문서아는 대회에서 이기기 위해 소나은에게 거액을 들여 원고를 사주는 것으로 절친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결국은 문서아가 철저하게 당해버렸다.그녀들에 비하면 예수진은 운이 좋은 편이다.감정 외에는 모든 것이 순탄대로를 걷고 있으니까.하나님도 그녀의 인생이 너무 완벽해서 질투심에 역겁을 겪게 한 건가?이번 역겁을 무사히 통과하면 승천할 수 있을까?예수진이 피식 웃었다.자신의 상상력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에 스스로 감탄했다.고개를 숙여 시계를 보더니 실장에게 물었다.“다음 신 촬영한다고 했는데 왜 지금도 부르지 않지?”“가서 물어볼게요.”실장이 적극적으로 알아보러 갔다.다음은 베드신을 촬영할 차례다.진작에 찍었어야 했다. 앞으로 몇 장면만 찍으면 이번 작품이 끝나는데 계속 미루다가 오늘에야 안배한 것이다.그때 실장이 씩씩거리며 돌아왔다.“수진 언니. 감독님이 그러는데 오늘 촬영이 끝났대요. 돌아가래요.”그 말에 예수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베드신을 찍기 위해서 심리적으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매일매일 마음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 장난하는 거야?예수진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수진 언니, 어디 가요?”“계지원 찾으러!”대체 뭐 하자는 플레이인지 똑똑히 물어봐야겠어.워낙 기가 세기로 소문난 예수진이 지금 이 순간 당장 폭발할 것 같았다.실장은 말리지 않았다.솔직히 그럴
”그래서 뭔데요?”예수진은 이해하지 못했다.“그래서 배우님은 적합하지 않다고요.”“어디가 적합하지 않아요? 몸매가 별로라서 유명한 감독님의 마음에 안 드시나?”예수진이 비아냥거리자 계지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는 평소에 화를 잘 내지 않았다.촬영할 때 요구가 엄격할 뿐, 조그마한 실수는 그냥 넘기고 촬영을 계속했다.정말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잘 참는 편이었다.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가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촬영장 내부의 분위기가 질식할 정도로 싸늘해지자 스태프들이 숨을 죽였다.실장이 옆에서 예수진의 옷자락을 당겼다.“수진 언니.”예수진과 계지원이 싸울까 봐 두려웠다.어쨌든 계지원은 감독이자 육씨 가문 사림이니 건드리면 안 되었다.예수진이 이를 악물고 옆에 있던 의자를 발로 걷어차며 포효했다.그 바람에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이 깜짝 놀랐다.예수진이 발광하는 것을 힐끗 보더니 이내 돌아서 하던 일을 마저 진행했다.계지원이 결정한 일이라면 그의 앞에서 죽어버린다 해도 절대 변하지 않았다.그때도 그랬다.계지원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몸이라고 가지려고 술 기운에 덮치려고 했다.그런데 그가 힘껏 밀치는 바람에 예수진은 머리를 벽에 박고 피를 줄줄 흘러내렸다.지금도 뒤통수에 바늘로 꿰맨 흉터가 남아 있다.그 흉터 때문에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이다.예수진이 떠난 뒤에도 현장 분위기는 여전히 썰렁했다.계지원이 벌겋게 된 눈으로 방금 예수진이 차버린 의자를 노려보았다.“촬영 계속합니다!”그제야 촬영이 다시 정상적으로 진행했다.감독 실장이 촬영에 몰입한 계지원을 몇 번이나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여배우들은 키스신이든 베드신이든 손해를 보기 때문에 계지원이 예수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베드신을 삭제해버렸다.그런데 투자사 측에서 한 컷이라도 홍보용으로 사용해야 한다면서 동의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대타를 찾자고 결정했다.그 뒤로 수많은 대타를 찾았지만 예수진이 연기한 캐릭터에 영향을 미칠까 봐 지금까지
하지수의 전화를 받은 소이연은 그녀의 목소리만 듣고도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지수 씨, 무슨 일 있어요?”“문수 씨가 오늘 어머님이랑 좀 다퉜는데 핸드폰도 다 깨져버려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나도 문수 씨가 걱정되는 데 아버님이 승우 오빠 먼저 설득해달라고 해서 지금 병원으로 가는 중이거든요.”“그래서 현경이랑 친구분들더러 문수 씨 찾아달라고 하라는 거죠? 혹시 문수 씨가 안 좋은 생각 할까 봐?”“네.”아직 본론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바로 알아맞히는 소이연이 제 친구라서 하지수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내가 현경이한테 말할 테니까 지수 씨는 걱정 말고 승우 씨한테 가요. 찾으면 연락할게요.”“고마워요 언니.”“아니에요.”전화를 마친 하지수는 아무리 심호흡을 해봐도 답답한 가슴을 안고 병원에 들어섰다.바로 중환자실로 향한 그녀 눈에 보이는 건 복도에 앉아 쉴 틈 없이 울고 있는 허영지였다.하지수가 병원을 나설 때도 울고 있더니 아직까지도 진행 중인 것 같았다.저 눈물이 송승우를 위해 흘리는 건지 아니면 송문수와 다퉈서 흘리는 건지는 몰라도 하지수는 어떻게 위로를 전해야 할지 몰랐다.솔직히 말하면 별로 위로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허영지가 송문수를 대하는 태도는 하지수마저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기 때문이다.“지수 왔구나”“네, 아버님.”“승우가 너 빼곤 아무도 보지 않겠대. 승우 아니었으면 너 이렇게 급하게 오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야.”“네.”그들은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위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사람이었으니 하지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제가 옷 갈아입고 들어가 볼게요.”고개를 끄덕이는 송기명에 하지수가 몸을 돌리던 찰나, 허영지가 아직도 화난듯한 어투로 물었다.“송문수는 안 온대?”“모르겠어요.”“어디 갔어?”“그것도 몰라요.”“걔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 줄 뻔히 알면서 뭐 하는 짓이야!”하지수는 눈물을 흘리며 발악하는 허영지를
“무슨 일로 전화한 거냐니? 넌 동정심이라곤 없니? 네 형이 지금 중환자실에 있다고!”하지만 계속해서 화를 내는 허영지에 송문수의 인내심도 결국 바닥나버렸다.“그럼 엄마는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요? 형 병실 앞에서 매일 밤낮으로 지키길 바라세요? 아니면 사고 난 게 형이 아니라 나였으면 하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나는 이 집안의 쓰레기 같은 존재였잖아요, 그런 내가 죽으면 다들 아무렇지도 않았겠죠!”담아뒀던 서러움이 터지듯 말을 쏟아내는 송문수에 잠에서 깬 하지수가 그를 말리기 시작했다.“문수 씨.”하지만 송문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한동안 조용하다가 입을 연 허영지는 목이 멘 채로 말했다.“송문수, 너까지 나 힘들게 할 거야? 내가 죽는 꼴이라도 봐야겠어?”“내가 엄마를 죽이는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날 죽으라고 내몰았던 사람이 엄마 아빠예요.”말을 마치고 나서 바로 핸드폰을 내던지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바닥에는 깨진 핸드폰이 나뒹굴고 있었고 송문수는 방문을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어릴 때부터 참지 않던 송문수라도 그가 이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본 하지수는 다급히 뒤쫓아가려 했지만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때문에 전화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네, 아버님.”“지수야, 너 지금 문수랑 같이 있어?”“아까까진 같이 있었는데 문수 씨 방금 나갔어요.”“문수 괜찮은 거야?”“모르겠어요. 어머님은 좀 어떠세요?”“화나서 계속 울지 뭐.”제 아내를 말릴 수도 없었던 송기명은 뒤늦게 허영지를 대신해 해명했다.“사실 이 사람도 문수한테 뭐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너무 슬퍼서 순간 아무 말이나 막 한 것 같아.”“알아요.”하지수도 허영지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송문수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거라 마음이 안 좋았다.“지금 병원으로 좀 올래?”“문수 씨 핸드폰도 안 가지고 나가서 전 문수 씨 찾으러 가야겠어요.”“걘 아무 일도 없을 거니까 걱정 마.”“왜 문수 씨는 아무
“송승우가 또 수술받으니까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은 거잖아. 그렇게라도 응어리 좀 풀라고.”“나 그 정도로 속 깊은 사람 아니야. 그냥 말하기 싫었을 뿐이지.”“난 못 속인다니까.”매번 거짓말을 할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송문수이기에 하지수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다 알 수 있었다.“문수 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하지수는 송승우보다 송문수가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물론 송승우도 부모님을 아주 공경했지만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해온 그는 다 커서도 집안의 관심만 바랐지 집안에는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늘 형에게 밀려나 찬밥신세이던 송문수는 항상 부모님 곁을 지키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서곤 했다.“나 이제 잘 거야.”그래서 대견스러워서 한 말인데 송문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귀가 빨개져서는 욕실로 도망가버렸다.그런 송문수의 뒷모습을 보던 하지수는 자신이 따라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만약 송문수를 혼자 보냈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이해를 받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송승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하지수도 포함이었다.그럼 송문수도 질투하고 부러워할 만도 할 텐데 하지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송문수가 송승우의 것을 탐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싶어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지금은 송승우도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시부모님도 아들을 지키겠다고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기에 하지수가 이런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생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걸 막고자 눈을 감았다 뜨며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다음에 송문수를 제대로 달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샤워를 마친 송문수는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자신이 정말 잘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눈만 감으
병원을 나선 송문수가 택시를 잡아타려고 할 때 하지수가 뛰어나오며 그를 불렀다.“문수 씨!”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차를 출발시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아주 다급해 보여서, 그녀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문을 연 채로 하지수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사실 하지수도 송문수가 저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릴까 봐 걱정됐는데 여전히 멈춰있는 차에 안심하며 빠르게 올라탔다.기분이 나빠서 호텔이든 어디든 가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러다가 연락이라도 안 되면 하지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따라 나온 거였다.하지수가 차에 앉은 걸 확인한 송문수가 차를 출발시켰고 둘은 정적 속에서 호텔로 향했다.하지수는 몇 번이나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무심히 창밖만 내다보는 송문수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송문수에게도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그런데 호텔 방으로 들어오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하지수, 나 욕할 거면 빨리해. 참을 필요 없어. 욕 다 하면 나도 잘 거야.”“뭐?”예기치 못한 말에 하지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송문수가 말을 이었다.“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잠이나 자겠다는 내가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나도 어제부터 못 자서 지금 좀 피곤해. 사람이 오랫동안 잠을 못 자도 심장마비로 죽거든.”“나 당신이랑 같이 자러 온 거야. 어제 나도 잘 못 잤어.”“당신이 마음 불편해서 못 잘까 봐 온 거라고. 나는 당신이 안 잔다고 버틸까 봐 그게 더 걱정됐어.”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하지수의 반응에 송문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나도 당신한테 화낼 줄 알았어?”“화내는 게 당연하잖아.”씁쓸한 투로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차피 송승우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어.”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역시나 하지수도 제가 송
“왜 이래? 왜 갑자기 안 보이는 거야?”눈도 깜빡이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던 허영지는 갑자기 내려진 커튼에 슬픈 눈을 하고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에게 물었다.“환자분 쉬셔야 하니까 일단은 다들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 내 아들 옆에 있을 거예요.”“환자분이 가족들 보는 걸 원치 않습니다.”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말에 허영지는 또 눈물을 터뜨렸다.“왜 우릴 안 보겠다는 거예요? 안에서 혼자 있으면 힘들 텐데...”“환자분한테도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허영지가 고집을 피우자 마찬가지로 송승우 옆에 있고 싶었던 송기명도 움직이지 않았다.“문수 넌 이제 그만 가.”“어젯밤도 샜으니 돌아가서 자.”쌀쌀맞은 엄마의 말투에서 저건 관심이 아니라 타박임을 눈치챈 송문수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호텔에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바로 올게요.”하지만 송문수의 말에도 허영지는 대답 없이 차가운 등을 보일 뿐이었다.그에 고개를 떨군 송문수는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줄곧 허영지의 곁을 지키며 한마디도 않고 있던 하지수를 쳐다보았다.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도 제가 송승우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고 원망하는 것 같아서 송문수는 결국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하지수는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송문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송문수가 먼저 다리를 잘라냈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하지수는 그가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의 송문수라면 모르겠지만 함께 일 하면서 봐왔던 송문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정말 상황파악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큰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혹시라도 너무 속상해서 해명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봐 하지수는 용기를 내어 시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의사의 질문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답했다.“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직은 회복도 채 안 됐고 그런 큰 충격을 받으면 회복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분들이 그 정도는 주의해주셔야죠.”의사의 말이 끝나자 허영지도 분노의 화살을 송문수에게로 돌려버렸다.“넌 어쩜 아직도 이러니? 승우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 나이 먹었으면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려야지. 만약 승우가 너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허영지가 목놓아 울자 송기명도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영지를 다독이며 말했다.“오늘 일은 나도 실망이다 너한테. 서른 살 넘으면 뒤도 안 보고 일부터 저지르는 버릇은 좀 고칠 줄 알았는데.”가족들의 질타에 해명을 하려던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어릴 때부터 송승우와 송문수가 싸울 때면 부모님은 늘 송승우의 편만 들어줬기에 송문수는 지금 이 상황에 송승우가 스스로 알아챘다고 한들 저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입 아프게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선생님, 그럼 이제 어떡해요?”“애가 제 몸 상태를 알았으니 죽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이제 고작 서른 좀 넘은 앤데 미래가 창창한 애를 제가 먼저 보낼 순 없잖아요...”대성통곡을 하는 허영지를 향해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금은 별문제 없는데 계속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이성을 잃으면 그땐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미 환자분이 본인 몸 상태를 다 알게 됐으니 가족분들은 위로해주면서 환자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우리 아들 국내 최고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애예요,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애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텐데... 승우가 제 몸 상태를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만 생각하면 저도 죽을 것 같아요...”“차라리 그냥 내가 다치고 말지,
장기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오른쪽 다리에만 느낌이 없는 게 아무래도 불길했다.“형, 진정하라니까.”“마취가 아직 안 풀려서 그런 거야. 마취만 풀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니까 좀 기다려봐.”“아니야,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 그냥 없어진 것 같아...”송문수의 위로에도 흥분하며 몸을 움직이던 송승우는 점차 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지금 송승우는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생각에 송문수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환자의 강한 움직임에 여러 가지 중요한 수치가 변하자 중환자실에서부터 경보음이 울려고 빠르게 뛰어온 의사들은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들을 보더니 곧바로 송승우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송승우의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느려진 걸 본 송문수는 깜짝 놀라며 재빨리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겼다.한편 하지수의 거듭되는 설득에 밥을 먹고는 송기명과 허영지는 아들 걱정에 일찌감치 병원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수술실로 뛰어가는 송문수와 침대에 누워있는 송승우를 보게 되었다.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더니 또 무슨 일로 수술실에 가는지 몰랐던 그들은 어두워진 의료진들의 안색을 살피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마음 약한 허영지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자 송기명과 하지수가 그녀를 부축했고 하지수는 괜찮을 거라고 허영지를 다독이며 그녀와 함께 수술실 앞으로 다가갔다.가족들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던 송문수를 하지수가 나지막하게 불렀다.“문수 씨.”그에 고개를 홱 돌린 송문수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까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길 때 송승우의 손이 그의 손에 닿았는데 그게 사람의 손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워서 송문수는 아직도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왜 그래, 말 좀 해봐.”“승우, 우리 승우 괜찮은 거지?”하지수는 하얗게 질린 송문수가 걱정됐지만 허영지는 송문수의 안색은 신경 쓰지 못하고 송승우의 안부를 물었다.송문수는 가족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송승우가 본
“너 혼자야?”힘겹게 내뱉은 목소리였지만 그게 너무나도 미약해서 송문수는 송승우에게로 가까이 붙은 채 몸을 숙여야만 그가 뭐라고 하는지 그나마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엄마 아빠도 너 걱정했어.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면회 못한다고 해서 어제 호텔로 먼저 보냈어. 보고 싶으면 지금 바로 전화할게.”송문수의 말에 괜찮다며 고개를 젓던 송승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나 많이 다쳤어?”“생명엔 지장 없대, 그런데 교통사고가 워낙 크게 나서 장기들이 많이 손상됐대. 그래서 여기 당분간 있는 건데 최고로 좋은 의료진들만 붙였으니까 걱정 마, 곧 괜찮아질 거야.”“나 얼굴은 멀쩡해?”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얼굴이 붕대로 다 감겨있어서 안 보여.”“눈, 코, 입, 귀는 멀쩡한 것 같아.”“팔다리는 다 있어?”하지만 또다시 들려온 질문에는 곧바로 답을 하지 못하는 송문수였다.이렇게 빨리 저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교통사고에서 깨어난 환자가 가장 궁금해할 게 본인의 목숨과 몸 상태일 테니 송문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교통사고에서 가장 흔한 후유증이 얼굴 흉터와 장애라서 저런 질문을 하는 건 알겠지만 송문수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눈을 피하기만 했다.“송문수.”“다 있어.”결국 의사의 당부 때문에 송승우의 회복을 돕고자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송문수의 긴장한듯한 반응에서부터 송승우는 무언가 눈치를 챈 듯했다.그 힘든 와중에도 그는 흥분을 한 건지 언성을 살짝 높였다.“너 아까 망설였어.”“거짓말이지?”“아니야. 정말 다 멀쩡해.”“맹세해 그럼.”“맹세할게.”죄책감이 점점 켜졌지만 송승우의 감정변화를 느낀 송문수는 아직은 중환자라 큰 충격은 피해야 하는 송승우를 위해 일부러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거짓말이면 넌 평생 하지수랑 같이 못 있어.”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는 송승우에 송문수는 마른 침을 삼켜냈다.제 목숨을 담보로는 맹세할 수 있어도 하지수와의 감정을
예수진:[그럼 너랑 지수 다 서울에 있는 거야? 아직 병원이야?]예수진:[부모님은 좀 어떠셔? 충격이 크시지?]그들의 문자에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송문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누구한테 일어나도 참혹한 비극인데 그 일이 제 형한테 일어났으니 송문수는 어떻게 송승우를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근심 속에서 밤이 깊어지자 하지수가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자?][아니.][병원에서 잘 수 있으면 어디서 눈이라도 좀 붙여. 문수 씨도 쉬어야지,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티시면 남은 건 당신뿐이야.][알아 나도. 넌 왜 아직 안 자? 시간 늦었는데.][당신이 걱정돼서.][뭐하러 날 걱정해, 난 괜찮아. 송승우가 문제지...]그의 문자에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하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송문수도 그만 대화를 끝내려 했다.[늦었으니까 얼른 자.][응.][나 대신 부모님 좀 잘 챙겨줘, 엄마 아빠 쓰러질까 봐 나 너무 무서워.][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핸드폰을 내려놓은 송문수는 중환자실 앞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중환자실에서 나온 송승우가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병원에서 VIP 병실을 열어줬지만 송문수는 그 편한 곳도 마다하고 굳이 송승우 옆을 지키고 있었다.아무리 송승우라 해도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 봐.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아침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던 송문수는 간호사의 친절한 부름에 서서히 눈을 떴다.“보호자분?”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몸을 일으킨 송문수는 의아한 눈으로 간호사를 바라보았다.“환자분이 보호자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송승우 씨가요?”중환자실을 가리키며 당황한 듯 묻는 송문수를 향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송문수 씨가 중환자실로 와줬으면 하세요.”“면회 안된다면서요?”“좀 전에 선생님이 또 몸 상태 체크하셨는데 이젠 다 정상수치로 돌아와서 면회 가능하시대요. 대신 시간만 좀 주의해주세요. 아직 몸이 약하셔서 이럴 때는 저희도 환자분 부탁이라면 뭐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