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이연에게 전화했더니 전원을 꺼버렸다.전원을 끄고 다닐 사람이 아닌데?다급하게 오빠한테 전화를 했더니 또 전원이 꺼져 있다.두 사람 설마 납치된 거 아니야?그럴 일은 없겠지만 은근 긴장이 되었다.망설이다가 하도경에게 연락했다.“우리 오빠 어디 갔는지 알아? 연락이 안 돼!”“나도 몰라.”하도경이 대답했다.“이연 씨와 축하 파티하고 있겠지. 오늘 저녁 이연 씨 그렇게 예쁘던데 남자라면 못 참는 게 당연해. 내가 네 오빠래도 주저없이…”“우리 오빠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예수진은 무서운 오빠 바라기였다.“그래도 남자들은 다 똑같아.”그저 답답한 면이 있다 뿐이다.“모르면 됐어.”예수진은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어 바로 끊어버리려 했다.“예수진.”그때 하도경이 불렀다.“뭐?”“술 마시러 나올래?”하도경이 불쑥 물었다.그 말에 예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시간에 무슨 술이야, 미쳤어?“내일 촬영 있어.”예수진이 딱 잘라 거절했다.“다음에 마시자. 이번 촬영이 끝나면 며칠 쉴 거야. 그때 이 누나가 실컷 마셔 줄게.”하도경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그깟 술을 마시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게 아니라 예수진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말한 것이다.“그럼 일찍 쉬어.”“응.”예수진이 통화를 끊고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하도경의 말을 들어보니 소이연이 육현경과 같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다시 마음이 가라앉았다.한 사람을 잊는데 얼마나 걸릴까?아마 오래오래 지나야 하나도 아프지 않겠지.…소이연과 육현경은 8시간 비행기를 타고 발리에 도착했다.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전용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그랜드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가 조금 지났다.소이연이 이동 중에 잠들어서 호텔에 도착했는데도 눈을 뜨지 못했다.결국 육현경이 안고 방으로 이동했다.조심스럽게 그녀를 푹신한 베개에 눕히자 더 깊이 잠들었다.육현경이 자는 모습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씻으러 가려고 할 때 소이연의
소이연이 잠에서 깼다.지금 몇 시지?아직 잠이 덜 깨서 정신이 몽롱하고 몸이 나른했다.방 안의 전등도 희미하고 다 처음 보는 물건들이었다.심지어 어떻게 여기에 들어와서 또 어떻게 침대에…침대?소이연이 갑자기 이불을 홱 젖히고 자신의 옷을 확인했다.다행히 멀쩡하게 잠옷을 입고 있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그것도 잠시 다시 긴장되었다.올 때 잠옷을 입지 않았는데?누가 갈아 입혔지? 설마 육현경?이번엔 잠옷을 들추어 브래지어를 입었는지 확인했다.없다…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어떻게 이것도 모르고 잘 수 있어?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녔는데?육현경이 옆에 있다고 경계심을 놓은 건가?그 인간이 더 위험한 인물인데 말이야.“혹시 머릿속에 이상한 상상을 한 건 아니지?”그때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이 화들짝 놀라며 입구 쪽에 여유롭게 기대어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육현경은 그런 그녀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그녀가 퉁명스럽게 물었다.“볼 거 안 볼 거 다 봤어.”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치명적이었다.볼 거 안 볼 거를 다 봤다고?그럼 내 옷을 벗겼단 말이야?존중하기로 했잖아!역시 남자는 믿을 게 아니야. 다 짐승이야!“일어났으면 밥 먹으러 나와.”당황한 소이연과 반대로 육현경은 차분해 보였다.그가 떠나기 전에 한마디 던지고 갔다.“짐은 옷장에 있어. 다 정리했으니까 나올 때 속옷 챙겨 입어.”“…”정말 생각 같았으면 혀를 깨물고 쓰러지고 싶었다.소이연은 이불을 홱 집어 던지고 일어나 낯선 방을 둘러보았다.방도 침대도 엄청 크고 천장에 별들이 반짝거렸다.총총한 별들이 넓은 공간에서 반짝이는 것이 마치 우주에 있는 것 같았다.이번에 창밖으로 다가가 커다란 창문을 열었더니 끝없이 푸른 바다가 보였다.파도가 잔잔하게 밀려올 때마다 바닷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쳤다.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기는 밤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기분이 상쾌했다.한참 동안
통유리창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파도가 일렁거릴 때마다 유리창에 부딪쳤다.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은 아마도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진수성찬이 줄지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종업원이 선홍색 와인을 길쭉한 글라스에 따르고 각자 두 사람의 앞에 놓았다.고급진 식재료를 보던 소이연은 그제야 슬슬 배고팠다.“먹자.”육현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전혀 사양하는 기색이 없이 포크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배가 고팠는지 두 사람 모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했다.조금 배가 채워지자 소이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 며칠 놀아?”“넌 얼마나 놀고 싶은데?”육현경이 되물었다.“내가 말하면 들어줄 거고?”소이연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이연이 점점 똑똑해지네.”칭찬 소리에 소이연은 어이가 없었다.“아마 일주일?”아마?소이연이 눈살을 찌푸렸다.“떠나기 아쉬우면 어쩌려고?”육현경이 농담 소리를 했다.“육현경. 나 회사 일도 제대로 인계하지 않았어. 이번 대회에 우승을 따냈으니 방송국에서 은하패션과 본격적으로 협업할 건데 내가 없으면 계약도 못해.”“걱정 마. 명진이 처리할 거야.”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일주일 동안 놀기만 해.”“…”소이연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육현경의 앞에서는 그 어떤 협상도 통하지 않았다.저녁 식사를 마친 소이연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하루 종일 잤더니 그다지 졸리지도 않았다.예수진에게서 걸려온 부재 전화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였다.“수진한테 이미 얘기했어. 신경 안 써도 돼.”육현경에게 투시안이 달린 것 같았다.분명 휴대폰 액정을 보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꿰뚫고 있었다.소이연은 대꾸도 하지 않고 예수진에게 연락했다.예수진이 첫 번째 촬영을 마치고 두 번째 촬영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소이연한테서 연락이 왔다.“두 사람 이제 다 잤어요?”“…”“콜록콜록, 내 말은 깨어났냐고요.
예수진이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솔직히 소이연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그렇다고 육현경도 입이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오빠도 이연 언니를 쫓느라 정신이 없는데 내 사적인 감정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어.그래서 예리한 소이연이 많은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방금 소이연이 말을 삼킨 것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침묵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예수진은 이렇게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친구를 알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라 생각했다.반면, 문서아는 대회에서 이기기 위해 소나은에게 거액을 들여 원고를 사주는 것으로 절친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결국은 문서아가 철저하게 당해버렸다.그녀들에 비하면 예수진은 운이 좋은 편이다.감정 외에는 모든 것이 순탄대로를 걷고 있으니까.하나님도 그녀의 인생이 너무 완벽해서 질투심에 역겁을 겪게 한 건가?이번 역겁을 무사히 통과하면 승천할 수 있을까?예수진이 피식 웃었다.자신의 상상력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에 스스로 감탄했다.고개를 숙여 시계를 보더니 실장에게 물었다.“다음 신 촬영한다고 했는데 왜 지금도 부르지 않지?”“가서 물어볼게요.”실장이 적극적으로 알아보러 갔다.다음은 베드신을 촬영할 차례다.진작에 찍었어야 했다. 앞으로 몇 장면만 찍으면 이번 작품이 끝나는데 계속 미루다가 오늘에야 안배한 것이다.그때 실장이 씩씩거리며 돌아왔다.“수진 언니. 감독님이 그러는데 오늘 촬영이 끝났대요. 돌아가래요.”그 말에 예수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베드신을 찍기 위해서 심리적으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매일매일 마음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 장난하는 거야?예수진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수진 언니, 어디 가요?”“계지원 찾으러!”대체 뭐 하자는 플레이인지 똑똑히 물어봐야겠어.워낙 기가 세기로 소문난 예수진이 지금 이 순간 당장 폭발할 것 같았다.실장은 말리지 않았다.솔직히 그럴
”그래서 뭔데요?”예수진은 이해하지 못했다.“그래서 배우님은 적합하지 않다고요.”“어디가 적합하지 않아요? 몸매가 별로라서 유명한 감독님의 마음에 안 드시나?”예수진이 비아냥거리자 계지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는 평소에 화를 잘 내지 않았다.촬영할 때 요구가 엄격할 뿐, 조그마한 실수는 그냥 넘기고 촬영을 계속했다.정말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잘 참는 편이었다.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가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촬영장 내부의 분위기가 질식할 정도로 싸늘해지자 스태프들이 숨을 죽였다.실장이 옆에서 예수진의 옷자락을 당겼다.“수진 언니.”예수진과 계지원이 싸울까 봐 두려웠다.어쨌든 계지원은 감독이자 육씨 가문 사림이니 건드리면 안 되었다.예수진이 이를 악물고 옆에 있던 의자를 발로 걷어차며 포효했다.그 바람에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이 깜짝 놀랐다.예수진이 발광하는 것을 힐끗 보더니 이내 돌아서 하던 일을 마저 진행했다.계지원이 결정한 일이라면 그의 앞에서 죽어버린다 해도 절대 변하지 않았다.그때도 그랬다.계지원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몸이라고 가지려고 술 기운에 덮치려고 했다.그런데 그가 힘껏 밀치는 바람에 예수진은 머리를 벽에 박고 피를 줄줄 흘러내렸다.지금도 뒤통수에 바늘로 꿰맨 흉터가 남아 있다.그 흉터 때문에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이다.예수진이 떠난 뒤에도 현장 분위기는 여전히 썰렁했다.계지원이 벌겋게 된 눈으로 방금 예수진이 차버린 의자를 노려보았다.“촬영 계속합니다!”그제야 촬영이 다시 정상적으로 진행했다.감독 실장이 촬영에 몰입한 계지원을 몇 번이나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여배우들은 키스신이든 베드신이든 손해를 보기 때문에 계지원이 예수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베드신을 삭제해버렸다.그런데 투자사 측에서 한 컷이라도 홍보용으로 사용해야 한다면서 동의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대타를 찾자고 결정했다.그 뒤로 수많은 대타를 찾았지만 예수진이 연기한 캐릭터에 영향을 미칠까 봐 지금까지
”다 핏줄이야.”소이연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이 인간과 계지원의 사이가 얼마나 좋으면 이런 말을 할까?왠지 예수진이 안쓰러웠다.그녀는 전형적인 오빠 바라기였다. 가끔 육현경에게 대꾸를 하지만 누가 육현경의 험담을 하는 걸 용서하지 않았다. 게다가 육현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무조건 숭배하고 그가 무엇을 하라고 하면 툴툴대면서도 끝까지 해냈다.예수빈과 계지원의 감정이 뒤틀어지는 걸 보면…두 남자는 정말 예수진의 기대를 저버린 거나 마찬가지다.정말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인데.소이연은 정말 내키지 않았다.더는 육현경과 말을 섞지 않으려고 뉴스를 검색했다.안 본 사이에 예수진에 관한 뉴스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그녀를 칭찬하는 글들이 꽤 많았다.언론이란 원래 이렇다. 누구를 처세우면 다른 누구를 짓밟는 것을 일삼았다.예수진이 칭찬을 받는 동시에 문서인이 비난을 받고 있다.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여자를 보는 눈이 없다고 풍자했다.어떻게 소이연을 버리고 소나은을 선택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면서 말이다.어떤 사람은 배후가 문서인이라고 추측했다. 필경 전과가 있는 인간이라 인터넷에 점점 사실처럼 전파되더니 네티즌들이 그의 모든 잘못을 문서아에게 뒤집어씌웠다고 단정지었다.아무튼 이번 대회에서 큰돈을 들여 원고를 샀지만 문서인은 문씨 가문의 명성을 얻지 못하고 악명만 늘어난 신세가 되었다.그때 소이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문씨 가문이 이 정도로 비난을 받는데도 소나은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소나은에게 쓰레기 같은 남자친구한테서 떨어지라고 권고했다. 소이연에게도 그렇게 잔인하게 대했으니 소나은에게도 똑같이 대할 거라면서.소나은이 어릴 때부터 잔꾀가 많았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이 일에서 깨끗하게 물러선 것도 모자라 피해자로 거듭나다니, 심기와 수단이 예전보다 더 업그레이드되었다.그때 소이연의 손이 움찔했다.또 다른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소이연의 블랙 기사가 헬리콥터로 등장해 애정
소이연이 고개를 홱 돌리자 육현경이 빙그레 웃었다.깔끔하게 거절당했다.“그날에 왜 얼굴을 가렸어?”소이연이 뉴스를 훑어보면서 무심하게 물었다.“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육현경이 되물었다.그럴 자격?소이연이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우리 이연이가 나와 사귀는 조건이 대외에 알리지 않는 거잖아.”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는 것은 사실이니까.솔직히 육현경과 사귀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감정이 조금 생긴 것도, 그의 다정함을 내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문서인이라는 인간과 사귀고 또한 소씨 같은 가문에서 자란 환경 때문에 정말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일단 사귀는 사실을 발표하면 귀찮은 일만 늘어날 것 같았다.이 감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육현경의 신분 때문에 불편할까 봐 걱정되었다.지금은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누구에게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결국은 진심으로 한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응.”소이연이 한 글자로 대답했지만 속으로 은근 감동했다.육현경은 진심으로 그녀를 위해 생각하고 있었다.“’응’이 다야?”그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그럼? 나 오글거리는 말은 못해.“내게 기한을 줘야 되지 않나? 예를 들어 언제면 우리 사이를 공개할 건지.”소이연이 입술을 오물거렸다.사실 알고 있다. 지금 육현경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더 이상 냉대가 아니라 되려 빠르게 싹트는 중이고 그가 이기적으로 나와도 거부하지 못하고 있다.하지만 정말 언제쯤이면 이 걱정거리를 내려놓고 그를 완전히 받아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그것도 모르면서 그와 더 깊은 관계를 맺는다면 정말 불공평한 일이긴 했다.육현경이 소이연의 갈등을 눈치챘다.속으로 슬펐지만 그녀를 더는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를 기다리는 것이 이미 습관되었다.그러니 1년, 2년, 심지어 10년을 기다린다고 해도 괜찮았다.“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돼. 대신 왜 lovely 신분을 숨겼는지는 알려줘. 그 신분이라면 장안
육현경은 의문스러웠다.사실 소이연도 그랬다.“나도 우리 엄마가 왜 그렇게 당부하셨는지 모르겠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그러셨을 수도 있지만…”소이연은 애써 엄마의 모습을 회상했다.“우리 엄마는 역경 앞에서 고개를 숙이실 분이 아니야. 그래서 나도 엄마가 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했는지 지금도 이해되지 않아. 유감인 건, 엄마가 세상을 뜨셔서 그 답을 알 길이 없다는 거야. 엄마는 내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유일하게 나한테 진심으로 잘해준 사람이라서 엄마가 한 말씀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아.”육현경은 침묵했다.그는 소이연의 엄마가 왜 그녀에게 부탁했는지, 분명 최고급 디자인인데 왜 신분을 감춘 건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이번에 문서아한테 뒤통수를 맞지 않았다면 나는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고...”소이연은 혼자서 웅얼거렸다.엄마의 유언이었는데…그걸 지키지 못해서 엄마한테 너무 미안해…육현경은 소이연의 기분을 알아챘기에 곧바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인생에서 유감스러웠던 일들은 사실… 제일 좋은 결과였을 거야. 너의 어머니가 하늘에서 네가 괴롭힘을 당하시는 걸 보고 널 지켜주려고 그러신 걸 거야. 누가 알아? 어머니께서 그 말을 하신 걸 후회해서 너한테 이런 운명을 안배해 주신 것일지도. 그래서 네가 그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너의 신분을 공개해야만 하게 안배하신 것일 거야.”소이연이 육현경을 쳐다보았다.그의 감성적인 말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서 한 말인 줄은 알지만 그녀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그렇다고 믿어야지.”소이연은 웃어 보이면서 지나간 일에 대해 더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우리 엄마가 그랬어.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신을 아껴주어야 한다고.어쩔 수 없는 일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아, 잠깐. 네가 한 말 중에 잘못된 부분이 있는데.”육현경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응?”소이연은 당황했다.어떤 말이기에 저렇게 싸늘하게 물어보는 거지?“네가 그랬잖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너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오직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