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진은 승합차를 타고 촬영장을 떠났다.하루 내내 감정기복이 심한 야간극을 찍었더니 주인공의 역할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했다.차에 올라탄 뒤 진정시킬 겸 등받이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오늘 매니저가 데리러 와서 지금 한창 옆에 앉은 실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다인 언니, 저녁에 ‘솔로디자인쇼’를 보셨어요?”실장이 물었다.“오는 길에 띄엄띄엄 봤어.”“저도 띄엄띄엄 보긴 했는데 오늘 소이연과 소나은의 대회가 너무 드라마틱하더라고요. 드라마를 본 것보다 반전이 더 많았어요. 지금 뉴스에 숱한 글들이 올라왔는데 궁투극보다 더 재미있어요.”실장의 말에 예수진의 눈꺼풀이 살짝 움직였다.오늘 소이연의 대결이 있다는 걸 새까맣게 잊어버렸다.촬영에만 집중하느라 대회를 챙겨보는 걸 까먹었다.그녀가 눈을 뜨고 물었다.“소이연이 이겼어?”“당연하죠. 그것도 아주 통쾌 상쾌하게 이겼어요. 오늘부터 나 소이연 팬 할래요.”실장이 흥분하면서 말하더니 이내 한마디 덧붙였다.“물론 수진 언니가 내 마음속에 최고이긴 하지만요.”알랑방구쟁이!그래도 예수진은 소이연이 이겨서 기분이 좋았다.만약 소나은이 이겼다면 얼마나 콧대를 쳐들고 다닐지 상상이 갔다.“수진 언니, 촬영하느라 아직 뉴스를 못 봤죠? 오늘 저녁 대회 현장에 문서아가 소이연을 모함하려다가 대중들 앞에서 들통났잖아요. 그때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10년 묵은 체중이 쫙 내리는 기분이에요.”실장은 말하면 말할수록 격동했다.“그래?”예수진도 가십거리를 논하기 좋아했다.실장의 말을 듣고 갑자기 흥분되기 시작했다.피곤해서 손가락 움직일 힘도 없지만 그래도 휴대폰을 들고 뉴스를 검색했다.대회에 관한 뉴스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와 있었다.한창 신나게 보고 있을 때 한 뉴스 제목이 눈에 띄었다.“계지원은 문서아의 스캔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중들 앞에서 당당하게 여친을 보호했다”예수진이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뉴스를 터치했다.먼저 글을 대충 훑어보다가 사진을 주시해 보았다.계지원이 인파를
소이연에게 전화했더니 전원을 꺼버렸다.전원을 끄고 다닐 사람이 아닌데?다급하게 오빠한테 전화를 했더니 또 전원이 꺼져 있다.두 사람 설마 납치된 거 아니야?그럴 일은 없겠지만 은근 긴장이 되었다.망설이다가 하도경에게 연락했다.“우리 오빠 어디 갔는지 알아? 연락이 안 돼!”“나도 몰라.”하도경이 대답했다.“이연 씨와 축하 파티하고 있겠지. 오늘 저녁 이연 씨 그렇게 예쁘던데 남자라면 못 참는 게 당연해. 내가 네 오빠래도 주저없이…”“우리 오빠는 그런 사람 아니거든?”예수진은 무서운 오빠 바라기였다.“그래도 남자들은 다 똑같아.”그저 답답한 면이 있다 뿐이다.“모르면 됐어.”예수진은 쓸데없는 말을 하기 싫어 바로 끊어버리려 했다.“예수진.”그때 하도경이 불렀다.“뭐?”“술 마시러 나올래?”하도경이 불쑥 물었다.그 말에 예수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 시간에 무슨 술이야, 미쳤어?“내일 촬영 있어.”예수진이 딱 잘라 거절했다.“다음에 마시자. 이번 촬영이 끝나면 며칠 쉴 거야. 그때 이 누나가 실컷 마셔 줄게.”하도경의 웃음 소리가 들렸다.그깟 술을 마시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게 아니라 예수진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말한 것이다.“그럼 일찍 쉬어.”“응.”예수진이 통화를 끊고 소파에 벌러덩 누웠다.하도경의 말을 들어보니 소이연이 육현경과 같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그렇다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다시 마음이 가라앉았다.한 사람을 잊는데 얼마나 걸릴까?아마 오래오래 지나야 하나도 아프지 않겠지.…소이연과 육현경은 8시간 비행기를 타고 발리에 도착했다.공항에서 내리자마자 전용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그랜드 호텔에 도착했을 때 현지 시간으로 오후 2시가 조금 지났다.소이연이 이동 중에 잠들어서 호텔에 도착했는데도 눈을 뜨지 못했다.결국 육현경이 안고 방으로 이동했다.조심스럽게 그녀를 푹신한 베개에 눕히자 더 깊이 잠들었다.육현경이 자는 모습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씻으러 가려고 할 때 소이연의
소이연이 잠에서 깼다.지금 몇 시지?아직 잠이 덜 깨서 정신이 몽롱하고 몸이 나른했다.방 안의 전등도 희미하고 다 처음 보는 물건들이었다.심지어 어떻게 여기에 들어와서 또 어떻게 침대에…침대?소이연이 갑자기 이불을 홱 젖히고 자신의 옷을 확인했다.다행히 멀쩡하게 잠옷을 입고 있어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그런데 그것도 잠시 다시 긴장되었다.올 때 잠옷을 입지 않았는데?누가 갈아 입혔지? 설마 육현경?이번엔 잠옷을 들추어 브래지어를 입었는지 확인했다.없다…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어떻게 이것도 모르고 잘 수 있어?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다녔는데?육현경이 옆에 있다고 경계심을 놓은 건가?그 인간이 더 위험한 인물인데 말이야.“혹시 머릿속에 이상한 상상을 한 건 아니지?”그때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소이연이 화들짝 놀라며 입구 쪽에 여유롭게 기대어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육현경은 그런 그녀를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그녀가 퉁명스럽게 물었다.“볼 거 안 볼 거 다 봤어.”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치명적이었다.볼 거 안 볼 거를 다 봤다고?그럼 내 옷을 벗겼단 말이야?존중하기로 했잖아!역시 남자는 믿을 게 아니야. 다 짐승이야!“일어났으면 밥 먹으러 나와.”당황한 소이연과 반대로 육현경은 차분해 보였다.그가 떠나기 전에 한마디 던지고 갔다.“짐은 옷장에 있어. 다 정리했으니까 나올 때 속옷 챙겨 입어.”“…”정말 생각 같았으면 혀를 깨물고 쓰러지고 싶었다.소이연은 이불을 홱 집어 던지고 일어나 낯선 방을 둘러보았다.방도 침대도 엄청 크고 천장에 별들이 반짝거렸다.총총한 별들이 넓은 공간에서 반짝이는 것이 마치 우주에 있는 것 같았다.이번에 창밖으로 다가가 커다란 창문을 열었더니 끝없이 푸른 바다가 보였다.파도가 잔잔하게 밀려올 때마다 바닷바람이 부드럽게 얼굴을 스쳤다.비릿한 바다 냄새가 풍기는 밤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기분이 상쾌했다.한참 동안
통유리창은 바다와 연결되어 있어 파도가 일렁거릴 때마다 유리창에 부딪쳤다.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은 아마도 바다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진수성찬이 줄지어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종업원이 선홍색 와인을 길쭉한 글라스에 따르고 각자 두 사람의 앞에 놓았다.고급진 식재료를 보던 소이연은 그제야 슬슬 배고팠다.“먹자.”육현경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전혀 사양하는 기색이 없이 포크를 들고 먹기 시작했다.배가 고팠는지 두 사람 모두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먹기만 했다.조금 배가 채워지자 소이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 며칠 놀아?”“넌 얼마나 놀고 싶은데?”육현경이 되물었다.“내가 말하면 들어줄 거고?”소이연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우리 이연이 점점 똑똑해지네.”칭찬 소리에 소이연은 어이가 없었다.“아마 일주일?”아마?소이연이 눈살을 찌푸렸다.“떠나기 아쉬우면 어쩌려고?”육현경이 농담 소리를 했다.“육현경. 나 회사 일도 제대로 인계하지 않았어. 이번 대회에 우승을 따냈으니 방송국에서 은하패션과 본격적으로 협업할 건데 내가 없으면 계약도 못해.”“걱정 마. 명진이 처리할 거야.”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일주일 동안 놀기만 해.”“…”소이연이 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육현경의 앞에서는 그 어떤 협상도 통하지 않았다.저녁 식사를 마친 소이연은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하루 종일 잤더니 그다지 졸리지도 않았다.예수진에게서 걸려온 부재 전화를 확인하고 통화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였다.“수진한테 이미 얘기했어. 신경 안 써도 돼.”육현경에게 투시안이 달린 것 같았다.분명 휴대폰 액정을 보지 않았는데도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꿰뚫고 있었다.소이연은 대꾸도 하지 않고 예수진에게 연락했다.예수진이 첫 번째 촬영을 마치고 두 번째 촬영을 기다리고 있을 때 소이연한테서 연락이 왔다.“두 사람 이제 다 잤어요?”“…”“콜록콜록, 내 말은 깨어났냐고요.
예수진이 조용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솔직히 소이연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그렇다고 육현경도 입이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오빠도 이연 언니를 쫓느라 정신이 없는데 내 사적인 감정까지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겠어.그래서 예리한 소이연이 많은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방금 소이연이 말을 삼킨 것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침묵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예수진은 이렇게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친구를 알게 되어서 너무 다행이라 생각했다.반면, 문서아는 대회에서 이기기 위해 소나은에게 거액을 들여 원고를 사주는 것으로 절친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지만 결국은 문서아가 철저하게 당해버렸다.그녀들에 비하면 예수진은 운이 좋은 편이다.감정 외에는 모든 것이 순탄대로를 걷고 있으니까.하나님도 그녀의 인생이 너무 완벽해서 질투심에 역겁을 겪게 한 건가?이번 역겁을 무사히 통과하면 승천할 수 있을까?예수진이 피식 웃었다.자신의 상상력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에 스스로 감탄했다.고개를 숙여 시계를 보더니 실장에게 물었다.“다음 신 촬영한다고 했는데 왜 지금도 부르지 않지?”“가서 물어볼게요.”실장이 적극적으로 알아보러 갔다.다음은 베드신을 촬영할 차례다.진작에 찍었어야 했다. 앞으로 몇 장면만 찍으면 이번 작품이 끝나는데 계속 미루다가 오늘에야 안배한 것이다.그때 실장이 씩씩거리며 돌아왔다.“수진 언니. 감독님이 그러는데 오늘 촬영이 끝났대요. 돌아가래요.”그 말에 예수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베드신을 찍기 위해서 심리적으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매일매일 마음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 장난하는 거야?예수진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수진 언니, 어디 가요?”“계지원 찾으러!”대체 뭐 하자는 플레이인지 똑똑히 물어봐야겠어.워낙 기가 세기로 소문난 예수진이 지금 이 순간 당장 폭발할 것 같았다.실장은 말리지 않았다.솔직히 그럴
”그래서 뭔데요?”예수진은 이해하지 못했다.“그래서 배우님은 적합하지 않다고요.”“어디가 적합하지 않아요? 몸매가 별로라서 유명한 감독님의 마음에 안 드시나?”예수진이 비아냥거리자 계지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는 평소에 화를 잘 내지 않았다.촬영할 때 요구가 엄격할 뿐, 조그마한 실수는 그냥 넘기고 촬영을 계속했다.정말 참을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잘 참는 편이었다.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가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촬영장 내부의 분위기가 질식할 정도로 싸늘해지자 스태프들이 숨을 죽였다.실장이 옆에서 예수진의 옷자락을 당겼다.“수진 언니.”예수진과 계지원이 싸울까 봐 두려웠다.어쨌든 계지원은 감독이자 육씨 가문 사림이니 건드리면 안 되었다.예수진이 이를 악물고 옆에 있던 의자를 발로 걷어차며 포효했다.그 바람에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이 깜짝 놀랐다.예수진이 발광하는 것을 힐끗 보더니 이내 돌아서 하던 일을 마저 진행했다.계지원이 결정한 일이라면 그의 앞에서 죽어버린다 해도 절대 변하지 않았다.그때도 그랬다.계지원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몸이라고 가지려고 술 기운에 덮치려고 했다.그런데 그가 힘껏 밀치는 바람에 예수진은 머리를 벽에 박고 피를 줄줄 흘러내렸다.지금도 뒤통수에 바늘로 꿰맨 흉터가 남아 있다.그 흉터 때문에 완전히 정신을 차린 것이다.예수진이 떠난 뒤에도 현장 분위기는 여전히 썰렁했다.계지원이 벌겋게 된 눈으로 방금 예수진이 차버린 의자를 노려보았다.“촬영 계속합니다!”그제야 촬영이 다시 정상적으로 진행했다.감독 실장이 촬영에 몰입한 계지원을 몇 번이나 쳐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여배우들은 키스신이든 베드신이든 손해를 보기 때문에 계지원이 예수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베드신을 삭제해버렸다.그런데 투자사 측에서 한 컷이라도 홍보용으로 사용해야 한다면서 동의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대타를 찾자고 결정했다.그 뒤로 수많은 대타를 찾았지만 예수진이 연기한 캐릭터에 영향을 미칠까 봐 지금까지
”다 핏줄이야.”소이연의 얼굴이 더 일그러졌다.이 인간과 계지원의 사이가 얼마나 좋으면 이런 말을 할까?왠지 예수진이 안쓰러웠다.그녀는 전형적인 오빠 바라기였다. 가끔 육현경에게 대꾸를 하지만 누가 육현경의 험담을 하는 걸 용서하지 않았다. 게다가 육현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무조건 숭배하고 그가 무엇을 하라고 하면 툴툴대면서도 끝까지 해냈다.예수빈과 계지원의 감정이 뒤틀어지는 걸 보면…두 남자는 정말 예수진의 기대를 저버린 거나 마찬가지다.정말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인데.소이연은 정말 내키지 않았다.더는 육현경과 말을 섞지 않으려고 뉴스를 검색했다.안 본 사이에 예수진에 관한 뉴스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그녀를 칭찬하는 글들이 꽤 많았다.언론이란 원래 이렇다. 누구를 처세우면 다른 누구를 짓밟는 것을 일삼았다.예수진이 칭찬을 받는 동시에 문서인이 비난을 받고 있다.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여자를 보는 눈이 없다고 풍자했다.어떻게 소이연을 버리고 소나은을 선택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면서 말이다.어떤 사람은 배후가 문서인이라고 추측했다. 필경 전과가 있는 인간이라 인터넷에 점점 사실처럼 전파되더니 네티즌들이 그의 모든 잘못을 문서아에게 뒤집어씌웠다고 단정지었다.아무튼 이번 대회에서 큰돈을 들여 원고를 샀지만 문서인은 문씨 가문의 명성을 얻지 못하고 악명만 늘어난 신세가 되었다.그때 소이연이 미간을 찌푸렸다.문씨 가문이 이 정도로 비난을 받는데도 소나은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소나은에게 쓰레기 같은 남자친구한테서 떨어지라고 권고했다. 소이연에게도 그렇게 잔인하게 대했으니 소나은에게도 똑같이 대할 거라면서.소나은이 어릴 때부터 잔꾀가 많았다는 걸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이 일에서 깨끗하게 물러선 것도 모자라 피해자로 거듭나다니, 심기와 수단이 예전보다 더 업그레이드되었다.그때 소이연의 손이 움찔했다.또 다른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소이연의 블랙 기사가 헬리콥터로 등장해 애정
소이연이 고개를 홱 돌리자 육현경이 빙그레 웃었다.깔끔하게 거절당했다.“그날에 왜 얼굴을 가렸어?”소이연이 뉴스를 훑어보면서 무심하게 물었다.“내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육현경이 되물었다.그럴 자격?소이연이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우리 이연이가 나와 사귀는 조건이 대외에 알리지 않는 거잖아.”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는 것은 사실이니까.솔직히 육현경과 사귀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감정이 조금 생긴 것도, 그의 다정함을 내치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문서인이라는 인간과 사귀고 또한 소씨 같은 가문에서 자란 환경 때문에 정말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었다.일단 사귀는 사실을 발표하면 귀찮은 일만 늘어날 것 같았다.이 감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육현경의 신분 때문에 불편할까 봐 걱정되었다.지금은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하고 싶었다. 누구에게 바라지도 않고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결국은 진심으로 한 사람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응.”소이연이 한 글자로 대답했지만 속으로 은근 감동했다.육현경은 진심으로 그녀를 위해 생각하고 있었다.“’응’이 다야?”그가 눈썹을 치켜 올렸다.그럼? 나 오글거리는 말은 못해.“내게 기한을 줘야 되지 않나? 예를 들어 언제면 우리 사이를 공개할 건지.”소이연이 입술을 오물거렸다.사실 알고 있다. 지금 육현경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더 이상 냉대가 아니라 되려 빠르게 싹트는 중이고 그가 이기적으로 나와도 거부하지 못하고 있다.하지만 정말 언제쯤이면 이 걱정거리를 내려놓고 그를 완전히 받아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그것도 모르면서 그와 더 깊은 관계를 맺는다면 정말 불공평한 일이긴 했다.육현경이 소이연의 갈등을 눈치챘다.속으로 슬펐지만 그녀를 더는 난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그녀를 기다리는 것이 이미 습관되었다.그러니 1년, 2년, 심지어 10년을 기다린다고 해도 괜찮았다.“지금 대답하지 않아도 돼. 대신 왜 lovely 신분을 숨겼는지는 알려줘. 그 신분이라면 장안
사실 송문수도 내성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지수의 앞에서 늘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송문수의 말에 하지수는 한숨을 내쉬었다.“왜 모두 날 못 믿는 거지?”송승우가 그녀를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송문수도 그녀를 믿지 않았다. 자신의 말이 이렇게 신뢰성이 없단 말인가?“그냥 송승우는 나보다 훨씬 나은데 당신이 날 선택하는 것이 이해가 안 돼서 그래.”송문수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지만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그는 너무 긴장해서 숨이 막힐 정도였다.“승우 오빠가 문수 씨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하지수는 망설이지 않고 말하였다.“응?”하지수의 말에 송문수는 눈썹을 치켜세웠고 자기의 귀를 의심하였다.송승우는 자기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더 똑똑한 것은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이었다.반대로 자신은 그냥 못난 놈이었다.그는 어렸을 때부터 무능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승우 오빠가 문수 씨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 않아. 점점 그런 생각이 들어.”하지수는 다시 한번 말하였다.“근데 너 어렸을 때부터 형만 좋아했잖아? 몇 년 동안 좋아했지?”“지금 생각하면 그건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해서 그런 것 같아.”하지수는 송문수에게 약을 발라주면서 말하였다.“어렸을 때 승우 오빠가 성숙하고 듬직하고 성격도 좋다고 생각했어. 당신처럼 걸핏하면 나를 괴롭히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난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또 낯선 환경에서 생활하다 보니 안전감을 줄 수 있는 듬직한 사람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아.”하지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그때 승우 오빠는 나를 지켜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난 정말 승우 오빠와의 감정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어. 승우 오빠에 대한 의지를 사랑으로 착각했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하면 아니야.”하지수는 연고를 내려놓고 송문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지금은 승우 오빠가 날 결혼식장에 버려두고 간 것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아. 그리고 승우 오빠와 다시 잘되고 싶은 생각이 없고 심지어 나와 더 멀리 떨어졌으면 좋겠어
“승우 오빠, 우리 사이에 정말 끝났다고 몇 번 말해야 돼요? 우린 더 이상 가능성이 없어요.”사실 하지수는 화가 좀 났다.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송승우가 자신의 진실한 속마음을 믿을까? 왜 이렇게 집착하지?송승우는 매서운 눈초리로 하지수를 노려보면서 이를 갈았다.“후회하지 마, 하지수!”“쾅!”송승우는 차에서 내릴 때 차 문을 세게 닫아서 차가 흔들렸다.그가 얼마나 화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기사마저 소스라쳐 놀라서 감히 숨도 쉬지 못했고 떠나야 할지 제자리에 있어야 할지 몰랐다.“가세요.”오히려 하지수는 담담한 태도로 말했다.송문수는 고개를 돌려 하지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속으로 조금 기뻤지만 감히 기뻐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하지수에 대해 늘 환득환실하였다.기사는 다시 브레이크를 밟고 그들을 데려다주었다.차 안은 여전히 조용하였다. 송문수는 하지수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죽어도 입을 열지 않겠다고 생각하였다.어느새 주차장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앞뒤로 차에서 내렸다.지금 두 사람은 모두 피곤하였다. 저녁 내내 난리 쳐서 벌써 새벽 3시 넘었고 이제 4시간 정도만 잘 수 있었다.“문수 씨, 먼저 씻어. 욕실에서 나오면 내가 방에서 약 발라 줄게. 당신 얼굴에 멍이 좀 들었고 손도 좀 부었잖아.”하지수는 피곤하지만 억지로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송문수는 입술을 오므리다가 대답하였다.“알았어.”하지수는 우선 방에 들어가서 샤워했고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그녀는 거실에서 약상자를 찾은 후 송문수의 방문을 두드렸다.송문수는 잠옷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담배를 들고 있었는데 불을 붙이지 않았다.왠지 모르게 갑자기 담배를 피고 싶지 않았고 하지수가 담배 연기를 맡으면 기침을 할까 봐 걱정되기도 하였다.하지수는 그의 옆에 앉아서 요오드포름과 상처치료용 연고를 꺼냈다.“문수 씨, 머리를 조금만 수그려줘. 바를 수가 없잖아.”하지수가 다정하게 말하자 송문수도 순순히 따라서 하였다.그가 이렇게 말을 잘 듣는
“문수 씨.”하지수는 송문수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 송문수가 화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송승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어쨌든 한 가족이 아닌가.그녀는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승우 오빠를 병원에 보내야 하잖아.”하지수는 큰 소리로 송문수에게 말하자 송문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사실 송승우는 별일 없었다. 송문수는 격투기를 배운 적이 있기에 사람의 어느 부위가 다치면 안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송승우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때렸어도 급소를 때리지 않았다.하지수는 송문수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서 긴급구조 요청을 하였다.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하지수는 송승우에게 다가가지 않았다.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바닥에 쓰러진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송승우의 분노가 극도에 이르렀지만 송문수와 싸울 힘이 없었다.사실 하지수도 요새 송승우와 송문수가 자주 싸우는 이유를 몰랐다. 오늘은 벌써 두 번째였다.어렸을 때 두 형제의 관계가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지금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 유치하게 싸우다니!이윽고 구급차가 도착했고 구조대원들은 들것으로 송승우를 구급차에 태웠다.하지수도 따라서 올라탔지만 송문수는 타지 않았다.하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려와서 송문수를 잡아당겨서 같이 구급차에 올라탔다.구급차 안은 매우 조용하였다.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차 안의 분위기에 아직 분노의 불꽃이 튕기는 것 같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송승우는 응급실로 옮겼다.하지수와 송문수는 로비에서 기다렸다. 송문수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면서 한쪽에 서 있었다.사실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에도 상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문수 씨도 얼굴과 몸에 난 상처를 검사하지 않을래?”“필요 없어. 외상이라 금방 나을 거야”송문수가 이렇게 말하자 하지수도 강요하지 않았다.잠시 후, 송승우는 응급실에서 나왔고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모두 외상이라 별문제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입원 수속
“놓지 못해?”송문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이거 놔요.”하지수도 송승우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러자 송승우의 눈빛에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그는 더욱 세게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아파요!”송문수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놓으라고 했다!”그는 송승우의 팔을 끌어당기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에 송승우는 통증을 느꼈으나 승부욕 때문에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송문수가 힘을 줄수록 그도 더욱 힘을 줘서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송승우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이걸 놔. 나와 지수의 일에 끼어들지 마.”“끼어들지 말라고?”송문수는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형이 잊은 것 같은데 지수는 내 와이프야. 우린 부부이지만 형과 지수는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지금 형이 내 와이프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나보고 끼어들지 말라고?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너!”송문수의 쏘아붙인 말에 송승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예전에 송승우는 하지수가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에 송문수를 안중에 넣지도 않았고 그들의 결혼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송문수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지수가 좋아한 사람은 나야!”송승우는 수치심에 더 약이 올라서 노기어린 목소리로 외쳤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반박할 힘도 없었고 송문수의 말이 들려왔다.“지수가 누구를 좋아하든 지금은 내 여자야. 누구도 데려갈 수 없고 누구도 지수를 괴롭힐 수 없다고! 셋까지 셀 테니 지수를 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송승우는 끄덕하지도 않고 송문수를 노려보았다.“하나.”“둘.”송문수는 ‘셋’을 세는 대신 주먹을 들고 송승우의 얼굴을 세게 강타했다.송문수의 한 방을 맞은 송승우는 코피를 흘렸고 아픔으로 이내 하지수를 놓아주었다.그러나 송승우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승우 씨, 사과 따위 이제 필요 없어요. 지금 제가 바라는 건 아무 탈 없이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끝내는 거예요. 승우 씨는 문수 씨 형이잖아요. 게다가 저도 어릴 때부터 송씨 가문에서 자란 사람이고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친척 같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하지수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말했다.송승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수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망상에 빠진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 헤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하지수는 뒤를 돌아 송문수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늦은 시간이었고 그녀도 여전히 많이 피곤했다. 송문수랑 같이 집으로 가서 자고 싶었다.크레지가 아직 오지 않은 이상, 기술 투자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이상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짬짬이 시간을 내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막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의 손은 또다시 송승우에 의해 붙잡혔다.하지수가 아무리 팔을 흔들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송문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송승우의 행동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그가 앞으로 다가가 하지수를 데려오려던 순간, 송승우가 갑자기 말했다.“지수 씨, 방금 당신의 행동은 모든 걸 말해줬어요!”“무슨 행동이요?”하지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방금 제가 불렀을 때, 제 쪽으로 다가왔잖아요. 그게 지수 씨 마음속에 있는 진심이에요. 더 이상 숨기지 말고 저한테로 오세요. 하지수 씨, 제가 잘 해줄게요. 지수 씨를 혼자 두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맹세할게요...”“아니요.”하지수는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하지수를 바라보는 송승우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찼다.“승우 씨가 불었을 때 따라간 건 무의식적으로 간 거예요. 잠에서 덜 깬 상태라서 누가 불렀어도 갔을 거예요. 승우 씨인 줄도 몰랐어요.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할게요. 낯선 목
송문수는 하지수가 일어나서 송승우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송승우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생각했다.‘그래, 지수 씨도 아직 날 신경 쓰고 있다니까. 숨기려 해도 어떻게 숨기겠어? 이런 상태에서야 비로소 진심이 드러나는 거지.’송문수는 멀어져 가는 하지수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옷자락에 손이 닿았을 때 살짝 멈칫했다. 하지수를 강제로 붙잡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사실 그는 항상 하지수의 선택을 존중해 왔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말이다.하지수는 송승우 앞으로 걸어갔고 송승우가 먼저 손을 뻗더니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다.그러나 그가 손을 뻗자 하지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승우 씨?”그녀는 그제야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조금 전까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이제와사 분명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흐릿할 뿐이었다.“너무 늦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송승우가 그녀를 끌고 나가려고 하자 하지수는 급히 그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그러자 송승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아까는 잠에서 덜 깨서 그랬어요. 전 문수 씨랑 같이 갈 거예요.”“뭐라고요?”송승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까지 연기할 거예요?”“네?”하지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저를 놀리는 게 재밌으세요?”송승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저... 저는 그런 게 아니라...”하지수는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그러자 송승우가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제가 잘못한 걸로 하죠.”그가 갑작스레 사과를 하자 하지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사과를 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사과를 하는 거야?’“미안했어요. 어쩔 수 없이 떠난 거라고는 하지만 우리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잖아요. 결혼식장에 지수 씨 혼자 남겨두고 간 건 제 잘못이에요. 미안해요.”하지수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
하지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빨리 뛰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만약 누군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어색한 상황이 얼마나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문수 씨도 부끄러워하는 건가?’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까 봐 걱정이었다.하지수는 소파에 앉아 몰래 송문수를 쳐다보았다.그는 그저 고위직 직원의 얘기를 듣고만 있을 뿐,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쉬었다.‘단지 어색해서 그런 건가?’송문수는 언제나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해명하려 하지 않는 것도 결국 체면을 세우려고 그러는 건가?’하지수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크레지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관련 부서가 계속해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송문수와 하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들은 끊임없이 회의를 열고 논의하며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애썼다.새벽 2시가 되었지만 송문수는 아직 퇴근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방금까지도 각 부서와 회의를 하면서 협력 계획과 판매 계획을 다시 수정하고 보완했다.회의가 끝난 후에도 송문수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송문수는 그제야 그의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서류든 제대로 보지 않고 사인을 해버렸었다. 하지만 이젠 점점 더 신중해졌고 모든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사인을 했다.그 덕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오늘 하루 동안의 모든 서류를 처리하고 나서야 송문수는 퇴근을 하려고 하지수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이미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잠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송문수의 기억 속에 하지수는 늘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고 절대 늦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많이 피곤한 걸까?’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야
송문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아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를 더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 송문수가 점점 더 발전하는 걸 보면서 하지수도 그를 더 지지해 주고 싶었고 송문수로 하여금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하지수는 옆에 있는 소파로 가서 노트북을 들고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습관처럼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들어갔다.그녀는 비록 알림을 꺼 놓았지만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메시지가 있으면 항상 첫 번째로 확인하곤 했다.그런데 그때, 그룹 채팅에 있는 메시지를 본 하지수는 깜짝 놀랐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마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워할 것이었다.송문수가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보낸 것이었다.하지수는 고개를 들어 송문수를 바라보았다.그는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채팅방에는 여전히 ‘하지수’라는 이름이 올라오고 있었다.“문수 씨, 컴퓨터 바이러스에 걸린 거 아니야?”하지수가 물었다.“어?”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하지수는 송문수 앞에 서서 그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타자를 해놓고 아직 보내지 않은 ‘하지수’도 있었다.송문수도 그제야 자신이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입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자신도 놀란 듯했다. 그는 자신이 타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하지만 방금 그의 머릿속이 온통 하지수로 가득 찬 건 사실이었다.그때, 채팅방에서 누군가 메시지를 보냈다.[회장님 지금 하 매니저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그걸 실수로 단체 채팅방에 보낸 거고?]메시지는 보내지자마자 삭제되었고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나도 잘못 보냈네!”그룹 채팅에 두 개의 삭제 기록이 나타났다.송문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제야 메시지를 삭제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하지수’라는 메시지들을 삭제하려 했지만 이미 메시지를 취소할 수 있는 시간이
송승우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는 하지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하지수에게 송문수를 고른 게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반드시 알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로 하여금 후회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하지수는 송승우의 사무실을 떠나 바로 송문수의 사무실로 갔다.송문수는 업무에 몰두해 있었다.회사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자유시간이 없었고 퇴근 후에도 여전히 업무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가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하느님도 부지런한 사람을 도울 거라 믿으며 송문수가 앞으로 큰 성과를 낼 것이라고 확신했다.“형이 뭐라고 했어?”송문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차갑게 물었다.“자기 개인 비서로 되어달라고 하더라고.”하지수는 송문수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송문수랑 같이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최대한 마음을 다할 생각이었다.송문수는 멈칫하더니 코웃음을 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하지수가 그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였을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지수가 형 요구를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번에도 알겠다고 했겠지...’이렇게 생각한 송문수는 일에 더 집중하려 애썼다. 회사 일을 제대로 해내기로 결심한 이상 중간에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거절했어.”하지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문수는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분명 그녀의 말에 설렌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했다.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계속해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반면, 하지수는 송문수에게 그 어떤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송문수는 자기한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신의 결정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이었다.“왜 거절했는데?”송문수가 차분하게 물었다.“문수 씨한테 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수는 웃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