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이 어떻게 육씨 가문에 들어왔는지 궁금하죠?”소이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럴 줄 알았어요. 그 답답한 인간이 지 입으로 말할 리가 없지.”예수진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하지만 그녀도 물은 적이 없었다.“오빠가 21살 때에 민이를 데리고 왔어요. 그것도 외할아버지가 직접 데려왔죠. 그때 오빠는 민이의 존재를 모르는 눈치였는데 외할아버지는 어떻게 알았는지. 암튼 외할아버지는 세상에 모르는 일이 없어요.”예수진이 지난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외할아버지가 민이를 안고 왔을 때 오빠는 해외에 있었어요. 그때 민이의 친모가 아이를 낳자마자 병원에 버리고 도망가서 외할아버지가 데리고 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그 말에 소이연의 가슴이 조여오듯 아파왔다.전에 육현경이 육민의 친모가 자식을 버렸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았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그 장면을 떠올리자 숨이 막힐 정도로 슬펐다.갑자기 그 아이가 생각났다. 그렇게 원했던 아이었는데 뱃속에서 죽어버린 아이.소이연이 슬픔을 참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그 모습을 본 예수진이 당황했다.“언니 왜 울어요?”“모르겠어요.”소이연도 왜 갑자기 통제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지 몰랐다.“그냥 가슴이 너무 아파요.”“내가 처음 민이를 봤을 때도 그랬어요. 사람이 얼마나 지독해야 친자식을 매정하게 버릴 수 있는지. 만약 내가 오빠였다면 평생 그 여자를 용서하지 않았을 거예요!”예수진이 한마디 덧붙였다.“오빠도 용서하지 않겠지만.”소이연이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이해할 수 없어요. 뭐가 내키지 않아서 오빠를 버리고 민이까지 버렸는지. 오빠 얼굴이 못 생겼어요 아니면 돈이 부족해요? 능력도 출중한데, 그 여자 장님 틀림없어요!”예수진이 격분했다.대체 어떤 여자가 육현경을 갖고 놀다가 소탈하게 돌아섰는지 소이연도 궁금했다.“한번은 나와 도경 오빠가 술을 마시면서 그 문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어요. 아마 그 여자도 오빠의 능력을 모르고 만났을 거
”알았어요.”예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이연 언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오빠랑 만나서 너무 좋아요.”갑작스러운 고백에 소이연은 쑥스러웠다.자신도 육현경과 만나서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민의 친모가 보는 눈이 없어서 다행이지. 아니면 이렇게 좋은 언니를 어떻게 만나겠어요.”예수진이 아부하는 티가 확 느껴졌다.“빨리 자요.”소이연이 재촉하고는 부랴부랴 욕실로 들어갔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예수진이 킥킥 웃으면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여자들이란 참, 먼저 쓰레기 같은 남자를 만나야 정신을 차리고 진짜 운명의 상대를 만나는 건가?소이연이 문서인 쓰레기를 만난 것처럼 자신도 불행하게 계지원과 만났다고 여겼다.…이튿날 아침 예수진이 요란하게 울리는 휴대폰 소리에 눈을 떴다.휴대폰 액정을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전화를 받았다.“다인, 계지원이 다 알아서 처리한다고 말했잖아. 우린 그냥 기다리면 되니까 날 귀찮게…”“계 감독님이 이미 발표했어.”갑자기 잠을 확 깬 예수진이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서 앉았다.커다란 인기척에 소이연도 깨어났다.침대에서 일어나 지나치게 흥분해 있는 예수진을 바라봤다.예수진이 휴대폰으로 뉴스를 확인했다. 일면에 계지원의 개인 성명이 올라와 있었다. 그와 예수진의 연애 관계를 확실하게 부정하고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일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문서아와 지금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불법 언론사에 사실과 어긋나는 말과 사진을 함부로 올리지 말라고 요구했다.소이연이 옆에서 뉴스를 보고 깜짝 놀랐다.계지원과 문서아가 사귄다고?문씨 가문에 편견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문서아는 좋은 사람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수진!”다인이 휴대폰 너머로 큰소리로 불렀다.“어.”예수진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조용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너 계 감독님과 정말 아무도 없었어?”다인은 믿기지 않았다.아무도 없었다면 왜 사진에 찍혔냐고? 그것도 야심한 밤에 육씨 저택에서.육씨 저택이 그렇게 쉽게 드나
예수진이 침묵했다.다인은 그녀가 불쾌해한다는 걸 눈치채고 한숨을 내쉬었다.계지원과 문서아의 재산을 따진다면 예수진이 빼앗겨도 할 말이 없다.예수진이 안쓰러워서 위로했다.“연예계에 좋은 남자가 널리고 널렸다. 남자가 계지원 하나뿐이겠어? 지금 계지원과 문서아가 서로 입장을 발표한 이상 우리 작업실에서도 축하해줄 생각인데 그래도 괜찮겠어?”그녀의 입장에서 충분히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다.“알아서 결정해.”“그럼 오늘 하루 쉬어, 내가 촬영팀에 말할게.”“알았어.”예수진이 전화를 끊고 문서아에 관한 뉴스를 보았다.문서아가 개인 SNS에도 글을 올렸다.‘저와 지원 씨는 오랫동안 연인 사이로 지냈어요. 우리는 지금도 잘 지내고 있고 앞으로도 좋은 인연을 이어갈 거예요. 여러분의 지지와 축하에 감사드려요.’라는 글와 두 사람이 친밀하게 찍은 사진도 첨부해서 올렸다.계지원과 문서아가 얼굴을 맞대고 웃는 모습이 정말 애틋하게 사랑하는 연인 사이처럼 보였다.하지만 댓글은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어제 예수진과 계지원의 스캔들이 나서 기뻤는데 오늘 눈을 뜨고 보니까 다른 여자로 바뀌었네. 능력 좋다!][딱 봐도 예수진이 계지원한테 놀아난 거네. 야심한 밤에 계지원 따라 집에 가서 뭘 했겠어? 지금 두 사람이 스캔들이 나오니까 계지원이 시치미를 떼를 것 좀 봐.][계지원 정말 무책임하다. 우리 수진이만 가엽게 속았네.]예수진이 덤덤하게 댓글을 읽었다.소이연도 옆에서 세 사람에 관한 뉴스들을 검색해 보았다.여론이 빠르게 한쪽 방향으로 쏠렸다. 모두 계지원이 무책임한 바람둥이라고 비난했지만 문서아는 오히려 멀쩡했다. 그래도 계지원과 연인 사이라고 발표한 이상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예수진은 온전히 피해자가 되었다.그래서 자신의 명의로 예수진의 미래를 바꾸는 게 계지원이 말한 처리 방식이란 말이야?뭔가 수상한데?소이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계지원이 예수진에게 최선을 다해 잘해주는 것 같았다.그런데 예수진은 왜 그렇게 싫어할까?아무런 이유 없이
싫어한다면 예수진을 위해서 왜 명의까지 잃어가며 혼자 책임을 졌을까?“두 사람 관계는 좀 복잡해. 계지원은 내 친구이지만 촌수로 따지면 삼촌 뻘이야. 내가 대신 비밀을 지켜주고 있어. 그러니까 두 사람은 될 수 없는 사이야.”육현경이 알려주지 않아서 소이연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말해줄 수도 있어.”그러다 육현경이 말을 바꿨다.“…”순순히 알려줄 리가 없지.육현경은 언제나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육씨 가문의 사적인 문제라 외부인에게 말하기가 좀 그렇거든. 근데 나한테 시집을 온다면 자연스럽게 집안의 모든 일을 알게 될 거야.”아주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에 소이연은 어이가 없었다.어제 예수진이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늙은 여우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육씨 가문에 여우들만 모여서 사는 가문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수진이 잠시 부탁할게. 걔가 살 집을 마련하면 그때 옮길 거야.”“알았어.”예수진이 오래 있어도 개의치 않았다.“혹시 여행가고 싶어?”육현경이 화제를 돌렸다.“…”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네?소이연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거절했다.“안 돼. 나 바빠.”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려면 준비할 것이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얼마나?”상대방의 퉁명한 소리가 들렸다.“3개월 정도.”마지막 결승전까지 버틴다면 3개월은 바쁘게 보내야 한다.“3개월 뒤에 거절하지 마.”듣기엔 명령 같지만 세상 부드러운 목소리였다.소이연은 가슴이 설레었다.결국 마지못해 대답해서야 전화를 끊었다.…일주일 뒤.계지원에 관한 이슈가 사나흘 만에 관심도가 하락했다.육씨 가문에서 손을 쓴 것 같았다.계지원도 꽤 영리한 두뇌를 갖고 있다. 육씨 가문에서 예수진이 연예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대해 관여하지 않지만 계지원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가 터지면 무조건 압박을 가해서라도 처리해주니 그것을 이용한 것 같았다.그렇다 해도 부정적인 뉴스 때문에 큰 타격은 받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계지원은 사람들 뒤에서 일하는 직업이라 아무
소나은이 입을 열기 전에 문서아가 몇몇 실장을 꼬리에 달고 다가와 지껄였다.“정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도 만난다더니 세상이 너무 좁지 않아요?”문서아까지 올 줄은 몰랐다.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이번 프로그램에 초청한 연예인들 중에 인기 연예인은 없었다. 일부분은 한물간 배우이고 다른 한 부분은 2,3 선에서 배회하는 여자 연예인뿐이었다.일반인들끼리 파트너를 맺는 자리에 인기도 높은 연예인들이 올 자리는 아니었다.소이연은 두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돌아서 갔다.“이연 언니. 아무리 자신감이 넘쳐도 자만하지는 말아야죠. 전국 국민들 앞에서 정말 괜찮겠어요?”문서아가 비아냥거렸다.“서아, 너나 걱정해. 내가 그동안 계 감독님을 지켜봤는데 쓸데없이 말썽을 일으키는 여자는 싫어하는 것 같더라고.”소이연이 대꾸했다.문서아의 안색이 순간 싸늘해졌다.계지원을 내세워서 협박할 줄은 몰랐다.“참, 전에 현경 씨 생일 때, 내가 지원 씨 하고 술도 마셨어.”소이연이 일부러 신경을 긁었다.“다음에 또 모인다면 서아도 데리고 나왔으면 좋겠다.”소이연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 갔다.그 모습을 보던 문서아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소이연, 너 지금 나를 비꼬는 거야?아무리 뉴스에서 커플이라고 나불거려도 실은 진정한 연인 사이가 아니다, 이 거야?그날 저녁 계지원과 예수진이 팬들의 비난을 받고 있을 때 계지원이 새벽 3시에 문서아에게 연락했다. 자신과 사귄다면 날이 밝는 대로 대외에 발표하겠다고 말하면서 발표하는 즉시 자신의 평판이 바닥을 치는 것은 물론 그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거라고 솔직하게 말했다.문서아는 고민도 없이 단번에 대답했다.평판이 나빠지는 건 일시적일 뿐, 계지원이 먼저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승낙한 뒤, 두 사람이 다정한 자세를 취하고는 사진 몇 장을 찍기 위해서 계지원이 새벽 4시에 문서아의 별장에 왔었다.계지원이 입장을 발표를 한 뒤에 문서아더러 개인 SNS에 사진과 글을 올리라고 했다.그래서 두 사람
소씨 가문만 의지해서는 안 되었다. 소씨 가문은 워낙 남존여비 사상이 강해 한두 개 원고를 사는 건 문제없지만 거액을 들인다면 틀림없이 반대해 나선다. 그러니 문씨 가문의 재력까지 이용한다면 쉽게 이름을 날릴 수 있다.먼저 문서인을 찾아가서 문씨 그룹의 수석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요구했다.문서인에게 손톱만큼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지만 승승장구하려면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다행히 문서인이 거절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줬다.무엇을 요구하면 한마디 잔소리도 없이 해줬다.만약 소나은이 빈털터리가 된다고 하면 문서인도 따라서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하지만 문씨 가문에서도 손해보는 건 없었다.이번 대회에서 문씨 가문 대표로 대상을 받게 되면 문씨 가문에서 영광을 얻게 되니까.소나은이 눈을 찔금 감았다.은하그룹에 있을 때 진정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소이연이 압박을 가할 때마다 대충 하는 시늉만 냈었다.어쨌든 그녀를 위해 일하는 건 썩 내키지 않았다.그러니 이번 대회에 진지하게 임한다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참가자들이 녹화장에 들어가 감독의 안배에 따라 각자 자리에 앉았다.예고편을 찍을 때 현장에 참여한 관중들과 인사를 나누고 연예인들과 파트너를 정한다.소이연이 앞에 나서서 자기소개를 할 때 모두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다들 은하그룹 수석 디자이너라는 직함도 스스로 안배해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수군거렸다.그렇게 되면 소이연과 소나은 두 자매가 맞서서 겨루는 상황이 되어버리니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사람이 어디 있을까?소이연이 자기소개를 마친 뒤에 어떤 연예인도 그녀를 택하지 않았다.필경 파트너와 업무는 서로 성질이 다르니, 첫 번째 대결에서 소이연 때문에 탈락하고 싶지 않았다. 프로그램 규칙은 디자이너가 탈락하면 파트너도 탈락하기에 서로 신중하게 파트너를 골라야 했다.소나은이 자기소개를 할 때 국제디자이너대회에서 글로벌 수상 5위, 아시아 수상 2위, 은하그룹 수석 디자이너 및 문씨 그룹 수석 디자니어 등등 수상
”솔로 디자인 쇼” 프로그램이 방송한 후 대중들의 인기를 한 번에 샀다.예고편과 제1회가 방영되자 반응도 좋고 시청률도 꽤 높았다.그때서야 육현경이 소이연이 말한 바쁜 3개월에 뭘 하려는 지 알게 되었다.모니터 화면을 통해 소이연이 나온 부분만 무한 반복으로 돌려봤다.몇 분도 안 되는 영상을 30분이나 보다니, 옆에서 지켜보던 이명진은 할 말을 잃었다.사모님은 워낙 예쁘게 생겨서 연예인들과 같이 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돌려보고 돌려 보고 또 돌려 본다면 마지막에 눈알이 돌아가 버릴 지도 모른다. 대표님의 눈이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순간 살의 그득찬 시선을 느끼고 바로 입을 닫아버렸다.“그렇게 웃겨?”육현경이 물었다,“웃기지 않습니다.”이명진이 대답했다.“역시 사모님의 미모는 아름답습니다.”그 말에 육현경이 침울해졌다.이명진은 울고 싶었다. 예쁜 걸 예쁘다고 말한 것뿐인데.예쁘다고 칭찬도 못해요?“나가!”육현경이 짜증을 냈다,이명진이 무거운 짐이라도 덜어버린 듯 쏜살같이 달려나갔다.사무실에 혼자 남은 육현경은 늘씬한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들고 소이연의 번호를 눌렀다.한편, 소이연은 마침 회의를 여는 중이었다.휴대폰 액정을 힐끗 보더니 ‘회의 중입니다. 잠시 후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간편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확인한 육현경의 얼굴이 한층 더 침울해졌다.그때 단톡방 메시지가 떴다.육현경이 4인 단톡방을 열고 들여다보았다.하도경이 영상 하나를 보냈다.바로 육현경이 방금 계속 돌려보던 그 영상이었다.친절하게 육현경의 이름까지 태그해서 보냈다.“현경아, 네 마누라 봤어? 예능에 참가했던데 인기 꽤 있더라? 댓글에서 예쁘다고 난리 났어. 제1회에서 역전승하고 5위를 따냈어.”문자 메시지만 봐도 지금 하도경이 얼마나 격동해 있을지 상상이 갔다.육현경은 그 흔한 이모티콘도 보내지 않고 무시해 버렸다.하도경이 이번엔 계지원을 태그했다.“네 마누라도 참여했어. 소나
”여자친구 실력도 우습게 보지 마.”“소이연, 당신 뒤에 튼튼하고 견고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금산이 있다는 걸 항상 잊지 마.”그 말에 소이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참 유혹적이고 인상 깊은 표현이었다.“저녁에 시간 있어?”육현경이 화제를 돌렸다.“있어.”보름이나 만나주지 않았으니 저녁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해도 그의 요구를 들어 주기로 했다.“이따가 회사 앞으로 갈게. 너희 집에 가서 저녁 먹자.”육현경이 안배했다.“…”소이연은 잘못 들은 줄 알고 확실하게 말했다.“우리 집에 먹을 거 없어.”“라면도 없어?”“라면 먹을 거야?”소이연이 되물었다.“응.”육현경이 흔쾌히 대답했다.“알았어.”그때 비서가 노크하고 업무를 보고하러 들어왔다.“일 봐야 돼. 이따가 보자.”“그래. 이따가 봐.”소이연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저녁 7시 30분쯤 되었을 때 갑자기 육현경과 한 약속이 떠올랐다.부랴부랴 휴대폰을 들고 전화했다.“나를 잊어버린 줄 알았어.”휴대폰 너머로 원망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착 깔린 쉰 목소리는 감미로웠다.“어디 있어?”“창 밖으로 내려 봐.”소이연이 창가 옆으로 다가가자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검정색 마이바흐가 눈에 띄었다.마이바흐에 탄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분명 평범한 행동인데도 멋져 보였다.“지금 내려갈게.”육현경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재빨리 가방을 챙기고 퇴근했다.회사 입구 앞에서 육현경이 마이바흐 옆에 기대 있었다.소이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미안, 전화하지 그랬어. 회의하느라 까먹었어.”“기억하면 됐어.”육현경이 포기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그렇게 믿음이 안 가는 사람이었나? 난 정말 바빴는데.“얼른 타.”육현경이 그녀가 탈 수 있게 문을 열어주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소이연은 잠시도 쉬지 않고 앞치마를 둘렀다.냄비를 가스에 올려 놓고 라면을 열심히 젖고 있을 때 육현경이 뒤에서 감싸 안았다.키가 워낙 훤칠해서 작고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