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친구 실력도 우습게 보지 마.”“소이연, 당신 뒤에 튼튼하고 견고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금산이 있다는 걸 항상 잊지 마.”그 말에 소이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참 유혹적이고 인상 깊은 표현이었다.“저녁에 시간 있어?”육현경이 화제를 돌렸다.“있어.”보름이나 만나주지 않았으니 저녁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해도 그의 요구를 들어 주기로 했다.“이따가 회사 앞으로 갈게. 너희 집에 가서 저녁 먹자.”육현경이 안배했다.“…”소이연은 잘못 들은 줄 알고 확실하게 말했다.“우리 집에 먹을 거 없어.”“라면도 없어?”“라면 먹을 거야?”소이연이 되물었다.“응.”육현경이 흔쾌히 대답했다.“알았어.”그때 비서가 노크하고 업무를 보고하러 들어왔다.“일 봐야 돼. 이따가 보자.”“그래. 이따가 봐.”소이연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저녁 7시 30분쯤 되었을 때 갑자기 육현경과 한 약속이 떠올랐다.부랴부랴 휴대폰을 들고 전화했다.“나를 잊어버린 줄 알았어.”휴대폰 너머로 원망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착 깔린 쉰 목소리는 감미로웠다.“어디 있어?”“창 밖으로 내려 봐.”소이연이 창가 옆으로 다가가자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검정색 마이바흐가 눈에 띄었다.마이바흐에 탄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분명 평범한 행동인데도 멋져 보였다.“지금 내려갈게.”육현경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재빨리 가방을 챙기고 퇴근했다.회사 입구 앞에서 육현경이 마이바흐 옆에 기대 있었다.소이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미안, 전화하지 그랬어. 회의하느라 까먹었어.”“기억하면 됐어.”육현경이 포기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그렇게 믿음이 안 가는 사람이었나? 난 정말 바빴는데.“얼른 타.”육현경이 그녀가 탈 수 있게 문을 열어주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소이연은 잠시도 쉬지 않고 앞치마를 둘렀다.냄비를 가스에 올려 놓고 라면을 열심히 젖고 있을 때 육현경이 뒤에서 감싸 안았다.키가 워낙 훤칠해서 작고
“아, 아니…”소이연은 고개를 흔들었다.뜨거운 국물에 잠깐 닿은 거라 곧 괜찮아졌다.그녀는 참을 수 있었다.그보다 갑작스럽게 훅 다가온 육현경의 숨결이 오히려 위험하게 느껴졌다.워낙 키가 큰 편이라 그녀가 바텐더에 앉아있어도 그와 비하면 여전히 작았기에 아담해 보였다.육현경은 소이연의 말을 듣지 못한 채 그녀의 작고 여린 손을 찬찬히 훑어보았다.빨갛게 데인 흔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우리 이연이는 왜 자꾸 덤벙거리지?”나무라는 것 같았지만 사실 애정이 듬뿍 담긴 말이었다.“내가 언제!”소이연은 반박하기에 급급했다.하지만 금세 풀이 죽었다.육현경과 집에서 오붓하게 밥 먹은 적이 몇 번 없었는데 번마다 해프닝이 있었다.그녀는 육현경의 깊어진 눈을 마주치면서 대답했다.“네 앞에서만.”그녀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다.“그래?”육현경의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면 그녀의 대답에 만족스러운듯했다.“네가 기댈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해. 나의 영광이야.”뭘 또 이렇게 오버해?소이연은 몸부림쳤다.“라면 불겠다.”그러고는 바텐더에서 내려오려 했다.“가만히 있어.”육현경은 명령조로 말했다.“라면 불면 맛없는데…”“내가 갈게. 우리 이연이는 가만히 앉아있어.”육현경의 말을 들은 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순간, 그녀는 육현경한테 애 취급당한 느낌이 들었다.육민을 대하듯이 말이다.아, 육민은 그한테서 지나친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소이연은 가만히 앉아서 육현경이 라면을 건져내 두 그릇에 나눠 담고 옆에 있는 식탁에 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러고는 바텐더에 앉은 소이연을 안아서 내려주었다.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아 오붓하게 라면을 먹었다.그냥 라면인데 둘이 함께 먹으니 맛나고 행복했다.육현경은 식사를 다하고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오히려 객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소이연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오늘 저녁에 집에서 디자인을 할 생각이었다.평소에는 은하그룹
영상을 끄려던 찰나, 뒤에서 중저음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런 취향이었어?”소이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다.고개를 휙 돌려 갑자기 뒤에 나타난 육현경을 쳐다보았다.들어오는 걸 못 봤는데?디자인에 몰두하느라 못 봤을 수도 있다.하지만 중점은 그것이 아니다.영상을 끄지 않아서 야릇한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소이연이 고개를 돌려 꺼버리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닫기 버튼을 한참 동안 누르지 못했다.식은땀이 났다.이때, 그의 큰 손이 마우스를 쥐고 있던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 쥐고 닫기 버튼을 눌렀다.서재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소이연은 숨 막히는 고요함에 어디론 가 숨고 싶었다.이성과의 스킨십이 싫다고, 스킨십만 하면 구역질이 난다 할 때는 언제고 지금 이런 영상을 소장하다니!이 상황에서 그녀가 변명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그녀는 얼굴뿐만 아니라 목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이연, 나 봐 봐.”육현경이 당장 쥐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하는 그녀를 불렀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었다.설명해야겠지? 이렇게 오해를 살 수는 없어.심호흡을 하고는 머리를 들었다.순간 육현경이 마침 그녀 쪽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두 입술이 부드럽게 닿자 두 사람이 당황했다.갑작스럽지만 싫지는 않고 놀라웠지만 아쉬움이 남는…주위의 공기마저 탁하게 느껴졌다.서재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서로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소이연은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잡았다.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육현경이 다가올 것이고 그녀가 떠나면 육현경이 다가오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런 생각에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그런데 상대방이 보기엔 이 행동은 마치 키스를 원하는 것 같았다.육현경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입술이 바짝 마르더니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랐고 눈동자도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듯했다.그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 뒤를 바쳐주었다.소이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진정할 수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육현경이 강압적인 말투로 물었다.예수진은 그가 준비해 준 집에 들어간 적도, 이 집 말고 다른 곳에서 잔 적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기 두려웠다.그 사이 마음을 진정시킨 소이연도 서재를 나섰다.예수진이 육현경의 앞에서 겁먹고 벌벌 떠는 모습이 안쓰러웠다.“시간도 늦었는데 자기도 얼른 들어가.”소이연이 육현경을 달랬다.육현경은 입술을 깨물었다.아직 네 입술이 무슨 맛인지 제대로 맛보지 못했어.“그래서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육현경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고 불쾌한 기분을 예수진한테 푸는 것 같았다.“그러니까… 나…”예수진은 어쩔 줄 몰라 소이연을 쳐다보았다.“내가 오라고 했어.”소이연이 대신 대답했다.“혼자서 제대로 끼니도 못 챙겨 먹을까 봐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살자고 했어.”“뭐 어쩌고 어째? 18살에 가출한 애야!”육현경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오빠도 가출할 능력이 되면 여기서 이연 언니랑 같이 살아! 그럼 내가 당장 나갈 테니까!”예수진이 용기를 내서 대담하게 말했다.육현경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중간에 애매하게 끼인 소이연도 민망했다.남매가 싸우는데 내가 괜히 끼어들어서…“나 하루 종일 촬영해서 힘들다고. 씻을 거니까 하던 거 계속해. 나 안 나올 거니까.”예수진은 재빨리 달아났다.더 있다가는 육현경한테 맞을 게 뻔했다.“예수진, 이연이 컴퓨터에 있는 그 이상한 동영상 당장 삭제해!”육현경이 예수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예수진이 움찔하는 걸 보나 생각이 난 모양이다.매니저가 보내온 영상을 소이연의 컴퓨터에 다운로드했었다.이틀 뒤에 배드신을 촬영하는데 매니저는 예수진이 성생활이 없거나 재미없을까 봐 그런 영상을 보고 영감을 받으라는 뜻으로 준 것이었다.매니저의 깊은 배려에 탄복했다. 스스로도 학습할 수 있는데 말이다.소이연은 육현경의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어떻게 그 영상이 수진 것이라고 단정 지은 거지? 좀 감동인데?육현경 이 사람은 진짜
육현경은 마음이 복잡했다.……영상을 삭제한 예수진은 서재에서 걸어 나오며 현관문 앞에 서있는 소이연에게 물었다.“언니, 오빠 갔어요?”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소이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네, 갔어요.”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걸어갔다.“제가 두 사람 방해한 건 아니죠?”예수진은 아직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방해하긴요. 아니에요.”소이연이 고개를 흔들었다.예수진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농담을 던졌다.“언니 설마 오빠랑 처음 키스하는 건 아니죠? 설마.”소이연이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에요.”지난번에 육현경이 갑자기 그녀한테 입을 맞추었다.그때는 너무 놀라고 화가 났었는데 이 번은…묵인했다. 그래서인지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달라도 너무 달랐다.“우리 오빠 키스 잘하죠?”예수진은 소이연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소이연은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말이 키스이지, 두 번 다 잠깐 닿았다가 말았으니 키스라고 할 수 있을까?아직 스킬을 써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우리 오빠 보기보단 잘할 거예요.”예수진은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육현경의 스킬에 대해 인정해 주었다.다른 건 몰라도 육현경은 얼굴만으로도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아, 참. 언니 예능 참가했다면서요? 오늘 촬영장에서 매니저 언니가 알려줘서 알았어요.”예수진이 화제를 돌렸다.“어쩐지 언니 요즘 너무 바쁘다 했어요.”“예능을 통해서 은하 패션을 홍보하려고요. 수진 씨가 우리 브랜드 홍보 대사를 맡아준 덕에 인지도가 올라갔지만 은하그룹이 아직 제가 원하는 수준까지 발전하지 못했어요.”“꼭 문씨 그룹을 이겨야 해요.”예수진은 그녀를 지지했다.“문서인 그 개 같은 자식만 보면 구역질이 나온다니깐요?”소이연은 오로지 문씨 그룹을 이기기 위해 이러는 건 아니다.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면 자연스럽게 문씨 그룹을 제칠 수 있다.그녀는 어머니의 염원을 이뤄주고 싶었다.그녀의 어머니는 은하그룹의 규
소나은과 문서아는 소이연의 순위가 떨어진 것을 보고는 아주 기뻐했다.그들한테는 이 순위가 소이연의 수준에 맞는 자리… 아니, 진작에 탈락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지난번에는 운이 좋았던 것이고 이 번에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이니 다음번에는 탈락해야 된다고 여겼다.정작 소이연은 하위권 순위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그녀에 대한 평가과 비판도 신경 쓰지 않고 대결이 끝나면 곧바로 사무실에 돌아와 업무에 몰두했다.그리고 남은 시간에 다음 대결에 참가할 준비를 했다.소이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처리할 업무가 많아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소이연, 네 무덤을 스스로 파는구나?”비아냥거리는 이 목소리는 문서인이었다.못난 놈이 분별없이 날뛴다더니…“첫 번째 디자인 말이야, 네가 은하패션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았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문서인이 차갑게 웃었다.“하지만 은하그룹 디자이너팀에 나은이가 없는데 너희들끼리 머리를 맞대봐야 거기서 거기지. 한번 출전한 것도 대단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순위가 바닥이던데. 내가 너였다면 쪽팔려서 자진 퇴출하겠어.”“너랑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데?”소이연도 차갑게 말했다.“네가 극진히 아끼는 소나은이나 잘 주시해. 이번에 떴다가 혹시 알아? 널 버리고 다른 남자 품에 안길지.”“우리 나은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소이연의 말에 문서인은 분노했다.“네가 이간질한다고 소용 있을 것 같아? 나랑 나은이 서로 많이 사랑해. 나은이가 대결에서 이기고 나면 우리 결혼할 거야. 소이연, 넌 영원히 날 가질 수 없어!”“너 같은 건 줘도 안 가져.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야?”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예전 같았으면 슬퍼했겠지.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으니까.하지만 문서인의 언행은 점점 그녀를 소름 돋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사랑했던 기억들도 지울 수 있었다.지금의 그녀는 문서인을 사랑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사랑하면서 자신을 아프게 했고 새로운 사랑을 시도조차 못하게 만들었다.“소이연, 네 주제를 알
결승전 디자인 콘셉트는 미리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공개하고 제작진이 제공하는 천을 이용해 옷을 만들어야 한다.그리고 마지막 대결에서는 파트너를 바꿔야 했다.그전의 대결에서는 자유롭게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었기에 대부분 참가자들은 원래의 팀을 유지했다.같은 팀끼리 오래하다 보니 팀워크가 생기기도 했고 파트너에게 어떤 디자인이 어울리는지 디자이너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갑자기 룰을 변경한 것은 대결의 난이도를 올리기 위함이었다.문씨 그룹 총괄 경영자 사무실.문서아가 화를 버럭 냈다.“제작진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마지막인데 파트너를 바꾼다니!”문서인과 문서아는 제작진이 갑자기 룰을 변경할 줄 몰랐다.“오빠, 이번에 나은이가 무조건 일등 해야 돼. 그런데 나랑 나은이가 같은 팀이 아니면 내가 일등 자리에 서지 못하잖아!”문서아가 투덜댔다.“오빠 제작진에 아는 사람 있다며! 이 룰 좀 취소하라고 말해봐!”“나도 공고 보자마자 제작진한테 연락했는데 이미 결승전 룰을 공개한 뒤라서 변경하기 어렵대.”“나 몰라!”문서아는 발을 동동 굴렀다.“룰은 지켜야 돼서 어쩔 수 없어. 게다가 이번 시합에서 주목받아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은이잖아.”문서인은 문서아가 화내도록 내버려 두고는 고개를 돌려 소나은에게 말했다.“난 좀 걱정되는 게 마지막에 소이연한테 갑자기 반전이 있을까 봐…”사실 소나은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소이연이 매 대결마다 관중들의 투표를 받아 겨우 진급한 것이었다.그녀는 소이연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지 의심되었다.소이연에게 그만한 자금이 없으니 이런 방식으로 그들로 하여금 경계를 늦추게 하여 결승전에 진입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만약 진짜 그렇다면…그럼 소이연이 계속 실력을 숨겨왔단 얘기인데…갑자기 은하그룹에서 출시한 아주 핫한 복장이 떠올랐다.그것은 분명 소이연이 디자인한 것이 아닌데…하지만 은하그룹 디자인 팀에는 이런 디자인 실력을 지닌 사람이 없는데, 설마 정말 소이
소나은이 머뭇거리면서 말했다.“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긴 한데.”“무슨 방법인데?”문서인과 문서아는 궁금했다.그런데 소나은이 쭈뼛거리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이러면… 언니한테 좀… 불공평한 것 같아.”“너는 이 상황이 되어서도 언니 생각뿐이야? 걔는 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 있대?”문서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소이연은 널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아. 저번에 기자들 앞에서 너를 어떻게 몰아붙였는지 잊었어? 우리 오빠를 어떻게 깎아내렸는지 잊었냐고! 나은아, 마음 약해서 어떻게 이 세상 살아가려고 그래?”“그렇지…”소나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서인 오빠를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문서인과 문서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럴 수도 있다고?“좀 너무한 것 같지?”소나은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너무하다니?”문서아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야! 소이연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도 이러지 않았을 거야. 우리가 당한 만큼 돌려주는 건데 뭐 어때! 이게 공평한 거지.”소나은이 문서인을 쳐다보았다.문서인도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다 소이연한테 달렸어. 소이연이 이상한 수를 쓰지 않으면 우리도 이 정도는 하지 않을 거라고.”“응.”소나은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그녀가 생각해낸 음모였으면서 순진한 척 연기했다.그녀의 속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소이연, 나한테 덤비는 순간 망신당하는 거야.아, 그런데…육현경한테 진짜 약혼녀가 있었단 말이야?소이연이 육현경의 장난감인 건 너무 웃긴데 육현경한테 약혼녀가 있으면 나한테 더 이상의 기회는 없겠지?소나은이 입술을 깨물었다.먼저 지켜보고 있자.……“솔로 디자인 쇼”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생중계를 진행하기에 앞서 촬영 세트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마지막 대결에서 세 팀의 디자이너들에게 금상, 은상 그리고 동상이 차려진다.소이연, 소나은 그리고 안나라는 혼혈 디자이너가 출전했다.그들이 선택할 스타
“송승우가 또 수술받으니까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은 거잖아. 그렇게라도 응어리 좀 풀라고.”“나 그 정도로 속 깊은 사람 아니야. 그냥 말하기 싫었을 뿐이지.”“난 못 속인다니까.”매번 거짓말을 할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송문수이기에 하지수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다 알 수 있었다.“문수 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하지수는 송승우보다 송문수가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물론 송승우도 부모님을 아주 공경했지만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해온 그는 다 커서도 집안의 관심만 바랐지 집안에는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늘 형에게 밀려나 찬밥신세이던 송문수는 항상 부모님 곁을 지키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서곤 했다.“나 이제 잘 거야.”그래서 대견스러워서 한 말인데 송문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귀가 빨개져서는 욕실로 도망가버렸다.그런 송문수의 뒷모습을 보던 하지수는 자신이 따라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만약 송문수를 혼자 보냈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이해를 받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송승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하지수도 포함이었다.그럼 송문수도 질투하고 부러워할 만도 할 텐데 하지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송문수가 송승우의 것을 탐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싶어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지금은 송승우도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시부모님도 아들을 지키겠다고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기에 하지수가 이런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생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걸 막고자 눈을 감았다 뜨며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다음에 송문수를 제대로 달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샤워를 마친 송문수는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자신이 정말 잘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눈만 감으
병원을 나선 송문수가 택시를 잡아타려고 할 때 하지수가 뛰어나오며 그를 불렀다.“문수 씨!”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차를 출발시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아주 다급해 보여서, 그녀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문을 연 채로 하지수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사실 하지수도 송문수가 저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릴까 봐 걱정됐는데 여전히 멈춰있는 차에 안심하며 빠르게 올라탔다.기분이 나빠서 호텔이든 어디든 가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러다가 연락이라도 안 되면 하지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따라 나온 거였다.하지수가 차에 앉은 걸 확인한 송문수가 차를 출발시켰고 둘은 정적 속에서 호텔로 향했다.하지수는 몇 번이나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무심히 창밖만 내다보는 송문수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송문수에게도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그런데 호텔 방으로 들어오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하지수, 나 욕할 거면 빨리해. 참을 필요 없어. 욕 다 하면 나도 잘 거야.”“뭐?”예기치 못한 말에 하지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송문수가 말을 이었다.“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잠이나 자겠다는 내가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나도 어제부터 못 자서 지금 좀 피곤해. 사람이 오랫동안 잠을 못 자도 심장마비로 죽거든.”“나 당신이랑 같이 자러 온 거야. 어제 나도 잘 못 잤어.”“당신이 마음 불편해서 못 잘까 봐 온 거라고. 나는 당신이 안 잔다고 버틸까 봐 그게 더 걱정됐어.”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하지수의 반응에 송문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나도 당신한테 화낼 줄 알았어?”“화내는 게 당연하잖아.”씁쓸한 투로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차피 송승우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어.”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역시나 하지수도 제가 송
“왜 이래? 왜 갑자기 안 보이는 거야?”눈도 깜빡이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던 허영지는 갑자기 내려진 커튼에 슬픈 눈을 하고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에게 물었다.“환자분 쉬셔야 하니까 일단은 다들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 내 아들 옆에 있을 거예요.”“환자분이 가족들 보는 걸 원치 않습니다.”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말에 허영지는 또 눈물을 터뜨렸다.“왜 우릴 안 보겠다는 거예요? 안에서 혼자 있으면 힘들 텐데...”“환자분한테도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허영지가 고집을 피우자 마찬가지로 송승우 옆에 있고 싶었던 송기명도 움직이지 않았다.“문수 넌 이제 그만 가.”“어젯밤도 샜으니 돌아가서 자.”쌀쌀맞은 엄마의 말투에서 저건 관심이 아니라 타박임을 눈치챈 송문수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호텔에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바로 올게요.”하지만 송문수의 말에도 허영지는 대답 없이 차가운 등을 보일 뿐이었다.그에 고개를 떨군 송문수는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줄곧 허영지의 곁을 지키며 한마디도 않고 있던 하지수를 쳐다보았다.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도 제가 송승우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고 원망하는 것 같아서 송문수는 결국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하지수는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송문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송문수가 먼저 다리를 잘라냈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하지수는 그가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의 송문수라면 모르겠지만 함께 일 하면서 봐왔던 송문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정말 상황파악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큰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혹시라도 너무 속상해서 해명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봐 하지수는 용기를 내어 시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의사의 질문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답했다.“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직은 회복도 채 안 됐고 그런 큰 충격을 받으면 회복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분들이 그 정도는 주의해주셔야죠.”의사의 말이 끝나자 허영지도 분노의 화살을 송문수에게로 돌려버렸다.“넌 어쩜 아직도 이러니? 승우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 나이 먹었으면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려야지. 만약 승우가 너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허영지가 목놓아 울자 송기명도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영지를 다독이며 말했다.“오늘 일은 나도 실망이다 너한테. 서른 살 넘으면 뒤도 안 보고 일부터 저지르는 버릇은 좀 고칠 줄 알았는데.”가족들의 질타에 해명을 하려던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어릴 때부터 송승우와 송문수가 싸울 때면 부모님은 늘 송승우의 편만 들어줬기에 송문수는 지금 이 상황에 송승우가 스스로 알아챘다고 한들 저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입 아프게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선생님, 그럼 이제 어떡해요?”“애가 제 몸 상태를 알았으니 죽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이제 고작 서른 좀 넘은 앤데 미래가 창창한 애를 제가 먼저 보낼 순 없잖아요...”대성통곡을 하는 허영지를 향해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금은 별문제 없는데 계속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이성을 잃으면 그땐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미 환자분이 본인 몸 상태를 다 알게 됐으니 가족분들은 위로해주면서 환자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우리 아들 국내 최고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애예요,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애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텐데... 승우가 제 몸 상태를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만 생각하면 저도 죽을 것 같아요...”“차라리 그냥 내가 다치고 말지,
장기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오른쪽 다리에만 느낌이 없는 게 아무래도 불길했다.“형, 진정하라니까.”“마취가 아직 안 풀려서 그런 거야. 마취만 풀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니까 좀 기다려봐.”“아니야,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 그냥 없어진 것 같아...”송문수의 위로에도 흥분하며 몸을 움직이던 송승우는 점차 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지금 송승우는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생각에 송문수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환자의 강한 움직임에 여러 가지 중요한 수치가 변하자 중환자실에서부터 경보음이 울려고 빠르게 뛰어온 의사들은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들을 보더니 곧바로 송승우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송승우의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느려진 걸 본 송문수는 깜짝 놀라며 재빨리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겼다.한편 하지수의 거듭되는 설득에 밥을 먹고는 송기명과 허영지는 아들 걱정에 일찌감치 병원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수술실로 뛰어가는 송문수와 침대에 누워있는 송승우를 보게 되었다.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더니 또 무슨 일로 수술실에 가는지 몰랐던 그들은 어두워진 의료진들의 안색을 살피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마음 약한 허영지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자 송기명과 하지수가 그녀를 부축했고 하지수는 괜찮을 거라고 허영지를 다독이며 그녀와 함께 수술실 앞으로 다가갔다.가족들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던 송문수를 하지수가 나지막하게 불렀다.“문수 씨.”그에 고개를 홱 돌린 송문수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까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길 때 송승우의 손이 그의 손에 닿았는데 그게 사람의 손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워서 송문수는 아직도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왜 그래, 말 좀 해봐.”“승우, 우리 승우 괜찮은 거지?”하지수는 하얗게 질린 송문수가 걱정됐지만 허영지는 송문수의 안색은 신경 쓰지 못하고 송승우의 안부를 물었다.송문수는 가족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송승우가 본
“너 혼자야?”힘겹게 내뱉은 목소리였지만 그게 너무나도 미약해서 송문수는 송승우에게로 가까이 붙은 채 몸을 숙여야만 그가 뭐라고 하는지 그나마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엄마 아빠도 너 걱정했어.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면회 못한다고 해서 어제 호텔로 먼저 보냈어. 보고 싶으면 지금 바로 전화할게.”송문수의 말에 괜찮다며 고개를 젓던 송승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나 많이 다쳤어?”“생명엔 지장 없대, 그런데 교통사고가 워낙 크게 나서 장기들이 많이 손상됐대. 그래서 여기 당분간 있는 건데 최고로 좋은 의료진들만 붙였으니까 걱정 마, 곧 괜찮아질 거야.”“나 얼굴은 멀쩡해?”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얼굴이 붕대로 다 감겨있어서 안 보여.”“눈, 코, 입, 귀는 멀쩡한 것 같아.”“팔다리는 다 있어?”하지만 또다시 들려온 질문에는 곧바로 답을 하지 못하는 송문수였다.이렇게 빨리 저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교통사고에서 깨어난 환자가 가장 궁금해할 게 본인의 목숨과 몸 상태일 테니 송문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교통사고에서 가장 흔한 후유증이 얼굴 흉터와 장애라서 저런 질문을 하는 건 알겠지만 송문수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눈을 피하기만 했다.“송문수.”“다 있어.”결국 의사의 당부 때문에 송승우의 회복을 돕고자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송문수의 긴장한듯한 반응에서부터 송승우는 무언가 눈치를 챈 듯했다.그 힘든 와중에도 그는 흥분을 한 건지 언성을 살짝 높였다.“너 아까 망설였어.”“거짓말이지?”“아니야. 정말 다 멀쩡해.”“맹세해 그럼.”“맹세할게.”죄책감이 점점 켜졌지만 송승우의 감정변화를 느낀 송문수는 아직은 중환자라 큰 충격은 피해야 하는 송승우를 위해 일부러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거짓말이면 넌 평생 하지수랑 같이 못 있어.”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는 송승우에 송문수는 마른 침을 삼켜냈다.제 목숨을 담보로는 맹세할 수 있어도 하지수와의 감정을
예수진:[그럼 너랑 지수 다 서울에 있는 거야? 아직 병원이야?]예수진:[부모님은 좀 어떠셔? 충격이 크시지?]그들의 문자에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송문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누구한테 일어나도 참혹한 비극인데 그 일이 제 형한테 일어났으니 송문수는 어떻게 송승우를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근심 속에서 밤이 깊어지자 하지수가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자?][아니.][병원에서 잘 수 있으면 어디서 눈이라도 좀 붙여. 문수 씨도 쉬어야지,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티시면 남은 건 당신뿐이야.][알아 나도. 넌 왜 아직 안 자? 시간 늦었는데.][당신이 걱정돼서.][뭐하러 날 걱정해, 난 괜찮아. 송승우가 문제지...]그의 문자에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하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송문수도 그만 대화를 끝내려 했다.[늦었으니까 얼른 자.][응.][나 대신 부모님 좀 잘 챙겨줘, 엄마 아빠 쓰러질까 봐 나 너무 무서워.][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핸드폰을 내려놓은 송문수는 중환자실 앞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중환자실에서 나온 송승우가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병원에서 VIP 병실을 열어줬지만 송문수는 그 편한 곳도 마다하고 굳이 송승우 옆을 지키고 있었다.아무리 송승우라 해도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 봐.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아침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던 송문수는 간호사의 친절한 부름에 서서히 눈을 떴다.“보호자분?”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몸을 일으킨 송문수는 의아한 눈으로 간호사를 바라보았다.“환자분이 보호자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송승우 씨가요?”중환자실을 가리키며 당황한 듯 묻는 송문수를 향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송문수 씨가 중환자실로 와줬으면 하세요.”“면회 안된다면서요?”“좀 전에 선생님이 또 몸 상태 체크하셨는데 이젠 다 정상수치로 돌아와서 면회 가능하시대요. 대신 시간만 좀 주의해주세요. 아직 몸이 약하셔서 이럴 때는 저희도 환자분 부탁이라면 뭐든 다
시부모님의 몸 상태를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하지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송기명은 더욱이 쓰러진 지 얼마 안 된 터라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다가는 정말 큰 일이 날 것 같았다.“아버님, 어머님, 여긴 문수 씨한테 맡기도 우린 먼저 호텔에 가 있어요.”하지수의 거듭되는 권유에 송기명과 허영지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송문수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알겠다니까요. 걱정 마시고 가세요. 제가 입구까지 모셔다드릴게요.”송기명과 허영지를 차에 태운 송문수는 조수석에 앉은 하지수를 바라보았다.모든 감정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녀도 송문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의 눈엔 미련이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방향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송문수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중환자실 복도에 앉은 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리고 핸드폰을 켜보았다.역시나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그의 알림창을 꽉 채우고 있었다.다른 문자는 싹 다 무시한 송문수는 친구들과의 방, 그리고 소이연, 예수진이 함께 있는 단톡방, 이렇게 두 곳에만 답장을 했다.육현경:[대체 무슨 일이야?]계지원:[문수야, 너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아저씨 생신 파티는 왜 취소하는 거야?]하도경:[말 좀 해봐, 전화도 안 받고. 이러다가 다들 답답해 죽겠어,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또 다른 단톡방에 있던 소이연과 예수진 역시 걱정스러운 문자를 보내왔다.소이연:[문수 씨, 무슨 일 있는 거죠?]예수진:[송문수, 답장 안 해? 기사 보니까 아줌마 안색도 엄청 안 좋던데 무슨 일이 나긴 난 거지?]예수진:[말 좀 하라고 이 자식아!]소이연:[수진 씨 진정해요 일단. 문수 씨랑 지수 씨가 바빠서 답장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급한 일 다 보고 나면 우리한테도 알려줄 거에요.]예수진:[알겠어요, 기다려봐야죠 뭐.]자신의 화면을 가득 채운 문자를 보던 송문수는 손가락을 움직여
송문수가 사 온 물을 건네도 부모님은 고개만 저으며 손을 모으셨다.그래서 하지수에게 건네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을 받아들었다.서울에 온 뒤 송씨 일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줄곧 자리를 지키며 송승우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송승우가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는 받아든 물이라 몇 모금 마시기는 했지만 물을 마시면서도 신경은 온통 송승우에게 쏠려있었다.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송승우의 몸을 보게 되었다.너무 아파서인지 아니면 힘이 없어서인지 몸은 미세한 떨림 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송승우의 눈이 서서히 떠지고 있어 하지수는 잔뜩 흥분한 채 외쳤다.“승우 오빠 일어났어요!”“문수, 문수야! 얼른 의사 불러와!”하지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부모님이 송문수에게 의사를 데려오라 했고 송문수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의사는 중환자실에서 각종 검사를 진행했다.방음효과가 워낙 좋은 중환자실이라 의사와 송승우의 대화를 듣지 못했던 가족들은 또다시 초조해 났다.한참이나 지나서 중환자실 빠져나오는 의사에 허영지가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아들은 좀 어떤가요?”“방금 검사 진행했는데 생명엔 아무 지장 없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하지만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여기서 며칠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일반병실로 옮겼다가 세균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거든요.”“알겠습니다, 입원은 며칠 하든 상관없으니까 저희 애 잘만 치료해주세요. 그런데 저희가 들어가서 같이 있어 주는 건 괜찮을까요?”“아직은 들어가지 마세요. 환자분도 방금 깨어나셔서 머리가 어지러울 겁니다. 오늘은 그냥 쉬게 놔두시고 내일 상태 좀 나아지면 그때 들어가 보시게 도와드릴게요.”“감사합니다 선생님!”“아닙니다.”감격 어린 허영지의 말에 의사가 한마디 더 보탰다.“환자가 아직은 본인 몸 상태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면회하실 때도 다리 절단한 사실은 일단 말하지 마세요. 환자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