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을 끄려던 찰나, 뒤에서 중저음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런 취향이었어?”소이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다.고개를 휙 돌려 갑자기 뒤에 나타난 육현경을 쳐다보았다.들어오는 걸 못 봤는데?디자인에 몰두하느라 못 봤을 수도 있다.하지만 중점은 그것이 아니다.영상을 끄지 않아서 야릇한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소이연이 고개를 돌려 꺼버리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닫기 버튼을 한참 동안 누르지 못했다.식은땀이 났다.이때, 그의 큰 손이 마우스를 쥐고 있던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 쥐고 닫기 버튼을 눌렀다.서재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소이연은 숨 막히는 고요함에 어디론 가 숨고 싶었다.이성과의 스킨십이 싫다고, 스킨십만 하면 구역질이 난다 할 때는 언제고 지금 이런 영상을 소장하다니!이 상황에서 그녀가 변명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그녀는 얼굴뿐만 아니라 목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이연, 나 봐 봐.”육현경이 당장 쥐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하는 그녀를 불렀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었다.설명해야겠지? 이렇게 오해를 살 수는 없어.심호흡을 하고는 머리를 들었다.순간 육현경이 마침 그녀 쪽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두 입술이 부드럽게 닿자 두 사람이 당황했다.갑작스럽지만 싫지는 않고 놀라웠지만 아쉬움이 남는…주위의 공기마저 탁하게 느껴졌다.서재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서로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소이연은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잡았다.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육현경이 다가올 것이고 그녀가 떠나면 육현경이 다가오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런 생각에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그런데 상대방이 보기엔 이 행동은 마치 키스를 원하는 것 같았다.육현경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입술이 바짝 마르더니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랐고 눈동자도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듯했다.그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 뒤를 바쳐주었다.소이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진정할 수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육현경이 강압적인 말투로 물었다.예수진은 그가 준비해 준 집에 들어간 적도, 이 집 말고 다른 곳에서 잔 적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기 두려웠다.그 사이 마음을 진정시킨 소이연도 서재를 나섰다.예수진이 육현경의 앞에서 겁먹고 벌벌 떠는 모습이 안쓰러웠다.“시간도 늦었는데 자기도 얼른 들어가.”소이연이 육현경을 달랬다.육현경은 입술을 깨물었다.아직 네 입술이 무슨 맛인지 제대로 맛보지 못했어.“그래서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육현경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고 불쾌한 기분을 예수진한테 푸는 것 같았다.“그러니까… 나…”예수진은 어쩔 줄 몰라 소이연을 쳐다보았다.“내가 오라고 했어.”소이연이 대신 대답했다.“혼자서 제대로 끼니도 못 챙겨 먹을까 봐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살자고 했어.”“뭐 어쩌고 어째? 18살에 가출한 애야!”육현경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오빠도 가출할 능력이 되면 여기서 이연 언니랑 같이 살아! 그럼 내가 당장 나갈 테니까!”예수진이 용기를 내서 대담하게 말했다.육현경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중간에 애매하게 끼인 소이연도 민망했다.남매가 싸우는데 내가 괜히 끼어들어서…“나 하루 종일 촬영해서 힘들다고. 씻을 거니까 하던 거 계속해. 나 안 나올 거니까.”예수진은 재빨리 달아났다.더 있다가는 육현경한테 맞을 게 뻔했다.“예수진, 이연이 컴퓨터에 있는 그 이상한 동영상 당장 삭제해!”육현경이 예수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예수진이 움찔하는 걸 보나 생각이 난 모양이다.매니저가 보내온 영상을 소이연의 컴퓨터에 다운로드했었다.이틀 뒤에 배드신을 촬영하는데 매니저는 예수진이 성생활이 없거나 재미없을까 봐 그런 영상을 보고 영감을 받으라는 뜻으로 준 것이었다.매니저의 깊은 배려에 탄복했다. 스스로도 학습할 수 있는데 말이다.소이연은 육현경의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어떻게 그 영상이 수진 것이라고 단정 지은 거지? 좀 감동인데?육현경 이 사람은 진짜
육현경은 마음이 복잡했다.……영상을 삭제한 예수진은 서재에서 걸어 나오며 현관문 앞에 서있는 소이연에게 물었다.“언니, 오빠 갔어요?”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소이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네, 갔어요.”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걸어갔다.“제가 두 사람 방해한 건 아니죠?”예수진은 아직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방해하긴요. 아니에요.”소이연이 고개를 흔들었다.예수진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농담을 던졌다.“언니 설마 오빠랑 처음 키스하는 건 아니죠? 설마.”소이연이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에요.”지난번에 육현경이 갑자기 그녀한테 입을 맞추었다.그때는 너무 놀라고 화가 났었는데 이 번은…묵인했다. 그래서인지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달라도 너무 달랐다.“우리 오빠 키스 잘하죠?”예수진은 소이연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소이연은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말이 키스이지, 두 번 다 잠깐 닿았다가 말았으니 키스라고 할 수 있을까?아직 스킬을 써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우리 오빠 보기보단 잘할 거예요.”예수진은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육현경의 스킬에 대해 인정해 주었다.다른 건 몰라도 육현경은 얼굴만으로도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아, 참. 언니 예능 참가했다면서요? 오늘 촬영장에서 매니저 언니가 알려줘서 알았어요.”예수진이 화제를 돌렸다.“어쩐지 언니 요즘 너무 바쁘다 했어요.”“예능을 통해서 은하 패션을 홍보하려고요. 수진 씨가 우리 브랜드 홍보 대사를 맡아준 덕에 인지도가 올라갔지만 은하그룹이 아직 제가 원하는 수준까지 발전하지 못했어요.”“꼭 문씨 그룹을 이겨야 해요.”예수진은 그녀를 지지했다.“문서인 그 개 같은 자식만 보면 구역질이 나온다니깐요?”소이연은 오로지 문씨 그룹을 이기기 위해 이러는 건 아니다.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면 자연스럽게 문씨 그룹을 제칠 수 있다.그녀는 어머니의 염원을 이뤄주고 싶었다.그녀의 어머니는 은하그룹의 규
소나은과 문서아는 소이연의 순위가 떨어진 것을 보고는 아주 기뻐했다.그들한테는 이 순위가 소이연의 수준에 맞는 자리… 아니, 진작에 탈락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지난번에는 운이 좋았던 것이고 이 번에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이니 다음번에는 탈락해야 된다고 여겼다.정작 소이연은 하위권 순위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그녀에 대한 평가과 비판도 신경 쓰지 않고 대결이 끝나면 곧바로 사무실에 돌아와 업무에 몰두했다.그리고 남은 시간에 다음 대결에 참가할 준비를 했다.소이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처리할 업무가 많아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소이연, 네 무덤을 스스로 파는구나?”비아냥거리는 이 목소리는 문서인이었다.못난 놈이 분별없이 날뛴다더니…“첫 번째 디자인 말이야, 네가 은하패션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았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문서인이 차갑게 웃었다.“하지만 은하그룹 디자이너팀에 나은이가 없는데 너희들끼리 머리를 맞대봐야 거기서 거기지. 한번 출전한 것도 대단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순위가 바닥이던데. 내가 너였다면 쪽팔려서 자진 퇴출하겠어.”“너랑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데?”소이연도 차갑게 말했다.“네가 극진히 아끼는 소나은이나 잘 주시해. 이번에 떴다가 혹시 알아? 널 버리고 다른 남자 품에 안길지.”“우리 나은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소이연의 말에 문서인은 분노했다.“네가 이간질한다고 소용 있을 것 같아? 나랑 나은이 서로 많이 사랑해. 나은이가 대결에서 이기고 나면 우리 결혼할 거야. 소이연, 넌 영원히 날 가질 수 없어!”“너 같은 건 줘도 안 가져.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야?”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예전 같았으면 슬퍼했겠지.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으니까.하지만 문서인의 언행은 점점 그녀를 소름 돋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사랑했던 기억들도 지울 수 있었다.지금의 그녀는 문서인을 사랑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사랑하면서 자신을 아프게 했고 새로운 사랑을 시도조차 못하게 만들었다.“소이연, 네 주제를 알
결승전 디자인 콘셉트는 미리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공개하고 제작진이 제공하는 천을 이용해 옷을 만들어야 한다.그리고 마지막 대결에서는 파트너를 바꿔야 했다.그전의 대결에서는 자유롭게 파트너를 선택할 수 있었기에 대부분 참가자들은 원래의 팀을 유지했다.같은 팀끼리 오래하다 보니 팀워크가 생기기도 했고 파트너에게 어떤 디자인이 어울리는지 디자이너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갑자기 룰을 변경한 것은 대결의 난이도를 올리기 위함이었다.문씨 그룹 총괄 경영자 사무실.문서아가 화를 버럭 냈다.“제작진 머리가 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마지막인데 파트너를 바꾼다니!”문서인과 문서아는 제작진이 갑자기 룰을 변경할 줄 몰랐다.“오빠, 이번에 나은이가 무조건 일등 해야 돼. 그런데 나랑 나은이가 같은 팀이 아니면 내가 일등 자리에 서지 못하잖아!”문서아가 투덜댔다.“오빠 제작진에 아는 사람 있다며! 이 룰 좀 취소하라고 말해봐!”“나도 공고 보자마자 제작진한테 연락했는데 이미 결승전 룰을 공개한 뒤라서 변경하기 어렵대.”“나 몰라!”문서아는 발을 동동 굴렀다.“룰은 지켜야 돼서 어쩔 수 없어. 게다가 이번 시합에서 주목받아야 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은이잖아.”문서인은 문서아가 화내도록 내버려 두고는 고개를 돌려 소나은에게 말했다.“난 좀 걱정되는 게 마지막에 소이연한테 갑자기 반전이 있을까 봐…”사실 소나은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였다.소이연이 매 대결마다 관중들의 투표를 받아 겨우 진급한 것이었다.그녀는 소이연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지 의심되었다.소이연에게 그만한 자금이 없으니 이런 방식으로 그들로 하여금 경계를 늦추게 하여 결승전에 진입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다.만약 진짜 그렇다면…그럼 소이연이 계속 실력을 숨겨왔단 얘기인데…갑자기 은하그룹에서 출시한 아주 핫한 복장이 떠올랐다.그것은 분명 소이연이 디자인한 것이 아닌데…하지만 은하그룹 디자인 팀에는 이런 디자인 실력을 지닌 사람이 없는데, 설마 정말 소이
소나은이 머뭇거리면서 말했다.“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긴 한데.”“무슨 방법인데?”문서인과 문서아는 궁금했다.그런데 소나은이 쭈뼛거리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이러면… 언니한테 좀… 불공평한 것 같아.”“너는 이 상황이 되어서도 언니 생각뿐이야? 걔는 너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 있대?”문서아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소이연은 널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아. 저번에 기자들 앞에서 너를 어떻게 몰아붙였는지 잊었어? 우리 오빠를 어떻게 깎아내렸는지 잊었냐고! 나은아, 마음 약해서 어떻게 이 세상 살아가려고 그래?”“그렇지…”소나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서인 오빠를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그녀는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문서인과 문서아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이럴 수도 있다고?“좀 너무한 것 같지?”소나은이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너무하다니?”문서아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야! 소이연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았으면 우리도 이러지 않았을 거야. 우리가 당한 만큼 돌려주는 건데 뭐 어때! 이게 공평한 거지.”소나은이 문서인을 쳐다보았다.문서인도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다 소이연한테 달렸어. 소이연이 이상한 수를 쓰지 않으면 우리도 이 정도는 하지 않을 거라고.”“응.”소나은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그녀가 생각해낸 음모였으면서 순진한 척 연기했다.그녀의 속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소이연, 나한테 덤비는 순간 망신당하는 거야.아, 그런데…육현경한테 진짜 약혼녀가 있었단 말이야?소이연이 육현경의 장난감인 건 너무 웃긴데 육현경한테 약혼녀가 있으면 나한테 더 이상의 기회는 없겠지?소나은이 입술을 깨물었다.먼저 지켜보고 있자.……“솔로 디자인 쇼”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생중계를 진행하기에 앞서 촬영 세트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마지막 대결에서 세 팀의 디자이너들에게 금상, 은상 그리고 동상이 차려진다.소이연, 소나은 그리고 안나라는 혼혈 디자이너가 출전했다.그들이 선택할 스타
“응?”육현경은 모니터에 나오는 소이연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무대 조명 아래에 선 그녀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결승전까지 온 건 별거 아니지만 매 대결마다 꼴등으로 살아남는다는 게 대단한 거예요!”이명진이 육현경의 곁에서 오랫동안 일하고 그의 비서가 된 것은 모두 그의 능력에 대한 인정이다.그는 소이연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자본의 힘에 밀리지 않겠다는 그녀의 의지를 보아낸 것이다.다시 말해서 적은 힘을 들여서 최고봉까지 올라왔다 할 수 있다.그러니 문씨 가문 사람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육현경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소이연, 생각보다 훨씬 더 똑똑한 여자였어.촬영 세트장.세 명의 디자이너가 파트너를 바꾸었다.소이연은 인기가 제일 없었기에 인기가 제일 많은 문서아와 파트너가 되었다.안나는 원래 파트너와 함께 했고 소나은은 유진과 한 팀이 되었다.결승전은 두 차례로 진행되는데 첫 번째 대결을 통해 3위를 뽑는다.두 번째 대결이야말로 피 튀는 전쟁일 것이다.대결이 시작되었다.첫 번째 대결은 30분 내로 현장에 있는 원단을 이용해 한 세트를 만들어야 한다.콘셉트는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었다.심사 위원과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라면 다 가능했다.원단을 만져보던 소이연이 망설임 없이 디자인하기 시작했다.그런 소이연을 쳐다보던 소나은도 고개를 숙인 채 몰두했다.문서아가 제작진 중 아는 사람을 통해 오늘 대결의 내용을 미리 알아내서 디자인까지 다 생각해 놓았다.그녀는 아주 빠른 속도로 첫 번째로 완성하게 되었다.그리고 유진더러 갈아입으라고 했다.유진이 나오자마자 관중석은 난리 법석이었다.디자인이 아주 훌륭했기 때문이다.소나은이 겸손하게 웃었다.그녀가 미리 내용을 알아낸 덕분에 많은 돈을 써가면서 세계에서 유명한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부탁했기에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두 번째 대결에 보일 디자인은 더욱 훌륭했다.소이연의 실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내가
소이연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첫 번째 대결에서 압도적인 점수를 얻었다.현장의 관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박수갈채를 보내왔다.반면 심사 위원단이 준 점수는 높지 않았다.디자인이 심플하고 포인트가 적으며 이루어낸 분위기만 괜찮았다고 평가했다.하지만 심사 위원단의 점수는 20퍼센트만 차지할 뿐, 문서인이 미리 손을 쓰더라도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무대에 선 소나은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선명했다.지금 이 상황으로 보아 마지막 대결에 그녀의 디자인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소이연의 상대가 될 수 없다.고개를 돌려 문서아를 쳐다보았다.문서아는 자신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소이연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문서아는 자신의 수석 디자이너가 되어달라고 부탁했을 텐데.하지만 소이연이란 여자는 너무 밉단 말이야.문서아도 소나은의 시선이 느껴졌다.디자인을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것이고 소이연이 그들을 짓밟고 올라가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했다.그녀는 소나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소나은은 그제야 좀 진정이 되었다.육씨 빌딩.육현경은 다시 이명진더러 댓글을 보여달라고 하고는 단톡방으로 들어갔다.단톡방에 들어가자마자 알림음이 쉴 틈 없이 울려댔다.“이연 씨 오늘 실력 발휘 제대로 하는데? 처음부터 치고 나오시네. @육현경”“이 심사 위원들 뭐야? 이연 씨 디자인이 어디를 봐서 심플하단 거지? 심플한 것과 단아한 건 다르다는 거 모르나? 나 같은 아마추어도 다 아는데. @육현경”“서아 씨가 이뻐서 내가 좀 호감을 가졌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이쁜 것 같아. 물론 이연 씨 디자인 덕분이지만. @계지원 @육현경”다들 답장도 하지 않는데 하도경이 계속 혼자 떠들고 있었다.육현경이 모니터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소이연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었어? 아니면 운이 따라준 건가?][소나은의 디자인이 더 마음에 들었었는데 소이연의 디자인과 너무 비교된다.][심사 위원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뒷돈을 얼마나 받아먹었으면 소이연 디자인을 저렇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