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씨 가문만 의지해서는 안 되었다. 소씨 가문은 워낙 남존여비 사상이 강해 한두 개 원고를 사는 건 문제없지만 거액을 들인다면 틀림없이 반대해 나선다. 그러니 문씨 가문의 재력까지 이용한다면 쉽게 이름을 날릴 수 있다.먼저 문서인을 찾아가서 문씨 그룹의 수석 디자이너라는 직함을 요구했다.문서인에게 손톱만큼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지만 승승장구하려면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다행히 문서인이 거절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도와줬다.무엇을 요구하면 한마디 잔소리도 없이 해줬다.만약 소나은이 빈털터리가 된다고 하면 문서인도 따라서 빈털터리가 될 것이다.하지만 문씨 가문에서도 손해보는 건 없었다.이번 대회에서 문씨 가문 대표로 대상을 받게 되면 문씨 가문에서 영광을 얻게 되니까.소나은이 눈을 찔금 감았다.은하그룹에 있을 때 진정한 실력을 발휘하지 않았다.소이연이 압박을 가할 때마다 대충 하는 시늉만 냈었다.어쨌든 그녀를 위해 일하는 건 썩 내키지 않았다.그러니 이번 대회에 진지하게 임한다면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참가자들이 녹화장에 들어가 감독의 안배에 따라 각자 자리에 앉았다.예고편을 찍을 때 현장에 참여한 관중들과 인사를 나누고 연예인들과 파트너를 정한다.소이연이 앞에 나서서 자기소개를 할 때 모두 경멸하는 시선을 보냈다.다들 은하그룹 수석 디자이너라는 직함도 스스로 안배해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수군거렸다.그렇게 되면 소이연과 소나은 두 자매가 맞서서 겨루는 상황이 되어버리니 이 좋은 구경거리를 놓칠 사람이 어디 있을까?소이연이 자기소개를 마친 뒤에 어떤 연예인도 그녀를 택하지 않았다.필경 파트너와 업무는 서로 성질이 다르니, 첫 번째 대결에서 소이연 때문에 탈락하고 싶지 않았다. 프로그램 규칙은 디자이너가 탈락하면 파트너도 탈락하기에 서로 신중하게 파트너를 골라야 했다.소나은이 자기소개를 할 때 국제디자이너대회에서 글로벌 수상 5위, 아시아 수상 2위, 은하그룹 수석 디자이너 및 문씨 그룹 수석 디자니어 등등 수상
”솔로 디자인 쇼” 프로그램이 방송한 후 대중들의 인기를 한 번에 샀다.예고편과 제1회가 방영되자 반응도 좋고 시청률도 꽤 높았다.그때서야 육현경이 소이연이 말한 바쁜 3개월에 뭘 하려는 지 알게 되었다.모니터 화면을 통해 소이연이 나온 부분만 무한 반복으로 돌려봤다.몇 분도 안 되는 영상을 30분이나 보다니, 옆에서 지켜보던 이명진은 할 말을 잃었다.사모님은 워낙 예쁘게 생겨서 연예인들과 같이 서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돌려보고 돌려 보고 또 돌려 본다면 마지막에 눈알이 돌아가 버릴 지도 모른다. 대표님의 눈이 돌아가는 모습을 상상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순간 살의 그득찬 시선을 느끼고 바로 입을 닫아버렸다.“그렇게 웃겨?”육현경이 물었다,“웃기지 않습니다.”이명진이 대답했다.“역시 사모님의 미모는 아름답습니다.”그 말에 육현경이 침울해졌다.이명진은 울고 싶었다. 예쁜 걸 예쁘다고 말한 것뿐인데.예쁘다고 칭찬도 못해요?“나가!”육현경이 짜증을 냈다,이명진이 무거운 짐이라도 덜어버린 듯 쏜살같이 달려나갔다.사무실에 혼자 남은 육현경은 늘씬한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들고 소이연의 번호를 눌렀다.한편, 소이연은 마침 회의를 여는 중이었다.휴대폰 액정을 힐끗 보더니 ‘회의 중입니다. 잠시 후 연락드리겠습니다’라는 간편 메시지를 보냈다. 메시지를 확인한 육현경의 얼굴이 한층 더 침울해졌다.그때 단톡방 메시지가 떴다.육현경이 4인 단톡방을 열고 들여다보았다.하도경이 영상 하나를 보냈다.바로 육현경이 방금 계속 돌려보던 그 영상이었다.친절하게 육현경의 이름까지 태그해서 보냈다.“현경아, 네 마누라 봤어? 예능에 참가했던데 인기 꽤 있더라? 댓글에서 예쁘다고 난리 났어. 제1회에서 역전승하고 5위를 따냈어.”문자 메시지만 봐도 지금 하도경이 얼마나 격동해 있을지 상상이 갔다.육현경은 그 흔한 이모티콘도 보내지 않고 무시해 버렸다.하도경이 이번엔 계지원을 태그했다.“네 마누라도 참여했어. 소나
”여자친구 실력도 우습게 보지 마.”“소이연, 당신 뒤에 튼튼하고 견고하며 반짝반짝 빛나는 금산이 있다는 걸 항상 잊지 마.”그 말에 소이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참 유혹적이고 인상 깊은 표현이었다.“저녁에 시간 있어?”육현경이 화제를 돌렸다.“있어.”보름이나 만나주지 않았으니 저녁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해도 그의 요구를 들어 주기로 했다.“이따가 회사 앞으로 갈게. 너희 집에 가서 저녁 먹자.”육현경이 안배했다.“…”소이연은 잘못 들은 줄 알고 확실하게 말했다.“우리 집에 먹을 거 없어.”“라면도 없어?”“라면 먹을 거야?”소이연이 되물었다.“응.”육현경이 흔쾌히 대답했다.“알았어.”그때 비서가 노크하고 업무를 보고하러 들어왔다.“일 봐야 돼. 이따가 보자.”“그래. 이따가 봐.”소이연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저녁 7시 30분쯤 되었을 때 갑자기 육현경과 한 약속이 떠올랐다.부랴부랴 휴대폰을 들고 전화했다.“나를 잊어버린 줄 알았어.”휴대폰 너머로 원망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착 깔린 쉰 목소리는 감미로웠다.“어디 있어?”“창 밖으로 내려 봐.”소이연이 창가 옆으로 다가가자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검정색 마이바흐가 눈에 띄었다.마이바흐에 탄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분명 평범한 행동인데도 멋져 보였다.“지금 내려갈게.”육현경이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재빨리 가방을 챙기고 퇴근했다.회사 입구 앞에서 육현경이 마이바흐 옆에 기대 있었다.소이연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미안, 전화하지 그랬어. 회의하느라 까먹었어.”“기억하면 됐어.”육현경이 포기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그렇게 믿음이 안 가는 사람이었나? 난 정말 바빴는데.“얼른 타.”육현경이 그녀가 탈 수 있게 문을 열어주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소이연은 잠시도 쉬지 않고 앞치마를 둘렀다.냄비를 가스에 올려 놓고 라면을 열심히 젖고 있을 때 육현경이 뒤에서 감싸 안았다.키가 워낙 훤칠해서 작고
“아, 아니…”소이연은 고개를 흔들었다.뜨거운 국물에 잠깐 닿은 거라 곧 괜찮아졌다.그녀는 참을 수 있었다.그보다 갑작스럽게 훅 다가온 육현경의 숨결이 오히려 위험하게 느껴졌다.워낙 키가 큰 편이라 그녀가 바텐더에 앉아있어도 그와 비하면 여전히 작았기에 아담해 보였다.육현경은 소이연의 말을 듣지 못한 채 그녀의 작고 여린 손을 찬찬히 훑어보았다.빨갛게 데인 흔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우리 이연이는 왜 자꾸 덤벙거리지?”나무라는 것 같았지만 사실 애정이 듬뿍 담긴 말이었다.“내가 언제!”소이연은 반박하기에 급급했다.하지만 금세 풀이 죽었다.육현경과 집에서 오붓하게 밥 먹은 적이 몇 번 없었는데 번마다 해프닝이 있었다.그녀는 육현경의 깊어진 눈을 마주치면서 대답했다.“네 앞에서만.”그녀는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런 적이 없었다.“그래?”육현경의 입꼬리가 올라간 걸 보면 그녀의 대답에 만족스러운듯했다.“네가 기댈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해. 나의 영광이야.”뭘 또 이렇게 오버해?소이연은 몸부림쳤다.“라면 불겠다.”그러고는 바텐더에서 내려오려 했다.“가만히 있어.”육현경은 명령조로 말했다.“라면 불면 맛없는데…”“내가 갈게. 우리 이연이는 가만히 앉아있어.”육현경의 말을 들은 소이연은 입술을 깨물었다.순간, 그녀는 육현경한테 애 취급당한 느낌이 들었다.육민을 대하듯이 말이다.아, 육민은 그한테서 지나친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소이연은 가만히 앉아서 육현경이 라면을 건져내 두 그릇에 나눠 담고 옆에 있는 식탁에 놓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러고는 바텐더에 앉은 소이연을 안아서 내려주었다.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아 오붓하게 라면을 먹었다.그냥 라면인데 둘이 함께 먹으니 맛나고 행복했다.육현경은 식사를 다하고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오히려 객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리모컨으로 텔레비전을 켰다.소이연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오늘 저녁에 집에서 디자인을 할 생각이었다.평소에는 은하그룹
영상을 끄려던 찰나, 뒤에서 중저음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런 취향이었어?”소이연은 너무 놀란 나머지 소리를 지를 뻔했다.고개를 휙 돌려 갑자기 뒤에 나타난 육현경을 쳐다보았다.들어오는 걸 못 봤는데?디자인에 몰두하느라 못 봤을 수도 있다.하지만 중점은 그것이 아니다.영상을 끄지 않아서 야릇한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소이연이 고개를 돌려 꺼버리려고 했지만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닫기 버튼을 한참 동안 누르지 못했다.식은땀이 났다.이때, 그의 큰 손이 마우스를 쥐고 있던 그녀의 작은 손을 감싸 쥐고 닫기 버튼을 눌렀다.서재 안은 적막으로 가득 찼다.소이연은 숨 막히는 고요함에 어디론 가 숨고 싶었다.이성과의 스킨십이 싫다고, 스킨십만 하면 구역질이 난다 할 때는 언제고 지금 이런 영상을 소장하다니!이 상황에서 그녀가 변명한다 해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그녀는 얼굴뿐만 아니라 목까지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이연, 나 봐 봐.”육현경이 당장 쥐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어하는 그녀를 불렀다.소이연이 입술을 깨물었다.설명해야겠지? 이렇게 오해를 살 수는 없어.심호흡을 하고는 머리를 들었다.순간 육현경이 마침 그녀 쪽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두 입술이 부드럽게 닿자 두 사람이 당황했다.갑작스럽지만 싫지는 않고 놀라웠지만 아쉬움이 남는…주위의 공기마저 탁하게 느껴졌다.서재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서로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소이연은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꽉 잡았다.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육현경이 다가올 것이고 그녀가 떠나면 육현경이 다가오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그런 생각에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그런데 상대방이 보기엔 이 행동은 마치 키스를 원하는 것 같았다.육현경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입술이 바짝 마르더니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랐고 눈동자도 점점 이성을 잃어가는 듯했다.그는 손으로 그녀의 머리 뒤를 바쳐주었다.소이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진정할 수
“왜 아직도 여기에 있어!”육현경이 강압적인 말투로 물었다.예수진은 그가 준비해 준 집에 들어간 적도, 이 집 말고 다른 곳에서 잔 적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기 두려웠다.그 사이 마음을 진정시킨 소이연도 서재를 나섰다.예수진이 육현경의 앞에서 겁먹고 벌벌 떠는 모습이 안쓰러웠다.“시간도 늦었는데 자기도 얼른 들어가.”소이연이 육현경을 달랬다.육현경은 입술을 깨물었다.아직 네 입술이 무슨 맛인지 제대로 맛보지 못했어.“그래서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육현경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고 불쾌한 기분을 예수진한테 푸는 것 같았다.“그러니까… 나…”예수진은 어쩔 줄 몰라 소이연을 쳐다보았다.“내가 오라고 했어.”소이연이 대신 대답했다.“혼자서 제대로 끼니도 못 챙겨 먹을까 봐 우리 집에서 나랑 같이 살자고 했어.”“뭐 어쩌고 어째? 18살에 가출한 애야!”육현경이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오빠도 가출할 능력이 되면 여기서 이연 언니랑 같이 살아! 그럼 내가 당장 나갈 테니까!”예수진이 용기를 내서 대담하게 말했다.육현경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고 중간에 애매하게 끼인 소이연도 민망했다.남매가 싸우는데 내가 괜히 끼어들어서…“나 하루 종일 촬영해서 힘들다고. 씻을 거니까 하던 거 계속해. 나 안 나올 거니까.”예수진은 재빨리 달아났다.더 있다가는 육현경한테 맞을 게 뻔했다.“예수진, 이연이 컴퓨터에 있는 그 이상한 동영상 당장 삭제해!”육현경이 예수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예수진이 움찔하는 걸 보나 생각이 난 모양이다.매니저가 보내온 영상을 소이연의 컴퓨터에 다운로드했었다.이틀 뒤에 배드신을 촬영하는데 매니저는 예수진이 성생활이 없거나 재미없을까 봐 그런 영상을 보고 영감을 받으라는 뜻으로 준 것이었다.매니저의 깊은 배려에 탄복했다. 스스로도 학습할 수 있는데 말이다.소이연은 육현경의 말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어떻게 그 영상이 수진 것이라고 단정 지은 거지? 좀 감동인데?육현경 이 사람은 진짜
육현경은 마음이 복잡했다.……영상을 삭제한 예수진은 서재에서 걸어 나오며 현관문 앞에 서있는 소이연에게 물었다.“언니, 오빠 갔어요?”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소이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네, 갔어요.”그녀는 태연하게 대답하고는 걸어갔다.“제가 두 사람 방해한 건 아니죠?”예수진은 아직도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방해하긴요. 아니에요.”소이연이 고개를 흔들었다.예수진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농담을 던졌다.“언니 설마 오빠랑 처음 키스하는 건 아니죠? 설마.”소이연이 움찔하더니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에요.”지난번에 육현경이 갑자기 그녀한테 입을 맞추었다.그때는 너무 놀라고 화가 났었는데 이 번은…묵인했다. 그래서인지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달라도 너무 달랐다.“우리 오빠 키스 잘하죠?”예수진은 소이연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소이연은 뭐라고 대답할지 몰랐다.말이 키스이지, 두 번 다 잠깐 닿았다가 말았으니 키스라고 할 수 있을까?아직 스킬을 써먹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우리 오빠 보기보단 잘할 거예요.”예수진은 대답을 듣지는 못했지만 육현경의 스킬에 대해 인정해 주었다.다른 건 몰라도 육현경은 얼굴만으로도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아, 참. 언니 예능 참가했다면서요? 오늘 촬영장에서 매니저 언니가 알려줘서 알았어요.”예수진이 화제를 돌렸다.“어쩐지 언니 요즘 너무 바쁘다 했어요.”“예능을 통해서 은하 패션을 홍보하려고요. 수진 씨가 우리 브랜드 홍보 대사를 맡아준 덕에 인지도가 올라갔지만 은하그룹이 아직 제가 원하는 수준까지 발전하지 못했어요.”“꼭 문씨 그룹을 이겨야 해요.”예수진은 그녀를 지지했다.“문서인 그 개 같은 자식만 보면 구역질이 나온다니깐요?”소이연은 오로지 문씨 그룹을 이기기 위해 이러는 건 아니다.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면 자연스럽게 문씨 그룹을 제칠 수 있다.그녀는 어머니의 염원을 이뤄주고 싶었다.그녀의 어머니는 은하그룹의 규
소나은과 문서아는 소이연의 순위가 떨어진 것을 보고는 아주 기뻐했다.그들한테는 이 순위가 소이연의 수준에 맞는 자리… 아니, 진작에 탈락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지난번에는 운이 좋았던 것이고 이 번에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이니 다음번에는 탈락해야 된다고 여겼다.정작 소이연은 하위권 순위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그녀에 대한 평가과 비판도 신경 쓰지 않고 대결이 끝나면 곧바로 사무실에 돌아와 업무에 몰두했다.그리고 남은 시간에 다음 대결에 참가할 준비를 했다.소이연의 휴대폰이 울렸다.처리할 업무가 많아 발신자를 확인하지도 않고 전화를 받았다.“소이연, 네 무덤을 스스로 파는구나?”비아냥거리는 이 목소리는 문서인이었다.못난 놈이 분별없이 날뛴다더니…“첫 번째 디자인 말이야, 네가 은하패션 디자이너의 도움을 받았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아?”문서인이 차갑게 웃었다.“하지만 은하그룹 디자이너팀에 나은이가 없는데 너희들끼리 머리를 맞대봐야 거기서 거기지. 한번 출전한 것도 대단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순위가 바닥이던데. 내가 너였다면 쪽팔려서 자진 퇴출하겠어.”“너랑 상관없는 일인 것 같은데?”소이연도 차갑게 말했다.“네가 극진히 아끼는 소나은이나 잘 주시해. 이번에 떴다가 혹시 알아? 널 버리고 다른 남자 품에 안길지.”“우리 나은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소이연의 말에 문서인은 분노했다.“네가 이간질한다고 소용 있을 것 같아? 나랑 나은이 서로 많이 사랑해. 나은이가 대결에서 이기고 나면 우리 결혼할 거야. 소이연, 넌 영원히 날 가질 수 없어!”“너 같은 건 줘도 안 가져.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야?”그 말에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예전 같았으면 슬퍼했겠지.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으니까.하지만 문서인의 언행은 점점 그녀를 소름 돋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사랑했던 기억들도 지울 수 있었다.지금의 그녀는 문서인을 사랑한 걸 후회하고 있었다.사랑하면서 자신을 아프게 했고 새로운 사랑을 시도조차 못하게 만들었다.“소이연, 네 주제를 알
“문수 씨.”하지수는 송문수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지금 송문수가 화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송승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어쨌든 한 가족이 아닌가.그녀는 가정의 불화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그래도 승우 오빠를 병원에 보내야 하잖아.”하지수는 큰 소리로 송문수에게 말하자 송문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사실 송승우는 별일 없었다. 송문수는 격투기를 배운 적이 있기에 사람의 어느 부위가 다치면 안 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송승우를 이성을 잃을 정도로 때렸어도 급소를 때리지 않았다.하지수는 송문수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서 긴급구조 요청을 하였다.구급차를 기다리는 동안, 하지수는 송승우에게 다가가지 않았다.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바닥에 쓰러진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송승우의 분노가 극도에 이르렀지만 송문수와 싸울 힘이 없었다.사실 하지수도 요새 송승우와 송문수가 자주 싸우는 이유를 몰랐다. 오늘은 벌써 두 번째였다.어렸을 때 두 형제의 관계가 그다지 친밀하지 않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지금 어른이 되었는데 아직 유치하게 싸우다니!이윽고 구급차가 도착했고 구조대원들은 들것으로 송승우를 구급차에 태웠다.하지수도 따라서 올라탔지만 송문수는 타지 않았다.하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려와서 송문수를 잡아당겨서 같이 구급차에 올라탔다.구급차 안은 매우 조용하였다.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차 안의 분위기에 아직 분노의 불꽃이 튕기는 것 같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송승우는 응급실로 옮겼다.하지수와 송문수는 로비에서 기다렸다. 송문수는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면서 한쪽에 서 있었다.사실 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에도 상처가 있는 것을 보았다. “문수 씨도 얼굴과 몸에 난 상처를 검사하지 않을래?”“필요 없어. 외상이라 금방 나을 거야”송문수가 이렇게 말하자 하지수도 강요하지 않았다.잠시 후, 송승우는 응급실에서 나왔고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모두 외상이라 별문제가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입원 수속
“놓지 못해?”송문수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송승우를 바라보았다.서로 마주 본 두 사람의 눈에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이거 놔요.”하지수도 송승우의 손을 힘껏 뿌리쳤다. 그러자 송승우의 눈빛에 분노로 이글이글 타올랐다.그는 더욱 세게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아파요!”송문수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놓으라고 했다!”그는 송승우의 팔을 끌어당기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에 송승우는 통증을 느꼈으나 승부욕 때문에 쉽게 놓을 수가 없었다.송문수가 힘을 줄수록 그도 더욱 힘을 줘서 하지수를 잡아당겼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송승우는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이걸 놔. 나와 지수의 일에 끼어들지 마.”“끼어들지 말라고?”송문수는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형이 잊은 것 같은데 지수는 내 와이프야. 우린 부부이지만 형과 지수는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지금 형이 내 와이프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나보고 끼어들지 말라고?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너!”송문수의 쏘아붙인 말에 송승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예전에 송승우는 하지수가 자신을 좋아했기 때문에 송문수를 안중에 넣지도 않았고 그들의 결혼 관계를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없었다.그러나 지금 송문수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지수가 좋아한 사람은 나야!”송승우는 수치심에 더 약이 올라서 노기어린 목소리로 외쳤다.하지수는 너무 아파서 반박할 힘도 없었고 송문수의 말이 들려왔다.“지수가 누구를 좋아하든 지금은 내 여자야. 누구도 데려갈 수 없고 누구도 지수를 괴롭힐 수 없다고! 셋까지 셀 테니 지수를 놓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송승우는 끄덕하지도 않고 송문수를 노려보았다.“하나.”“둘.”송문수는 ‘셋’을 세는 대신 주먹을 들고 송승우의 얼굴을 세게 강타했다.송문수의 한 방을 맞은 송승우는 코피를 흘렸고 아픔으로 이내 하지수를 놓아주었다.그러나 송승우는 소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늘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승우 씨, 사과 따위 이제 필요 없어요. 지금 제가 바라는 건 아무 탈 없이 우리 사이의 관계를 끝내는 거예요. 승우 씨는 문수 씨 형이잖아요. 게다가 저도 어릴 때부터 송씨 가문에서 자란 사람이고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친척 같은 관계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하지수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지하게 말했다.송승우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수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망상에 빠진 사람은 무슨 말을 하든 헤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으니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하지수는 뒤를 돌아 송문수 쪽으로 다가가려 했다. 늦은 시간이었고 그녀도 여전히 많이 피곤했다. 송문수랑 같이 집으로 가서 자고 싶었다.크레지가 아직 오지 않은 이상, 기술 투자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은 이상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짬짬이 시간을 내서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그런데 막 돌아서려는 순간, 그녀의 손은 또다시 송승우에 의해 붙잡혔다.하지수가 아무리 팔을 흔들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송문수는 차가운 눈빛으로 송승우의 행동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그가 앞으로 다가가 하지수를 데려오려던 순간, 송승우가 갑자기 말했다.“지수 씨, 방금 당신의 행동은 모든 걸 말해줬어요!”“무슨 행동이요?”하지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방금 제가 불렀을 때, 제 쪽으로 다가왔잖아요. 그게 지수 씨 마음속에 있는 진심이에요. 더 이상 숨기지 말고 저한테로 오세요. 하지수 씨, 제가 잘 해줄게요. 지수 씨를 혼자 두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맹세할게요...”“아니요.”하지수는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하지수를 바라보는 송승우의 눈빛은 분노로 가득 찼다.“승우 씨가 불었을 때 따라간 건 무의식적으로 간 거예요. 잠에서 덜 깬 상태라서 누가 불렀어도 갔을 거예요. 승우 씨인 줄도 몰랐어요.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할게요. 낯선 목
송문수는 하지수가 일어나서 송승우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송승우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생각했다.‘그래, 지수 씨도 아직 날 신경 쓰고 있다니까. 숨기려 해도 어떻게 숨기겠어? 이런 상태에서야 비로소 진심이 드러나는 거지.’송문수는 멀어져 가는 하지수를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옷자락에 손이 닿았을 때 살짝 멈칫했다. 하지수를 강제로 붙잡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사실 그는 항상 하지수의 선택을 존중해 왔다. 지금까지 변함없이 말이다.하지수는 송승우 앞으로 걸어갔고 송승우가 먼저 손을 뻗더니 그녀를 끌어당기려 했다.그러나 그가 손을 뻗자 하지수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승우 씨?”그녀는 그제야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조금 전까지 어지럽고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이제와사 분명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언제 잠에 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너무 피곤해서 머리가 흐릿할 뿐이었다.“너무 늦었어요. 제가 데려다줄게요.”송승우가 그녀를 끌고 나가려고 하자 하지수는 급히 그의 손을 쳐내며 말했다.그러자 송승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아까는 잠에서 덜 깨서 그랬어요. 전 문수 씨랑 같이 갈 거예요.”“뭐라고요?”송승우는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언제까지 연기할 거예요?”“네?”하지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저를 놀리는 게 재밌으세요?”송승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저... 저는 그런 게 아니라...”하지수는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그러자 송승우가 입을 열었다.“알겠어요. 제가 잘못한 걸로 하죠.”그가 갑작스레 사과를 하자 하지수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녀는 송승우가 왜 갑자기 사과를 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왜 사과를 하는 거야?’“미안했어요. 어쩔 수 없이 떠난 거라고는 하지만 우리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잖아요. 결혼식장에 지수 씨 혼자 남겨두고 간 건 제 잘못이에요. 미안해요.”하지수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
하지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은 여전히 빨리 뛰고 있었다.그녀는 전혀 말을 듣지 않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만약 누군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 어색한 상황이 얼마나 계속될지 알 수 없었다.‘문수 씨도 부끄러워하는 건가?’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려 애썼다.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올까 봐 걱정이었다.하지수는 소파에 앉아 몰래 송문수를 쳐다보았다.그는 그저 고위직 직원의 얘기를 듣고만 있을 뿐, 전혀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깊게 숨을 쉬었다.‘단지 어색해서 그런 건가?’송문수는 언제나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해명하려 하지 않는 것도 결국 체면을 세우려고 그러는 건가?’하지수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잡았다....크레지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관련 부서가 계속해서 야근을 하고 있었다.송문수와 하지수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들은 끊임없이 회의를 열고 논의하며 최대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애썼다.새벽 2시가 되었지만 송문수는 아직 퇴근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방금까지도 각 부서와 회의를 하면서 협력 계획과 판매 계획을 다시 수정하고 보완했다.회의가 끝난 후에도 송문수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계속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송문수는 그제야 그의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서류든 제대로 보지 않고 사인을 해버렸었다. 하지만 이젠 점점 더 신중해졌고 모든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고 나서야 사인을 했다.그 덕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고 오늘 하루 동안의 모든 서류를 처리하고 나서야 송문수는 퇴근을 하려고 하지수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이미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잠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송문수의 기억 속에 하지수는 늘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고 절대 늦잠을 자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소파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많이 피곤한 걸까?’자세히 생각해 보니 그들은 지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야
송문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밝아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를 더 방해하지 않으려 했다. 송문수가 점점 더 발전하는 걸 보면서 하지수도 그를 더 지지해 주고 싶었고 송문수로 하여금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하지수는 옆에 있는 소파로 가서 노트북을 들고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그리고는 습관처럼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들어갔다.그녀는 비록 알림을 꺼 놓았지만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메시지가 있으면 항상 첫 번째로 확인하곤 했다.그런데 그때, 그룹 채팅에 있는 메시지를 본 하지수는 깜짝 놀랐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아마 이 상황을 믿기 어려워할 것이었다.송문수가 회사의 공식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보낸 것이었다.하지수는 고개를 들어 송문수를 바라보았다.그는 진지하게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채팅방에는 여전히 ‘하지수’라는 이름이 올라오고 있었다.“문수 씨, 컴퓨터 바이러스에 걸린 거 아니야?”하지수가 물었다.“어?”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하지수는 송문수 앞에 서서 그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면에는 타자를 해놓고 아직 보내지 않은 ‘하지수’도 있었다.송문수도 그제야 자신이 채팅방에 ‘하지수’라는 이름을 여러 번 입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자신도 놀란 듯했다. 그는 자신이 타자를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하지만 방금 그의 머릿속이 온통 하지수로 가득 찬 건 사실이었다.그때, 채팅방에서 누군가 메시지를 보냈다.[회장님 지금 하 매니저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그걸 실수로 단체 채팅방에 보낸 거고?]메시지는 보내지자마자 삭제되었고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나도 잘못 보냈네!”그룹 채팅에 두 개의 삭제 기록이 나타났다.송문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그제야 메시지를 삭제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하지수’라는 메시지들을 삭제하려 했지만 이미 메시지를 취소할 수 있는 시간이
송승우는 이를 꽉 악물었다. 그는 하지수를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하지수에게 송문수를 고른 게 얼마나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반드시 알게 해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로 하여금 후회하도록 만들겠다고 다짐했다....하지수는 송승우의 사무실을 떠나 바로 송문수의 사무실로 갔다.송문수는 업무에 몰두해 있었다.회사에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자유시간이 없었고 퇴근 후에도 여전히 업무와 관련된 일들을 처리하고 있었다.하지수는 송문수가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하느님도 부지런한 사람을 도울 거라 믿으며 송문수가 앞으로 큰 성과를 낼 것이라고 확신했다.“형이 뭐라고 했어?”송문수는 그녀를 한 번 쳐다보며 차갑게 물었다.“자기 개인 비서로 되어달라고 하더라고.”하지수는 송문수에게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그에게 숨기고 싶지 않았다.송문수랑 같이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최대한 마음을 다할 생각이었다.송문수는 멈칫하더니 코웃음을 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가 어떻게 대답했는지 알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하지수가 그 제안을 무조건 받아들였을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지수가 형 요구를 거절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번에도 알겠다고 했겠지...’이렇게 생각한 송문수는 일에 더 집중하려 애썼다. 회사 일을 제대로 해내기로 결심한 이상 중간에 포기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거절했어.”하지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문수는 가슴이 약간 두근거리는 걸 느꼈다.분명 그녀의 말에 설렌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 티 내지 않으려 했다.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척 계속해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반면, 하지수는 송문수에게 그 어떤 반응도 기대하지 않았다. 어차피 송문수는 자기한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저 자신의 결정을 그에게 알리고 싶었을 뿐이었다.“왜 거절했는데?”송문수가 차분하게 물었다.“문수 씨한테 내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하지수는 웃으며
하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았다.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말이다.어린 시절 그녀는 항상 송승우를 믿었고 그가 자기를 보호해 줄 거라 생각했었다. 송승우는 같은 또래 친구들보다 성숙하고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었다.하지만 순간, 그녀는 자신이 송승우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게다가 그가 지금 하는 행동이 너무 유치해서 하지수는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어떻게 이런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지?’송승우는 하지수와 송문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하지수가 몇 번이나 말했으니 모를 리 없었다. 지금은 송문수와 잘 지내고 있고 송승우와의 관계는 이미 끝난 거라고 말이다.그리고 송문수가 지금 송씨 그룹의 대리 회장직을 맡고 있다는 것도 분명 알고 있었다. 송문수의 결정이 회사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말이다. 송문수한테 도움이 더 필요했고 송문수가 받는 스트레스가 더 많았다.‘생각이 없는 건가? 어쩌면 이렇게 이기적인 말을 할 수 있는 거지?’“왜요? 제가 무슨 어려운 부탁이라도 했나요?”송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지수를 바라보며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승우 씨, 정말 제대로 일하려고 온 거 맞아요? 아니면 그냥 문수 씨를 못 믿어서 온 건가요? 문수 씨가 회사를 잘 관리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감시하러 온 거냐고요!”“당연히 일하러 온 거죠. 아니면 왜 연구소 일까지 내려놓고 회사로 왔겠어요! 그리고 또...”“아까 지수 씨가 그러셨잖아요. 송문수를 못 믿냐고요. 맞아요. 전 송문수 그 자식 못 믿어요. 송문수가 회사를 제대로 이끌 수 있을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성과를 하나 냈다고 교만해져서 마음대로 하려 할 겁니다.”“갑자기 드는 생각인데요. 승우 씨는 왜 그렇게 문수 씨 잘되는 꼴을 못 보는 거예요?”하지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게 아니라면 왜 문수 씨를 그렇게 모욕하고 내 곁에서 떼어놓으려 하겠어...’하지수의 능력이 얼마나
짧은 시간이었기에 송문수가 회사의 대체적인 상황을 잘 파악한 것만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는 단지 송문수에게 회사를 관리하는 재능이 있어서 해낸 것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송문수가 매일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 하지수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항상 그는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회사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연구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지어는 날마다 새벽까지 야근을 하다가 집에 돌아갔다. 게다가 차에서 보는 서류들도 모두 송씨 그룹과 관련된 문서였다.송문수는 원래 시간만 나면 게임을 하거나 먹고 자고 놀기만 했던 사람이었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송문수는 정말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된 것 같았다....송문수의 말대로 하지수는 다음 주에 회사로 찾아올 크레지를 위해 연관 업무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송문수와 하지수가 일 처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사님들도 점점 두 사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맡긴 업무에 대해 불평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바로 행동에 옮기기만 했다.그러면서 송문수와 하지수의 업무 부담도 줄어들었고 회사도 더 원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회의가 끝난 후,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갔다.요즘 들어서 그녀는 송문수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는 것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송문수는 자주 회사의 전문 용어나 이해할 수 없는 마케팅 계획에 대해 물었고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그가 묻는 말에 답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사무실을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지수 씨, 잠깐 제 사무실로 올 수 있으세요?”그때, 송승우가 갑자기 하지수를 불렀다.하지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송문수를 한 번 바라보았다.“네 마음대로 해.”송문수는 이렇게 말하고 큰 걸음으로 사무실을 떠났다. 질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이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지수는 속으로 약간 허탈감을 느꼈다.송문수가 많이 변한 건 사실이었지만 하지수에 대한 감정은 별로 진전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