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문수는 단 한마디만 남기고 뒤돌아 떠나버렸다. 하지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쫓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팔은 여전히 송승우에게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지수야, 가지 마!” 하지수는 송문수가 떠나는 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려 송승우에게 외쳤다. “날 놓아줘요!” “지수야!”송승우도 분명 화가 난 얼굴이었다. “지금 송문수한테 다가가면 다칠 수도 있다는 거 몰라!” “그는 내 남편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연히 그의 곁에 있어야 해요.” 하지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날 놓아줘요.”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 거야?” 송승우는 눈가를 깊게 찌푸리며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지수야.” 송 어머니는 하지수를 부르며 나직이 말했다. 하지수는 송 어머니의 목소리에 격앙된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송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지금 송 어머니는 몹시 기력이 없어 보였다. 다시 침대에 몸을 기댔고 얼굴에는 아직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송 어머니는 힘겹게 입을 뗐다. “승우 말이 맞아. 지금 문수는 아주 위험한 상태야. 좀 진정되면 그때 찾아가.” “하지만 어머님. 문수 씨 감정이 너무 불안정해 보여요.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요.” “그런 일 없을 거야!” 송승우는 단호하게 끊어 말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사고 칠 때마다 다친 적 있었어? 항상 남들한테만 피해를 줬지!” “승우 오빠, 친형으로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하지수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송문수를 대신해 불만을 터뜨렸다. 송승우는 순간 멍해졌다. 아마도 하지수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늘 그의 편에 서 있었던 그녀였는데 이제는 송문수 편을 드는 걸까? 하지만 도대체 송문수가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그녀가 그를 그렇게 감싸는 걸까? 송문수는 그저 쓸모없
하지수는 계속 송 어머니 옆에 있었다. 그녀가 완전히 잠들 때까지. 하지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줬다. 돌아보니 소파에 앉아 있는 송승우의 얼굴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마 송문수에게 여전히 화가 난 상태일 것이다. 사실 하지수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송승우가 이렇게까지 송문수를 비난하는지. 결국. 그도 송 부모님 곁에 있지 않았고 송문수가 그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고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하지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마도 오랜 시간 동안 송승우에 대한 정 때문일 것이다. 어릴 적 그는 정말 그녀를 잘 대해줬으니까. 그녀는 송승우에게 상처 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송 씨 가문에게는 항상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단 송문수를 제외하고. 그녀는 항상 송문수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승우 오빠, 얼굴에 상처가 있는데 의사한테 가서 처리 안 해도 돼요?” 하지수는 조용히 물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에 난 멍 자국을 보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송승우는 고개를 들어 하지수를 한 번 쳐다보고 말했다. “별거 아니야.” 사실 하지수도 별거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냥 가벼운 상처일 뿐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점점 송문수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무례한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송승우를 때린 것도 분명 힘을 조절한 것이었다. 진짜로 죽일 듯이 때렸다면 송승우는 일어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방금 송승우가 날린 그 한 방이... 하지수는 약간 걱정스러웠다. “그래도 치료받고 가세요. 곧 회사로 돌아가야 할 텐데 이 상태로 동료들이나 상사에게 보이면 곤란할 거 잖아요.”하지수는 설득하며 말했다. 송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이 없다는 건 곧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가시죠. 어머님은 잠드셨으니까 당분간 깨어나지 않으실 거에요. 제가 같이 의사 찾으러 가줄게요.” 송승우는 하지수를 한 번
“부모님께 대체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거예요?”하지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송승우를 바라봤다. “넌 뭘 것 같아?”송승우가 되물었다. “난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전혀 모르겠어요.” 하지수의 표정은 점점 차가워졌다. “지수야, 너 왜 이렇게 고집이 세졌어? 어릴 때부터 넌 항상 착하고 배려심 많은 아이였어.” 송승우는 어딘가 실망한 듯한 눈빛으로 하지수를 바라보았다. 하지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도 느꼈다. 송승우는 변했다. 예전의 송승우는 이러지 않았다. 이렇게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지 않았다. 그는 늘 그녀의 감정을 배려해 주었고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으면 어떻게든 웃게 했다. 그리고 절대 그녀를 힘들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너를 떠난 건 내 잘못이 맞아. 그때도 이미 설명했잖아. 그때는 정말 어쩔 수 없어서 말도 없이 떠났어. 난 네가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설마 아직도 그 일로 나한테 화가 난 거야?” 송승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수야, 이 몇 년 사이에 넌 너무 많이 변했어.” 하지수는 그저 조용히 그의 비난을 들을 뿐이었다. 입술을 꽉 깨물며 생각했다. 맞다. 그녀는 인정했다. 예전에 감정이 상했던 건 맞았다. 결혼식에서 버려지는 게 누구에게나 납득될 수 있는 일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로 인해 어떤 극단적인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속으로 끙끙 앓으며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든 견뎌내려고 노력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중에야 송승우의 어쩔 수 없는 사정을 알게 되었고 그녀는 그를 용서하기로 했다. 그녀는 정말로 누구도 미워하지 않았다. 송씨 가문의 사람들도 미워한 적이 없었다. 그냥 더 이상 송승우와의 감정을 기대하지 않을 뿐이다. 한 번 어긋난 감정은 이유가 누구에게 있든 간에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게 바로 흔히 말하는 인연은 있지만 운명이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그녀는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어릴 때부터 그녀는 송씨 가문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한 적이 없었고 특별히 큰 욕심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그런데 지금 송승우는 그녀가 그에게 민폐를 끼쳤다고 비난하고 있었다.“승우 오빠, 제가 도대체 어디서 민폐를 끼쳤다고 생각해요?”하지수는 차분히 물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아직도 모르겠어?”송승우는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수야, 이 몇 년 동안 송문수와 함께 지내면서 정말 많이 망가졌어.”“제가 도대체 뭘 했다는 거예요!”하지수는 한 마디씩 똑똑히 말했다. 그녀의 태도도 점점 강경해졌다.“지금 네가 하는 모든 행동이 그게 결국 내가 결혼식에서 떠난 일에 대한 불만을 표현하려는 거 아니야? 그래서 일부러 나한테 쌀쌀맞게 굴고 내가 너를 달래게 만들려고 하는 거잖아?”송승우는 직설적으로 말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송승우는 사실 그다지 인내심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어릴 때 그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항상 공부였고 그는 공부를 정말 좋아했다. 공부는 중요한 일이었기에 그가 공부한다고 하면 아무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좋은 학습 환경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공부를 마친 후에야 다른 일들을 생각했다. 그리고 하지수는 어릴 때부터 참 착하고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그녀는 송승우가 공부할 때는 절대로 방해하지 않았다. 그가 어릴 때 자신을 잘 대해주고 그녀의 기분을 맞춰 주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송승우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법을 잘 알았다고 하는 것이 더 맞았다.그녀가 불만을 표현할 수 있는 때는 송승우가 바쁘지 않을 때였고. 송승우가 그녀를 달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손승우가 달래줄 때 이미 미리 감정을 정리해 놓았다.하지수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깨닫고 나니 많은 것들이 더 이상 집착할 필요가 없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그녀는 말했다. “승우 오빠, 난 오빠가 달
“그만하자. 지수야. 더 이상 너랑 말다툼하고 싶지 않아.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고 달콤한 말로 너를 달래지도 않을 거야. 나는 오직 내 행동으로 내 감정을 표현할 뿐이야. 네가 내 입장을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송승우는 엄중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하지수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송승우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를 맞춰주면 그는 다정하고 자상한 오빠가 된다. 그러나 맞춰주지 않으면 그는 고집스러워 보였다. 자신의 관점을 끝까지 고수하며 다른 사람의 반박은 조금도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쟁이처럼 느껴졌다. 혹시 여태까지 그녀가 송승우에 대해 너무 이상적인 시각을 가졌던 걸까? 이제야 그 차이를 깨닫고 나니 실망감만 남았다.송승우는 하지수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자신의 말을 받아들였다고 착각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다소 실망한 듯 보였지만 이내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마치 하지수에게 매우 관대하고 대범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다. 도덕적 압박 같기도 하고 일종의 가스라이팅 같기도 했다. 하지수는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승우 오빠, 마지막으로 말할게요.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감정 같은 건 없어요. 우리는 이미 끝났어요. 저는 화가 난 것도 아니고 이런 말을 해서 오빠가 달래길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이제는 정말로 송문수와 함께 있고 싶어요.” “지수야, 너 대체!” 송승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지며 급격히 화를 내며 말했다. 그는 하지수의 단호한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그리고 하나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어요. 오늘 송문수를 그렇게 말하지 말아야 했어요.” 하지수는 평온한 목소리로 담담하게 말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지는 듯했다. 더 이상 송승우의 그림자 속에서 살아가서는 안 된다. 그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을 바꿔서는 안 된다.그녀는 그녀 자신의 삶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더 이상 송승우의 감정을 신경 쓰
하지수는 사실 송 어머니가 이미 잠에서 깼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번 말할 때마다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송승우는 그러지 않았다. 그도 송 어머니가 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래. 됐다. 하지수는 더 이상 송승우와 예전과 달라진 점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그의 숨겨진 모습을 이제야 깨달았을지도 몰랐다. 지금 그녀가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는 것. 송문수와 함께. “난 이만 가볼게. 송문수도 다친 데가 있어서 그 사람 보러 가야 해.” 하지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돌아섰다. “하지수. 네가 지금 나한테 화가 나서 일부러 날 자극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게. 네가 오늘 정말로 이 문밖을 나간다면 우리 사이는 끝이야. 난 다시는 널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그리고 기억해 둬. 난 두 번, 세 번씩 중고품을 받아주는 사람이 아니야.” 송승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하지수의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하지수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제야 알았다. 송승우의 마음속에서 자신은 이미 중고품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듣고 있었다. 누구라도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모욕적인 단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 아마 그가 중요하지 않으니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송승우 앞에 섰다. 송승우는 하지수가 그의 경고 앞에서 끝내 떠나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역시나 하지수가 그저 허세를 부릴 줄 알았다. 하지수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확신했다. 자신과 송문수중에서 하지수가 어리석게 그 열등품을 선택할 리 없다는 것을. 누구나 눈이 있다면 알 것이다. 그를 선택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는 사실을. “지수야,
송 어머니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그저 송승우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사람들 눈에 송승우는 정말로 모범적인 아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큰 걱정을 끼친 적도 없었고 늘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온 아이였다. 반면 송문수는 어릴 때부터 꾸중을 듣는 일이 잦았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인데 왜 송문수는 송승우처럼 그렇게 뛰어나지 못한 걸까. 하지만 지금 송 어머니는 순간적으로 혼란에 빠졌다. 혹시 그동안 자신들이 송승우를 너무 완벽하게 보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를 너무 완벽하게 생각했기에 그의 작은 결점조차도 받아들이기 어려워진 건 아닐까? 송 어머니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승우야, 지수와의 일은 더 이상 억지로 붙잡으려 하지 말거라.” 송승우의 눈빛은 그 순간 부드러움에서 날카로움으로 변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송 어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저랑 지수가 어떻게 억지로 엮인 거예요? 어머니도 잘 아시잖아요. 지수가 좋아했던 사람은 처음부터 나였어요. 결혼식 날 제가 어쩔 수 없이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 지수랑 결혼한 사람은 저였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너희는 이미 지나가 버린 사이잖니.” “그래서 그걸 바로잡으려는 거예요.” 송승우는 단호한 목소리로 정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송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승우야, 내가 말하는 건 끝났다는 거지 잘못됐다는 게 아니야. 문수랑 지수는 이미 부부야. 그리고 지금 그들도 점점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걸 축복해 주는 거지 네가 와서 그 관계를 깨는 게 아니야.” “왜 엄마까지 송문수 편을 드는 거예요?” 송승우는 어머니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전까지 알던 온화했던 아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송승우가 오랜 시간 우리와 떨어져 살았기 때문일까? 송 어머니는
허영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을 진정시켰다.남편은 아직 중환자실에 있고 그녀는 그와 함께 들어갈 수 없었다.마음을 좀 진정되자 그녀는 입을 열었다.“승우야,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알기 전에 함부로 결론을 내리지 마. 네가 떠난 뒤에 지수가 결혼식에서 무엇을 겪었는지 아니? 전 장안시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조롱받고 비웃음당해야 했던 상황이었어. 물론 일시적인 조롱보다 지수의 인생을 망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당시 지수는 누군가가 자신을 구해주고 외롭고 힘든 순간을 함께 견뎌주길 간절히 바랐을 거야.”허영지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차분하게 이어갔다.“지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은 여자야. 평소에 울지도 않고 소란도 피우지 않는 건 우리 집에 폐를 끼칠까봐 걱정했기 때문이지. 네가 정말 지수의 마음을 이해한다면 알겠지만 지수는 부모를 잃고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했어. 외로움을 두려워하고 무엇보다 버림받는 걸 가장 두려워하는 아이야.”그 말을 들은 송승우의 눈가가 붉어졌다.그의 눈에는 억누를 수 없는 분노와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처음에 그와 하지수는 정말 서로 사랑했었다.둘은 영원히 사랑해야 했을 관계였다.결혼 생활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었지만 사랑만큼은 변하지 말아야 했다.“결혼식이 끝난 후, 나는 지수에게 물었어. 결혼식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있다고 말이야.”허영지는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지수의 대답은 이랬어. 결혼은 장난이 아니니 송문수 씨와 자기는 부부라고 했지.”허영지는 말을 이어갔다. “지수가 문수와 결혼한 이후로 감정이 생겨서 너를 포기했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네가 지수를 떠났을 때, 그리고 지수가 문수와 손을 잡고 결혼식장에 들어섰던 그 순간부터 이미 문수를 남편으로 받아들인 거야.”송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어머니의 말을 인정하고 싶지도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하지수는 그의 여자였고 영원히 그의 여자였어야 했다.“곰곰이 생각해 봐.”허영지는 말을 거기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