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 씨.”하지수가 송문수의 뒤로 다가가면서 말했다.송문수는 누군가 방에 들어온 걸 분명 느꼈지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그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하지수는 그가 화가 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수가 송문수를 불러도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얼굴은 괜찮아?”“괜찮아.”송문수가 대답했다. “근데 여기엔 왜 온 거야? 송승우랑 같이 있는 게 아니고?”누가 봐도 조롱이 가득한 말투였다.예전 같았으면 하지수는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이상하게도 송문수가 질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는 단지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하지수는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이렇게 많았던 거라고 생각했다.“나는 당신 아내야. 내가 왜 그 사람이랑 있어야 해?”그러자 송문수는 가만히 입술을 꾹 다물었다.담배를 한 모금 더 들이마셨지만 그는 여전히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약 발라줄게. 의사가 처방해 준 상처 치료 약을 가져왔어.”하지수가 먼저 제안했다. “괜찮다니까.”송문수는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문수 씨...”“방으로 돌아가.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송문수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웠다.“당신 지금 나한테 화난 거야?”“내가 왜 화를 내겠어?”송문수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송승우 말이 맞잖아. 나는 한심한 놈이라고. 그런데 내가 뭐가 화날 게 있겠어?”“나 방금 송승우랑 싸웠어.”송문수가 멈칫했다.“당신 때문에 싸웠다고.”“당신은 전혀 송승우가 말한 것처럼 그렇지 않잖아.”송문수의 목젖이 가늘게 움직였다.“나도 송승우가 당신을 그렇게 말하는 게 싫었어.”“송승우가 화내면 어쩌려고?”송문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어딘가 미세하게 톤이 살짝 바뀐 것 같았다.그건 송문수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한 변화였다.“송승우는 내 남편도 아닌데 뭐가 무서워?” 하지수가 태연하게 말했다.그 말에 송문수의 몸이 더 긴장하는 듯했다.“자, 이리
송문수는 거절하면 하지수가 정말로 울며 그를 붙잡을 것 같아 두려웠다.“약만 바르고 나면 바로 갈게.”하지수가 다시 말했다.그녀는 몰래 그의 손을 잡고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가볍게 흔들었다.‘이럴 수가! 하지수가 언제 이렇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한 거지? 이 나이에... 이거 정말 부끄럽지도 않아?’송문수는 돌아서서 소파에 앉았다.그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고요한 침묵으로 응답했다.송문수는 사실상 그녀를 허락한 것이다.하지수는 살짝 웃었다.‘송문수는 강하게 밀어붙이기보다는 부드럽게 다가가는 걸 좋아하네.’그녀는 소파로 가서 외상약을 꺼내며 말했다.그녀는 면봉에 요오드 알코올을 묻혀 송문수의 얼굴을 향해 다가갔다.그녀는 송문수의 판다처럼 퉁퉁 부어오른 눈을 보고 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하지수, 또 웃으면 널 진짜 밖에 내던져버린다!”송문수가 경고했다.그러자 하지수는 입술을 물었다.“알았어. 웃지 않을게.”“문수 씨, 눈 감아.”“왜?”“약이 눈에 들어가면 어떡해?”“그럼 웃지 말라니까.”“알았어. 웃지 않을게.” 하지수는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송문수는 여전히 믿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하지수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오려고 했지만 겨우 참았다.송문수의 모습은 진짜 웃겼다.하지수는 어릴 때부터 송문수가 이렇게 민망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하필 그가 이렇게 맞았다는 게 웃기기도 하고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나 때문이 아니었다면 문수 씨가 이렇게 얼굴을 맞을 일도 없었을 텐데.’하지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송문수의 상처를 소독해주고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심지어 서로의 숨결이 가까이 닿는 게 느껴질 정도로 두 사람은 아주 조용했다.하지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약을 발라주었고 그가 눈을 뜰 준비를 할 때였다.하지수는 송문수의 얼굴이 가까이 닿자 살짝 심장이 두근거렸다.하지수의 기억에는 자신이 종래로 송문수의 얼굴을 자세히 본 적이 없었다.송문수가 어릴 때부터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그의
방 안의 온도는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하지수는 머리가 어지럽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그녀는 다시 한번 적극적으로 송문수의 입술에 가까이 다가갔다.그저 더 많이 더 많이 원했다.그녀의 입술은 그의 입가에 닿았다.하지만 송문수가 갑자기 피하는 바람에 그녀는 입술을 맞추지 못했다.하지수의 눈빛에는 흐릿한 아지랑이가 어리었고 송문수의 입술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송문수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지금 그는 하지수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하지수는 지금 정말 너무 매혹적이었다.부드럽고 물처럼 유연한 느낌이었던 하지수는 잔뜩 긴장한 송문수가 마음을 내려놓기를 기다렸다.그런데 송문수는 하지수에게서 벗어나 옆에 앉았다. “문수 씨?”하지수가 그를 불렀다.고양이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하지수는 분명히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느꼈다.그야말로 방금은 모든 것이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갑자기 문수 씨가 물러난 이유가 뭘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하지만 방금 그녀가 적극적으로 다가갔을 때 그는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속에 빠져들었던 것 같았다.‘그렇다면 왜 갑자기 관심을 잃었을까? 내가 매력 없어서 그럴까? 아니면 내가 키스를 잘 못하는 걸까?’방금 그녀가 송문수와 키스할 때 그녀는 송문수가 너무 격렬하게 나오는 바람에 키스를 받기만 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잘 몰랐다.그런데 하지수는 정말로 송문수와의 키스를 아주 좋아했다.그녀는 그의 입술을 원하고 송문수에게서 또 다른 세상을 느끼고 싶었다.“너 그냥 네 방으로 가.”송문수가 그의 욕망을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왜? 방금 느낌 괜찮지 않았어?”“갑자기 안 하고 싶어졌어.”송문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그런데 문수 씨 몸은...”“마음이 원하지 않아서 그래.”“왜?”하지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나기보다는 그저 이유를 물어보려 했다.그녀는 단지
송문수는 그녀를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냥 말할게. 문수 씨가 이제 나를 원하지 않아도 괜찮아.”하지수는 마음속의 서러움을 삼키면서 말했다.아마도 송문수는 아직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녀는 송문수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한 천천히 그와 감정을 쌓아가며 다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그냥 날 밀어내지 마.”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송문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우리 천천히 서로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면 안 될까?”하지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녀는 송문수가 정말로 거절할까봐 두려웠다.그는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라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 행동하는 성격이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많이 긴장했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그녀도 왜 이렇게 송문수와 함께 있고 싶은지 잘 몰랐다.아마 몇 년 전, 송문수가 그녀 때문에 감옥에 갔던 일이 영향을 미친 걸지도 모른다.그 뒤로, 그녀는 송문수에 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보면 볼수록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이게 바로 좋아하는 느낌일까?’그녀가 송문수를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게 사실 쉽지 않았다. 어떻게 갑자기 한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 송문수는 별로 바뀌지 않았고 그녀에게 특별히 잘해주지도 않았다.하지만 어쩌면 그런 감정이 서서히 깊어져서 그녀의 마음속에 파고든 게 아닐까.“문수 씨가 말하지 않으면 난 그런 줄로 알게.”하지수가 입을 열었지만 송문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럼 먼저 나갈게. 담배 좀 덜 피고. 푹 쉬어.”하지수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섰다.“지수야.” 송문수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그 순간 하지수의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그가 자신이 듣
다음 날 오전, 허영지가 전화를 걸어 송기명이 깨어났다고 전했다.하지수는 송문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송문수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말이다.가기 싫은 이유 중 하나는 오늘 아침에 눈이 더 부은 데다가 까맣게 멍이 들어서 더웃겨 보였기 때문이었는데 둘째는 아마도 송승우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었다.하지만 하지수 생각은 달랐다.‘어차피 가족이어서 얼굴도 자주 마주쳐야 하는데 평생 아무 소통도 없이 지낼 순 없잖아.’결국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갔다.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송기명은 매우 허약해 보였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더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회사 일에 대해 걱정하며 허영지에게 비서를 불러달라고 했다.허영지는 물론 반대했다.“여보, 그냥 쉬세요. 의사 선생님께서도 몸이 너무 안 좋다고 하셨잖아요. 더 이상 회사 일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요.”“신경 쓰는 게 아니라 그냥 회사 정황이 궁금할 뿐이에요.”“신경 쓰는 게 아니라면 상황을 알 필요도 없잖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가요. 지금은 당신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나는...”“아버지.”송승우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회사 일은 그냥 놔두세요. 일에 신경 쓰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기면 결국 아버지만 힘들게 돼요. 그러지 마세요.”“네가 뭘 알겠어.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회사가 잘 돌아가겠어?”송기명은 약간 화를 내며 말했다.“회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회사가 왜 안 돌아가겠어요? 아버지께서 어떤 말을 해도 저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치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회사 일을 해결하지 못했는데 나더러 어떻게 안심하라는 거야?”“아무리 마음에 걸려도 그냥 안심하세요. 지금은 절대 아버지한테 일을 맡기지 않을 거예요.”송승우는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안 하면 누가 한다는 거냐?”송기명도 감정이 격해졌다
하지만 하지수는 아직 어렸고 회사의 대부분 오래된 직원들, 특히 이사들 중에는 하지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가 회사 일을 주도하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될 것이었다.오직 송기명이 돌아가야만 회사의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상상만 해도 그는 지금 회사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예측할 수 있었다.“제가 지수랑 같이 하겠습니다.”송문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기명, 허영지, 그리고 송승우 세 사람 모두 어리둥절해했다.하지수도 놀라서 송문수를 돌아보았다.“계속 저한테 회사로 출근하라고 하셨잖아요. 전 지금 회사로 돌아가서 회사 일을 관리하겠다고 아버지께 약속하는 겁니다.”송문수가 송기명에게 이렇게 말했다.“이 기회는 한 번 뿐이에요. 아버지께서는 침대에 누워서 잘 쉬세요. 저랑 지수가 돌아가서 회사 문제를 해결할게요. 아니면 지금 아버지께서 바로 회사로 돌아가셔도 좋아요. 대신에 그러면 앞으로 제가 회사에 출근할 일은 없을 겁니다.”그 말을 들은 송기명이 잠시 망설였다. 과연 송문수가 회사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 믿기지 않는 마음이 컸다.그동안 송문수는 가끔 회사에 나가긴 했지만 항상 성실하게 일하지는 않았다. 3일 동안 일을 했다고 치면 이틀은 놀았으니 송문수에게 회사 일을 맡기기는 좀 불안했다.그러나 이번 기회는 송문수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송문수가 회사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한다면 적어도 회사에 후계자가 없을까 봐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네가 이렇게 말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데?”송승우가 비웃으며 말했다.“너 회사에서 제대로 일해본 적도 없잖아. 무슨 자격으로 회사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거지? 벌써 30대 중반인데 아직도 철이 안 들어서야 되겠어?”“맞아. 나도 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거 알아.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고.”송문수가 이렇게 고백했다.“하지만 난 책임을 지고 싶어.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더 잘 치료받을 수 있도록 회사에 나가서 제대로 일하려는 거잖아.
“형은 진정한 친구가 없어서 그래. 모든 친구들이 형이 생각하는 대로 현실적일 거라고 생각하지?”송문수가 이렇게 반박했다.“내 친구들은 목숨을 걸고 함께할 수 있을 정도로 진정한 친구야. 만약 내가 진짜 어려움을 겪게 되면 뭘 해서든 도와줄 친구들이라고.”송승우는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 비웃으면서 말했다.“그냥 술친구들이겠지.”“나도 굳이 형한테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송문수는 송기명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아버지, 편히 쉬세요. 회사 일은 제가 지수랑 같이 해결할게요. 정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그때는 아버지께 말씀드릴 거고요.”송기명은 잠시 망설였다.그러나 송문수가 정말 회사로 출근한다는 생각에, 만약 육현경이 도와준다면 회사가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그럼 너랑 지수에게 맡길게.”송승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기명을 바라봤다.그는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을 결국 삼켜버렸다.하지만 송승우도 송기명이 회사로 출근하는 걸 원하지는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또 다른 사고라도 생기면 그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다만 송기명이 정말 송문수에게 회사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그를 믿는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었다.송승우는 입술을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잘 되길 바랄게.”송문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중환자실의 면회 시간이 끝나자 모두 병실을 떠났다. 허영지는 병원에 남아 송기명의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송승우는 급한 일이 있다며 서울로 갔고 송문수와 하지수는 회사로 가야 했다.그렇게 다들 병원에서 흩어졌다.차 안에서 송문수는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그냥 회사로 가는 것뿐이잖아. 회사 사람들이 널 잡아먹기라도 하겠어?”하지수가 이렇게 그를 위로했다.그녀는 송문수가 회사에 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회사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사 회의에도 거의
송문수는 말을 입밖에 내뱉은 이상 무조건 지키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도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그러는 사이 차는 송씨 그룹에 도착했다.송문수는 마음을 많이 다잡고 나서야 차에서 내렸다.두 사람은 함께 회사로 들어갔다.오가는 직원들 중 몇몇은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송 매니저님, 하 매니저님.”송문수는 이 상황이 약간 어색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일부러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굳혔다.무표정인 상태의 송문수는 약간 무서운 인상이었다. 게다가 키도 유난히 큰 편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가가기 힘들어 보였다.그래도 하지수는 천천히 고쳐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송문수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먼저 상황부터 파악하고 해결책을 생각해 보자. 방금 유 비서님한테 전화했으니까 곧 와서 상황을 보고해 주실 거야.”하지수가 말했다.“알겠어.”송문수는 의자에 앉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거울을 꺼내 자신의 눈 주위를 여러 번 확인했다.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그러자 유하준이 사무실로 들어왔다.“하 매니저님.”유하준은 먼저 하지수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송문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송 매니저님.”그를 본 송문수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유하준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하지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회사가 최근 새 프로젝트에 투자를 했습니다. 주로 신에너지 자동차의 연구개발이죠. 따로 브랜드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기술력이 좀 부족한 상황이었어요. 연구개발도 중단되었고요. 그래서 회사에서는 손해를 적게 보기 위해서 프로젝트를 서둘러 마무리하려 했습니다.”“해외에서 연구개발에 유명한 과학자들을 데려온 덕에 기술도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요. 신에너지 자동차가 시장에서 주목받을 때를 노려서 수익을 보려고 했지만 그 중 한 사람이 자격증을 위조했다는 것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우리 회사의 기술력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의문이 제기되었
이혼 시간까지 다 정하고 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 둘은 가만히 소파에 앉아있었다.그 숨 막힌 정적 속에서 한참을 앉아있던 송문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송문수는 하지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등을 돌려 집을 나서버렸다.서울을 떠날 때처럼 미련 없이 돌아서는 송문수에 하지수의 시야가 흐려졌다.하지수는 뿌얘진 시야에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담았다.이튿날, 하지수는 약속대로 송문수와의 이혼을 위해 법원으로 향했는데 송문수는 먼저 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는 하지수가 차에서 내리며 안에 앉아있는 또 다른 이와 뭐라고 말하는 걸 지켜보았다.그 안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송승우일 것이기에 송문수는 시선을 돌리며 라이터를 만지작거렸다.공공장소에서는 흡연이 금지된 상태였기에 그는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잠재우고 있는 것이었다.하지수는 대화를 마친 건지 종종걸음으로 송문수에게 다가가 말했다.“오래 기다렸어? 미안해.”“아니야, 내가 빨리 온 거야.”그녀가 제게 다가오자 송문수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했다.“들어가자.”“그래.”그렇게 둘은 법원으로 들어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송문수가 합의서를 건네며 말했다.“내가 알아서 작성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있으면 바로 말해줘, USB 챙겼으니까 여기서 고칠 수 있어.”사실 어젯밤 송문수가 파일을 보내와서 하지수는 이미 확인을 마친 상태였다.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으니 양육권 싸움도 없었고 이익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니 재산분할에도 큰 문제 없었다.그럼에도 제게 40억을 주겠다는 송문수를 하지수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어차피 큰돈도 아니라서 헤어지는 대가로 주겠다는 그의 말에 공감이 가 그저 받기로 했다.송문수한테는 정말 적은 돈이긴 하니까.그리고 돈으로서 둘 사이를 깔끔히 정리하는 걸 송문수도 원할 것 같아 하지수는 결국 그걸 받는 조건으로 서류에 사인을 한 것이다.이혼서류를 제출하자 직원이 한 달간의 이혼 숙려기간이 있다는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핸들을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임에도 송문수는 그걸 애써 무시하며 집으로 향했다.차가 멈추자 하지수는 송승우를 부축하며 차에서 내렸는데 송승우의 몸은 껌딱지처럼 하지수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그를 차에서 내려 휠체어에 앉히는 모든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마치 매일 하던 행동인 것 마냥, 그래서 몸에 배어버린 것마냥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하지수, 송문수, 송승우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영지와 송기명도 마침 도착해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보름 동안 돌아오지 못했던 집이 그리웠던 허영지와 송기명은 바로 방으로 돌아갔다.아무리 편한 호텔에서 자도 제집만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먼저 잠부터 청했다.그리고 송승우도 피곤해해서 하지수는 휠체어를 밀며 그를 방에 데려다주었다.순식간에 혼자 남아버린 송문수는 소파에 앉아 하지수를 기다렸다.원래는 송문수를 데려다주고 나가려 했는데 저에게 할 말이 있다는 하지수 때문에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솔직히 하지수가 언제 내려올지는 미지수였기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잠에서 깬 다음에 내려올 수도 있다는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그렇게 되면 하루를 꼬박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지만 송문수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2층에서 홀로 내려오는 하지수가 보이자 송문수의 심장박동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몸에 힘이 자꾸만 들어가며 뭐가 그렇게 긴장되는지 몸을 가만둘 수가 없었다.하지수가 자연스럽게 송문수의 옆에 자리 잡고 앉기는 했지만 둘 사이에는 아직도 어색한 기류가 감돌고 있었다.부부인데도 부부답지 않았고 가족임에도 가족 같지 않은 둘의 애매모호한 사이 때문이었다.이렇게 보니 제 인생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것 같아 송문수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나한테 할 말 있다며, 뭐야?”송문수는 더 이상의 희망을 품지 않기 위해, 하지수와 한 지붕 아래에서 얼굴을 맞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난 충동적인 적 없어요, 그리고...”하지수가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송승우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그럼 너 나랑 다시 사귈 수 있어?”터무니없는 그의 말에 하지수는 적잖이 당황했는데 송승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네가 내가 아닌 송문수를 좋아한다는 걸 난 못 믿겠어. 난 아직도 네가 그때 내가 말도 떠난 일로 화내는 것 같아. 그러니까 나랑 다시 사귀자. 6개월만 만나보고 그때도 네가 송문수를 선택한다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하지수는 자신이 송승우를 다시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완벽히 포기해야 끝나는 싸움이었기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버렸다.하지수는 이제 송승우와의 이 지긋지긋한 인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좋아요.”하지수가 긍정적인 답을 하자 자신만만했던 송승우의 얼굴에는 바로 미소가 번졌다.자신이 한쪽 다리를 잃긴 했지만 송승우는 그래도 하지수의 사랑을 다시 거머쥘 자신이 있었다.송승우는 단 한 번도 송문수를 제 상대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그리고 하지수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완벽한 저를 놔두고 멍청한 송문수를 선택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조건이 하나 더 있어.”“말해요.”“문수랑 이혼부터 해.”“네가 나랑 사귀겠다고 했잖아. 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게 싫으니까 당당하게 너랑 만나고 싶어.”송승우의 말에 하지수는 입술을 말아 물고 생각에 잠겼다.송문수와의 결혼 관계를 유지하며 송승우와 만나는 건 바람피우는 거랑 다를 바가 없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존중을 깨는 거라서 하지수도 썩 내키진 않았다.“알겠어요.”하지수가 이혼만 하면 저와 재결합을 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것이기에 송승우의 미소는 아까보다 더 선명해졌다.“대신 나도 조건이 있어요.”“뭐든 말만 해.”기분이 좋았던 송승우는 하지수가 제시한 조건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송승우는 하지수는 어차피 저 아니면 안 된다고 자신을 하고 있었다....일주일 뒤, 송승우가 퇴원하자 드디어 가족들이 전부
“네.”“회사 일을 이제는 문수가 다 책임지고 있으니까 빨리 가는 것도 맞지, 승우도 많이 좋아졌으니까 이제 매일 간호할 필요도 없잖아.”하지수를 직접 키워온 허영지는 그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한눈에 보아낼 수 있었다.그래서 빈말이지만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네.”그런 허영지의 노력을 보아낸 건지 하지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도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저 이제 중환자실에서도 나오고 의사 선생님도 별문제 없다고 했으니까 두 분은 먼저 돌아가서 쉬고 계세요. 며칠만 더 있으면 퇴원도 가능하다고 하잖아요.”“그래.”송승우의 상태가 많이 좋아져서 마음을 놓을 수도 있었고 또 지금 하지수와 단둘이 있고 싶어 하는 아들의 속내가 너무 눈에 훤해서 허영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우린 그럼 먼저 갈게. 지수야, 승우 잘 부탁해. 네가 고생이 많다.”말이야 친절하기 그지없지만 사실은 하지수의 발을 여기 묶어두는 거나 마찬가지였다.“네.”하지수 역시 제 시어머니의 의도를 알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하지수의 대답을 들은 허영지는 마음이 한결 놓여 송기명을 밀며 병실을 빠져나갔다.송기명은 등 떠밀려 나가면서도 끊임없이 한숨을 내쉬었다.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데에 대한 불만이 많아 보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허영지와 송기명이 나간 병실에는 하지수와 송승우 둘뿐이었다.“과일 좀 먹을래요?”“응, 고마워.”하지수가 먼저 그 어색한 정적을 깨며 묻자 송승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배를 집어 든 하지수는 열심히 깎기 시작했는데 송승우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한참 지나 껍질을 다 깎아낸 하지수는 배를 작게 썰어 송승우의 앞에 놓아주었다.“천천히 먹어요.”“넌 안 먹어?”“입맛 없어요.”송승우는 입맛 없다는 하지수에게 굳이 권하지 않고 천천히 과일을 먹기 시작했다.도도하고 자신만만하던 송승우의 모습을 다시 본 하지수는 송승우의 말대로 거기에 자신의 공
하지수는 송문수를 따라 송승우의 병실을 빠져나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앞을 향해 걷기만 했다.병원 입구에 도착하자 송문수를 기다리고 있는 차량이 보였다.그래도 작별인사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차 문도 열지 못하고 망설이던 송문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그냥 차에 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가 그를 불러세웠다.“문수 씨.”“장안시로 돌아가면 서울엔 다시 올 거야?”“안 올 것 같아 아마. 송승우도 많이 나았으니까 얼마 안 있으면 퇴원하겠지. 그럼 엄마 아빠가 송승우 집에 데려가서 보살피려 할 텐데 내가 뭐하러 여기까지 와 힘들게.”“그래서 나 혼자 여기 버려두겠다는 거구나.”하지수가 내뱉은 담담한 한마디에 송문수는 심장박동이 멎는 것만 같았다.숨을 내쉴 수조차도 없이 가슴이 아파와서 그는 이를 악문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여전히 침묵만 유지하는 송문수에 마지막 기대도 사라져버린 하지수는 이제 그만 그를 보내주기로 했다.송문수 말대로 자신은 그저 그가 마음을 다잡을 때 마침 옆에 있었던 여자일 뿐이니, 여기서 뭘 더 바라는 것도 욕심인 것 같았다.아무리 노력해봐도 송문수의 마음은 저를 향하지 않으니 하지수는 이제 그와의 사이를 끝내려 했다.“조심히 가.”이렇게라도 서로의 마음을 제대로 확인했으니 하지수는 그거면 된 것 같았다.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저 짤막한 한마디만 내뱉고 웃으며 돌아섰다.그 작은 몸통이 외로이 돌아서는 걸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왔다.정말 제가 하지수를 버린 것만 같아서, 또 하지수를 혼자만 남겨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려왔다.주먹을 꽉 말아쥔 채 온몸을 떨어대던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제 충동을 잠재우며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뎌 결국 차에 올라탔다.하지수에게는 송승우가 있었으니, 그녀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으니 이번에도 혼자일 리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미련 없이 돌아서기로 했다.한편 한참을
송승우가 병실을 옮기고 나니 가족들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엄마, 아빠 고생 많으셨어요. 저 걱정하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죠.”“너만 괜찮을 수 있다면 우린 뭐든 다 할 수 있어.”병원 침대에 누운 채 감성 어린 말을 하는 송승우를 향해 허영지는 감격에 겨워 말했다.허영지는 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정말 많이 변한 것 같았다.더 이상 나쁜 생각은 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씩씩하게 본인의 생활을 이어나가는 것 같았다.“제가 하루빨리 마음 다잡아서 이제 엄마 아빠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넌 한 번도 우릴 실망시킨 적이 없는 애야, 넌 계속 우리의 자랑이었어.”제 손을 잡은 채 저와 눈을 맞추며 말하는 엄마를 향해 송승우도 웃음을 지어 보였다.정말 눈물 나도록 다정한 모자지간이었다.송승우가 병실을 옮긴다는 소식에 병원으로 달려온 송문수도 병실 한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하지만 그들의 대화에는 끼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라이터만 만지작거리는 그는 어쩐지 제 가족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한편 허영지와 대화를 나누던 송승우는 하지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아직까지도 간호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물어가며 앞으로는 어떻게 재활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묻고 있었다.자신의 일에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하지수를 보며 송승우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마워, 지수야.”“아니에요, 당연한 일인데요 뭘.”“네 덕분에 내가 이렇게 빨리 마음 다잡을 수 있었어. 너 아니었으면 현실을 이렇게 빨리 받아들이진 못했을 거야.”“나 응원해줘서 정말 고마워.”하지수는 결국 그 감사 인사를 받아들인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다시 간호사를 보며 디테일하게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일들을 물었다.다들 제 자리를 잡은 듯한 모습에 송문수는 그만 병실을 나가려고 몸을 일으켰는데 그때 송기명이 그를 불러세웠다.“문수야, 어디 가?”“장안시로 돌아가야죠 이제.”담담히 말하는 송문수에 송기명은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지금
허영지의 말에 다들 그녀의 시선을 따라 눈을 돌렸고 그 시선 끝에는 하지수가 서 있었다.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지수야, 여긴 어떻게 왔어?”그런 하지수를 본 허영지는 다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다.하지수가 송문수의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들었다면 둘 사이에 감정이 있든 없든 마음이 아플 것은 당연지사였기에 허영지는 하지수가 안쓰러웠다.하지수는 굳어버린 고개를 힘겹게 돌리며 허영지를 향해 말했다.“일어나보니까 호텔에 아무도 없어서 왔어요.”눈 떠보니 사라져버린 송문수에 빠르게 병원으로 달려온 거지만 혹시나 송문수가 자신의 몸 상태를 걱정하며 오지 말라고 말릴까 봐 연락은 하지 않았었다.하지만 송문수가 또다시 허영지와 싸울까 봐 말도 없이 온 건데, 오자마자 하지수는 송문수가 내뱉는 차가운 말들을 모조리 들어버린 것이다.저를 물건 취급하며 송승우에게 넘겨주겠다는 송문수의 말에 하지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이제 좀 달라진 줄 알았는데, 송문수한테 저는 여전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란 걸 이렇게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모든 게 다 저 혼자만의 착각인 것 같아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아직도 많이 피곤해서 전 이만 호텔로 돌아가 볼게요.”그래서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병원을 나섰다.자신들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등을 돌리는 하지수를 보며 허영지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하지수가 친딸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같이 키워왔던 아이였기에 허영지는 그녀를 친딸 이상으로 아껴주었다.부모도 잃은 아이가 저렇게 충격받은 모습으로 자리를 뜨는 게 가슴이 아팠지만 허영지는 끝내 송문수 더러 하지수를 위로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허영지는 이번에도 이기적이게 송승우를 위해 송문수를 희생시킨 것이다.송승우가 나을 수만 있다면 송문수와 하지수 사이에는 아무 감정도 없다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하지만 송기명은 그런 아이들을 두고 볼 수만
송문수가 병실에서 나오자 허영지와 송기명이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맞아주었다.아까 분명 난리를 치던 송승우였는데 그걸 어떻게 진정시킨 건지가 궁금해서 나온 눈빛이었다.“걱정 마세요, 송승우 치료에도 협조 잘하고 더 이상 난동도 안 부릴 거에요. 그러니까 이제 마음 좀 놓으세요.”높낮이가 없는 송문수의 말에 허영지와 송기명은 아들의 감정을 도통 보아낼 수가 없었다.“뭐라고 했길래 승우가 네 말을 듣는 거야?”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발언권이 없던 송문수의 말을 그 자존심 강한 송승우가 고분고분 듣는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허영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수의 일은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았지만 제가 계속 입을 다물면 허영지가 제 말을 믿지 않을 걸 알기에 입술을 말아 물던 송문수는 할 수 없이 입을 열었다.“지수 그만 놓아주겠다고 했어요.”지수를 송승우에게 보내겠다는 뜻의 말을 들은 허영지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송문수, 넌 결혼이 애들 장난이야?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함부로 해! 지수한테는 물어봤어? 아니면 승우 속이고 치료받게 하려고 그런 거야? 속이는 거라면 언젠가는 진실을 알게 될 텐데 그때는 어쩌려고 그래! 넌 왜 항상 이렇게 생각이...”“그만 좀 해요!”또 송문수를 타박하는 허영지에 송기명은 참다못해 큰 소리를 내었다.“당신은 왜 문수 말은 안 믿어주는 거예요? 전에 당신이 나한테 우리가 문수한테는 좋은 부모가 돼주지 못했다고 했을 때 난 사실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어요. 그런데 이제야 알겠네, 정말 우리가 애한테 못 할 짓을 하긴 한 것 같아요. 어떻게 당신은 매번 문수를 나쁜 쪽으로만 생각해요?”“나는 그냥...”허영지는 아직 화가 가라앉은 것도 아니고 송기명의 말이 서럽기도 했지만 차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송승우와 송문수 사이에 마찰이 있을 때면 그녀는 늘 송승우를 감싸주곤 했다, 그리고 그게 이젠 본능으로 자리 잡아서 허영지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더 이상 허영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송기명은
송문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던 송승우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자 송문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지금 이러는 거 다 지수 얻으려고 그러는 거잖아.”더 이상 상황을 회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송문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아무런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 적나라하게 말하는 송문수에 송승우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렇게 앞뒤 재지 않는 게 또 송문수 답긴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지수를 얻으려는 게 아니고 네가 지수한테는 어울리는 짝이 아니라서 그러는 거야. 너랑 함께하는 지수만 불쌍하니까.”남의 가정을 파탄 내고 남의 아내를 빼앗으려 하면서도 송승우는 마치 자신이 옳다는 듯 당당하기만 했다.하지만 그 말에 송문수는 어떠한 반박도 하지 않았다.사실은 반박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이었다.한번 생각을 굳히면 절대 흔들리지 않는 송승우임을 알기에 그한테 저는 언제까지나 하지수에게 한참 못 미치는 인간일 뿐이었다.“난 지수한테 더 안정된 가정을 줄 수 있어. 너처럼 다른 여자들 끼고 다니는 게 아니라 지수만 아껴줄 거라고. 나는 어렸을 때부터 지수만 바라보면서 다른 여자한테는 손도 대지 않았어. 그런데 넌, 너무 더럽잖아.”송승우는 제 동생의 입장 따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송문수를 무참히 짓밟아버렸다.송승우의 말대로 예전의 송문수는 한없이 더러운 사람이었다.하지만 송문수는 자신이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하지수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믿었는데 송승우의 말을 들어보니 그 모든 게 저만의 어리석은 생각인 것 같았다.“지금은 지수 찾지 말고 몸 회복하는 데만 집중해. 너 다 낫고 나면 지수는 내가 알아서 놓아줄게.”그래서 송문수는 구질구질한 변명대신 확실한 약속을 했다.그 말을 들은 송승우는 의외라는 듯 송문수를 바라보았다.물론 예전의 송문수는 헤프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송승우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하지수를 향한 송문수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그 마음이 진심이라서 송승우에게는 더 위협적이게 느껴졌던 것이고 그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