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의 온도는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하지수는 머리가 어지럽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그녀는 다시 한번 적극적으로 송문수의 입술에 가까이 다가갔다.그저 더 많이 더 많이 원했다.그녀의 입술은 그의 입가에 닿았다.하지만 송문수가 갑자기 피하는 바람에 그녀는 입술을 맞추지 못했다.하지수의 눈빛에는 흐릿한 아지랑이가 어리었고 송문수의 입술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송문수의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였다.지금 그는 하지수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하지수는 지금 정말 너무 매혹적이었다.부드럽고 물처럼 유연한 느낌이었던 하지수는 잔뜩 긴장한 송문수가 마음을 내려놓기를 기다렸다.그런데 송문수는 하지수에게서 벗어나 옆에 앉았다. “문수 씨?”하지수가 그를 불렀다.고양이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하지수는 분명히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느꼈다.그야말로 방금은 모든 것이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갑자기 문수 씨가 물러난 이유가 뭘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가?’하지만 방금 그녀가 적극적으로 다가갔을 때 그는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속에 빠져들었던 것 같았다.‘그렇다면 왜 갑자기 관심을 잃었을까? 내가 매력 없어서 그럴까? 아니면 내가 키스를 잘 못하는 걸까?’방금 그녀가 송문수와 키스할 때 그녀는 송문수가 너무 격렬하게 나오는 바람에 키스를 받기만 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잘 몰랐다.그런데 하지수는 정말로 송문수와의 키스를 아주 좋아했다.그녀는 그의 입술을 원하고 송문수에게서 또 다른 세상을 느끼고 싶었다.“너 그냥 네 방으로 가.”송문수가 그의 욕망을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왜? 방금 느낌 괜찮지 않았어?”“갑자기 안 하고 싶어졌어.”송문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그런데 문수 씨 몸은...”“마음이 원하지 않아서 그래.”“왜?”하지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화가 나기보다는 그저 이유를 물어보려 했다.그녀는 단지
송문수는 그녀를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냥 말할게. 문수 씨가 이제 나를 원하지 않아도 괜찮아.”하지수는 마음속의 서러움을 삼키면서 말했다.아마도 송문수는 아직 뭔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녀는 송문수가 다른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한 천천히 그와 감정을 쌓아가며 다시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그냥 날 밀어내지 마.”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며 말했다.송문수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 했다.“우리 천천히 서로 받아들이면서 나아가면 안 될까?”하지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녀는 송문수가 정말로 거절할까봐 두려웠다.그는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의 감정을 신경 쓰지 않았던 사람이라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 행동하는 성격이었다.그녀는 마음속으로 많이 긴장했고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그녀도 왜 이렇게 송문수와 함께 있고 싶은지 잘 몰랐다.아마 몇 년 전, 송문수가 그녀 때문에 감옥에 갔던 일이 영향을 미친 걸지도 모른다.그 뒤로, 그녀는 송문수에 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보면 볼수록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이게 바로 좋아하는 느낌일까?’그녀가 송문수를 좋아한다고 인정하는 게 사실 쉽지 않았다. 어떻게 갑자기 한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 송문수는 별로 바뀌지 않았고 그녀에게 특별히 잘해주지도 않았다.하지만 어쩌면 그런 감정이 서서히 깊어져서 그녀의 마음속에 파고든 게 아닐까.“문수 씨가 말하지 않으면 난 그런 줄로 알게.”하지수가 입을 열었지만 송문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수는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럼 먼저 나갈게. 담배 좀 덜 피고. 푹 쉬어.”하지수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섰다.“지수야.” 송문수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그 순간 하지수의 가슴이 쿵 하고 뛰었다. 그녀는 불안한 마음에 그가 자신이 듣
다음 날 오전, 허영지가 전화를 걸어 송기명이 깨어났다고 전했다.하지수는 송문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송문수는 죽어도 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말이다.가기 싫은 이유 중 하나는 오늘 아침에 눈이 더 부은 데다가 까맣게 멍이 들어서 더웃겨 보였기 때문이었는데 둘째는 아마도 송승우를 만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었다.하지만 하지수 생각은 달랐다.‘어차피 가족이어서 얼굴도 자주 마주쳐야 하는데 평생 아무 소통도 없이 지낼 순 없잖아.’결국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갔다.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송기명은 매우 허약해 보였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더 쉬어야 한다고 말했다.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회사 일에 대해 걱정하며 허영지에게 비서를 불러달라고 했다.허영지는 물론 반대했다.“여보, 그냥 쉬세요. 의사 선생님께서도 몸이 너무 안 좋다고 하셨잖아요. 더 이상 회사 일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요.”“신경 쓰는 게 아니라 그냥 회사 정황이 궁금할 뿐이에요.”“신경 쓰는 게 아니라면 상황을 알 필요도 없잖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가요. 지금은 당신 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나는...”“아버지.”송승우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회사 일은 그냥 놔두세요. 일에 신경 쓰다가 또 무슨 일이 생기면 결국 아버지만 힘들게 돼요. 그러지 마세요.”“네가 뭘 알겠어. 내가 신경 쓰지 않으면 회사가 잘 돌아가겠어?”송기명은 약간 화를 내며 말했다.“회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요?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회사가 왜 안 돌아가겠어요? 아버지께서 어떤 말을 해도 저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치료를 최우선으로 생각하셨으면 좋겠어요.”“회사 일을 해결하지 못했는데 나더러 어떻게 안심하라는 거야?”“아무리 마음에 걸려도 그냥 안심하세요. 지금은 절대 아버지한테 일을 맡기지 않을 거예요.”송승우는 단호하게 말했다.“내가 안 하면 누가 한다는 거냐?”송기명도 감정이 격해졌다
하지만 하지수는 아직 어렸고 회사의 대부분 오래된 직원들, 특히 이사들 중에는 하지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녀가 회사 일을 주도하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곤란한 상황에 부닥치게 될 것이었다.오직 송기명이 돌아가야만 회사의 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상상만 해도 그는 지금 회사가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예측할 수 있었다.“제가 지수랑 같이 하겠습니다.”송문수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송기명, 허영지, 그리고 송승우 세 사람 모두 어리둥절해했다.하지수도 놀라서 송문수를 돌아보았다.“계속 저한테 회사로 출근하라고 하셨잖아요. 전 지금 회사로 돌아가서 회사 일을 관리하겠다고 아버지께 약속하는 겁니다.”송문수가 송기명에게 이렇게 말했다.“이 기회는 한 번 뿐이에요. 아버지께서는 침대에 누워서 잘 쉬세요. 저랑 지수가 돌아가서 회사 문제를 해결할게요. 아니면 지금 아버지께서 바로 회사로 돌아가셔도 좋아요. 대신에 그러면 앞으로 제가 회사에 출근할 일은 없을 겁니다.”그 말을 들은 송기명이 잠시 망설였다. 과연 송문수가 회사 일을 해결할 수 있을지 믿기지 않는 마음이 컸다.그동안 송문수는 가끔 회사에 나가긴 했지만 항상 성실하게 일하지는 않았다. 3일 동안 일을 했다고 치면 이틀은 놀았으니 송문수에게 회사 일을 맡기기는 좀 불안했다.그러나 이번 기회는 송문수가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송문수가 회사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한다면 적어도 회사에 후계자가 없을까 봐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 말이다.“네가 이렇게 말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는데?”송승우가 비웃으며 말했다.“너 회사에서 제대로 일해본 적도 없잖아. 무슨 자격으로 회사 문제를 해결한다고 하는 거지? 벌써 30대 중반인데 아직도 철이 안 들어서야 되겠어?”“맞아. 나도 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거 알아.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고.”송문수가 이렇게 고백했다.“하지만 난 책임을 지고 싶어.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더 잘 치료받을 수 있도록 회사에 나가서 제대로 일하려는 거잖아.
“형은 진정한 친구가 없어서 그래. 모든 친구들이 형이 생각하는 대로 현실적일 거라고 생각하지?”송문수가 이렇게 반박했다.“내 친구들은 목숨을 걸고 함께할 수 있을 정도로 진정한 친구야. 만약 내가 진짜 어려움을 겪게 되면 뭘 해서든 도와줄 친구들이라고.”송승우는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 비웃으면서 말했다.“그냥 술친구들이겠지.”“나도 굳이 형한테 설명할 필요는 없겠네...”송문수는 송기명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아버지, 편히 쉬세요. 회사 일은 제가 지수랑 같이 해결할게요. 정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생기면 그때는 아버지께 말씀드릴 거고요.”송기명은 잠시 망설였다.그러나 송문수가 정말 회사로 출근한다는 생각에, 만약 육현경이 도와준다면 회사가 위기를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그럼 너랑 지수에게 맡길게.”송승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기명을 바라봤다.그는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을 결국 삼켜버렸다.하지만 송승우도 송기명이 회사로 출근하는 걸 원하지는 않았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약 또 다른 사고라도 생기면 그땐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다만 송기명이 정말 송문수에게 회사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그를 믿는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이었다.송승우는 입술을 깨물고는 입을 열었다.“잘 되길 바랄게.”송문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중환자실의 면회 시간이 끝나자 모두 병실을 떠났다. 허영지는 병원에 남아 송기명의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송승우는 급한 일이 있다며 서울로 갔고 송문수와 하지수는 회사로 가야 했다.그렇게 다들 병원에서 흩어졌다.차 안에서 송문수는 계속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그냥 회사로 가는 것뿐이잖아. 회사 사람들이 널 잡아먹기라도 하겠어?”하지수가 이렇게 그를 위로했다.그녀는 송문수가 회사에 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회사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사 회의에도 거의
송문수는 말을 입밖에 내뱉은 이상 무조건 지키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도 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그러는 사이 차는 송씨 그룹에 도착했다.송문수는 마음을 많이 다잡고 나서야 차에서 내렸다.두 사람은 함께 회사로 들어갔다.오가는 직원들 중 몇몇은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송 매니저님, 하 매니저님.”송문수는 이 상황이 약간 어색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에 일부러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굳혔다.무표정인 상태의 송문수는 약간 무서운 인상이었다. 게다가 키도 유난히 큰 편이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다가가기 힘들어 보였다.그래도 하지수는 천천히 고쳐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송문수를 따라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먼저 상황부터 파악하고 해결책을 생각해 보자. 방금 유 비서님한테 전화했으니까 곧 와서 상황을 보고해 주실 거야.”하지수가 말했다.“알겠어.”송문수는 의자에 앉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거울을 꺼내 자신의 눈 주위를 여러 번 확인했다.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그러자 유하준이 사무실로 들어왔다.“하 매니저님.”유하준은 먼저 하지수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송문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송 매니저님.”그를 본 송문수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유하준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하지수에게 상황을 보고했다.“회사가 최근 새 프로젝트에 투자를 했습니다. 주로 신에너지 자동차의 연구개발이죠. 따로 브랜드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기술력이 좀 부족한 상황이었어요. 연구개발도 중단되었고요. 그래서 회사에서는 손해를 적게 보기 위해서 프로젝트를 서둘러 마무리하려 했습니다.”“해외에서 연구개발에 유명한 과학자들을 데려온 덕에 기술도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었어요. 신에너지 자동차가 시장에서 주목받을 때를 노려서 수익을 보려고 했지만 그 중 한 사람이 자격증을 위조했다는 것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우리 회사의 기술력에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의문이 제기되었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송문수가 입을 열었다.유하준은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송문수를 바라봤다.그는 송문수가 회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순조롭게 잘 흘러가던 때에도 회사에 신경 쓰지 않던 사람이었기에 지금 같이 엉망인 회사는 더더욱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유하준은 또 송문수가 회사를 관리할 능력도 없다고 생각했다.“구체적인 상황은 다 파악했습니다.”하지수가 말했다.“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우리가 방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비서님은 본인 일에 집중해 주셨으면 해요.”하지수는 유하준이 송문수를 무시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믿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빨리 그를 내보내려고 했다.그런 유하준의 태도가 송문수를 자극해서 그가 화를 낼까 걱정했던 것이다.송문수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고 조금만 기분이 나쁘면 화를 내버리는 성격이었기에 지금은 그를 최대한 달래는 것이 중요했다.유하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사무실에서 나갔다.“문수 씨, 비서님 말에 의하면 지금 회사의 가장 큰 문제는 두 가지 있어. 투자 문제랑 사람들이 핵심 기술에 대한 불신인 것 같아.”하지수가 말했다.“현경 씨에게 물어봐. 지금 우리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응.”송문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지금 그는 비즈니스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육현경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었다.“맞다, 현경이 신혼여행 중 아니었나?”통화 버튼을 누르다 말고 송문수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음... 그랬던 것 같은데?”“상관없어. 현경이가 신혼여행 끝내고 돌아오는 걸 기다리는 사이에 회사가 망하게 생겼는데...”송문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신호음이 오랫동안 울리더니 전화는 겨우 연결되었다. 피곤한 듯한 육현경의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송문수는 시간을 보며 말했다. 오전 10시 30분이었다.“현경아, 저녁에 얼마나 달렸으면 지금 이
송문수는 지금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육현경은 흘러가는 1분 1초마저도 아까웠다.그는 몸을 돌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소이연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전화를 거는 소리 때문에 잠에서 깼는지 약간 불편해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그는 다시 침대에 누워서 소이연을 품에 안았다.그리고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손은 그녀의 허리 주변을 맴돌았다.“안 돼.”소이연은 몸을 비틀며 말했다. 그녀는 아직 잠이 덜 깬 듯했는데도 불고하고 육현경이 뭘 하려는지 알아차렸다.“나 너무 피곤해...”그녀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그 말을 들은 육현경은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넌 편하게 즐기면 돼.”“어떻게 즐기라는 거야...”소이연은 육현경을 밀쳐냈다.“매번 그렇게 말하고 자제도 못하면서.”“어제 너무 소리를 질렀나? 목 나갔네.”육현경이 말했다.그 말을 들은 소이연은 얼굴이 빨개졌다.섬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부끄러운 짓만 잔뜩 했기 때문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민망했다.“또 못 자게 하면 나 장안시로 돌아갈 거야...”그 말에 육현경은 바로 조용해졌다.그는 아직 다 즐기지 못했지만 며칠동안 소이연이 너무 힘들었으니 일단 잘 자게 해주기로 결심했다.소이연이 정신을 차리면 그때는 육현경에게도 많은 기회가 올 것이니 말이다.한편, 송씨 그룹.전화를 끊은 송문수는 하지수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방금 현경이가 말했어. 먼저 회사 내부부터 안정시켜야 한다고 말이야. 맞는 말이라고 생각해. 방금 비서님도 말했잖아. 지금 회장님이 안 계시는 탓에 모든 것이 엉망이라 회사 내부를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그래서 지금 회의를 소집할까 해.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임시로 회장 자리를 맡고 그룹의 모든 일을 처리할 것이라고 분명히 할 것을 제안하지.”“나 혼자서 괜찮을까?”송문수는 자신에게 별로 자신이 없었다.“네가 잘 해보겠다고 약속했잖아. 이건 첫걸음일 뿐이야.”하지수가 단호하게 말했다.송문수는 입
그리고는 간호사 하나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소이연 씨 보호자 계세요?”“네!”“아기 나왔습니다. 3.15킬로...”“산모는요?”간호사의 말에 우렁차게 대답한 육현경은 아이는 신경도 안 쓰고 소이연의 상태부터 물었다.“산모분은 아주 건강하십니다. 지금 선생님께서 상처 처리하고 계시니까 곧 나오실 겁니다.”“아빠 맞으시죠? 아이 한 번 안아보실래요?”그제야 안도한 육현경이 아이를 안아 들자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어머, 어쩜 이렇게 하얗지? 내가 본 아기들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지금 네 아들은 못생겼다는 소리야?”“솔직히 말하면 좀 못생기긴 했어.”하도경의 시비에 예수진이 너무 솔직히 답하자 계지원이 그게 사실인 걸 알면서도 자기 아들 외모를 저렇게 평가하는 게 썩 기분 좋지는 않았는지 헛기침을 해댔다.“나도 안아볼래.”예수진의 말에 육현경은 바로 아이를 넘겨주었다.“우리 공주님, 너무 귀엽다. 왜 하필 혈연관계인 거야!”피가 섞인 남매라서 자기 아들과 맺어줄 수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예수진에 하지수도 궁금해서 다가가 보았다.“나도 봐봐.”가까이에서 보니 정말 떡잎부터 남다른 예쁜 아이였다.장차 아주 예쁘게 클 것 같아서 하지수는 아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딸이야?”“딱 보면 딸이지, 이 얼굴이 남자일 리는 없잖아.”간호사가 대답하려던 그때 분만실 분이 또 한 번 열리고 소이연이 휠체어를 타고 나오자 육현경은 다급히 달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고생했어.”“이제 돌아가서 쉬자. 우리 이제 아이는 그만 가지자.”소이연이 고생하는 게 마음 아팠던 육현경은 잔뜩 굳은 얼굴로 간호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 병실로 향했다.친구들도 그런 육현경을 따라 병실로 향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걷던 하지수가 휑한 옆자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송문수가 아직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진 하지수가 그를 바라보자 송문수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뭐라고요?!”놀란 예수진이 언성을 높이자 육현경도 표정을 굳히고 소이연을 바라보았다.늘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하던 육현경은 이번에도 다들 벙쪄있는 틈을 타 소이연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예수진도 그 뒤를 따라 나가려 하자 계지원이 그녀를 잡아 세웠다.“수진아, 오늘 이 자리 우리가 만든 거야.”“그래도 갈 거야. 당신은 엄마랑 현경 오빠 어머님한테 손님들 좀 부탁한다고 전해줘. 난 언니한테 가봐야겠어.”예수진을 말릴 수 없다고 생각한 계지원도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가자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감을 눈치챈 송문수와 하지수도 아쉬운 듯 서로에게서 떨어졌다.“키스 다 했으면 빨리 병원 가. 이연 씨 출산한대.”출산이라는 말에 하지수도 다급히 뒤 따르려 하자 송문수가 그녀를 잡으며 말했다.“천천히 가. 그래도 안 늦어.”그렇게 몇 분도 안 된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파티장을 빠져나갔다.예수진이 둘째를 위해 연 백일잔치는 사라진 엄마 아빠 때문에 아이 혼자 남겨진 채로 끝이 나버렸다.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수가 터진 소이연이 분만실로 옮겨진 뒤였다.상황이 많이 급박한지 늘 침착함을 유지하던 육현경조차도 많이 초조해 보였다.아까부터 입구에서 서성이는 육현경을 보다 못한 예수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오빠,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 다들 긴장하고 있는데 오빠 때문에 더 진정할 수가 없잖아.”직설적인 그녀의 말에 육현경이 예수진을 보자 계지원이 다급히 나서며 분위기를 풀었다.“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수진이도 그때 오래 걸렸잖아. 낳으면 된 거지 뭐.”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계지원도 육현경 못지않게 초조해했었다.당장이라도 분만실로 뛰어 들어가 예수진 대신 아이를 낳아주고 싶어 했었다.그런데 그때, 분만실에서 소이연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흘러나왔다.주먹을 쥐고 있던 육현경의 손이 점점 하얗게 질려감에 따라 지켜보던 친구들의 긴장감도 고조되고 있었다.다들 긴장하고 있는 와중에 송문수가 갑자기 하지수의 손
“임신 때문에 살쪄서 그런 거야. 문수 씨 탓 아니야.”하지수가 당황한 송문수를 달래주자 그는 벙찐 표정으로 물었다.“그럼 어떡하지?”“살 빼고 나서 다시 끼지 뭐.”“그래.”하지수에게 반지를 직접 끼워주는 건 송문수가 꿈에서도 그리던 장면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이유로 못하게 되는 그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하지수가 자신과 결혼만 해준다면 앞으로의 날은 길 것이기에 송문수는 그만 몸을 일으켰다.그런데 그가 일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소리높이 외치기 시작했다.“키스해! 키스해!”갑작스러운 호응에 하지수의 얼굴이 빨개지자 송문수는 그녀가 난처해지지 않게 당분간은 자신의 욕구를 억누르기로 했다.사실 그날 밤, 하지수와의 잠자리는 송문수에게 많은 미련을 남겨주었다.잠을 자다가도 쉴 새 없이 흥분해서 밤에 속옷을 몇 번이나 씻기도 했었다.그렇게 그녀를 원했어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송문수는 하지수의 손을 잡고 내려가려 했는데 그 순간, 하지수의 입술이 송문수에게 닿아왔다.그녀가 먼저 한 입맞춤은 송문수의 심장을 뒤흔들기 충분했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입맞춤을 당한 송문수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그때 하도경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뽀뽀 한 번에 바보 된 거야?”“...”그 말에 욱한 송문수였지만 여자친구도 없는 친구를 위해 한번은 참아주기로 했다.“신경 쓰지 마. 우리 내려갈...”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또다시 입을 맞춰왔다.하지만 이번에는 아까처럼 닿았다가 금방 떨어지는 입맞춤이 아니라 오래도록 이어지는 키스였다.작은 그녀의 혀가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송문수의 몸은 그대로 굳어버렸고 그의 심장박동 또한 정직하게 빨라졌다.정말 자신을 죽이려 드는 하지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송문수는 하지수의 뒤통수를 손으로 잡고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임신을 해도 작기만 한 체구의 하지수는 금방 송문수에게 주동권을 뺏겨버렸다.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주기라도 하듯 무대 위로 장미꽃잎이 흩날리고
다들 숨을 죽이고 송문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의 눈엔 눈물이 가득해서 눈을 조금만 깜빡여도 쏟아질 정도였지만 그녀 역시 온 힘을 다해 참아내고 있었다.송문수는 그 정적 속에서 입술을 말아 물며 많은 고민을 거쳐 마침내 입을 열었다.“결혼하자.”그 대답이 들리기까지의 몇 분이 하객들에게는 한 세기만큼 길게 느껴졌다.송문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지수도 기쁨의 눈물을 왈칵 쏟아냈고 송문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소리높이 외쳤다.“하지수, 결혼하자. 너랑 결혼하는 게 내 평생의 소원이었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네가 지금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라 해도 넌 이제 평생 내 여자야. 다시는 너 다른 남자한테 안 보내. 아주 박력 넘치는 남자가 될 거라고.”“난 후회 안 해.”송문수와의 결혼을 하지수가 후회할 리는 없었다.그때 예수진이 무대 위로 올라가자 송문수는 그제야 이 자리의 주인공이 예수진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급히 하지수를 데리고 내려가려 했다.그런데 그때 예수진이 빨간 보석함 하나를 송문수에게 보여주었다.“이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는 알지?”그 안에 들어있는 건 송문수가 하지수를 위해 준비한 프러포즈 반지였다.익숙한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 사실을 기억해낸 송문수였다.송문수는 하지수에게 가장 특별한 반지를 만들어주기 위해 세계적인 디자이너까지 초빙하며 큰 공을 들였었다.“이제 네가 가져.”예수진이 그것을 송문수에게 건네주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고는 천천히 보석함을 열어보았다.반짝이는 5캐럿의 다이아몬드가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반짝이는 반지를 집어 든 송문수는 하지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자신이 상상해왔던 화면이 눈 앞에 펼쳐지자 하지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는데 송문수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채로 목멘 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지수야.”송문수의 부름에 하지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예전에는 내가 진짜 나쁜 놈이었어. 맹세할게, 앞으로는 진짜 좋
그런데 하지수가 이런 마음을 전하기도 전에 송문수가 그 먼 타지로 떠나버린 것이다.그래도, 송문수가 정말 자신을 싫어한다 해도, 정말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 한다 해도 송승우와 함께하지 않겠다는 하지수의 마음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다.물론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송문수에 잠깐 실망도 했었다.그러면서 송문수에게 자신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예수진과 소이연이 저 영상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송문수가 준비해온 모든 것들을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하지수는 영원히 송문수가 오래도록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눈에 눈물을 가득 매단 하지수를 보던 송문수는 가슴이 아파와 손을 뻗으려 했지만 다시 움츠러들었다.지금 송문수는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 지 몰랐다.혹여나 자신의 선택이 하지수에게 부담으로 다가갈까 봐, 그녀의 모습을 보며 송문수는 괴로워하고 있었다.너무 괴로워서 생긴 착각인지, 송문수는 하지수도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하지수 배 속의 아이였다.물론 송승우의 아이라 해도 송문수는 상관없었지만 하지수도 개의치 않을 수 있을까가 그의 의문이었다.“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네가 나한테 잘해줘서가 아니고, 네가 오래전부터 날 좋아해서도 아니고, 날 위해 많은 걸 준비해줘서도 아니라 그냥 내가 좋아서. 그래서 결혼하고 싶어. 다른 거랑은 아무 상관없어.”하지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송문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네가 좋아하는 건 송승우잖아.”“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난 송승우 안 좋아해.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끝난 사이였어. 말했잖아, 그때 좋아한다고 느꼈던 감정은 그냥 습관 같은 거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미안해서가 아니라 그냥 네가 좋아!”매번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믿질 못하는 송문수 때문에 하지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물론 송문수가 자신을 믿지 못해서 화가 난 게 아니라 송문수가 본인한테 자신감이 너무 없는 것 같아
파티장 안의 모든 불빛은 송문수와 하지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무대 중앙에 선 하지수는 송문수를 바라보고 있었고 송문수도 사람들 틈에서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지금 하지수는 송문수가 그냥 가버릴까 봐, 그게 제일 무서웠다.하지수는 자신이 이런 용기를 내는 것도 마지막일 것 같았다.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조용한 그 공간에서 송문수가 갑자기 무대로 향해 걸어갔다.한발 한발, 무거운 발걸음이었지만 그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확실했다.그래서 하지수의 심장박동도 빨라졌다.더 이상 컨트롤이 되지 않을 정도로.모두들 숨죽인 채 송문수와 하지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마음을 졸이는 건 예수진과 소이연이었다.겁이 많은 송문수가 도망이라도 갈까 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송문수가 책임감은 있어서 하지수를 혼자 남겨두진 않았다.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송문수가 하지수에게로 다가섰고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송문수의 눈은 빛나고 있었고 울대는 잔잔히 떨리고 있었다.심경에 크나큰 변화가 일었지만 애써 본인을 진정시키려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지수야, 이건 마음에 담아두지 마.”그러다 갑자기 내뱉은 말에 하지수는 송문수를 빤히 쳐다보았다.“그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찍었는지도 모르겠어.”송문수는 이번에도 장난인 척 너스레를 떨며 상황을 넘기려 했다.“너도 알잖아 나 이상한 거. 충동적으로 무슨 짓이든 하는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마.”말을 마친 송문수가 직원을 찾아가 영상을 지우려 하자 하지수가 입을 열었다.“난 이미 진지하게 받아들였어.”그 말에 발이 잡힌 송문수는 빨라지는 심장박동을 애써 늦추며 말했다.“미안해.”송문수의 갈등과 무력함을 보아낸 하지수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차올랐다.“너 헷갈리게 해서 미안해. 만약 네가 신경 쓰인다면... 앞으로 네 앞에 안 나타날게. 너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힘들어하지 마. 그럴 가치 없
오늘 온 손님들은 하나같이 외향형인지 호응도 아주 잘해줬다.“네! 궁금해요!”“한 여자를 위해선데요.”“누구예요?”“바로 하지수입니다.”영상 속의 자신이 한 자 한 자 내뱉는 말들을 듣던 송문수는 그제야 이게 자신의 프러포즈 영상이었음을 깨달았다.처음에는 이게 어떻게 여기 있는지 당황스러웠지만 항상 일 처리에 미흡한 예수진이 이번에도 실수한 거라 생각해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영상을 멈추려 했다.그런데 그가 발을 내디디자마자 육현경과 하도경이 그 앞을 막아섰다.그리고 영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하지수는 제 아내입니다. 결혼한 지 몇 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제대로 사랑해준 적이 없었죠. 사실 저는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랑할 용기가 없었던 겁니다. 제가 너무 비겁해서 그 사람 앞에만 서면 저 자신이 쓸모없어지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늘 유치한 방법으로 그 사람에게 상처만 줬어요.”영상 속 송문수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미안해 지수야.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어. 괜한 질투로 널 몇 년 간 힘들게 한 걸. 매일 밤 널 안고 자고 싶었는데도 난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 한마디 못했어. 그래서 내 인생이 좀 덜 재밌었던 것 같아. 너라는 복지가 부족했잖아.”감동하며 영상을 보고 있던 사람들은 마지막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참 울지도 웃지도 못하게 하는 고백 영상이었다.“사랑해, 지수야.”뒤이어 마침내 사랑한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때 송문수의 눈은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널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었어. 그런데 네가 좋아하는 게 내가 아니니까 점점 비참해지더라. 그래서 네가 싫어하는 방법으로 네 시선을 끌려고 했어. 그때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너무 멍청한 것 같더라.”“하지만 이젠 아니야.”“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못 돼도 세상에서 너한테 가장 잘해주는 남자는 될 수 있어.”“더 이상 너한테 성질도 안 내고 부려먹지도 않을게. 괜한 질투 때문에 너 상처받게 하지도 않아. 우리 집은 이제 너한테 맡길 거야. 돈도
파티장에 들어와 보니 계지원과 예수진이 아들딸과 함께 와준 손님들에게 인사를 해주고 있었다.인사를 마친 예수진은 흥분된 목소리로 하지수를 불렀다.“이번에는 제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우리 아들의 영원한 이모일 하지수 씨를 모셔보겠습니다.”파티장 한구석에 선 송문수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하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까는 제대로 볼 엄두가 안 나서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녀의 배가 꽤나 불러온 것 같았다.옷을 입어도 다 가려지지 않는 게 이미 임신 몇 개월은 된 것 같았다.정말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는지 이렇게 빨리 임신한 하지수가 송문수는 조금은 원망스러웠다.이어서 마이크를 잡은 하지수는 누군가를 찾는 듯 무대 아래를 훑어보았다.한참이 지나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에 다급히 눈을 피하던 송문수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하지수의 시선은 이미 사라져있었다.그에 송문수는 그녀가 찾던 건 아마 송승우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그런데 끝까지 모습을 비추지 않는 송승우 때문에 그저 시선을 거둔 것 같았다.“우선은 수진이 아들 이모가 될 수 있어서 너무 영광스럽고요.”“수진이가 제 배 속에 있는 아이가 딸이면 꼭 사돈을 맺자고 그러더라고요.”“저도 우리 조카 귀여워서 너무 사랑하거든요.”“하지만 사돈은 저 혼자 맺는 게 아니잖아요. 애 아빠 입장도 있고 하니까요.”그러자 예수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왔다.“그럼 얼른 애 아빠부터 불러서 오늘 사돈 한번 맺자!”“아이 아빠는...”그녀의 말에 담담히 웃던 하지수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마른 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보던 송문수는 정말 송승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가장 사랑하는 여자를 내어줬는데도 책임을 다하지 않고 이런 날에 하지수를 혼자 이곳에 보내고 또 혼자 무대 위에 올리는 게 어떻게 남편이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인가 싶었다.“수진아, 내가 무대 좀 써도 돼?”“당연하지, 오늘 이 자리는 널 위한 거야.”“아, 아니다. 내 미래의 며느리를 위한 거지.”예수진의 한마디에
하지수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물리자 송문수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당연하지.”“진짜야?”“내가 왜 널 속이겠어?”“그런데 왜 안 데려왔어?”“이번엔 시간이 별로 없어서 괜히 고생만 할까 봐 안 데려왔어.”“나중에 기회 되면 데리고 올 거야.”“예뻐?”“내가 안 예쁜 여자 사귀는 거 봤어? 외국 여자들은 몸매도 좋아. 원래 S라인이 내 취향이잖아.”“사진 있어?”하지만 저 질문에는 송문수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몇 초 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다시 능청스레 대답했다.“있지.”“내가 봐도 돼?”“왜? 뭐 심사라도 해주게?”“아니, 그냥 궁금해서. 네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여자는 어떻게 생겼는지.”“보면 너 상처받을까 봐 안 보여줄 거야.”“괜찮아.”송문수도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려 했지만 하지수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다음에 직접 데려와서 보여줄게.”“지금 보고 싶어.”“카메라는 잘 안 받아서 실물보다 별로야.”“왜 안 보여주는 거야? 설마 없는 거야?”“설마 내가 너 못 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난 원래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절대 너한테 매달리지 않을 거야.”송문수가 확신에 찬 말을 하자 하지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매달린 적이 있긴 해?”그런 하지수의 모습을 보니 또 가슴이 아파왔지만 송문수는 꾹 참기로 했다.송승우의 아이를 가진 하지수는 이미 자신에게서 너무 멀어져 있으니까.“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하지수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멀어져가는 송문수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한편 화장실로 들어온 송문수는 물을 틀어놓고 손을 몇 번이니 씻어댔다.더 이상 손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아까부터 한 동작만 반복하고 있었다.“더 씻으면 손 터져.”그 모습을 본 하도경이 직접 물을 꺼주자 송문수는 넋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도경이 건넨 휴지를 받아 손을 닦아냈다.“고마워.”“이게 진짜 뭐 하는 짓이냐. 그렇게 좋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