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헌의 눈가에 드리워진 미소는 더 선명해졌다.그는 반지를 꺼내 소이연의 약지에 조심스럽게 끼워주었다. 찬란한 햇빛이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비쳐 그녀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심문헌은 몸을 일으켰다.막 일어서는 순간, 바닥의 꽃잎이 갑자기 큰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다.같은 시각 하늘에서도 꽃잎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두 사람은 완전히 꽃잎에 휩싸여 로맨틱한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소이연은 눈앞의 장면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이연 씨, 당신과 키스해도 되나요?”심문헌이 물었다.소이연은 미소를 지었다.‘완전 바보잖아.’그녀는 심문헌의 목을 껴안고 주동적으로 그의 입술을 맞추었다.심문헌은 멈칫했다.그는 눈에 띄게 긴장했고, 몸이 바르르 떨릴 정도로 긴장했다.그리고 그녀의 입맞춤에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두 사람은 그저 입술을 서로 맞붙이고 있었다.천우진은 멀지 않은 곳에서 키스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들의 머리카락은 흩날렸고 꽃잎이 온 하늘을 휘날렸다.너무 아름다운 화면이라 눈길을 쉽게 뗄 수 없었다.천우진은 결국 몸을 돌려 떠나갔다.행복한 시간을 전부 두 사람에게 남겨주고, 그는 그곳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다음날.장안시.예수진은 슬그머니 계지원의 뒤를 따랐다.죄책감이 조금 들긴 했다.그러나 소이연이 따라가 봐도 된다고 말했기에 그녀는 금방 부담감을 내려놓았다.그녀는 계지원을 따라 병원에 도착했다.‘이상해. 지원 씨가 왜 병원에 온 거지? 큰 병이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계지원에 대한 의심은 순간 모두 걱정으로 변했다.그녀는 계지원에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자기는 어떻게 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예수진은 겁에 잔뜩 질려 더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그녀는 그저 계지원이 휠체어를 타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구석에 숨어서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지켜보면서 소이연에 전화를 걸었다.이 시각 소이연은 심문헌과 함께 짐을 정리하고 있었
“근데 저 엄두가 안 나요.”예수진은 뒷걸음쳤다.“그럼, 지원 씨를 믿어봐요.”“그것도 못 하겠어요.”“...”소이연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그럼, 용기를 내서 따라가 봐요. 수진 씨가 도망친다고 해서 그 일들이 안 벌어지는 것도 아니잖아요.”예수진은 입술을 깨물면서 소이연의 말에 설득당했다.“맞다.”소이연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다.“네?”“문헌 씨가 저에게 청혼했어요.”“정말이에요?”예수진은 조금 격동했다.“언니가 이번에 서울에 돌아갔을 때 청혼했나 보네요.”“네.”“너무 잘됐어요.”예수진이 축하의 말을 전했다.“결혼식은 언제 올릴 거예요?”“아마 몇 달은 걸릴 것 같아요. 먼저 낙성에 가서 심씨 가문과 부모님을 만나 뵈어야 하고, 그다음에 웨딩 사진도 찍고, 결혼식장도 안배해야 하니까 적어도 이삼 개월은 걸릴 것 같아요.”“저 신부 들러리 하고 싶어요.”예수진은 적극적으로 말하고 나서야 문뜩 생각났다.“아참. 저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으니까 신부 들러리를 할 수 없네요.”“저는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수진 씨와 지수 씨가 이제 저의 들러리가 되어 주세요.”“그래도 돼요?”“저의 결혼식인데 제가 결정하는 거죠.”“문헌 씨도 신경 안 쓰나요?”“저도 괜찮아요.”옆에 있던 심문헌은 예수진의 통화 내용을 듣고 재빨리 대답했다.“저는 이연 씨가 저와 결혼해 준다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어요. 더군다나 이렇게 작은 요구인데 당연히 들어드릴 수 있죠.”“통화만으로도 두 사람이 꿀 떨어지는 게 보이네요.”예수진이 두 사람을 놀리자, 소이연이 말했다.“수진 씨, 볼 일 있는 거 까먹은 거 아니죠?”예수진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아차차. 그럼, 나중에 다시 통화해요.”예수진은 다급하게 전화를 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조금 전에 엘리베이터는 15층에서 멈췄다.15층, 무슨 병동이지?예수진은 15층을 누른 후 안절부절못한 마음을 안고 목적지에 도착했다.15층은 유난히 조용했다.특급 VIP 병동인
그 순간 계지원은 심지어 예수진을 보지 못했다.예수진도 계지원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그저 흰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병실로 우르르 달려 들어가는 것만 보았다.곧이어 그 병실의 침대에 누워있던 남자는 바로 실려 나갔다.예수진은 심지어 그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지도 못한 채 계지원이 급하게 휠체어를 밀고 의사와 간호사를 따라간 것을 보았다.예수진은 이를 악물고 그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환자는 응급실에 실려 들어갔다.계지원은 응급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속이 타들어 갈 정도로 초조해 보였다.“계지원.”조용한 복도에서 예수진은 더는 참지 못하고 말을 꺼냈다.계지원은 매우 놀란 듯했다.한 가지 일에 너무 집중해서 다른 사물에 관심 두지 않다가 갑자기 방해되었을 때 나타나는 놀란 상태였다.그는 고개를 돌려 예수진을 보더니 눈 밑의 놀라움이 더 커졌다.예수진이 이곳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예수진은 계지원의 얼굴만 봐도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주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도대체 누구길래 지원 씨가 이렇게까지 걱정하는 걸까? 체형으로 볼 때 여자는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럼... 누구길래 지원 씨가 이토록 신경 쓰는 거지?’“수진아, 네가 왜 여기에 있어?”계지원이 불쑥 물었다.“이 말은 내가 당신에게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예수진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요 한두 달 동안 당신은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왔잖아. 뭐 하러 갔냐고 물어보면 우물쭈물 제대로 얘기해 주지도 않고. 오늘 이렇게 병원까지 따라오지 않았더라면 언제까지 날 속일 생각이었는데?”계지원은 말문이 막혔다. 안 그래도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들키니까 더 할 말이 없어졌다.“안에 실려 들어간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데?”예수진이 물었다.계지원은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그는 말하지 않겠다고 육현경과 약속했었다.그리고 이제야 왜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이해했다.지금 육현경의 상태로 사실을 말했다가는 오히려 문제를 일으킬 수
“그러면 지금 들여다볼 수 없는 건가요?”“당분간은 보지 않는 게 좋습니다. 접촉하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 저희는 환자분을 바로 무균 병실로 옮길 겁니다.”의사가 조언을 건넸다.“네. 그럼 무균 병실에서 얼마 동안 있어야 하나요?”“3~5일 정도 있어야 할 겁니다. 상처가 거의 아물면 일반 병실로 옮겨도 됩니다.”“이번이 마지막 수술이 맞나요?”“큰 수술은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이제 환자분이 자신의 외모에 대한 만족도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다르지만, 더 할 수 있는 건 시술밖에 없습니다.”“알겠습니다. 의사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계지원은 몹시 감격했다.“저희가 해야 하는 일인 걸요.”의사는 계지원과 예수진을 먼저 떠나보냈다.예수진은 찌뿌둥하게 계지원의 뒤를 따랐다.예수진은 겨우 용기를 내어 힘들게 여기까지 찾아왔지만, 결국 계지원이 매일 누구를 그렇게 걱정하는지 알아내지 못했다.울화가 치밀었다.차에 타고나서도 예수진은 여전히 표정이 좋지 않았다.기분이 아주 언짢아 보였다.“수진아.”계지원이 입을 열었다.“내 이름 부르지 마!”계지원이 입술을 깨물었다.“어쨌든 네가 만나면 많이 놀랄 거야.”계지원은 예수진을 달래려고 했다.“만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놀랐거든!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내 남편이 이렇게 걱정하는 건데?”계지원이 머쓱하게 웃었다.“곧 알게 될 거야.”“언제 알 수 있는데?”“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3~5일 이후?”“...”성격이 급한 예수진은 며칠 더 기다려야 하는 것이 미칠 것만 같았다.그러나 그녀는 계지원을 더 괴롭히지 않았다. 그를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3일 후.계지원은 병원의 전화를 받고 육현경이 이미 무균 병실에서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계지원은 바삐 병원으로 가려고 했고 예수진은 그저 한껏 초조해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계지원은 문 앞까지 나가서야 문뜩 예수진이 생각났다.그는 얼른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같이 갈래?”예수진은 어이없다는 듯이 눈을 희번
“난 루카스 리야. 그리고 육현경이야.”흥분한 예수진에 비해 육현경은 정말 호수처럼 잔잔했다.예수진은 한참 동안 생각을 정리하더니 그제야 알아들었다.그녀는 격분한 나머지 계지원의 다리에서 펄쩍 뛰어서 일어나더니 박수를 쳤다.“내가 말했잖아. 육현경이 맞다고! 이연 언니가 내 말을 안 믿었었어! 내가 오빠랑 그렇게 오래 같이 살았는데 귀신이 된다고 한들 난 오빠를 알아볼 수 있어!”육현경은 어이가 없었다.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예수진은 여전히 말을 가리지 않고 막 했다.“근데 오빠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거고, 왜 이 병원에 있어? 그리고 왜 응급실까지 실려 갔어? 오빠한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예수진은 한바탕 궁금한 것들을 다 물어보았다.육현경은 예수진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다.예수진은 이렇게까지 크면서 처음으로 육현경의 몸에서 인내심을 느꼈다.죽다 살아나니 성격도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니까, 그 당시 심아윤이 오빠를 배에 잡아넣었지만 죽진 않았고 뜻밖에도 사람에게 구해져서 해외로 갔고, 마침 오빠를 구해준 그 집 아들이 죽어서 그 사람들은 오빠를 그 아들 얼굴로 성형을 시켰으며, 또 마침 그 아들이 원래 오빠랑 조금 닮았기에 아무도 오빠의 진실한 신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거야?”예수진은 육현경의 얘기를 들은 뒤 제멋대로 또다시 한번 복창하였다.육현경은 이에 평가하였다.“몇 년 안 본 사이에 아주 총명해졌네.”“난 줄곧 총명했어!”예수진은 뾰로통하게 대답했다.육현경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으며 예수진과 따지지 않았다.“그럼, 이연 언니에게 말했어?”예수진은 다급하게 물었다.“갑자기 생각난 건데 오빠 결혼했잖아. 임아영 씨랑? 임씨 가문에 큰 사고가 생긴 거 알아?”“이연이는 오래전부터 내 정체를 알고 있었어.”“뭐라고?”예수진은 흠칫 놀랐다.옆에 있는 육현경과 계지원은 이미 습관이 되어 두 사람은 이상할 정도로 담담했다.“그러니까 오빠 말은 이연 언니가
예수진은 정말 분위기를 깨는 재주가 있었다.“오빠는 이제 나를 작은 숙모라고 불러야 해.”예수진은 득의양양하게 얘기했다.육현경은 심호흡을 한번 하였는데 화가 조금 난 것이 분명했다.계지원도 정말 예수진이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짧디짧은 두세 마디로 육현경을 이토록 화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나중에 윗사람이 일깨워 주지 않았다고 탓하지 말고 지금 기회를 제대로 잡아야지. 두세 달밖에 안 남았어.”예수진은 아주 엄숙하게 얘기했다.“잘 생각해 보고 미리 나한테 알려줘. 내가 도와줄게.”육현경은 예수진을 보고 희번덕거리고는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계지원은 옆에서 몰래 웃고 있었다.예수진이 이렇게 분위기를 잘 띄울 줄 알았으면 계지원은 진작에 그녀를 데리고 육현경을 만나러 왔을 것이었다.가끔 두 남자가 할 말이 없을 때면 정말 하루 종일 어색하게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기도 했다.예수진이 있으니 어색이고 뭐고 전혀 그럴 틈이 없었다.그래서 그날 예수진이 육현경을 만난 이후, 계지원은 종종 예수진을 데리고 같이 병원에 가곤 하였다.사실 예수진도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무심하지 않았다.그날 육현경을 만나고 집에 돌아간 뒤 예수진은 갑자기 계지원을 안고 울음보를 터트렸다.그건 기쁨에 겨운 울음이었다.다만 외부인 앞에서 예수진은 그런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서 참았던 것이었다.그러고 보면 예수진은 완전히 계지원을 자기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었다.계지원은 이런 답안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한 달이 지난 뒤, 육현경은 퇴원했다.얼굴도 한동안의 회복을 거치니 거의 예전이랑 다를 것이 없었다.예수진과 계지원은 함께 나타나 육현경의 퇴원을 맞이하였다.예수진은 막힘없이 말했다.“오빠를 처음 본 그날 난 정말 오빠가 이대로 얼굴이 망가질까 봐 깜짝 놀랐어. 지금 보니 사람 꼴이긴 하네.”“예수진!”육현경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예전과 마찬가지로 오빠 행세를 했다.“나한테 뭐라 하지 마.”예수진은 아주
육현경이 육씨 저택에 들어서자, 집 안에 있던 도우미들은 그를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심지어 몇 명은 깜짝 놀랐다.그들은 큰 도련님이 이미... 돌아가신 줄로 알고 있었다.그래서 위층의 방에서 내려오던 육은숙은 육현경을 본 순간, 그 자리에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한순간 그녀는 정말 자신이 귀신을 보기라도 한 줄 알았다.육은숙이 비명을 질렀다.그 즉시, 육가희가 위층 방에서 걸어 나오더니 거실에 서 있는 육현경을 본 순간, 육가희도 화들짝 놀랐다.“오빠, 안 죽었어요?”육가희는 긴장하면서 물었다.“어.”육현경은 무덤덤하고 가볍게 말했다.“뜻밖에 살아남았어.”육은숙은 얼른 계단에서 뛰어 내려왔다.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겁 없이 육현경을 와락 안았다.“현경아, 너 정말로 안 죽었구나. 살아 돌아왔네...”육현경은 가슴이 조금 조여들었다.그는 어려서부터 육씨 가문에서 자랐기에 육은숙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다른 건 몰라도 육은숙은 정말 진심으로 육현경에게 잘해주었다.육현경도 육은숙을 안았다.“고모, 저 돌아왔어요.”“흑흑흑... 그동안... 흑흑흑. 너 왜 일찍이 돌아오지 않았어? 아버지도 돌아가셨어... 현경아...”육은숙은 육현경을 안은 채 흐느껴 울었다.한 가족이 이렇게 다 같이 모인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육은숙은 조금 진정한 뒤 입을 열었다.“현경아. 이번에 돌아와서 다시 안 떠나는 거지?”“네. 안 가요.”“다시 떠나면 안 돼. 지원처럼 날 화나게 하면 안 돼!”계지원 얘기가 나오자, 육은숙은 화가 불쑥 솟아올랐다.“고모, 고모랑 작은삼촌 일은 제가 뉴스에서도 봤어요. 근데 저는 그 일이 작은 삼촌의 잘못이라고는 생각 안 해요.”육현경은 직설적으로 말했다.“현경아! 너까지 지원이 편을 드는 거야?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기나 해?!”육은숙은 흥분하며 말했다.그녀는 육현경이 돌아와서 자기의 편을 들어줄 줄 알았다.근 몇 년, 육씨 가문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바람에 집안에 남자가
“근데 나...”“넌 수진이 너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원망하고 싶겠지. 근데 제일 큰 피해자는 수진이야. 이해하기 아주 쉬운 도리야. 가난하게 살다가 부유해지는 건 적응하기 쉽지만, 반대로 사치하게 살다가 가난해지는 건 적응하기 힘들어. 네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게 아니지만, 이 일의 장본인은 수진이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수진이는 예씨 가문에서 쫓겨날 때부터 이미 제자리로 돌아갔어. 두 사람은 이제 자신의 원한을 수진이 몸에 풀어놓을 이유가 없다는 거 알았으면 좋겠어.”육현경은 아주 엄숙하게 말했다.로비의 분위기는 조금 싸늘해졌다.육은숙은 육가희가 육현경의 말에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고, 기분이 언짢아져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현경아, 초반에 수진이 내 딸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 너도 날 지지했잖아. 단지 수진이 지원이랑 같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네가 수진이 편을 드는 거야...”“그때 저는 그저 그 일을 알고 난 후 큰 충격을 받은 고모의 심정을 너무 잘 알아서 이기적으로 고모의 편을 들어주고 수진이를 버렸던 거예요. 그런데 세월이 많이 흘러간 지금, 저는 고모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일의 실체를 똑똑히 알아낸 후에 이성적으로 대처할 줄 알았어요.”육현경은 육은숙을 보며 말했다.“고모, 정말 실망했어요.”육은숙은 육현경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육현경이 말했다.“물론 저는 고모가 꼭 수진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고모 마음속의 집념을 바로 떨쳐내라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이 일에 도대체 수진의 잘못이 있는지 없는지 고모가 똑똑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육은숙은 말이 없어졌고, 육가희도 입을 열지 못했다.“저는 조금 피곤해서 먼저 방에 돌아가 볼 게요.”육현경도 말을 더 하지 않았다.“네 방은 늘 그대로 있어.”육은숙이 얼른 말했다.육현경이 무슨 말을 하든, 육은숙은 여전히 그를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여겼다.육현경은 사실 육은숙이 자신에 대한 감정을 알고 있었다.하지만 그는 가족이라는 핑계를 대고 무턱대
친구인 계지원이 아니라 자신에게 물어볼 게 있다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쳐다봤다.“일단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비웃지 않겠다고 약속해.”“뭔데 그래?”“나 지수한테 다시 프러포즈하려고.”망설임 없이 말하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제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송문수가 하지수한테 다시 프러포즈를 하다니, 예수진은 내일 당장 지구가 멸망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표정은 왜 그래, 내가 프러포즈한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저를 아니꼽게 바라보는 송문수에 예수진은 바로 입을 다물며 물었다.“너 진심이야?”“당연하지.”“진짜 지수랑 잘살아 보려고?”“응.”“밖에 나가서 이상한 짓도 안 하고?”도무지 송문수를 믿을 수 없었던 예수진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안 한다니까.”“어떻게 장담하는데.”“어떻게 하면 믿을래?”“남자들이 하는 말은 믿는 게 아니랬어.”제가 무슨 말을 해도 예수진이 믿지 않을 것 같아 송문수는 한숨을 쉬며 큰 용기를 내어 솔직한 마음을 고백했다.“나 감옥에서 나온 뒤로 여자들 만난 적 없어.”“뭐?”“그러니까 지수랑 우연히 한 거 말고는 여자 만져본 적도 없다고.”“진짜?”“내가 뭐하러 널 속여.”“그럼 맹세해, 거짓말하면 평생 남자 구실 못하는 거야.”자꾸 되묻는 것도 슬슬 짜증 나는데 저런 말까지 하는 예수진에 송문수는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못하겠어?”“한다 해, 내가 한 말 다 진짜고 만약 조금의 거짓이라도 있으면 난 이제 남자 아니야.”“대박이다, 송문수. 네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송문수가 맹세를 하자마자 예수진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나 좀 도와줘. 전에 지수가 나랑 결혼한 건 지수를 위한 결혼이 아니었잖아. 그래서 이번에는 지수가 마음에 들어 할만한 결혼식을 하고 싶어.”“진작 그랬어야지.”“나는 이런 쪽엔 워낙 소질이 없잖아, 낭만적인 것도 잘 모르고. 그러니까 네가 나 대신 생각 좀 해줘.”송문수는 멋쩍은
“어머, 미리 준비하는 거야?”예수진이 또 장난을 치며 놀리자 하지수도 멋쩍게 웃어 보였다.“지수 씨도 아이 가질 마음 있으면 되도록이면 빨리 가져요.”“네, 그래야죠.”“우리 셋 다 술 못 마시게 됐으니 그냥 물이나 마셔요.”아무것도 마시지 않으면 식사가 제대로 끝난 것 같지 않았던 예수진은 물이 담긴 컵을 들어 올렸다.“우리 다...”다 순산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려 했는데 아직 임신을 하지 않은 하지수 때문에 멈칫하던 예수진은 이내 말을 바꿨다.“우리의 순산을 위하여! 물론 아직 어디 있는지 모르는 지수 아이도 포함이에요.”“다들 원하는 일 다 이루길 기원할게요.”거기에 소이연이 한마디 덧붙이지 예수진은 웃으며 말했다.“역시 배운 사람이라니까요.”“그럼 다들 원하는 거 다 이루고 앞으로 호호 할머니가 될 때까지 서로의 가장 좋은 친구로 남길 기원하면서 우리 건배 다시 해요!”소이연과 하지수도 이렇게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된 것에 감사하며 잔을 높이 들어 올렸다.그 뒤로 식사 자리는 한참 동안 이어졌는데 소이연, 하지수, 예수진은 진작에 식탁을 벗어났고 술을 마시는 남자들만 거실에서 예능을 보며 떠들고 있었다.오랜만에 봐도 전혀 어색함 없이 수다를 떨어대던 남자들은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말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서로 번갈아 가며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지만 취하기 전까진 집에 가지 않기로 다들 약속이나 한 건지 그들은 끊임없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그 넷 중에 가장 먼저 항복을 외친 건 육현경이었다.얼굴은 원숭이 엉덩이처럼 빨개져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그를 아들 육민이 힘겹게 부축하며 나갔다.소이연도 육현경이 그토록 취한 모습은 처음 보지만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신났을 그를 알기에 화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아쉬웠다.그가 친구들을 만나 신난 것처럼 소이연도 사실 하지수와 예수진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남편이 저렇게 인사불성이 되어버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육민이 육현
“나는 지금 하연이 임신했을 때랑은 완전 달라요.”“성별이 다르면 입덧도 다르다던데.”소이연은 현재 임신 중인 예수진과 아이에 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그래요?”“가서 검사 안 해봤어요?”“당연히 검사해봤죠.”성격이 급했던 예수진은 진작에 아이의 성별이 궁금해 병원을 찾아갔었다.“그런데 매번 갈 때마다 돌려 말하면서 나한테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안 보여줘요. 답답해 죽겠다니까요 정말.”“하하하.”그럴 때마다 예수진의 표정이 얼마나 웃길지 상상하던 소이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아들을 원해요 아니면 딸이 더 좋아요?”“당연히 아들이죠.”돌려 말하는 것 없이 직설적으로 대답하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아들이 더 중요하다 그런 거예요 설마?”“제가요? 그 반대죠 완전히. 지원 씨가 딸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매일 둘이 꼭 붙어 있는다니까요. 그거 볼 때마다 화가 나서 나도 아들 낳아서 계지원 열 받게 하려고요.”역시나 일반인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예수진이 웃겨 소이연은 이번에도 웃음을 흘렸다.“아들인지 딸인지는 모르겠는데 자꾸만 딸 같아요.”“임산부의 촉은 보통 틀리지 않죠.”“또 아빠한테만 달려가겠네요.”“전생에 얼마나 잘 놀았으면 딸을 이렇게 줄줄이 낳아요. 다 키워야겠네.”“무슨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요.”한마디에 한 번씩 한숨을 쉬며 말하는 예수진에 소이연과 하지수 모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언니는 배 속의 아기가 남자 같아요 여자 같아요?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난 다 상관없긴 한데 솔직히 딸이 갖고 싶어요.”“딸은 안돼요. 딸 낳으면 오빠가 계지원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진 않을걸요. 오빠랑 언니 둘 다 미모가 이렇게나 출중한데 딸 낳으면 얼마나 이쁘겠어요. 오빠가 죽고 못 살죠 아주.”“...”소이연은 예수진의 말이 그다지 신빙성은 없어도 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어쨌든 아들을 낳든 딸을 낳든 그건 우리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
“축하드려요!”제 아내가 또 남사스러운 말을 할까 걱정됐던 계지원은 발 빠르게 축하 인사를 전했다.“그래요, 정말 축하해요!”곧이어 다들 축하하자 하도경은 참지 못하고 육현경을 놀려주었다.“육현경, 아직 안 죽었다? 여행 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임신이야. 문수보다 낫네, 문수는 지수 씨랑 저렇게 오래됐어도 아무 소식도 없는데. 너 진짜 어디 문제 있는 건 아니지?”“입 다물어.”“내 실력 의심하는 거야 지금?”“뭐래.”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하도경의 발언에 송문수는 어이없다는 듯 화를 냈다.“솔로인 너는 나 비웃을 자격 없거든. 나는 결혼이라도 했지 너는 있는 게 뭐야?”“뭐?!”“우리 중에 너만 솔로야. 분발해 하도경.”이미 말문이 막힌 하도경을 향해 송문수가 한마디 더 하자 하도경은 욕설을 내뱉으며 말했다.“닥치고 마셔, 오늘 내가 너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먹일 거야.”“누가 쓰러질지는 두고 봐야지.”서른 살 넘게 먹은 사람 둘이 아이처럼 싸우는 것도 그들의 일상인지라 그들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그때 진정한 예수진이 소이연에게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오빠가 그거 안 하고 했어요?”“네?”“아니, 그렇게 빨리 애 갖고 싶어 하진 않을 것 같았는데. 아직 제대로 못 누렸잖아요.”예수진이 알고 있는 육현경은 소이연과의 둘만의 시간을 한 일 년은 더 누려야 직성이 풀릴 사람이었기에 아까도 그녀는 소이연이 임신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두세 달밖에 안 됐는데 덜컥 임신을 해버리면 육현경은 만족을 못 할 게 분명한데.한편 이런 질문을 받은 소이연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둘의 신혼여행을 되돌아봤다.사실 신혼여행을 갔을 때부터 소이연은 아무리 급해도 안전조치는 꼭 하는 육현경에 의아해하고 있었다.둘은 합법적인 부부이니 아이가 생긴다 해도 아무런 문제 될 것도 없고 민이도 남동생이든 여동생이든 상관없이 동생을 원한다고 했었는데 왜 굳이 그걸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그렇게 궁금해하다가 어느 날 참지 못하
“둘이 아무 소리도 없더니 할 건 다하네.”당연히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예수진이었다.“우리 지수를 그렇게 적극적인 여자로 만들고 송문수 대단하다.”제 친구 앞이라고 빼지 않는 송문수는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내가 매력이 좀 넘치잖아.”“적당히 해.”그 모습에 예수진이 어이없다는 듯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언니랑 지수는 왜 술 안 마셔?”워낙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던 예수진은 술도 아주 좋아하는데 본인은 임신 중이라 마실 수가 없으니 자꾸만 주변 사람들을 부추기고 있었다.“이연이는 안돼.”“지수도 오늘은 안 돼.”제 말이 끝나자마자 들려오는 송문수와 육현경의 대답에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왜? 두 사람도 임신했어 설마?”“아니야.”얼토당토않은 말에 하지수는 다급히 부인했다.“그런데 왜 못 마셔?”“생리니까 못 마시지.”“송문수, 언제 이렇게 다정해졌냐? 지수 생리인 것도 다 알고 기특하네 좀.”예수진의 장난에도 기분이 좋았던 송문수는 아주 환하게 웃어 보였다.“이연 언니는 왜 못 마셔?”예수진은 이번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육현경을 보며 물었다.“아무튼 안돼.”“언니도 생리야?”그렇게 우연이 겹칠 리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미간을 찌푸리는 예수진에 소이연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는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뭘 자꾸 그렇게 물어.”“언니 어디 아파요? 나 놀래키지 말고 말 좀 해봐요.”육현경까지 말을 아끼니 깜짝 놀란 예수진은 잔뜩 긴장한 채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육현경의 핀잔이었다.“넌 매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연이가 왜 아파!”“그럼 왜 못 마시냐고.”예수진의 질문에 입술을 말아 물며 소이연을 보는 육현경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예수진은 소이연을 신 모시듯 떠받드는 제 오빠를 보며 정말 한 사람을 바꾸는 건 사랑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도대체 뭘 숨기는 거야?”예수진이 끝까지 캐묻자 소이연이 할 수 없이 숨을 한번 들이마시며 답했다.“나 임신했
사실 하지수는 늘 송승우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 내려야 할지 몰랐었다.우수하지 않다고 하기엔 국가사업에 공헌할 정도로 대단한 두뇌를 지니고 있었지만 또 그렇다고 아무도 비비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건 아니었다.그런데 송승우는 늘 고고한 척, 자신이 다른 사람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CEO들은 몸에서 돈 냄새가 난다면서 싫어했던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회사를 물려받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해왔었다.그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마다 무의식인지 아니면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늘 자신의 박학다식함을 뽐내며 자신의 우수함을 드러내려 했다.이제 보니 가식적이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다.하도 가식적이어서 하지수는 이제 그가 짜증 날 지경이었다.“어릴 때 게임 할 때도 송승우는 옆에 앉아서 코드나 쳤고 우리가 예능 볼 때는 그런 조작된 건 안 본다면서 머리 나쁜 사람들만 좋아하는 거라고 비웃었어. 우리가 디저트를 먹으면 지능 떨어진다고 무시했고...”예수진은 송승우 때문에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쉴 새 없이 말했다.하지수와 다르게 정말 힘들어했던 그녀는 송승우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친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다.“됐어, 그 사람 얘기 그만하자.”“너랑 문수만 잘 지내면 됐지, 송승우는 과거일 뿐이야.”“응.”이제 송승우한테는 조금의 감정도 남지 않은 하지수는 예수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그때 도우미 하나가 와서 식사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주자 그들은 다 같이 테이블로 향했다.거기에는 하연이와 민이도 있었는데 민이는 육현경을 쏙 빼닮아 겉은 차가워 보였지만 사실은 동생을 아주 잘 챙겨주는 아이였다.물론 그의 다정함은 자신이 인정한 사람 한해서만이었다.민이가 하연이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던 예수진은 감탄하며 말했다.“우리 조카가 결혼할 생각만 하면 난 벌써부터 가슴이 아파.”“제수씨도 아무 말 없는데 네가 왜 가슴이 아파.”장난을 치는 송문수의 말을 예수진 바로 맞받아쳤다.“언니는 당연히 괜찮겠지, 며느
예수진의 말에 정곡을 찔린 듯 소이연은 얼굴을 붉혔다.“거봐요, 오빠는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그냥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거예요.”소이연의 반응에 예수진은 득의양양해 하며 말을 이어나갔다.“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주 대범해지는 사람이거든요. 언니는 이제 오빠의 넘치는 사랑을 받을 일만 남았네요, 물론 침대 위에서요.”“그만 해요 수진 씨.”신나서 얘기하는 예수진에 못 말린다는 듯 웃던 소이연이 그녀를 타박하듯 말했다.“태교하는 사람이 자꾸 그런 생각 하면 어떡해요?”“아직은 그냥 핏덩이라서 아무것도 몰라요.”“...”“지수야,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평소에 문자 보내도 답장 늦게 하던데.”말을 하던 예수진은 임신한 뒤로 아무것도 못 하게 하는 계지원 때문에 요즘 부쩍 재미없어진 일상을 떠올리고는 서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그냥 회사일 처리하고 있었지. 얼마 전에 경영에 문제가 생겨서 회사 부도날 뻔했거든. 그래서 문수 씨랑 일 처리만 했어.”“송문수?”“걔가 회사 일을 한다고?”송문수가 일한다는 소리에 예수진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그래, 안 믿길 거 아는데 진짜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문수 씨 정말 많이 변했어, 더 이상은 맨날 놀러만 다니던 망나니 아니야. 이번에도 문수 씨 덕분에 송씨 집안이 다시 일어서게 된 거야. 그리고 이연 언니랑 현경 씨도 많이 도와줬고.”하지수는 곧바로 소이연을 보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정말 고마워요 언니, 언니랑 형부 도움 아니었으면 저희 집안은 진작에 끝났을 거예요.”“아니에요, 별로 힘든 일도 아니었는데요 뭘.”“현경이가 안 그래도 문수 씨 많이 변했다는 말 하더라고요. 밤에도 전화해서 기획서 어떻냐고 물어볼 정도로 열정적이래요.”“진짜 그렇게나 많이 변했다고요?”소이연까지 긍정하자 예수진은 눈을 크게 뜨며 하지수를 바라봤다.“네가 바꾼 거야?”“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나이가 점점 드니까 본인이 알아서 바뀐 거겠지.”“송문수가 바뀐 뒤
그래서 하지수는 이를 악문 채로 따져 물었다.“문수 씨, 당신 형이 올린 인스타 봤어?”자신이 송승우를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었는데 갑작스레 인스타를 언급하는 하지수에 송문수는 자연스레 핸들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안 그래도 거슬렸는데 하지수의 저 질문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그걸 봤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아?”“응, 괜찮아. 그냥 인스타일 뿐인데 뭘 신경 써.”자신이 송승우를 선택할까 봐 두려워하는 모습이 조금도 보이지 않자 하지수는 조금 실망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척 말했다.“신경 안 쓴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당신 아내로서 해명할게. 나랑 송승우 씨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아무 사이도 아니라니, 둘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나눈 사이였는지 온 집안사람들이 다 아는데 저런 말을 하는 하지수가 어이없었지만 송문수 본인도 뭐 그다지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그는 자신도 하지 못한 것을 하지수에게 요구할 자격은 없다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하지수는 송승우를 진짜 사랑한 거였지만 자신은 그저 다른 여자들을 갖고 논 것이기에 더 따질 권리가 없는 것 같았다.“오늘 어머니랑 같이 쇼핑가기로 했는데 송승우 씨가 먼저 따라가겠다고 한 건 맞아. 나랑 어머니도 거절하기 힘들어서 같이 오긴 했는데 나는 송승우 씨랑은 말도 안 섞었어. 거리도 엄청 많이 뒀고 못 믿겠으면 어머니한테 물어봐도 돼.”하지수의 해명을 듣고 있던 송문수는 오로지 저를 위해 저렇게 자세히 상황설명을 해주는 건가 싶어 또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그녀의 작은 행동에 또 흥분한 송문수는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어 애써 심호흡을 하며 정면을 주시했다.“내가 선택한 사람은 당신이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한테 진심일 거야. 당신한테 미안한 짓은 절대 안 해.”하지수의 약속에도 송문수는 꿈쩍도 안 했지만 하지수는 둘 사이의 작은 오해가 큰 불화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아무런 반응이 없어도 상황설명을 마쳤다.제 할 일을 마친 하지수는 안광이 사라진 눈으로 차 시트에 기대 있었
송문수는 애초에 쉽게 만족하는 사람이었기에 하지수가 조금만 잘해주면 한동안 기뻐했다.둘의 웃는 모습을 지켜보던 허영지도 흐뭇하게 그들을 지켜보며 이렇게 사이좋은 둘이라면 걱정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지수 데리고 밥 먹으러 가려고 온 거라고 했지?”“네.”“옷도 다 입어봤으니까 얼른 가봐.”데이트하러 가라는 말만 안 했지 사실 허영지는 그 둘에게 오붓한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기에 서둘러 둘의 등을 떠밀었다.“어머니는요, 저녁 어떻게 하시려고요?”“승우 집에 있잖니. 승우랑 같이 쇼핑 좀 더 하면서 네 시아버지 옷 좀 더 보려고. 내 걱정 말고 얼른 가봐.”송승우는 당연히 내키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말도 다 뱉은 마당에 거절하기도 쉽지 않아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그럼 차 키는 두고 갈게요.”“저랑 문수 씨는 이만 옷 갈아입을게요.”옷을 갈아입은 둘은 손을 잡고 쇼핑몰 밖으로 나갔고 그 둘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송승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승우야.”송승우는 갑자기 들리는 어머니의 부름에 다급히 표정을 감추었지만 허영지는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그때 너랑 지수 사이 우리도 다 알아. 하지만 너희 둘은 이미 끝난 사이고 지수랑 문수가 저렇게 잘 지내니까 이제는 너도 형으로서 축복해줘야 하지 않겠니?”송승우도 물론 어머니의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옛날 하지수가 좋아하던 건 분명 자신이었는데, 그때의 제삼자인 송문수가 하지수를 채가는 게 송승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말을 마친 허영지는 이만 옷을 갈아입으러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송승우도 성인이었기에 조언도 적당히 해야지 선을 넘으면 그냥 가족 사이의 불화만 생길 것이기에 허영지도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하지만 어릴 때부터 송문수에게 져본 적이 없던 송승우는 이번에도 제 여자를 그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아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송문수의 차에 앉은 하지수는 처음으로 저를 데리러 온 송문수에 못내 기분이 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