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행죄가 성립되었다.그녀가 원한다면, 상대방은 형사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소이연은 휴대폰을 켜 경찰에 결과를 전달한 뒤, 입원 수속을 밟았다.병상에 기대 휴대폰 화면에 띄워진 수없이 많은 부재중 전화를 보고는 다시금 ‘무시’를 선택했다.그녀는 신문을 뒤적이고 있었다.지금 인터넷에는 모두 문서인과 소나은을 비난하는 목소리로 가득했다. 심지어는 그들의 18대 가문까지도 언급되는 악랄한 수준이었다.이 정도까지 왔으니, 문서인과 소나은이 잃은 지위와 명예 외에, 문 씨 그룹과 소 씨 그룹에도 직접적인 손해를 끼쳤다. 예를 들어 두 그룹의 제품 불매운동, 주식시장 하락 등의 문제였다.소이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그녀는 다시 SNS를 켰다. 문서인이 예전에 업로드 했던 게시물을 보았다.예전에는 해당 게시물을 상단에 고정해 두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욕하고 있다.가장 인기 있는 댓글은 【몸 파는 여자와 개새끼의 조합, 영원히 함께하길.】이었다.그 댓글 아래에 그 댓글보다 더 인기있는 댓글이 있었다.글은 없고, 치켜든 엄지손가락 이모티콘이었다.이 이모티콘을 남긴 사람은 플랫폼 공식 인증 마크가 있는 계정인 “육 씨 그룹 육현경.”이었다.그 아래로 더 많은 댓글이 달렸다. 【이거 육 씨 도련님이야? 육 씨 도련님도 SNS를 한다고? 】【이거 육 씨 도련님이 SNS에 남긴 유일한 글임.】【헐… 내가 육 씨 도련님이랑 소통을 하고 있다고? 죽어서도 연기 뿜을 듯.】【문서인이 한 짓은 육 씨 도련님도 차마 못 보겠다는 거지. 육 씨 도련님 너무 정직하시다!】그 아래로는 가식적인 칭찬이 이어졌다.소이연은 피식 웃었다.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머릿속에 갑자기 육현경의 댓글과 이 게시물이 떠올라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지만, 입꼬리는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소이연은 입술을 문질렀다.입꼬리의 웃음이 다시 사라졌다.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르겠지만, 육현경이 그녀에게 주는 영향은 점점 더 커졌다.그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그를 떠올리고 있었다....
“소이연, 네가 어떻게 네 할머니를 폭행죄로 신고를 해! 경찰이 그러던데, 너 합의 안하고 법적으로 처리하겠다고 했다며!” 소승영은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소이연이 이렇게까지 하다니.“예전에 공장 직원한테 합의 안 해준 건 그렇다 쳐도, 네 친할머니야. 너 그러다 천벌 받아!” 소승영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화를 냈다.“친할머니?” 소이연이 차갑게 웃었다. “할머니가 말씀 안 드렸어요? 당신네 소씨 가문에 나 같은 사람은 없다고요! 앞으로도 다시는 소씨 가문에 한 발짝도 들이지 않을 거예요!”“그땐 화나서 그런거고.”“저도 화났어요.”“그래도 네 할머니야. 너보다 연세도 많으신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나이가 많은 건 괜찮은데, 나잇값을 못 하면 안되죠.”“소이연, 넌 좋은 말로 하면 안 듣지?!” 소승영이 화를 냈다.소이연은 웃었다.좋은 말로 한다고?!도대체 어떤 말이 좋은 말이었을까.할머니의 잘못을 인정하기라도 했나?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기라도 했나?설명을 듣기라도 했나?됐다.소씨 가문에서 그녀는 단 한 번도 희망을 품은 적이 없었다.“안 들어요.” 소이연은 착잡하다는 듯 대답했다.“소이연!” 소승영은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 “너 내 체면 구기려고 작정했니?! 넌 진짜 네가 네 할머니한테 죄를 물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네가 지금 언론에서 어느 정도 힘이 있고 은하 그룹이 인지도가 조금 생겼다고 다 네 거라고 생각하냐고! 내가 장안시에서 지낸 시간, 우리 소씨 가문이 장안시에서 지낸 시간 동안의 명성이 있는데, 넌 정말 내가 널 무서워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난 네가 뼈도 못 추리게 할 수 있어......”“만약, 저까지 포함하면요?”소이연은 손가락이 굳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녀는 육현경이 그녀의 휴대폰을 가져가 받는 것을 보고 있었다. “저는 육현경입니다. 저까지 포함하면요? 당신 어머니의 죄를 물을 수 있을까요?”소승영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애초에 육현경이 소이연과 함께 있으리
“아빠, 뭐래요? 언니는 그래도 할머니 신고하겠대요?” 소나은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했다.소승영이 대답했다. 당연히 소이연을 설득하지 못했다.그는 아주 단단히 화가 났다. “넌 육현경 꼬신다고 한 거 아니었니? 이렇게 오래됐는데, 육현경이 왜 아직도 소이연이랑 같이 있는 거야!”더 억울해진 소나은은 눈 주변이 시뻘게지도록 울었다. “저도 육현경을 꼬셔서 우리 소씨 가문의 일이 다 잘 해결됐으면 좋겠다고요. 하지만 육현경은 지금 언니한테 목매고 있어서 애초에 제가 육현경한테 다가가는 것조차 힘들어요......”“당신, 애들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요. 감정이라는 건 정말 서두른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이번 일로 나은이도 울다가 쓰러지기 직전이었어요. 우리 어떻게 하면 소이연이 어머님을 신고하지 않을지 좀 더 잘 생각해 봐요. 만약 어머님이 정말 소이연의 신고로 형을 받아 밖으로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정말 집안 망신이에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소씨 가문을 비웃겠어요.” 양화랑이 급히 나은을 대신해 해명했다.소승영도 여기까지 생각하니 화가 나서 핏대가 설 정도였다.“다 제가 못나서 그래요. 저만 아니었으면 할머니도 그렇게 언니를 혼내지 않으셨을 텐데.” 소나은은 또 불쌍한 척을 했다. “아니면 제가 가서 언니한테 사과할게요. 제가 가서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제가 할게요. 할머니가 형을 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이번 일은 다 네 책임만은 아니야! 네 언니도 소씨 가문 체면은 생각도 안 하고, 이렇게 일을 크게 만들고, 소씨 기업에까지 영향을 미치다니, 네 할머니도 이런 꼴을 가만히 보고 계실 수 없어서 소이연을 찾아간 거야.게다가 문서인도 쪼잔해서는, 은하 그룹이 잘 되니까 소이연한테 가서 맞서더니, 소이연한테 되레 한 방 먹었잖아. 예전엔 그래도 문서인이 문씨 가문을 회생시켰으니, 인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런대로 괜찮지만 계속 이렇게 가다 보면 문씨 가문도 다 무너질 거야.”양화랑은 공평하고 공정한 시선으로 이 일에 대해 평가
“어릴 때는 반항할 능력이 없었지만, 이제 다 컸으니 그렇게 쉽게 괴롭힘당하진 않아.” 소이연이 담담하게 말했다.사실 그녀도 본인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말로 육현경을 위로하는 것이었다.왜 그를 위로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지만,아마도 그가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게다가 이 세상에 정말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 주는 사람은 몇 안 된다.“아파?” 육현경이 갑자기 물었다.그의 시선은 여전히 붓기가 남아있는 그녀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도대체 얼마나 세게 때리면 이렇게까지 부을 수 있는 걸까.소이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아프지 않다.어렸을 때 비하면...... 이 정도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어렸을 때는 마음까지 다쳤으니.지금은 소씨 가문 사람의 일에는 눈물 한 방울도 아까웠다.육현경은 그런 그녀를 보며 그의 얇은 입술을 계속 문질렀다. 온몸에서 한기를 내뿜는 것 같아 조금 무서울 정도였다.당연히 그녀는 그가 무섭지 않다.그녀도 그가 화난 이유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나 사과 먹고 싶어.” 소이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화제 전환을 위해서였다.육현경은 시선을 살짝 돌렸다.“저번에 당신이 깎아준 사과 진짜 달았는데.” 소이연은 덧붙였다.육현경의 한기가 조금은 수그러든 것 같았다.그는 테이블의 과일 접시를 보고 몸을 일으켜 사과와 과도를 집어 들고 아주 조용히 사과를 깎기 시작했다.길게 쭉 뻗은 마디가 명백한 손가락, 흉터 하나 없는 깨끗한 두 손.소이연은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스스로 정말 용기가 부족하다고 느꼈다.너무 많은 일을 겪은 터라, 모험을 하기엔 두려웠다.혹시나 정말 누군가를 잃을까.그래도 굳이 비교하자면, 차라리 가지지 못하는 것이 나았다.빠르다.작은 조각의 사과 한 접시가 소이연의 눈앞에 놓였다.“고마워.” 소이연은 접시를 받아 들고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그녀는 사실 과일을 정말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사과가 진심으로 맛있다고 느껴졌다.새콤달콤
“자, 나 옆에 있을게.” 육현경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소이연은 그런 그를 보고 있었다.“저번에 내가 입원했을 때는 네가 자주 와서 봐줬잖아. 나는 예의상 그런 것뿐이야.”“저번에는 네가 나 때문에 다쳐서 입원한 거였잖아.”“나는 받으면 배로 갚아. 이연 아가씨 괜찮습니다.” 육현경은 단호했다.소이연은 입술을 문질렀다.이번에도 거절한다면 육현경의 어리고 작은 영혼에까지 상처를 줄 것만 같았다.그녀는 몸을 돌려 육현경을 등지고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육현경은 계속 그녀의 병상 곁에서 그녀의 작고 여린 몸을 지켜보고 있었다.정말 아주 작디작은 사람이다.겉으로는 정말 강해서 마음이 아프다.육현경은 침을 삼켰다.만약, 만약 그 당시에 그가 그녀를 잡았다면, 그녀가 모든 것을 놓아버린 채 도망가는 것을 막았더라면.그녀가 다시는 그 누구도 못 믿지는 않지 않았을까.......소이연은 자신이 정말 잠에 들 줄은 몰랐다.그녀는 사실 육현경을 쫓아낼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어 낸 것뿐이었다.하지만 그녀도 모르게 눈을 감고 누워있으니, 정말 깊게 잠들어버렸다.그녀는 안정감이 없는 사람이라서,남 앞에서 잠드는 것이 익숙하지 않고, 자주 있지도 않은 일이었다.그녀는 몸을 살짝 움직였다.시선을 돌려 소파에 기댄 채로 잠이 든 육현경을 보았다.작은 소파에서 자고 있는 육현경을 보니, 큰 몸이 아주 견디기 힘들어 보였다.소이연은 전에 육현경이 입원했을 때를 떠올렸다. 마치 그때와 서로 입장이 바뀐 것 같았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침대 위의 이불을 가지고, 최대한 살짝 그의 몸에 둘러주었다.하지만 그녀가 다가간 그 순간, 육현경은 눈을 번쩍 떴다.육현경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정말 상상도 못 했다.“미안, 난...... 아!”갑자기 소이연의 얇은 비명소리가 들렸다.손목이 육현경의 손에 꽉 잡힌 채, 육현경의 품 안으로 넘어졌고, 눈 깜짝할 새에 육현경은 몸을 돌려 소이연을 자신의 몸 아래로 눕혔다.두 사람은 지극히 애매한 자세로
“우선 나 좀 놔줘.” 소이연은 몸을 움직이며, 그에게 다시 한번 알려주고 있었다.그녀가 몸을 움직이자,육현경이 갑자기 소리를 냈다.굉장히 애매한 소리였다.소이연은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비록 그리 많은 경험을 해보지는 않았지만, 성인이라면, 모두가 알 수 있었다.“당신 우선 일어나.” 소이연이 최대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육현경은 침을 삼켰다.눈 속의 감정이 요동치다 빠르게 회복했다.그는 소이연의 몸 위에서 일어났다.일어나자마자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소이연도 남몰래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고 있었다.잠시 후육현경이 나왔다.소이연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고, 그녀도 모르게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다시 민망해졌다.그녀는 보려고 본 건 아니었지만, 자신도 모르는 새에 눈길이 갔다......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힘들게 감정을 추슬렀는데, 이제는 귀까지 빨개졌다.육현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근데 가끔...... 조금 참기 힘들어. 너무 안 좋은 경험은 아니었길 바라.”“......” 경험.그녀는 아무런 경험도 하지 않았다.육현경은 애매한 말로 상대방이 쉽게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사실 육현경이 지금 해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전에 두 사람이 친근하게 접촉했던 건 맞지만, 신체적인 것은 모두 거부했었다. 심지어 그녀는 방금 육현경이 화장실에 갈 때, 또다시 그때처럼...... 그 자리에서 토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나 방금 뭐 했어?” 육현경이 화제를 돌렸다.아마 갑자기 그녀가 왜 그의 몸 아래에서 깨어나게 된 건지 모르는 눈치였다.“당신이 잠든 것 같아서, 추울까 봐 이불 덮어주려고 했는데, 당신이 갑자기 몽유병처럼 나를 깔고 누웠어.” 소이연이 최대한 서로 민망하지 않을 단어를 골라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미안.” 육현경이 사과했다.소이연은 육현경의 사과에 정말 진심이 하나도 안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세상에 어느 누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실실 웃
‘문씨 아저씨 너무하시네.’저녁을 가져다주고는 작은 도련님께서 집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만 남기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대표님과 사모님을 방해하는 이런 곤란한 일을 그에게 맡기다니.“문씨 아저씨가 저녁을 가져다주셨는데, 식으면 맛이 없을까 봐요.” 명진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육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명진은 급히 저녁을 병실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잘 올려두고는 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이렇게 많은데, 같이 드세요. 저희 둘이서 다 못 먹어요.” 소이연이 이명진을 불렀다.이명진은 대답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돌려 대표님의 얼굴을 보았다.“낭비하면 안 되잖아.” 소이연이 말했다.육현경은 그제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이명진은 진작부터 배가 고팠다.속으로는 사모님께서는 역시 아름다우시니 마음도 예쁘다고 생각했다.저녁을 다 먹은 뒤, 소이연은 육현경에게 돌아갈 것을 완강히 요구했다.육민 혼자 두는 게 걱정된다는 이유였다.육현경은 소이연의 “쫓김”에 어쩔 수 없이 병실을 떠났다.소이연은 숨을 작게 내쉬었다.육현경이 있으니, 역시 조금 자유롭지 않은 기분이었다.그녀가 침대에 누워있으니, 회사의 여러 총감독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기자회견이 끝난 뒤, 온라인상에서 그녀의 평판은 반등하기 시작했고, 예상외로 은하 패션의 판매도 다시 잘 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정확한 결과가 필요했다.각 팀의 총감독이 그녀에게 최신 현황을 보고했다. 총감독들은 모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어찌 됐든 결과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좋았고, 은하 패션의 옷은 평판이 전부 뒤집어져, 다시금 폭발적인 판매를 일으켰다. 전에 협업을 진행했던 업체들도 더 이상 빚을 독촉하지 않았고, 오히려 급하지 않다며 더 연장해도 좋다고 했다.장사 앞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하지만 적어도 은하 그룹이 다시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었다.소이연은 마지막 전화를 끝내고, 예수진의 SNS를 켰다.예수진의 SNS에 그녀의 SNS가
소이연은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비록 격식을 차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캐주얼한 것도 아니었다.다만, 육현경에 비해서는 조금 대충인 듯한 느낌이었다.육현경은 그녀의 차림새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높이 솟은 건물로 들어갔다.룸은 28층에 있었다.육현경이 고른 장소는, 장안시의 고위급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소이연은 육현경을 따라 웅장하고 화려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육현경이 갑자기 외투를 벗더니, 넥타이를 풀고, 흰 셔츠의 단추 두 개를 풀었다.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금 사그라들고, 소탈하고 구속받지 않는 느낌이 조금 강해졌다.“이것 좀 들어줘.” 육현경이 갑자기 입을 열며 외투와 넥타이를 소이연에게 건넸다.소이연은 받아 들었다.그리고 육현경이 느릿느릿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려 탄탄한 팔뚝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있었다.순식간에 사람이 캐주얼해보였다.그 순간, 소이연은 육현경이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는지 깨달았다.그는 그녀와 스타일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그녀는 속으로 죄책감이 들었다.그러니까, 육현경은 그녀가 그의 생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녀가 중요시하지 않은 것까지 맞추고 있었다.소이연은 자신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감정을 무시하려 애썼다. 어쨌든 그녀는 오늘 밤 그녀만의 목적이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육현경은 그의 옷과 넥타이를 가져갔다. 직원들은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했고, VVIP 룸을 향해 걸어갔다.룸은 호화스러운 양문형 디자인이었다.그들이 지나가자, 문 앞에 서 있던 두 직원이 각각 한쪽 문을 열어 아주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했다.소이연은 육현경을 따라 룸으로 들어가서야 깨달았다. 사실...... 그녀와 육현경 두 사람만의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을.그녀가 알고 있는 계지원, 하도경, 송문수도 있었다.계지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육씨 가문의 의붓자식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도 모두 장안시의 유명한 재벌 2세였고
“송승우가 또 수술받으니까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은 거잖아. 그렇게라도 응어리 좀 풀라고.”“나 그 정도로 속 깊은 사람 아니야. 그냥 말하기 싫었을 뿐이지.”“난 못 속인다니까.”매번 거짓말을 할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송문수이기에 하지수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다 알 수 있었다.“문수 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하지수는 송승우보다 송문수가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물론 송승우도 부모님을 아주 공경했지만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해온 그는 다 커서도 집안의 관심만 바랐지 집안에는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늘 형에게 밀려나 찬밥신세이던 송문수는 항상 부모님 곁을 지키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서곤 했다.“나 이제 잘 거야.”그래서 대견스러워서 한 말인데 송문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귀가 빨개져서는 욕실로 도망가버렸다.그런 송문수의 뒷모습을 보던 하지수는 자신이 따라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만약 송문수를 혼자 보냈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이해를 받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송승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하지수도 포함이었다.그럼 송문수도 질투하고 부러워할 만도 할 텐데 하지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송문수가 송승우의 것을 탐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싶어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지금은 송승우도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시부모님도 아들을 지키겠다고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기에 하지수가 이런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생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걸 막고자 눈을 감았다 뜨며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다음에 송문수를 제대로 달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샤워를 마친 송문수는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자신이 정말 잘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눈만 감으
병원을 나선 송문수가 택시를 잡아타려고 할 때 하지수가 뛰어나오며 그를 불렀다.“문수 씨!”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차를 출발시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아주 다급해 보여서, 그녀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문을 연 채로 하지수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사실 하지수도 송문수가 저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릴까 봐 걱정됐는데 여전히 멈춰있는 차에 안심하며 빠르게 올라탔다.기분이 나빠서 호텔이든 어디든 가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러다가 연락이라도 안 되면 하지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따라 나온 거였다.하지수가 차에 앉은 걸 확인한 송문수가 차를 출발시켰고 둘은 정적 속에서 호텔로 향했다.하지수는 몇 번이나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무심히 창밖만 내다보는 송문수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송문수에게도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그런데 호텔 방으로 들어오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하지수, 나 욕할 거면 빨리해. 참을 필요 없어. 욕 다 하면 나도 잘 거야.”“뭐?”예기치 못한 말에 하지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송문수가 말을 이었다.“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잠이나 자겠다는 내가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나도 어제부터 못 자서 지금 좀 피곤해. 사람이 오랫동안 잠을 못 자도 심장마비로 죽거든.”“나 당신이랑 같이 자러 온 거야. 어제 나도 잘 못 잤어.”“당신이 마음 불편해서 못 잘까 봐 온 거라고. 나는 당신이 안 잔다고 버틸까 봐 그게 더 걱정됐어.”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하지수의 반응에 송문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나도 당신한테 화낼 줄 알았어?”“화내는 게 당연하잖아.”씁쓸한 투로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차피 송승우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어.”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역시나 하지수도 제가 송
“왜 이래? 왜 갑자기 안 보이는 거야?”눈도 깜빡이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던 허영지는 갑자기 내려진 커튼에 슬픈 눈을 하고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에게 물었다.“환자분 쉬셔야 하니까 일단은 다들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 내 아들 옆에 있을 거예요.”“환자분이 가족들 보는 걸 원치 않습니다.”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말에 허영지는 또 눈물을 터뜨렸다.“왜 우릴 안 보겠다는 거예요? 안에서 혼자 있으면 힘들 텐데...”“환자분한테도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허영지가 고집을 피우자 마찬가지로 송승우 옆에 있고 싶었던 송기명도 움직이지 않았다.“문수 넌 이제 그만 가.”“어젯밤도 샜으니 돌아가서 자.”쌀쌀맞은 엄마의 말투에서 저건 관심이 아니라 타박임을 눈치챈 송문수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호텔에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바로 올게요.”하지만 송문수의 말에도 허영지는 대답 없이 차가운 등을 보일 뿐이었다.그에 고개를 떨군 송문수는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줄곧 허영지의 곁을 지키며 한마디도 않고 있던 하지수를 쳐다보았다.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도 제가 송승우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고 원망하는 것 같아서 송문수는 결국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하지수는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송문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송문수가 먼저 다리를 잘라냈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하지수는 그가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의 송문수라면 모르겠지만 함께 일 하면서 봐왔던 송문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정말 상황파악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큰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혹시라도 너무 속상해서 해명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봐 하지수는 용기를 내어 시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의사의 질문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답했다.“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직은 회복도 채 안 됐고 그런 큰 충격을 받으면 회복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분들이 그 정도는 주의해주셔야죠.”의사의 말이 끝나자 허영지도 분노의 화살을 송문수에게로 돌려버렸다.“넌 어쩜 아직도 이러니? 승우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 나이 먹었으면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려야지. 만약 승우가 너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허영지가 목놓아 울자 송기명도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영지를 다독이며 말했다.“오늘 일은 나도 실망이다 너한테. 서른 살 넘으면 뒤도 안 보고 일부터 저지르는 버릇은 좀 고칠 줄 알았는데.”가족들의 질타에 해명을 하려던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어릴 때부터 송승우와 송문수가 싸울 때면 부모님은 늘 송승우의 편만 들어줬기에 송문수는 지금 이 상황에 송승우가 스스로 알아챘다고 한들 저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입 아프게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선생님, 그럼 이제 어떡해요?”“애가 제 몸 상태를 알았으니 죽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이제 고작 서른 좀 넘은 앤데 미래가 창창한 애를 제가 먼저 보낼 순 없잖아요...”대성통곡을 하는 허영지를 향해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금은 별문제 없는데 계속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이성을 잃으면 그땐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미 환자분이 본인 몸 상태를 다 알게 됐으니 가족분들은 위로해주면서 환자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우리 아들 국내 최고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애예요,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애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텐데... 승우가 제 몸 상태를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만 생각하면 저도 죽을 것 같아요...”“차라리 그냥 내가 다치고 말지,
장기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오른쪽 다리에만 느낌이 없는 게 아무래도 불길했다.“형, 진정하라니까.”“마취가 아직 안 풀려서 그런 거야. 마취만 풀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니까 좀 기다려봐.”“아니야,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 그냥 없어진 것 같아...”송문수의 위로에도 흥분하며 몸을 움직이던 송승우는 점차 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지금 송승우는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생각에 송문수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환자의 강한 움직임에 여러 가지 중요한 수치가 변하자 중환자실에서부터 경보음이 울려고 빠르게 뛰어온 의사들은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들을 보더니 곧바로 송승우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송승우의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느려진 걸 본 송문수는 깜짝 놀라며 재빨리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겼다.한편 하지수의 거듭되는 설득에 밥을 먹고는 송기명과 허영지는 아들 걱정에 일찌감치 병원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수술실로 뛰어가는 송문수와 침대에 누워있는 송승우를 보게 되었다.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더니 또 무슨 일로 수술실에 가는지 몰랐던 그들은 어두워진 의료진들의 안색을 살피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마음 약한 허영지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자 송기명과 하지수가 그녀를 부축했고 하지수는 괜찮을 거라고 허영지를 다독이며 그녀와 함께 수술실 앞으로 다가갔다.가족들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던 송문수를 하지수가 나지막하게 불렀다.“문수 씨.”그에 고개를 홱 돌린 송문수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까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길 때 송승우의 손이 그의 손에 닿았는데 그게 사람의 손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워서 송문수는 아직도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왜 그래, 말 좀 해봐.”“승우, 우리 승우 괜찮은 거지?”하지수는 하얗게 질린 송문수가 걱정됐지만 허영지는 송문수의 안색은 신경 쓰지 못하고 송승우의 안부를 물었다.송문수는 가족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송승우가 본
“너 혼자야?”힘겹게 내뱉은 목소리였지만 그게 너무나도 미약해서 송문수는 송승우에게로 가까이 붙은 채 몸을 숙여야만 그가 뭐라고 하는지 그나마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엄마 아빠도 너 걱정했어.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면회 못한다고 해서 어제 호텔로 먼저 보냈어. 보고 싶으면 지금 바로 전화할게.”송문수의 말에 괜찮다며 고개를 젓던 송승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나 많이 다쳤어?”“생명엔 지장 없대, 그런데 교통사고가 워낙 크게 나서 장기들이 많이 손상됐대. 그래서 여기 당분간 있는 건데 최고로 좋은 의료진들만 붙였으니까 걱정 마, 곧 괜찮아질 거야.”“나 얼굴은 멀쩡해?”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얼굴이 붕대로 다 감겨있어서 안 보여.”“눈, 코, 입, 귀는 멀쩡한 것 같아.”“팔다리는 다 있어?”하지만 또다시 들려온 질문에는 곧바로 답을 하지 못하는 송문수였다.이렇게 빨리 저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교통사고에서 깨어난 환자가 가장 궁금해할 게 본인의 목숨과 몸 상태일 테니 송문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교통사고에서 가장 흔한 후유증이 얼굴 흉터와 장애라서 저런 질문을 하는 건 알겠지만 송문수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눈을 피하기만 했다.“송문수.”“다 있어.”결국 의사의 당부 때문에 송승우의 회복을 돕고자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송문수의 긴장한듯한 반응에서부터 송승우는 무언가 눈치를 챈 듯했다.그 힘든 와중에도 그는 흥분을 한 건지 언성을 살짝 높였다.“너 아까 망설였어.”“거짓말이지?”“아니야. 정말 다 멀쩡해.”“맹세해 그럼.”“맹세할게.”죄책감이 점점 켜졌지만 송승우의 감정변화를 느낀 송문수는 아직은 중환자라 큰 충격은 피해야 하는 송승우를 위해 일부러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거짓말이면 넌 평생 하지수랑 같이 못 있어.”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는 송승우에 송문수는 마른 침을 삼켜냈다.제 목숨을 담보로는 맹세할 수 있어도 하지수와의 감정을
예수진:[그럼 너랑 지수 다 서울에 있는 거야? 아직 병원이야?]예수진:[부모님은 좀 어떠셔? 충격이 크시지?]그들의 문자에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송문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누구한테 일어나도 참혹한 비극인데 그 일이 제 형한테 일어났으니 송문수는 어떻게 송승우를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근심 속에서 밤이 깊어지자 하지수가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자?][아니.][병원에서 잘 수 있으면 어디서 눈이라도 좀 붙여. 문수 씨도 쉬어야지,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티시면 남은 건 당신뿐이야.][알아 나도. 넌 왜 아직 안 자? 시간 늦었는데.][당신이 걱정돼서.][뭐하러 날 걱정해, 난 괜찮아. 송승우가 문제지...]그의 문자에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하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송문수도 그만 대화를 끝내려 했다.[늦었으니까 얼른 자.][응.][나 대신 부모님 좀 잘 챙겨줘, 엄마 아빠 쓰러질까 봐 나 너무 무서워.][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핸드폰을 내려놓은 송문수는 중환자실 앞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중환자실에서 나온 송승우가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병원에서 VIP 병실을 열어줬지만 송문수는 그 편한 곳도 마다하고 굳이 송승우 옆을 지키고 있었다.아무리 송승우라 해도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 봐.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아침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던 송문수는 간호사의 친절한 부름에 서서히 눈을 떴다.“보호자분?”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몸을 일으킨 송문수는 의아한 눈으로 간호사를 바라보았다.“환자분이 보호자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송승우 씨가요?”중환자실을 가리키며 당황한 듯 묻는 송문수를 향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송문수 씨가 중환자실로 와줬으면 하세요.”“면회 안된다면서요?”“좀 전에 선생님이 또 몸 상태 체크하셨는데 이젠 다 정상수치로 돌아와서 면회 가능하시대요. 대신 시간만 좀 주의해주세요. 아직 몸이 약하셔서 이럴 때는 저희도 환자분 부탁이라면 뭐든 다
시부모님의 몸 상태를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하지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송기명은 더욱이 쓰러진 지 얼마 안 된 터라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다가는 정말 큰 일이 날 것 같았다.“아버님, 어머님, 여긴 문수 씨한테 맡기도 우린 먼저 호텔에 가 있어요.”하지수의 거듭되는 권유에 송기명과 허영지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송문수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알겠다니까요. 걱정 마시고 가세요. 제가 입구까지 모셔다드릴게요.”송기명과 허영지를 차에 태운 송문수는 조수석에 앉은 하지수를 바라보았다.모든 감정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녀도 송문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의 눈엔 미련이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방향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송문수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중환자실 복도에 앉은 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리고 핸드폰을 켜보았다.역시나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그의 알림창을 꽉 채우고 있었다.다른 문자는 싹 다 무시한 송문수는 친구들과의 방, 그리고 소이연, 예수진이 함께 있는 단톡방, 이렇게 두 곳에만 답장을 했다.육현경:[대체 무슨 일이야?]계지원:[문수야, 너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아저씨 생신 파티는 왜 취소하는 거야?]하도경:[말 좀 해봐, 전화도 안 받고. 이러다가 다들 답답해 죽겠어,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또 다른 단톡방에 있던 소이연과 예수진 역시 걱정스러운 문자를 보내왔다.소이연:[문수 씨, 무슨 일 있는 거죠?]예수진:[송문수, 답장 안 해? 기사 보니까 아줌마 안색도 엄청 안 좋던데 무슨 일이 나긴 난 거지?]예수진:[말 좀 하라고 이 자식아!]소이연:[수진 씨 진정해요 일단. 문수 씨랑 지수 씨가 바빠서 답장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급한 일 다 보고 나면 우리한테도 알려줄 거에요.]예수진:[알겠어요, 기다려봐야죠 뭐.]자신의 화면을 가득 채운 문자를 보던 송문수는 손가락을 움직여
송문수가 사 온 물을 건네도 부모님은 고개만 저으며 손을 모으셨다.그래서 하지수에게 건네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을 받아들었다.서울에 온 뒤 송씨 일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줄곧 자리를 지키며 송승우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송승우가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는 받아든 물이라 몇 모금 마시기는 했지만 물을 마시면서도 신경은 온통 송승우에게 쏠려있었다.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송승우의 몸을 보게 되었다.너무 아파서인지 아니면 힘이 없어서인지 몸은 미세한 떨림 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송승우의 눈이 서서히 떠지고 있어 하지수는 잔뜩 흥분한 채 외쳤다.“승우 오빠 일어났어요!”“문수, 문수야! 얼른 의사 불러와!”하지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부모님이 송문수에게 의사를 데려오라 했고 송문수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의사는 중환자실에서 각종 검사를 진행했다.방음효과가 워낙 좋은 중환자실이라 의사와 송승우의 대화를 듣지 못했던 가족들은 또다시 초조해 났다.한참이나 지나서 중환자실 빠져나오는 의사에 허영지가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아들은 좀 어떤가요?”“방금 검사 진행했는데 생명엔 아무 지장 없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하지만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여기서 며칠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일반병실로 옮겼다가 세균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거든요.”“알겠습니다, 입원은 며칠 하든 상관없으니까 저희 애 잘만 치료해주세요. 그런데 저희가 들어가서 같이 있어 주는 건 괜찮을까요?”“아직은 들어가지 마세요. 환자분도 방금 깨어나셔서 머리가 어지러울 겁니다. 오늘은 그냥 쉬게 놔두시고 내일 상태 좀 나아지면 그때 들어가 보시게 도와드릴게요.”“감사합니다 선생님!”“아닙니다.”감격 어린 허영지의 말에 의사가 한마디 더 보탰다.“환자가 아직은 본인 몸 상태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면회하실 때도 다리 절단한 사실은 일단 말하지 마세요. 환자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