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씨 아저씨 너무하시네.’저녁을 가져다주고는 작은 도련님께서 집에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말만 남기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대표님과 사모님을 방해하는 이런 곤란한 일을 그에게 맡기다니.“문씨 아저씨가 저녁을 가져다주셨는데, 식으면 맛이 없을까 봐요.” 명진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육현경은 고개를 끄덕였다.이명진은 급히 저녁을 병실의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잘 올려두고는 바로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이렇게 많은데, 같이 드세요. 저희 둘이서 다 못 먹어요.” 소이연이 이명진을 불렀다.이명진은 대답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돌려 대표님의 얼굴을 보았다.“낭비하면 안 되잖아.” 소이연이 말했다.육현경은 그제야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이명진은 진작부터 배가 고팠다.속으로는 사모님께서는 역시 아름다우시니 마음도 예쁘다고 생각했다.저녁을 다 먹은 뒤, 소이연은 육현경에게 돌아갈 것을 완강히 요구했다.육민 혼자 두는 게 걱정된다는 이유였다.육현경은 소이연의 “쫓김”에 어쩔 수 없이 병실을 떠났다.소이연은 숨을 작게 내쉬었다.육현경이 있으니, 역시 조금 자유롭지 않은 기분이었다.그녀가 침대에 누워있으니, 회사의 여러 총감독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기자회견이 끝난 뒤, 온라인상에서 그녀의 평판은 반등하기 시작했고, 예상외로 은하 패션의 판매도 다시 잘 되기 시작했다.하지만 그녀는 정확한 결과가 필요했다.각 팀의 총감독이 그녀에게 최신 현황을 보고했다. 총감독들은 모두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어찌 됐든 결과는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좋았고, 은하 패션의 옷은 평판이 전부 뒤집어져, 다시금 폭발적인 판매를 일으켰다. 전에 협업을 진행했던 업체들도 더 이상 빚을 독촉하지 않았고, 오히려 급하지 않다며 더 연장해도 좋다고 했다.장사 앞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다.하지만 적어도 은하 그룹이 다시 정상 궤도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었다.소이연은 마지막 전화를 끝내고, 예수진의 SNS를 켰다.예수진의 SNS에 그녀의 SNS가
소이연은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비록 격식을 차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캐주얼한 것도 아니었다.다만, 육현경에 비해서는 조금 대충인 듯한 느낌이었다.육현경은 그녀의 차림새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높이 솟은 건물로 들어갔다.룸은 28층에 있었다.육현경이 고른 장소는, 장안시의 고위급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소이연은 육현경을 따라 웅장하고 화려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엘리베이터 안에서 육현경이 갑자기 외투를 벗더니, 넥타이를 풀고, 흰 셔츠의 단추 두 개를 풀었다.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금 사그라들고, 소탈하고 구속받지 않는 느낌이 조금 강해졌다.“이것 좀 들어줘.” 육현경이 갑자기 입을 열며 외투와 넥타이를 소이연에게 건넸다.소이연은 받아 들었다.그리고 육현경이 느릿느릿 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려 탄탄한 팔뚝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있었다.순식간에 사람이 캐주얼해보였다.그 순간, 소이연은 육현경이 무엇을 위해 이렇게 하는지 깨달았다.그는 그녀와 스타일을 맞추기 위한 것이었다.그녀는 속으로 죄책감이 들었다.그러니까, 육현경은 그녀가 그의 생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녀가 중요시하지 않은 것까지 맞추고 있었다.소이연은 자신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감정을 무시하려 애썼다. 어쨌든 그녀는 오늘 밤 그녀만의 목적이 있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육현경은 그의 옷과 넥타이를 가져갔다. 직원들은 정중하게 그들을 맞이했고, VVIP 룸을 향해 걸어갔다.룸은 호화스러운 양문형 디자인이었다.그들이 지나가자, 문 앞에 서 있던 두 직원이 각각 한쪽 문을 열어 아주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했다.소이연은 육현경을 따라 룸으로 들어가서야 깨달았다. 사실...... 그녀와 육현경 두 사람만의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을.그녀가 알고 있는 계지원, 하도경, 송문수도 있었다.계지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육씨 가문의 의붓자식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도 모두 장안시의 유명한 재벌 2세였고
“안녕하세요, 이연 아가씨. 이름 백 번 듣는 것보다 한번 뵙는 게 낫죠. 저번 기자회견 때 보다 더 예뻐지셨네요.” 송문수는 진심으로 칭찬했다.“칭찬 감사합니다.” 소이연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쪽도 멋지시네요.”송문수는 의기양양한 듯 웃었다. 마치 미간으로 육현경을 도발하는 듯했다.육현경은 못 본 체했다.그는 소이연에게 의자를 끌어다 주어 앉히면서 말했다. “다 내 소꿉친구들이야. 근데 내가 해외에 있는 시간이 많고, 자주 돌아오지 않으니까, 올해가 장안시에서 보내는 첫 생일이야. 그래서 애들이 축하해 주고 싶대.”이건 원래 그녀와 단둘이 생일을 보내려고 했다는 뜻인데, 왜 이 자식들이 아직도 붙어있냐는 것이다.“편하게 해, 쟤네들 신경 안 써도 돼.” 육현경은 그녀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그녀를 아주 많이 신경 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소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육현경의 생일은 당연히 그가 하고 싶은 것 위주였다.다만...... 그녀가 오늘 저녁 준비한 많은 말들을 전할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이때.갑자기 룸의 거대한 문이 열렸다.입구에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아직 도착 안 했는데, 벌써 먹고 있어? 기다려주지도 않고!”소이연은 고개를 돌려 예수진이 꽃다발을 들고 친근하게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았다.“연예인이 안 왔는데, 누가 감히 젓가락을 들어!” 하도경이 일부러 장난을 쳤다.“역시 뭘 좀 안다니까.” 예수진이 한번 웃고는, 바로 육현경을 향해 걸어가, 다정하게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말했다. “생일 축하해.”육현경은 조금 과장되기까지 한 꽃다발을 흘끗 보더니 굉장히 불쾌한 티를 냈다. “이게 그 SNS 게시물에서 팬들까지 동원해서 준비한 생일 선물이야?”“나 엄청 신경 썼어.” 예수진이 있는 힘을 다해 변명했다. “이거 다 내가 한 송이 한 송이 골라서 포장까지 직접 한 거야.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어. 마치 너에 대한 내 마음처럼.”“연기하는 데 재미 들었네.” 하도경이 놀리며 말했다.
”참, 지수는 왜 안 왔어?”예수진이 송문수에게 물었다.송문수가 대답하기 전에 하도경이 끼어들었다.“문수가 있는 자리에 하지수가 오는 걸 봤어?”“그럼 왜 지수와 결혼했어?”예수진이 못마땅해하며 물었다.“그건 본인한테 물어봐.”하도경은 어깨를 으쓱하며 저도 모른다는 태도를 표시했다.송문수가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정략결혼이다. 이제 알겠어?”“남자는 다 개자식이야.”예수진은 대놓고 경멸했다.사촌 오빠 덕분에 몇몇 사람과 꽤 사이 좋게 지냈다. 하지만 하지수와 송문수의 결혼에 있어 전적으로 하지수 편에 섰다.“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하도경이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바로잡았다.“우리 셋은 그런 남자가 아니야. 현경은 비록 아들이 있지만 그동안 여자한테 얼씬도 하지 않아서 몸이 아주 깨끗해. 지원은 더 말할 것도 없지. 그 흔한 여친도 없으니 순결하기 짝이 없고, 이 도련님은 겉보기엔 주변에 여자들이 많아도 감히 이 오빠를 감당할 여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단다.”“뭐래!”예수진은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예수진, 너 점점 이 오빠들을 우습게 본다?”하도경이 꾸짖었다.“술도 이기지 못하면서!”“요것 봐라!”예수진의 도발에 하도경은 뚜껑이 열렸다.“오늘 밤에 취하면 이 오빠가 괴롭혔다고 탓하지 마.”“꿈 깨. 평소에도 이기지 못했으면서, 오늘은 이연 언니가 내 옆에서 흑기사 해줄 거니까 일찌감치 포기해.”“이연은 술 안 마실 거야.”육현경이 불쑥 말을 던지자 예수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왜?”“아무튼 마시면 안 돼. 마시고 싶으면 너희들끼리 마셔.”예수진은 너무나 불쾌했다.소이연은 옆에서 조금 난처했다. 예수진과 몇몇 남자들 사이가 좋은 것이 눈에 확 띄었다. 육현경이 예수진을 데리고 종종 친구들과 놀았던 것 같다. 그런 육현경이 갑자기 자신을 두둔해 나서니 예수진이 불쾌한 건 당연하다 여겼다.소이연이 다급하게 해명했다.“내가 귀를 다쳐서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 술을 끊으라고 했어요.”“귀를 다쳤
방금 하도경과 너무 급하게 마셔서 속이 울렁거렸다.계속 이렇게 마시다간 무슨 실수를 할지 상상이 안 되었다.“괜찮아요?”소이연이 걱정스럽게 물으며 따뜻한 물을 건넸다.“급하게 마시면 위가 나빠져요.”“고마워요.”예수진이 물컵을 받았다.소이연의 걱정스러운 말투에 감동하여 저도 모르게 진심을 말해버렸다.“소이연 언니, 정말 좋아해요.”그 말에 소이연의 가슴이 움찔했다.“하지수라고 알아요?”“알아요, 저번에 같이 밥 먹었잖아요.”“내 절친 중 한 명이에요.”예수진이 진지하게 말했다.“오늘부터 내게 절친 한 명이 더 생겼어요.”소이연이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몰라 애먼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예수진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진심으로 대하기 때문에 마음이 더 복잡하고 고민이 되었다.소이연이 시선을 돌려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육현경을 바라보았다.더는 미루지 말고 오늘 저녁에 다 말할 작정이다.식사가 끝난 뒤에도 흥이 쉽게 가시지 않는지 하도경이 한사코 노래방으로 가자고 난리를 쳐서 16층 노래방으로 갔다.VIP 룸을 잡고 일행이 들어갔다. 대여섯 명이 놀기엔 좁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여유롭지도 않았다. 그저 인테리어만 과하게 화려했다.하도경은 워낙 외향적인 데다 술까지 마셔서 더욱 흥을 주체하지 못했다.제일 먼저 마이크를 잡고 혼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예수진도 술김에 흥이 나서 하도경의 마이크를 빼앗으며 노래를 불렀다.두 사람은 마치 어린 아이처럼 정신없이 뛰며 놀았다.“재미없으면 먼저 데려다 줄게.”육현경이 술 냄새를 풍기며 말했다.“아니야.”소이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다들 한창 흥이 나서 놀 때 주인공인 육현경이 자신과 나가버리면 분위기가 썰렁해질 것이 뻔했다.“가고 싶으면 얘기해. 내가 데려다줄게.”육현경이 중얼거리듯 계속 말했다.“내가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소이연은 가슴이 뜨끔했다.육현경이 몸을 일으켜 계지원 옆으로 걸어갔다.남자들끼리 또 마시기 시작
음악이 흘러나오자 소이연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그 순간 술을 마시던 사람들이 소이연의 노랫소리에 전부 행동을 멈추었다.소이연의 노래 실력에 다들 깜짝 놀랐다.예수진이 귀를 어루만졌다.“가수해도 되겠어. 나보다 더 잘 부르는데?”“너 연기과 아니었냐?”하도경이 일깨워주었다.“멀티로 발전하면 안 되나?”“노래는 잘 부르는데… 가사가 좀…”하도경이 육현경에게 물었다.“뭘 암시하는데?”육현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무슨 생각하는 거야? 그냥 노래야. 설마 우리 오빠가 제3자라고?”예수진은 어이가 없었다.“…”하도경이 급하게 선을 그었다.“난 아무 말도 안 했어.”한 곡이 끝나자 다들 박수를 보냈다.소이연은 노래에만 집중하느라 옆에서 다들 열심히 듣고 있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박수소리에 왠지 쑥스러워 부랴부랴 마이크를 놓고 화장실로 들어가버렸다.친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어쨌든 마음 놓고 부를 수 없었다.게다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육현경에게 확실하게 말한 뒤 이들과 더는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소이연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문 앞에 육현경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집에 데려다 줄게.”자신이 어색하고 불편한 걸 눈치챈 모양이다.“육현경.”소이연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할 말이 있어.”“응?”육현경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술을 마신 탓인지 눈 앞이 흐려서 왠지 평소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다.“우리 헤어지자.”소이연이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육현경의 늘어뜨린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무뚝뚝한 얼굴에서 왠지 한기가 느껴졌다.하지만 화를 내거나 다그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내가 뭘 잘못했어?”너무 갑작스러웠다.내가 뭘 잘못했지?내 친구들이 마음에 안 들었나? 아니면 내 생활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나?소이연이 더는 사람을 믿지 못하겠다고 해서, 자신의 일상을 보여주기 위해 하도경이 축하해 주겠다고 할 때 허락한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하고 익숙해지면
육현경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말 몰랐다.“당신과 예수진, 둘이 사귀는 사이지?”소이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확실히 말하지 않으면 계속 얽히게 되니까.전에는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 큰 어른들끼리 적이 아닌 이상 서로 난처하게 지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런데 몇 번이나 거절해도 말 길을 알아듣지 않으니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순간 육현경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충격을 받았는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소이연이 계속 말했다.“내가 아는 예수진은 좋은 여자야. 성격이 털털해서 걱정이긴 하지만 마음씨가 착하고 순수해.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무슨 사연이 있는지 난 잘 몰라. 어쩌면 그저 각자의 수요에 의해 만날 뿐, 영원히 함께하자는 약속 같은 건 필요치 않은 사이일 수도 있지. 난 수진이가 너한테 좋은 대접을 받을 가치가 있는 여자라고 생각해. 만약 가정을 이루어서 육민에게 엄마를 찾아주고 싶다면 수진은 괜찮은 선택일 거야.”“괜찮긴 하지.”육현경이 인정했다.소이연은 가슴이 조여오듯 괴로웠다.하지만 무시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였다.산전수전을 겪고 났더니 감정 때문에 받은 상처에 이젠 면역력이 생긴 모양이다.게다가 자신과 육현경 사이는 죽고 못 사는 사이까진 발전하지 않았다.“그래서 당신이 물러나겠다?”육현경이 물었다.“그 때문이 아니야. 그저 두 사람이 잘 어울려서 진심으로 축복해 주고 싶어.”소이연이 진심을 털어놓았다.“우리 둘, 그리고 수진이까지. 앞으로도 친구처럼 지냈으면 좋겠어.”“내가 친구가 부족해 보여?”육현경이 되물었다.“그럼 앞으로 안 보면 되겠네.”소이연이 마지막 말을 던지고 돌아섰다.육현경이 마른 침을 삼키며 싸늘하게 말했다.“소이연, 정말 대범하네.”소이연이 입술을 오므렸다.솔직히 놓아줄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특히 육민,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아쉬운 건 육민 뿐이었다.“그렇게 내가 싫어?”육현경이 갑자기 소이연의 손목을 잡았다.소이연이 깜
오빠?소이연이 움찔했다.육현경이 품에 안긴 그녀의 움직임을 감지했다.“이리 와.”육현경이 부르자 예수진이 우물쭈물하며 다가왔다.술을 거하게 마셔서 얼굴이 빨개진 데다 걸음걸이마저 휘청거렸다.예수진은 은근히 두려웠다. 그 모습은 마치 잘못을 저질러서 부모님한테 혼날까 봐 잔뜩 겁을 먹은 어린아이 같았다.“오빠, 난 절대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을 훔쳐보려고 온 게 아니야. 그냥 쉬가 마려워서.”그녀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소이연은 원래 육현경의 입술을 피하려고 발버둥을 쳤었다.그런데 이 순간 너무나도 난처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 육현경의 가슴을 점점 파고들었다.육현경이 소이연의 난처함을 알아차리고 가만히 있으면서 또 물었다.“너 내 할아버지를 어떻게 부르지?”“오빠, 무섭게 왜 이래?”예수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떴다.헐, 무슨 연애를 IQ까지 버려가면서 하냐?하지만 육현경의 따가운 시선에 고분고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외할아버지.”“이연 씨, 이제 나와 예수진의 관계를 알겠지?”육현경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는 소이연에게 물었다.방금 육현경이 깨물었던 귓불이 아까보다 더 빨개졌다.소이연은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아니면 내가 가족증명서까지 보여줄까?”소이연이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예수진이 이상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오빠, 왜 그래?”“아니야, 어떤 사람이 글쎄 내가 양다리…”육현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소이연이 갑자기 고개를 들고 작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기 때문이다.소이연이 눈빛으로 더는 말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이렇게 창피한 일을 육현경 외 제3자가 아는 걸 원하지 않았다.육현경이 눈웃음을 쳤다.손바닥에서 육현경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 느낌이 마치 따뜻한 입술이 몸에 입맞춤하는 것 같아 얼른 손을 떼었다.두 사람의 엉뚱한 모습을 지켜보던 예수진은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대체
“송승우가 또 수술받으니까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냥 입 다물고 있은 거잖아. 그렇게라도 응어리 좀 풀라고.”“나 그 정도로 속 깊은 사람 아니야. 그냥 말하기 싫었을 뿐이지.”“난 못 속인다니까.”매번 거짓말을 할 때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이는 송문수이기에 하지수는 그가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다 알 수 있었다.“문수 씨는 진짜 좋은 사람이야.”하지수는 송승우보다 송문수가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물론 송승우도 부모님을 아주 공경했지만 어릴 때부터 사랑을 독차지해온 그는 다 커서도 집안의 관심만 바랐지 집안에는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늘 형에게 밀려나 찬밥신세이던 송문수는 항상 부모님 곁을 지키며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하는데 발 벗고 나서곤 했다.“나 이제 잘 거야.”그래서 대견스러워서 한 말인데 송문수는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는 게 부끄러웠는지 귀가 빨개져서는 욕실로 도망가버렸다.그런 송문수의 뒷모습을 보던 하지수는 자신이 따라온 게 정말 다행이라고 여겨졌다.만약 송문수를 혼자 보냈다면 그는 지금까지도 가족들의 이해를 받지 못한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었을 텐데 하지수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진 것 같았다.어릴 때부터 모든 사람의 시선은 송승우에게 집중되어있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 하지수도 포함이었다.그럼 송문수도 질투하고 부러워할 만도 할 텐데 하지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송문수가 송승우의 것을 탐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그래서 그 속이 얼마나 문드러졌을까 싶어 하지수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하지만 지금은 송승우도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시부모님도 아들을 지키겠다고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기에 하지수가 이런 슬픔에 잠겨있을 때가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이런 생각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걸 막고자 눈을 감았다 뜨며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온 다음에 송문수를 제대로 달려줘야겠다고 다짐했다.샤워를 마친 송문수는 잠을 청하려고 침대에 누웠지만 자신이 정말 잘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었다.눈만 감으
병원을 나선 송문수가 택시를 잡아타려고 할 때 하지수가 뛰어나오며 그를 불렀다.“문수 씨!”하지수를 본 송문수는 당장이라도 차를 출발시키고 싶었지만 그녀가 아주 다급해 보여서, 그녀에게 욕을 먹더라도 그냥 돌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문을 연 채로 하지수가 탈 때까지 기다렸다.사실 하지수도 송문수가 저를 기다리지 않고 그냥 가버릴까 봐 걱정됐는데 여전히 멈춰있는 차에 안심하며 빠르게 올라탔다.기분이 나빠서 호텔이든 어디든 가서 혼자 있고 싶어 하는 건 알겠지만 그러다가 연락이라도 안 되면 하지수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기에 이렇게 따라 나온 거였다.하지수가 차에 앉은 걸 확인한 송문수가 차를 출발시켰고 둘은 정적 속에서 호텔로 향했다.하지수는 몇 번이나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고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무심히 창밖만 내다보는 송문수에 차마 입을 뗄 용기가 생기지 않아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송문수에게도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그런데 호텔 방으로 들어오자 송문수는 하지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하지수, 나 욕할 거면 빨리해. 참을 필요 없어. 욕 다 하면 나도 잘 거야.”“뭐?”예기치 못한 말에 하지수가 어리둥절해 하며 묻자 송문수가 말을 이었다.“송승우가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와중에 잠이나 자겠다는 내가 이해 안될 수도 있지만 나도 어제부터 못 자서 지금 좀 피곤해. 사람이 오랫동안 잠을 못 자도 심장마비로 죽거든.”“나 당신이랑 같이 자러 온 거야. 어제 나도 잘 못 잤어.”“당신이 마음 불편해서 못 잘까 봐 온 거라고. 나는 당신이 안 잔다고 버틸까 봐 그게 더 걱정됐어.”자신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하지수의 반응에 송문수는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나도 당신한테 화낼 줄 알았어?”“화내는 게 당연하잖아.”씁쓸한 투로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송문수에 하지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어차피 송승우도 언젠가는 알게 될 사실이었어.”그 말을 들은 송문수는 역시나 하지수도 제가 송
“왜 이래? 왜 갑자기 안 보이는 거야?”눈도 깜빡이지 않고 송승우를 바라보던 허영지는 갑자기 내려진 커튼에 슬픈 눈을 하고 병실을 나서는 간호사에게 물었다.“환자분 쉬셔야 하니까 일단은 다들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 내 아들 옆에 있을 거예요.”“환자분이 가족들 보는 걸 원치 않습니다.”간호사의 입에서 나온 믿기지 않는 말에 허영지는 또 눈물을 터뜨렸다.“왜 우릴 안 보겠다는 거예요? 안에서 혼자 있으면 힘들 텐데...”“환자분한테도 혼자만의 시간을 줘야죠.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 일단은 돌아가 계세요.”“난 안 가요.”허영지가 고집을 피우자 마찬가지로 송승우 옆에 있고 싶었던 송기명도 움직이지 않았다.“문수 넌 이제 그만 가.”“어젯밤도 샜으니 돌아가서 자.”쌀쌀맞은 엄마의 말투에서 저건 관심이 아니라 타박임을 눈치챈 송문수는 엄마가 저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 호텔에 가 있을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세요. 바로 올게요.”하지만 송문수의 말에도 허영지는 대답 없이 차가운 등을 보일 뿐이었다.그에 고개를 떨군 송문수는 돌아서기 전 마지막으로 줄곧 허영지의 곁을 지키며 한마디도 않고 있던 하지수를 쳐다보았다.말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도 제가 송승우에게 사실을 말해버렸다고 원망하는 것 같아서 송문수는 결국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하지만 하지수는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송문수를 안쓰럽게 쳐다보고 있었다.송문수가 먼저 다리를 잘라냈다는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믿고 있던 하지수는 그가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혼자 속앓이를 하는 것 같아 입술을 말아 물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예전의 송문수라면 모르겠지만 함께 일 하면서 봐왔던 송문수는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만약 그가 정말 상황파악도 못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큰 회사를 성공적으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혹시라도 너무 속상해서 해명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봐 하지수는 용기를 내어 시부모님을 보며 말했다
의사의 질문에 송문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답했다.“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걸 알게 됐어요.”“그걸 말하면 어떡합니까! 아직은 회복도 채 안 됐고 그런 큰 충격을 받으면 회복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가족분들이 그 정도는 주의해주셔야죠.”의사의 말이 끝나자 허영지도 분노의 화살을 송문수에게로 돌려버렸다.“넌 어쩜 아직도 이러니? 승우가 어떤 상황인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 나이 먹었으면 할 말 못 할 말 정도는 가려야지. 만약 승우가 너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도 따라 죽을 거야!”허영지가 목놓아 울자 송기명도 미간을 찌푸린 채로 허영지를 다독이며 말했다.“오늘 일은 나도 실망이다 너한테. 서른 살 넘으면 뒤도 안 보고 일부터 저지르는 버릇은 좀 고칠 줄 알았는데.”가족들의 질타에 해명을 하려던 송문수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렸다.어릴 때부터 송승우와 송문수가 싸울 때면 부모님은 늘 송승우의 편만 들어줬기에 송문수는 지금 이 상황에 송승우가 스스로 알아챘다고 한들 저를 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그래서 입 아프게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선생님, 그럼 이제 어떡해요?”“애가 제 몸 상태를 알았으니 죽겠다고 하면 어떡해요... 선생님, 우리 아들 좀 살려주세요, 이제 고작 서른 좀 넘은 앤데 미래가 창창한 애를 제가 먼저 보낼 순 없잖아요...”대성통곡을 하는 허영지를 향해 의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지금은 별문제 없는데 계속 이렇게 우울해하다가 갑자기 이성을 잃으면 그땐 정말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미 환자분이 본인 몸 상태를 다 알게 됐으니 가족분들은 위로해주면서 환자분이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우리 아들 국내 최고 연구기관에서 일하는 애예요, 어릴 때부터 1등을 놓친 적이 없던 애라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텐데... 승우가 제 몸 상태를 알게 됐을 때 얼마나 충격이 컸을지만 생각하면 저도 죽을 것 같아요...”“차라리 그냥 내가 다치고 말지,
장기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오른쪽 다리에만 느낌이 없는 게 아무래도 불길했다.“형, 진정하라니까.”“마취가 아직 안 풀려서 그런 거야. 마취만 풀리면 정상으로 돌아올 거니까 좀 기다려봐.”“아니야, 아무 느낌도 안 나잖아. 그냥 없어진 것 같아...”송문수의 위로에도 흥분하며 몸을 움직이던 송승우는 점차 제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지금 송승우는 자신이 다리를 잃었다는 생각에 송문수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환자의 강한 움직임에 여러 가지 중요한 수치가 변하자 중환자실에서부터 경보음이 울려고 빠르게 뛰어온 의사들은 모니터에 표시된 수치들을 보더니 곧바로 송승우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송승우의 심장박동이 놀라울 정도로 느려진 걸 본 송문수는 깜짝 놀라며 재빨리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겼다.한편 하지수의 거듭되는 설득에 밥을 먹고는 송기명과 허영지는 아들 걱정에 일찌감치 병원으로 나왔는데 때마침 수술실로 뛰어가는 송문수와 침대에 누워있는 송승우를 보게 되었다.위험한 고비는 넘겼다더니 또 무슨 일로 수술실에 가는지 몰랐던 그들은 어두워진 의료진들의 안색을 살피며 놀란 심장을 부여잡았다.마음 약한 허영지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하자 송기명과 하지수가 그녀를 부축했고 하지수는 괜찮을 거라고 허영지를 다독이며 그녀와 함께 수술실 앞으로 다가갔다.가족들이 온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던 송문수를 하지수가 나지막하게 불렀다.“문수 씨.”그에 고개를 홱 돌린 송문수는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아까 의료진들을 도와 송승우를 수술실로 옮길 때 송승우의 손이 그의 손에 닿았는데 그게 사람의 손이라고는 전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워서 송문수는 아직도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왜 그래, 말 좀 해봐.”“승우, 우리 승우 괜찮은 거지?”하지수는 하얗게 질린 송문수가 걱정됐지만 허영지는 송문수의 안색은 신경 쓰지 못하고 송승우의 안부를 물었다.송문수는 가족들의 질문에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송승우가 본
“너 혼자야?”힘겹게 내뱉은 목소리였지만 그게 너무나도 미약해서 송문수는 송승우에게로 가까이 붙은 채 몸을 숙여야만 그가 뭐라고 하는지 그나마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엄마 아빠도 너 걱정했어.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면회 못한다고 해서 어제 호텔로 먼저 보냈어. 보고 싶으면 지금 바로 전화할게.”송문수의 말에 괜찮다며 고개를 젓던 송승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나 많이 다쳤어?”“생명엔 지장 없대, 그런데 교통사고가 워낙 크게 나서 장기들이 많이 손상됐대. 그래서 여기 당분간 있는 건데 최고로 좋은 의료진들만 붙였으니까 걱정 마, 곧 괜찮아질 거야.”“나 얼굴은 멀쩡해?”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송문수는 솔직하게 말해주었다.“얼굴이 붕대로 다 감겨있어서 안 보여.”“눈, 코, 입, 귀는 멀쩡한 것 같아.”“팔다리는 다 있어?”하지만 또다시 들려온 질문에는 곧바로 답을 하지 못하는 송문수였다.이렇게 빨리 저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지만 교통사고에서 깨어난 환자가 가장 궁금해할 게 본인의 목숨과 몸 상태일 테니 송문수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교통사고에서 가장 흔한 후유증이 얼굴 흉터와 장애라서 저런 질문을 하는 건 알겠지만 송문수는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눈을 피하기만 했다.“송문수.”“다 있어.”결국 의사의 당부 때문에 송승우의 회복을 돕고자 거짓말을 하긴 했지만 송문수의 긴장한듯한 반응에서부터 송승우는 무언가 눈치를 챈 듯했다.그 힘든 와중에도 그는 흥분을 한 건지 언성을 살짝 높였다.“너 아까 망설였어.”“거짓말이지?”“아니야. 정말 다 멀쩡해.”“맹세해 그럼.”“맹세할게.”죄책감이 점점 켜졌지만 송승우의 감정변화를 느낀 송문수는 아직은 중환자라 큰 충격은 피해야 하는 송승우를 위해 일부러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그게 거짓말이면 넌 평생 하지수랑 같이 못 있어.”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는 송승우에 송문수는 마른 침을 삼켜냈다.제 목숨을 담보로는 맹세할 수 있어도 하지수와의 감정을
예수진:[그럼 너랑 지수 다 서울에 있는 거야? 아직 병원이야?]예수진:[부모님은 좀 어떠셔? 충격이 크시지?]그들의 문자에 하나하나 답장을 하던 송문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누구한테 일어나도 참혹한 비극인데 그 일이 제 형한테 일어났으니 송문수는 어떻게 송승우를 바라봐야 할지 몰랐다.근심 속에서 밤이 깊어지자 하지수가 송문수에게 문자를 보냈다.[자?][아니.][병원에서 잘 수 있으면 어디서 눈이라도 좀 붙여. 문수 씨도 쉬어야지, 어머님 아버님이 못 버티시면 남은 건 당신뿐이야.][알아 나도. 넌 왜 아직 안 자? 시간 늦었는데.][당신이 걱정돼서.][뭐하러 날 걱정해, 난 괜찮아. 송승우가 문제지...]그의 문자에 어떤 말로 답을 해야 할지 몰랐던 하지수는 말을 잇지 못했고 송문수도 그만 대화를 끝내려 했다.[늦었으니까 얼른 자.][응.][나 대신 부모님 좀 잘 챙겨줘, 엄마 아빠 쓰러질까 봐 나 너무 무서워.][내가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 마.]핸드폰을 내려놓은 송문수는 중환자실 앞에 놓인 딱딱한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중환자실에서 나온 송승우가 바로 입원할 수 있게 병원에서 VIP 병실을 열어줬지만 송문수는 그 편한 곳도 마다하고 굳이 송승우 옆을 지키고 있었다.아무리 송승우라 해도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 봐.불편한 잠자리 때문에 아침까지도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던 송문수는 간호사의 친절한 부름에 서서히 눈을 떴다.“보호자분?”잔뜩 충혈된 눈을 하고 몸을 일으킨 송문수는 의아한 눈으로 간호사를 바라보았다.“환자분이 보호자분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송승우 씨가요?”중환자실을 가리키며 당황한 듯 묻는 송문수를 향해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송문수 씨가 중환자실로 와줬으면 하세요.”“면회 안된다면서요?”“좀 전에 선생님이 또 몸 상태 체크하셨는데 이젠 다 정상수치로 돌아와서 면회 가능하시대요. 대신 시간만 좀 주의해주세요. 아직 몸이 약하셔서 이럴 때는 저희도 환자분 부탁이라면 뭐든 다
시부모님의 몸 상태를 안 그래도 걱정하고 있던 하지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송기명은 더욱이 쓰러진 지 얼마 안 된 터라 이렇게 몸을 혹사시키다가는 정말 큰 일이 날 것 같았다.“아버님, 어머님, 여긴 문수 씨한테 맡기도 우린 먼저 호텔에 가 있어요.”하지수의 거듭되는 권유에 송기명과 허영지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하라고 송문수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나서야 자리를 떴다.“알겠다니까요. 걱정 마시고 가세요. 제가 입구까지 모셔다드릴게요.”송기명과 허영지를 차에 태운 송문수는 조수석에 앉은 하지수를 바라보았다.모든 감정을 가슴속에 꾹꾹 눌러 담은 채 한마디도 하지 않던 그녀도 송문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두 사람의 눈엔 미련이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방향등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송문수는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중환자실 복도에 앉은 송문수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리고 핸드폰을 켜보았다.역시나 수많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그의 알림창을 꽉 채우고 있었다.다른 문자는 싹 다 무시한 송문수는 친구들과의 방, 그리고 소이연, 예수진이 함께 있는 단톡방, 이렇게 두 곳에만 답장을 했다.육현경:[대체 무슨 일이야?]계지원:[문수야, 너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아저씨 생신 파티는 왜 취소하는 거야?]하도경:[말 좀 해봐, 전화도 안 받고. 이러다가 다들 답답해 죽겠어,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또 다른 단톡방에 있던 소이연과 예수진 역시 걱정스러운 문자를 보내왔다.소이연:[문수 씨, 무슨 일 있는 거죠?]예수진:[송문수, 답장 안 해? 기사 보니까 아줌마 안색도 엄청 안 좋던데 무슨 일이 나긴 난 거지?]예수진:[말 좀 하라고 이 자식아!]소이연:[수진 씨 진정해요 일단. 문수 씨랑 지수 씨가 바빠서 답장을 못 하는 것 같은데 급한 일 다 보고 나면 우리한테도 알려줄 거에요.]예수진:[알겠어요, 기다려봐야죠 뭐.]자신의 화면을 가득 채운 문자를 보던 송문수는 손가락을 움직여
송문수가 사 온 물을 건네도 부모님은 고개만 저으며 손을 모으셨다.그래서 하지수에게 건네자 그녀는 잠시 멈칫하다가 물을 받아들었다.서울에 온 뒤 송씨 일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줄곧 자리를 지키며 송승우의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이번에는 송승우가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수는 받아든 물이라 몇 모금 마시기는 했지만 물을 마시면서도 신경은 온통 송승우에게 쏠려있었다.그런데 그때 하지수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송승우의 몸을 보게 되었다.너무 아파서인지 아니면 힘이 없어서인지 몸은 미세한 떨림 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송승우의 눈이 서서히 떠지고 있어 하지수는 잔뜩 흥분한 채 외쳤다.“승우 오빠 일어났어요!”“문수, 문수야! 얼른 의사 불러와!”하지수의 말에 정신을 차린 부모님이 송문수에게 의사를 데려오라 했고 송문수의 부름을 받고 달려온 의사는 중환자실에서 각종 검사를 진행했다.방음효과가 워낙 좋은 중환자실이라 의사와 송승우의 대화를 듣지 못했던 가족들은 또다시 초조해 났다.한참이나 지나서 중환자실 빠져나오는 의사에 허영지가 다급히 달려가 물었다.“선생님, 저희 아들은 좀 어떤가요?”“방금 검사 진행했는데 생명엔 아무 지장 없습니다. 이제 안심하셔도 돼요.”“하지만 아직 회복이 덜 돼서 여기서 며칠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일반병실로 옮겼다가 세균감염이라도 되면 큰일이거든요.”“알겠습니다, 입원은 며칠 하든 상관없으니까 저희 애 잘만 치료해주세요. 그런데 저희가 들어가서 같이 있어 주는 건 괜찮을까요?”“아직은 들어가지 마세요. 환자분도 방금 깨어나셔서 머리가 어지러울 겁니다. 오늘은 그냥 쉬게 놔두시고 내일 상태 좀 나아지면 그때 들어가 보시게 도와드릴게요.”“감사합니다 선생님!”“아닙니다.”감격 어린 허영지의 말에 의사가 한마디 더 보탰다.“환자가 아직은 본인 몸 상태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면회하실 때도 다리 절단한 사실은 일단 말하지 마세요. 환자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