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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9화

Author: 온유
“주문하신 생강차 도착했습니다. 회사 정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데 직접 내려서 받으실 건가요? 아니면 제가 경비실에 두고 갈까요?”

“생강차요? 주문한 적이 없는데요. 전화 잘못 주신 것 같아요.”

도아린이 전화를 받으며 어리둥절했다.

“도 사장님 맞으세요?”

“...네.”

“그럼 맞아요. 혹시 남자 친구분이 주문한 게 아닐까요?”

도아린이 손으로 이마를 문지르자 윤가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경비실에 맡겨주세요. 제가 사람 보내서 가져가게 할게요.”

전화를 끊고 도아린은 계속해서 비서들과 함께 배건후의 기획안을 어떻게 실행할지 논의했다.

윤가인이 보온 가방을 들고 올라왔을 때, 배건후의 메시지도 도착했다.

[곧 생리 기간이잖아. 날씨도 추워지고 해서 따뜻한 걸 시켰어.]

도아린이 다이어리를 확인하니 정말로 생리 날짜가 이틀 남았다.

결혼 3년 동안 배건후는 한 번도 이런 걸 신경 쓴 적이 없었다.

‘남자란... 결국 놓치고 나서야 그리워지는 법이구나.’

“좀 뜨거워요.”

윤가인이 생강차를 건네며 주의했다.

도아린은 대충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회의를 이어갔다.

메시지를 받은 배건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한참을 논의한 끝에 고유리는 내일 바로 프로젝트 책임자와 만나기로 했다.

강재민의 프로젝트를 포기하면서 입찰은 다시 시작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젝트를 노리고 있지만 그걸 독차지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한경 그룹만이 현재 가장 입찰 가능성이 있는 회사였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도아린은 어두워진 하늘을 보았다.

“날씨가 안 좋으니 모두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비서팀의 직원들과 세 명의 부사장은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었고 전용 운전기사들이 이동을 돕고 있었다.

도아린은 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들며 외투를 챙겼다. 그리고 빠트린 물건이 없는지 확인한 후 불을 끄고 문을 잠갔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가는 순간, 도아린은 갑자기 몸에 이상한 열기를 느꼈다.

“으악!”

그녀는 급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옷을 가장 가까운 자리 위에 던져놓고 공용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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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말고!”주현정은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콧방귀를 뀌듯 말했다.“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린이가 너한테 다시 기회를 줘야 뭐라도 되는 거지.”반쯤 물을 마시던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눈을 번쩍이며 배건후를 바라봤다.“설마, 아린이가 너 용서한 거야?”“아직 아니에요.”배건후의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내가 하는 걸 봐서... 용서할지 말지 정하겠대요.”“난 또… 나가!”주현정은 소파에 있던 쿠션을 집어 던졌고 쿠션은 정확히 그의 어깨에 명중했다.배건후는 묵묵히 쿠션을 주워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아버지 장례는 제가 처리할게요. 남은 소송 문제도 계속 맡아서 진행할 거고요. 엄마는 몸부터 잘 회복하세요. 제 결혼식에 참석하셔야 하니까요.”그때는 그저 혼인신고 하나만 조용히 올렸던 그들이었다.하지만 이번엔 다르다.도아린을 다시 품에 안게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성대한 결혼식을 해주겠노라 그는 다짐하고 있었다.샤워를 마친 배건후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었다.알림창에 뜬 ‘새로운 친구 추가 수락’ 메시지에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고 곧장 도아린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 들어갔다.같은 시각.도아린은 이불 속에 몸을 말고, 배 위에 핫팩을 얹은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윤명희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아린아, 우리 곧 귀국해! 그리고 깜짝선물도 준비했어.]몸을 옆으로 돌리다가 뜨거운 찜질팩이 배에 닿자 도아린은 놀라며 핸드폰을 내려두었다.다시 폰을 들어 올렸을 땐 배건후와의 채팅창이 열려 있었고 화면엔 ‘상대방이 입력 중...’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하지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아무런 메시지도 도착하지 않았다.“...뭐지. 편지라도 쓰는 건가? 이 정도면 500자는 넘었겠네...”도아린은 성질이 나 채팅창을 닫고 다시 윤명희의 메시지창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조금 전, 배석준의 사망 소식을 전했고 주현정에게 위로의 말을 해달라며 부탁했다.잠시 후, 윤명희의 영상통화가

  • 또 한 번의 거절   제902화

    도아린이 배건후의 허리를 끌어안는 순간, 그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하지만 그다음 순간, 그의 두 팔이 강하게 그녀를 감쌌다.배건후는 천천히 몸을 숙여 도아린의 어깨와 허리를 깊숙이 감쌌다.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품으려는 듯, 그의 넓은 품으로 그녀를 감쌌지만 결코 억지로 끌어안지 않았다.마치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처럼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도아린이 거부하지 않자 배건후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가슴 깊이 각인된 그 익숙한 향기를 허락받은 사람처럼 탐하듯 들이마셨다.수없이 꿈에서 그리던 사람, 밤새 뒤척이며 떠올리던 그 사람이 이제 그의 품 안에 있었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리며 숨을 고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내 재산은 쳐다보지도 마요. 한 푼도 못 주니까.”배건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턱을 문지르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내가 번 돈도 다 너한테 줄 건데?”도아린은 피식 웃으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눈물을 닦았다.“일단 하는 것 봐서요. 오늘은 어머님 곁에서 좀 지켜드려요.”배건후는 아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돌아서는 순간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블랙리스트에서 나 좀 빼줘.”도아린은 그의 손을 툭 뿌리치고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배건후는 멀어져가는 차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차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천천히 몸을 돌렸다.복도로 돌아오는 길, 주현정의 방 앞을 지나던 배건후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세상 사람들은 주현정과 배석준 부부를 부러워했다.부부 금슬도 좋고 자식까지 둘이나 낳아 완벽한 가족처럼 보였지만 배건후가 기억하는 부모의 모습은 달랐다.어머니는 여동생 배지유를 낳고 나서 줄곧 한약을 달고 살았으며 아버지는 처음엔 다정하게 곁을 지켰지만 시간이 갈수록 냉담해졌다.해외 지사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아버지는 말로는 ‘가족과 떨어지기 싫다’고 했지만 정작 서류 작업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그때부터였다. 그는 가족이 아닌

  • 또 한 번의 거절   제901화

    “네.”배건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배석준의 사망 소식보다도 도아린과 배건후가 함께 왔다는 사실이 주현정에게는 더 큰 위로였다.가정부는 도아린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식탁을 차렸고 세 사람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저녁 식사를 나눴다.식사를 마친 후, 배건후는 문 앞까지 도아린을 배웅했다.짙은 어둠이 내린 밤. 그 속에서 배건후가 입을 열었다.“와줘서... 고마워.”“어머님은 늘 절 따뜻하게 대해주셨잖아요. 당연히 와야죠.”도아린의 발걸음이 멈췄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김지민의 수법은...”“이미 장 변호사한테 사건을 맡겼어.”배건후의 눈동자가 밤보다도 깊고 어두웠다.그 안에는 복잡한 감정과 지울 수 없는 우울이 고여 있었다.“만약 맹세라는 게 통한다면, 난 기꺼이...”“그런 말 하지 마요!”도아린은 생각할 틈도 없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날렵한 입술, 차가운 감촉.하지만 이상하게도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온몸이 찌릿했다.도아린의 눈이 크게 흔들렸고 손을 거두기도 전에 배건후가 먼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남자의 손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감싸 쥐었다.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단호했다.“난 진심이야.”도아린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심장이 세차게 뛰었고,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배건후는 오히려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차가운 봄밤의 공기 속에서 그의 심장은 거칠게 뛰고 있었다.“내가 널 처음 본 건, 네가 구겨진 지폐로 육하경에게 빵을 사주던 날이었어.그때부터... 난 육하경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지.”“건후 씨...”도아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날 밤, 배건후는 육하경과 권투 연습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차 안에 담배가 떨어져 근처 슈퍼에 들렀고 우연히 유리창 너머로 쓰레기통을 뒤지는 육하경의 모습을 목격했다.육민재는 육하경을 ‘사촌 동생’이라 소개했지만 재벌가에서 초대 손님을 그

  • 또 한 번의 거절   제900화

    연남시 프로젝트의 인수인계 절차가 마무리되자 감독 기관 측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도로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 있었고 도로 한가운데 남아 있던 핏자국도 청소 차량에 의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배석준을 감시하던 사람이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도아린에게 보고했다.배석준이 죽었고 아내인 김지민이 몇 번이나 실신할 정도로 오열했다고 말이다.그의 말에 의하면 김지민이 의심을 받기는커녕, 경찰이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고 사고 차량의 운전자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CCTV를 확인한 결과, 배석준이 스스로 도로로 걸어 들어갔기에 주된 책임은 배석준에게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김지민이 이 마지막 돈벌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하며 난리를 쳤다.자전거를 탄 할아버지도 보상금을 내기가 두려워서 김지민보다 더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병원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도아린은 배석준와 김지민이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말이다.퇴근 후, 도아린은 배건후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그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내가 직접 우린 거야. 한번 마셔봐.”차를 받아 든 도아린은 그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그녀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눈치챈 배건후는 순간 긴장하기 시작했다.배석준이 연성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내뱉은 모욕적인 말들도 마찬가지였다.배건후도 도아린에게 이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배석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게 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아린아, 걱정 마. 한경 그룹은 네 거야.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아니, 그게 아니라... 아버님이...”도아린은 어떻게 말하면 배건후에게 상처가 덜 될지 고민했다.배석준이 아무리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에게는

  • 또 한 번의 거절   제899화

    배석준은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내 선택을 존중한다는 건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도아린을 위해서라면 내 생사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야?’한참이 지나서야 숨을 고른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그가 전화를 건 사람은 주현정이었다. 그는 주현정이 자신과 같은 생각일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전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전에 휠체어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배석준이 급히 뒤를 돌아보자 김지민이 서 있는 것이었다.“너 왜 여기 있어?”그녀는 배석준과 함께 산 고급 브랜드 옷을 입고 있었다.김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석준 씨가 제 남편이잖아요. 석준 씨가 어디 있으면 저도 옆에 있어야죠.”“이거 놔!”배석준은 뒤로 돌아보려 했지만 김지민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난 이미 소송을 제기했어. 우리 이제 곧 부부가 아니야!”김지민은 휠체어를 밀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재판 날 석준 씨가 참석하지 않으면 법원에서도 판결 안 날 거예요.”“뭐라고?”배석준은 화가 났다.“또 나를 감금하려고 그래?”김지민은 몸을 굽혀 그의 옷을 정리해 주고는 웃으면서 말했다.“부부니까 싸울 때도 있고 그렇죠. 석준 씨도 결혼 중에 한 번 불륜을 저질렀으니까 이제 서로 미안할 것 없네요. 앞으로 잘살아 봐요.”배석준은 깜짝 놀라며 휠체어에서 일어섰다.그동안의 재활 덕분에 그는 조금씩 걸을 수 있었다. 좀 더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배석준은 변함없는 김지민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나서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여보! 여보!”김지민은 휠체어를 잠그고 그를 쫓아갔다.“천천히 가요!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요?”배석준은 그녀의 가식적인 모습에 신경 쓰지 않고, 힘껏 앞을 향해 걸어갔다.순간, 어떤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할아버지는 배석준이 자기를 양보해 줄 거라 생각했고 행동거지가 불편한 배석준은 할아버지가 양보해

  • 또 한 번의 거절   제898화

    소리를 따라 화장실로 찾아간 우정윤은 창백한 얼굴로 구역질을 하고 있는 배건후를 보았다.“대표님, 의사 선생님께서 위에 자극을 주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많이 마시면 안 된다니까요?”먹었던 와인을 전부 토해낸 배건후는 현기증 때문에 비틀거렸다. 위가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는 입을 헹구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침대 끝 쪽에 있는 인형을 끌어안았다.진수혁은 그보다 더 취해 있었는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변슬기가 돌아왔을 때, 송 비서가 따뜻한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대표님,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술 깨는 약 좀 사 올게요.”“제가 사 왔어요!”변슬기는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서 진수혁에게 건넸다.진수혁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변슬기의 품에 쓰러졌다.집으로 돌아온 도아린은 변슬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일북이한테 슬기 씨 데리러 가라고 하려는데 괜찮으면 답장 줘요.]하지만 변슬기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잠시 생각에 잠긴 도아린은 송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연결되었고 송 비서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지만 목소리엔 약간의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도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혹시 슬기 씨 아직 거기에 있나요?”“네. 대표님이 너무 취하시는 바람에 술 깨는 약 사러 갔어요.”비록 도아린은 변슬기에게 잘해주었고 변슬기를 데려오라고 제안한 것도 그녀였지만 도아린이 어디까지 용납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송 비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그럼 송 비서님이 슬기 씨를 잘 챙겨주세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 주시고요.”“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송 비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호텔 프런트에 자신의 신분증을 건넸다.“방 하나 주세요.”다음 날.이번 회의에 참석한 건 도시 정비국의 새 책임자였다. 그는 공손한 태도로 진수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증거는 없었지만 누구든 다 알고 있었다. 진우석이 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는지 말이다.

  • 또 한 번의 거절   제897화

    하지만 이젠 길가에서 어묵을 먹으면서 옷이 더러워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이때 명문 가문 아가씨가 지나갔다면 자기가 헛것을 봤다며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뜨끈한 꼬치를 먹어서 그런지 공복에 술을 마신 탓에 조금씩 아파져 오던 위가 좀 나아지는 듯했다. 오늘 먹은 어묵이 그동안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인 것 같았다. 물론 도아린이 사준 거라서 더욱 그랬다.등에서 그녀의 손길이 간간이 느껴졌다. 그 부드러운 손길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차단 풀어주면 안 돼?”배건후는 마지막 한 꼬치를 먹으며 물었다.도아린은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말했다.“건후 씨,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건후 씨라면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잖아요. 전...”“내가 원하는 건 너뿐이야. 너도 알잖아...”배건후는 그녀의 말을 끊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 앞에 섰다.그는 자기를 올려다보는 도아린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순 없을까?”도아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외투 호주머니에 넣은 손가락 사이에는 이미 땀이 배어 있었다.배건후는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마음속에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저번 결혼 생활이 그녀로 하여금 기대를 내려놓게 했다.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도아린이 입을 열었다.“건후 씨,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요. 건후 씨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건후 씨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저를 사랑해 주는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요. 온전히 제 능력으로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어요.”“난 전처럼 돌아가려는 게 아니야.”배건후는 단호했다.“네가 사업을 하고 싶다면 나도 온 힘을 다해서 도울 거야. 네가 가족과 함께 있고 싶다면 나도 네 가족이 되면 되잖아...”“도아린, 난 네가 예전에 보여줬던 따뜻한 모습을 바라는 게 아니야.

  • 또 한 번의 거절   제896화

    “대표님, 내일도 스케줄이 있으시잖아요. 이만...”변슬기는 시험 삼아 말을 꺼냈지만 진수혁의 눈빛에 제지당했다.그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려줄 수 있길 바랐다. 도아린이 시선을 진수혁에게 돌렸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안심해도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배건후도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스치면서 자기도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도아린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자 또 하나의 와인병이 금세 비었다. 배건후는 초점이 흐려진 듯했고 진수혁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도아린이 눈치를 주자 송 비서가 나서서 진수혁을 침실로 데려갔다.그녀는 배건후를 바라보며 물었다.“괜찮은 거 맞아요?”“응.”배건후는 힘껏 고개를 끄덕얐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도아린은 변슬기와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고 배건후를 데리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던 중, 변슬기가 갑자기 말했다.“두고 온 게 있는 것 같아요. 먼저 가세요. 전 나중에 택시 타고 가면 돼요.”말을 그렇게 했지만 도아린은 그녀가 진수혁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제가 집에 도착하면 일북이한테 슬기 씨 데리러 가라고 할게요.”변슬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아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위로 올라갔다.앞으로 걸어가던 도아린은 배건후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마치 먹이를 주면 자꾸 따라오는 강아지처럼 말이다.“대리기사 불러줄까요?”그녀가 멈춰 서자 배건후도 제자리에 섰다. 그에게서 우드 향과 술 냄새가 섞인 향이 났다.밤바람이 차가웠기에 배건후는 손을 들어 도아린의 옷깃을 여몄다.그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배건후의 깊은 눈동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도아린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려와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배건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묵 먹고 싶은데 같이 먹을래?”도아린은 오늘 밤 배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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