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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1화

Penulis: 온유
도아린이 육민재에게 다시 전화를 걸자, 육민재는 전화기 너머에서 친구와 호텔에서 프로젝트를 논의할 예정이라며 도아린도 관심이 있다면 만나러 오라고 말했다.

도아린은 바로 얼굴을 씻고 육민재가 알려준 호텔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밀크티 한 잔을 사서 울렁거리는 속을 달랬다.

그렇게 그날, 도아린은 우연히 배건후의 방으로 잘못 찾아갔었다.

“감기 걸릴라.”

배건후가 티슈를 건넸다. 도아린은 창밖으로 내밀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며 티슈를 받았다.

“건후 씨.”

도아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내가 방에 잘못 들어갔을 때... 건후 씨는 그 호텔에 왜 간 거예요?”

‘육민재가 말한 투자자가 건후 씨였을까?’

배건후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대시보드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담배 한 개를 입에 물고 담뱃갑을 다시 던져놓고 라이터를 찾으려 하자 도아린이 그의 입에서 담배를 빼앗았다.

배건후는 잠시 멈칫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날, 나는 육민재와 프로젝트를 논의하러 간 거였어.”

육민재는 그가 가진 프로젝트 중 하나에 투자하고 싶다고 했다.

배건후는 그가 도아린을 자신의 앞에 불러오기만 한다면 육민재에게도 한몫 챙겨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배지유가 그곳에 따라가서 배건후의 술에 약을 타 그와 손보미를 이어주려 했던 것이다.

배건후는 술을 마신 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미리 방으로 돌아가 찬물로 샤워하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침 그때 도아린이 그의 방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는 약 때문에 이미 몸이 달아오른 상태였고 도아린이 들어오자마자 육민재의 이름을 부르자 질투심에 결국 제어하지 못한 채 폭발했다.

그 이후로 배건후는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난 술이나 음료를 절대 마시지 않았고 도아린이 밀크티를 마시는 것조차 막았다.

그의 설명을 듣고 도아린은 피곤한 듯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댔다.

‘오해는 이렇게 시작된 걸까?’

그 오해의 시작은 결국 서로가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육민재가 그녀에게 투자자가 배건후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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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한 번의 거절   제882화

    도아린은 뒤를 돌아보며 배건후에게 뭐 하냐는 눈빛을 보냈다.“혹시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노인네에게 여지를 남겨줄까 그래요?”하지만 지금의 도아린은 그렇게 마음이 약한 여자가 아니었다.예전에 육씨 가문이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을 때도 도아린은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할 것이라고 도아린은 알고 있었다.하지만 나영옥이 본인의 생일잔치에 도아린을 초대했던 이유는 정말로 자신을 도와주려는 것이 아니라 배건후의 태도를 시험하려 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그렇지 않았다면 고단수의 노인네는 손보미가 만찬에서 도아린에게 했던 짓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또한 육민재가 그렇게 우연히 다음 날 바로 그녀의 억울함을 증명할 수 있는 영상을 찾은 것도 너무 뻔한 일이었다.도아린은 그나마 있던 옛정으로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녀에게 진흙탕에서 끌어내 주기를 바라는 건 헛된 망상이었다.나영옥은 육민재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오르려다 다시 손을 뿌리치고 도아린의 집으로 다가갔다.“내가 처리할게.”배건후가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여전히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비를 맞은 탓에 본래 병색이 짙은 그의 얼굴은 더 초췌해 보였다.하지만 그 깊고 날카로운 눈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어르신.”배건후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비 내리는 밤거리에 울려 퍼졌다.갑작스러운 목소리에 노인의 발이 미끄러져 거의 넘어질 뻔했고 육민재가 급히 부축했다.배건후의 얼굴을 확인한 육민재와 나영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방금까지 손자를 꾸짖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그저 귀신을 본 게 아닌가 애써 눈을 크게 떴다.육민재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지만 아무리 다시 봐도 눈앞의 남자는 배건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건후야. 너... 죽은 거 아니었어?”분명 육청아는 배건후가 죽었다고 말했었다.그래서 주현정은 배건후의 회복을 핑계로 회사의 고위층들이 병문안을 가지 못하게 하고 도아린이 배건후의 대리인 역할을 하도록 했다.

  • 또 한 번의 거절   제883화

    노인이 불안한 듯 육민재의 팔을 꽉 붙잡았다.그날 약을 탄 일은 가정부만이 알고 있었고 만약 육하경이 방해하지 않았다면 도아린은 별생각 없이 그 전복죽을 먹었을 것이다.그러면 나영옥의 계획대로 도아린은 꼼짝없이 육씨 가문에 이용당했을 것이고 육씨 가문은 오늘날의 어려움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었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영옥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었고 육민재의 팔이 서서히 멍이 들었다.하지만 아픔을 잊은 채 육민재의 머릿속에는 온통 배건후를 설득해 도아린의 집에 들어갈 생각만이 가득했다.“건후야, 3년 전 그 일이 내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서 너희 둘이 계속 얽히게 된 거야. 너도 도아린 씨와 다시 잘해보고 싶어서 여기 온 거잖아. 내가 들어가서 다 설명할 수 있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아린 씨와 결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너희를 이어주고 싶지 않은 욕심에 그랬어. 지금 같이 가서 내가 그때의 일들을 전부 말할게!”자세한 상황을 모르고 있던 나영옥의 얼굴이 굳어졌다.“너 이놈, 아린이를 만나면 잘 사과해! 만약 아린이가 너를 용서하지 않으면, 더 이상 집에 들어설 생각도 하지 마!”“할머니, 제가 잘못했어요.”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배건후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며 말했다.“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배건후는 더 이상 도아린을 향한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었고 결과가 어떻든, 그는 도아린에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할 생각이었다.“그만 돌아가.”배건후가 두 사람을 쫓아내듯 말했다.“너희가 한 짓을 생각해 봐. 도아린이 복수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육씨 가문의 체면을 지켜준 거야. 나도 옛정을 생각해서 더는 추궁하지 않을게. 그런데도 계속 아린이를 괴롭히면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옛정? 진짜 친구로서 옛정이 있었다면 죽지 않았다는 것도 나한테는 얘기했겠지.’육민재는 씁쓸하게 웃었다.그의 우산은 노인의 머리 위로 가져가고 자신은 거의 다 비를 맞고 있었다.“건후야, 사실 너는 이미 육하경이 바로 우리

  • 또 한 번의 거절   제884화

    “민재야...”나영옥이 목이 메어 육민재의 이름을 불렀지만 육민재는 시선을 돌리며 단호하게 차에 올라탔다.“할머니, 우리는 오지 말아야 했어요.”“하지만 육씨 가문은 이렇게 끝날 수 없어!”노인은 눈물을 흘리며 땅을 쳤다.“그때 내가 막지 않았으면 넌 도아린이랑 결혼했을 거고 우리 육씨 가문도 절대로 오늘의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거야.”육민재는 한숨을 쉬며 비와 눈물로 젖은 얼굴을 손으로 훔쳤다.나영옥은 평생 강하게 살아왔고 그는 그런 할머니의 손에 키워졌기에 도저히 할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만약 그때 내가 용기 있게 싸웠더라면, 아마도...’그는 핸들을 꽉 쥔 채 방향을 돌려 차를 떠나갔다.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던 배건후는 도아린의 차 옆에 다가갔다. 문을 열기도 전에 도아린이 먼저 차 문을 열고 나왔다.살기를 띤 배건후의 얼굴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그의 이마에서 머리카락이 늘어져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도아린은 초라한 그의 몰골을 무시하고 차 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녀는 그의 뜨거운 시선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대문에 다다랐을 때,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그를 돌아봤다.“집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감기 조심해요.”남자의 눈이 순식간에 생기가 돌았고 고통스러워 보였던 얼굴도 미세하게 변했다.“그럴게.”대문이 열리고 일북이 몸을 옆으로 비켜주었다. 문을 닫을 때, 그는 배건후를 한 번 더 노려봤다.“아가씨, 저건 다 쇼하는 거라고요. 그러니 마음 약해지면 안 돼요.”도아린은 따뜻한 물로 샤워한 뒤 머리를 말리고 잠자리에 들었다.침대에 누운 후, 그녀는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일정을 확인했다. 휴대폰 화면에는 배건후가 보낸 다양한 친구 요청 알림이 떠 있었다.[집에 도착했어.][따뜻한 물로 샤워도 하고.][감기약도 먹었어.][당신도 일찍 자. 육씨 가문 일은 내가 처리할게. 더 이상 당신을 찾아가지 않을 거야.][아직 안 자?][자기 전 따뜻한 차

  • 또 한 번의 거절   제885화

    육하경의 시신은 인양되자마자 화장되었고 유골은 바다에 뿌려졌었다.게다가 그의 양부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가 육민재의 이복형제였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은 육민재와 나영옥뿐이었다.그래서 육민재는 바다에서 건진 시신은 절대 육하경일 리 없다고 더욱 확신했다.“아가씨.”일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만약 육하경이 미리 아가씨의 그림 스타일을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을 준비해 둔 거라면요?”도아린은 잠시 침묵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내 스타일을 따라 할 수 있는 화가라면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아.”하지만 곧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가 문신을 새길 때, 원래 이빨 자국 모양을 새기려던 걸 즉흥적으로 입술 모양으로 바꿨어.”도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설령 하경 씨가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해도... 그건 진짜 내가 직접 새긴 문신이에요.”그 사진이 조작이 아니라면 사진에 있는 문신은 분명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한 것이었다.“자상훈을 조사해 봐.”도아린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그 사람은 하경 씨의 오른팔이었으니 하경 씨가 정말 살아 있다면... 분명 자상훈이 뭔가 알고 있을 거야.”“알겠습니다.”일북은 곧바로 사람을 보냈다.그 시각, 도심 속 한 고급 호텔의 VIP룸.고유리는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곧 직원이 도착할 거예요. 잠깐 실례하겠습니다.”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다 마침 계단을 오르던 배건후와 마주쳤다.깔끔한 정장 차림에 단정한 머리와 여유로운 분위기는 누가 봐도 막 수습을 시작한 신입 사원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건후 씨!”고유리가 인사하려는 찰나, 그녀의 뒤에서 누군가 빠르게 걸어왔다.“건후 씨! 걱정 마세요. 우리 아버지랑 저는 건후 씨 편이에요! 도아린 그 여자한테 기죽지 않게 도와드릴게요!”고유리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이제야 알겠네. 왜 그 자리에 꼭 배건후여야 한다고 했는지.’배건후는 가까이 다가온 여자의 손길을 매몰차게 피하며 냉정한 눈빛을 보냈다.“진서윤 씨

  • 또 한 번의 거절   제886화

    배건후의 눈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그날 대형 선박에서 그뿐만 아니라 다른 세 가족도 장기 이식이 필요했었다.‘그 사람들도 육하경이 특별히 도아린한테만 더 신경 쓴다는 걸 봤을 거야. 이식 수술이 중단된 마당에 경찰한테 화풀이할 수는 없으니까 도아린을 타깃으로 삼은 거지. 루머를 퍼뜨리면서 말이야.’그에게서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진서윤의 심장이 조여왔다.그녀는 배건후가 도아린 때문에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말했다.“도아린 씨가 무슨 자격으로 이혼을 요구하는 거죠? 전 도아린 씨가 처음부터 육하경 씨와 짜고 친 거라고 봐요. 그러니까...”“진서윤 씨.”배건후가 냉정하게 말을 끊었다.“말조심하세요.”진서윤은 말문이 막혔다.고유리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배건후가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들어가시죠.”고유리는 사람들을 룸으로 안내했다.이번 프로젝트는 고위직 사람들도 상당히 신경을 쓰고 있었다. 게다가 이전에 문제가 발생했던 만큼 이번엔 감독 기관까지 추가되었던 것이다.배건후가 들어오는 걸 보자 감독 기관과 도시 정비국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배 대표님!”“배 대표님, 오셨군요.”전에는 배건후를 만나는 것조차 어려웠으니 말이다.지금 실권이 없다고는 하지만 기획서도 그가 작성한 것이었고 한경 그룹에서 어떤 권력을 갖고 있는지 확실치 않으니 당장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하지만 오직 진우석만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딸이 배건후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배건후가 다시 일어서려면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도 말이다.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해서든 아니든 배건후는 결국 진서윤과 사귀게 될 것이고 만약 두 사람이 만약 결혼이라도 한다면 진우석은 두 사람이 이혼하는 꼴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배 대표님, 앉으시죠.”진우석은 장인어른인 같은 태도로 맞은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배건후

  • 또 한 번의 거절   제887화

    그들은 일 때문에 온 것이지, 두 사람의 연애사가 궁금해서 온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진우석의 체면을 차려주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진서윤이 한경 그룹의 대표를 모욕한 이상 앞으로의 협력 과정에서 충돌이 생길 게 뻔했다.이 프로젝트는 이미 오랫동안 끌어왔기에 차질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 개인적인 감정 문제로 또다시 문제가 생긴다면 진우석은 고위층 사람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감독 기관 사람들은 프로젝트 진행 속도가 걱정되기 시작했고 진우석은 자신의 국장 자리가 위태로울까 봐 마음을 졸였다.그는 도아린이 수작을 부려 모건 그룹을 손에 넣은 것에 대해서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그런 말은 사적으로만 해야 했다. 배건후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내는 건 미친 짓이었다.“서윤아?”진우석이 딸을 바라보며 사과하라는 눈치를 주었다.진서윤은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더니 배건후를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앞으로 안 그럴게요.”“앞으로요? 오늘 일은 어떻게 할 건데요?”“배건후 씨, 사과도 했잖아요. 도대체 뭘 더 바라는데요?”진서윤이 화를 냈다.배건후는 차갑게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서윤 씨는 저희 그룹 대표님을 모욕하셨어요. 그저 사과하는 걸로 넘어갈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으셨잖아요.”“제가 언제 모욕했는데요? 전 사실만 말했어요!”진서윤의 눈가가 붉어졌다.‘그 여자가 다른 남자들과 얽혀 있다는 소문이 돈 것도 사실인데 건후 씨는 왜 여전히 그 여자를 감싸고 도는 거야?’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펜을 꺼내 들며 말했다.“방금 서윤 씨가 한 말은 전부 녹음됐어요. 모욕인지 아닌지는 판사님께서 판단하겠죠.”그는 진우석을 흘끗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했다.“따님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진 국장님이 계속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요?”배건후의 말은 처음엔 경고였지만 이제는 노골적인 협박이었다.진서윤이 제대로 사과하지 않으면 녹음을 공개하겠다는 뜻이었다.현재 여론은 진우석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데 그는 국장이라는 자리

  • 또 한 번의 거절   제888화

    진서윤은 숨을 헐떡이며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서윤아!”진우석이 재빨리 일어나 딸을 안았다.“서윤이는 심장병이 있어요. 이미 잘못을 인정했는데도 꼭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야 했나요?”고유리가 배건후를 바라봤다.진서윤은 불리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는 것에 익숙한 사람 같았다.진우석이 이를 알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계속 몰아붙이면 그들이 옳더라도 불리해질 가능성이 있었다.하지만 배건후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진서윤을 차갑게 바라봤다.“서윤 씨가 심장병 환자라면 먼저 약부터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진우석이 멈칫했다.감독 기관 사람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맞는 말이었다. 심장병이 있다면 응급약을 항상 소지하고 있어야 했고 증상이 나타나면 즉시 복용해야 했다.하지만 진우석은 그녀를 부축하기만 할 뿐, 약을 먹이지도, 물을 건네지도 않았다.진서윤은 숨이 가쁘다고 했지만 얼굴빛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배건후의 얘기를 듣고 나서야 창백해졌다.“약을 먹지 않아도 나아지는 걸 보니 심각한 병은 아닌가 보군요.”배건후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웠다.“우리 도 대표님은 심각한 우울증을 앓고 계십니다. 진서윤 씨의 모욕적인 언행으로 우울증이 악화된다면 한경 그룹의 손실을 진 국장님께서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진우석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푸르스름해졌다. 그는 진서윤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사과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배건후가 신고라도 해서 그의 비리를 폭로하면 그는 직장을 잃을 것이고 가족 모두가 불행해질 터였다.진서윤은 이번엔 정말 울컥해서 숨을 헐떡이며 울음을 터뜨렸다.“우리 대표님을 모욕해 놓고 정작 본인이 울고 있으면 어떡하자는 겁니까?”고유리가 담담하게 말했다.진서윤이 고개를 들어보니 고유리가 휴대전화를 들고 촬영하고 있었다.‘내가 우는 모습까지 전부 녹화된 거잖아?’진서윤은 어쩔 수 없이 카메라 앞에서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앞으로 헛소문을 믿거나 퍼뜨리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 또 한 번의 거절   제889화

    “알겠습니다.”고유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점심시간이 되자 도아린은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려고 했다.그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들어오세요.”도아린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당연히 윤가인 일 거라 생각한 그녀는 무심코 말했다.“윤 비서님, 점심 뭐 드실 건가요?”“닭볶음탕이랑 계란찜.”도아린은 순간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배건후가 도시락을 들고 그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도시락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어 도아린 앞에 내밀었다.“먹어봐.”도아린은 본능적으로 핸드폰을 꼭 쥐었다.“건후 씨가 만든 거예요?”“응.”배건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너 매운 거 좋아하잖아. 일부러 좀 맵게 했어.”“운영팀 일도 바쁠 텐데 일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나요? 굳이 이런 걸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도시락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요리를 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오전에 고유리와 함께 감독 기관과 도시 정비국 사람들을 만나러 갔으니 이 음식들은 분명 아침에 준비한 것이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요리한 게 분명했다.배건후의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에게 혼이라도 난 것처럼 말이다.그는 도시락을 쥔 손을 거두지 않고 고집스럽게 말했다.“한 입만 먹어봐.”도아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다 검은 무언가를 집었다.“고기가 탔잖아요. 불이 너무 세서 겉은 탔는데 속은 덜 익었어요. 그리고 이런요리는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는 거예요. 이렇게 도시락에 넣어두면 눅눅해지잖아요.”배건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도아린은 한숨을 쉬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왜 아침부터 이런 걸 준비했어요? 소중한 시간까지 낭비해 가면서...”‘건후 씨 시간뿐이 아니라 내 시간도 낭비한 셈이지. 배달을 시켰으면 벌써 도착했을 텐데...’배건후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예전에 에이트 맨션에 살았을 때는 아침 몇 시에 일어나든 항상 따뜻하고 맛있는 아침밥이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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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또 한 번의 거절   제904화

    “소유정?”도아린의 눈이 놀라움과 의문으로 흔들렸다.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끊었던 소유정이 눈앞에 서 있었다.햇볕에 까맣게 탄 피부와 살이 빠져 까마득히 변한 얼굴.도아린은 거의 못 알아볼 뻔했다.소유정은 한때 ‘곡은 뜨지만 사람은 안 뜨는’ 무명 싱어송라이터였다.햇빛에 탄 듯 거칠어진 볼, 그러나 그 눈은 여전히 맑고 마치 고요한 샘물처럼 맑았다.“너 영화 곧 개봉하잖아. 거기에 어울릴 노래 하나 만들었어.”소유정은 도아린 앞에 다가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낙하산으로 들어가겠다는 건 아니야. 그냥 한 번만, 내 무대를 보여줄 기회만 줘.”그녀의 눈빛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이제 더 이상 방황하는 예술가의 허영도 아닌, 세상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꺾이지 않는 고집이 그 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좋아.”도아린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소유정이 더 말하려던 찰나,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키 큰 남자를 보곤 무의식적으로 두 걸음 물러섰다.“제가 들게요.”배건후가 진범준의 손에서 카트를 넘겨받았다.진범준은 도아린을 살짝 살폈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로소 손을 놓았다.“수고 좀 해줘.”“별말씀을요.”배건후는 미리 준비해 둔 7인승 밴에 사람들을 태워 호텔로 향했다.한편, 진수혁은 공항에 나오지 않았다.대신 집이 더 편하겠다며 송 비서와 변슬기를 데리고 집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일을 마친 후, 모두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다시 만났다.도아린은 변슬기가 눈에 띄게 자신을 피하며 거리를 두는 걸 눈치채고 먼저 그녀를 불렀다.“슬기 씨, 우리랑 같이 식사해요.”“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송 비서님이랑 밖에서 간단히 먹을게요!”변슬기는 다급하게 눈짓을 보내며 송 비서를 향해 도와달라는 신호를 보냈고 송 비서도 눈치껏 거들었지만 소용없었다.“송 비서도 같이 앉아요. 오늘은 우리 가족 모임이니까 너무 격식 차릴 필요 없어요.”도아린은 직원에게 수저를 부탁했다.변슬기가 당황한 눈으로 진수혁을 바라보자 그는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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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말고!”주현정은 뜨거운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콧방귀를 뀌듯 말했다.“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아린이가 너한테 다시 기회를 줘야 뭐라도 되는 거지.”반쯤 물을 마시던 그녀는 뭔가 떠오른 듯 눈을 번쩍이며 배건후를 바라봤다.“설마, 아린이가 너 용서한 거야?”“아직 아니에요.”배건후의 대답에 그녀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내가 하는 걸 봐서... 용서할지 말지 정하겠대요.”“난 또… 나가!”주현정은 소파에 있던 쿠션을 집어 던졌고 쿠션은 정확히 그의 어깨에 명중했다.배건후는 묵묵히 쿠션을 주워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아버지 장례는 제가 처리할게요. 남은 소송 문제도 계속 맡아서 진행할 거고요. 엄마는 몸부터 잘 회복하세요. 제 결혼식에 참석하셔야 하니까요.”그때는 그저 혼인신고 하나만 조용히 올렸던 그들이었다.하지만 이번엔 다르다.도아린을 다시 품에 안게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성대한 결혼식을 해주겠노라 그는 다짐하고 있었다.샤워를 마친 배건후는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들었다.알림창에 뜬 ‘새로운 친구 추가 수락’ 메시지에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고 곧장 도아린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 들어갔다.같은 시각.도아린은 이불 속에 몸을 말고, 배 위에 핫팩을 얹은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윤명희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아린아, 우리 곧 귀국해! 그리고 깜짝선물도 준비했어.]몸을 옆으로 돌리다가 뜨거운 찜질팩이 배에 닿자 도아린은 놀라며 핸드폰을 내려두었다.다시 폰을 들어 올렸을 땐 배건후와의 채팅창이 열려 있었고 화면엔 ‘상대방이 입력 중...’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하지만 5분이 지나고, 10분이 지나도 아무런 메시지도 도착하지 않았다.“...뭐지. 편지라도 쓰는 건가? 이 정도면 500자는 넘었겠네...”도아린은 성질이 나 채팅창을 닫고 다시 윤명희의 메시지창으로 돌아갔다.그녀는 조금 전, 배석준의 사망 소식을 전했고 주현정에게 위로의 말을 해달라며 부탁했다.잠시 후, 윤명희의 영상통화가

  • 또 한 번의 거절   제902화

    도아린이 배건후의 허리를 끌어안는 순간, 그의 몸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하지만 그다음 순간, 그의 두 팔이 강하게 그녀를 감쌌다.배건후는 천천히 몸을 숙여 도아린의 어깨와 허리를 깊숙이 감쌌다.조금이라도 더 그녀를 품으려는 듯, 그의 넓은 품으로 그녀를 감쌌지만 결코 억지로 끌어안지 않았다.마치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물처럼 그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도아린이 거부하지 않자 배건후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가슴 깊이 각인된 그 익숙한 향기를 허락받은 사람처럼 탐하듯 들이마셨다.수없이 꿈에서 그리던 사람, 밤새 뒤척이며 떠올리던 그 사람이 이제 그의 품 안에 있었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리며 숨을 고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내 재산은 쳐다보지도 마요. 한 푼도 못 주니까.”배건후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턱을 문지르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내가 번 돈도 다 너한테 줄 건데?”도아린은 피식 웃으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눈물을 닦았다.“일단 하는 것 봐서요. 오늘은 어머님 곁에서 좀 지켜드려요.”배건후는 아쉬운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다가 그녀가 돌아서는 순간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블랙리스트에서 나 좀 빼줘.”도아린은 그의 손을 툭 뿌리치고 빠르게 차에 올라탔다.배건후는 멀어져가는 차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차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천천히 몸을 돌렸다.복도로 돌아오는 길, 주현정의 방 앞을 지나던 배건후는 방 안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세상 사람들은 주현정과 배석준 부부를 부러워했다.부부 금슬도 좋고 자식까지 둘이나 낳아 완벽한 가족처럼 보였지만 배건후가 기억하는 부모의 모습은 달랐다.어머니는 여동생 배지유를 낳고 나서 줄곧 한약을 달고 살았으며 아버지는 처음엔 다정하게 곁을 지켰지만 시간이 갈수록 냉담해졌다.해외 지사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 아버지는 말로는 ‘가족과 떨어지기 싫다’고 했지만 정작 서류 작업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그때부터였다. 그는 가족이 아닌

  • 또 한 번의 거절   제901화

    “네.”배건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배석준의 사망 소식보다도 도아린과 배건후가 함께 왔다는 사실이 주현정에게는 더 큰 위로였다.가정부는 도아린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식탁을 차렸고 세 사람은 조용하고 평화롭게 저녁 식사를 나눴다.식사를 마친 후, 배건후는 문 앞까지 도아린을 배웅했다.짙은 어둠이 내린 밤. 그 속에서 배건후가 입을 열었다.“와줘서... 고마워.”“어머님은 늘 절 따뜻하게 대해주셨잖아요. 당연히 와야죠.”도아린의 발걸음이 멈췄다.잠시 침묵이 흐른 후,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저씨가 자초한 일이라 해도 김지민의 수법은...”“이미 장 변호사한테 사건을 맡겼어.”배건후의 눈동자가 밤보다도 깊고 어두웠다.그 안에는 복잡한 감정과 지울 수 없는 우울이 고여 있었다.“만약 맹세라는 게 통한다면, 난 기꺼이...”“그런 말 하지 마요!”도아린은 생각할 틈도 없이 손으로 그의 입을 막았다.날렵한 입술, 차가운 감촉.하지만 이상하게도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온몸이 찌릿했다.도아린의 눈이 크게 흔들렸고 손을 거두기도 전에 배건후가 먼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남자의 손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감싸 쥐었다.그의 눈빛은 진지했고 단호했다.“난 진심이야.”도아린은 그 시선을 외면했다.심장이 세차게 뛰었고, 본능적으로 손을 빼려 했지만 배건후는 오히려 그녀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차가운 봄밤의 공기 속에서 그의 심장은 거칠게 뛰고 있었다.“내가 널 처음 본 건, 네가 구겨진 지폐로 육하경에게 빵을 사주던 날이었어.그때부터... 난 육하경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지.”“건후 씨...”도아린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그날 밤, 배건후는 육하경과 권투 연습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차 안에 담배가 떨어져 근처 슈퍼에 들렀고 우연히 유리창 너머로 쓰레기통을 뒤지는 육하경의 모습을 목격했다.육민재는 육하경을 ‘사촌 동생’이라 소개했지만 재벌가에서 초대 손님을 그

  • 또 한 번의 거절   제900화

    연남시 프로젝트의 인수인계 절차가 마무리되자 감독 기관 측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했다.그들이 밖으로 나왔을 때 도로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이미 사라져 있었고 도로 한가운데 남아 있던 핏자국도 청소 차량에 의해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배석준을 감시하던 사람이 이 사건의 자초지종을 도아린에게 보고했다.배석준이 죽었고 아내인 김지민이 몇 번이나 실신할 정도로 오열했다고 말이다.그의 말에 의하면 김지민이 의심을 받기는커녕, 경찰이 그녀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고 사고 차량의 운전자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주장했다는 것이었다.CCTV를 확인한 결과, 배석준이 스스로 도로로 걸어 들어갔기에 주된 책임은 배석준에게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김지민이 이 마지막 돈벌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진 듯 통곡하며 난리를 쳤다.자전거를 탄 할아버지도 보상금을 내기가 두려워서 김지민보다 더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병원에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도아린은 배석준와 김지민이 서로 물고 뜯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말이다.퇴근 후, 도아린은 배건후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렀다.그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다가왔다.“내가 직접 우린 거야. 한번 마셔봐.”차를 받아 든 도아린은 그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그녀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눈치챈 배건후는 순간 긴장하기 시작했다.배석준이 연성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감출 수 없었다. 그가 내뱉은 모욕적인 말들도 마찬가지였다.배건후도 도아린에게 이 사실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배석준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게 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아린아, 걱정 마. 한경 그룹은 네 거야. 아무도 빼앗을 수 없어.”“아니, 그게 아니라... 아버님이...”도아린은 어떻게 말하면 배건후에게 상처가 덜 될지 고민했다.배석준이 아무리 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에게는

  • 또 한 번의 거절   제899화

    배석준은 점점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화가 치밀어 올랐다.‘내 선택을 존중한다는 건 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말인가? 도아린을 위해서라면 내 생사도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야?’한참이 지나서야 숨을 고른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그가 전화를 건 사람은 주현정이었다. 그는 주현정이 자신과 같은 생각일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전화가 연결되기도 전에 전에 휠체어가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배석준이 급히 뒤를 돌아보자 김지민이 서 있는 것이었다.“너 왜 여기 있어?”그녀는 배석준과 함께 산 고급 브랜드 옷을 입고 있었다.김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석준 씨가 제 남편이잖아요. 석준 씨가 어디 있으면 저도 옆에 있어야죠.”“이거 놔!”배석준은 뒤로 돌아보려 했지만 김지민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난 이미 소송을 제기했어. 우리 이제 곧 부부가 아니야!”김지민은 휠체어를 밀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재판 날 석준 씨가 참석하지 않으면 법원에서도 판결 안 날 거예요.”“뭐라고?”배석준은 화가 났다.“또 나를 감금하려고 그래?”김지민은 몸을 굽혀 그의 옷을 정리해 주고는 웃으면서 말했다.“부부니까 싸울 때도 있고 그렇죠. 석준 씨도 결혼 중에 한 번 불륜을 저질렀으니까 이제 서로 미안할 것 없네요. 앞으로 잘살아 봐요.”배석준은 깜짝 놀라며 휠체어에서 일어섰다.그동안의 재활 덕분에 그는 조금씩 걸을 수 있었다. 좀 더 편하게 움직이기 위해 휠체어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었다.배석준은 변함없는 김지민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나서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여보! 여보!”김지민은 휠체어를 잠그고 그를 쫓아갔다.“천천히 가요! 넘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요?”배석준은 그녀의 가식적인 모습에 신경 쓰지 않고, 힘껏 앞을 향해 걸어갔다.순간, 어떤 할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다.할아버지는 배석준이 자기를 양보해 줄 거라 생각했고 행동거지가 불편한 배석준은 할아버지가 양보해

  • 또 한 번의 거절   제898화

    소리를 따라 화장실로 찾아간 우정윤은 창백한 얼굴로 구역질을 하고 있는 배건후를 보았다.“대표님, 의사 선생님께서 위에 자극을 주면 안 된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많이 마시면 안 된다니까요?”먹었던 와인을 전부 토해낸 배건후는 현기증 때문에 비틀거렸다. 위가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는 입을 헹구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침대 끝 쪽에 있는 인형을 끌어안았다.진수혁은 그보다 더 취해 있었는데 온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변슬기가 돌아왔을 때, 송 비서가 따뜻한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대표님, 조금만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술 깨는 약 좀 사 올게요.”“제가 사 왔어요!”변슬기는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서 진수혁에게 건넸다.진수혁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변슬기의 품에 쓰러졌다.집으로 돌아온 도아린은 변슬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일북이한테 슬기 씨 데리러 가라고 하려는데 괜찮으면 답장 줘요.]하지만 변슬기는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다.잠시 생각에 잠긴 도아린은 송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연결되었고 송 비서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지만 목소리엔 약간의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도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혹시 슬기 씨 아직 거기에 있나요?”“네. 대표님이 너무 취하시는 바람에 술 깨는 약 사러 갔어요.”비록 도아린은 변슬기에게 잘해주었고 변슬기를 데려오라고 제안한 것도 그녀였지만 도아린이 어디까지 용납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에 송 비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그럼 송 비서님이 슬기 씨를 잘 챙겨주세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 주시고요.”“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송 비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호텔 프런트에 자신의 신분증을 건넸다.“방 하나 주세요.”다음 날.이번 회의에 참석한 건 도시 정비국의 새 책임자였다. 그는 공손한 태도로 진수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증거는 없었지만 누구든 다 알고 있었다. 진우석이 왜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는지 말이다.

  • 또 한 번의 거절   제897화

    하지만 이젠 길가에서 어묵을 먹으면서 옷이 더러워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이때 명문 가문 아가씨가 지나갔다면 자기가 헛것을 봤다며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뜨끈한 꼬치를 먹어서 그런지 공복에 술을 마신 탓에 조금씩 아파져 오던 위가 좀 나아지는 듯했다. 오늘 먹은 어묵이 그동안 먹어본 것 중 가장 맛있는 음식인 것 같았다. 물론 도아린이 사준 거라서 더욱 그랬다.등에서 그녀의 손길이 간간이 느껴졌다. 그 부드러운 손길은 그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었다.“차단 풀어주면 안 돼?”배건후는 마지막 한 꼬치를 먹으며 물었다.도아린은 물티슈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말했다.“건후 씨,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건후 씨라면 더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있잖아요. 전...”“내가 원하는 건 너뿐이야. 너도 알잖아...”배건후는 그녀의 말을 끊고 빠른 걸음으로 그녀 앞에 섰다.그는 자기를 올려다보는 도아린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순 없을까?”도아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외투 호주머니에 넣은 손가락 사이에는 이미 땀이 배어 있었다.배건후는 그녀의 첫사랑이었다. 마음속에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저번 결혼 생활이 그녀로 하여금 기대를 내려놓게 했다.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도아린이 입을 열었다.“건후 씨,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요. 건후 씨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건 저도 알아요. 건후 씨에게 기대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저를 사랑해 주는 가족과 함께 있고 싶어요. 온전히 제 능력으로 제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싶어요.”“난 전처럼 돌아가려는 게 아니야.”배건후는 단호했다.“네가 사업을 하고 싶다면 나도 온 힘을 다해서 도울 거야. 네가 가족과 함께 있고 싶다면 나도 네 가족이 되면 되잖아...”“도아린, 난 네가 예전에 보여줬던 따뜻한 모습을 바라는 게 아니야.

  • 또 한 번의 거절   제896화

    “대표님, 내일도 스케줄이 있으시잖아요. 이만...”변슬기는 시험 삼아 말을 꺼냈지만 진수혁의 눈빛에 제지당했다.그녀는 당황한 눈빛으로 도아린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려줄 수 있길 바랐다. 도아린이 시선을 진수혁에게 돌렸다. 그러자 그는 그녀에게 안심해도 된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와 동시에 배건후도 그녀의 다리를 가볍게 스치면서 자기도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도아린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자 또 하나의 와인병이 금세 비었다. 배건후는 초점이 흐려진 듯했고 진수혁은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도아린이 눈치를 주자 송 비서가 나서서 진수혁을 침실로 데려갔다.그녀는 배건후를 바라보며 물었다.“괜찮은 거 맞아요?”“응.”배건후는 힘껏 고개를 끄덕얐지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도아린은 변슬기와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고 배건후를 데리고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던 중, 변슬기가 갑자기 말했다.“두고 온 게 있는 것 같아요. 먼저 가세요. 전 나중에 택시 타고 가면 돼요.”말을 그렇게 했지만 도아린은 그녀가 진수혁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제가 집에 도착하면 일북이한테 슬기 씨 데리러 가라고 할게요.”변슬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아린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위로 올라갔다.앞으로 걸어가던 도아린은 배건후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마치 먹이를 주면 자꾸 따라오는 강아지처럼 말이다.“대리기사 불러줄까요?”그녀가 멈춰 서자 배건후도 제자리에 섰다. 그에게서 우드 향과 술 냄새가 섞인 향이 났다.밤바람이 차가웠기에 배건후는 손을 들어 도아린의 옷깃을 여몄다.그는 아무 말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배건후의 깊은 눈동자에는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도아린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떨려와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그러자 배건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어묵 먹고 싶은데 같이 먹을래?”도아린은 오늘 밤 배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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