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건후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그의 초점이 도아린의 얼굴에 맞춰졌다가 이내 흐려졌다.복도에서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배건후의 눈빛이 점차 맑아졌다.도아린은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고 가볍게 그의 등을 두드렸다.“다 지나갔어요. 재희 씨가 겪은 일은 그저 예기치 못한 사고였을 뿐이에요.”배건후는 뭐라 말하려 했지만 도아린이 그의 손을 꼭 잡았다.“가요. 태희 씨 아이 보러.”배건후는 맞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도아린이 살짝 힘을 줘서 그를 안으로 이끌었다.민호준은 그들을 보자마자 눈물을 머금고 다가와 말했다.“감사합니다, 배 대표님. 아린 씨도 감사해요. 제 아내와 딸 모두 무사하대요! 전...”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음을 터뜨릴 뿐이었다.“태희 씨는 아주 강한 분이세요.”도아린이 위로를 건넸다.“태희 씨가 먹을 수 있는 거라도 준비해 놓읍시다.”“네.”민호준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이미 산후조리원에 연락해 두었어요. 준비가 다 되면 곧 데리러 올 거예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산후조리원에서 유태희를 데려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도아린과 배건후는 자리를 떠났다.“운전할 수 있겠어요? 제가 일북을 시켜서 데려다주라고 할까요?”눈치가 빠른 일북이 일남을 꼬집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일남은 아마 반대 의견을 냈을 것이었다.배건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일북과 일남의 표정을 살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건후 씨 좀 데려다주고 올게. 물어볼 게 좀 있어서 말이야.”배건후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차 열쇠를 도아린에게 건네며 조수석에 앉았다.할 말이 있다고 했지만 도아린은 차 안에서 내내 침묵을 유지했다.거의 도착했을 때, 배건후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으며왠지 모를 쓰라린 감정을 담고 있었다.“내가 재희 씨를 찾았을 때 말이야. 재희 씨는 창고에 있었어.”그는 두 손을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태아는 이미 숨이 끊어진 채로 끌려 나왔다.간단하게 처리하고 나서 고성만이 강재희를 업고 밖으로 나갔다.마을 사람들은 개를 풀어서 그들을 추격했고 고성만은 배건후에게 강재희를 데리고 먼저 가라고 했다. 그는 온몸이 강재희의 피로 흠뻑 젖어 있었기에 이를 이용해 마을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유인하며 시간을 벌어주려 했다.도아린은 에이트 맨션 앞에 차를 앞에 세웠다. 배건후가 얘기를 끝낸 후에도 그녀의 가슴속에 엉켜있는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그 마을 사람들은 단지 가문의 대를 잇겠다는 이유로 여자를 사들였고 그녀의 생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무지하고 잔인하며 폭력적인 사람들이었다.배건후는 손을 꽉 쥐었다. 그는 시선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나는 네가 그런 일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도아린은 배건후의 생각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그 작전에 대해 말할 수 없었고 강재희의 사생활도 지켜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심리적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래서 배건후가 얻은 결론은 바로 도아린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녀가 임신을 하지 않으면 강재희처럼 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도아린은 그를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뒤통수를 맞자 배건후는 순간 멍해졌다. 그는 당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바보 아니에요? 임신이 걱정되면 피임을 하면 되잖아요! 약을 먹을 수도 있고 수술을 해도 되고... 그런데 왜!”‘그런 얘기를 할 수 없었다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었잖아!’하지만 배건후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강아지가 주인에게 혼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도아린은 비웃듯이 말했다.“건후 씨, 그럼 예전에 제가 먼저 유혹했을 때 말이에요. 절 모질게 대하면서 거절했잖아요. 게다가 막말까지 했고요. 사실 속으론 엄청 기뻤죠?”배건후의 귀가 붉어졌다. 그는 도아린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내
“아가씨!”일남은 눈치를 주던 일북을 무시하고는 불만스럽게 말했다.“배 대표님 말이에요. 예전에 아가씨를 모욕하고 괴롭혔잖아요. 왜 아직도 저 사람을 신경 쓰는 거예요?”“교통사고 때도 안 죽었으면서 괜히 죽은 척해서 아가씨가 죄책감을 느꼈었잖아요. 아까도 그냥 내버려뒀어야죠. 저렇게 혼이 나간 모습이면 분명 운전하다 사고가 날 거예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죠.”“일남아, 입 다물어!”“아가씨를 모시고 다닌다고 해도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해줘야 해!”도아린이 두 사람을 나무라며 말했다.“일남이 말도 맞고 일북이 한 일도 틀리지 않았어. 잘못한 건 나야. 그러니까 그만 싸워.”일남은 살짝 찔린 듯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아가씨, 제가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헛소리한 거예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는 슬쩍 일북의 얼굴색을 살폈다.일북은 두 손으로 핸들을 움켜쥐고 앞을 응시하며 운전을 했다.“건후 씨가 잘못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건후 씨에게도 사정이 있었어.”일남은 그녀가 배건후를 변호하려는 줄 알고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일북이 싸늘한 눈빛을 보내자 그는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일남이한테 무섭게 굴지 마.”도아린이 일북의 좌석을 툭 치며 말을 이었다.“건후 씨에게 사정이 있다고 해서 용서한다고 한 적은 없어.”“그럼...”일남이 일북을 한번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배 대표님을 받아들이실 건가요?”“뭐라고?”“배 대표님은 아가씨를 붙잡으려고 하잖아요. 앞이 보이는 사람이라면 다 눈치챌 수 있을걸요? 배 대표님은 후회하고 있고 아가씨와 다시 결혼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어떤 사정이 있다고 한들, 아가씨한테 못된 짓을 했다면 배 대표님은 좋은 남편이 아니에요. 배 대표님보다는 차라리 강 대표님을 선택하는 게 낫죠!”“일남아, 선 넘었어.”일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변 공기가 가라앉았다.“아가씨의 일에 네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일남은 일북이 무서웠기에 불만을 억누르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
“강 대표님이 정말 아가씨를 좋아한다면 남자로서 정정당당하게 쟁취했어야 해. 뒤에서 음모를 꾸미는 게 아니라! 배 대표님을 함정에 빠뜨린 이상 나중에는 아가씨까지 노릴 수도 있어! 안민아 씨랑 도유준의 일 말이야. 진짜 강 대표님이 개입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일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도 강재민이 도아린을 얻기 위해 수많은 더러운 일을 저질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전까지 그의 입장은 변함없었다. 일남은 배건후가 누구에게 잘해 주든 상관없었다. 도아린에게 잘해주지 않으면 그건 그의 잘못이었다. 반대로 강재민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고 짓밟더라도 도아린에게만 피해를 주지 않으면 용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북의 분석을 들으니 그는 자신의 생각이 너무 순진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강재민은 도아린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아가씨한테 상처를 주지 않았다고 해도 계속 그럴까? 만약 아가씨를 손에 넣고 나니 기대했던 것처럼 만족스럽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움직였다면?’ 그때면 도아린이 상처를 받을 것이었다. 일북이 문을 열면서 말했다. “돌아가서 반성해.” 일남은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방을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왔다. “다른 방은 강 대표님 방이잖아. 난 거실에서 안 자. 네 방에서 잘래.” 말을 미친 그는 욕실로 들다 갔다. “나 잠버릇 없어. 얌전히 있을게.” 일북은 미간을 찌푸렸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그는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도아린의 방으로 가서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님, 주무시는 중이세요?” 도아린이 문을 열었다. 그녀 손에는 갈색 서류 봉투가 들려 있었다. “들어와.” 일북은 잠시 머뭇거리다 방에 들어갔다. 탁자 위에는 여러 장의 사진과 서류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대충 훑다 본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남은 마음이 급하고 직설적이지만 악의는 없습니다. 그러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실
“사실은 말입니다. 손보미 씨가 이미 세 번이나 신청했거든요. 도아린 씨가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면 앞으로 다시는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하면서 말이죠.”경찰이 말했다.도아린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온갖 수를 써서 날 찾은 건 분명 그에 따르는 목적이 있을 거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손보미를 만나러 갈 필요는 없었기에 그녀는 회사로 향했다.회사에 도착하자 윤가인이 이름 후보를 몇 개 가져왔다. 도아린은 ‘레브’라는 이름을 선택했다.도아린은 윤가인에게 최대한 빨리 변경 절차를 밟으라고 했다.“그리고 이 프로젝트 말인데요. 배... 배건후 씨가 맡아서 진행했다고 하더군요.”윤가인이 또 다른 서류를 건네면서 말했다.서류를 펼쳐 본 도아린은 비웃음을 흘렸다.신지훈이 정말이지 온 힘을 다해 배건후를 띄워주고 있었다.도아린이 전에 신지훈더러 조사하라고 했던 강재민이 중단시킨 프로젝트의 건축 자재에 대한 서류였다. 아마도 신지훈이 조사하고 나서 공을 세울 기회를 배건후에게 준 것이었다.“배건후 씨가 맡게 놔두세요.”도아린은 거절하지 않았다.하지만 그렇게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그에게 다른 어려움이 없다면 그녀라도 장애물을 놓아야 했다.도아린은 퇴근 직전까지 바쁘게 일했다. 그리고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이 생겨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전했다.하루 종일 기다린 손보미는 욕설을 퍼붓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다음 날도 그녀는 계속해서 기다렸지만 도아린은 오지 않았다.사흘이 지나자 손보미는 도아린이 자신을 가지고 노는 거라고 확신했다. 애초부터 만날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라고 말이다.그때, 경찰이 와서 그녀에게 면회 소식을 알렸다.면회실에 들어선 손보미는 도아린을 보자마자 살기를 뿜어냈다.예전의 화사하고 아름다웠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원래 단정하던 긴 머리는 싹둑 잘라버려서 그런지 오늘따라 건조하고 푸석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시술을 받을 수 없어서인지 얼굴은 점점 변형되었고 콧대는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손보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성형 수술을 한 남궁유민 변호사님이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과연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까? 설령 얼굴을 또 바꿨다 해도 DNA까지 바꿀 순 없잖아. 경찰이 수색하고 있으니 곧 잡힐 거야!”“아니야, 아니라고!”손보미는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경찰이 감정을 가라앉히라고 호통쳤지만 손보미는 온몸을 떨며 안절부절못했다.“설마 남궁유민 변호사가 내 약점을 잡고 경찰들을 협박하면 경찰이 널 풀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네 딸 율이 말이야... 살 희망이 있었는데도 남궁유민 변호사가 장기 기증 동의서에 서명해서 죽었어!”“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손보미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그녀는 도아린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경찰이 재빠르게 그녀를 제압했다.“손보미 씨, 진정하세요!”“율이는 무사할 거야! 절대 무사할 거야... 잘 보살필 거라고 나한테 약속했었다니까? 우리 세 명이서 함께할 거라고 약속했단 말이야! 도아린, 거짓말이지? 맞지?”손보미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경찰에게 눌려 테이블에 얼굴을 박았다. 볼을 타고 눈물이 쏟아졌다.그녀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다.율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는 율이를 곁에 두기로 했다.처음엔 율이를 인질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함께 지내면서 율이의 착하고 속 깊은 모습에 점점 정이 들었다.남궁유민이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두를 때, 율이는 따뜻한 물을 받아 그녀더러 목욕을 하라고 했었다. 그럴 때마다 율이는 조심스럽게 연고를 발라 주면서 물었다.“언니를 안 좋아해서 때리는 거예요?”남궁유민이 율이를 떠나보내자고 했을 때, 손보미는 막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병약한 딸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부녀 사이라는 건 변함없었다.생활이 조금 힘들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율이는 보육원에서도 그렇
제복을 입었을 때는 늠름했는데 지금은 치마를 입고 가발까지 써서 그런지 고민성은 유독 우아하게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도아린으로 분장한 고민성은 손을 들어 배건후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고 두 사람 사이의 눈빛은 아주 끈적했다.“나 엄청 기다렸다니까. 이제 빨리 가자.”배건후는 그의 손을 단숨에 쳐내고 도아린의 손에서 차 키를 가져갔다.도아린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일부러 골반을 흔들면서 걷는 고민성을 보고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경찰이 다가오더니 도아린에게 휴게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휴게실에 막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고 경찰은 차를 따라주겠다며 자리를 비웠다.도아린은 창가 쪽으로 갔다. 그녀는 바깥 상황을 볼 수 있으면서도 공격당하지 않을 만한 위치를 찾아서 전화를 받았다.“말하세요.”“육씨 가문에서 육하경 씨에게 누명을 씌우려 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육하경 씨가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다는 걸 몰랐죠. 육하경 씨는 죽었지만 그 자료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어요.”강재민의 목소리는 경멸스러움과 조소로 가득했다.“그리고 또 하나 신기한 소식이 있어요. 육청아 씨는 애초에 육씨 가문의 먼 친척이 아니라는 거예요. 육청아 씨는 나영옥 어르신이 며느리로 삼으려고 데려온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계속 육청아 씨를 통제할 생각이었는데 육청아 씨가 되려 육하경이 육씨 가문을 반격하는 수단으로 되어버린 거죠.”도아린이 미간을 좁혔다.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유치장 앞 도로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경찰이 남궁유민을 어떻게 체포했는지 알 수 없었다.창문을 열려고 하던 찰나, ‘쿵’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곧이어 유리창에 불길이 일렁이며 비쳤다.“어디예요?”강재민이 다급하게 물었다.도아린은 그의 질문에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전화를 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차를 가져다주려던 경찰도 소리를 들었는지 손에 든 종이컵을 꽉 쥐어 구겼고, 뜨거운 물이 손등에 쏟아졌다. 그는 곧장 밖으
“빨리 도망가요!”고민성이 큰 소리로 외치자 도아린은 뒤돌아서서 하얀 카옌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갑자기 차 문에 검은색 코트가 끼어 있는 게 눈에 들어오자 도아린은 멈칫했다.“건후 씨!”도아린은 급히 뛰어 돌아가 차 문을 힘껏 당겼다. 그러나 차 문은 이미 충격에 의해 휘어져 있었고, 밴에서 새어 나오는 검은 연기가 차 안을 가득 채워 내부 상황을 알 수 없었다.펑!차창이 다시 폭발하며 유리가 공중으로 튕겨 나갔고 불길은 삽시간에 마치 차를 삼키려는 듯 거세졌다. 도아린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쪼그려 앉았다. 유리 조각이 튀었지만 다행히 상처는 입지 않았다.그녀가 다시 일어나 차 문을 잡으려 할 때, 갑자기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뛰어!”도아린은 상대방의 손에 이끌려 몇 미터를 달리다가, 뒤에서 또 한 번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뜨거운 열기에 두 사람은 뒤로 튕겨 나갔다.도아린은 본능적으로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예상한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도아린을 꼭 껴안으며 그녀를 모든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폭발음과 함께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남자의 손이 그녀의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손끝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배건후의 얼굴을 보았다. 그가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지만 도아린은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뭐라고요?”도아린이 크게 외쳤다.배건후도 마치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도아린을 안전한 곳으로 끌고 간 뒤, 그녀의 팔과 다리를 움켜잡았다. 도아린은 그가 방금 자신이 다쳤는지 물어본 것임을 깨달았다.“난 괜찮아요!”도아린이 입을 크게 벌려 대답하며 배건후를 가리켰다.“당신은 괜찮아요?”배건후의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먼 곳에서 비친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상처가 없었지만 연한 색의 터틀넥 스웨터에는 약간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 피는 심장 근처에 있었다.도아린이 놀라 급히 그의 가슴을 만지며 갈비뼈
누군가는 사진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말했다.“도아린 곁에 있는 꽃미남이 사실 강재민이래.”과거, 두 사람이 함께 음악 페스티벌에 참석했던 적도 있다는 이야기였다.그 말에 또 다른 누군가는 고개를 끄덕였고 소문은 꼬리를 물고 번져갔다.그러던 어느 날.도아린의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한 신인 배우가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이 인터넷에 올라왔다.사진 속엔, 두 사람의 머리가 맞닿은 채 귓속말을 나누고 있었다.그 한 장의 사진은 결국 배건후의 정체를 증명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고 그는 다시 한번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이번에도 역시 온갖 의심과 루머 그리고 비난이 따라붙었다.하지만 며칠 후, 연성 경찰청에서 공식 공지문이 게시되었다.바로 얼마 전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기 밀매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 공지였다.공지문에는 고성만, 손보미, 자상훈 등이 인신매매로 부당한 이익을 챙기다 결국 장기 밀매까지 손을 뻗친 사실이 요약되어 있었고 그 수사에 협조한 익명의 자원자들에게 감사의 뜻도 함께 담겨 있었다.그 단 하나의 공지로, 여론은 완전히 반전됐다.정월 대보름, 해남엔 보기 드문 큰 눈이 내리고 있었다.도로는 차들로 가득 막혀 10분이 지나도 백 미터를 채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천천히 가. 우린 여기서 내려서 좀 걸을게.”도아린은 조수석 창문을 내리며 일북에게 말했다.그리고 배건후와 함께 차에서 내려 레스토랑까지 걷기로 했다.배건후는 우산을 펼쳐 도아린의 머리 위에 씌웠다.도아린은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은 외투 주머니 속에 꼭 쥐어져 있었다.“춥지 않아?”그가 우산을 더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안 추워요.”도아린은 입김을 내뿜으며 활짝 웃었다.발밑에서는 바삭거리는 눈이 소리를 냈고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래전 기억이 스쳐 갔다.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던 시절.어느 회사 대표라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눈밭에서 몇 시간을 버텼던 그날, 발이 얼어 서 있지도 못하고 결국 쪼그려 앉았던 그 순간
그 여자는 바로 그날 수상 레스토랑에서 진경수에게 벨트를 빌렸던 그 여자였다.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짧은 티셔츠와 청 반바지 대신 격식을 갖춘 정장 느낌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얘, 내 여동생. 그리고 이 사람은... 우리 제부.”진경수는 ‘제부’라는 단어에서 말끝을 흐렸다.여동생이 혼인신고까지 해놓고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그건 진수혁도 마찬가지였다.“큰형님, 작은 형님.”배건후가 정중히 일어나 인사를 건넸고 도아린은 해맑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오빠들, 호칭 바꿨으니까 용돈 좀 주셔야죠?”“혼인신고도 우리 몰래 해놓고, 무슨 용돈이야?”진경수는 여전히 불만 가득한 얼굴로 배건후를 노려보다가 결국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도아린에게 내밀었다.“다시 내 동생 울리기만 해봐. 그땐 진짜 널 갈기갈기 찢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야. 명심해.”“고마워요, 둘째 오빠!”도아린은 싱긋 웃으며 봉투를 받아들었고 이번엔 진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진수혁 역시 말없이 봉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도아린은 봉투를 슬쩍 비춰보며 속으로 웃었다.‘안 봐도 이건 수표네.’그녀는 배건후를 보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더니 말했다.“이건 제가 따로 보관할게요.”“감사합니다, 우리 아내님.”“...”진씨 형제들은 동시에 말문이 막혔다.‘쯧쯧, 벌써 아내한테 잡혀 사네...’하지만 상대가 도아린이라면, 뭐… 그럴 만했다.“근데, 여기 두 분은?”도아린은 일부러 모르는 척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진수혁은 변슬기를 소파에 앉히며 담담히 말했다.“예전 동료야.”변슬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 순간, 진경수가 옆에 있던 여자를 품 안으로 확 끌어당기며 밝은 미소를 지었다.“부모님 말씀대로 아린이 일도 정리됐겠다... 이젠 내 차례지. 그래서 나도 결혼했어.”도아린과 배건후는 동시에 진수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둘째 오빠를 좀 본받으세요. 뭐 하세요, 진짜.’“작은 올
“...”집사는 조용히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배건후는 당연하다는 듯 도아린의 방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고 도아린은 그런 그를 집사에게 소개했다.“이 사람은 제 남편이에요. 서재랑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 둘째 오빠 방만 빼고 어디든 자유롭게 다니게 해주세요.”두 사람은 짐을 정리하자마자 곧장 외출에 나섰다.“앞에 있는 만둣가게, 진짜 맛있어요!”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도아린의 시선은 창가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던 진수혁에게 향했다.그 맞은편에는 변슬기가 앉아 있었고 다소 곤란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설득 중이었다.“여긴 패스트푸드점이에요, 카페가 아니라고요. 여기서 일하시는 건 좀...”“카페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난 괜찮은데?”“그렇긴 해도 이렇게 계속 앉아 계시면 저희 가게 영업에 방해된다니까요!”그때 도아린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변슬기는 반가움에 벌떡 일어났다.“도 선생님! 대표님 좀 말려주세요!”그 말에 진수혁은 고개를 돌리며 태연하게 말했다.“밥은 먹었어? 여기 만두 꽤 괜찮더라.”도아린은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사람을 회사에서 내쫓아 놓고선 정작 본인은 여기에 눌러앉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짜.’막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내가 말할게.”도아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변슬기와 함께 옆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그사이 배건후는 주머니에서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내 진수혁 앞에 내려놓았다.“제가 이겼어요.”“...”진수혁은 조용히 종이를 펼쳐보고는 이를 악물었다.“너 이거 반칙 아냐?”“우린 내기했잖아요. 졌으면 인정해야죠.”“유럽 연수 그 자리, 잊지 말고 제 이름으로 신청해 주세요.”진수혁은 고개를 돌려 도아린을 바라보았고 마침 도아린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둘의 눈이 마주쳤고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이 분위기 뭐야... 완전 닭살 돋게 하네.’그 순간, 배건후는 시선을 거두고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형님도 제가 예전에
‘정말로 배고픈 거야? 아니면 날 원하는 거지?’도아린은 배건후를 흘끗 쳐다보며 가위를 테이블 위에 놓고는 끌려가 밥을 먹었다.배건후의 요리 실력은 한층 더 늘어 있었고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새도 훨씬 좋아졌다.“이제 영양식은 안 드세요?” 도아린은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 “전에 어떤 사람이 고기도 안 먹고 기름진 것도 안 먹고 오래된 것도 안 먹고 부드러운 것도 안 드셨잖아요!”배건후는 매운 닭 요리를 그녀 앞으로 밀어놓으며 진심으로 사과했다.“그때는 네 관심을 끌려고 그런 거야. 그리고 몸매가 망가져서 네가 싫어할까 봐 걱정도 됐고.”“그럼 이제는 몸매 망가지는 거 걱정 안 해요?”도아린은 고기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배건후는 가볍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원래 한 사람이 요리하면 다른 한 사람이 설거지하기로 했다. 하지만 배건후는 도아린에게 설거지할 기회를 주지 않고 바로 그녀를 안아 위층으로 올라갔다.도아린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큰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배건후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삼켜버릴 듯한 눈빛을 보였지만 쉽게 다음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도아린은 그가 마음속 어둠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그녀는 그의 목을 감싸안고 몸을 들어 올려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달랬다.“천천히 해도 돼요.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하세요.”도아린의 위로는 곧 배건후에게 그대로 되돌아왔다.그의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그녀의 흰 목 위로 떨어졌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 “도아린, 힘 빼... 너무 긴장했어...”도아린은 그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손가락은 그의 입에 물려 있었다. 그 후, 그녀는 머릿속이 멍해졌고 마치 거친 파도 위에서 흔들리는 작은 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재미를 본 배건후는 그녀를 끈질기게 괴롭혔다. 도아린이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마치 어젯밤 온몸이 부서졌다가 다시 조립된 것처럼 사지가 말을 듣지 않았고 특히 허리
“배 대표님! 모든 자산을 도 대표님께 넘기신 것은 이전에 하신 일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셔서인가요? 손보미 씨가 형을 선고받았다고 들었는데 손보미 씨를 꺼내줄 계획이 있으신가요?”배건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기자들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오늘 인터뷰의 주제는 챔피언십 선수들의 숙식 안전입니다. 개인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겠습니다.”기자들이 더 질문하려 하자 도아린이 배건후의 손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숙식 문제에 대한 더 나은 제안이 있다면 제안서를 작성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수한 의견을 채택하고 그에 따라 보상을 제공할 예정입니다.”도아린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고 품위 있게 말했고 입가의 미소를 살짝 거두며 한층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제 개인적인 문제로 여러분의 시간을 뺏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배건후 씨에 대해서는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배건후는 눈빛이 살짝 흔들리며 걱정스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도아린이 배건후에 대해 말하려 하자 기자들은 앞다투어 마이크를 내밀었다.도아린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배건후 씨는 여태까지 운영부의 팀장이었지만 오늘부터는 한경 그룹의 특별 자문입니다. 이후의 직책은 배건후씨의 능력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도아린의 시선은 배건후가 도아린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거냐고 묻던 기자를 향했다.“과학 연구자, 의학 전문가, 스포츠 선수,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여성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여성을 존경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모욕해서는 안 됩니다.”그러자 그 기자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갔다.다른 기자들도 더 이상 질문을 할 기세를 잃었고 도아린은 고개를 돌려 고유리를 보며 말했다.“기자분들 고생 많으셨으니 저녁 식사 후 차량을 준비해 안전하게 귀가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고유리는 기자들을 데리고 나가며 각자에게 돈 봉투를 나눠 주었다.그들은 어떤 내용을 발표할 수 있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건후는 구운 닭 날개는 도아린에게 건네주고 주현정에게는 구운 식빵을 건네주었다.주현정은 빵을 받아 들고는 돌아서며 말했다. “천천히 이야기 나누렴. 나는 물 좀 마시러 들어갈게.”도아린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배건후가 그녀의 손을 붙잡아서 멈췄다.두 사람은 강가의 평평한 돌 위에 앉았다.“엄마는 진짜 다 내려놓으신 걸까요?”“적어도 시작은 하신 거지. 앞으로 진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와 함께 여행 다니면 점차 나아질 거야.”배건후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방금 구 경관이 보내온 사진을 열었다.“남궁유민, 즉 고성만이야. 경찰이 고성만의 집을 수색할 때 이걸 발견했어.”도아린은 마지막 닭 날개를 입에 넣고 꼬챙이를 배건후에게 건네며 핸드폰을 받아서들었다.화면 속 사진에는 루비 목걸이가 찍혀 있었다.배건후가 큰돈을 들여 샀던 화려한 디자인의 목걸이지만 전에 잃어버렸던 목걸이였다.도아린은 배건후를 바라보며 말하려 했지만 입안은 닭 날개로 가득 차있어 눈만 깜빡였다.“내가 전에 너한테 줬던 그 목걸이야. 배지유가 몰래 차다가 잃어버렸던 거.”도아린의 입은 마치 발골 기계 같았다. 닭 날개가 입에 들어갔다 나올 때면 뼈만 남았다.도아린은 손바닥에 뼈를 뱉고는 차분하게 말했다.“배지유가 어떤 남자와 잤고 그 사람이 계속해서 그녀를 영상으로 협박했어요. 그 장본인이 바로 고성만이라구요!”“...”이번에는 배건후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성만이 배지유를 협박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목걸이를 철저히 숨겨놓고 분해해서 이미 팔아버렸을 거로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걸 집에 보관해 놓았을 줄은 몰랐어.”그것은 고성만이 자신을 위해 남겨둔 마지막 보험이었다.궁지에 몰리게 되면 목걸이를 분해해 팔고 다른 도시로 가서 새 삶을 살 계획이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다음 날, 도아린은 연성으로 돌아갔다. 배건후가 신청한 챔피언십 대회 접대 임무가 승인되었기 때문이다.진수혁 역시 변
그는 입가에 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괜찮아. 자고충이 하나가 될 때 이런 현상이 생기는 거야. 앞으로 잘못된 일을 하지 않으면 아프지도 않을 거야.”만약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한다면 그 고통으로 인해 결국 죽게 될 것이다.도아린은 배건후의 머리를 끌어안고 고개를 들고 흘러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고 애썼다.배건후는 그녀의 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어서 너에게 혼수로 바칠게. 네가 나를 원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래도 나는 너를 평생 지켜줄 거야.”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흘린 한 방울의 눈물은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져 남자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그렇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빛이 어두워질 때까지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안고 있었다. “돌아가자.”배건후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안고 다리를 움직이며 불편했던 자세를 바꿨다.“이 근처에 야생 동물은 없지만 해가 지면 안전하지 않아.”도아린은 처음에는 감정에 휩싸여 배건후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가 몸을 움직이자 그녀는 즉시 이상함을 느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돌아갈 때 건후 씨 몸이 불편하니까 제가 태워드릴게요. 그리고 내리막길이라 힘도 덜 들 거예요.”“알았어. 네 말 들을게.”자전거 핸들이 비뚤어져 있었지만 배건후는 두 다리로 바퀴를 단단히 고정한 후 힘껏 돌려 단숨에 바로 고쳤다.도아린이 자전거 앞좌석에 타고 배건후는 그녀 뒤에 앉았다.그는 얼굴을 그녀의 등에 기댄 채 내리막에서 속도가 너무 빨라지면 긴 다리를 쭉 뻗어 마찰력을 늘리며 조절했다.그들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수혁과 변슬기도 막 돌아오고 있었다.변슬기는 도아린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도아린은 그들이 뭔가 진전이 있을 줄 알고 가서 물어보려 했지만 배건후가 붙잡았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 머리 위에서 붉은 잎 하나를 떼어냈다.“...”변슬기와 진수혁이 설마 자신과 배건후가 야외에서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배건후는 오직 도아린에게만 부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다.도아린은 그의 눈동자 속에 가득한 붉게 물든 단풍잎과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마음속 깊이 즐거워하며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그의 깊고 그윽한 눈이 가늘게 감기며 그 속에는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듯했다.‘그래, 이거지!’그녀는 올해 겨우 25살이었다.어린 시절 양부모 곁에서 사랑받지 못했고 장애를 겪은 후 식물인간이 된 동생을 돌보며 결혼 생활에서는 남편의 감정적 학대 속에서 버텨야 했다.그녀는 너무도 많은 행복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이게 맞는 일이다.그녀는 웃어야 한다. 크게 소리 내어 마음껏 웃어야 한다.고작 25살에 불과한 그녀가 이토록 많고 무거운 책임과 압박을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눈앞 여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점점 사라지고 배건후의 심장도 저릿해 왔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거친 손끝이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를 스쳤고 천천히 그녀의 눈꼬리를 눌렀다.“웃어. 앞으로 나쁜 감정들은 전부 나한테 넘겨. 내 앞에서는 일부러 강한 척 버틸 필요도 없어. 속상하면 때리고 욕해도 돼. 대신에 절대 자신을 괴롭히지 마.”도아린은 코끝이 찡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지더니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뒤돌아 눈물을 닦으려 했다.그 순간 힘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았고 특유의 나무 향기가 그녀를 감쌌고낮고 깊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여태까지 내가 나쁜 놈이었어. 미안해. 앞으로는 모든 일을 너와 상의할게. 네가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거고 네가 속상해할 일도 만들지 않을 거야.”도아린은 팔꿈치로 그를 툭 쳤다.“입만 살아서!”배건후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뒤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도아린은 미간을 찌푸렸다.“아직 육원의 중첩된 지분을 손에 넣지도 못했잖아요. 그리고 저도 아직...”이후의 말은 더 이상할 수 없었다.배건후가 상자를 열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청혼의 반지가 아니었다.작고 빨간 벌레가 들어 있었는데 다리가 없고 온몸이 부드러웠으며
변슬기는 바쁜 듯 뒤돌아보며 기대와 불안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좋아요." 진수혁은 흔쾌히 대답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배건후는 세 사람을 보고 눈빛이 흔들렸다. 빌라에는 자전거가 두 대 있었는데, 도아린과 함께 드라이브를 나가기 위해 일부러 다른 자전거의 페달을 떼어 놓았던 것이다. 도아린은 자전거를 보고 그에게 너 정말 얄밉다'는 눈빛을 보내며 빨리 고치라고 신호를 보냈다. 자전거를 고치고 네 사람은 문밖으로 나갔다. "꽉 잡아."배건후는 도아린이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자 힘껏 페달을 밟았고, 자전거는 비탈길을 미끄러져 작은 길로 향했다.변슬기는 진수혁에게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자전거 뒤쪽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진수혁은 자전거 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듯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저, 제가 밀어드릴까요...거의 정상에 도착하면, 그때 저를 밀어주세요."라고 제안했다. 진 대표님의 속도로는 누가 먼저 정상에 도착할지 내기는커녕,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진수혁은 아무 말 없이 계속 비틀거렸다. 변슬기는 거의 넘어질 뻔했고, 황급히 남자의 허리를 붙잡았다. 자전거는 갑자기 비틀거리지 않았고, 속도도 빨라졌다. 변슬기: "..."배건후는 도아린을 태우고 산길을 누볐고, 도아린은 뒤쪽 페달을 밟으며 일어섰다.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누르고, 짧은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렸다. "산속 공기가 도시보다 훨씬 좋네요. 매연 냄새도 없고, 에어컨 냄새도 안 나고." 배건후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살짝 몸을 일으켰다. "어제 비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신도 비 온 뒤 흙냄새 좋아해요?" 도아린은 배건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귓가에 웃으며 말했다. "나도 좋아해요! 비 온 뒤 흙과 풀이 섞인 냄새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요!" 배건후는 입꼬리를 올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아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깨달았다. 배건후가 말한 것은 바로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욱 환한 미